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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상임감사에 김영덕(47) 법무법인 홍윤 수석변호사, 상무이사에 김은호(55) 전 우리은행 이사대우, 이사에 한승엽(58) 전 S&T중공업 상무이사를 각각 선임했다.
이 신임 사장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신문에 입사해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이 신임 사장은 또 남해화학 사외이사, 경기대 초빙교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이사, 삼성언론재단 미디어연구위원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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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서!!
105년의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공익정론 서울신문에는!!
이제 더이상의 낙하산인사는 없습니다!!
다만 국민이 원하고 시대가 바라는!!
정의의 인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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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서울신문사 사장 이동화씨 감사 김영덕씨, 상무 김은호씨, 이사 한승엽씨 | ||||||||
또 비상임감사에 김영덕(47) 법무법인 홍윤 수석변호사, 상무이사에 김은호(55) 전 우리은행 이사대우, 이사에 한승엽(58) 전 S&T중공업 상무이사를 각각 선임했다. 이 신임 사장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신문에 입사해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이 신임 사장은 또 남해화학 사외이사, 경기대 초빙교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이사, 삼성언론재단 미디어연구위원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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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대한매일신보 (1904.7.18~1910.8.28)
구한말 민족구국지였던 대한매일신보가 서울신문의 전신이다. <런던 데일리 뉴스> 의 특파원인 베델이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일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신문창간을 계획하고 1904년 6월 29일 견본판을 만든 뒤 본격적으로 창간했다. 당시 1만부가 넘는 초대형 신문으로서 사주가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항일기사를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版)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양기탁이 편집과 경영의 실질적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이 신문의 중요 논설은 대부분 그가 집필했고 박은식, 신채호등 애국지사들의 논설도 실었다. 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운동에 앞정섰다. 이 신문은 향리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고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애국계몽운동에 크게 이바지 했다. 애국가사도 많이 실어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뿐 아니라 매국적인 친일 세력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 신문은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한 발자취일 뿐만 아니라 언론사, 문학사, 독립운동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자임하였으며 간교한 통감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 1910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강제매입당하기 이전까지 끊임없는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의 부당성,그리고 일제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여 당시 무지했던 다수의 조선백성들이 신문을 보고 구국적 민족투쟁 전선에 뛰어 들게끔함으로써 우리의 저항적 민족성을 보여주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발행 초기에는 발행인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어느정도 피할수 있었으나 1908년 신문지법이 개정되어 탄압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베델은 1908년 6월 재판에 회부되어 금고형을 받기도 했다. 베델이 일제의 탑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베델이 죽고 난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제2기 매일신보(1910.8.29~1945.11.10)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통합시켜서 《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 밑에 두어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되었다. 1920년 초까지의 무단정치 기간에는 《매일신보》가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으므로, 이 신문에 이인직(李仁稙)·조중환(趙重桓)·이해조(李海朝)·이상협(李相協) 등이 신소설 또는 번안소설을 발표하였고, 이광수(李光洙)가 처녀작 《무정(無情)》 《개척자(開拓者)》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지가 창간된 후로는, 민족지와 대립된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편집국을 《경성일보》 편집국에서 분리시켰고, 193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부사장이 임명되었으며, 1938년 4월 16일 《경성일보》에서 완전 독립된 주식회사가 되었다. 이와 함께 제호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바꾸고 최린(崔麟)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자매지로 《월간매신(月刊每申)》(1934.2) 《매일신보사진특보(每日新報寫眞特報)》(1938.11) 《국민신보(國民新報)》(1939.4) 등을 발간하였다.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로 광복될 때까지 다시 유일한 우리말 일간지가 되어 일제의 침략전쟁과 민족말살정책을 대변하였다. 따라서 《매일신보》는 일제가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날부터 광복되던 날까지 중단된 일 없이 발간된 단 하나의 한국어신문이다. 사옥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에 있었다.
