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만주사변1) 과 1937년 중일전쟁2) 을 일으키면서 대륙침략을 시작했고, 1941년에는 진주만3) 을 기습공격하고 태평양전쟁4) 을 도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게 되었다.1932년 만주국 수립 이후 일제는 이미 만주에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 경영을 허용하고 있었으며, 1932년 상하이에서는 일본 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중일전쟁 이후 1937년말 난징점령5) 때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하였다. 이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일자 일제는 일본군의 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를 느꼈다.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일제는 강간과 성병확산을 막을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고, 이에 따라 일제는 군위안소 제도를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군위안소 제도의 설립은 군의 사기 진작 등 효과적인 군사활동을 꾀하려는 또 다른 중요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보다 구체적으로 일본군이 병사들의 성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위안소제도를 만든 중요한 역사적 배경으로 일본의 오랜 공창제도6) 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공창제도는 일본뿐 아니라 이후 대만, 조선에도 그대로 도입되어 중국여성과 조선여성들 역시 일본 공창제의 저변으로 편입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성립한 일본군위안소 내에서 이루어진 강간 행위는 강제로 위안부 피해자가 된 수 많은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으로 여성을 비인간화하였다.
정부에 신고한 피해자들의 증언과 일본측 관련 문서를 통해 볼 때 여성들을 동원할 때 크게 취업사기, 폭력, 협박, 정신대, 보국대 등을 통해 동원되었다. 또한 유괴, 납치, 인신매매 등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동원방식에 관계없이 피해자들은 자신이 위안소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고, 엄격한 감시를 받으면서 동원되었기 때문에 모두 강제연행이라고 할 수 있다.조선총독부7)와 같은 관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관알선을 하기도 하였지만, 민간업자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위안소에서 일할 여성들을 모집하고 연행 하도록 하였다.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여 취직을 시켜준다거나 좋은 돈벌이가 있다고 속여 여성들을 끌어모았다. 연행 당시 피해자들의 연령은 주로 10대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대부분이 이 말에 따라 나섰다고 증언하고 있을 정도로 이들은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다. 특히 이들 중 경상도나 전라도 등 농촌출신이 많았다. 이것은 농촌지역이 일제강점기 동안 더욱 심하게 수탈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교나 관청을 통해 근로정신대원으로 여성을 동원했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보국대8), 봉사대, 근로대 등 여러가지 이름의 공식적인 동원 조직을 통해 공개적으로 동원된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연행에는 이처럼 일제의 전시 총동원체제하9)의 각종 노동력 동원 제도가 합법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면서는 군과 경찰이 나서서 폭력적으로 식민지 조선여성을 납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 현지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기도 했다. 일본군이 군위안소 정책을 만들었던 시점의 식민지 조선 내의 여성들의 상태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족구조와 가족법, 이중적인 성윤리로 여성의 가정 내 위치는 조선시기 보다 더 열악한 상태였다. 식민지 상태에서 노동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된데다 여성노동자는 일본인 남성의 1/4, 일본인 여성의 1/2의 임금을 받았고, 유년여성노동자는 일본인 남성의 1/7밖에 안 되는 저임금에 시달렸다. 게다가 노동자로 취업하는데 이용하던 일종의 직업소개소들은 매춘업에 여성들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소개소업자들이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들을 모집하여, 이익이 많이 남는 매춘업으로 소개했던 것이다. 또 일제가 공공연히 매춘을 인정하고 공권력이 감독, 관리하는 공창제도10)를 이식한 후 사기수법에 의한 광범위한 인신매매가 조장되었다.특히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식민지 조선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의 전시체제 아래서 식민지 조선 여성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전쟁이 확대되고 군인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도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의 여성을 손쉽게 동원함으로써 위안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옛 일본군 군의관인 아소 테츠오의 증언에 따르면 1938년 12월 상해 위안소에 있던 대부분 피해자들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일제는 더욱 광범위하게 일반여성의 위안부 동원에 힘썼다. 일반 조선의 젊은 여성들이 성병에 감염되어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도 동원의 중요한 이유였다. 