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공화국 풍경들] <46> 申鉉林의 '해질녘에 아픈 사람'-허기진 생활의 멜로디
따뜻한 밥과 사랑이 그리운 억척아줌마의 겨울 일기
통속과 신파를 가로지르는 생활속의 건강함 가득
고단한 싱글맘 自慰의 눈물엔 비슷한 처지 다독이는 힘이…
신현림의 시들은 수사학의 숨바꼭질을 단념하고 독자들을 향해 직진한다. 그의 세 번째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은 겨울 추위 속에서 따뜻한 밥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억척아줌마의 일기다.
신현림(45)의 시들은 술술 읽힌다. 그 시들은 수사학의 숨바꼭질을 단념하고 독자들을 향해 직진한다. 신현림 시의 매력은 그러니까 공들여 쓴 유행가 가사의 매력과 통하는 데가 있다.
그의 시들이 비교적 널리 읽히고 있는 비결 하나가 거기 있을 것이다. 신현림의 시어들은 통속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파를 꺼리지 않는다. 두려워하고 꺼리기는커녕 그 언어들은 통속과 신파 한 가운데서 숨가쁘게 무자맥질한다. 세상과 통하기(통속) 위해 신현림의 화자들이 감수하는 정서적 파열과 눈물(신파)을 시인 자신은 ‘세상과의 로맨스’라 일컬은 바 있다.
통속과 신파를 가로지르는 신현림의 이 로맨스는 그러나 자신이 통속적이지도 신파적이지도 않다며 젠체하는 ‘진지한’ 독자의 가슴까지 울렁이게 만든다. 그것은 이 로맨스가 순정함과 우직함으로, 요컨대 생활의 건강함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힘찬 순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현림 시의 순정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신현림의 화자들이 더러 내비치는 눈물은 일차적으로 제 고단한 몸뚱이와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이내 비슷한 처지의 독자들을 다독거리고 격려하는 연대와 연민의 물줄기로 변한다. 바로 거기에, 순정의 힘이 있다.
신현림의 시들이 그리는 것은 별날 것 없는 삶의 풍경, 범백(凡百)의 세상잡사다. 거기선 역사의 중압도, 지성의 섬광도, 미적 모험도 읽히지 않는다. 그 세계는 지적 정서적 평균인들의 세계다. 이 평균인들은 오직 제 앞의 구체적 삶을 살아가는 데만 열심이다. 그들의 열정이 일상 너머의 어떤 거룩한 가치를 향하는 법은 거의 없다.
이런 평균의 세계는 확실히 예술적으로는 덜 매력적이다. 그러나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힘이 삶을 향한 그런 건강한 열정, 평균인들의 통속적 열정인 것도 엄연하다. 세 번째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2004년. 이하 ‘해질녘에’)에서 신현림이 보여주는 것도 세상을 떠받치는 튼튼한 버팀목으로서의 이 통속적 열의다.
시쳇말로 생활력이다.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은 “아슬아슬한 나날의 쌀자루”에 실린 “허기진 생활의 멜로디”(‘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다.
시집 ‘해질녘에’에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말은 ‘따뜻하다’라는 형용사다. 이 밋밋한 형용사는 시집 전반에 걸쳐 널따랗게 퍼져 있지만, 특히 제1부 ‘해질녘에 아픈 사람’과 제2부 ‘싱글 맘’에선 거의 매 편 등장한다.
1, 2부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거긴 밥만큼 따뜻한 얼굴이구”(‘해질녘에 아픈 사람-향수병’), “외로움을 따뜻하게 덥히며”(‘흐느끼는 키스’), “언제나 따뜻한 시작”(‘사랑’), “너는 따뜻한 물병 같아”(‘싱글 맘-술 마시고 간다’), “따뜻한 연애 상상도 해보지만 다 배부른 얘기”(‘그 해 네 마음의 겨울 자동차’)에서처럼 ‘따뜻하다’가 지천이다.
‘고맙습니다, 따뜻한 시간 되세요’라는 시에는 따뜻한 외투와 모자, 따뜻한 가방, 따뜻한 영화, 따뜻한 인사, 따뜻했던 기억, 따뜻한 이불 등 따뜻한 사물과 사태들이 아예 무더기로 출현한다.
그리고 마침내, ‘싱글 맘-술이 쏟아지는 샤워기처럼’에서는 ‘따뜻한 돈’이 나온다. 이 시의 화자는 “군중, 사내 냄새, 여행”과 함께 ‘따뜻한 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 ‘따뜻한 돈’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에선 아무런 비루함도 읽히지 않는다. 이 시집의 화자들 앞에서 “생존의 알람시계가 절박하게 울”(‘싱글 맘-원더풀 마이 라이프’)고 있다는 것을 독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화자들은 “가난의 마지막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헝그리 정신’)고 있다.
제2부의 표제 자체가 ‘싱글 맘’이기도 하거니와, ‘해질녘에’의 화자들은 대체로 제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여성인 듯하다. 생존의 알람시계 앞에서 “총체적 슬픔과 우울”(‘싱글 맘-원더풀 마이 라이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가난한 화자들에게 ‘따뜻한 돈’은 겨울 장터의 곁불 같은 것이고, 기초대사(基礎代謝)를 위한 자양분 같은 것이다.
