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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다(4)
행 16:1-10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설 교 >
하나님의 가이드
행 16장 6~10절 / 홍문수목사
흔히 우리 인생을 가리켜 길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비유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죠? 잠시 여행을 해도 중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교통편도 좋아야 되고, 음식도 좋아야 되고, 잠자리도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이드’입니다. 가이드가 좋아야 여행이 즐겁고 유익합니다. 만일 엉터리 가이드를 만나면 큰일 납니다. 우왕좌왕하게 되고, 모든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인생은 누구나 초행길이기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가 많기에 정말 좋은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를 인도해 줄 좋은 스승이나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인간 가이드는 아무리 좋아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 역시 초행길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약간의 유익을 줄 뿐입니다. 완벽한 가이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 실수가 없으십니다. 반드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가이드로 모시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바울이죠. 그는 위대한 사도였지만, 그 역시 무지하고 연약한 인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이드가 꼭 필요했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인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가이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가이드를 받았는지 함께 살펴보기를 소원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가이드를 잘 따라감으로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가이드 : 최선의 삶으로 인도
하나님은 완벽한 가이드이므로 우리를 최선의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어떻게 최선의 삶으로 인도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였습니다. 가는 데마다 막혀버립니다. 너무 이상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나님은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를 원했던 겁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유럽으로 건너가기를 원하셨던 것이죠. 6절~7절을 봅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그리고 비두니아 등 중부와 북부 지방으로 진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계속 막아버립니다. 이때 바울이 큰 고민에 빠졌을 겁니다. 자기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왜 자꾸 막혀버리는지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었고, 그는 바다 건너 유럽 지역인 마게도냐로 건너가 첫 성(Capital City)인 빌립보로 갑니다. 그곳은 낯선 곳입니다. 바울이 갈 생각도 안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놀라운 일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납니다.(행16:11~15) 그의 집안 식구가 몽땅 세례 받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죠. 바울이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 하나를 고쳐줍니다. 그동안 주인이 앵벌이를 시켰던 것인데, 이제 수입이 없어지자 길길이 뛰며 바울을 고발합니다. 이렇게 해서 애매하게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죠. 인간적으로 황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행16:16~40)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찬송하며 기도하는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진이 나면서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어집니다. 그냥 도망가면 되는데, 그때 간수가 자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법으로 중죄수를 놓치면 간수가 처형됩니다. 본인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처형됩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보니 옥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로 착각하고 차라리 자결하면 죄수들이 자기를 죽이고 탈옥한 것으로 인정되어 최소한 가족들은 살릴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겁니다. 그때 바울이 제지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간수가 아마 깜짝 놀랐을 겁니다. 세상에 이런 죄수가 어디 있습니까? 간수의 목숨을 구하려고 출옥을 포기하다니! 감동을 받은 간수는 바울에게 정중히 구원의 도를 물었고, 바울이 증거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감동을 받은 간수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데려다 씻겨주고 대접합니다. 그리고 간수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들도 아마 루디아 집에서 시작된 빌립보 교회의 멤버가 됐을 겁니다. 더욱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다음 날 아침 상부에서 지사가 떨어졌습니다. 풀어주라는 겁니다. 그러자 바울이 호통을 칩니다. 로마 시민권자를 함부로 가두더니 이제는 나가라니 장난하는 거냐고 항의합니다. 그 당시 로마 시민을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구금하거나 구타하는 것은 범법행위였습니다. 크게 문책 당할 일입니다. 그러자 상관들이 놀라 제발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래서 바울 일행은 뻐기면서 감옥을 나옵니다. 얼마나 절묘합니까! 좀 고생은 했지만 하나님의 큰 역사를 경험한 겁니다. 사도행전 17장 이하를 죽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유럽 전역과 당시 세계의 심장부였던 로마까지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만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세계를 생각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단한 사도 바울조차 그 생각이 편협합니다. 그리고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사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을 위해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로 인도하십니다.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심으로 우리를 최선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가이드 방법 : 성령의 인도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인도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실까요? 가이드 방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인도’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음성(영음 Spiritual Voice)을 들려줍니다. 이건 청각적인 소리가 아니죠. 그런 경우도 간혹 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음성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게 바로 성도들이 인생을 지혜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이래야 된다는 겁니다.
본문을 잘 관찰해 보면 바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성령이 그의 진로를 인도해 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6절, 7절, 10절. “6 성령이 ... 7 ... 예수의 영이 ... 10 ... 하나님이 ... ”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특히 성령님께서 앞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는 구체적으로 다양한 도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 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말씀 :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인생의 지도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마음 속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확신을 주십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또 시119:105 보면 빛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로 이래야 되나 저래야 되나 고심하고 있는데, 성경을 읽다가 깨달아집니다. 설교를 듣다가 해결됩니다. 그게 바로 말씀을 통한 성령의 인도입니다.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성도 부부가 부부 싸움을 하고 냉전 상태에서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가정의 달도 아닌데 그날따라 목사님이 가정 설교를 합니다. 부부 관계에 관해 자세히 얘기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남편이 아내를 수상쩍게 생각합니다. 혹시 교회 가서 떠든 거 아냐? 그런 심증이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날 또다시 부부 싸움 2라운드를 벌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말씀을 통해 성령이 음성을 들려주시는구나 하고 깨달아야죠.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그 길로 나아가면 수지맞는 겁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② 기도 :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쌍방적 기도가 중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 하면 그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청구하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이런 기도는 청구식 기도(간구)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듣는 기도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해 보세요.(마26:36~46)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은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십자가 고통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청구식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죠.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쌍방적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겁니다. 결국 십자가를 받아들이셨고,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계속 진로가 막힐 때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 기도했을 겁니다. “하나님, 왜 이래요?” 밤새 씨름하며 기도했는지 몰라요. 그 때 응답을 받은 겁니다.
③ 환상과 꿈 :
하나님은 흔하지는 않지만 그림으로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환상과 꿈 두 가지입니다. 환상은 깨어 있을 때 보이는 그림이고, 꿈은 잠을 잘 때 보이는 그림입니다.
바울이 밤에 기도하다가 환상을 봅니다.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기도 중에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지! 땅끝으로 가라고 했는데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네! 그래서 서쪽 유럽 사람이 보인거로구나!” 그는 이렇게 판단했습니다.
창세기 37장을 보면 요셉의 꿈이 나오죠.(창37:5~11) 그는 소년 시절 꿈을 꾸었는데 치리자(정치 지도자)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으로 간 요셉이 정말 그렇게 됩니다. 그가 꾼 꿈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지구천 교회 이동원 목사님의 간증문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설교자이지만, 20대초에는 방황하는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집안은 망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한 마디로 죽지 못해 사는 처지였습니다. 영어회화라도 배우면 호텔 종업원으로 취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서 외국인 선교사가 이끄는 영어성경 그룹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YFC 선교회 토요 정기 모임에 참석하다가 한번은 간증을 부탁받았습니다. 며칠 동안 준비해서 3~4백 명 모인 청년들 앞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 많은 청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여러 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스터 리는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네요. 아무래도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 날 밤 꿈을 꾸었답니다. 수만 명 모인 집회에서 설교를 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그의 인생이 호텔 종업원에서 설교자로 방향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꿈대로 정말 그렇게 됐죠.
그러나 모든 환상이나 꿈이 다 하나님의 음성인 것은 아닙니다. 개꿈도 있고, 헛것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분별해야 됩니다.
④ 환경 :
모든 상황이나 환경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바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때 계속 막혀버립니다.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 인도하신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막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열리면 하나님의 뜻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일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도 사단이 방해해서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분별할 필요가 있죠.
오늘 우리가 처하는 환경, 문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질병 가운데 있습니까? 사업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혹은 좋은 일이 생겼습니까? 원망 불평만 하지 말고, 좋다며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환경을 통해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⑤ 사람의 말 :
하나님은 때때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 ” 성도들은 지혜의 말씀으로 충만한 가운데 서로 가르치고 권면해 주면 좋습니다.
바울이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했겠습니까? 일행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었을 겁니다. 그러자 일행 모두가 동의하고 유럽을 건너갑니다.
때로는 우리가 답답한 상황 가운데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상담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에게 상담하면 망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제일 안전한 것은 목회자들이나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의 말을 참조하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 본인이 판단해야 되므로 성령의 인도에 대한 분별력을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3] 하나님의 가이드 따르기 : 분별과 순종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서 인정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분별력(Spiritual Sensibility)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기도할 때, 환상이나 꿈, 환경에 처할 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 그 어떤 도구를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듣든지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들리는 음성에 세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 사단의 음성, 그리고 욕심의 음성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매 순간 영적인 전쟁이 일어납니다. 잘 분별해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릴 때 사단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끼어들고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잘 분별해야 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죄성으로 인한 욕심이 있습니다. 욕심의 음성이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고 사단의 음성을 접수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백만원을 가져오면 한 달 만에 2백만원으로 불려 준다고 제안했다고 합시다. 말이 안 되는 소리이죠. 그런데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하면 미혹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욕심의 음성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꾸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감이 생깁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면, 그 다음에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잠3:5~6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음성에 순종하면 잘 가이드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산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산불이 났습니다. 모두 우왕좌왕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당황하지 마세요! 산꼭대기로 올라가면 됩니다.” 정말 그 말대로 산꼭대기에 올라갔더니 길이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순간마다 난관에 부딪히면 하나님께로 가십시오!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인생의 길이 훤히 보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가이드입니다. 하나님의 가이드를 따라가면 승리합니다. 내 생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생각으로 더 크게 승리합니다. 부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가이드를 받으심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에 붙잡혔는가
행 16장 6~12절 / 이종윤목사
세상에서 사는 인간들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못되어서 원하든 원치 않든 무엇인가에 꼭 붙잡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바울이 기도 중에 환상으로 마케도냐(유럽)인의 부름을 받고 빌립보에 들어갔을 때 그 곳에 있던 다양한 인물들이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Ⅰ. 과연 그들은 무엇에 붙잡혔는가?
