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을 읽는 노인과 문제가 많은 수요일—그 후
이제 벌써 세밑이니, 문제가 많은 수요일이 시작된지 한 달 반이 되었다.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이 어떻고, “카르페 디엠”이 또 어떻고 하면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정작 베란다 누수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말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렇게 되어있었다. 관리사무소의 정기사에 의하면, 윗층인 1705호의 세입자는 12월 말에 이사를 나가게 되어있으며, 그 후 즉시 베란다의 누수 공사가 시작되게 되어있다. 정기사는 나에게 그 때까지 좀 기다려달라고 말하면서, 기다려주는 대신에 우리 베란다 천장에 페인트칠까지 새로 해주게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드디어 12월 말이 되었다. 전화 연락을 기다리다가 조바심을 막 내려고 하는 차에 전화가 왔다. 1705호의 집주인이었다. 그는 곧바로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가 나를 보고 내어놓은 첫마디는 올해 나이가 몇이냐는 것이었으며, 둘째 마디는 고향이 여기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 때 이미 이 일이 어떻게 종결될지를 알아차렸어야만 했다.) 그리고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자세하게 하였다. 이 분은 이 고장 출신이고 80대인데, 80대나 되었기 때문에, 매사에 의욕이 없고, 뭘 하려고 해도 겁이 난다. 자기가 사는 곳은 전주이지만 우리 아파트 단지에 아파트를 세 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문중(門中)의 재산이다. 1705호는 자기가 아들에게 사준 것인데, 아들은 지 형이 사준, 혁신도시에 있는 아파트에서 사는 바람에, 세를 놓게 되었다. 같은 가격에 산 토지는 시가가 세 배나 뛰었는데, 이 놈의 아파트는 그 가격 그대로라서 손해를 보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 듣고난 뒤 나는 노인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베란다 쪽을 한 번 안 보시겠어요?” 노인은 우리 베란다 천장을 확인하였다. 그러면서 실망스러운 말을 하였다. 자기가 페인트를 가져와서 페인트가 벗겨진 부분에 칠해주겠다는 것이며, 그게 안 되면 방수 스프레이를 가져와서 벗겨진 부분에 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방수 스프레이는 나에게도 있다. 그리고 올 7월에 베란다에 새로 도색을 하였는데, 장마비를 맞고 저렇게 들뜨고 벗겨진 것이다. 나는 방수전문가가 내린 진단도 노인에게 전해주었다. 관리사무소에서 소개해 준 방수전문가가 다녀간 적이 있는데, 그 사람에 의하면, 1705호의 외벽에 방수공사를 하여야 한다.
그러자 노인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주는 말을 하였다. 자기네 집도, 즉 1705호도 베란다 천장이 꼭 저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자기네 윗 층, 즉 1805호에 올라가서 말을 한번 해 봐야겠다는 것이다. 잠시 뒤에 노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1805호 사시는 분, 참 좋은 분이더구만요. 고쳐준대유. 그리고 교수님을 아주 잘 안다고 하던대요? 저희 아이도 사실은 우석대 나왔구만요. 식품영양학과요. 교수님은 식품영양학과는 아니지유?” 1805호에 사는 부부는 아파트에 딸린 작은 상가에서 수퍼를 운영하다가 딸기 농사로 전업한 사람들이다. 아저씨는 항상 술냄새를 풍긴다. 아주머니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보면 딸기를 한 바가지씩 건네준다. 자기들이 먹을 요량으로 끝까지 따지 않고 남겨두었던 것이라서 정말 크고 달다. 1705호 노인에 의하면, 1805호에서 “주관을 해서” 두 집의 베란다 누수 문제를 해결해주게 되었다. 다만 그 작업을 하려면 날씨가 맞아야 하기 때문에 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 작업을 시키는가 하면, ‘우정종합장식’에 의뢰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정종합장식은 나도 안다. 키가 작고 힘이 세며 삼례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인데, 우리 집에 장판을 교체해준 적이 있으며 도배사를 소개해 준 적도 있다. “그 사람은 실내 장식 쪽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누수 전문가가 따로 있다니까요. 관리사무소에서도 알고있고요.”라고 나는 노인에게 말하였지만, 내 투지는 이미 꺾여있었다. 그러다가 내 투지가 완전히 꺾이는 일이 일어났다.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엊그제 1705호 노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베란다 문제로 전화한 사람이여유. 누수 문제요. 우성 아파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구만요.” 아 예.
“작업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두 집 다 말이예요.” 예 그렇지요.
“어떻게 작업을 시작할지...... 음, 그러니께 그 분도 그렇게 빡빡한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예? 아 그러세요.
“그 사람이 원래 삼례 사람은 아닌 거지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요즘 애들처럼 법을 따지고 그런 건 아니니께.” 나는 노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지만, 그냥 아, 예 그러세요라고 대답하였다.
“윗 층 보고 책임지라고 해서 아주 빡빡한 사람인 줄 알았는디...... 세 든 사람이 나갈 때까지 기다려주기도 하고...... 보니까 아주 순하게 생겼는디......” 예? 아 저 어디에 전화를 하신 건가요?
“우정종합 뭐시긴가? 거기 아닌감유?”
나는 완전히 포기하였다. 나만 가만히 있으면 1705호 집주인 노인도 행복해지고 1805호 딸기농사 짓는 부부도 행복해지는 것 아닌가?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진 베란다 천장은 여전히 문제지만, 다시 보니, 견딜 만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카르페 디엠이 뭐 따로 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나도 그런 선물을 많이 받아왔을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인상이 조금은 바뀌었나 보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인상인 줄 알았는데...... (끝)
추기(12월 30일): 벨이 울려서 나가보았더니, 중년 남자가 뭘 들고 서 있었다. 윗층 세입자였다. “아, 이사 오셨군요. 어이쿠 이런. 뭘 이런 걸 다.” 나도 모르게 입이 찢어지면서 저절로 손이 나갔다. 묵직하였다. 플라스틱 접시에, 비닐을 씨운 시루떡이 세 덩어리나 놓여있었다.
첫댓글 아니 이 글을 왜 한참 지난 이제서야 읽지??
ㅋ원판 불변의 법칙!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순한 인상은 순한 인상 그대로 임.
교수님도 남자 인지라 잘 넘어 가셨구만
이런 경우 씨끄러워 질 수도 있는데 잘 하셨어요
내가 사는 아파트도 오래되서 문제가 많아
위층의 배관이 새서 우리집 천장이 물새고 벽지가 모두 훼손되었는데
위층이 와서 보고 관리소에서도 보았는데
위집은 자기집 파이프만 고치고 입을 쌋더라고
할 수 없이 내가 벽지를 사다가 도배를 다시 했어
매일같이 엘레베이터에서 만나는데
미안한지 항시 90도 절을 한다.
허리 아플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