곧이곧대로 ‘따뜻하다’고 표현되지 않았더라도, ‘해질녘에’에서는 그 따뜻함과 깊숙이 연결된 시행들이 자주 보인다. “당신 체온이 필요합니다” “오랜만에 달아오른 숨결” “난로처럼 빨갛게 몸을 달구며”(이상 ‘우울한 로맨스-휘말려 가다’), “봉화처럼 타오르는 반달 노래”(‘해질녘에 아픈 사람-반달’), “포대기를 두르고 한 몸이 되어/ 자전거를 타면 어디든 갈 것 같지/ 내 몸 속에 번진 너의 체온”(‘싱글 맘-엄마는 너를 업고’) 같은 대목이 그 예다.
화자들이 이렇게 따뜻함을 열망하는 것은 그들이 추위 속에서 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집에서 ‘따뜻함’의 배경에는 흔히 쓸쓸하다, 춥다, 차디차다, 눈보라, 바람 불다, 폭풍 치다, 배고프다, 겨울, 달밤 같은 차가움의 언어들이 배치돼 있다. 말하자면 이 시집의 화자들은 한겨울 한데에 내던져져 있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삶의 온기를 간구하게 한다.
화자가 간구하는 따뜻함은 세상만사와 결합돼 있지만, 그 고갱이는 밥과 사랑이다. 한 덩이의 따뜻한 밥과 한 움큼의 따뜻한 사랑을 위해 화자들은 일 중독자가 되고 감정의 조련사가 된다.
그 사랑은, 더러 미지의 남성을 설정하기도 하지만, 주로는 딸을 향한 질긴 가족애다. 시집의 한 화자가 “아가야, 엄마는 술이 필요하구나/ 생존의 회전목마를 돌리느라/ 오래된 와인처럼 자신을 가꾸지 못했구나/ 샤워기가 술을 거칠게 쏟아내듯이/ 다시 열렬한 청춘의 리듬을 타고 싶구나”(‘싱글 맘-술이 쏟아지는 샤워기처럼’)라고 풀어져 푸념할 때조차, 그가 제 존재를 버텨내는 것은 청춘의 리듬에 대한 욕망에 의지해서라기보다 “백열등만 한 아이가 자라 방을 비춘다”는 사실의 무게에 의지해서다.
‘해질녘에’는 그 따뜻한 밥과 사랑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동분서주하는 억척아줌마의 일기다. 이 억척아줌마의 자산은 “열정의 산소호흡기”(‘꿈꾸기엔 늦지 않아’) 뿐이다.
그 동분서주가 ‘해질녘에’의 시행들을 극히 세속적으로 만들었지만, 알고 보면 이 시집의 화자들은 윤리적 고답주의자에 가깝다. 그들은 고작 “부동산 잡는다고? 불황에 믿을 건 부동산”이라거나 “부부 스와핑.....전국에 6천여 쌍” 같은 신문기사 제목 정도에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들보다 너저분한 게 욕망이구나”(‘싱글 맘-원더풀 마이 라이프’)라고 한탄하며 “삶을 단순하게, 더욱 단순하게 만들 것”이라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심플리스트다.
이 심플리스트는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요컨대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아무것도 아니었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집 화자들의 세속적 욕망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에 겸손히 머물러있고, 바로 그런 절제의 도덕, 최소주의 도덕이 신현림의 (때로는) 거칠고 거침없는 시행들에 만만찮은 호소력을 부여한다.
나는 위에서 신현림 시의 매력이 공들여 쓴 유행가 가사의 매력과 통한다고 말했다. 그런 진단이 신현림의 언어를 깎아 내리는 말로 들리지 않았길 바란다. 좋은 대중가요 가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 소박한 형식에 담긴 체험의 구체성과 절박성 때문이다. 좋은 노래언어는 더러 잠언적 울림으로 청자 대중의 피부 깊숙이 박힌다.
그런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해질녘에’에서 그런 시행들을, 선율에 실렸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싶은 시행들을 여럿 만났다. “행복, 그게 뭔데?.......카푸치노 거품 같은 것”(‘해질녘에 아픈 사람-세월아,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이라거나, “무엇에든 휘말려 지내지 않으면 인생은 견디기 힘들죠” “누구나 의미 있고, 겉보기 좋은 순간을 원하죠”(이상 ‘우울한 로맨스-휘말려 가다’)라거나, “네 체온 속에서 녹는 상처의 언 저수지......”(‘싱글 맘-술 마시고 간다’) 같은 시행들이 그렇다.
정서적 자기폐쇄성과 언어의 가난함으로 독자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는 시들이 문학제도의 오묘한 파동방정식에 힘입어 이런저런 월계관을 쓰고 있는 시대에, 신현림의 ‘읽히는 시’를 읽는 것은 즐겁다. 그의 언어가 건드리는 것이 대체로 감각의 표피뿐이라는 비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이 지닌 감각의 두께는 그리 대단치 않다. 그리고 그 ‘보통사람들’은 흔히 추위 속에서 따뜻한 밥과 사랑을 간구하는 이들이다.
여느 해보다 추위가 사뭇 일찍 찾아왔던 이 겨울에, 신현림의 ‘해질녘에’가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느 재능 있고 호기심 많은 작곡가가 그의 시에 선율을 붙여줬으면 좋겠다. 신현림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부르며 추위를 이기고 싶다.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가난에 갇힌 것보다
힘없는 나라에 사는 일보다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서러워
슬픈 눈을 땅에 떨어뜨리며
늙은 아이들이 날아가고
새들은 땅속을 파 들어가고
오래된 건물을 뚫은 포도 넝쿨이
한스럽게 뻗쳐오른다
가난과 설움을 넘어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허기진 생활의 멜로디여
아슬아슬한 나날의 쌀자루여
낡은 육신의 그물을 던지는 나와 너여
글: 고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