1. 악귀에 붙잡힌 여인(행 16:16-18)
이 여인은 노예 신분에 악귀에게 까지 붙잡힌 불쌍한 여인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침략당하고 있는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2. 물욕에 붙잡힌 사업가(행 16:16, 19-23)
악귀 들린 여종을 이용해서 돈을 벌던 사람은 바울이 악귀 들린 여종을 고쳐주자 자기의 여종으로 인해 복채가 끊어진 것에 노하여 바울을 관청에 끌고 가서 거짓 고발하여 욕을 당하게 했습니다.
3. 편견에 붙잡힌 관리(행 16:19-23)
주변사람들이 바울을 유대인이라고 고발하자 시비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때려 옥에 가둔 관리들은 공정하고 냉철해야 할 법관들이였지만 그들은 결국 편견에 붙잡혀 제대로 법을 이용하지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었습니다.
4. 의무감에 노예가 된 공직자(행 16:26-27)
지진으로 수감자들이 도망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목숨을 끊음으로 책임을 지려고 했던 간수는 목적도 없이 의무만 행하려고 했던 일의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그 밖에도 주색잡기, 마약, 명예심, 출세욕, 증오심, 인습, 고집, 무지, 허영심, 거짓에 붙잡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누구든지 다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지, 아무것에도 붙잡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Ⅱ. 바울은 무엇에 붙잡힌 사람인가?
1. 성령에 붙잡힌 사람(행 16:6)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인 에베소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고(행 16:6) 또한 비두니아로 가려 했지만 성령이 허락하지 않음으로(행 16:7) 못 가게 됩니다. 그러던 바울은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주는 환상적인 비전(행 16:9)을 보고 소아시아가 아닌 구라파(유럽)의 마케도냐로 길을 옮겼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붙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롬8:9),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그의 영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갈 5:25).
2. 말씀에 붙잡힌 사람(행 18:5)
말씀에 붙잡힌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는 은퇴도 방학도 없었습니다. 세상지식은 우리의 이성과 양심까지는 전달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전달되며(히 4:12),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 능력이 있으므로 우리는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사랑에 붙잡힌 사람(고후5:14)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으로 악귀에 붙잡혀 버려진 여종을 살려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David Livingston가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는 독생자를 선교사로 우리에게 보내주셨다’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고백했듯이 우리도 이처럼 주님의 사랑에 붙잡힌 자, 또한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4. 사명에 붙잡힌 사람(행 20:24)
바울은 기도 중에 ‘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는 마케도냐 사람의 부름을 사명으로 받았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마케도냐로 보내신 것을 사명감으로 확인하고(행 16:10)발걸음을 소아시아에서 구라파(유럽)으로 돌렸습니다. 사명(使命)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使)을 수행하기 위해서 있는 목숨(命)이라고 풀이한다면 우리는 이 일을 회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맺는말.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 가는 단기선교팀대원들과 농촌전도대원들을 비롯하여 복음증거자의 사명을 받은 모든 서울교회 여러분들은 바울이 소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으나, 성령과 말씀에 붙잡혀 마케도냐(유럽)로 떠났던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사명에 붙잡힌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라 순종함으로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마게도냐인의 환상
행 16장 6~15절 / 손상률목사
세기의 전도자 바울은 그가 평생에 이루어 놓은 선교의 업적을 기록하면서 그 이면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으신 배려와 간섭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때 되어진 사건으로써 그가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배경을 소개한 것입니다. 전 후 네 차례에 걸쳐 해외 선교를 했던 바울은 그 중에도 두 번째 여행 때 되어진 극적인 사건을 매우 인상깊게 그려놓았습니다. 아시아 사람인 그가 에게해를 건너서 유럽으로 원정을 가게 된 것은 전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것은 또한 아시아가 발원지인 기독교가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되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세계 문화사에 있어서 그 판도를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의 초점은 마게도냐인의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눈에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여주셨고, 그 귀로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소리를 듣게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보여진 마게도냐인의 환상은 자기의 계획을 성취코자 하는 하나님의 비상 수단인 것이며, 동시에 이 땅 위에서 주님의 교회가 전개하는 하나님 나라운동의 비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Ⅰ. 인위의 장벽을 허물게 하는 것입니다.
원대하신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 있어서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들의 계획 때문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의도에 상관없이 자기의 신앙이나 열심만 가지고 어떤 일을 수행하려 할 때 성공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쳐 놓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16:24). 언제나 주님의 기쁘신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됩니다.
본문 6-7절에 보면 바울의 의도하는 일에 성령께서 그것을 막으시고 차단시켜 버립니다. 그리고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하였습니다(9-10절). 이는 바울의 선교사역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으로서 전자는 소극적으로 후자는 적극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거리낌이 되는 인간적인 장벽을 허물어야됩니다.
(1) 지역의 장벽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고자 하는 비두니아는 갈라디아와 인접한 곳으로써 소아시아 내륙지방에 있는 지명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전도하고자 애를 쓰게 된 것은 아마 지방색에 대한 그의 본심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고 바울이 공부하여 자란 곳 이스라엘이 아시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출생지인 길리기아 다소는 오늘날 터키의 남쪽에 있는 도시로 그 당시에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요 경제적으로도 매우 번영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그가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 랍비 가말리엘에게 학문을 배운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행22:3).
이처럼 자기가 흠모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곳에서 전도하고 활동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오대양 육대주 어디에나 구별 없이 그가 영광을 받아야 될 곳이며 복음이 펼쳐져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류가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창1:28), 또한 어디에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기를 원하십니다(마28:18-20).
(2) 종족의 장벽입니다.
어릴 때부터 유대주의 율법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바울은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동족에 대한 관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훗날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였고(갈2:8), 유대인 율법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기도 하였지만(행14:19), 그래도 그의 마음 속에는 유대인으로서 민족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서 9:3에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1-4에 보면 헬라인을 아버지로 둔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사도와 장로의 규례를 지키게 한 것도 동족을 의식하는 배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롬10:13).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유대인이 아닌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3) 사고의 장벽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하였습니다(고후5:17).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개성과 철학에 따라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경륜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의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으로 몰아붙일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자기 열심만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 인줄 생각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갔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손에 붙들려 그 방향을 돌려놓고 말았습니다(행9:1-9).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 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을 받는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장벽을 허물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딤전1:13-14).
Ⅱ. 성령의 주도하심에 이끌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사람이 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행1:8).
(1) 선교의 주체는 성령입니다.
본문 말씀 6절에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더라고 말했습니다. 7절에는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9절에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볼 때 바울의 전도 사역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요14:25).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려 할 때 그 전개되는 과정을 통하여 성령이 개입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길이 막히고 또 한편 전혀 생각지도 않는 쪽으로 길이 열리며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등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아니했던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 임금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6:1).
(2)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불러서 그의 뜻을 알게 하실 때는 그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앞으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애굽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을 구출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하며 한사코 사양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통해서 이적을 행하게 하시며 모든 능력의 실제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였습니다(출4:1-7). 스가랴 4:6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다른 일들을 재물이나 권력이나 기술이나 사람이 가진 조건만으로 성사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신령한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평생 동안 이루어 놓은 실적들을 돌아보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빌4:13).
(3) 성령의 뜻을 수용하여야됩니다.
본문 말씀 10절에는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에 민감하여야됩니다(롬12: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계시 사역의 실제가 육신의 눈이나 귀만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눈과 귀로써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4). 하나님께서 간혹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주시거나 또는 통상적인 삶 가운데서 그의 의도를 살피도록 작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마5:8). 깨어 있는 성도는 항상 열려져 있는 마음으로 계시의 환상을 분별하는 자이며, 또한 그것을 실천하므로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Ⅲ. 웅대한 하나님 나라의 환상입니다.
어느 때에나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그 일에 수종 드는 사람은 자기 속에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품고 사는 자입니다. 구약시대의 경우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사야는 동정녀의 몸에서 나시게 될 임마누엘의 예언을 통하여 메시야의 환상을 나타내었습니다(사7:14). 그는 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하였는데(사60:22), 이는 멀리 신약교회가 지니고 있는 선교의 비젼이기도 합니다.
여기 본문 성경에 나타나는 바울의 경우도 세계 선교의 환상을 품고 그 뜻을 펼쳐나갔던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웅대한 선교의 비전을 구상하셨고 이를 지상 교회를 통하여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환상을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창조 주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게 하는 일을 그의 역사 경영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죄와 구원의 도리를 전파하고 그 열매를 거두게 하는 일을 자기 교회의 사명으로 맡기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놓은(요19:30)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상대하여 믿어 구원 얻게 하는 이 사역이 바로 교회가 안고 있는 선교적 사명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하신 선교적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교회는 복음의 환상을 가진 교회입니다.
