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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분지(密陽盆地)를 둘러싼 일련의 산성(山城)과 산악(山嶽)을 연결”해 보면 일련(一連)의 산성은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의 산성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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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분지형 미리미동국 영역(領域)"
※밀양이 다른 지역보다 여름에 몹씨 더운 이유는 고기잡이 통발처럼 열려 대문 역할을 하는 용두목과 마암산 사이의 밀양강을 통해 남쪽의 무더운 공기가 밀려 들어와서 "반(半) 밀양분지"의 지형에 갇혀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위 위성 지도상의 밀양시 7 개 동(洞)인 內一洞ㆍ內二洞ㆍ校洞ㆍ三門洞ㆍ駕谷洞(南浦洞 포함)ㆍ龍平洞ㆍ活城洞과 부북면(府北面) 지역이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의 영역이며, 이 영역(領域)을 둘러싼 산성이 미리미동국의 산성(山城)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기 3세기 후반(250년 ~ 270년)의 한반도의 남한에 관한 기록으로 고대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서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은 우리 밀양의 고대국가”로 후세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우리 밀양인들은 말로는 "미리미동국이 밀양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이다" 라고, 말하지만 부끄럽게도 공식적으로는 미리미동국의 역사유물 및 역사유적지라고 밝혀온 것은 하나도 없는 매우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 있다.
또 밀양시립박물관에도, 관청 어디에도 미리미동국의 역사 유적물을 분명하게 정의한 것이나 유물이 하나도 없다.
몇 년 전에 우리 밀양 삼문동에 미리미동국과 관련한 명칭인 “미리벌초등학교”라는 새로운 학교가 생겨 밀양 고대국가 역사 보전 및 발전에 간접적인 기여를 하는 것에 대해 밀양 향토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애향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나, 이 학교에서도 미리미동국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는 어떠한 역사적 자료도 없다.
또 밀양문화원에서 1987년 발행한 『密陽誌』의 한 부분을 보면 “미리미동국이 고대 수산호(守山湖) 주변에서 발생하여 밀양의 부내면(府內面 : 洞지역) 및 부북면(府北面)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인 것 같고, 오히려 지금의 密陽府 관아와 밀양시청 부근에서 외곽 지역인 "고대(古代) 수산호(水山湖)" 등지로 고대 읍락국가인 미리미동국이 뻗어나간 것 같다.
즉, 『密陽誌』 409페이지 “고대 수산호와 그 주변 유적”을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前略> 이러한 지정(指定)을 근거로 하여 다시 생각해 보면, 밀양 지역은 삼국(三國 : 마한.진한.변한)중 변한지역의 읍락국가로 인정되는 미리미동국은 처음 이곳 수산제(守山堤)와 그 내지(內池)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점차 지금의 밀양읍(지금의 洞지역 등) 방면으로 그 중심권이 이동된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되는 것이다 <後略>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인류문화는 강이나 하천 주변에서 발생한다는 정설을 볼 때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고대(古代) 수산호(水山湖)가 없었더라도, 바로 옆에는 큰 낙동강이 있다.
2. 또 고대 수산호와 낙동강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반(半) 밀양분지에는 고대읍락국가가 들어서기에 매우 적합한 밀양강(응천凝川 = 사행천蛇行川이 더욱 발달하면 응천이 됨)이 있다.
3. 즉, 고대 수산호나 낙동강변이 미리미동국의 기원지가 아니고, 밀양강(응천)이 있는 지금의 부북면과 시내 지역인 밀양분지가 미리미동국의 발생지 및 영역으로 확실시 된다.
4.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지형적 요건으로 다음을 볼 수 있다.
밀양분지(密陽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화악산을 중심으로 동쪽과 남쪽으로는 철마산(위양리 도방동마을 뒷산)ㆍ말치고개ㆍ옥교산(무연마을 뒷산)ㆍ추화산ㆍ호두산(살내마을 뒷산)ㆍ산성산ㆍ자씨산(멍에실마을 뒷산)ㆍ용두산 등이 있다.
밀양분지(密陽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화악산을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으로는 고암산(고강산 = 꼬꾸랑산, 청운.덕곡마을 뒷산)ㆍ 조롱산(오례마을 뒷산), 우령산(사포마을 뒷산)ㆍ종남산ㆍ마암산으로 산악이 이어진다.
5. 위와 같은 일련의 산악 선상(線上)에서 고개나 하천 등으로 적(敵)이 용이하게 침입할 수 있는 전략적ㆍ전술적 요충지와 가까운 산 정상 등에 산성을 축성했으며, 그 산성들은 추화산성과 호두산성ㆍ자씨산성ㆍ청운산성ㆍ철마산성이며, 이러한 일련의 험준한 산악과 산성으로 둘러싸인 곳이 지금의 부북면과 시내 동(洞) 지역인 밀양분지이다.
