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희문부터 장충체육관까지, 현대건축
거장들의 작품을 만나다
조선은 건국 후 한양도성을 쌓을 때 동서남북 방향으로 사대문을, 그 사이사이에 작은 대문을 두었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만들어진 남소문에 해당하는 문이 광희문으로, 1396년(태조 5년)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됐다.
'광명원희'(光明遠熙/ 광명이 멀리 빛나다)에서 두 글자를 택해 문의 이름을 광희문(光熙門)이라 지었다.
광희문(光熙門)은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렸다.
남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가 이곳 부근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 해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렸다.
실제로 도성 안의 시신은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
유족들은 광희문을 나오자마자 제를 한 번 더 지냈다.
운구 행렬이 무덤으로 향하다가 중간 지점에서 멈춰 제사를 지내는 ‘노제’였다.
죽은 자의 넋을 달래고, 산 자의 애끓는 절절함을 위로해주는 작업, 이승과 저승의 연결자인 무당이 광희문 밖에 자리 잡았다.
무당집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이 지역은 ‘신당’(神堂)이라 불렸다.
인근 금호동과 옥수동까지 묏자리가 이어져 일대는 거대한 공동묘지가 형성됐다.
1895년 갑오개혁 때 ‘무속타파’를 명분으로 신당의 '神(귀신 신)'자가 '新(새 신)'자로 바뀌었다.
지금의 신당동(新堂洞)이다.
서울이 팽창하면서 도시계획이 새로 짜였고, 신당에는 대규모 주택 단지가 들어섰다.
조선시대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누군가 한양으로 올라간다고 하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지독한 병에 걸리거나 고난을 겪다 시구문에서 죽은 사람들 때문에 성돌이 면역돼 그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지하철 2, 4, 5호선이 지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로 나온다.
3번 출구 앞엔 옛 서산부인과 의원 건물이 있다.
현대 건축의 거장 김중업의 대표작으로, 1965년 설계해 1966년 준공됐다.
남성의 심벌과 여성의 자궁, 그리고 태아를 형상화 한 파격적인 건물이다.
건축주였던 서병목 원장은 병원과 주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의뢰했고, 30여년간 산부인과 건물로 사용했다.
시구문이라 불리는 죽음과 관련한 문 바로 옆에 생명을 탄생시키는 산부인과 병원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퇴계로(옛 왕십리길) 횡단보도를 건너면 광희문이다.
광희문은 혜화문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헐렸다.
6.25전쟁 때는 문루와 서문 위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됐고, 1960년대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다.
광희문은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고증을 거쳐 복원하면서 홍예(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문) 석축을 해체해 남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고쳐 지었다.
광희문 현판을 등지고 서면 조선 시대 천주교 순례터(참형장)가 눈에 들어온다.
광희문 성지는 790위의 순교자 시신이 묻힌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한양도성 내 좌·우 포도청, 형조전옥, 의금부옥 등에서 병사, 장살(형벌로 매를 쳐서 죽임) 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은 그 가족 친지들이 즉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경우 하급관리들에 의해 광희문 밖으로 운반돼 버려졌다.
광희문에서 장충동 방면으로 샛길이 있다.
집들은 한양도성을 소형차 한대 지나갈 정도의 간격을 유지한채 줄지어 있다.
광희문의 한양도성을 왼쪽에 두고 100m쯤, 여기서 우회전해 300m쯤 걷다보면 왼편에 경동교회가 나온다.
교회의 이름은 서울(京)의 동쪽(東)에 있다는 뜻이다.
경동교회까지의 골목엔 특이한 가게들이 눈에 띈다.
과일가게처럼 꾸며진 간판 없는 상점인데, 업소용 냉장고 문을 열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칵테일 바가 대표적인 사례다.
경동교회는 붉은 벽돌과 담쟁이넝쿨로 중세 고성의 분위기다.
현대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1981년 건립된 경동교회는 외관에 십자가·창문·정문이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손을 형상화한 메인 타워, 골고다 언덕길을 표현한 본당 진입로, 초기 로마교회 카타콤의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예배당 내부 등 상징이 있는 건축물이다.
내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큰 창은 빛이 위에서 십자가를 비추도록 설계됐다.
서산부인과 의원을 건축한 김중업은 1922년생이고, 경동교회를 건축한 김수근은 1931년생이다.
김수근은 6·25전쟁 통에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에서 건축 공부를 했고, 김중업은 6.25전쟁 중에 파리로 가서 거장 르코르뷔지에 문하에서 건축 공부를 했다.
김수근은 실권자 김종필(JP)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유센터, 타워호텔, 세운상가, 정동 MBC 사옥, 워커힐호텔 등을 설계했다.