(2) 하나님의 전략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말하고 있으나(엡1:4-5), 그 방법은 선교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선택하시고 이들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의와 공도의 표본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창18:19). 하나님의 선교 전략에 있어서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에서부터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며(마10:6), 지역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로 확대하게 하신 것입니다(행1:8).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기 선교의 과정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 받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복음의 불길이 사마리아를 거쳐(행8:14)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번져갔습니다(행11:19-26). 사도행전 13:3에 보면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하여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는데 그들이 제 1차 전도 여행을 통하여 소아시아 일대를 석권하였습니다(행14:1-28). 그 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때 하나님께서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이시며 그로 하여금 에게해를 건너서 유럽에 상륙하도록 작용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1-12절에 보면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복음의 행진이 유럽의 첫성을 교두보로 삼아 세계 심장인 로마를 점령한 후 세계를 석권하게 하였습니다. 곧 시간적으로는 세상 끝까지, 공간적으로는 온 세계 어느 곳이나, 그리고 대상은 모든 족속이라는 하나님의 전략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3) 신비로운 결과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롬1:16). 그는 또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했습니다(롬1:17). 이는 복음의 신비로운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불가사의한 신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여준 하나님의 싸인에 따라 빌립보에 들어간 바울과 그 일행은 그곳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크게 놀라고 기뻐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의 설교를 들은 루디아가 예수를 믿고 그 집이 세례를 받았습니다(15절). 또 저자거리에서 귀신들려 점하는 소녀가 예수를 믿었습니다(18절).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갇혀 있는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릴 때 간수가 무릎을 꿇면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하고 회개하였습니다(30절). 결국 그도 회개하고 주 예수를 영접하여 저와 그 가족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구라파의 모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신비로운 능력을 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새롭게 여시는 하나님
행 16장 6~15절 / 성홍모목사
오늘은 우리 교단 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실시하는 성년주일입니다. 성년이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성인으로서 자부심과 책임의식을 부여하는 날입니다. 오늘 성년을 맞이하는 청년 여러분,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위하여 무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년의 날을 1973년부터 시작하였는데, 매년 5월 셋째 월요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올해는 5월 17일이 성년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남자는 관례라고 하여 머리에 상투를 틀어주고, 갓을 씌워주었고, 여자는 계례라고 하여 머리에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었습니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첫 번째 관(冠)이 바로 이 성년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청년의 때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청년이라는 말은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벅차 오르고, 설레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은 비전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전(Vision)이라는 말은 한글로 풀이하기가 매우 힘든 단어입니다. 유사한 뜻은 있는 것 같은데, 꼭 들어맞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꿈이나 환상, 이상이라는 말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조금은 다른 개념입니다. 어떤 포부나 희망과 관련이 되는데, 매우 추상적인 단어라고 봅니다. 비전을 야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청년들을 통하여 장차 국회에 진출할 수 있는 의원을 보고 있으며, 대학총장이나 정부의 장차관으로 봉사할 인물들이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만한 꿈과 이상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잠언 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을 비전(Vision)이라고 합니다.
흠정역 성경에는 Vision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환상- 비전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한다"라는 뜻입니다. 비전이란 말은 미래에 대한 분명한 그림,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전을 설명하면서 "잠재력을 가지고, 통찰력을 가지고 미래는 설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정신적으로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비전은 실현 가능한 목표요, 꿈입니다.
비전이란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그런 근시안적인 것이 아닙니다. 장기간에 걸쳐 이룰 수 있는 원대한 꿈이요, 목표가 됩니다. 나는 나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봉사하며, 사회를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서 일한다는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전의 사람이 되고,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려면 긍정적이고, 올바른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져야 성공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주셨다고 하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매우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에 길이 빛날 인물이 일어나야 됩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는 4분 대통령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나라를 세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독립선언문을 만든 토머스 제퍼슨, 노예를 해방한 에이브러함 링컨, 그리고 최근에 세워진 세계 제2차대전의 영웅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념관은 1997. 5. 2일에 완공되어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념관 내에 있는 루스벨트의 동상은 2001. 1. 10일 대통령으로 퇴임을 열흘 앞둔 클린턴 대통령이 제막하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 대 미국을 뉴딜 정책으로 경제 공항을 이겨내었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위대한 인물이요, 미국 역사상 4선 대통령으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유를 신장시킨 사람입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념관에는 그의 가장 아픈 부분이 빠져 있었다는 지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39살 때에 소아마비 장애인이 되어 23년 동안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존하여 살았습니다. 4선 대통령으로 미국 백악관에서 휠체어에 앉아 나라를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념관에는 그런 흔적이 없기에 진정한 기념관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지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루스벨트를 장애인으로 휠체어에 앉아 집무하는 모습을 동상으로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부인 엘러너 루스벨트 여사의 말을 동상 하단에 새겨 넣었습니다. 글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의 질병은 그를 강인하게 만들었으며, 남의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내심을 기르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시각 장애인들을 위하여 점자로도 새겨 넣었습니다. 여러분, '악의 축'이라는 말은 부시가 사용한 말이 아니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 대전 중에 사용한 말입니다.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악의 축에 점령되어 자유를 잃고 억압받고, 소외되어 가난과 공포에 떨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위하여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주창한 4대 자유가 실현되기 위하여 유엔을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20세기의 영웅입니다. 20세기 대통령 중에 수도 워싱턴에 기념관이 세워진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소아마비 치료를 받으면서 3중고에 시달린 헬렌켈러 여사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채찍질하였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데, 그런 사람도 박사가 되는데, 나는 왜 못하느냐고 자신을 채찍질한 것입니다.
교육학에서는 어떤 위인을 목표로 하는 것을 역할모델이라고 합니다. 루스벨트는 헬렌겔러 여사를 역할모델로 삼았습니다. 루스벨트는 말합니다. "헬렌켈러가 해냈다면 나는 다만 양다리가 마비된 것뿐인데, 나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의 성취를 제한하는 것은 오늘의 의심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서 있는 목사가 여러분의 역할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죄송하기 짝이 없지만, 사도 바울을 역할모델로 삼아보세요. 사도 요한을 연구해보세요. 그런 위대한 사도를 여러분의 역할 모델로 정하시는 것입니다.
눈을 보지 못하던 우리나라의 강영우 박사가 미국에서 저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으로 학생 시절을 보내면서 사도 바울을 그의 역할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을 연구하면서 바울을 닮아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속에서도 세계적인 비전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 13권을 썼습니다. 그 중에 많은 책들은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힘쓰던 중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저작한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계를 품은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시대는 지금과 같이 교통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세계 인구 60억 중에 20억 이상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사도 바울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난에 대하여 긍정적인 해석을 내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질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않고, 자기에게 족한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약한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려고 힘썼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보면 그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아시아주 오늘의 터어키 서부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려고 부르기아 지방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다시 갈라디아 지방을 다녀가려고 하였습니다. 무시아라는 도시에서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 성령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드로아라는 도시는 항구도시요, 바다 건너편은 유럽으로 헬라의 북부로 마게도냐 지방이었습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아의 여러 곳을 가려고 하여도 이런 저런 사건과 형편으로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쪽 사정에 밝은 사람들을 대동하려고 하여도 사람을 찾을 수 없던지, 날씨가 좋지 않아 갈 수 없게 하던지, 그 쪽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기독교인들을 지독하게 핍박하든지, 복음 전하러 갈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습니다. 환상이란 말은 비몽사몽 간에 이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마게도냐 사람 한 사람이 서서 말하는데,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도 행전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은 우선 아시아 지역을 복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가 다 복음화되지 않았다고 하여도 유럽으로 건너가라는 것입니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한 지역이 완전히 복음화 된 후에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지금까지 한국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완전 복음화 되기 이전인데 하나님은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히브리인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히브리인의 독특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인류를 구원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헤브라이즘이라는 영성 문화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종교요, 기독교도 구약을 가지고 있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는 헬라의 철학과 사상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헬레니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이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가게 되므로 기독교회는 헬라의 철학이라는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사상과 학문에는 두 조류가 있는데, 하나는 헤브라이즘이라고 합니다. 헤브라이즘 즉 유대교의 사상과 영성은 내세 지향적인 영성의 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헬레니즘으로 합리적이고, 현세 지향적인 분석적인 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조를 하나로 접목시키는 일에 사도 바울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헤브라이즘의 사고를 가진 기독교를 헬레니즘의 사고로 바꾸어 준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책을 헬라어로 기록하였는데, 바로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헬라어로 기록되었기에 대단히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읽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를 논리화하고 교리화하고, 체계적으로 조직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신조가 그렇습니다. 니케아신조가 다 헬라의 철학적인 논리에서 나온 산물인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언제든지 로마에 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헬라에서 활동하게 하신 후에 로마에 가게 하십니다. 이것은 헬라의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선교 전략이냐고 하실 지 모르나, 선교는 하나님이 하게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면 선교는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의 여러 도시로 가려고 하였지만, 성령이 기뻐하시지 않았는데, 이제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았을 때에 하나님이 유럽 사람들,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줄로 알고 순종하여 유럽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시아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주므로 진정한 도움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도움은 유럽 사람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두니아로 가려는 사도 바울을 마게도냐로 보내시고 있습니다.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길은 닫기도 하시고 열기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아시아로 가려는 바울을 성령께서 어떻게 막으셨는지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어떤 핍박이 일어났다면 가지말고, 다른 곳에 가서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적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병을 가지고 있는데, 어디를 가려고 하면 병이 깊어져서 움직일 수 없게 하시다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는 건강을 주신 것으로도 보여집니다. 그래서 성령이 막으시는 것으로 새롭게 길을 열어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였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쓰고 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향하여 가는데, 중간에 기착지가 있어도 가고자 하는 목적지 빌립보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빌립보에는 하나님이 미리 두아디라 성의 자주옷감 장사로 부자인 여성 루디아를 준비해놓으셨고,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그의 집을 예배당으로 하고 빌립보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예비하십니다. 비전을 가지는데, 세계 평화를 향하여,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큰 꿈과 이상을 가져야겠습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환상을 보았는데, 기도하는 중에 보았을 것입니다. 기도하므로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절하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고, 큰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힘쓰고 애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대낮에 꿈만 꾸고 있는 몽상가는 아니었습니다. 확신을 가지기까지는 기도도 하고, 연구하지만, 확신이 섰을 때에는 힘쓰고 애를 쓰면서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는 강헌구 박사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1875년 미국 남캐롤라이나 주에서 흑인 노예 부부의 딸로 태어난 메리베툰(Marry Bethune)이 비전을 간직하게 된 것은 15살 때였습니다. 베툰이 주인 집 거실에서 어떤 한 책을 집어든 순간, 누군가가 "내려놔, 읽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딜 감히 책에다 손을 대는 거야"라는 힐난의 소리를 퍼부었습니다. 순간 베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백인 아이와 흑인 아이를 구별하는 기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배워야 한다. 글을 " 하고 마음 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두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집에서 8Km 떨어진 곳에 흑인도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생겼습니다.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곧이어 덴버 시에도 흑인이 공부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개설되자, 그 학교를 나오고, 시카고에 있는 무디 성경학교를 진학하였습니다. 그녀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숫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디성경학교를 다니면서 흑인 소녀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가슴 속에 그 꿈을 담아놓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었습니다. 졸업 후에 흑인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플로리다 주의 데이토나비취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낡은 2층 건물을 하나 임대하여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가구를 정리하였습니다.