밀양분지의 중심에 사행천(蛇行川)이 더욱 발달한 응천(凝川)이 있고, 그 응천 주변인 지금의 밀양시청과 밀양부(密陽府) 관아 주변이 미리미동국의 중심지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수도였다는 강력한 증거로 밀양공설운동장을 건설할 당시 토목공사 현장(지금의 밀양시청 뒷편)에서 다수의 고대 유적물이 출토되었고, “그 출토물은 국가가 관리하는 어느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라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행정 당국은 밀양분지 최고의 미리미동국 역사유적물인 산성들을 정확하게 조사하여 미리미동국의 산성임을 만천하에 선전하고, 보전하는 일에 우리 밀양인은 앞장서야 한다.
다시 설명하지만 산성은 한 개를 두고 볼 때는 어떤 국가와 관련이 있는 산성인지를 잘 알 수가 없다 즉, 그곳에서 유적물이 많이 나타나면 그 산성의 유래와 함께 그 지역의 역사를 찾을 수 있으나, 아주 오래된 산성 즉, 미리미동국이 형성된 시기가 서기 250년 즉, 거의 2천 년에 가깝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훼손 등으로 그 유적물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밀양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일련(一連)의 산성들의 지형적 특성인 여러 산들을 연결해 보면 그 산성들이 어느 시대의 산성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자씨산성과 호두산성, 추화산성ㆍ청운산성ㆍ철마산성은 조선시대 및 고려시대 산성이 아닌 것은 명약관화하다.
둘째
미리미동국이 가야시대에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 존재한 소국(小國)인 밀양의 읍락국가(邑落國家)로서 초기 미리미동국의 산성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산성은 국경이나 변방이 오랫동안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 축성하며, 빠르게 진격하는 통일전쟁을 할 때는 스쳐지나가지 머물면서 축성하지 않는다.
가야는 미리미동국을 일시적으로 일부를 점령했거나 영향을 미쳤다고 보이기에(萬魚寺와 夫恩庵 유래 등) 가야가 밀양분지를 점령하여 이러한 산성을 축성할 이유가 없었다고 보이며, 다만 가야 세력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미리미동국의 남쪽인 삼랑진 및 하남ㆍ초동지역으로 추정되므로, 가야가 지리적으로 지금의 이러한 산성들을 축성할 이유가 없었다고 추정되는 이유이다.
셋째
신라시대 산성도 아니다. 신라가 밀양지역(미리미동국 지역)과 그 남쪽과 서남쪽의 일부 지역인 삼랑진과 하남ㆍ초동 지역을 빠르게 점령하고, 낙동강을 건너 서진(西進)하였기에 신라가 이러한 산성들을 축성할 이유는 더욱 없다고 본다. 따라서 신라는 기존의 미리미동국의 산성들을 일시적으로 이용하고 서진을 하였다고 본다.
넷째
고려시대 산성도 아니다.
2024년에 한 역사 관련 단체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자씨산성이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라고, 하고 있으나, 손흥수와 도재국이 여러 번 주장을 하지만, 소국(小國)의 영역이 분지형일 때는 산성은 하나만 축성하지 않고 대체로 그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서 산악 등의 연결된 지형을 이용해서 그 지형 중에서 요충지 등에 여러 개의 산성을 연결해서 축성한다.
그리고 『密陽誌』와 『三國遺事』의 寶壤梨木 조(條)에 기록된 推火奉聖寺址에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삼국통일 대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청도(淸道) "한재"에 웅거한 도적 떼를 물리치기 위해서 추화 봉성사(推火奉聖寺)의 보양(寶壤)스님이 개(犬)의 습성을 이용한 비책(秘策)을 태조 왕건에게 제시한 내용이 나오지만 "密城(밀양)에 산성을 축성하고 장기간 주둔한 기록"이 없다. 만약에 慈氏山城을 高麗國에서 축성했다면 『三國遺事』의 寶壤梨木 조(條)의 推火奉聖寺址의 고려 태조 왕건의 통일전쟁 수행과 관련한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또 고려국 영역의 깊숙한 밀양이 도성(都城)도 행궁(行宮)도 아닌데 겹겹이 내성(內城)을 축성할 이유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추화산성과 자씨산성의 축성 년대가 다르다" 라고 하나, 손흥수와 도재국이 보기로는 같은 시대에 축성했다 라고, 볼 수 있다 즉, 분지형(盆地形)인 미리미동국의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서 지금의 밀양시 7 개동(洞)인 내일동ㆍ내이동ㆍ교동ㆍ삼문동ㆍ용평동ㆍ가곡동(남포동 포함)ㆍ활성동(활성1통)과 부북면을 둘러싸고 있는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서 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용두목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자씨산성(慈氏山城)ㆍ산성산(山城山 일명 일자봉一字峰)ㆍ호두산성(虎頭山城)ㆍ호두(虎頭)ㆍ월연정(月淵亭)ㆍ추화산성(推火山城)ㆍ범북산ㆍ옥교산(玉橋山)ㆍ말티고개ㆍ철마산성(鐵馬山城)ㆍ화악산(華嶽山)ㆍ앞고개(부북면 대항리와 무안면 동산리 경계의 고개)ㆍ청운산성(靑雲山城 일명 佳山山城) ㆍ고암산(高岩山 일명 꼬꾸랑산)ㆍ조롱산ㆍ마흘리고개ㆍ우령산(牛齡山)ㆍ방울재(일명 영현 鈴峴)ㆍ종남산(終南山)ㆍ남산봉수대(南山烽燧臺 일명 종남산봉수대 終南山烽燧臺)ㆍ마암산(馬岩山)으로 이어지는 마암산과 용두목 구간만이 밀양강으로 인해서 남쪽으로 약간 열려 있는 분지형의 영역이 초기 미리미동국의 영역이었으며, 이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서 위 5개(철마산성 포함)의 산성이 거의 같은 시대에 축성되었다고 보여진다.
