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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요유 (逍遙遊) 원문보기 글쓴이: 山木
The Joy of True Meditation
제프 포스터 Jeff Foster
FOREWORD
BY KELLY BOYS(캘리 보이즈)
Life has a simple and fiercely kind invitation for us: to be as we are the in the face of what is.
인생은 우리에게 우송된
무척이나 친절한 초대장이다.
존재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되라.
True meditation, an easily disappearing yet well-worn path on the journey home to ourselves, is both difficult to define and predictably trustworthy in its unfolding. It encompasses a genuine encounter with all of who we are, as well as all of who we take ourselves to be that won’t hold up in the light of honest, compassionate inquiry. The path unfolds along essential lines, along emotional and existential crevices and outcroppings that life displays within and around us.
참된 명상은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쉽게 사라지지만 낡은 길이며,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 전개에 있어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누구인지, 그리고 정직하고 동정심 어린 탐구에 비추어 볼 때 유지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만남을 포함합니다.
그 길은 본질적인 선을 따라, 삶이 우리 안팎에서 보여주는 정서적, 실존적 틈새와 돌출부를 따라 펼쳐집니다.
To accept the invitation to this essential journey home requires courage. Oddly enough, sometimes that courage shows up as a desperation, a surrender, an up-giving… or as total and complete ‘cowardice’ as we can’t bear to look, to feel, to experience whatever is here.
본향으로 가는 이 필수적인 여정으로의 초대를 받아들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상하게도, 때때로 그 용기는 절망, 항복, 포기로 나타납니다.
또는 우리가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없는 총체적이고 완전한 '겁쟁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And yet, here we still are. Asleep, awake, leaning in, leaning out, encountering this present moment.
Just as we are.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습니다.
잠들어 있건, 깨어 있건 지금 이 순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내면에 기대거나, 외부에 의존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True meditation is vividly relational. It is an ultimate encounter with what is real: with a clear, direct seeing of truth in any form in our lives. This clear seeing of what is present—be it an emotion, a thought, a misperception, a moment of joy, or the deepest essence of things—is a relational, intimate gesture. This gesture invites us to embody a warm, holding presence, an unflinching capacity to fundamentally welcome and be all of the beautiful muck and mess of the human life. It is deeply intimate and leaves nothing out. It forsakes nothing, and includes everything. The moment itself contains within it the seeds of all we need to meet the moment.
참된 명상은 생생한 관계에 있으며, 실제와의 궁극적인 만남입니다.
참된 명상은 우리 삶에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진리를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보게 합니다.
감정이든, 생각이든, 오해이든, 기쁨의 순간이든, 사물의 가장 깊은 본질이든, 현재 존재하는 것을 명확하게 보는 것은 은밀한 관계의 몸짓입니다.
이 몸짓은 우리를 안온하게 유지해주고, 우리를 누구한테나 환영받는 존재로 만들어 주고, 근본적으로 아름다운 인간 삶으로 이끌수 있는 불굴의 능력을 구현하도록 초대합니다. 그것은 매우 친밀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 순간 그 안에는 우리가 그 순간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의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As we meet and welcome whatever comes, feeling our breath, bodies, the pulsing existence at our core, we become welcoming itself. We discover, as we lean in, that this welcoming presence is essential to who we are.
우리가 내쉬고 들이쉬는 호흡, 신체의 각 부위, 가슴 한 가운데에서 맥박을 치고 있는 존재- 그것이 무엇이든,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만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됩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게 됩니다.
As we lean in to our breath, feelings, emotions, sensations, and thoughts, we discover things aren’t as we thought they were.
The fear is less scary than it seems, the anger less threatening.
자신의 호흡, 느낌, 감정, 감각, 생각에 몸을 기울일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러리라고 여겨왔던 것들과 같지 않다.
두려워하던 것도 생각만큼 두려워할 게 아니고
분노 또한 급박한 게 아니다.
Even self-refusal is welcomed; in fact, all inner violence and struggle, in the act of being welcomed as is, now encounters the true meaning of nonviolence.
As we come home to ourselves in this way, we begin to rest.
심지어 자아 거부도 기꺼이 반기며,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투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폭력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때, 우리는 쉬기 시작한다.
THE DISCOVERY OF TRUE MEDITATION
we are all ultimately on the same journey back home… to the present moment. To the here and now.
우리 모두는 결국 집으로, 이 순간으로
지금 이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있다.
From as early as I can remember, I believed that there was something profoundly wrong with me. I felt sick and broken and ugly inside; unworthy of love, a mistake of a human being; damaged beyond redemption, beyond hope. The terror of abandonment, and with it the terror of death itself, lurked deep within my bones and made me afraid and ashamed to live. I walked through the streets hunched over, hiding my face. I would never make eye contact with anyone for more than an instant; I was convinced they would flee in disgust if they saw into me.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가면, 매우 잘못된 뭔가가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내면은 구역질이 나고 비통하고 추악했다.