개교하는 첫날 흑인 소녀 5명이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운영할 재정이 문제였습니다. 건물 계약금을 물고 나니 돈은 1달러 50센트만 남았습니다. 그때 마침 겨울 휴가 차 데이토나 비취에 온 부자 제임스 켐블이라는 사람을 만나 자기의 비전을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장차 흑인 소녀들을 교육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제가 온 것은 단순히 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캠블 씨, 우리 학교의 이사가 되어 주십시오. 저의 꿈, 이 학교의 꿈을 관리하는 이사 말입니다." 캠블이라는 사람은 이 젊은 흑인 여성의 간절한 꿈에 녹아지고 말았습니다. 부자인 캠블씨와 그 도시의 시장과 부동산 업자 한 사람, 그리고 두 명의 흑인 목사님이 학교의 이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 학교가 개교 50주년을 맞이하였을 때에는 낡고 초라한 2층 짜리 건물은 대지가 36에이커에 19개 빌딩을 갖춘 베툰 쿡먼 대학교로 변하여 있었습니다. 36에이커라고 하면 45,000평 정도 되는 넓은 땅입니다. 그리고 학생은 5명에서 출발하였지만 1,300명의 재학생이 공부하는 명문대학교로 변해 있었습니다. 지금 베툰의 이름은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습니다. 수 만명의 여성들이 베툰의 비전으로 인하여 밝고 희망찬 삶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비전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렵고, 나가야 할 문이 닫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비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사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인물로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또 한 사람의 사도 바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비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 됩시다
행 16장 6~15절 / 이동규목사
어디에 민감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그 삶이 결정됩니다.
사랑에 민감한 사람은 사랑만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끝내 고고한 학이 아니라 제비가 되었다나요?
돈에 민감한 사람은 돈만 찾아다닙니다. 돈줄이 보이면 전쟁터도 찾아 갑니다. 위험한 곳에서야 말로 확실하게 돈줄이 보인다나요?
권력에 민감한 사람은 선거철만 되면 출마하러 나옵니다. 선거철만 되면 들썩거립니다. 마약중독과 같데요. 그의 인생의 좌우명은 칠전팔기입니다.
어느날 공주병에 걸린 할머니가 양로원에 가는데 웬 청년이 트럭을 타고 따라오며 외치는 거잖아요?
“같이가 처녀!”
“설마 내가 아니겠지” 하고 계속 가는데 잘 생긴 청년이 또 부르는 거예요
“같이가 처녀!”
“드디어 걸려 들었구나” 생각한 할머니 보청기를 꺼내들고 귀에 꽂으니 또렷이 들렸습니다
“잘치가 천원”
이렇듯 관심의 방향에 따라 소리도 다르게 들립니다. 무엇에 민감해 있고 무엇에 관심해 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그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육에 민감한 사람은 육적인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영에 민감한 사람은 영적인 일에 더 신경을 씁니다.
우리는 오늘 영에 민감한 참으로 영적인 사람을 한 사람 봅니다. 그의 민감한 영적인 활동 때문에 세계사가 바뀐 것을 우리는 봅니다. 서양의 종교, 철학, 윤리, 예술, 문학, 예술, 정치, 건축.... 그 방대한 기독교 세계관과 문명을 구축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바울의 민감한 영적 행동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차 하면 놓쳤을 그런 영적 행동 때문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할 때에 육로로 전에 방문한 적이 있던 바시디아 지방의 도시들로 갔다가 브루기아를 지나서 무시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시아에서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했다(7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갔던 것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 (6-7절)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향하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바울은 영에 민감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민감한 지시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 성령이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6절)
“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지라” (7절)
뿐만 아니라 이제 더 구체적인 지시를 하는 겁니다. 환상으로 보이는 겁니다.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 (9절)
마게도냐는 유럽쪽입니다. 바울이 계획한 방향이 아닙니다.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곳입니다. 그러나 영에 민감한 바울은 지체하지 않고 성령의 이끌림에 따르고 순종하기로 합니다.
“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0절)
여기서 “곧” 이라는 것은 다음날 아침을 뜻합니다. 밤에 환상을 보고 다음날 아침에 곧 바로 떠나려고 하는 겁니다. 그만큼 영에 민감하고 철저히 실천하는 사역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드로아-사모드라게-네압볼리-빌립보 의 여정을 밟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빌립보에 도착하여 빌립보 교회를 개척합니다.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는 장면도 참 드라마틱 합니다.
강가에 기도처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잊을 수 없는 사람 루디아를 만납니다. 루디아는 이 만남으로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됩니다.
“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한 지라” (14절)
마음을 열게 한 이도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전무후무한 빌립보 교회가 개척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은 서양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 동안 서양의 종교가 됩니다. 서양의 문화와 역사, 생활과 철학, 예술을 강력히 지배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종교 세계의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발단도 영적으로 민감함 바울의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이 시키신 일입니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한 것입니다. 전혀 영적 (Spiritual)인 일입니다.
성령이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6절)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지라 (7절)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한 지라 (14절)
그래서 방향 선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내 의지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어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이렇게 성령에 이끌리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사역의 길은 이렇게 성령에 이끌리는 길이어야 합니다. 영의 사람이라야 만이 더 영적인 사실에 민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기운에 민감한 사람이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돈줄이 보이는 사람이 돈을 벌고요. 역사의 혜안을 가진 사람만이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영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석 도상에서 부활하신 영적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영적인 것은 영적인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2:13-14)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롬8:5-6)
영에 민감한 영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노아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육적인 사람들이 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쾌락 누릴 때 멸망이 올 줄 알고 방주를 준비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지시를 따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땅을 나누면서 롯에게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합니다. 롯은 육적인 눈으로 비옥한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척박한 땅 헤브론을 선택하고 어디든 하나님과 함께하는 땅이 축복의 땅임을 믿습니다. 결과 롯은 멸망하고 아브라함은 풍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의 사람과 육적인 눈의 사람의 차이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야곱은 욕심 많은 불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영적인 가치에 대해서만큼은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영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미리 깨달은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권 장자의 축복을 사모한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그 영적인 가치인 장자 축복권을 휴지조각처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그냥 팔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관점과 자세를 보신 것입니다.
엘리와 다윗의 법궤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다윗은 영적인 사람이고 엘리는 육적인 대처를 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성경에서 들자면 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라야 승리합니다.
영적인 사람이라야 현재부터 영원까지 (Now and forever) 성공합니다.
영적인 사람이라야 위대한 하나님의 진짜 축복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라야 사역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라야 위기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라야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육적인 사람이 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순간은 영적인 하나님과 사귀기 때문에 나도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수록 더 성령에 민감하고 말씀에 민감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개인 경건의 시간.. 갖은 기도의 접촉을 통해 그대는 이전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설교말씀을 여섯 번 우려먹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친구교회 교인이면 적어도 주일 설교를 네 번 정도 복습하게 됩니다. 주일 예배현장에서 듣습니다. 또 주일 설교문을 매주일 인쇄해서 나누어 주면 그것을 탐독합니다. 또 제작된 설교 테이프를 청취합니다. 그리고 소공동체에서 한번 나누고, 주간 성경공부반에서 또 한번 나눕니다. 이렇게 말씀의 소화력을 높이고, 또 성경공부반이나 양육과정에 전교인이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는 설교시간에 필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섯 번 설교를 복습하는 게 됩니다. 어쨌든, 이런 말씀의 집중을 통해 말씀의 사람이 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찬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은 그리스도인들을 더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찬양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찬양은 어두의 세력을 몰아내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찬양이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에 머물 때는 그 영혼이 순결해집니다. 찬양을 통해서 영혼의 강력한 에너지를 충전 받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친구교회 베스트 찬양 26곡을 정해서 자주 부르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방황할 때, 있는 모습그대로, 오예수님, 정결한 마음, 오늘집을 나서기전, 아침에나로, 오신실하신주, 내안에사는이, 주님과같이, 하나님은너를지키시는자, 왜, 넘지못할산이있거든, 약할때강함되시네, 주님여이손을, 주님손잡고일어나세요, 나의등뒤에서, 하나님은실수하지않으신다네, 찬양이언제나넘치면, 할수있다하신이는 예수의이름으로, 나무엇과도, 주께가오니, 주만바라볼지라, 나주님의기쁨디기원하네, 주님내가여기있사오니, 부흥2000, 가서제자삼으라, >
정말 어떤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찬양이 넘치면 우리의 영혼이 환해 집니다.