혹자는 자씨산성과 청운산성이 고려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용도는 전란 시에 피난처로 사용된 산성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손흥수와 도재국이 여러 번 주장하지만 산성은 적의 장기적인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축성하며, 그 영역(미리미동국)을 빠르게 침략하면서 영토를 넓혀나갈 때는 산성을 쌓을 시간도 여력도 없기에 여러 개의 산성을 축성할 이유가 없다.
다시 언급하지만 자씨산성과 청운산성이 전란 시에 백성들의 피난산성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축성했다 하나, 전란이 한 시대에만 있은 것이 아니고 왜적은 천 년 이상 수백 번을 침략했고, 또 미리미동국은 주변의 여러 소(小) 가야 제국(諸國)과 초기(初期) 신라 등의 세력이 여러 번 침략하기도 했으므로 그러한 적들이 침략할 때마다 피난처로서 이용한 것은 추정할 수 있으나 "특정 시대인 고려시대에만 적들의 침입을 대비해서 백성들의 피난처로서 축성한 것"이 아니고, 그 앞전의 시대(미리미동국 등)에 축성한 성(城)을 후대의 여러 시대로 내려오면서 외적(外敵)이 침입할 때마다 주변 백성들의 피난처로 사용된 것은 분명해 보이며, 밀양의 중심부의 바로 인근에 있는 산성이므로 임진왜란 같이 무려 7년간 한반도를 부분적으로 점령했을 때는 이러한 산성들이 이미 백성들과 왜적들 사이에 성(城)의 위치가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외적(外敵) 특히 왜구나 왜적(倭敵)이 모를리가 없었기에 피난처의 산성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며, 또 그 이전인 고려시대에도 일시적 또는 장기적인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서 성(城)을 축성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여지고, 다만 옛날부터 있었던 산성에 일시적으로 피난을 한 것으로는 추정된다.
그리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한 후 1914년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밀양군의 비지(飛地 일명 월경지越境地:
월경지越境地는 한자로 풀이하면 '경계 너머의 땅'이라는 뜻으로, 본래 조선 시대의 행정구역에서 소속 군현郡縣의 관할구역에서 떨어져서 다른 군현 사이에 있는 땅을 뜻하는 용어였다)의 영역이었던 밀양에서 무려 120 리나 떨어진 밀양군 고며면(古旀面: 현재의 경북 청도군 운문면의 水北地區)과 운문댐 주변의 공암리(孔巖里) 지역은 인적이 드문 지역으로 전란 시에 피난처로 이용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례가 있어, 밀양부(密陽府)의 본부(本府)와 지척인 자씨산성과 청운산성은 피난 산성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명이 된다.
즉, 밀양문화원에서 발간한 密陽文獻輯覽 第1號 『國譯 密州誌 地理編』 2001년, 399~401 페이지에는 "山水深險故壬辰之亂賊鋒不能探搜府人之避亂者甚衆(산수심험고임진지란적봉불능탐수부인지피란자심중:산수가 깊고 험한 까닭에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 찾아낼 수가 없어 고을(밀양) 사람으로서 피난했던 사람이 매우 많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자씨산성을 축성하여 피난산성으로만 이용했다는 것은 문헌으로 충분한 증거가 밝혀진 바가 없다. 즉, 옛날에 축성한 산성들을 후대(여러 代)에 피난처로서 사용했을 뿐이다.