사랑은 무가치 했고 인간에게는 실망만 가득했으며, 상처는 치유할 수 없었고, 희망 따위는 멀고도 먼 일이었다.
포기에 대한 공포 죽음의 공포가 뼈 속 깊은 곳에 숨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고, 살아 있음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I was exhausted all the time, profoundly tired on a very deep soul level. Entire school holidays I would spend hiding in my bedroom, numbing myself with computer games, movies and food, and generally longing for a different life. I ached and had tensions all over my body, which I saw as an enemy and was repulsed by.
나는 늘 지쳐 있었다. 영혼 깊숙한 곳까지 완전히 피곤해 절었다.
다른 삶을 갈망하면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며 목구멍 너머로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으며, 나 자신을 마비시켰다.
온몸이 아팠고 스트레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적으로 보고 혐오감을 느꼈다.
Sometimes I didn’t even know whether I was alive or dead.
My identity was a giant question mark to me, and that disturbed me to my core.
때로는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내 정체성은 나에게 거대한 물음표였고, 그것은 나를 뼛속까지 혼란스럽게 했다.
As I got older, an urge to die grew within me. I fantasised often about killing myself or destroying the world or both. An ancient grief and rage boiled inside, yet I numbed it and put on a brave face. I excelled academically and was often top of the class at school. At eighteen, I was accepted into Cambridge University, a great honour for the family. I pretended to be happy, fulfilled, untroubled, easy-going, the archetypal “good boy”. I gave no indication to the world as to the depths of my despair.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에 대한 충동이 내 안에서 자라났다.
나는 자주 나 자신을 죽이거나 세상을 파괴하는 환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때로는 둘 모두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학교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종종 1등을 하기도 했다.
케임브릿지 대학에 입학해 가족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행복한 척했고, 원만한 성격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전형적인 착한 아들로 위장했다. 내가 빠져들어 있던 절망의 깊은 수렁을 단 한 자락도 보여 주지 않았다.
In my quiet moments during the day and in nightmares while sleeping I heard monsters moaning from deep within, terrible cries of forgotten selves I had buried in the blackness, abandoned parts of the psyche calling for love and help and attention from the Underworld.
한 낮에도 고요한 순간이 찾아오면, 악몽에 시달리던 밤과 똑같았다.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괴물들의 신음이, 망각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온갖 자아들의 끔찍한 비명이, 지하 세계에 버려진 채 애타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을 갈망하던 혼령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I had given up on all my hopes and dreams.
I lived outside of my body and outside of the present moment and in the fantasy world of the timebound conceptual mind, in daydreams and nightmares, in convoluted philosophies and distant worlds, in pasts and futures, and always, always in regret and anticipation.
I was homeless, divided from my true sanctuary and place of refuge.
I had become separated from God, alienated from the Life Source, wrenched from the Divine Mother.
희망을 모두 버렸고 꿈을 모두 접었다.
나는 내 몸의 바깥에서, 현재의 순간의 바깥에서,
시간에 얽매인 개념적 마음의 환상의 세계에서,
백일몽과 악몽 속에서,
뒤얽힌 철학과 먼 세계에서,
과거와 미래에서, 그리고 늘, 항상 후회와 기대 속에서 살았다.
나는 진정한 성지, 안식의 거처를 잃어버린 노숙자였던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와 결별한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신성한 보호자에게 버림받은 짐승이 되어 있었다.
Later in my life, I came to the point of suicide. It seemed like the only solution to my impossible problem of living.
Of course, I didn’t really want to die. Secretly, I wanted so badly to live. I just didn’t know how. Nobody had ever shown me.
결국 자살 밖에는 길이 없었다. 그것 만이 삶에서 맞닥뜨리는 풀 길이 없는 문제를 풀어내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물론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속으로는 살아 있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I believed physical death was the only way forwards.
But I did not die. In fact, I was beginning to heal.
The old, unhappy ‘me’ was beginning to break down. My no to life was burning up and my true self was coming alive. Something deep inside me was starting to say yes—yes to being alive, yes to not knowing, yes to the joy and the sorrow of existence, yes to the mess of being an imperfect human being, yes to the darkness and the light, yes to all of it!
나는 육체적인 죽음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죽지 못했다. 죽기는 커녕 치유가 시작되었다.
삶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불타오르고 있었고 나의 진정한 자아가 살아나고 있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살아 있음에 대한 긍정
무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존재의 기쁨과 슬픔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엉망진창인 인생에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기 시작하고,
어둠이든 빛이든,
그 어떤 것에도 '예스'라고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I came out of my mind and into the heart.
I touched Presence, the Now, a profound Oneness with all things.
I felt like a baby, experiencing the world for the first time.
This sense of being alive was so intense sometimes, I thought it would kill or damage or at least overwhelm me, or perhaps send me spiralling into a void I would never escape from.
나는 현재라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온전히 살을 맞대었다.