일제가 일본군 위안부 정책을 기획하고 수행하는 데 식민지 조선여성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 일본군 위안부 연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위안소는 군이 직접 설립, 경영했으며 민간에게 위임하기도 하였다. 민간 운영의 위안소는 군대의 보호, 감독 및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일본군 위안소 생활은 기본적으로 군에서 제정한 ‘위안소 이용규칙’에 따라 통제되었다. 규칙에는 군인을 상대하는 시간과 상대해야 할 군인의 숫자, 요금, 성병검진, 위생상태 등에 대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장교용과 사병용의 위안소가 달리 정해지기도 했고, 군인의 계급의 따라 낮에는 사병, 저녁에는 하사관, 밤에는 장교가 이용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위안소 건물은 현지 시설을 이용하기도 했고 군이 새롭게 짓거나 건물을 대여하기도 했다. 피해여성들은 대개 위안소에서 생활했고 군의 필요에 의해 다른 부대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했다.또한 민족에 따라 일본인 여성은 장교를, 조선인 여성은 병사를, 대만인 여성은 군속을 상대하도록 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규칙과 상관없이 군인을 상대해야 했으며, 군인의 요구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매질을 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규정상 군위안부를 구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군인이나 관리자들의 폭행은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실제로 피해자들은 그때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으며 폭행으로 인한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다. 이용규칙에 요금제도의 규정이 있었고 일본군인들이 위안소 출입시에 이용료에 해당하는 군표(군용수표)11)나 이용권을 위안소 주인에게 지불했다고 한다.그러나 일본군위안소 생활을 통해서 돈을 모았다는 여성은 거의 없다. 식비, 옷값, 화장품값 등의 온갖 명목으로 갚아야 할 빚만 늘어났다. 아예 돈을 못 받았다는 증언이 상당수이고 군표를 받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군표는 일제가 망하자 휴지조각이 되었다.특히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식민지 조선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의 전시체제 아래서 식민지 조선 여성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성병검사12)는 일본군위안소를 운영 규정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거의 매주 군의관에게 국부검사를 받았다.성병에 걸리면 606호13)라는 주사를 맞았으며 격리치료를 받았고 위안부 생활을 금지당했다.위안부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임신방지 방법으로 수은이 든 약을 먹기도 했다. 위안소를 이용하는 군인들은 삿쿠14)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규정을 어기는 경우도 많았다. 위안부들 대부분은 성병에 감염되었고 성병치료를 위한 약물복용과 수은 등을 쓴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군 위안소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위안소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위안소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일본군에 의해 집단적으로 유기되거나 학살되었다. 한편 연합군의 포로로 있다가 귀국선을 타기도 하였다. 해외에 남겨진 대부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우처럼 위안소 경험에 대한 수치심으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남아있는 경우도 많았다. 2011년 4월말 현재 여성가족부에 신고자는 234명에 불과하고 생존자는 73명이다.(사망 161명) 고국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도 여성의 순결을 중요시하는 가부장적 사회가 주는 심적 고통과, 위안소 생활의 후유증으로 남아있는 성병과 육체적 상처, 계속되는 빈곤으로 인한 생활고로 크게 고통받고 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식당일, 파출부, 막노동 등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면서 직접 생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였다. 대다수 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위안부 경험에 대한 수치심과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보다 더 큰 고통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평범한 여성의 삶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여성들은 신체적 장애뿐 만 아니라 정신적 장애 즉, 트라우마15)로 고통 받고 있다.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발족되고,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이 시작되면서 한국정부에 법제정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1993년 국회에서 ‘일제하 군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이 제정되었다. 대부분의 군‘위안부’여성들은 직접 생계를 유지하면서 생활을 하며 일반적으로 식당일, 파출부, 막노동 등 육체적 노동에 종사해왔다.2005년에는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로 개정되었다.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기념사업이 추가된 것이다. 