●위의 노란선 안은 임진왜란 등 전란(戰亂) 시에 밀양 사람들의 피난처(避亂處)로 많이 이용되었던 밀양(密陽)의 비지(飛地=월경지越境地)인 "밀양군(密陽郡) 고며면(古旀面)의 대략적인 영역(領域)"
●운문댐 북쪽 밀양군의 비지(飛地 일명 월경지 越境地)를 보여주는 위성지도이다.
※1914년까지 운문댐 북쪽 깊숙한 곳에 밀양의 영역에 속한 땅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밀양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운문댐 북쪽에 지금의 경북 청도군 운문면의 법정리(法定里)인 공암리ㆍ지촌리ㆍ봉하리ㆍ마일리가 있는데, "지촌리ㆍ봉하리ㆍ마일리가 1914년까지 밀양군의 비지(飛地 일명 월경지越境地)"로 있었다.
※이 지역은 청도군과 경산시ㆍ영천시ㆍ경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정상리의 높은 고개를 넘어면 경산시로 통하고, 마일리에서 높은 고개를 넘어면 영천시로 통하고, 지촌리 입구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경주시 산내면과 건천읍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나, 옛날부터 은둔의 땅으로 여겨졌다.
※손흥수와 도재국은 오래전에 이 지역을 전부 구석구석 답사한 적이 있다.
또 자씨산성을 2024년에 창원에 소재한 한 역사 단체가 조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즉, "1960년대에 산성 내부를 뽕밭으로 개간하면서 훼손이 되었고, 최근에도 조림사업이 이루어져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고, 고려시대 기와와 회청색 경질토기가 확인되고, 조선시대 자기편도 확인되었다 하여 고려시대에 조성되어 조선시대까지 운영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하였다.
이 조사에 대해 손흥수와 도재국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에 뽕밭을 조성할 때는 중장비가 크게 이용되지 않았기에(주로 인력으로 개간하였기에) 유물의 훼손이 크게 되지 않았다고 보이나, 그 이후 20여 년전에 한 조경업자가 산성 내부를 중장비로 완전히 파헤쳐 훼손하여 조경수를 심는 과정에 향토사학자 손흥수 선생이 현장에 올라가서 산성 터를 훼손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그 업자는 산성 터를 이미 완전히 훼손하였기에 만약에 고려시대 이전의 산성을 축성한 증거가 되는 유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그때에 훼손되었기에, 2024년에 조사할 때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2024년 현재 상태로 산성 터 내의 잔존 유물 조사"로써 자씨산성이 고려시대 산성이라고 추정할 수가 없다 라고, 본다 .
※1960년대에 제 고향 신당(新塘) 마을 뒷산에도 신(申) 모(某)씨가 5,000평 정도의 산지를 개간하여 밭으로 이용했는데, 순전히 인력으로 개간하는 것을 보았다.
또 아주 오래전에 축성한 산성의 최초의 유물은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유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그 후대에 그 산성을 이용한 사람들이 원래의 유물을 훼손하고, 후대에 이용한 사람들과 관련된 유물만 발견될 수도 있고, 그런 후대의 유물로써 그 시대의 산성으로 추정하는 것은 최초의 산성임을 조사하는데 부정적인 문제를 일어킬 수도 있다.
위와 같이 밀양분지를 둘러싼 추화산성ㆍ호두산성ㆍ자씨산성ㆍ청운산성ㆍ철마산성의 주변 소(小) 국가와의 연관성을 살펴볼 때 가야와 신라ㆍ고려는 미미리미동국이 축성한 이러한 산성들을 일시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추정된다.
밀양의 일부 향토사학가들은 미리미동국이 가야에 병합되지 않고, 신라에 바로 복속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 본다. 그 이유는 손흥수와 도재국이 오래전에 여러 산성을 답사하면서 발견한 밀양의 고대산성(백마산성ㆍ자씨산성ㆍ청운산성 등)에서는 빠짐없이 오래된 토기 및 자기들이 발견되었고, 문헌에는 밀양의 고대 사찰로 영정사(표충사의 전신으로 인도에서 온 승려 등 언급) 및 부은암(삼랑진 천태산 소재), 모은암(김해 무척산 소재), 자은암(김해 봉하마을 뒷산 소재) 등 가야 계통의 설화가 언급된다. 다시 설명하면 영정사 창건설화에는 얼굴이 누른 황면선사(부처님을 닮은 얼굴)가 등장하고, 부은암(삼랑진 천태산 소재)과 모은암(김해 무척산 소재)은 남방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어, 그 당시 밀양의 일부 지역은 김해 지역과 같이 가야권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즉, 영정사(靈井寺)는 인도스님(서역에서 온) 황면선사(黃面禪師 : 부처님과 닮은 얼굴 )가 창건했다는 설화의 전래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미리미동국은 초기에는 밀양분지를 중심으로 기원을 하였고, 그후 현재의 밀양시 전역으로 팽창되어 나갔고, 팽창된 미리미동국의 일부는 가야권에 점령을 당했거나, 아니면 가야문화권에 속했다고 보여지며, 그후 미리미동국은 서진(西進)하는 신라에 최종적으로 복속당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추화산성 및 호두산성ㆍ청운산성ㆍ자씨산성ㆍ철마산성은 밀양인의 얼이 담긴, 밀양을 최초로 건설했던, 밀양인의 자랑스러운 고대국가인 미리미동국을 방어했던 산성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풍문에 의하면, 밀양 어떤 사람들은 이런 중요한 밀양의 산성들에 대해서 “어떤 시대에 축성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또 “누가 또 왜 축성했는지도 알 수 없다” 또 “이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산성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희박하다” 또 “따라서 보전할 가치가 별로 없다” 라고 했다 한다.