세상 모든 것들과 내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깊은 일체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때로는 살아 있다는 이 감각이 너무도 강렬해서, 나를 죽이거나 해를 입힐지 모른다는, 적어도 나를 완강하게 지배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But feelings are always safe. It is our defences that hurt so much.
그러나 감각 즉 느낀다는 것은 결코 우리를 해치지 않는다.
우리를 해치는 것은 경계심이다.
Our feelings are safe, no matter how intense they are. It is our tensing-up around our human feelings, our rejection and refusal of them, our unconscious efforts to destroy and annihilate and purify them inside of us, our shaming of our vulnerable inner life and the smothering of the inner child, which causes so much pain and suffering. Not the feelings themselves.
우리의 감각은 아무리 강렬하다 할지라도 우리를 해치지 않는다.
감각들을 둘러싸고 있는 긴장감과 거부감이, 우리의 내면에 깃든 감각들을 파괴하고 소멸시키고, 정화하려고 애쓰는 무의식적인 노력, 취약한 내면을 수치스러워하며 질식시키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주역이다.
느끼는 것 감각하는 것 그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해에도 끼치지 않는다.
Even when the moment seemed unbearable, I could always bear it. Something inside me was indestructible. It could not be killed. It was soft, vulnerable, radically open and receptive, but it was also stronger and harder and more valuable than the most precious diamond, and brighter than a billion suns.
그 순간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을 때조차도, 나는 언제나 그것을 견딜 수 있었다.
내 안의 무언가는 파괴될 수 없었다. 그것은 죽일 수 없었다.
그것은 부드럽고, 연약하고, 근본적으로 개방적이고, 수용적이었지만,
또한 가장 귀중한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하고 단단하고 더 귀중했으며, 10억 개의 태양보다 더 밝았다.
I was beginning to discover my true nature; who I really was, before I had been taught to distrust myself, before the self-hatred and fearful conditioning, before the Fall. I was discovering my true identity as Presence-Awareness itself. As the Light that never goes out. As the Love that never dies. The great inextinguishable Fire within.
나는 진정으로 타고난 나의 본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불신하게 만들기 전에, 모멸과 공포로 짓눌려 있기 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진짜 나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이곳에 현존하는 자각 나의 진정한 정체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빛처럼. 결코 불멸의 사랑처럼.
내면에 꺼지지 않는 거대한 불이 있다.
At the core of my separation-shame-abandonment-death wound, new hope was born. At the heart of duality, nonduality.
내 안에 깃든 꺼지지 않는 거대한 불길을 이원성에 둘로 갈라질 수 없는 존재가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Some days I quaked and convulsed with fear, all the fear I’d never really let myself feel, I let it move through me finally, instead of pushing it away. Some days I raged at the sky and the oceans and mountains, spoke all the words of the inner child who’d never had a voice before, words that weren’t “nice” or “spiritual” or “kind”, but raw and feral and wild and authentic and thrilling to speak.
Oh, to hear myself speak my own, authentic words at last!
때론 두려움이 밀려들어 질식할 것 같은 날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것들을 밀쳐내는 대신 나를 통과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떤 날은 청명한 하늘 드넓은 바다 높다란 산에 분노가 치밀었다.
한 번도 목소리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내면의 아이의 모든 말들,
"착한", "영적인", "친절한" 말이 아니라,
거칠고 야성적이며 진실하고 짜릿한 말들을 쏟아냈다.
오, 드디어 나 자신의 진정한 말을 듣다니!
I wept every day for about a year, wept out all the tears I’d never been able to weep as a child, all the tears I had stifled so as not to upset or anger or alienate anyone around me. I laughed like a baby sometimes, giggled until I could hardly breathe, often for no reason at all.
거의 1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렸을 때 결코 울지 못했던 모든 눈물을 쏟아냈고,
주변 사람들을 화나게 하거나 소외시키지 않으려 억눌렀던 모든 눈물을 흘렸다.
이따금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리고 기침이 날 정도로 키득거렸다.
아무 이유 없이 키득거리기도 하였다.
Some days I felt ecstatic joy and terrible despair in the very same moment. I was a glorious mess!
A wild, inconsistent, unpredictable and uncontrollable mess!
There was so much room in me now.
So much life. So much space.
Sometimes I thought I was going mad, with all this freed-up energy moving inside.
어떤 날은 바로 그 순간에 황홀한 기쁨과 끔찍한 절망을 느꼈다. 나는 영광스러운 혼란 그 자체였다! 거칠고, 일관성이 없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혼란!
이제 내 안에는 너무나 많은 공간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삶. 너무나 광활한 공간.
가끔은 내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해방된 에너지가 내면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Some days I thought about checking myself into a mental hospital. But maybe we have to go ‘insane’ to heal. Maybe ‘normality’ or ‘conformity’ was the disease I’d been suffering from my whole life. Maybe the straitjacket of ‘adaptation’ was finally burning up in a fever of healing.
