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를 지나다 치안센터 앞에서 수배전단을 보다 황당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수배자 사진에 인적사항을 나열하다가 맨 끝에 '노동자풍'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이 전단을 보면서 노동자하면 떠오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뭔지-노동자를 무시하는 무의식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조차도 억지로 노동자들이 우겨서 누리는 특권으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가 존재한다. 회사들과 노동조합이 맺은 복지부분에 대한 단체협약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을 과도하다고 트집 잡는 언론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우리나라에는 노동자의 날은 없고 근로자의 날만 있다.
전교조나 교수노조에 대해서는 교사나 교수가 무슨 노동자냐고 힐난한다. 소방관이나 경찰에서 노조를 만들려하면 해고되거나 해고될 각오를 해야한다. 장관이나 수상조차도 노조원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노조에 남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을 뉴스 인터뷰에서 밝히는 유럽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모든 분야에 얼마나 퍼져있는지 이제 이런 무의식적 노동자 권리 무시가 버젓이 언론매체를 통해 광고로 나타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감기 걸리는 거 자체가 문제야! 근데 뭐? 월차! 워~얼~차! 어디 월차를 내 개념 없이, 으~슬 으~슬 감기엔 판피린-큐…’
“(관리실 풍경) 아..나가는 겨?...요즘 부쩍 감기가 극성인디유, 그럴 땐 출근이구 뭐구 푸욱 쉬~유, 다음날 자리 없어지는 건 ...책임 못 지고유~, 그게 힘덜면 판피린큐가 좋아요...”(‘관리실’ 편)
민주노총은 ‘젊은 사람들이 아픈 것부터가 문제인데 개념 없이 월차까지 낸다’는 주장을 은연 중 전달하면서 근로기준법 상 권리인 월차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항의했다. 현 근로기준법 제57조 월차 유급휴가는 지난 2004년 7월부터 주5일제(주40시간)가 시행된 이후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폐지돼 왔으나 현재 20인 미만 사업장에 한해서는 마땅히 보장돼야 할 권리라고 밝혔다.
또 “이 광고는 헌법상 행복추구권에 포함되는 휴식권과 건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사회에 확산시킨다는 점에서도 매우 부적절한 광고”라며 “광고가 개그 패러디라는 형식을 띠고 있으나 그 편파성과 과도함은 결코 단순한 웃음거리로 지나칠 정도를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청년유니온도 동아제약에 항의공문을 보내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도 방송중단 조치를 요구했다. 청년유니온은 “판피린-큐 광고는 가뜩이나 청년실업과 취업난으로 고생하고 있는 청년들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하고 있다”며 “청년실업 100만 명 시대에 회사에 취업시켜줬으니 아파도 티내지 말고 죽도록 일하라는 것인가”라고 성토했다.
동아제약이 이런 사회적 파장을 모르고 했을까? 역으로 이런 파장을 통한 광고효과 극대화를 노렸을까? 그러기에는 회사 이미지 타격이 너무 큰데...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제약사나 광고사 임직원들의 노동자에 대한 의식이 너무나도 편향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광고회사에서도 제약회사에서도 경영진들이 직접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광고를 만드는 것도 제약사에서 광고를 담당해 실무적으로 처리하는 사람도 사장이 아닌 노동자다. 그런 노동자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모른다면 사실 더 문제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침을 뱉고도 남의 얼굴에 뱉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마치 선거 때 자신이 노동자면서 자신들의 이익과 위배되는 한O라당을 찍듯,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진보정당에게는 언제나 한 자리 수 지지를 보내며. 이제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한 번 정립할 시기가 충분히 되었다고 본다.
아울러 제약사나 광고사들도 광고를 만들고 결정할 때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부분을 고려해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작은 부분들도 미리 고려할 줄 아는 것이 프로다. 이런 일이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여론화된다는 것도 우리 사회가 진일보했다는 증거라는 사실에 그나마 위안을 삼으며,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