이 법에 따라 한국정부는 생활안정지원금 지원(2011년 현재 월 90만 8천원), 의료지원, 영구임대주택 입주권 부여, 일시금 4,300만원을 지급하는 등 현재까지 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본적인 생계를 돕고 있다.2006년부터는 간병비 지급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현재 몇몇 할머니들은 나눔의 집과 정대협 쉼터에서 살고 있고 대다수는 영구임대주택에서 독거생활하고 있다.또한 아산병원에서는 1995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에 대한 평생 무료진료를 하고 있으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나눔의 집,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대구), 부산정대협, 기독살림여성회(전주),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등 민간단체 차원에서도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일제시기를 경험한 사람들은 정신대나 처녀공출16)이라는 말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한국에서는1990년대 이전에 일본군 위안부라는 말 대신에 대개의 경우 정신대라는 말을 썼다. 정신대는'어떤 목적을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 라는 뜻으로서 일제가 전쟁을 위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남녀 모두 정신대의 동원 대상이었고 농촌정신대, 보도(報道)정신대, 의료정신대, 근로정신대 등 여러 분야에서 조직되었다. 여성만으로 구성되는 경우 여자정신대라고 불렀다.공식적으로 여자정신근로령이 발포된것은1944년8월22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조선의 여성들은 이미 관알선으로 정신대로 동원되었다. 그리고 정신대로 동원된 여성들 중 일부는 일본군위안소로 강제로 연행되었다.일본은 종군위안부라는 말로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종군위안부라는 말에는 종군기자, 종군간호부처럼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다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강제동원의 경험을 부정한다. 현재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 종군위안부라는 말을 쓰고 있다.현재 한국 관계법령에서는 일본군 위안소에 연행되어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쓰고 있다. 사실 위안부란 말은 전적으로 일본군의 입장을 반영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그러나 당시 군문서에 위안부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어 일본정부와 군의 관여사실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그러나 이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되면서 이들 피해자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새롭게 개념화했다. 위안소 제도를 통해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강제적으로 성적 노예 생활을 강요 당했다는 차원에서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1996년 유엔 인권위원회나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는 일본군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군 성노예라는 말은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써 시민권을 얻고 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 시작된 생존자들의 공개 증언은 구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을 역사의 산 증인이자 평화의 각성자로 우뚝 서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e-역사관 '피해자 증언' 메뉴의 기록증언, 영상증언,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시작된 피해자의 그림은'위안부' 연행과정의 강제성과 기만성, 위안소에서의 비인간적 참상, 해방 후에도 계속되는 생존자들의 아픔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제시대 ‘위안부’ 관련 문헌자료는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 전후 며칠간, 예상되는 연합군에 의한 전쟁범죄 추궁을 회피하기 위하여 구 일본군과 정부에 의해 대부분이 소각되었거나,현재 남아있는 있는 자료중에서도 중요한 문건은 일본정부가 공개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위안부생존자들의 증언 등 구술 자료는 당시의 역사복원을 위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2006년 작고한 북한 박영심 할머니의 경우는,중국 숭산 등지에서 ‘위안부’로서 겪었던 참상에 대한 본인의구술 증언뿐만아니라 중국 운난성 쿤밍의 미군관할 포로수용소에서의생활 당시 미군과 미국정보당국이 작성한 보고서 및 사진, 운난성에 참전한 전 일본군 하야미 마사노리의 증언 등이 발굴되어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 대표적인 예이다.1991년8월 김학순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생존자들의공개증언은 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기여하였을뿐만아니라 피해자들을 역사의 산 증인이자 평화의 각성자로 우뚝 서게 하는 힘이 되고있다. e-역사관 ‘피해자 증언’ 메뉴의 기록증언, 영상증언,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시작된 피해자 그림은 ‘위안부’ 연행과정의 강제성과 기만성, 위안소에서의 비인간적 참상, 해방 후에도 계속되는 생존자들의 아픔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이름 : 현병숙(玄炳淑) 1917년 1월 9일이 내 생일이다.우리집은 평안북도 박천군 성도리에서 산으로 한 오리 걸어가면 있는 산골에 있었다. 