And I was learning to trust myself again. Learning to stay close to my own experience, without judging it, without trying to fix it, without trying even to be free from it.
어떤 날은 정신 병원에 입원해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치유를 위해 ‘미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황홀한 정신 이상이라면 치료를 해야 할 테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정상이나 순종이 오히려 질병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적응'이 나를 옥죄는 구속복(服)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정신 병원으로 향하던 내 발길이 멈춰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내 자신의 경험을 판단하지 않고, 고치려고 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내 자신의 경험에 가까이 머무르는 법을 배웠다.
I was a vast ocean of Consciousness, learning to love all of the waves of thought, feeling, sensation…
나는 생각, 느낌, 감각의 모든 파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의식의 광활한 바다였습니다.
I wanted to be broken and whole at the same time. I wanted the positive and the negative of existence too. I wanted the bliss but also the heartache. I wanted the expansion but I also wanted the contraction. I wanted the “up” but I also wanted the “down” of life. I wanted desire and lack of desire. I wanted feeling and I wanted to feel the absence of feeling too. I was hungry for all polarities of being.
나는 다시금 나 자신을 믿어 보기로 했다. 판단을 던져버리고 고치려 들지 않고 자꾸만 벗어나려 하지 않고 내가 겪었던 사실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자 생각한 것이다.
깊이 경험하고 맛보고 싶었다. 내가 일으키는 생각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의식이라는 광대무변한 바다가 되고 싶었다.
넓혀지는 원했지만 동시에 한없이 작아지는 건 역시 바랐다.
위로 치솟는 삶을 바랐지만 아래로 곤두박 치는 삶 또한 바랐다.
욕망도 원했지만 욕망의 소진 역시 원했으며 온전한 느낌을 받았지만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상태 또한 바랐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존재의 양극성 존재의 이쪽 끝과 저쪽 끝 모두였다.
The yin and the yang. The comedy and the tragedy. The agony and the ecstasy. The storm and the sunshine. The flaws and the imperfections and the unbearable perfection of it all; I wanted all of myself, the mess and the miracle, the dirt and the stars. I wanted wholeness. Yes, not happiness but wholeness, a gift far greater than the mind’s limited notion of happiness.
동양에서 말하는 음과 양, 희극과 비극, 고통과 황홀, 폭풍우와 햇볕, 봐줄 것 하나 없는 결함 투성이의 존재와 더할 수 없이 완벽한 존재,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모두였다.
나는 나 자신을 이루는 모든 것을 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도 배제되지 않은 모든 것, 행복이 아니라 전체였다.
one day I found myself in front of a small group of people in someone’s living room, talking about what I’d discovered: Presence. Deep Acceptance. This non-dual reality, this loving field where every thought and feeling is no less than divine. Where even our urge to die contains intelligence, consciousness, life. Me, who’d been the most frightened person on Earth, sharing with others from the depths of my heart! How unexpected!
어느 날 나는 어떤 사람의 거실에서 있었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내가 발견한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존재함에 대해 깊이 받아들임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것과 감각하는 것이 신성하게 존재하는 사랑의 공간, 비 이원성의 실제 그 자체에 대해 죽음으로 곤두박질 치는 곳에서도 지성과 의식과 삶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내가 이 행성에서 만난 가장 놀라운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Soon I was talking to thousands of people all over the world in meetings and retreats, in one-to-ones and even online broadcasts, never knowing what I’d say, but trusting this inner voice anyway; never knowing what to teach or how to help, but allowing this ancient teaching to flow through the open and transparent channel of myself. Without a plan, without a clue about what I was doing, the path unfolded in front of me, step by step, moment by moment, and the role of ‘teacher’ was born—although I have never really seen myself as a teacher, more like a friend and ally. Someone who’s not trying to fix or heal you. Someone who just wants to meet you as you are. Someone who’s here to remind you of something you’ve always known.
오래지 않아 나는 점점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 내면의 목소리를 신뢰했다.
나 자신이 선생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 고대의 가르침이 나 자신이라는 개방적이고 투명한 통로를 통해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군가를 바꾸거나 치료하려 하지 않는 사람, 존재하는 그 모습 그대로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 늘 알고 있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사람, 선생이란 그런 사람이었다.
What an epic journey it has been, back to the utter simplicity of this moment, back to the Garden of Eden, to this unique instant of life, the place we inhabited before we innocently stepped away into the sorrows of time.
Through the detritus of myself, through the sewage of the Underworld, through the gateway of terror and ego-death, and back into the eternal Now.
최초의 인간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도 거기서 만나는 것은 삶의 오직 하나뿐인 이 순간이다.
비극의 시간 속으로 속절없이 걸어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살았던 곳이 황홀한 여정의 종착지는 바로 그곳이다.