찬양이 언제나 넘치면 은혜로 얼굴이 환해요
성령의 충만한 모습을 서로가 느껴요
할렐루 할렐루 손뼉치면서 할렐루 할렐루 소리외치며
할렐루 할렐루 두손을 들고 주님을 찬양해요
기도와 말씀과 찬양으로 더 영적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에 둔감하면 패망이 옵니다. 영에 민감하면 승리의 사람이 됩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강력한 그리스도인입니다. (Spiritual Christian is Powerful Christian)
더 영적인 사람이되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되어 현재부터 영원까지(Now and forever)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되어 위대한 하나님의 진짜 축복을 따를 수 있기 바랍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되어 거침없이 사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되어 위기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되어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는 승리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래 여행을 위한 안전수칙
행 16장 6~15절 / 김흥규목사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여러분들이 식당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대개 셀류 폰을 사용하는 손님들을 위한 전용 룸이 있습니다. 자동차에 인터넷을 장착해서 차를 운전하면서도 수시로 이 메일 등을 첵크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손목 시계에도 인터넷을 장착해서 순간순간 이 메일을 첵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아마 몇 년 안에 모든 것에 인터넷이 부착되어서 만사를 집안에서 척척 처리하게 될 시대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입는 옷이 우리의 건강 상태를 스스로 알아서 첵크를 해주어서 이상이 생길 때마다 의사에게 이 메일을 통하여 알려 주게 될 것입니다. 냉장고들 역시 우리가 먹고싶은 음식을 자동으로 알아서 그 때마다 주문해서 배달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또한 스캐너는 우리 몸의 치수를 일일이 다 재어서 입을 옷들을 주문해줄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영화배우가 입고 있는 옷이 마음에 들 경우 스크린 화면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면 그와 똑같은 옷을 주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대학의 디그리를 학교에 직접 가지 않고서도 집안에서 공부해서 받게 될 것입니다.
실로 세상은 눈이 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서 단지 꿈만 꾸어 오던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아마 미래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여행과 같습니다. 그것도 수많은 변화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지 못하는 여행입니다. 우리는 2002년이라는 배를 타고 여행을 해왔는데 이제 이틀 후면 '2003년'이라는 새로운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떠나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든지 아니면 배나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든지 간에 승객들이 꼭 지켜야만 할 '안전수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전 벨트를 꼭 매야 한다든지 창문을 맘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안전수칙을 잘 지키는 승객들은 아무 사고 없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이제 2002년도를 마무리짓고 이틀 후면 '2003년'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여행을 떠나는 우리들은 한편으로 큰 기대감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불안감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도대체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영적인 안전수칙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세상의 풍파가 몰아쳐도 끄떡도 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기 위해서 안전수칙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모두 안전수칙을 잘 들으시고 지키셔서 새해의 여행이 안전하고 활기차고 유쾌한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바울 선교의 미래를 결정하신 하나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 유럽으로 진출해서 유럽 최초의 개종자인 루디아를 얻었고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건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자기 뜻대로 아시아 쪽으로 발길을 돌렸더라면 세계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유럽이 기독교 복음의 중심지가 아니라 아마 중국이나 한국이 중심지가 되어서 아시아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본문은 불확실성과 불안감 속에서 선교 여행을 시작하려고 했던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서 세계 역사의 판도를 바꾸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 가지 영적인 안전수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1수칙: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바울의 미래는 마게도냐, 즉 유럽에 있었습니다. 아시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 어느 곳으로 갈지 갈 바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는 한 번도 복음이 전파된 적이 없는 처녀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쪽으로, 즉 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터키의 수도권 지역인 안카라(Ankara)에 해당되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갔습니다(6절).
성령께서는 그 곳에서도 선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셔서 바울은 그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북서쪽인 무시아를 지나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지만 이마저도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7절). 이렇게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이 곳에서 바울이 선교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결국 선교를 포기하고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8절).
드로아는 오늘날로 말하면 터키 령에 해당되는데 고대 아시아 서쪽 해안 지역의 중요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바로 이 드로아 지역에서 바울은 세계 역사를 뒤바뀌게 한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9절을 보세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일곱 마디의 영어로 된 말씀, "COME OVER TO MACEDONIA AND HELP US." 마게도냐는 오늘날 그리스와 유럽, 등의 서방 세계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곳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 곳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누구와도 접촉한 적이 없었으며, 도대체 어느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전혀 아이디어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그의 미래를 맡겼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된 바울은 의사 누가와 실라 등 일행과 함께 주저하지 않고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게도냐의 첫 성이요 가장 큰 도시였으며 로마의 식민지였던 빌립보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빌립보는 군사적인 전략지역으로서 제대한 로마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많이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어를 썼으며 로마 옷을 입었고 로마 음식을 먹었습니다. 로마가 그 당시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지역을 복음화 시키기에 다시없는 선교적 요충지가 바로 빌립보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빌립보 지역에서 바울 일행은 유럽 최초의 개종자로서 장차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세울 일꾼, 루디아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해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주장하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는 인간적인 뜻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 길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미래를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서방 세계, 즉 유럽으로 가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하여 먼저 유럽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셨고 세계 복음화의 관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미래를 자기 맘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 세계 복음화에 큰 장애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영국의 철학자요 정치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73)은 아버지 제임스 밀로부터 아주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비범함과 명석함을 진작부터 알아차린 아버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예술, 과학, 철학, 역사 등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게 해서 그 당시에 받을 수 있었던 최고의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독교 신앙서적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읽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적으로 어떤 영향도 받지 못하도록 막아버렸습니다. 그 결과 존은 나중에 큰 학자는 되었지만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 같은 공허감과 패배감 같은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존은 영적인 것에 심하게 굶주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존은 기도와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않고 살아온 자기 자신을 '훌륭한 시설을 갖춘 배이긴 하지만 아무 돛도 달지 않은 배'--'a well-equipped ship, but with so sail'--와 같다고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않는 삶은 온갖 훌륭한 시설을 다 갖추었지만 돛을 달지 않은 배와 같다 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추었어도 돛을 달지 않으면 배는 나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우리의 미래를 맡기지 않으면 우리는 앞을 향하여 바르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2003년 한 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하려고 하지말고 미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의 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제 2수칙: 「매일 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판단과 결정은 실수가 많습니다. 지금 당장에는 좋은 것 같으나 먼 미래에는 불리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면 지금 당장에는 손해가 되는 것 같으나 미래에는 축복된 일이 많습니다.
바울은 브루기아에 있었을 때까지 무시아로 가야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무시아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이 드로아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로아에 갔을 때에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 지역에 들어가서도 루디아라는 여성이 있는지 여러 날 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안식일이 되어서 우연히 강가로 나갔다가 그 곳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임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십시오. 성령님께서 바로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자주 만드십시오. 매일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을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려면 라디오는 켜져 있어야 합니다. 전원이 반드시 켜져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라디오가 꺼진 상태에서는 라디오 소리를 들을래야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전원이 꺼져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적으로 기도하고 주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서 영적인 라디오의 전원이 언제나 켜져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 3수칙: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들었으면 순종해야 합니다. 지난 2002년도에 우리는 실패한 일도 성공한 일도 있었습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습니다. 올라갈 때도 있었고 내려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만났든지 간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내 뜻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바로 그 때가 최고의 날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난 경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신기합니다. 그들은 전혀 우연히 시내를 빠져나가 지칵티스(Zygaktis) 강으로 갔습니다. 혹시 안식일에 기도처, 즉 유대 회당이 있나 싶어서 찾던 중 강가로 나갔던 것입니다. 아마 빌립보에는 유대 회당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이 최소한 10 명 이상이 있어야지만 유대 회당을 만들 수 있다는 규정으로 보건대 이 지역에는 유대교 신자들이 많이 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가로 나갔는데 그곳에서 루디아를 비롯한 여자들을 전혀 우연히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마 이 여자들은 유대교 신자들로서 안식일에 모여서 기도하고 애찬을 들기 전에 정결 예식을 하기 위해서 강가에 모여 앉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들이 유대교 신자들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단지 안식일에 구애받지 않고 빨래를 하기 위해서 그곳에 모여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간에 이 여자들이 왜 안식일에 강가에 모여 앉아 있었는지 성경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루디아는 자주색 옷감을 취급하는 여성 기업가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14절). 자주색 옷은 그 당시로서는 최고로 비싼 옷이었는데 왕이나 귀족들, 혹은 부자들만이 입을 수 있었던 고급 옷이었습니다. 따라서 루디아는 틀림없이 빌립보 성에서 영향력이 매우 컸던 여류 인사였을 것입니다.
