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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의식
duggy716 ・ 2020. 5. 19. 9:45
바가반 라마나의 깨달음 100주년 기념 출판물
지은이 라마나 마하리쉬
옮긴이 김병채
펴낸곳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
초판2쇄 2013년 10월 25일
바가반 슈라 라마나 마하리쉬는 1979년 12월 30일 남인도 티루출리에서 태어났다. 11살때 사랑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죽음이라는 문제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1896년 7월에 그는 갑작 찾아온 매우 강력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늘 깨달음의 상태에 있었다.
1896년 9월 1일, 그는 아루나찰라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아루나찰라 산자락에 그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인 라마나스라맘이 생겨나게 도었다. 그는 여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메세지를 말과 침묵으로 가르치다가 1950년 4월 14일 마하 사마디에 들었다.
1996년7월17일 라마나님이 깨달은지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하여 마하리쉬 센터에서 100권의 책을 출간하기로 하였는데 <불명의 의식>이라는 이 책은 그 첫번째의 책이다.
이 책은 유일한 하나의 실재는 영원하고 실재하며 어디에나 있는 절대자라는 바가반 라마나 마하리쉬의 귀중하고 직접적이고 심오한 가르침들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보여 주고 있다.
바가반 라마나 마하리쉬는 대중을 상대로 강연한 적이 없다. 바가반은 침묵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바가반은 침묵과 자비로운 바라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침묵은 그치지 않는 웅변이고 침묵만이 영원한 말이며,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하나의 말이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바가반의 주된 가르침이며 직접적인 길이자 의식인 "난 야르(Nan Yar,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한다
2부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변함없는 의식을 다루고 있다.
3부는 자기 탐구, 자아, 마음, 환생과 다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1. 베다
베다는 "그대는 그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슈리 바가반은 전체 베단타의 가르침이 다음 네 단어로 축약될 수 있다고 합니다
데함 (Deham) - 몸
나함 (Naham) - 나는 아니다.
코함 (Koham) - 나는 누구인가?
소함 (Soham) - 나는 그이다. 나는 지고의 의식이다.
2. 내면의 그루
그루는 내면에 있다
구루는 참나 깨달음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없앨 뿐입니다.
3. 구루의 은총
구루는 단지 무지를 없애도록 그대를 도울 뿐입니다. 구루의 은총은 물에 빠진 그대를 돕기 위하여 내뻗은 손과 같습니다. 구루의 은총은 자동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제자는 필요한 도움을 정확히 받습니다. 구루는 길을 가는데 매우 강력한 도움이 되지만, 그대도 역시 노력해야 합니다
구루는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해방을 원한다면 안에 있는 구루는 그를 안으로 끌어당기며, 밖에 있는 구루는 그를 안으로 참나를 향해 밀어 넣습니다. 이것이 구루의 은총입니다.
4. 난 야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그대 자신에게 물으십시요. 다른 모든 생각의 뿌리인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인 자기의 내면에 집중하십시오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는 사실 '나'라는 생각이 몸 안의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아보는 자기 내면의 탐구입니다. 만약 그대가 그런 탐구에 주의를 집중하면, '나'라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의 뿌리이므로 모든 생각이 소멸되고 참나만이 늘 남을 것입니다.
깨어있는 동안 늘 탐구하십시오. 잠자리에 들 때까지 탐구를 계속한다면, 탐구는 잠자는 동안에도 지속될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다시 탐구를 하십시오
"나는 이다", 자각, 의식은 깨어 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나 항상 존재하며 빛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다"는 실재입니다. 바뀌지않는 유일한 실재는 있음입니다. 그 순수한 있음의 상태를 깨닫기 전에는 탐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 안에 자리를 잡게 되면 더 이상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5. 브라만 브라만은 충만한 의식이다.
절대자와의 합일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목표임을 아십시오. 이것은 또한 해방의 상태입니다.
절대자는 언제나 그대와 함께, 그대 안에 있습니다. 그대 자신이 절대자입니다.