주관적 자아정체성의 완전한 상실이라는 에고의 죽음을 통해 만고 불멸의 지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We are not born into sin, only a forgetting. We are taught to hate ourselves. We can un-learn this self-aggression. We can un-forget. We can remember what we always knew. We can heal from the most profound self-loathing and fear of living. We can recover from even the most horrific depression. At the very heart of our hopelessness, there is new hope, rooted not in the mind and its images, but in the reality of Presence itself.
우리 중 누구도 죄를 안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도록 강요 받아 왔다. 자신을 향한 이런 식의 공격성은 우리가 배울 수도 없고 배워서 안되는 것이다. 희망이란 당장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는 지금 바로 그것이다.
The healing journey is not about “getting rid” of the unwanted and “negative” material within us, purging it until we reached a perfect and utopic “healed state”. No. That is the mind’s version of healing. Healing is not a destination.
True healing involves drenching that very same ‘unwanted’ material within us with love, presence and understanding. It involves penetrating our deepest shadows, our physical and emotional pains, those regions we have withdrawn from in fear and in loathing, with a merciful and compassionate awareness. Re-inhabiting those disavowed, rejected, forgotten and frightened regions, those abandoned realms of the body and mind, with curious attention in the present moment. For what we attend to, we can love.
치유의 여정은 우리가 원치 않는 것,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치유의 여정은 그것들을 몰아낸 뒤에 어떤 완전하고 무결하게 치유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치유라는 관념에 불과하다. 치유는 종착역이 아니다.
진짜 힐링은 우리 안에 있는 원치 않는 요소를 사랑하고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며 온전히 이해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치유는 우리 안에 가장 깊은 어둠에 닿는 일을 포함한다.
고통스러운 감정들 두려움과 증오와 맞닥뜨렸을 때 뒷걸음질 치지 않고 자비와 연민으로 감싸는 것을 포함한다.
안으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고, 들어가야만 사랑할 수 있다.
To begin again, to see life through the eyes of not knowing.
To stop thinking about your life in the abstract, to stop seeking some other state or experience or feeling, to stop running towards another moment, and really fully experience this unique instant of existence.
지식을 탐구하는 것과는 다른 눈을 통해 삶을 바라보기, 당신의 삶에 대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멈추는 것, 뭔가 다른 상태나 경험이나 느낌을 찾으려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 다른 순간으로 달려가는 것을 그만두는 것, 지금이 순간이라는 존재의 유일무의한 시공을 진실로 온전히 경험하는 것, 명상이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THE MIRACLE OF BREATHING
In any moment of our lives, we can become aware of our breath.
It is our most wonderful anchor to Now.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호흡이란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이라는 바다의 한 지점에 닻을 내리는 가장 멋진 순간이다.
Just for a moment, be present with the breath as it rises and falls, surges and descends at its own pace.
As you read these words, attend to the sensations in your belly and chest, without trying to control or change them, and without trying to breathe in any kind of special way.
아주 잠깐이라도 오르고 내리는 숨을, 상승하다가 잦아지는 호흡의 속도를 느껴보라.
호흡을 조절하거나 통제하지도 말고,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숨을 쉬려 하지 말고, 오르고 내리는 감각을 물결치듯 가슴이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과 매우 유사한 그 움직임을 느껴보라.
Let the breath be as it is. Rising and falling, rising and falling, like a wave in the ocean. Don’t try to alter the breath. If the breath is shallow, let it be shallow. If it is deep, let it be deep right now. If it feels tight and restricted, or smooth and spacious, just be with that too. Don’t try to make the breath into something that it’s not. Don’t compare today’s breath with yesterday’s or tomorrow’s. Be with the breath as it is, in this moment, at this hour, on this day.
호흡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라.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도록 내버려두라. 그것은 바다에 이는 물결과도 같다.
호흡을 바꾸려 하지 말라 호흡이 얕다면, 얕은 그대로 두라.
깊이 호흡하고 있다면, 깊이 호흡이 되도록 놔두라.
긴장되거나 뭔가 억압된 느낌이 들더라도, 부드럽거나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더라도 그렇게 놓아두라.
지금의 숨을 바꾸려 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의 숨이 순간의 숨, 지금이 시간의 숨, 오늘의 숨으로 호흡하라.
Just let the breath be natural. Let the body breathe itself. Soften any sense of holding around the breath, let it rise and fall in its own way, at its own pace.
자연스럽게 호흡이 이루어지도록 놓아두라.
몸이 호흡 자체가 되도록 내버려두라. 호흡을 둘러싸고 있는 감각들이 부드럽게 풀려 나가도록 하라. 호흡 자체의 방식으로, 호흡 자체의 속도로 오르고 내리도록 가만히 놓아두라.
See! For a moment, as you pay attention to what’s here (and don’t pay attention to what’s not here) you are not caught up in the thought-constructed story of your life!
그러고는 지켜보라. 그렇게 여기 무엇이 있는지(또한 무엇이 없는지)에 집중하는 동안,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만들어낸 인생 스토리에 엮지 않게 된다.