루디아는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를 듣고 즉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서 바울의 말에 청종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결국 루디아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초청해서 온 집안 식구들이 세례를 받았고 억지로 머무르게까지 했습니다. 세례 받은 후에 아주 적극적인 기독교 신자로 변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바울 일행이 편안히 복음을 전하도록 모든 숙식까지 책임져 주었다는 것이지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큰 부자요 영향력 있는 여류 명사 루디아의 도움으로 빌립보 지역의 선교는 훨씬 더 수월하게 착착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유럽 최초의 결신자인 루디아와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강가에 앉아 있는 여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우연히 하나님의 뜻에 바울 일행이 순종했을 때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다 아셔서 저절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힘써 전하는 것일 뿐 인간의 영혼을 건지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신 것입니다.
윌리엄 보덴(William Borden)은 엄청난 낙농장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지만 모두 포기하고 중국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선교 목적지인 중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집트에서 척추 뇌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실패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보덴은 죽기 전에 자기 인생의 모토를 종이 쪽지 위에서 써서 남겼습니다. "주저하지 말라!"(No Reserve!) "물러서지 말라!"(No Retreats!) "후회하지 말라!"(No Regrets!)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보덴의 모토에 영향을 받고서는 세계 선교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보덴이 살아서 인도했을 숫자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2003년도에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뜻을 기꺼이 이루어드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닫는 말: 승리하는 '2003' 여행이 되게 합시다>
바울 일행이 아시아로 가려다가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로 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미래를 다 맡기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유럽에서 일어날 엄청난 일들의 터를 닦게 하셨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지으며 새로운 여행을 떠나시는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수칙을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미래를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십시오. 그리해서 2003년도의 여행 역시 안전하고 유쾌한 여행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혼과 마음과 손이 열린 루디아
행 16장 6~15절 / 김명혁목사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들 중 중요한 일은 닫힌 것을 여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의 영혼을 열고 사람들의 손과 발을 엽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사마리아로 가는 길을 열었고 가이사랴로 가는 길을 열었으며 마게도냐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은 성령께서 오셔서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로 가는 길을 여셨고 그리고 그곳에서 자주 장사하던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닫힌 것을 여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마음과 손과 발을 조금씩 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꽉 막힌 사람, 꽉 닫힌 사람을 성령님은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마음이 닫혀서 교제도 하지 않고 입이 닫혀서 말도 하지 않고 손이 닫혀서 악수도 하지 않는 사람을 성령님은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열린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이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발도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래는 소아시아의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음을 열고 발을 열어 유럽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손과 발이 열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도행전 역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또 한 사람 등장합니다.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유럽의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자주 장사 루디아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가 어떻게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수가 있었습니까? 물론 성령께서 역사했기 때문이었고 사도 바울이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디아의 역할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루디아는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할 때 루디아는 영혼을 열었고 마음을 열었고 손과 발을 열었습니다.
첫째 루디아는 영혼을 열었습니다.
루디아는 소아시아 두아디라에서 온 이방인 여자였습니다. 루디아는 자주 천 장사하는 사업가였습니다. 그 당시 자주 천은 왕실이나 상류층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아주 비싼 천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사업에 성공했고 어느 정도의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크고 좋은 집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죽었지만 자녀들을 거느리고 여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루디아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공허했습니다. 몸은 평안했지만 영혼의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디아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기도처소에 가보곤 했습니다. 빌립보에는 아직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빌립보에 와서 살던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빌립보 강변 나무 그늘에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들을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 안식일마다 강변 기도처소에 가서 영혼을 열고 하늘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특별한 사람들 몇 명이 와 있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온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 일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배를 타고 네압볼리에 상륙해서 빌립보성에까지 왔지만 아무도 그들을 맞아주지도 않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며칠을 그곳에서 지나며 고민하던 끝에 그들도 하늘을 향해 영혼을 열고 기도하기 위해서 강변으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영혼을 열고 하늘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루디아의 열린 영혼을 보셨고 사도 바울의 열린 영혼을 보셨습니다. 마치 옛날 야곱의 열린 영혼과 한나의 열린 영혼과 바벨론 강변 이스라엘 포로들의 열린 영혼을 보셨듯이 지금 빌립보 강변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루디아와 바울의 열린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두 영혼이 서로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바울이 루디아를 만났고 루디아가 바울을 만났습니다. 모든 일은 만남에서 시작되는 데 두 사람이 서로 만났습니다. 영혼이 열린 두 사람이 서로 만났습니다.
둘째 루디아는 마음을 열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을 열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게 했지만 루디아도 자기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께서 마음을 열도록 감동을 하지만 끝까지 굳게 닫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마음과 귀를 열고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루디아는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자기의 선한 의지로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을 들었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14). 주님이 내 마음을 열어주시지만 내 마음을 여는 것은 나 자신의 의지입니다. 계3:20에 보면 우리의 마음을 열도록 두드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루디아는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에 마음이 열리고 진리에 마음이 열리고 예수님에게 마음이 열린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사용하십니다. 바로 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활짝 열고 눈물로 말씀을 받아드립니다. 그런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회개하고 믿으라고 하면 믿고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고 봉사하라고 하면 봉사하고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하고 헌신하라고 하면 헌신하고 겸손하라고 하면 겸손하고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변에서 온 가족과 가솔이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는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루디아는 손을 열었습니다.
마음을 연 사람은 손을 열게 됩니다. 손을 연다는 것은 도움의 손을 편다는 말입니다. 손을 연다는 것은 지갑을 열고 집을 연다는 뜻입니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을 폈고 지갑을 열었고 집을 열었습니다.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15). 루디아는 사도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에 들어와 유하게 했습니다. 마지 못해서 한 것이 아니라 강권해서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루디아의 손이 열리되 인색하게 조금 열린 것이 아니라 크게 넓게 활짝 열렸습니다. 두 사도가 옥에 갇혔을 때는 루디아가 옥을 방문하여 사도들을 찾아보고 음식을 대접하며 위로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루디아는 자기 집을 교회로 삼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40).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공통적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열었고 손을 열었습니다. 지갑을 열어서 서로 도와주었습니다. 집을 열어서 나그네들과 전도자들을 대접했습니다. 자기 집을 교회로 삼았습니다. 요한 삼서에 나오는 가이오는 자기의 집을 열어 나그네와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대접했습니다. 부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자기의 집을 열어 형제들을 영접하고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로 삼았습니다. 사실 초대교회들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집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누구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고전16:19). "나와 온 교회의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롬16:23).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4:15). 손을 열고 집을 연 사람들의 이름이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루디아는 손을 열고 집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로 삼았습니다. 바로 루디아의 열린 손과 열린 집이 유럽 복음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수많은 유럽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 루디아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업가였습니다. 그가 유업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던 비결은 그가 열린 사람이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의 성품과 기질이 열려 있었습니다. 영혼이 열려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마음이 열려서 바울의 말을 청종했으며 손이 열려서 물질과 집을 내어 놓았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다도 마음이 열리고 손이 열리고 집이 열린 사람들이었지요. 지금도 마음과 손과 발이 열려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가서 마음과 사랑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우리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활짝 열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꽉 닫혀있어서 말도 하기 싫고 악수도 하기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음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었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었고 수가성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사마리아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고 루디아는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과 저도 마음을 활짝 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게도냐인의 환상
행 16장 6~15절 / 손상률목사
세기의 전도자 바울은 그가 평생에 이루어 놓은 선교의 업적을 기록하면서 그 이면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으신 배려와 간섭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때 되어진 사건으로써 그가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배경을 소개한 것입니다. 전 후 네 차례에 걸쳐 해외 선교를 했던 바울은 그 중에도 두 번째 여행 때 되어진 극적인 사건을 매우 인상깊게 그려놓았습니다. 아시아 사람인 그가 에게해를 건너서 유럽으로 원정을 가게 된 것은 전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것은 또한 아시아가 발원지인 기독교가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되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세계 문화사에 있어서 그 판도를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의 초점은 마게도냐인의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눈에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여주셨고, 그 귀로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소리를 듣게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보여진 마게도냐인의 환상은 자기의 계획을 성취코자 하는 하나님의 비상 수단인 것이며, 동시에 이 땅 위에서 주님의 교회가 전개하는 하나님 나라운동의 비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Ⅰ. 인위의 장벽을 허물게 하는 것입니다.
원대하신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 있어서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들의 계획 때문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의도에 상관없이 자기의 신앙이나 열심만 가지고 어떤 일을 수행하려 할 때 성공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쳐 놓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16:24). 언제나 주님의 기쁘신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됩니다.
본문 말씀 6-7절에 보면 바울의 의도하는 일에 성령께서 그것을 막으시고 차단시켜 버립니다. 그리고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하였습니다(9-10절). 이는 바울의 선교사역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으로서 전자는 소극적으로 후자는 적극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거리낌이 되는 인간적인 장벽을 허물어야됩니다.
(1) 지역의 장벽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고자 하는 비두니아는 갈라디아와 인접한 곳으로써 소아시아 내륙지방에 있는 지명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전도하고자 애를 쓰게 된 것은 아마 지방색에 대한 그의 본심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고 바울이 공부하여 자란 곳 이스라엘이 아시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출생지인 길리기아 다소는 오늘날 터키의 남쪽에 있는 도시로 그 당시에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요 경제적으로도 매우 번영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그가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 랍비 가말리엘에게 학문을 배운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행22:3).
