해외에서 찾는 서울 이야기100년 전 선교사의 서울살이
우리 박물관은 2010년부터 해외에 산재한 서울학 관련 미공개 자료를 발굴·수집·조사하여 학술총서로 발간해오고 있다. 2022년에는 미국 뉴저지주 소재 프린스턴 신학교에 소장된 ‘마펫 한국 컬렉션’ 사진자료를 조사하여 학술총서18 『100년 전 선교사의 서울살이』를 발간하였다.
글 | 조사연구과 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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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 서울의 또 다른 구성원이었던 선교사들의 서울살이 조명
우리 박물관은 2010년부터 해외에 산재한 서울학 관련 미공개 자료를 발굴·수집·조사하여 학술총서로 발간해오고 있다. 2022년에는 미국 뉴저지주 소재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소장된 ‘마펫 한국 컬렉션(Moffett Korea Collection)’ 사진자료를 조사하여 학술총서18 『100년 전 선교사의 서울살이』를 발간하였다. 마펫 한국 컬렉션은 미국 북장로회 한국 초기 선교 시기 서울에 왔던 사무엘 A. 마펫 선교사(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와 그의 가족, 동료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수집, 작성한 자료들로, 그중 근대~일제강점기 서울 사진들을 조사하고 163건을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특히 이번에는 개항 이후 서울에서 가장 오래 거주하였던 외국인 집단의 관점으로 선교사들의 생활상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사진들은 선교사들이 서울을 선교의 중심지로 정하고 정착한 후, 선교활동을 하며 어떻게 서울 속에서 적응하고 살았는 지의 흐름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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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목격자, 선교사들의 눈으로 본 100년 전 서울은
“ ‘영은문이 헐렸다’는 공고가 모든 한국 지식인의 마음을 놀라움으로 가득 채웠다.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신시켰기 때문이다…한국의 중국 의존을 나타내는 기념비로 오랫동안 서 있던 문에서 지금 남은 것이라고는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뿐인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국인의 감정 일부를 실감했다.”
- 사무엘 마펫 선교사(1895년) –
선교사들이 발을 디딘 서울은 세계를 향해 문을 연 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모해가는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1884년부터 입국한 초기의 선교사들은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의 전통적인 모습부터 대한제국의 수립, 도시의 개조사업, 근대화로 막 변해가기 시작하는 서울을 생생하게 포착하였다. “모든 면에서 조선의 중심이었던” 서울을 선교의 중심지로 정하면서 먼저 외국 공관이 들어서 있었던 정동에 정착하였다. 정동은 이내 곧 외국 공사관과 선교사 사택, 학교, 병원, 교회 등 선교기지의 모습을 갖춰 나가기 시작하였다. 정동 러시아공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로 손꼽혔는데, 이곳 높은 전망탑에서 선교사들은 저 멀리 시내를 바라보며 선교의 꿈을 품었다.
선교사들은 대한제국기 고종의 개혁과 변해가는 도시의 모습을 흥미롭게 눈여겨보았다. 아관파천(1896년) 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복귀하여 궁궐을 정비하는 모습, 조선호텔 건립으로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이 헐리면서 어질러진 황궁우의 모습 등은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로 변모해가는 서울의 상황을 생생하게 잘 보여준다. 도시 개조사업 전 임시 가건물인 가가假家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던 종로 거리, 성벽이 철거되기 전 흥인지문, 궁장이 훼철되기 전 경복궁 동십자각 등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식민당국의 탄압과 그 안에서의 자신들의 모습도 기록하였다. 기독교계 반일 세력을 제거하고자 날조했던 ‘1911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사건(105인 사건)’ 관련 ‘1912년 공판’ 사진들은 생생한 그 실체를 말해준다. 1912년 6월 28일부터 9월 28일까지 3개월간 지속된 1심 공판 과정에서 용수를 쓰고 결박된 채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든지,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마펫 선교사 일행이 종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참관하기 위해 모이고, 뉴욕 헤럴드 특파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 등은 한국 근대사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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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선교사들의 고군분투 서울 적응기
공식적인 포교가 어려웠던 초기 선교 시기, 선교사들은 의료·교육 사업을 통해 믿음을 전하며 1887년 마침내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서울은 이처럼 ‘기독교 전도’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모인 선교사들의 생업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19세기 미국에서 부흥한 ‘대학생 해외선교 운동’에 감화되어 입국한 젊은 선교사들은 낯선 타지에서 30-40년을 살아야 했기에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한국에 적응하며 고된 선교사역을 이겨내고자 하였다.
선교사 간의 결혼이나 교파·직업·세대를 초월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선교사들은 가족애와 같은 돈독한 관계를 다져 나가며 안정된 일상생활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선교 틈틈이 테니스, 야구 등의 스포츠를 즐겼으며 소풍 등의 여가생활을 통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그들은 본토의 서양 문화를 들여와 이국적인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면서 타지생활에 적응하고자 했으며, 60세 생일 파티를 한국식 회갑연으로 치르는 등 한국 문화를 깊이 향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의 기후에 적응하고 자녀들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한 달 정도의 여름 휴가는 필수적이었다. 특히 이들은 선교 초기의 정동을 비롯하여 연지동(연못골), 선교기지, 남대문로5가(복숭아골)의 세브란스병원 선교구내, 사직동, 인현동(인성붓재) 등에 거주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도심에서 가까운 한강변 일대에 별장을 짓고 이곳에서 여름 휴가를 지냈다.
낯선 타지에서의 선교사업과 가정생활은 사실상 한국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 나름의 이주민 문화를 만들고 한국 사회에 스며들어 갔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사택과 선교기지를 지켜주는 ‘기수旗手’, 여성 전도에 주요한 매개체가 되어준 ‘전도부인’, 한글 선생, 집안일을 도와준 한국 고용인 등을 “가족”으로 불렀다. 여성 선교사들은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을 펼쳤는데, 의료·간호, 교육사업을 통해 신마리아(1873-1921), 김배세(1886-1944), 김필례(1891-1983) 같은 여성들이 주체적인 존재로 사회에 나아가는 데 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선교를 위해 장기간 서울에 거주하며 가정을 이룬 선교사들의 2세 자녀들은 대를 이어 한국에 뿌리를 내리며 살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문화와 언어를 자연스레 익히며 성장한 이들은 청소년기 본국에서의 유학을 거친 후 대부분 다시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이어가거나 학교·병원·사회구호 활동 등을 하며 한국 현대사와 긴 시간을 함께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의 언어, 문화,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학문적 주제로 탐구하기도 하였다.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1900년 결성)를 이끌며 선교사 겸 학자로서 세대를 이어 한국학을 연구하고 세계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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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찾는 서울 이야기
우리 박물관이 해외 자료조사를 시작한 지 벌써 14년째다. 프랑스, 독일, 체코, 일본 등을 조사한 후, 2020년부터는 미주지역 소재 자료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지만, 때마침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난 3년간 현지 조사를 수행하지 못하고 온라인과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조사 연구하였다. 그럼에도 외국인 이주 생활상이라는 미시적인 주제 접근을 시도하여 해외조사 연구의 시각을 확장하는 등 성과가 적지 않았다. 올해는 직접 현지조사를 통해 미공개 신자료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보다 생생한 서울 이야기를 찾아내고자 한다. 외국인들이 바라보았던 서울 풍경과 함께 서울에서의 삶 속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도시 서울의 역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풍부하게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첫댓글 아련하고 애틋하네요
조상님들
정동여학교 학생들 사진 -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