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국악사의 흔적, 용동권번(龍洞券番)
수원문화재단 대표 김승국
관기제도는 조선조 전통예술의 보존 및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조가 일제에 합병되기 직전인 1908년에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권번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권번은 관기제도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권번은 일제강점기에 기생 조합을 이르던 것으로 노래와 연주와 춤을 가르치고, 기생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관리하면서 화대(花代)를 받아 주는 등 매니저 역할을 하였다.
권번은 서울의 한성, 평양의 대동, 부산에 동래, 인천에 용동, 개성에 개성, 남도의 한남권번 등이 있었다.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인천에도 관기가 사라지고 1912년에 인천 용동기생조합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던 것으로 미루어 1910년 전후 용동권번(龍洞券番)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동권번은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고, 이어 용동권번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고, 이후 인화권번으로, 다시 인천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 출신의 기생은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빠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로서 전통예술의 가·무·악(歌·舞·樂)에 두루 능하였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고 한다. 용동권번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 대중예술계에 유명 스타를 배출하기도 했다.
용동권번 출신의 재인으로는 기녀에게 기예와 학문을 가르치던 취헌 김병훈이 있었고, 기녀로는 1930년대 <초립동>, <화류춘몽>, 범벅타령, 꼴망태 목동> 등의 수많은 히트곡으로 민요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날린 가수 이화자(李花子)와 같은 레코드사 소속으로 1920년대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개성난봉가>, <경복궁타령>을 포함한 20여 곡의 서도잡가·경성좌창(京城座唱)·경기좌창(京畿座唱)·경성잡가(京城雜歌)를 방송한 김일타홍(金一朶紅), 일본인보다도 일본노래를 잘 불러 일본요정으로 단골출장을 다닌 이화중선(李花中仙), 춘원 이광수가 사랑했던 학생기생 변혜숙, 아리랑의 나운규와 사랑에 빠졌던 영화배우 오향선(유신방), 인천항에 입항한 중국 군함 함장의 마음을 빼앗아 출항 일정을 수 일 넘기게 할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닌 박미향, 훗날 영화계의 스타 계보에 올랐던 복혜숙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용동권번에서 재능과 미모로 유명세를 타다가 캐스팅 되었으며, 혹은 이미 알려진 배우였으나 경제적 여건으로 다시 권번에 들어오기도 했다.
인천의 용동권번은 해방 후에는 서울의 유명 인사들이 인천 용동으로 풍류 나들이가 잦을 정도로 요정촌(料亭村)으로 성수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인천시의 신도시 개발로 쇠퇴하여 소규모 식당들과 주점들이 남아 옛날의 흔적만 남아 있다.
얼마 전 인천 용동지역을 답사하다가 경동 신신예식장 자리에서 용동으로 내려가는 골목 계단 길에 ‘龍洞券番’이라고 가로로 음각된 계단석을 발견하였다. 용동이 권번 지역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보존해야 할 유형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통행로의 계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인천시 차원에서 시급히 보존 대책을 세워야한다.
용동 지역에는 권번이 자리 잡기도 했지만 1902년 조선황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협률사(協律社) 보다 훨씬 앞선 1895년 협률사(協律舍)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국내 첫 사설공연장이자 극장인 애관극장이 자리 잡고 있어 당대 명인들이 그 무대 위에 섰고 인근 율목동에는 재인들 즉 국악인들을 양성하는 국악원이 있었다. 용동권번 – 애관극장 - 율목동 소재 국악원 터는 관광벨트로 연동하여 개발해볼 필요가 있다.
용동권번은 한 때 국악의 명인들이 기예를 펼치던 명소로서 근대 한국국악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인천시는 시 차원에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 조사를 할 필요가 있으며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은 보존하고,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관광명소로 개발할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