And if you lose yourself again in the madness of the world, you can always ask the breath for help.
You can invoke the great and timeless question, “Breathing, how are you doing, right now?”
만약 또다시 세상의 광란에 휘말려 당신 자신을 잃게 된다면 호흡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도와달라고 그러면 호흡이 당신을 도울 것이다.
여러분은 위대하고 시대를 초월한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호흡, 당신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You can touch the mysterious ‘Breathing One’ inside with the greatest tenderness and fascination.
And notice, ultimately you are not doing the breathing: you are being breathed.
내면의 신비한 '숨쉬는 자'를 가장 부드러움과 매혹으로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주목하라.
궁극적으로 호흡을 행하는게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숨쉬는 존재 자체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HOW TRUE HEALING HAPPENS
In childhood, many of us learned that certain feeling states, sensations in the body, urges and impulses within us, thoughts, desires and wants, were not okay to experience, let alone express. We were taught to fear and reject parts of ourselves, see them as ‘dark’ or ‘negative’ or ‘dirty’ or ‘sick’ or even ‘sinful’. We were taught to distrust ourselves, distrust the present moment. We were made to believe that we were separate from all things, divided from the Whole. We were made to eat from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digest dualistic conditioning from the world around us, swallow second-hand ideas and concepts of how we ‘should’ be. This was our innocent Fall from Grace. It wasn’t our fault. We didn’t know any better.
당신과 호흡이 하나라는 사실을 어린아이일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느낌의 상태들, 몸의 감각들 내면에서 느끼는 억압과 자극, 생각, 욕망, 바람 등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드러내기는 커녕 그것들을 좋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임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거부하도록 학습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어둡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심지어 더럽고 병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죄악시 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지금이 순간을 불신하도록 배워왔다.
우리는 만물과 분리되어 있으며 온전한 전체로부터 따로 떨어진 존재라고 믿어왔다. 신이 따먹지 말라고 금한 선악을 구별해 주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존재가 됐고,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분리된 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주입된 사상과 관념을 바탕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이 원죄를 짊어진 자가 되어버렸고,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Hiding our true feelings, repressing our authentic selves and creating a conceptual ‘me’, an image, a persona (mask) or character to win love and approval, and becoming something we were not—this became a matter of necessity, survival. Yes, in order to survive, in order to win love, we brilliantly and creatively did all we could to push down, suppress, numb or destroy the unwanted, ‘dangerous, threatening, unsafe’ energies inside us, de-pressing our true selves and creating a role called “me” to please the world, to avoid punishment or ridicule or neglect, to win attention and praise, to keep our primary relationships intact.
We became performers, doing anything we could to distract others from our ‘dark’ insides.
그런 나는 하나의 이미지 가면과 다름없는 페르소나 사랑을 쟁취하고 인정받는 캐릭터에 불과했다.
우리의 진짜 자아들을 억누르고 세상이 만족해야 하는 나를 만들어 그 역할에 충실했다. 벌을 피하기 위해, 이상한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주목을 받고 칭찬을 얻어내기 위해, 우리가 맺은 관계에 한치의 손상도 입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연기자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We pretended to be strong when we felt weak, up when we felt down, confident when we felt scared, controlled and cautious when we only longed to express our silliness and spontaneity and creativity.
To the extent that we suppressed our true selves, we were all depressed, split and traumatised by our childhoods.
우리는 약하다고 느낄 때 강한 척하고, 우울할 때 일어선 척하고, 두려울 때 자신감 있는 척하고, 어리석음과 자발성과 창의성을 표현하고 싶을 때 통제하고 조심스러워했다.
어린아이 때부터 시작된 이 진짜 자아 억누르기는 우리를 깊은 우울의 늪으로, 분열의 늪으로 헤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We abandoned ourselves for love, in our innocence. And to this day we may still feel like there is something wrong with us, deep down.
As Jesus said in the Gospel of Thomas:
“If you do not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do not bring forth will destroy you.”
He was perfectly describing the experience of trauma. Jesus also said:
“If you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bring forth will save you.”
트라우마로 인해 우리는 순순히 사랑을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안에 깊은 곳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도마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감추기만 한다면, 그 감춘 것이 너희를 파괴할 것이다.”
예수의 이 말만큼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묘사한 것은 없다.
같은 뜻의 말을 예수는 다음과 같이 반복했다.
“너희가 만약 너희 안에 있는 것을 꺼내 놓는다면, 그 꺼내 놓은 것이 너희를 살릴 것이다.”
Through this ‘bringing forth’, flushing our wounds with loving awareness, which is the essence of true meditation, even the deepest inner pain and trauma can be transmuted into medicine.
‘꺼내 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상처들을 밝혀내어 사랑으로 감싸 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가장 깊은 내면의 고통과 트라우마조차도 의술로 치유될 수 있다.
We can take the risk of seeing ourselves, and being seen in return.
