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초판 ; 1924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1913년에 집필되었으나 1차 대전 종전 후 인도에서 독립운동이 격렬히 전개되던 1920년대에 수정 발표된 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1924년 출간)은 인도를 깊이 이해한 영국의 양심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경영의 정당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역작이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유럽 제국에 식민지는 원자재의 공급원이며 제품의 시장으로 중요했지만 동시에 그 사회의 낙오자를 구제하는 좋은 배출구였다. 본국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심리적인 열등감으로 인해 부적응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식민지에 진출해서 원주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심리적인 보상도 받고 제국주의의 경제적 이득도 취할 수 있었기에. 영국에서는 이들을 ‘식민지 진출형’으로 부를 정도로 이들은 한 유형을 이루었다. 이들에게서 인류애와 인도주의에 입각한 통치를 기대하기는 당연히 어려웠다.
‘인도로 가는 길’에서도, 인도 동북부의 소도시 찬드라포어(실제 지명은 찬드라푸르)의 행정 관료들과 병원장 등으로 구성된 영국인 사회는 누추하고 비위생적이기 짝이 없는 인도인 주거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아름다운 정원도시를 이루고 산다. 이 지역과 인도인 거주지역이 공유하는 것은 하늘뿐이다. 영국인들은 이곳으로부터 마치 올림포스 신들과 같이 인도인들의 삶을 지배한다.
이곳에 인종차별적인 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두 여성이 나타나면서 동요가 일게 된다. 무어 부인은 본성적으로 모든 인간을 존중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고, 그의 며느리 후보인 아델라 역시 인종적 편견을 거부하고 인도의 진면목을 접하고 싶어 한다. 무어 부인이 젊은 인도인 의사 아지즈와 우연히 만나 호감을 갖게 되었으므로 두 여성은 자연히 아지즈에게 길잡이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로니 히슬롭(무어 부인이 자신의 첫 결혼에서 낳은 아들)은 어머니와 애인이 인도인들과 인간적으로 사귀고 싶어 하는 것에 깊은 우려와 곤혹감을 느낀다. 그는 치안판사로서 ‘매일매일 거짓말과 아첨에 둘러 싸여서 (원고와 피고의) 거짓말 중에서 어느 쪽이 덜 거짓인가를 분별해서 용감하게 정의의 판결을 하고, 약한 자를 덜 약한 자로부터 보호하고, 언변이 능란한 자로부터 어눌한 자를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서 그의 어머니와 약혼녀가 인도인과 친분을 갖게 되면 온갖 청탁과 소문, 모함에 휩쓸릴 수 있음을 호소한다. 공적인 위치를 떠나서도 그는 체질적으로 비상식, 비합리적인 인도인들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고 약속을 준수하는 것이 훌륭한 처신인 대부분의 영국인들에게 아지즈처럼 즉흥적으로 초대를 하고 곧 까맣게 잊어버리는 인도인들은 자치 능력이 없는 유아적 존재들이다. 영국인들은 그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무질서하고 비효율적인 인도인들의 소통이나 업무 방식에도 그들 나름의 질서와 효율이 있음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인도인의 비합리성과 이슬람, 힌두, 자인, 시크, 파시 등으로 분열되어 격렬하게 반목하는 인도의 종교적 갈등이 영국이 인도를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이자 핑계이다.
아지즈는 그저 호감의 표현으로 두 여성을 마라바 동굴(실제 이름은 바라바 동굴) 탐사에 초대한다고 했다가 피크닉 준비에 엄청난 출혈을 하게 된다. 홀아비로서 세 아이를 양육해 주는 처가에 봉급의 대부분을 보내고 빈한하게 살아가는 그는 빚을 내어 마라바 역에서부터 동굴 입구까지 이동 수단으로 코끼리를 대절하고 아침식사, 간식, 피크닉 장비 일체를 준비한다. 친지들의 하인들도 하루 빌리고 현지 가이드도 고용한다. 그러나 그의 손실은 금전적 출혈로 끝나지 않았다.
아델라가 동굴 안에서 그에게 성적인 습격을 받았다고 한 것은 살인적인 햇볕과 동굴의 메아리 효과 때문이었다. 아지즈가 백인의 함정에 빠졌다고 분노하는 인도인들과 백인여성을 욕보이려는 ‘검둥이’의 만행에 치를 떠는 영국인들의 대치상황이 인종 폭동과 군대에 의한 진압으로 발전될 뻔하지만 아델라가 동굴의 후유증을 극복한 후 성적인 습격은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고백해서 영국인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인다. 그러나 인도인들의 격분과 승리감은 여러 날 지속된다.
아델라는 비록 아지즈에게 재난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보통 여성으로는 그 상황에서 하기 어려운 고발의 철회로 그에게 생을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아지즈는 아델라의 용기나 선의를 인정하지 않고 그녀를 원수로 보며 피해의식에 집착한다. 영국인 사회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히면서까지 자기를 옹호한 필딩마저도 오갈 데 없어진, 폭동의 제물이 될 위험에 처한 아델라를 보호했다고 해서 증오한다.
2년이나 지난 후에 필딩과 재회해서 우정을 재확인한 후에 필딩의 설득에 승복하여 아델라의 용기와 정직성이 자신을 파멸에서 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에게 용서의 편지를 쓴다. 참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무한한 치유의 힘을 지닌 서신이다. 그러나 아지즈는 필딩에게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이와 더불어 인도로 가는 길이 지닌 또 다른 가치는 문학적인 아름다움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곳곳에서 은유와 상징들이 시적인 심상들을 빚어내고 예리한 관찰력과 빼어난 글 솜씨가 어우러진 묘사는 인도의 모습을 신비롭고도 강렬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 특히 마라바르 산과 신비의 동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작가의 상상력은 맹렬하고 거침이 없었다. 또 영국으로 돌아가는 무어 부인의 눈에 비친 인도의 마지막 모습, 크리슈나 탄신제의 풍경도 내게독특하고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로 가는 길’ 은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의식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통찰과 예술성을 두루 갖춘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터의 마지막 소설인 ‘인도로 가는 길’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심각함이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 포스터는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오만하고 거드름쟁이로 공격하고 있지만 ‘하워드 엔드’나 ‘전망좋은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결 같은 패러디로 일관하지 않는다.
인도와 영국 사이의 관계를 자유주의적으로 탐구한 이 작품의 핵심은 포스터가 모호함과 불안정의 공간으로 설정한 마라바르 동굴의 거대한 공허함이다. 이 동굴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이 무엇인지, 아니 무언가를 보기는 했는지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결혼하자마자 인도로 온 영국 여인 아델 퀘스토는 인도인 아지스 박사와 함께 동굴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무도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영국인들은 아지스가 그녀를 겁탈했다고 생각하지만 아텔은 그렇다고도, 그렇다고도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정에서 고소를 철회함으로써 같은 영국인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고소 취하도 이 사건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유부단이야말로 포스터의 근대적 미적 감각을 특징짓는다.
만약 강간 사건 재판이 이 소설의 플롯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면 아지스와 영국인 휴머니스트 무어 부인과 시릴 필딩 사이의 우정을 극적으로 뛰어 넘는 유대와 이해(포스터 문학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를 암시한다.
혹자는 이 소설을 인도의 초기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호의적인 묘사라고 평가한다. 거ㅡ러나 행간에서는 포스터가 인도인을 묘사함에서 그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이국적인 환상을 떨칠 수 없다고 평한다.(꼭 읽어야 할 1001권의 소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