제3기 서울신문 (1945.11.23~ 현재)
일제강점기하 조선총독부 기관지 노릇을 했던 매일신보에 대해 1945년 11월 10일 미군정 당국은 정간처분을 명했다. 이 정간과 함께 《매일신보》라는 제호는 없어지게 되었고, 경영진을 새로 구성하여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어 11월 23일자 석간부터 속간하였다. 지령은 한말 《대한매일신보》 때부터 《매일신보》까지 그대로 계승하여 13,738호부터 시작하였다. 초대 임원진은 사장 오세창(吳世昌), 주필 이관구(李寬求), 편집국장 홍기문(洪起文) 등이었다. 1949년 동해주(東海州) 반공사건의 기사시비로 5월 3일 발행정지처분을 당했다가 6월 20일에 속간하면서 공보처(公報處)의 지시·감독을 받게 되었다. 1951년 1·4후퇴로 각 신문이 피난지에서 발행되고 있었으나 4월 10일부터 서울에서 타블로이드 2면의 《진중신문(陣中新聞)》을 발행하였다. 1959년 3월 23일부터는 《매일신보》로부터 계승해 온 지령을 버리고 《서울신문》 창간 이후부터의 지령으로 다시 환산하여 새 지령을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는 정부의 고지로서 자유당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다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데모대들이 사옥과 시설을 불태워 버려 일시 정간했고, 6월 27일 오종식(吳宗植)이 제9대 사장에 취임하여 재건에 주력했지만 재정난으로 1961년 5월 9일 휴간되었다가 5·16군사정변 후 12월 22일에 다시 속간하였다. 서울신문은 한글전용신문 제작에 있어 다른 신문보다 앞장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56년 10월 18일부터는 국한문판 본지와 함께 한글판 《서울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여 1958년에는 한글판 편집진용을 따로 구성하기까지 했으나, 부수를 늘리지 못한 채 1959년 초부터 한글판 발행을 중단해 버렸다. 1968년 11월 22일 창간 23주년을 맞아 이번에는 한글전용신문으로 과감하게 개혁하였으나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국한문혼용으로 환원하였다. 한글전용신문으로 정착하지는 못했으나 다른 신문이 시도해 보지 못한 일이었으며, 한글전용으로 발간하는 동안에는 제목의 용어 및 글자배열·편집체제·기사문장 등을 한글전용에 알맞도록 연구하기도 하였다. 본지 외에 1946년 1월 15일 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를 창간하여 1954년 8월까지 통권 68호를 기록, 광복 이후 6·25전쟁 때까지 가장 오래 발간된 대표적인 종합잡지였다. 또한 대중 주간지 《선데이 서울》(1968.9.22), 어린이 주간지 《소년서울》(1970.4.22), 《주간스포츠》(1975.3.30), 《서울평론》(1973.11.4) 등의 주간지를 발행하다가 모두 폐간하였다. 2004년 현재 연예 주간지 《TV가이드》(1981.7.18), 여성월간지 《퀸》(1990.7.22), 시사주간지 《피플》(1992.1.12 창간, 11.5 《뉴스피플》로 제호 변경)을, 1985년 6월 22일에 창간한 일간지 《스포츠서울》을 발행하고 있다. 사옥은 1985년 4월에 프레스 센터와 함께 준공한 것이며, 5·16군사정변 이후 석간으로 발행하던 것을 1980년 12월 2일부터 조간으로 전환했다. 1998년 11월 11일 제호를 《대한매일》로 변경했다가 2004년 1월 1일 다시 《서울신문》으로 환원하였다. 주식회사의 형태로 자본금은 544억 4478만 원이며, 대표이사는 노진환이다. 지방 보급망으로 2개 지사, 605개 지국, 47개 가판이 있고 임직원수는 721명이다. 주재지역은 인천·수원·춘천 등 17곳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 25번지에 있다.
1904년 창간된 구국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을 이어받아 극좌.극우에 치우치지않는 바른보도로 희망찬 새 100년을 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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