이 무슨 무지하고, 수치스러운 말인가?
우리 밀양인 즉, 행정 당국은 이 5개의 산성을 철저히 조사하여 최대한 원형대로 복원하고, 영원토록 보전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밀양분지를 둘러싼 일련의 산성 및 산악을 연결”해 보면 “미리미동국의 산성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들의 주장에 대해서 반대를 하시고자 하는 분은 어떠한 누구라도 그 반대의 증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당신들의 이야기가 잘못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고, 만에 하나 유구한 미리미동국의 산성을 "한참 후대인 고려시대의 한낱 피난 산성으로 격하(格下)"시킨다면 이는 자랑스러운 밀양 최초의 고대읍락국가였던 미리미동국의 역사를 없애는 일이며 또 그 위상을 추락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분들의 주장이 옳다면 미리미동국의 역사 유적지는 어디이며 어떤 것이 남아있는지를 반드시 찾아서 밀양시민에게 밝혀야 한다.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반대만하고, 틀렸다 하고, 말 안 하고 침묵만 하면 아득하게 묻혀버린 밀양 고대사 즉, 미리미동국의 역사를 찾는 일에 한 걸음조차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손흥수와 도재국이 오래전에 밀양의 여러 산성을 조사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이 볼 수 있고 또 추론할 수가 있다. 즉, 밀양에는 산성이 전국에서 제일 많은 지역 중의 한 곳이다. 밀양에 산성이 많은 이유는 "孝心의 亂"과 같이 가렴주구하는 고려 무인정권에 항거한 백성들의 대규모 민란과 이를 도륙하는 관군에 맞서 일시에 급하게 축성한 소천봉산성ㆍ보두산성ㆍ대암산성과 왜적이 북상하는 길목인 밀양이 들판이 넓고 기름지고, 산 높고 골이 깊고, 농사짓는 풍부한 강물이 넘실대어 이를 바탕으로 수천 년 동안 년년세세 풍년이 드는 밀양을 탐내는 외부 세력이 많았기에 이를 방어하기 위해 백마산성과 덕대산성ㆍ무흘산의 입성산성 등을 축성했다 라는, 증거이다.
우리 선조들은 아름다운 이 땅을 목숨바쳐 지켜 왔다. 따라서 우리 밀양을 지켜온 소중한 국방유적(國防遺跡)인 산성을 우리 후손들에게 잘 보전토록해야 한다.
산성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이 소중한 밀양땅을 지키고 우리들에게 물려준 조상에 대한 후손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맞은편의 경북 청도군 청도읍 소재의 오례산성은 역사적으로 밀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밀양의 산성"에 같이 등재하며, 밀양의 산성을 읍ㆍ면ㆍ동별 분포 현황과 방어 대상, 축성 시기 등을 다음과 같이 추정하여 작성한다. 정확한 내용 조사는 행정 당국에서 반드시 할 일이다.