6. 부마 완전만이 있다.
완전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한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유한한 의식이 일어나 제한된 모습을 취합니다. 이것은 반사입니다. 이 개별 의식이 지고자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해야 할 일입니다.
7. 가슴 가슴은 참나의 궁극의 중심이다
가슴의 동굴 안에는 유일한 절대자가 '나-나'로서 홀로 빛나고 있는데, 그것은 진실로 의식이며 참나입니다
완벽한 순수와 절대 지식으로 있는 가슴 안에 자아를 붙잡아 두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 저절로 마음의 잠재적인 습성이 파괴되고 호흡이 제어됩니다.
"모든 제한적인 속성들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지식의 모습으로 있는 쉬바, '그 쉬바가 나다'라는 명상을 끊임없이 하여 가슴에 늘 머무르면, 자아의 모든 집착들이 사라집니다"
참나의 자리인 가슴은 신체의 오른쪽에 있습니다
가슴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 가슴을 향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사라지고 가슴이 환히 빛납니다.
8. 실재 실재는 순수 존재이다.
실재는 그저 자아의 소멸입니다. 자아가 무엇인지 찾음으로써 자아를 소멸시키십시오. 자아는 실체가 없으므로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실재는 오로지 경험될 수 있을 뿐이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나(스크린)을 잊고 이름과 형상(영화)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을 전체와 분리된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독립된 몸을 볼 때, 모든 문제와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 실재를 깨닫기 위하여 그대는 다른 실재를 원합니까? 그 실재를 자각하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다는 실재는 없으며, 그 실재를 아는 또 다른 마음도 없습니다. 그 실재는 그대 안에서 고동치는 경험의 형태 안에 있으며, 그 고동침이 그대의 진정한 참나이기 때문입니다.
9. 자각 자각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삿-칫-아난다 는 존재-의식-희열 은 참나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는 이다"를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각을 떠나서 신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대는 자각입니다. 그대는 진정한 자각이므로 그것을 얻거나 개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가 할 일은 오로지 참나 아닌 것들에 대한 자각을 포기하는 것 뿐입니다. 그것들에 대한 자각을 포기하면, 순수한 자각만이 납습니다. 그것이 참나입니다.
10. 고요하라 있는 그대로 있어라
슈리바가만은 기도나 영적인 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고요히 있음으로써 진리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나는 이다"를 경험하는 것이 고요히 있는 것입니다.
고요는 그대 자신을 파괴하는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이름과 형상이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말들을 떠나십시오. 있는 그대로 있으십시오.
성경에서 "고요하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고요함이란 개별성이 흔적조차 없는 완전한 복종입니다. 복종하십시오 그러면 고요함이 가득해지고 마음의 동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동요는 욕망과 행위의 의식, 성격의 원인입니다. 마음의 동요가 멈추면 고요가 있습니다.
11. 희열 희열은 그대 자신의 존재이다.
지금 그대는 자신을 늘 변하며 일시적인 마음이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대는 변하지 않으며 영원합니다.
희열은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이며,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 가는 것은 마음의 창조물입니다. 개인이 참나에 녹아들어 하나가 될 때, 희열이 존재하게 됩니다.
12. 은총 은총은 늘 존재하며 늘 흐르고 있다.
은총은 진실한 헌신자나 요기에게만 주어집니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길에서 끊임없이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듯이 구루의 은총이 흘러들도록 가슴을 여는 것 뿐입니다. 은총은 항상 있으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이 존재하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13. 침묵 침묵은 참나다.
그것은 바라봄, 접촉, 가르침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개인을 정화시켜 실재 안에 자리잡도록 합니다. 침묵은 마음의 활동이 없는 명상입니다. 내적 침묵은 자기 복종이며, 그것은 자아라는 생각이 없이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현자들은 '나'라는 생각인 자아가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침묵이며 참나라고 합니다.
