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해변의 운문집’에는 10월, 가을, 노을, 저녁처럼 끝머리나 저묾에 줄을 대고 있는 이미지들이 지침 없이 되풀이된다. 이 시집의 아름다움은 그 아슬아슬한 저묾의 미학에서 온다.
말초적이면서도 호방한… 병적인 아름다움
저묾의 이미지에 실린 허무의 세계
그 위를 수놓는 모순적일 만큼 다양한 무늬들
변의 운문집’(1966년)은 고은(73)의 두 번째 시집이지만, 시인 자신이 그 후기에서 환기시켰듯 선시집(選詩集)에 가깝다.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1960년)에 이미 실렸던 ‘폐결핵’ ‘요양소에서’ ‘눈물’ 같은 작품이 재수록됐을 뿐만 아니라, 첫 시집 이후 발표된 작품 가운데 상당수를 일단 제쳐두었기 때문이다.
제주 서귀포에서 쓴 것으로 돼 있는 이 후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이 세상의 80세는 이제 50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진술이다. 선문(禪門) 출신의 33세 시인이 배포 크게 발설한 이 미래의 ‘50년’은,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조바심을 고스란히 정당화하며, 미증유의 문학적 정치적 정열로 채워져 왔다.
‘해변의 운문집’을 읽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다. 시인은 1983년에 이전 사반세기 시업(詩業)을 두 권의 두툼한 ‘고은 시전집’으로 정리하면서 적잖은 가필을 했다.
그러니까 1958년 등단부터 1983년까지의 작품들은 대체로 두 개의 판본이 있는 셈이다. ‘해변의 운문집’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폐결핵’을 비롯해 첫 시집에서 ‘해변의 운문집’으로 옮겨진 다섯 편의 작품은 재수록 과정에 이미 적잖은 가필을 겪은 터여서, 전집에 수록된 텍스트까지 합하면 세 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해변의 운문집’에 재수록되며 원래의 43행이 16행으로 줄어들어 가장 큰 수정을 겪은 첫 시집의 ‘교상기도(橋上祈禱)’는 제목까지 ‘한강에서’로 바뀌었는데, 이 작품은 전집에서 다시 19행으로 늘어나며 ‘흑석동에서’라는 새 제목을 얻었다.
또 다른 재수록 작품 ‘삼월원사(三月願寺)’ 역시 전집에서 본문이 수정된 외에 제목이 ‘천은사운(泉隱寺韻)’으로 바뀌었다. 이미 발표돼 문학사의 일부가 된 작품들에 다시 손을 대는 것이 바람직하달 수는 없겠으나, 이 시인의 경우에 가필은 대체로 작품의 됨됨이를 낫게 한 듯하다.
가필의 큰 방향은 이렇다. 우선 본디 발표될 때 남용되었던 쉼표와 마침표 따위의 구두점이 크게 줄었다. 전집에는 구두점이 아예 없는 시들이 수두룩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인의 문체적 ‘특징’으로까지 거론되던 비문들이 많이 바로잡혔다는 사실일 것이다. 형태론 수준에서도 그렇고 통사론 수준에서도 그렇고, 전집의 텍스트들은 원래의 텍스트들보다 한결 한국어 문법을 존중한다.
의미와 이미지 수준의 개신(改新)도 주목할 만하다. 지천명에 되돌아보는 약관의 언어들이 무참했던 듯, 시인은 젊은 시절의 치기를 슬그머니 지워냈다.
예컨대 ‘요양소에서’라는 큰 제목 아래 묶인 첫 작품 ‘작별’의 첫 연은 본디 “서서 우는 누이여./ 너의 비치는 치마 앞에서, 떠난다.”였으나, 전집에서는 “서서 우는 누이여/ 너의 치마 앞에서 내가 떠난다”로 바뀌었다. ‘비치는’이라는 말이 여지없이 드러내는 소싯적의 근천스러움이 마음에 걸렸던 듯하다.
또 시집 들머리에 실린 ‘대망(待望)’에는 “몇 사람의 남양인(南洋人)이 오기 전에”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전집에서는 이 구절의 ‘남양인’이 ‘남제주 사람’으로 바뀌었다. 젊은 시절의 조작된 이국주의랄까 오리엔탈리즘이랄까, 아무튼 언어와 상상력의 분칠(粉漆)이 스스로 역겨웠는지 모른다.
부사어를 새로 끼워 넣어 뜻을 명료하게 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 만조(滿潮)에 노래하다’(전집에서는 제목이 ‘제주만조(濟州滿潮’)로 바뀌었다)의 “이제 밤 배들을 돌아오게 한다.”는 전집에서 “이제 밤 배들을 그윽그윽 돌아오게 한다.”로 바뀌었고, 같은 시의 “어느 작은 갑판 위에 인기척이 남고/ 마지막 배가 죄없이 돌아온다.”는 “어느 갑판 뒤에 걸걸히 인기척이 남고/ 마지막 배가 외따로 죄없이 돌아온다.”로 바뀌었다. 여기서 ‘그윽그윽’ ‘걸걸히’ ‘외따로’ 같은 부사어들이 작품의 됨됨이를 낫게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부사어들 덕분에 의미가 생생하고 풍성해지기는 했지만, 그 대신 시행의 긴장이 다소 풀려버린 듯하다.
놀랍게도 어떤 시행들은, 적어도 표면층위에서는, 가필을 통해 의미가 홱 뒤집히기까지 했다. 예컨대 ‘대망’의 마지막 구절 “아직 이 땅은 죄인양 남아 있습니다.”는 전집에서 “아직 이 땅은 무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로 바뀌었고, 같은 작품의 “오후에는 무심코 해후(邂逅)의 허리로 걸터앉았다가”의 ‘무심코’는 ‘유심히’로 바뀌었다.
