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질투
精金明月珠(정금명월주)-아름다운 금덩이 빛나는 진주로
贈君爲雜佩(증군위잡패)-노리개 만들어 그대에게 드려요
不惜棄道旁(불석기도방)-싫으면 길가에다 버리는 것은 아까울 게 없지만
莫結新人帶(막결신인대)-다른 여자 허리에 매어 주지는 마세요!
허난설헌(許蘭雪軒)
우리 딸 노처녀가 애기를 배었어요
『내 일찍이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소견법(消遣法)으로
거위 한 쌍을 구하여 자식 삼아 정원에 기르기 십개성상(十個星霜)이거니,
올 여름에 천만 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음식과 수면을 거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달 밝은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우는 단장곡(斷腸曲)은 차마
듣지 못할러라.』
위의 문장(文章)은 누구나 학생시절의 기억에 남아있는
오상순(吳相淳)의 “짝 잃은 거위를 곡(哭)하노라” 서두(序頭)이다.
필자가 약 30년 전 직장시절 한 거래처 사람으로부터 문주란(文珠蘭)화분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어른 새끼손가락 크기의 몸체가 아주 작은 가날픈 화분이었다.
별로 귀(貴)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음먹고 주는 것인데”
잘 길러야지 생각했다.
개봉동에서 셋방을 살 때인데 마루에 두고 보니 화분하나가
좀 쓸쓸하게 보여서
집사람이 개봉시장에 비슷한 크기의 군자란 하나를 사서 같이 키웠다.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어언 10년이 지나 문주란과 군자란은 마치 오누이와 연인(戀人)같이 잘 자라고 있었다.
23년 전 어느 해 집사람이 중한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을 하고 필자도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동안에 화분에 물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겨울에 관리를 소홀히 하여 그만 군자란이 얼어 죽었다.
10년을 자라는 동안 군자란이 새끼를 처서 아주 보기 좋았고 이웃에서 분양을 요청해도 분리하면 모양이 없을까하여 매정(?)하게
거절을 했던 화분이었다.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말처럼 마치 연인(戀人)같이 있다가 한쪽이 없으니 관심을 두지 못해 죽게 한 군자란이 얼마나 후회되었는지 모른다.
그 후로는 집에 문주란 외는 회분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느껴져서인지 그 후로 홀로된 문주란이 병치레를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모른다.
화원(花園)에 수차례 입원을 하고 수시로 치료제니 보약을 달고 살아왔다.
하루는 가만히 생각을 했다.
한의학에서 과부나 처녀 여승이 남자가 그리워 병드는 실녀병(室女病)이 있다.
이때 쓰는 상사병 처방전이 시호억간탕(柴胡抑肝湯)이라는 한약이다.
사실 제일 좋은 약은 그냥“남자를 껴 안는 것”이지만---
그래서 생명력이 강하게 보이는 이름도 모르는 풀 한 폭을 같이 심어 주었는데 그래서인지 몇 년간은 탄저병 같은 병치레 없이 잘 지내 왔다.
친구가 되었는지 연인이 되었는지--
해맑은 꽃도 피웠다.
병든 아내와 늙어가는 내 몸 관리하게도 힘드는데
40세 된 장가못간 아들과
30세 된 늙은 딸 김주란(金珠蘭) 눈치 살피기에도 신경이 쓰인다.
얼마 전 지인(知人)으로부터 동양란(東洋蘭) 화분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난(蘭) 화분 하나를 두고 싶었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책상위에 놓아보기도 하고 거실 붓통 옆에 자리를 정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집사람이
여보 저것좀 보세요 한다.
다용도실에 가보니 문주란 꽃이 지고난후에 아주 굵고 탐스러운 열매를 달고 있었다.
위에 사진이 문주란 열매다.
30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불현 듯 지난주 집에 찾아온 초등학교 2학년 큰 손녀 말이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는 요즘 나예만 안아주고 나에게는 관심이 없어 !”
올해 돌 지난 막내아들 딸을 안아주고 귀여워 해주니까 큰손녀가 샘이 나서 하는 말이다.
아하 !
어느 식물학자가 책에 쓰기를 “생명체들은 자기가 생을 마감할 때에 후손을 준비한다” 는 말이 생각났다.
군자란을 잃어 30년을 외롭게 살아온 주란(珠蘭)이 오직 락(樂)이라고는 부모님의 사랑뿐이었는데 느닷없이 동양란 하나가 들어와 그동안 누렸던 관심과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이제 건강도 나빠지고 사랑도 없어졌으니 무슨 재미로 더 살의미가 있겠는가!
이승을 떠나기 결심하고 후손을 남기기 위해 열매를 맺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딸 주란(珠蘭)이 “애비 없는 자식”을 갖기 까지 얼마나 깊은 고민을 했을까
주란(珠蘭)이를 새삼 살펴보니 온 전신에 탄저병이 만연되어 있다.
불쌍한 것
사랑 잃고 건강 잃고 얼마나 괴로웠을까
마음 고쳐먹어라
이 애비가 미안하구나
내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심신을 회복하자
비록 내 배 앓아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내가 30년을 너를 키울 때는 사랑 없이는 못 키운다.
기른 정도 낳은 정 못지않게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네가 낳은 새끼는 그 애비가 하나님이든 어느재벌의 자식이라도 싫다
나는 네가 제일 소중하다.
내가 죽고난 다음에는 네가 사생아를 낳든 돈많은 놈의 후실로 들어가든 내 상관 할바
아니지만
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너는 내옆에 있어야 한다.
30년을 내옆에 살아왔는데
이제 나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다
그러니 쓸데 없는 생각말고 몸을 좀 추서려라
그리고 네 뱃속의 아이도 부끄러워할 것 없다.
남자 없이 자식을 낳은 사람이 또 있다.
“예수를 낳은 마리아”다.
마리아나 주란(珠蘭)이나 다 하느님의 뜻으로 애기를 갖인 것이다.
사랑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