신을 가슴의 보좌에 모시고 마음이 복종하여 유일한 참나로서 자리 잡는, 끊임없고 진실하며 자연러운 숭배의 이행이 침묵임을 아십시오.내면의 침묵은 자기 복종이며, 자아라는 느낌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과 생각을 초월해 있는 그 상태가 침묵입니다.
14. 홀로 있음 참나에 머무는 것이 홀로 있는 것이다
참나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홀로 있을 특정한 장소가 없습니다. 마음의 개념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 홀로 머무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초연한 사람은 늘 홀로 있습니다. 집착으로 행해지는 일은 속박이지만, 초연함으로 행해지는 일은 행위자에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홀로 있습니다.
15. 평화 평화는 늘 지금 여기에 있다.
자연스러운 상태를 방해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만약 그대가 평화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탐구가 오로지 마음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무엇인지 탐구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이 사라지면, 그대는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오로지 명상으로 옵니다. 평화에 방해되는 것들을 없애십시오. 생각들이 방해물입니다.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그대는 무한한 지성인 참나입니다. 거기에 완전한 평화가 있습니다.
16. 참나 참나는 지고의 존재이다.
현자들에 따르면, 자아인 '나'라는 생각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침묵인 참나입니다.
자아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일시적인 존재인 반면에 참나는 영원합니다. 그대는 실제로 진정한 참나임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진정한 참나로 착가하고 있습니다. 자아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아를 없애십시오. 그러면 무지는 사라집니다. 자아를 찾아보면, 자아는 사라지고 진정한 참나만이 남습니다. 무지를 고백하는 자아는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무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나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찾는 자를 찾아내십시오. 질문하는 자를 찾아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진리를 찾고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는 그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의심을 없앨 것입니다.
참나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는 느낌, 생각, 행위는 없습니다.그러므로 모든 것에서, 모든 환경에서, 모든 순간에서 참나를 찾도록 하십시오.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없습니다.
17. 참나에 머무르기 참나에 머무는 것은 자아가 없는 상태이다.
순수한 참나는 마음이 가라안지 않는 한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마음은 생각들의 꾸러미입니다. 모든 생각들 가운데 맨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나'라는 근본 생각입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해야만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마음을 끊임없이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참나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 자기 탐구입니다.
한 가지 대상을 명상하는 이의 마음은 일념이 됩니다. 일념의 마음은 참나에 머물도록 안내합니다.
마음이 사라질 때 다른 욕망들도 사라집니다.
본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신을 타인과 차별하지 않으며 늘 참나로만 머무른다면, 어느 누가 참나로부터 떨어져 있겠습니까?
18. 시간 너머의 참나
'영원한 지금'에는 생각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순전히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공간도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시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탄생과 환생은 다름 아닌 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와 떨어진 시간과 공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몸이라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관련될 것입니다. 우리가 몸입니까? 우리는 지금도 그때도 언제나, 여기서도 저기서도 어디서나 동일한 존재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우리만이 있습니다.
19. 행복 참나의 상태가 행복이다.
그대가 만족할 때마다 그대는 참나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뛰어들면 스스로 존재하는 희열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개념들로 말미암아 그 희열이 다른 것들이나 다른 일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대하 만족할 때마다 그대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참나 속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대가 행복이라고 보는 경험이 유일한 실재인 참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렇게 뛰어든다면,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의식하면서 참나, 가슴으로 뛰어들기를 바랍니다.
그대는 스스로 자신에게 한계를 지운 뒤에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헛되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행은 자아에 기인합니다. 그대 안에 있는 불행의 원인을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 탓으로 돌린다면,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자아를 믿지 않고 시들게 한다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몸을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고통이 있습니다. 이 고통이 왜 그리고 누구에게 왔습니까? 이렇게 탐구한다면 '나'는 마음과 몸으로부터 떨어져 있고,참나가 영원한 존재이며 영원한 희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제2부
1. 사랑 사랑이 신의 모습이다.
참나의 본성인 사람의 진실을 알게 될 때만 삶의 강력한 매듭들이 풀릴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에 이를 때만 헤방에 이를 것입니다. 참나 경험은 오직 사랑입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만을 보며, 사랑만을 들으며, 사랑만을 느끼며, 사랑만을 맛보며, 사랑만을 냄새맡습니다. 그 사랑은 희열입니다.