내가 7~8살 되었을 때 집안 살림은 아주 곤란했다. 부모님은 지주의 종노릇을 하다가 저녁때면 그들이 먹다가 남은 것을 가지고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식구 다섯이서 끓여먹고 살았다. 지주집에서 두부를 만들 때는 남은 비지를 가지고 와서 그걸 볶아서 같이 먹었다. 그 때 그 비지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내가 큰 딸이라고 제일 이뻐했다. 아버지는 나를 곱다시며 안고 다니고, 업고 다니고 그랬다. 돈이 없어서 공부할 수조차 없었으며, 오빠도 공부를 못했다. 밥도 못 먹는데 무슨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렸을 때는 여동생을 돌봐주었다. 아버지는 이후 지주 집에서 일을 하다가 죽었다. ***************************************************************************** 이름 : 박차순(朴次順) 나는 1923년에 태어났으며, 생일은 음력 4월 15일이다. 고향은 어디인지 모른다. 다만 외할머니댁이 전라북도 전주 풍남정 23번지였다는 것만 기억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박순심이었고 여동생 이름은 박복순이었다. 여동생은 나보다 3살이 더 어리다. 어머니가 여동생을 임신하고 있었을 때 살림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는 일본으로 일하러 가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 생사는 알지 못한다. ***************************************************************************** 이름 : 김의경(金義慶) 경성부의 태평통(지금의 서울 태평로)에서 1918년 11월 14일 태어났다. 남대문 근처에 집이 있었고, 집 근처에는 일본사람이 있는 절이 있었다.6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형제자매가 다섯이나 되는 바람에 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오빠 1명, 언니 3명, 여동생 1명이 있었다. 오빠의 이름은 김수백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재혼을 하였지만, 의붓아버지도 3년 만에 죽었다.이후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일을 하였다. 당시 오빠는 종이 만드는 일을 했고 장가를 가지 않은 상태였다. 언니들은 모두 시집을 갔고 엄마와 오빠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 이름 : 김순옥(金順玉) 1922년 생으로 평안남도 평양이 고향이다. 오빠 둘에 언니 하나 그리고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평양 모란봉 앞에 집이 있었다. 가난하여 콩으로 배를 채우고 죽을 쑤어서 먹을 때가 많았다. 집안이 어려워 7살 때부터 남의집살이를 하였다. 일본사람 집에서 아기를 돌보아주며 7년 동안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18살 때(1940년경) 중국 요녕성으로 오게 되었다. 봉천에서 자동차를 타고 반나절을 달려와서 내렸는데 함께 온 조선 사람이 나를 중국 사람에게 판 것이었다. 거기는 술집이었는데 밤이면 자꾸 손님을 받으라고 강요했으나 내가 거절했다. 거기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술집에 온 60대 조선노인이 안 됐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 데려다 먹여주기도 했다. 반년 후에 그 노인이 빚을 물어주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이름 : 박서운 (朴徐云) 박씨인 아버지와 서산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 10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1915년 음력 11월 23일이 내 생일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또 아들일 것을 기대했는데 딸이 태어나자 서운해서 이름을 서운이라 지었다 한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조차 없을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다. 나물을 뜯어다 먹기도 하였고, 바닷가에 가서 미역 등 해초를 뜯어먹고 살았다. 내 위의 오빠들과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재가를 하였다.의붓아버지에서 엄마랑 같이 살았는데 그 집도 너무 가난하였다. 그러다 집에서 멀지 않은 어느 여관에 양딸로 들어갔다. 그 집에도 아이가 없었다. 그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이부자리를 개고 하였다. 거기서 한 달 정도 있다가 나왔다. ***************************************************************************** 이름 : 이수단 (李壽段) 어머니는 몸이 약하였고 자주 아팠다.송촌이란 곳에서 한 달 정도 일본학교를 다니다가 말았다. 그래도 그 덕분에 글씨를 알았고 공장에서 일을 할 수도 있었다. 열한 살 때부터 열세 살 때까지 일본사람 집에 가서 애를 돌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또 일본인 공장에 밥도 해다 주고 이것저것 잡일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 공장이 어떤 공장인지 무얼 만드는 데였는지는 모르고 그저 비밀스럽게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열세 살 때 물동이를 메고 가다고 월경이 시작되어 깜짝 놀라고 무서워서 울기도 하였다. ******************************************************************************* 문옥주 , 이남이 , 박두리 , 김분선 , 문필기 , 김학순 , 이용수 , 황금주 , 이상옥 , 박영심 , 리현숙 , 로현화 , 김영실 , 김영숙 , 곽금녀 , 최용순(가명) , 정서운 , 장점돌 , 이옥선 , 석순희(가명) , 박화자(가명) , 박송자(가명) ,노청자 , 김화자(가명) , 김정덕(가명) , 김순악 , 김봉이(가명) , 김말순 , 길원옥 , 공점엽 , 강순자(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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