■ 밀양(密陽)의 산성(山城) 분포도(읍.면.동별) 현황
연번, 산성(山城) 명칭(名稱), 위치, 비고
1 삼랑산성(三郞山城) : 삼랑진읍 삼랑리 낙동강변 산 정상부
2 화성(火城) : 삼랑진읍 미전리 산 정상부, 밀양강변
3 입성(立城) : 삼랑진읍 미전리 산 정상부 국도 인근
4 덕대산성(德大山城) : 하남읍 남전리.초동면 덕산리 경계 덕대산 정상부
5 청운산성(靑雲山城) : 부북면 청운리.가산리 경계 고암산 정상부
6 철마산성(鐵馬山城) : 상동면 옥산리 및 경북 청도읍 한재 경계 철마산 정상부
7 화산성(火山城) : 상동면 옥산리 및 청도읍 한재 경계 철마산 인근
8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 : 상동면 도곡리.신곡리 경계 소천봉 정상부
9 보두산성(步斗山城) : 산외면 엄광리.상동면 가곡리 보두산 남쪽 능선
10 대암산성(臺岩山城) : 산외면 희곡리.산내면 용전리 경계 동천변 양쪽
11 백마산성(白馬山城) : 단장면 바드리 마을 뒷산 백마산 정상부
12 밀양읍성(密陽邑城) : 내일동 무봉산(일명 아동산) ~ 아북산
13 추화산성(推火山城) : 교동 추화산 정상부
14 자씨산성(慈氏山城) : 가곡동.활성동.삼랑진읍 숭진리 경계 산성산 남쪽
15 호두산성(虎頭山城) : 활성동 살래마을 뒷산(단장천변)
16 오례산성(五禮山城) : 경북 청도군 청도읍 오례산 정상부
■ 밀양(密陽)의 산성(山城), 방어(防禦) 대상
연번, 산성(山城) 명칭(名稱), 방어(防禦) 대상, 비고
1 삼랑산성(三浪山城) : 삼한시대(후기 미리미동국), 왜구(倭寇)
2 화성(火城) : 조선시대, 왜적(倭敵)
3 입성(立城) : 조선시대, 왜적(倭敵)
4 덕대산성(德大山城) : 삼한시대(후기 미리미동국) 및 신라시대, 왜구(倭寇)
5 청운산성(靑雲山城) : 삼한시대(초기 미리미동국), 가야 및 비사벌(창녕). 이서고국(청도)
6 철마산성(鐵馬山城) : 삼한시대(미리미동국), 이서고국.신라
7 화산성(火山城) : 조선시대, 왜적(倭敵)
8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 : 고려시대(明宗) 효심(孝心)농민군, 관군(官軍)
9 보두산성(步斗山城) : 고려시대(明宗) 효심(孝心)농민군, 관군(官軍)
10 대암산성(臺岩山城) : 고려시대(明宗) 효심(孝心)농민군, 관군(官軍)
11 백마산성(白馬山城) : [후기 미리미동국시대, 왜구(倭寇)]
[조선 선조 임진왜란 박명복(밀성인) 창의(倡義), 왜적(倭敵)]
12 밀양읍성(密陽邑城) : 조선시대 읍 방어용, 임진왜란 시 왜적(倭敵)
13 추화산성(推火山城) : 초기 미리미동국(삼한시대), 가야. 왜구
14 자씨산성(慈氏山城) : 초기 미리미동국(삼한시대), 가야. 왜구
15 호두산성(虎頭山城) : 초기 미리미동국(삼한시대), 가야. 왜구
16 오례산성(五禮山城) : 신라초기 이서고국 산성, 신라(이서고국 전투)
※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 및 보두산성(步斗山城), 대암산성(臺岩山城)은 “효심의 난”과 관련이 있다.
밀양지역은 우리나라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지석묘(고인돌) 및 고분(古墳)은 많이 존재하나, 능(陵)은 전무한 상태이며, 이는 밀양지역이 기름진 농토와 풍부한 수자원으로 인해 주변 강대세력이 탐내는 지역으로 고대에는 오랜 세월동안 왜구와 왜적의 참략과 강성 세력의 각축장이었고, 미리미동국은 이러한 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미리미동국시대부터 산성을 축성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1. 밀주지
2. 밀주지리지 국역본(밀양문화원)
3. 밀양지(밀양문화원)
4. 미리벌의 얼(밀양군)
5. 밀양지명고(밀양문화원)
6. 대동지지
7. 대동여지도
이 글은 오래전에 밀양의 향토사학자 손흥수와 도재국이 같이 조사하여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에 올리고, 밀양향토사연구회의 회지인 『밀양이야기』에 기고한 내용을 2024.11.4 현재 일부 내용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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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밀양부(密陽府)에서 무려 120 리나 떨어진 전란(戰亂) 때에 밀양 사람들이 많이 피난(避亂)한 밀양의 비지(飛地:월경지越境地)에 관한 내용이 있는 글이다.
●관련 글 1 :
밀양향토사연구회 년보(年報) "밀양이야기 제8호(2017년)" 기고문, 『고려시대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P517/12?svc=cafeapp
●관련 글 2 :
[축소판] 고려시대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P517/7?svc=cafeapp
●이상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史料)조사위원
도재국(都在國) 올려드립니다.
●성주도씨(星州都氏) 연원 :
○성주도씨 上系의 受姓始祖 都稽는 중국 漢나라 武帝 때 중국 남부지방인 南越國(現在 廣東省ㆍ홍콩특별행정구ㆍ廣西壯族自治區ㆍ海南省ㆍ북부 베트남 등을 평정하여 漢나라에 편입시켜 臨蔡侯를 봉작받았다.