2. 신
그대가 세상의 것들을 우선시하므로 신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대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신만을 찾는다면 신만이 '나', 참나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3. 삿
존재하는 하나만이 실재합니다. 그 유일한 하나는 세상으로 나타나는 존재인 삿(Sat)입니다.
삿의 광채가 칫(순수 의식)이며, 그것의 본성이 아난다(희열)입니다.
4. 의식
의식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의식인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없습니다.
늘 현존하고 있는 의식을 깨달을 때만 그것은 영원할 것입니다.
어떤 것을 의식한다면, 그대는 본질적으로 그대 자신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5. 존재
그대는 스로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단슨한 존재이지는 않습니다. 의식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의식과 동일합니다.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질문들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 존재는 참나입니다. 그것은 이미 깨달아 있습니다.
6. 있음
참나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자 합니다. 그대가 할 일은 오직 자신의 몸이라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뿐이며, 또 외적인 것들이나 참나 아닌 것들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나 저것ㅇ로 있지 마십시오. 그냥 있으십시오. 순수한 있음이 그대의 본성입니다.
이미 자신인 존재로 있는 것은 노력이 들지 않습니다. 있음은 늘 현존하며 늘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7. 그것
잠 속에 있을 때 나는 육제도, 감각도, 마음도, 무지의 상태도 아닙니다
위에 언급한 모든 것들이 거부될 때 홀로 남아 있는 그것이 '나'입니다.
그것은 존재-의식-희열인 참나, 순수 자각입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고 그것이다."라고 묵상만 하는 것은 마음의 강인함이 부족함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모두가 영원히 그것입니다
8. -이다
바뀌지 않는 하나의 실제가 있음입니다. 이미 자신인 존재로 있는 것은 노력이 들지 않습다.
있음은 항상 현존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있는 그것은 "나는 이다"입니다.
"나는 이다."는 우리 각자입니다.
은총은 항상 있으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9. 보는 자
마음은 자기 자신을 주체와 객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눕니다. 그러므로 이름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외부 세상은 독립된 존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대상들도 없습니다. 보는 자만이 실재하며 영원합니다.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보는 자를 찾아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보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 뚜리야티따
깨어 있음, 꿈, 잠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 가지 상태를 초월하여 있는 깨어있는 잠의 상태를 뚜리야(넷째)라고 부릅니다.
진리를 확고히 붙들고 세 가지 상태를 초월하면, 삶의 활동은 릴라 즉 유희로 보일 것입니다.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깊은 수면은 가능합니다.
잠의 무지가 꿈꾸는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에 퍼져 있는 한, 그 상태들에서 자아를 찾아봄으로써 중단 없이 자기 탐구를 계속하십시오.
11. 자그라트 수숩티 그것은 희열이며, 그것은 영원하다.
자그라트 수숩티 상태를 깨어 있는 잠이라 합니다.
잠을 자는 동안 자아는 가라않으며, 감각 기관들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어떤 활동에도 자발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자신이 행위자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잠에서처럼 무의식적이지 않으며 참나 안에서 완전히 깨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깨어 있는 잠이라 합니다
12. 세 가지 상태 세 가지 상태는 실재일 수 없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거친 몸이 거친 이름과 형상을 지각합니다.
꿈의 상태에서는 정신적인 몸이 정신적인 ㅇ름고 형상을 지각합니다.
깊은 수렴에서는 몸과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아무런 지각이 없습니다.
어떻게 깨어 있는 잠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가?깨어 있는 상태와 잠의 상태의 유일한 차이는 몸에 집착하는 '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몸-의식이 그 차이를 만든다.
어떻게 몸-자각이 일어나는가? 몸은 자각 능력이 없어서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몸의 한계 안에서, 몸과 참나 사이에 하나의 '나'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물질과 영 사이의 매듭, 혹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생각의 꾸러미에 불과합니다.