Losing the image. Coming out of hiding.
우리 자신을 명확히 바라보고, 그런 자신을 되 비추는 위험은 우리가 감수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조작해낸 이미지를 버리고 숨겨둔 것을 까발리는 것이다.
Don’t think. Look.
생각하려 들지 말라. 그냥 보라.
Can you behold this present moment as an artist would behold his subject, as a lover would behold her beloved?
Not as something to change or mend, but as something whole and fascinating in itself?
And if you can’t be here, if you can’t find a place of allowing, can you be with that feeling—of restlessness or resistance or frustration or refusal—just for a moment, without trying to fix it, or heal it, or transcend it, or make it go away…?
화가가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려내듯,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듯, 지금이 순간을 온전히 가지도록 하라.
바꾸려 하거나 고치려 하지 말고, 전체를 온통 끌어 안아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라. 당신은 지금이 순간 이곳에 있다. 그런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이 저항하고 거절하고 분열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 한 순간이라도 고쳐 보겠다는 생각, 치유하겠다는 생각, 초월하려는 생각, 멀리 떠나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FROM DEPRESSED TO DEEP REST
We simply long to stop performing and be authentic again. We long to wake up from the performance of separation, take off our costumes and make-up and tear up the script forced upon us by our family and our culture and simply be.
우리가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연기를 끝내고 온전한 자신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분리되려는 연기자의 삶에서 깨어나는 것. 우리 몸에 걸쳐진 가짜 옷을 벗어버리는 것. 우리의 가족과 문화가 구성해 놓은 대본을 찢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진짜 나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When we repress our true feelings, desires, urges, longings, banishing them into the unconscious, living as a mask in this world, playing a cartoon version of ourselves, we become depressed, lethargic, numb and even suicidal.
우리가 진정한 느낌, 욕망, 충동, 갈망을 억누르고, 그것들을 무의식으로 추방하고, 가면을 쓴 채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울증에 시달리고 무기력에 빠지고, 말문이 닫히고, 심지어 자살충동에 휘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The experience of depression is not a mistake, then, but deeply intelligent. It is a wake-up call. Depression is an ancient, yet highly misunderstood, invitation back to deep rest, slowness, presence, truth. It is a call to come out of the mind and its fears and anxieties and resentments, and back into the living body and its senses and its spontaneity.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지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우울증은 오래도록 오해되어 온 깊은 휴식, 느림, 존재, 진실로 돌아가는 초대이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의 두려움과 근심과 원한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몸과 감각과 자발성으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다.
It is a call to ‘kill’ the false self, the character we’ve been playing and be exactly what we are.
우울증이 보내는 신호는 거짓 자아를 죽이고, 우리가 연기해 온 캐릭터를 죽이고 우리를 본연에 있는 그대로 살라고 요청한다.
I did not need to destroy my body or kill my mind. I needed to kill my image of ‘self’, to stop confusing a picture of ‘me’ with who I really was. I needed to commit the compassionate spiritual ‘suicide’ of falling in love with the present moment. This is the great paradox of awakening. We must ‘die’ in order to really live. We must ‘kill’ (let go of) everything we are not, in order to flourish as who we really are. We must die to the false notion that we are not One with the stars, the moon, the migrating swallows at daybreak, the wild lavender and heather and rose of the mountains.
나는 내 육체와 정신을 파괴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죽여야 할 것은 자라는 조작된 이미지였다. 내가 멈추어야 할 일은 나라고 찍힌 사진을 진짜 나라고 혼동하지 않는 것이 였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지금이 순간과 사랑에 빠지는 자비로운 영적 자살을 결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각이라는 엄청난 역설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진짜 삶을 위해 있는 그대로의 진짜 우리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별과 달, 새벽에 이동하는 제비들, 들녘 야생화와 하나가 아니라는, 우리와 따로 떨어져 존재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죽여야 한다.
STOP TRYING TO FIX ME. LOVE ME INSTEAD
‘나’를 고치려 들지 말고, 사랑하라.
“Please, don’t try to fix me. I am not broken. I have not asked for your solutions.
“제발, 나를 고치려 들지 마십시오. 나는 고장 난 게 아닙니다.
당신에게 고쳐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When you try to fix me, you unintentionally activate deep feelings of unworthiness, shame, failure, even suicidal self-doubt within me. I can’t help it. I feel like I have to change to please you, transform myself just to take away your anxiety, mend myself to end your resistance to the way I am. And I know I can’t do that, not on your urgent timeline anyway. You put me in an impossible bind when you try to fix me. I feel so powerless.
당신이 나를 고치려 들 때, 당신은 무심코 무가치함, 수치스러움, 열패감, 심지어 내 안에 있는 자살 충돌을 유발하는 자기회의(自己懷疑)까지 들추어내 활성화시킵니다.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당신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한다는, 지금의 나를 밀쳐내는 당신을 위해 나 자신을 고쳐야 한다는 느낌에 휩싸이고 말죠.