※근거 : 사마 천(司马迁,司馬遷)의 『史記』
○도조(都祖)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 비류(比流)ㆍ온조(溫祚)와 왕권 쟁탈전을 벌일 때 유리(琉璃)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이라고 한다.
○도유(都儒)는 신라에서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상천후(尙川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都彌는 百齊 정승이다.
○都陣은 高麗 政丞과 星山府院君을 지냈다.
○都順은 고려 典理尙書를 지냈으며, 起世祖이다.
○都吉敷는 문하찬성사(現 국무총리급)로서 麗末鮮初에는 이성계와 함께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왜구를 물리치며 참전하였으나 최영과 이성계 일파로부터 염흥방 家奴의 토지탈점 사건에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적몰되었다. 이 사건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星州都氏 문중이 크게 위축된 게기가 되었다.
○도신수(都愼修)는 조선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부사(咸興府使) 등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現世에는 제32대 육군참모총장 도일규 장군과 기업인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도종이 등이 있다.
○현재는 대구ㆍ경북지역에서 성주도씨문중이 큰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칠곡향교"의 터를 성주도씨문중에서 희사하였으며 향교내에는 그 내력을 알리는 비석이 있으며, 또 都仁錫이 현재 대구향교의 전교의 중임을 맡는 등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
○성주도씨대종회 사무소 : 종전의 대구 광역시 중구 대명동 소재 3층 규모의 큰 대종회 사무소를 2024년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鋤齋里)에 더 크게 4층 규모로 이전, 신축했다.
※성주도씨(星州都氏)는 일명 팔거도씨(八莒都氏)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성주목(星州牧)의 영역은 지금의 경북 성주군과 칠곡군 지천면(옛 명칭 팔거)ㆍ대구광역시 북구 일대ㆍ달성군 일부 등이었으며, 조선시대 행정단위 목(牧)은 지금의 특례시 정도의 규모였음.
※성주도씨의 연원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C1ra/108?svc=cafeapp
※무진화변(戊辰禍變)과 역사의 진실(도길부都吉敷 관련)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4451?svc=cafeapp
※자기 근본도 모르면서 향토 역사를 논한다는 이야기가 있을까봐 먼저 제(도재국) 문중에 대해서 위와 같이 소개했습니다.
●사우당(四友堂) 도만추(都萬秋) 대구(大邱)에서 밀양(密陽) 입향(入鄕) 전거(奠居) :
성주도씨 서재공파(鋤齋公派) 후손 지파문중의 사우당(四友堂) 도만추(都萬秋:入密陽祖)가 조선 현종(顯宗) 때 대구(大邱)에서 밀양 사포 신당(新塘)마을에 전거(奠居)함.
●도재국 약력 :
○73세(2024년 현재), 밀양 출신.
○본관(本貫) : 성주(星州).
○성주도대종회 이사(現).
○평생을 밀양 향토사(鄕土史) 조사 및 연구.
○1973.10.1~2012.6.30 : 밀양시청 공무원 39년 재직 후, 2012.6.30 정년 퇴직.
○밀양문화원 부설 밀양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前).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前).
○밀양향토사연구회 지도위원(前).
○1982~2024 현재까지 42년째 손흥수(孫興銖)와 함께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을 민족의 명산(名山)인 영남알프스의 중심에 있는 「재악산(載嶽山=載岳山,해발 1189m)으로 山名 복원 운동」중임.
※재악산(載嶽山=載岳山) 산명 증거와 홍보 글은 전부 「daum cafe 밀양광장」에 실려있으며, 글과 관련 사진의 분량은 A4용지로 5,000 페이지 정도가 됨.
●2017.2.12 표충사 일주문에 편액한 현판 : 《載岳山 表忠寺》
표충사의 일주문(一柱門)에 현판을 《載岳山 表忠寺》으로 걸어놓은데도 불구하고 《載藥山》이라 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주문의 글씨는 2017.3.12 통도사의 방장인 《원명지종 큰스님》이 적고, 현판식 제막식 때도 표충사 주지 《도원법기 큰스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2017.8.17 표충사 산문(뒷편)에 편액한 현판 : 《載嶽山門》
표충사의 산문(山門)에 현판을 《載嶽山門》으로 걸어놓은데도 불구하고 《載藥山》이라 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산문의 글씨는 2017.8.17 조계종의 종정인 《진제법원 대종사》가 적고, 현판식 제막식 때도 표충사 주지 《도원법기 큰스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위와 같이 표충사의 일주문에는 載岳山, 산문에는 載嶽山이라는 현판을 걸어놓았다.
※嶽의 약자는 岳이다.
●그러나 국토지리정보원은 1961년에 "《天皇山》"이라 지명고시했다.