13. 꺄니 갸니는 절대자이다.
성자들과의 친밀한 교제는 해방을 오게 합니다. 그런 교제는 소중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자기 탐구와 더불어, 그런 교제는 다른 어떤 영적 수행보다도 강력합니다.
성자들과 교제를 하면 무지가 접차 사라지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면 영원한 참나가 드러납니다. 구루는 무지를 없애도록 도와 줄 뿐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성자들과의 교제는 물질적인 집착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집착이 파괴됩니다.그러면 참나와 하나가 됩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해방에 이릅니다.
성자들과의 교제의 결과로 지금 여기에서 얻어진, 그리고 가슴과 접촉하며 깊은 자기 탐구 명상을 통하여 실현된 이 지고의 상태은 선생의 도움이나 경전의 지식, 영적인 공덕이나 다른 어떤 수단들에 의해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14. 성자의 고요 그는 충만이다.
성자는 끊임없이 열심히 행위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빨리 도는 팽이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15. 신의 발아래 그대의 짐을 신의 발아래에 내려 놓아라.
자신이 행위자라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신이며, 인간은 신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들을 자초하고있습니다. 행위자라는 느낌이 있는 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 느낌은 성격이기도 합니다. 행위자라는 느낌은 굴레입니다. 마음의 동요는 욕망, 행위자라는 느낌, 성격의 원인입니다. 동요가 멈추면 고요가 있습니다.
지혜의 상태에 이르러 이 환영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고통을 겪을 때마다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사회봉사를 해야 합니다. 봉사를 할 때에도 자아 없이, 즉 "내가 행위자다"라는 의식을 갖지 않고, "나는 신의 도구이다"라고 느끼며 해야 합니다.
다른 창조물의 고통을 감소시키고자 할 때, 그 봉사를 사심없이 행한다면, 즉 "내가 이것을 하고 있다"라는 에고의 느낌 없이, "신이 나를 통하여 일을 하고 있다, 신이 행위자이며 나는 도구이다"라는 정신으로 행한다면, 그대의 노력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대는 영적으로 진보하게 됩니다.
일어낮 않기로 되어 있는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일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일어날 것입니다.
16. 깨달음 깨달음은 이미 있다.
참나의 깨달음은 새로은 무엇인가를 얻거나 멀리 있는 어떤 목표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알거나 어떤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아는 이해를 포기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저 고요히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나 형상으로 절대적 실재를 숭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완전한 존재를 깨닫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17. 참나는 항상 깨달아 있다.
자아가 무엇인지 탐구함으로써 자아를 파괴하십시오. 자아는 실체가 아니므로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실재가 스스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들은 자아를 지키면서 행해집니다. 그런 길들에는 많은 의심이 일어나고, 마지막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원한 질문만 남게 되며, 이 질문을 붙잡고 씨름해야 합니다. 하지만 탐구 방법에서는 이 마지막 질문을 처음부터 합니다. 이 탐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영적 수행들이 필요치 않습니다.
3부
1. 길 길은 없다
먼저 그대가 어디에 있는지, 그대가 무엇인지를 아십시오. 도달해야할 곳은 없습니다. 이르러야 할 목적지는 없습니다. 얻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목표가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개념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목적지이며 평화입니다. 그대는 참나입니다. 그내는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기 탐구는 과정이자 또한 목적지입니다. "나는 이다."는 목적지이며 궁극의 실제입니다. 노력으로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자기 탐구입니다. 그것이 자발적이고 자유스러울 깨달음입니다. 자기 탐구를 하지 않으면 마음을 가라않게 하는 다른 적절한 방법은 없습니다.
2. 참나 망각 생각이 있는 한 참나 망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절대자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망각이 잇따라 일어납니다. 망각과 생각은 오로지 '나'라는 생각에게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단단히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허깨비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 남아 있는 것이 진정한 '나'이며 그것이 참나입니다.
