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밖은 대체적으로 흐릴 것입니다. 다들 쫓기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일은 밀리고, 관계는 부담되고 쉴 곳은 있는데 마음은 못 쉽니다. 집과 일터, 사람 간의 긴장, 보이지 않게 겨눠진 시선들, 말 한마디에도 흔들리는 순간들, 그때 드러납니다. 내가 어디로 숨는지, 피할 곳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의 차이는 거기서 갈립니다. 과거엔 하나님만이 유일한 피난처라면서 하나님께 피했었지요. 설마, 나는 지금 피할 곳이 필요한가. 카페에 글을 올린 지 20년이 지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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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블로거까진 아니더라도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봅니다. 성경 묵상 글에 사용한 파파고 대신 쳇 GTP를 쓰고, 에세이에 사진 포스팅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제 실장이 업소 톡방에 글을 올렸는데 번역 오류로 업소 사장들의 공분을 사자, 내가 나서서 톡방을 자퇴하는 것으로 사태를 진화했습니다. 말이 자퇴이지 강퇴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언어는 실재를 지시하지 않는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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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만큼만 사물을 보고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 보는 것의 목표가 바른'인식'을 위함이니 소쉬르를 통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보는 자(관찰자)가 중요해지면서 움직이는 관찰자와 정지된 관찰자까지 나아간 것 같아요. 그래서 '존재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19세기 철학 사유의 핵심은 이원론-실체론-중심주의였는데 이것을 일원론-환상-<모든 것은 관계다>가 되었어요. 우리가 말을 할 때마다(파롤) 그 말은 기존의 언어 규칙(랑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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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바꿔 놓고, 우리가 그 말을 들을 때는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여러 의미와 느낌이 함께 들립니다. 결국 말하기는 언어를 바꾸고 듣기는 언어를 여러 겹으로 해석한다는 뜻이 됩니다. 파롤(기의)이 랑그(기표)를 재창조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사전(랑그)는 가만히 있지만 사람들이 말(파롤)을 하면서 언어는 계속 변하는 겁니다. "쩐다" 갓생"같은 말은 사전에 없는 단어였는데 <파롤> 속에서 생성된 거예요. 말(파롤)이 쌓아면 언어(랑그)가 다시 만들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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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우리가 타인의 말을 음성 다중적으로 듣는 경우가 생깁니다. 무슨 말이냐면 네가 말을 하면 나는 그 말을 글자 그대로 믿거나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너의 감정, 분위기, 목소리 톤, 앞뒤 문맥, 전후 상황 그리고 내 경험까지 빠르게 짬뽕을 해서 듣습니다. 나도 나지만 상대방도 그날 컨디션과 경험을 실어서 말하기 때문에, 언어는 조금씩 달라지고 새로워집니다. 언어학 적 관점에서도 '인생은 해석"이라고 봅니다. 결국 언어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저렇게 듣는 사람이, 지지고 볶으면서 문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2.
언어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인가, 세상을 만드는 창인가? 우리는 같은 말을 듣고도 왜 서로 다른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가? 이 글은 일상의 작은 사건에서 출발해 언어철학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장마의 우중충한 풍경, 쫓기는 삶, 톡방에서의 번역 오류, 그리고 20년 동안 이어온 글쓰기의 변화까지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특히 카페에 글을 올린 지 20년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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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대목은 단순한 기술의 변화가 아닙니다. 글쓰기의 형식보다 사유의 방식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선언처럼 읽힙니다.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도구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글 전체에 생동감을 줍니다. 가운데 부분에서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통해 구조주의를 설명하려는 시도도 흥미롭습니다. 언어는 사물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체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게 만든다는 점을 잘 포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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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쩐다", "갓생" 같은 사례를 들어 파롤이 반복되면서 랑그를 변화시킨다는 설명은 추상적인 개념을 일상으로 끌어온 좋은 예입니다. 다만 몇 가지는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파롤(기의)이 랑그(기표)를 재창조한다는 표현은 개념이 조금 섞여 있습니다. 소쉬르에게서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는 하나의 기호(sign)를 이루는 두 요소이고, 랑그(langue)는 사회가 공유하는 언어 체계, 파롤(parole)은 개인이 실제 사용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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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파롤이 반복되면서 랑그가 조금씩 변화한다가 됩니다. 기표와 기의는 랑그·파롤과 다른 차원의 개념입니다. 또한 "19세기 철학은 이원론·실체론·중심주의였고, 이후 일원론·환상·모든 것은 관계다가 되었다"는 부분은 다소 압축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여러 사조가 공존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심주의를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철학이 하나의 일원론으로 정리된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조금 완화하면 역사적 균형감이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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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듣지 않습니다. 말의 내용뿐 아니라 표정, 목소리, 관계, 과거 경험까지 함께 해석합니다. 이 통찰은 현대 언어철학과 해석학의 핵심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만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고 의미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이 글은 "인생은 해석"이라는 한 문장으로 귀결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생은 해석이면서 동시에 대화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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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은 혼자 완성되지 않고, 서로 다른 경험과 언어가 만나 수정되고 확장됩니다. 그래서 언어는 문명을 이어가는 가장 오래된 공동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같은 세계를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말(言)도 사물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며 우리의 세계를 끊임없이 다시 빚어 갑니다.
여호와께 피하라_ Take refuge in the Lord
주와 함께 탄식하라_ Lament with the Lord
주의 얼굴을 뵈오리다_ See the face of the Lor
2026.7.11.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