이처럼 자기가 흠모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곳에서 전도하고 활동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오대양 육대주 어디에나 구별 없이 그가 영광을 받아야 될 곳이며 복음이 펼쳐져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류가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창1:28), 또한 어디에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기를 원하십니다(마28:18-20).
(2) 종족의 장벽입니다.
어릴 때부터 유대주의 율법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바울은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동족에 대한 관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훗날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였고(갈2:8), 유대인 율법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기도 하였지만(행14:19), 그래도 그의 마음 속에는 유대인으로서 민족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서 9:3에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1-4에 보면 헬라인을 아버지로 둔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사도와 장로의 규례를 지키게 한 것도 동족을 의식하는 배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롬10:13).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유대인이 아닌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3) 사고의 장벽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하였습니다(고후5:17).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개성과 철학에 따라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경륜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의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으로 몰아붙일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자기 열심만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 인줄 생각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갔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손에 붙들려 그 방향을 돌려놓고 말았습니다(행9:1-9).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 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을 받는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장벽을 허물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딤전1:13-14).
Ⅱ. 성령의 주도하심에 이끌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사람이 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행1:8).
(1) 선교의 주체는 성령입니다.
본문 말씀 6절에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더라고 말했습니다. 7절에는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9절에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볼 때 바울의 전도 사역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요14:25).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려 할 때 그 전개되는 과정을 통하여 성령이 개입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길이 막히고 또 한편 전혀 생각지도 않는 쪽으로 길이 열리며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등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아니했던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 임금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6:1).
(2)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불러서 그의 뜻을 알게 하실 때는 그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앞으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애굽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을 구출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하며 한사코 사양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통해서 이적을 행하게 하시며 모든 능력의 실제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였습니다(출4:1-7). 스가랴 4:6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다른 일들을 재물이나 권력이나 기술이나 사람이 가진 조건만으로 성사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신령한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평생 동안 이루어 놓은 실적들을 돌아보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빌4:13).
(3) 성령의 뜻을 수용하여야됩니다.
본문 말씀 10절에는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에 민감하여야됩니다(롬12: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계시 사역의 실제가 육신의 눈이나 귀만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눈과 귀로써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4). 하나님께서 간혹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주시거나 또는 통상적인 삶 가운데서 그의 의도를 살피도록 작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마5:8). 깨어 있는 성도는 항상 열려져 있는 마음으로 계시의 환상을 분별하는 자이며, 또한 그것을 실천하므로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Ⅲ. 웅대한 하나님 나라의 환상입니다.
어느 때에나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그 일에 수종 드는 사람은 자기 속에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품고 사는 자입니다. 구약시대의 경우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사야는 동정녀의 몸에서 나시게 될 임마누엘의 예언을 통하여 메시야의 환상을 나타내었습니다(사7:14). 그는 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하였는데(사60:22), 이는 멀리 신약교회가 지니고 있는 선교의 비젼이기도 합니다.
여기 본문 성경에 나타나는 바울의 경우도 세계 선교의 환상을 품고 그 뜻을 펼쳐나갔던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웅대한 선교의 비전을 구상하셨고 이를 지상 교회를 통하여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환상을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창조 주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게 하는 일을 그의 역사 경영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죄와 구원의 도리를 전파하고 그 열매를 거두게 하는 일을 자기 교회의 사명으로 맡기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놓은(요19:30)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상대하여 믿어 구원 얻게 하는 이 사역이 바로 교회가 안고 있는 선교적 사명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하신 선교적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교회는 복음의 환상을 가진 교회입니다.
(2) 하나님의 전략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말하고 있으나(엡1:4-5), 그 방법은 선교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선택하시고 이들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의와 공도의 표본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창18:19). 하나님의 선교 전략에 있어서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에서부터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며(마10:6), 지역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로 확대하게 하신 것입니다(행1:8).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기 선교의 과정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 받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복음의 불길이 사마리아를 거쳐(행8:14)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번져갔습니다(행11:19-26). 사도행전 13:3에 보면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하여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는데 그들이 제 1차 전도 여행을 통하여 소아시아 일대를 석권하였습니다(행14:1-28). 그 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때 하나님께서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이시며 그로 하여금 에게해를 건너서 유럽에 상륙하도록 작용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1-12절에 보면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복음의 행진이 유럽의 첫성을 교두보로 삼아 세계 심장인 로마를 점령한 후 세계를 석권하게 하였습니다. 곧 시간적으로는 세상 끝까지, 공간적으로는 온 세계 어느 곳이나, 그리고 대상은 모든 족속이라는 하나님의 전략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3) 신비로운 결과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롬1:16). 그는 또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했습니다(롬1:17). 이는 복음의 신비로운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불가사의한 신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여준 하나님의 싸인에 따라 빌립보에 들어간 바울과 그 일행은 그곳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크게 놀라고 기뻐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의 설교를 들은 루디아가 예수를 믿고 그 집이 세례를 받았습니다(15절). 또 저자거리에서 귀신들려 점하는 소녀가 예수를 믿었습니다(18절).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갇혀 있는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릴 때 간수가 무릎을 꿇면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하고 회개하였습니다(30절). 결국 그도 회개하고 주 예수를 영접하여 저와 그 가족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구라파의 모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신비로운 능력을 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막으실 때
행 16장 6~15절 / 이삼규목사
미국 알라바마주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라는 소도시에는‘목화 벌레를 위한 기념탑’이라는 돌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1895년, 그 해는 알라바마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비극적인 해였습니다. 금년도 우리 나라가 잦은 비와 태풍으로 농사가 최대의 흉작을 예상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다가 온 것입니다. 그것은 난데없는 목화벌레 떼들이 유난히도 들끓기 시작하여 그들의 주요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목화밭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그 해의 목회 수확은 평년작의 3분의 1도 되지 못했습니다. 실직자들이 속출하고 도산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생겨나고 이것이 파급되어 다른 경기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주로 이사를 가는가 하면 굶는 자와 병든 자들, 일자리를 구하려는 실직자들로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정부와 남아 있던 농민들은 이 피폐에도 실망하지 않고 목화밭에서 목화를 뽑아내고 대신 땅콩과 감자, 옥수수를 서둘러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알라바마주는 세계적인 땅콩 산지로 변했으며, 차츰 세계적인 목화 산업, 즉 무명 옷감 대신 값싼 화학 제품의 옷감으로 대체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든 목화 산업 대신 일찍 다른 작물로 변농한 첫 번 주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가장 부정적인 목화 벌레를 인하여 긍정적인 결실을 얻은 엔터프라이즈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을 재판소 앞에 목화 벌레를 위한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그 돌에는“우리는 목화를 갉아먹었던 벌레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이 벌레는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주었고, 하면 된다는 신념을 주었다. 목화 벌레들이여, 다시 한 번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를 바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지금 상당히 위기 상황에 처하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WTO 협상 때문에 우리 고장 출신이 멕시코 협상하는 현지에서 할복자살을 하여 농민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주는 사건이 지난주간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앞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성령께서 가는 길을 막으실 때 우리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령께서 막으실 때(6-7)
오늘 읽어드린 본문을 보면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 일행은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를 돌아보고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라는 청년을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울의 선교 목적지는 '아시아'였습니다. 그 당시에 아시아는 오늘날에 말하는 아시아가 아닌 터키 안에 있는 하나의 속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소아시아의 중요 요충지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중심도시 에베소는 그 당시 최고의 정치, 교육, 문화, 경제를 주름잡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두란노와 같은 유명한 서원이 있어서 철학자들의 강의나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바울의 계획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계획은 훌륭하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하자도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지역을 복음화 하려면 먼저 그 지역의 중심 되는 도시를 공략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약 3년 가까이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 더욱 바울의 의도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 성령께서 막으셨을 까요?
본문에는 또 다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아시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으셔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서 무시아 앞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봅니다. 바울 사도 일행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 곧 성령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애쓰되'라는 말은 '어떤 일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해보다' try, '시도하다, 기도하다' attempt를 의미합니다. 한 두 번 시도해보고 금방 끝낸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시도해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앞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바울은 어떤 자세로 주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까? 그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에서 전하지 못하게 하시니 무시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두니아에서의 복음 사역도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드로아는 그 당시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구도시입니다. 지금은 배로도 건너갈 수 있고 다리가 놓여 육로로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이 항구를 통하여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저도 그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보았기 때문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를 향하여 떠날 때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바울 사도 일행이 아시아에서 또는 비두니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하였는데 막으신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사역의 우선 순위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바울이 생각하기로는 아시아나 비두니아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보다 더 시급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앞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실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는가를 살피십니까? 바울은 드로아로 내려갔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성령께서 이 길도 막으시고 저 길도 막으셨는가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있다면 얼마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겠습니까?
무조건 하나님의 일이라면 밀고 나가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의 우선 순위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더 시급한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먼저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성령께서 열으실 때(9-10)
성령님은 두 가지 일을 병행하십니다. 한 길을 막으시면 다른 길을 열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일행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지만 허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섭리였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여기서 바울 일행은 조금도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과 계획은 막혔습니다. 이것은 바울 일행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막힌다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잘못된 것이 없는지 반성하고 고치는 것은 좋지만 분명히 옳은 자세로 일하는 데도 막힐 경우에는 하나님의 다른 섭리나 뜻이 없는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선교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야 선교할 수 있었고 또한 성령의 인도 속에 선교사역을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이것이 다시 확인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인간이 자기 계획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 속에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는 하나님의 인도 속에 꾸준히 진행됩니다. 선교를 하다가 잘 안 된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가장 적절하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이 드로아에 내려갔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드로아에 내려갔을 때 밤이 되었습니다. 밤에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바울은 이 환상을 본 후에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시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나가는 비전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 나갔다면 그는 아시아에서 자기 사역을 마쳤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로마까지 가서 세계 복음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깨닫고 보니 더욱 더 겸손히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한 사역의 비결은 그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래 "타락한 존재"임을, "무능한 존재"임을 철저하게 시인하며, 고백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배경과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 겸비하여 주님을 구하였기에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늘 자신에 대해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곤고한 자입니다' '나는 죄 때문에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고민에서 나를 건져 줄 수 있겠습니까?' 그 자신의 힘으로 그 어떤 것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그는 영광의 십자가 능력 앞에 자신을 무릎 꿇었던 것입니다.