"참나가 어디에 있지?"라면서 우리는 참나를 찾아 여기저기로 다닙니다. 마침내 지식의 통잘력이 밝아 오면, 우리는 "이것이 참나구나, 이것이 나구나" 라면서 찾기를 그만둡니다. 그 통찰력을 얻어야 합니다. 일단 그 통찰력에 이르게 되면, 세상과 더불어 살며 활동하더라도 아무런 집착이 없을 것입니다
참나를 망각한 개별 영혼은 단순히 간접적 지식만을 통해서는 참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생의 업보로 인해 개인은 자신이 참나라는 생각을 자꾸만 잊고 몸을 자신이라 여기면서 기만당합니다.
참나를 묵상하는 형태의 노력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파괴되면, 개별 영혼은 참나가 될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생각 자체가 굴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수행은 '나'라는 생각의 모습으로 있는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 안에서 녹인 뒤, 그분, 신, 참나를 잊지 않고 고요히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전들의 결론적인 가르침입니다.
3. 무지 잘못된 지식이 무지이다.
환영을 정복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그대의 진정한 상태에 있으십시오. 그러면 환영은 저절로 떠날 것입니다. 만약 환영을 정복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대는 수많은 어려움에 부닥칠 것입니다.
자아를 없애십시오. 그러면 무지는 사라집니다. 탐구하기 시작하면, 본래 있지 않은 무지는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무지를 없앤다는 말은 무지가 실재하지 않음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4.마야 마야와 실재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마야는 거짓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실재의 활동적인 측면입니다. 마야는 의식 안에서 형상을 만드는 자입니다. 형상은 다양성을 의미하며 이것이 환영을 일으킵니다. 이 모든 다양성은 마음 안에만 있습니다.
세상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항상 세상 뒤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어떤 다른 행위로도 파괴될 수 없는 미혹이요 무지인 마야는 침묵이라 불리는 강력한 활동으로만 완전히 파괴될 수 있습니다.
5. 몸 몸은 지각 능력이 없다.
몸, 마음, 자아가 함께 하여 인간 존재를 이룹니다.
이번 생애의 유익한 목적은 내면으로 향하여 참나를 깨닫는 것 뿐입니다.
지각 능력이 없고, 죽어 있으며 생명력이 없는 몸에서 마음이라 불리는 '나'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마음과 자아는 하나이며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몸은 흙으로 빚은 항아리처럼 자력으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몸은 나-의식을 가지지 않으며, 깊은 잠에 들어 몸이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의 자연스런 존재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몸이 '나'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탐구하여 참나를 알고 참나로 머무는 이들의 가슴 동굴에서 아루나찰라 쉬바가 "그것이 나다"라는 의식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6. 자기 탐구 자기 자신을 알기
자기 탐구는 진정한 그대 자신인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를 깨닫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다. 자기 탐구는 참나에게로 안내하며, 다른 방법은 다른 곳으로 안내 합니다.
호흡과 말을 통제하고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나'가 일어나는 근원에 도달하여야 합니다, '나'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고, '나'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하여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여 탐구하는 것이 참나 지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탐구입니다.
"이것은 나가 아니다. 그것이 나다."라는 묵상은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탐구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붙잡고 그것을 조사하는 것은 초보자에게 권할 만 합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이 누구에게서 나타나고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보십시오. '나'라는 생각이 근본 원인임을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깊이 들억십시오. '나'라는 생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거기에 무한히 확장된 '나'-의식이 있습니다.
7. 나 생각 '나' 생각이 뿌리이다
마음은 '나'라고 하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후, '나'를 몸, 감각, 마음 등과 그릇 동일시 합니다.'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후에 개별성이라는 개념 혹은 생각도 일어나고 2인청인 너와 3인칭인 그,그것등이 나타납니다.
'나'라는 생각은 주체와 객체를 보며, 잠을 자고 깨어나며, 먹고 생각하며,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나'라는 것이 살아 있는 한 슬픔과 고통이 존재합니다.