텍스트를 불안정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전집을 출간하며 시인이 실천한 수정이 원래 시에 흩뿌려져 있던 일부 무질서한 이미지들을 비교적 반듯한 시적 규율 안에 통합해 가지런히 만들어놓은 것은 인정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시인 자신이 전집 서문에서 “앞으로 나의 시는 여기에 수록된 것으로 정본시를 삼는다.
이 시전집 이전의 것은 백지로 돌릴 결심이 서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시인의 뜻을 좇아, ‘고은 시전집’의 ‘해변의 운문집’을 서둘러 살피기로 하자.
‘해변의 운문집’에 실린 작품 대다수는 시인이 1963년부터 머물던 제주도에서 쓰여진 것이다. “나는 창조보다도 소멸에 기여한다”는 이 시집 자서(自序)의 선언이 “그러나 얼마나 창조보다도 멸망은 찬란한가”(‘당(唐)의 동해안에서’)라는 시행으로 되풀이되기도 하거니와, ‘해변의 운문집’의 공간은 첫 시집 ‘피안감성’에서 이미 자락을 드러낸 허무의 세계다.
그 허무는 이념적 허무라기보다 감각적 허무고, 그 허무한 마음은 “옛 주소에 내 이름이 남아 있는 마음”(‘독신자의 주위’)일 것이다. 그 허무의 감각은 “지난날의 끝을 여기에 쓴다”(‘해변의 습득물’)거나 “저문 들에는 노을이 단명(短命)하게 떠나가야 한다”(‘저문 별도원(別刀原)에서’) 같은 시행에서 보듯, 끝머리나 저묾의 이미지에 실려있다.
실제로 이 시집에는 제주섬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물과 바람의 이미지 외에 10월, 가을, 노을, 저녁처럼 끝머리나 저묾에 줄을 대고 있는 이미지들이 지침 없이 되풀이된다.
빛의 끝머리에 놓인 그 아슬아슬한 저묾의 순간이 ‘해변의 운문집’이 내장한 미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 허무의 바탕 위에 수놓인 무늬들은 서로 모순적일 만큼 다양하다.
거기엔 이국주의와 전통주의가, 세계시민주의와 국민국가주의가, 허세와 쇄말이, 방랑과 칩거가, 자기폐쇄와 우국이, 자기파괴와 자기현시가, 무위와 노동이 동거하고 있다. 그것은 고은의 허무에 슬며시 역사가 버무려져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미적 됨됨이로는 비교적 볼품이 없고 시집의 분위기에도 썩 어울리지 않는 ‘한국대인사(韓國待人詞)’의 “기다림이야말로 역사의 신인(新人)이다./ 한국에서는 기다림이 한국사다” 같은 대목은 역사를 향한 이 시인의 (70년대 중반 이후) 선회/도약을 예비하고 있다.
소멸과 허무를 표나게 선포하고 있는 시들이 더러 임금을 화자로 삼고 있는 것도, 이 시인 특유의 허세와 자애(自愛)를 떠나서, ‘소멸 이후의 역사’에 대한 시인의 무의식적 미련과 관련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초기 고은의 허무주의는 제스처이거나 쉼터였는지도 모른다.
초기 오장환의 항구 시편들을 연상시키는 바다 시편들을 포함해, ‘해변의 운문집’은 깊숙한 감각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대체로 병적인 아름다움이다. 첫 시집에 이미 드리워져 있던 병과 죽음의 이미지는 이 둘째 시집에서도 여전하다. 상상 속 누이와의 근친상간 모티프 역시 마찬가지다.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랜 병”이 “착한 우단 저고리의 누님께 옮겨 가” “누님의 흰 손은 떨어지고 이 세상을 하직”한 사연을 그린 ‘사치(奢侈)’는 이 시인이 종종 시도하는 ‘감염으로서의 몸 섞음’ 이미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병적 아름다움은 “어디다 머나먼 켈트족의 말로라도 말하는 추운 곳에”(‘가을 병상’)라거나 “아무도 모르는 사어(死語)로써 산스크리트로써”(‘산장심방’), 또는 “(첫 딸 이름에) 러시아의 부칭(父稱)을 넣지 않겠다”(‘내 아내의 농업’) 같은 시행의 비릿한 이국주의와 버무려지며 ‘해변의 운문집’을 야들야들한 낭만의 공간으로 만든다.
‘해변의 운문집’은 이렇게 말초적이면서도, 큰 틀에서는 남성적 허세로 호방하다. 이런 야누스의 얼굴은 어쩌면 시인 자신의 기질과 관련돼 있을지도 모르고, 또 그것은 오늘날 고은이라는 이름이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한국 시문학을 대표하게 된 비결인지도 모른다.
회갑 무렵에 쓴 글에서 시인은 자신이 여전히 ‘무지막지한 소년’으로서 미지의 문학을 동경하고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 소년의 마음이 여전하기를 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직 ‘이 세상의 80세’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 산사감각(山寺感覺)
높디높은 잠자리
차라리 울음
내 이마에도 울음
하늘이 진다
어느 바람자락 없이도
아니 바람 생각 없이도
잎새가 진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트이는 소경의 눈으로
빈 마음이
빈 마음을 낳는다
저 노승(老僧)의 등에 진 하늘 속에 들어 있는
노승의 내일
가을 높디높은 풍경소리
차라리 밤!
글: 고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