●그런데 2024.11.20(일) 밤 9:40~10:30에 KBS 1 TV에서 방영한 "아주 史적인 여행"라는, 프로그램에는 "재약산"이라는 크다란 자막이 떴다. 이것은 한문으로 "《載藥山》"이라는 뜻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은 天皇山을 사용한다
●표충사는 載岳山(載嶽山)을 사용한다
●KBS는 載藥山을 사용한다
※KBS가 載藥山이라고 자막을 띄운 것은
①본 프로그램팀의 결정인가?
②밀양시의 결정인가?
③국토지리정보원의 결정인가?
방송을 한 KBS는 대답하라.
●즉, 하나의 산을 두고 제각각 이 모양이다
●도대체 왜 이럴까?
●국민이 헷갈린다.
●책임이 있는 기관에서는 하루속히 "원래의 산명인 載岳山(載嶽山)"으로 정립하라.
○1997~2024 현재까지 28년째 손흥수와 함께 「남산(종남산)봉수대」 원래 위치로 복원 운동중임(밀양 백산봉수대 및 김해 자암봉수대 연계 조사).
○손흥수와 함께 밀양의 산성(山城) 16개소 현장 전수 조사.
○손흥수와 함께 「고려시대(高麗時代) 밀성(密城=密陽) 효심(孝心)의 난(亂)」 조사.
○손흥수와 함께 베일에 쌓였던 고려 공민왕 때 「김용(金鏞) 정승(政丞)」의 밀양시 단장면 원구천 정승동(政丞洞) 유폐(幽閉) 조사.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오졸재 박한주 선생ㆍ송계 신계성 선생을 향사지내는 경남 밀양 소재 예림서원(禮林書院) 장의(掌議 : 前).
○2020~2024 현재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史料)조사위원.
○손흥수와 함께 1914년까지 「밀양의 비지(飛地=월경지 越境地)」로 남아 있었던 밀양부(密陽府)에서 120 리(里)나 떨어진 경북 청도군 운문면 수북지구(水北地區) 답사.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동남권 신공항 밀양 유치 운동」을 10년 가까이 사적(私的)으로 전개(상세 내역은 「daum cafe 밀양광장」에 있음).
○일제(日帝)가 부설한 「경부선 밀양강철교」 보존 운동 관련 글을 「daum cafe 밀양광장」에 다수 기고.
○손흥수와 함께 밀양 향토사(鄕土史) 및 지명(地名) 조사 다수.
※손흥수(孫興銖)는 84세(2024년 현재)로 도재국(都在國)의 밀양 향토사 스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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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daum에서 밀양광장을 검색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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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재악산(載嶽山)과 밀양광장을 홍보하는 사진입니다
●아래는 2024.11.11 현재 밀양광장에 카페지기 도재국이 올려놓은 본글의 수량이 18,563 건이고, 댓글의 수량이 1,000 건입니다.
●이 중에서 재악산(載嶽山) 산명을 증명하고 또 홍보하는 글과 사진의 분량이 A4용지 분량으로 5,000 장 정도됩니다.

첫댓글
표충사의 일주문(一柱門)에 현판을 《載岳山 表忠寺》으로 걸어놓은데도 불구하고 《載藥山》이라 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주문의 글씨는 2017.3.12 통도사의 방장인 《원명지종 큰스님》이 적고, 현판식 제막식 때도 표충사 주지 《도원법기 큰스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표충사의 산문(山門)에 현판을 《載嶽山門》으로 걸어놓은데도 불구하고 《載藥山》이라 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산문의 글씨는 2017.8.17 조계종의 종정인 《진제법원 대종사》가 적고, 현판식 제막식 때도 표충사 주지 《도원법기 큰스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위와 같이 표충사의 일주문에는 載岳山, 산문에는 載嶽山이라는 현판을 걸어놓았다.
※嶽의 약자는 岳이다.
●그러나 국토지리정보원은 1961년에 "《天皇山》"이라 지명고시했다.
●그런데 2024.11.20(일) 밤 9:40~10:30에 KBS 1 TV에서 방영한 "아주 史적인 여행"라는, 프로그램에는 "재약산"이라는 크다란 자막이 떴다. 이것은 한문으로 "《載藥山》"이라는 뜻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은 天皇山을 사용한다
●표충사는 載岳山(載嶽山)을 사용한다
●KBS는 載藥山을 사용한다
※KBS가 載藥山이라고 자막을 띄운 것은
①본 프로그램팀의 결정인가?
②밀양시의 결정인가?
③국토지리정보원의 결정인가?
방송을 한 KBS는 대답하라.
●즉, 하나의 산을 두고 제각각 이 모양이다
●도대체 왜 이럴까?
●국민이 헷갈린다.
●책임이 있는 기관에서는 하루속히 "원래의 산명인 載岳山(載嶽山)"으로 정립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