10절 후반부를 다시 보십시오.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인정함이러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이 유럽의 첫 성인 마게도냐에 있음을 깨닫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시아로 가려는 바울의 의도는 그 자체로 선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선한 의도를 하나님의 계획 앞에 꺾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은 항상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의 결정을 하나님의 결정으로 오인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결정, 선한 의도로 내린 결정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나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의 우선 순위는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도 하나님은 순서를 정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성령의 음성이라면 순종하기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 체면과 유익을 당장에 손상시킨다고 할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까?
1)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잠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왕상 18:37 '엘리야가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을 돌리시는 분은 하나님이라'
2)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3. 성령님의 인도를 따른 결과(11-15)
바울 사도 일행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직행하여 빌립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성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첫 번째 맺은 전도의 열매가 있습니다.
행 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마게도냐로 왔을 때 유럽 전도의 첫 번째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열심히 전도하였다고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았다고 하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따르게 되니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영혼을 그에게 부쳐 주셨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감동하신 성령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성령께서 앞길을 막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앞길을 열어 주실 때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막으면 우리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럴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의 탄생은 루디아의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 여인의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놀라운 유럽 전도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 모든 역사는 바울이 철두철미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을 위하여 무슨 사역을 하든지 아니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때로는 앞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 맺혀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르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가에게 본받을 점
행 16장 6~15절 / 박봉수목사
중국 고사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있습니다. ‘섶에 누워 자고 쓰디쓴 곰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는 뜻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왕 합려가 월나라 왕 구천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들 부차는 겨우 살아 돌아와 복수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면서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를 공격했는데 이 때 부차가 승리했습니다.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여기서 와신(臥薪)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월나라 왕 구천이 항복했고, 오나라의 속국이 되기로 하고 간신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는 돌아오자 자리 옆에 항상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거나 눕거나 늘 이 쓸개를 핥아 쓴 맛을 되씹었습니다. 그리고 회개산에서의 치욕을 기억하며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구천이 기어이 오나라를 쳐서 이기고 부차를 자살케 했습니다. 여기서 상담(嘗膽)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합쳐져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이 고사가 중국에서 영화화 되었는데 영어 제목으로 “The Great Revival”(위대한 재기(再起))라 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처참하게 무너지고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인생을 끝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와신상담입니다. 장작더미에서 자고 쓸개를 핥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다시는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반드시 성공할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생활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와신상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실 때 기어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와신상담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와신상담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혼자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와신상담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와신상담은 그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와신상담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와신상담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이 하나님 앞에서의 와신상담의 예가 여럿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마가입니다. 이제 마가의 삶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와신상담이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가의 실패
마가는 남다른 신앙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일찍이 청년시절 직접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음 좋고 부유했던 어머니 마리아가 집을 모임 장소로 개방했습니다. 그 덕에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자기 집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덕에 자기 집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었고 신앙지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처음부터 주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그의 초기 모습은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행 13:1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여기서 요한은 행 15:17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바로 마가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서 의욕을 가지고 전도 여행에 났다가 도중에 하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바울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마가를 두둔하는 동역자 바나바와 의가 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마가가 도중하차 한 것은 일행의 전도사역에 큰 해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가의 도중하차는 신앙적인 실패였습니다.
그러면 마가는 왜 도중하차했을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마가가 향수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부자 집 아들로 늘 엄마 품에 자라다가 먼 외국에서 그것도 오랜 세월 체류하다보니 엄마도 보고 싶고 고향이 그리워 견딜 수 없어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너무 고생스러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여행하고 있는 지역은 너무 힘이든 지역이었고, 앞으로 그들이 가려고 하는 곳은 더 힘든 곳입니다. 그런 사실을 안 마가는 고생 모르고 자라 온 터라 두려워서 도중하차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마가는 신앙적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렸습니다. 지도자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크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신앙적 실패가 마가만의 일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이런 신앙적 실패는 정직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일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다른 믿음의 형제들을 힘들게 한 일들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을 실망시킨 일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적 실패는 저의 일이요 여러분의 일이요 우리 모두의 일인 것입니다.
마 26:75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두려워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론 우리도 베드로처럼 울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울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쓰디쓴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재기
마가는 실패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 초기에 도중하차했었지만, 2차 전도여행에 다시 동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때가 약 2년여가 지난 뒤였습니다. 이 때 바울이 거절해서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에 올랐습니다. 물론 이 때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10년여가 흘렀습니다. 마가는 로마에서 바울을 다시 만났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동안 마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몰라보게 성숙해진 마가를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를 아주 가까운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골 4:10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편지에 썼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는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또한 몬 23을 보면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고 썼습니다. 아울러 딤후 4:11을 보면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디모데에게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이런 기록들은 마가가 더 이상 신앙의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가가 옛날의 마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뒤 마가는 베드로를 돕게 됩니다. 베드로의 통역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마가를 “사랑하는 내 아들 마가”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벧전 5:13) 그리고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써서 초대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마가는 더 이상 신앙의 실패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실패를 딛고 재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패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그 실패를 관리하고 처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존 맥스웰이라는 분은 [실패를 딛고 전진하라(Failing Forward)]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실패해도 괜찮다. 성공한 사람들은 많은 실패를 딛고 일어섰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실패하지 않는 보통 사람이 되지 말고, 실패하는 성공자가 되라! " 그러면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지만 자신을 실패자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실패를 딛고 전진하는 7가지 능력은 이런 것입니다. (1) 실패를 인정하되 거절하며 노력하는 계기로 삼는다. (2) 실패를 영원히 곤경에 빠뜨릴 구덩이가 아닌 일시적인 것으로 본다. (3) 실패를 평생 따라 다니는 전염병이 아닌 순간적인 사건으로 본다. (4) 실현 가능한 기대를 갖고 그에 따르는 노력과 대가를 치른다. (5)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장점에 초점을 맞추어 계발하고 극대화 시킨다. (6) 성공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을 찾고 시도한다. (7) 잘못이나 실수, 실패 후에도 금방 회복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는 우리 모두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한 과정입니다. 실패가 찾아왔을 때 나를 실패자로 간주하지 마십시오.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실패를 딛고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이렇게 실패를 딛고 앞으로 전진할 때 와신상담이 필요한 것입니다. 실패를 딛고 앞으로 전진하려 할 때 “섶에 눕고, 쓸개를 핥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마가의 와신상담
마가가 실패를 딛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그 자신의 와신상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가의 와신상담은 마가 혼자 이루어낸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마가의 와신상담 속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주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마가가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추정해 볼 뿐입니다.
막 16:20을 보면 마가가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마가는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도 늘 제자들과 함께 하셔서 제자들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심을 목격했고, 또한 자신과 함께 하심도 체험했음이 분명합니다. 자신이 실패의 자리에 주저앉아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능력을 팔을 펴셔서 일으켜 주셨음을 체험했음이 분명합니다. 마가의 와신상담 그 한 복판에 찾아오셔서 그를 도와주셨음이 분명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는 CCM곡이 있습니다. 이런 가사 내용이 있습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자국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실패해서 힘들고 낙망하고 넘어져 있을 때, 우리가 실패의 늪을 헤매며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 주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찾아오셔서 손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그 손을 잡으십시오. ‘와신상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행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때 모여 오로지 기도에 전념했던 사람들의 수가 120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였던 곳 그곳이 바로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행 12을 보면 야고보 사도가 순교했고, 베드로 사도가 옥에 갇히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 때 성도들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베드로가 풀려났습니다. 그 때 저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던 그곳이 바로 마가의 집이었습니다.(행 12:12)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기도의 자리에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녀 주변에는 늘 기도의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교회의 대소사에 기도로 뒷바라지하는 기도사역자였던 것입니다.
마가는 바로 어머니 마리아와 기도사역자들의 전폭적인 중보 기도의 지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기도의 힘이 마가로 하여금 실패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게 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뜻 밖에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한 분이 평소와 다르게 제게 다가와 손잡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 아시죠? 힘 내세요” 마치 제가 힘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안에서 힘이 솟구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분을 보내셔서 저를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힘들 때 적극적으로 기도 부탁을 하십시오. 중보기도의 도움으로 와신상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마가에게는 든든한 후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외삼촌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그렇게 도중하차하여 자기들을 힘들게 했지만 다시 도전하는 마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다시 기회를 준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도록 뒷바라지를 아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가를 위해 예비해 두신 사람입니다.
왕상을 보면 엘리야가 여러 차례 힘겨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때로는 생각지 않았던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릿 시냇가에서는 까마귀를 통해서까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셨고 필요할 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그 도움의 손길의 도움으로 와신상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실패가 찾아올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실패를 딛고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와신상담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함께 와신상담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