어디서 이 '나'가 일어납니까? 그것을 내면에서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추구입니다. 마음이 끊임없이 자신의 본성을 조사하면,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따라서 마음이란 '나'라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8. 자아 자아는 '나 생각이다.
'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일어납니다. 그것이 가슴에서 일어난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마음이 유래하는 자리입니다. 끊임없이 '나', '나'를 생각하여도 그 장소로 안내될 것입니다.
자아는 사실 유령과 같아서, 자신의 형태는 없지만 그것이 붙들고 있는 형태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자아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먼저 자아를 붙들고서 어떻게 하면 자아를 소멸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누가 질문을 합니까? 그것은 자아입니다. 이런 질문은 자아를 간직하기 위한 방법이지 소멸하기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 자아를 찾으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다근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자아를 없애는 방법입니다.
자아는 나 아닌 의식의 몸과 절대적 나인 의식의 실재 사이에 있는 미세한 연결입니다.
9. 마음 마음은 생각들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으로 향한 마음이 참나입니다. 외부로 향하면 마음은 자아가 되고 온 세상이 됩니다.
마음은 생각들의 집합입니다. 생각은 자아를 위해서만 존재할 수 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들은 자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음은 자아로부터 태어납니다. 자아는 참나로부터 일어납니다. 자아의 근원을 찾으면 참나가 나타납니다.
10. 바사나 바사나는 심리적 충동들이다.
바사나는 마음의 습관들입니다. 오래된 심리적 경향성을 타파해야만 합니다.
수천 년 동안 동굴 안에 있던 어둠을 몰아내는 데 또 다른 수천 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초 한자루면 충분합니다. 빛이 동굴로 들어오는 순간, 수천 년 동안 동굴을 채우고 있던 짙은 어둠은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이와같이 수많은 세월 동안 수많은 생을 거치면서 축적된 심리적 경향성도구루의 은총이라는 빛에 의하여 그냥 사라집니다. 어두운 동굴 안으로 빛을 가저오기 위한 노력은 구루의 발아래에서 은총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단 어둠이 사라지면, 무지로 인한 고통은 사라집니다.
11. 만트라 아함!(AHAM!)
'나'는 모든 만트라들 중 첫째이자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즉 아함 없이는 만트라도 없습니다.
참나를 알기 위해 경전의 지식이나 학습은 필요치 않습니다. 결국에는 모든 지식이나 참나 아닌 것은 버려져야 합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에서 권하듯이 마음 속으로 "'니','나'하고 계속말 하십시오. 끊임없이 '나','나'를 생각하면 참나의 상태로 안내될 것입니다. 앉아 있든 서 있든 걷고 있는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을 반복하십시오.
12. 타파스 금욕
바가반 라마나가 조언하는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타파스는 "고요하라."이지 명상이나 요가 등과 같은 것을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흔적이 사라질 때 남아 있는 그것을 깨닫는 것이 훌륭한 타파스입니다.
'나'라른 개념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지켜본다면 마음은 그것 안으로 흡수됩니다. 이것이 타파스입니다
만트라를 반복할 때 만트라의 소리가 일어나는 근원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마음은 그것으로 들어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타파스입니다.
전능하신 신에게 모든 짐을 맡기고 무집착과 평화로 있는 것이 최상의 타파스입니다
13. 환생 욕망들의 만족
잠을 잘 때, 이 몸과 세상은 그대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몸을 가지게 되고 또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은 오직 잠에서 깨어날 때뿐입니다. 그대는 잠 속에서는 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몸입니까? 깨어 있음과 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대흔 삶과 죽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참나를 잊고 몸을 참나로 착각하고, 수많은 탄생들을 거치다가, 마침내 참나를 알고 참나로 있는 것은 온 세상을 떠도는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14. 고통 모든 고통은 환영에서 온다.