김중업은 1970년에 발생한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와 일련의 부당한 정부 정책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계속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1971년에 파리로 추방됐다가 정치적인 상황이 바뀐 197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경동교회 바로 옆 서울석유사옥도 인상적인 건물이다.
1, 2층 주유소 위에 새로 올린 정방형 건물은 얇은 회색 철망이 씌워져 있다.
건물 6, 7층에 사선형으로 유리관을 박아 외부와 내부를 개방했다.
건물 내부 계단에서는 경동교회를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중세의 고성 같은 경동교회와 대비를 이룬다.
경동교회 맞은편엔 평양면옥이 자리하고 있다.
동치미 국물이 생각나는, 밍밍한 맑은 육수를 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취재차 평양에 갔을 때 대동강변 옥류관에서 '랭면'을 맛봤다.
간장을 푼 짙은 육수에 검은색에 가까운 면이었다.
나로서는 평양냉면 고유의 맛이 뭔지 알 수 없다.
인건비 상승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름이 있든 없든 냉면값은 올라도 너무 올랐다.
서울석유사옥에서 장충체육관으로 가는 길에는 대문 두 개가 있다.
잠겨있지 않은 대문과 주변 벽에는 예쁜 색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작은마을'이란 단어가 눈에 띈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집이 아닌 좁은 골목이 있다.
좁은 골목을 마주하고 집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있다.
대문에 씌여있던 '작은마을'은 진짜 작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마을의 유래는 6.25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남한 실향민들은 장충동 일대 '벌집촌'으로 불린 좁은 골목들에 터를 잡았고, 그들은 냉면과 족발 등 고향 음식을 팔았다.
'작은 마을'은 벌집촌의 흔적이다.
'작은마을'부터 장충체육관 길 건너편까지는 이른바 '족발골목'이다.
평안북도 실향민 출신 전승숙, 김정연 할머니가 1957년 ‘평안도집’이란 상호로 동업을 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된장으로 조리하던 평안도식의 족발을 간장 양념 족발로 바꿔 서민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각각 ‘뚱뚱이할머니집’. ‘평남할매집’으로 분리하면서 족발골목의 태동을 알렸다.
족발이 식재료로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1970년대 돼지고기를 일본에 수출하고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서울 시민이 많이 찾던 남산공원, 장충체육관, 장충단공원 등엔 유동인구가 많았다.
단백질이 부족했던 시절 족발이 저렴한 보양식으로 소문이 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길 건너편으로 장충체육관이 보인다.
1979년 잠실체육관 건립 전에는 국내 최대의 실내 체육관이었다.
1955년 육군체육관으로 건립됐고, 넘겨받은 서울시가 한국 최초의 돔(dome)식 건물로 개조해 1963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꿔 개관했다.
1966년 김기수 선수는 이곳에서 이탈리아의 영웅이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한국 프로권투 최초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프로레슬링의 김일 선수는 장충체육관에서 ‘박치기왕’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1972년 ‘10월 유신’에 따라 제8대부터 제10대 대통령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단독 후보를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률로 선출한 ‘체육관 선거’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88서울올림픽의 유도와 태권도 경기 등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장충체육관 대각선 방면 태극당은 상호부터가 정겹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빵집을 경영하던 일본인이 돌아가면서 두고 간 집기를 받아 1946년 태극당이라는 이름으로 명동에서 문을 열었다.
창업주는 광복의 기쁨을 담아 이름을 태극당이라고 짓고 우리꽃 무궁화를 태극당의 얼굴로 삼았다.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한 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자 시절 주3회 저녁 7시 30분부터 3시간씩 동국대에서 박사를 했다.
가끔씩 지하철역 근처 태극당에서 야채사라다빵을 사서 강의실까지 가면서 먹었다.
묵직한 무게, 샐러드 아닌 사라다라는 추억의 맛이 좋았다.
장충체육관 맞은편 장충교회를 끼고 주택가 언덕 길을 오른다.
막다른 길에서 왼쪽으로 돌아 주한튀르키예 대사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왼편에 큰 저택이 있다.
나무 대문은 열려 있고, 문패엔 <Starbucks Reserve>라고 적혀 있다.
대선제분의 창업주 박세정 회장 일가가 4대에 걸쳐 살았던 집이다.
1세대 토종 건축가로 불리는 나상진에게 의뢰해 1963년 설계하고 1965년 착공해 1966년 6월 완공한 주택이다.
나상진은 김중업, 김수근보다 한 세대 앞선 건축가다.
광장동 워커힐호텔 본관과 후암동 성당,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캠퍼스로도 쓰였던 석관동의 중앙정보부 본청사 등을 지었다.
장충동은 서울의 근현대사를 압축한 동네다.
떠들썩한 먹자골목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담장 높은 저택, 실향민 벌집촌이 뒤엉켜 있다.
김수근의 경동교회.
글: 조수진 에디에이터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