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구절은 불법의 이치를 가장 선명하게 압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겠다. 색상이 있는 모든 현상은 다 본성에서 공하고, 공한 본성은 다 색상이 있는 현상으로 나툰다는 의미는 현상과 본성의 관계를 풀이한 가르침이라 여겨진다. 두 구절이 각각 다르다. 전자는 모든 소유론적 현상의 무상함을, 후자는 모든 존재론적 현상이 공의 본성에서 자발적으로 생기한 공의 보시임을 가르친다고 생각된다. 소유론적 현상은 결과적으로 환상이고, 존재론적 현상은 실상임을 말한다고 여겨진다. 같은 현상이 환상이면서 실상이다. 그런 분기점을 낳게 하는 것이 자아의 유무(有無)다. 자의식에 축을 둔 마음은 필연적으로 현상을 소유하려고 집착한다. 주관이 객관을 장악하려는 마음을 낸다. 자아는 현상을 여여하게 보지 않고 나의 소유물로 보려는 마음을 일으킨다. 구업(口業)은 무소유의 삶 곧 허무한 삶인 것처럼 말하는 사회관습에 인간을 젖게 했다. 의업(意業)은 개별적인 명사의 개념을 실체라고 집착하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키웠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대상을 먹으려는 충동을 신업(身業)으로 자라게 했다. 식욕과 성욕, 생각의 집념과 인식작용은 다 대상을 먹으려 하는 신업의 소유욕과 무관하지 않다. 삼업(三業)이 다 현상을 소유론적으로 보게끔 한다. 그 삼업의 진원지는 자아(自我)다. ‘색즉공’은 자아의 본질인 소유욕을 해체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그 구절은 소유의 무상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몸이 더럽고, 느낌이 고통스럽고, 마음이 덧없고, 제법을 소유하려 해도 하나도 내 것이 안되는 유루법(有漏法)을 터득케 한다. 일체가 다 꿈이나 거품과 같다. 현상은 다 환상이다. 『금강경(金剛經)』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마음이 무아에로 회심하면, 현상을 환상으로 보기보다 오히려 여실한 실상의 존재로 보게 된다. 실상의 존재는 만물이 자기 것을 소유하고 있는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 단지 차이를 구분 짓는 이름의 기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름은 만물의 색상이 다르면서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의타기적 가유(假有)를 표시하기 위해서다. 환상의 현상은 소유적 자아의 탐욕을 부수지만, 실상의 현상은 우주법계의 공성이 스스로 보시하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무언설법과 같다. 법신불(法身佛)은 허공이고 일심(一心)이다. 허공이 왜 일심인가? 허공은 죽은 공허한 터전이 아니라, 만물의 생멸을 무한히 반복시키는 보이지 않는 바탕으로서 마치 무아의 마음이 자신을 끝없이 나투고자 하는 원력과 같다. 그래서 허공을 일심이라 부른다. 일심은 우주적 마음이라 해석된다. 진공의 법성이 일심이므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언명이 가능해진다. 진공인 우주적 마음은 스스로 고갈되지 않는 무한의 힘을 현상화하려는 보시의 기운을 나툰다. 법신불은 곧 다함이 없는 힘을 증여하려는 절대적 무아의 마음과 같다. 이 무아의 마음이 무량한 존재로 솟아나려는 원력이 된다. 이것이 곧 보신불(報身佛)이다. 보신불은 법신불이 스스로 솟구치는 힘이다. 이것을 자수용신(自受用身)의 보신불이라 부른다. 그 보신불은 법신불의 원기(元氣)와 같으나 현상화됨에서 마음의 기틀에 따라 수없이 다양하게 시여된다. 이것이 타수용신(他受用身)의 보신불이고, 또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이다. 무아의 마음에서 이 우주를 보면, 이 세상 두두물물은 다 법신불의 분화요, 보신불의 물화인 셈이다. 심지어 바위나 광물도 잠자는 일심의 상태일 뿐이다. 소는 뿔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받으려는 마음이 뿔을 솟게 했고, 벚꽃은 아름답게 산화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일시에 피었다가 함께 휘날린다.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의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성부, 성령, 성자의 것과 유사하다. 기독교의 것이 너무 인간적 의미로 좁혀지는데, 불교의 것은 우주적 의미로 펼쳐진다. 지금은 후자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런 시대다. 인간중심주의가 인상(人相)뿐만 아니라 아상(我相)을 낳는 진원지임을 인류가 깨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