지혜의 상태에 이르러 이 환영으로부터 깨어나는 날까지, 그대는 고통을 볼 때마다, 고통을 덜어주는 사회봉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조차도 "나가 행위자다"라는 느낌 없이, 자아 없이, "나는 신의 도구이다"라는 느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을 숭배하듯이 도와야 합니다. 그런 모든 봉사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참나를 위한 것이며, 오로지 그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잠 속에서 세상과 세상의 고통을 자각하지 않지만 깨어난 상태에서는 고통을 의식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 상태인 잠 속의 상태와 같은 내면에 집중하고 내면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고통이 끝날 것입니다. 세상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방법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참나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15. 아루나찰라 아루나찰라는 지혜의 산이다.
벤카타라만, 그는 어떤 경전도 읽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구루도 없었다. 아루나찰라 산의 힘에 이끌려 바가반은 16세의 깨달은 현자로 이 산기슭에 이르럿고 평생을 아루나찰를 떠난 적이 없다.
16. 프라닥쉬나 프라닥쉬나(pradakshina)는 움직임 속에 있는 사마디이다.
프라(pra)는 모든 종류의 죄를 없앤다는 의미입니다
다(da)는 욕망의 충족을 의미합니다
크쉬(kashi)는 윤회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나(an)는 지혜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루나찰라를 한 바퀴 돌아 보십시오.
기리프라닥쉬나를 하는 동안에는 발은 움직어더라도 마음은 고요할 것입니다. 걷는 동안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자파나 명상을 하는 것을 움직임 속의 사마디라 합니다.
걷다 보면 몸은 지치고, 감각 기관들은 힘을 잃으며, 몸의 모든 활동들은 내면으로 흡수됩니다. 따라서 자신을 잊고 명상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17. 나마스카라 나마스카라(namaskara)의 의미는 자아의 가라앉음이다.
엎드려 절하기는 '자아의 가라앉음'을 의미합니다.
신은 겉으로 무릅을 꿇거나 절하거나 엎드려 절하는 것에 속지 않습니다. 신은 개별성이 있는지를 봅니다.
18. 지혜의 이슬
깨어 있는 동안에도 잠의 상태에 이르면 그대는 갸니(성자)가 됩니다.
스승은 내면에 있습니다. 명상은 스승이 바깥에만 있다는 무지한 생각을 없애려는 것입니다
참나는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 것을 그만둠으로써, 고요히 있으면서 그저 진정한 자신으로 있음으로써 실현됩니다. 그러니 명상하지 마십시오. 존재하십시오.
참나로 있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습니다. 노력도 필요 없고,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잘못된 정체성만 버리고, 자신의 영원하고 자연스럽고 타고난 상태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성자들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로 가슴에게 말하는 가슴입니다.
'나'와 '나의 것'을 소멸시키는 지고의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불멸을 깨닫는 수단입니다.
지고자를 신, 참나, 가슴, 의식의 자리 등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가슴은 존재의 핵심, 중심을 의미하며,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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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깨어 있는 동안에도 잠의 상태에 이르면 그대는 갸니(성자)가 됩니다.
스승은 내면에 있습니다. 명상은 스승이 바깥에만 있다는 무지한 생각을 없애려는 것입니다
참나는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 것을 그만둠으로써, 고요히 있으면서 그저 진정한 자신으로 있음으로써 실현됩니다. 그러니 명상하지 마십시오. 존재하십시오.
참나로 있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습니다. 노력도 필요 없고,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잘못된 정체성만 버리고, 자신의 영원하고 자연스럽고 타고난 상태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성자들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로 가슴에게 말하는 가슴입니다.
'나'와 '나의 것'을 소멸시키는 지고의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불멸을 깨닫는 수단입니다.
지고자를 신, 참나, 가슴, 의식의 자리 등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가슴은 존재의 핵심, 중심을 의미하며,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발은 움직어더라도 마음은 고요할 것입니다. 걷는 동안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자파나 명상을 하는 것을 움직임 속의 사마디라 합니다.
잠 속에서 세상과 세상의 고통을 자각하지 않지만 깨어난 상태에서는 고통을 의식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 상태인 잠 속의 상태와 같은 내면에 집중하고 내면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고통이 끝날 것입니다. 세상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방법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참나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