하지만 나는 압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의 시간표에 나를 맞출 수는 없다는 것을.
나를 고치려 든다는 건, 나를 억지로 붙들어 매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집니다.
I know your intentions are loving! I know you really want to help.
You want to serve. You want to take away people’s pain when you see it. You want to uplift, awaken, caretake, educate, inspire.
You truly believe that you are a positive, compassionate, unselfish, nice, good, kind, pure, spiritual person. But I want you to know, honestly, friend, I actually feel deeply unloved when you try to ‘love’ me in this old way. It feels like you’re trying to relieve your own tension when you attempt to fix me. I feel treated like a broken object that needs mending.
당신의 의도가 사랑이라는 걸 압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나를 도우려 한다는 것도 압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그런다는 걸 압니다.
당신의 눈에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당신은 그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희망을 주고 싶고, 깨어나게 하고 싶고, 보살펴주고 싶고, 가르쳐주고 싶고, 영감을 부여하고 싶어 하죠.
당신은 당신이 긍정적이고, 연민으로 가득하며, 이타적이고, 다정하고, 선하고, 친절하며 순수하고, 영적으로 충만한 존재라는 믿음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진정으로, 친구를 알아 달라는 겁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지켜온, 나를 ‘사랑’하는 그 방식은 나를 ‘살랑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나를 뜯어고치려 들 때의 당신은 무척이나 여유롭게 보여서 마치 수리가 필요한 고장 난 기계를 대하는 것 같습니다.
Under the guise of you being ‘kind’ and ‘helpful’ and ‘spiritual’, I feel suffocated, smothered, rejected, shamed, and completely unloved when you try to fix me. I feel abandoned in your love. Do you get that? I feel like you don’t actually care about me, even though on the surface it sure looks like you care.
But deep down it feels like you are holding an image of how I should be. Your image. Not mine. It looks like your love but it feels like your violence. Do you understand?
‘친절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고, 영적으로 충만하다’는 미명 아래 당신이 나를 고치려 하는 순간, 당신의 모습은 나의 숨통을 조이고, 옴짝하지 못하게 만들고, 꺼려지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저는 그만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무슨 느낌인지 아시나요? 내게 드는 느낌은 당신이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의 깊은 곳에는 나의 사진 한 장이. 내가 어떻게 되어야만 할 어떤 인간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닙니다.
그건 당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그 사랑은 폭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나요?
As soon as you stop trying to ‘help’ me, you are of the greatest help to me! I stop trying to change to please you! I feel safe, respected, seen, honoured for what I am. I can fall back into my own subjective power. I can trust myself again, the way you are trusting me. I can relax deeply.
당신이 나를 ‘도우려 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당신은 내게 가장 훌륭한 도우미가 될 것입니다!
그때 나 역시 어떻게든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나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멈추게 될 겁니다. 그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편안히 느끼고, 존중하고, 감추지 않고,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때 나는 내 고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믿어주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복원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긴장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Without your pressure, your demand for me to abandon myself and be different, healed, transformed, enlightened, awakened, mended, ‘better’, I can better see myself. I can discover my own inner resources. I can touch my own powerful presence. I feel safe enough to allow and express my true feelings, thoughts, desires, hold my own perceptions. I no longer feel smothered, a victim, a little child to your expert adult. The courageous warrior in me rises. I breathe more deeply. I feel my feet on the ground. Loving attention drenches my experience, even the uncomfortable parts. My senses feel less dull. Healing energies emerge from deep within. I feel light, free, liberated from your disapproval. I feel respected, not shamed. Seen as a living thing, not able to be compared with an image.
당신이 가하는 압박이 없다면, 나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존재가 되라는 당신의 요청이 사라진다면, 치유를 통해 ‘더 나은 존재’로 바뀌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멈춘다면, 나는 나 자신을 ‘더 나은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는 내가 활력 넘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긴장감에 사로잡힌 채 나의 진짜 감각들을 따르지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의 통찰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억압당하는 느낌, 희생당하는 느낌, 노련한 어른들 앞에서 언제까지나 미숙한 어린아이로 남겨질 듯한 느낌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 안의 용맹한 전사가 깨어날 것입니다.
더 깊이 호흡하게 될 것입니다. 비로소 나의 두 발이 견고하게 딛고 있는 땅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 내가 겪는 일들 하나하나를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조차 나는 사랑으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내 감각들은 둔감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치유의 에너지가 내면 깊은 곳에서 샘솟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더 이상 나를 억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나를 존중할 것이고, 더 이상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들어진 이미지란, 한낱 죽은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가 된 나로 인해서 말이지요.
You help me so much when you stop trying to help me, friend!
I need my own answers, my own truth, not yours. I want a friend, present and real, someone to hold me as I break and heal, not an expert or a saviour or someone trying to stop me going through my process.
당신이 나를 친구로 여긴다면, 나를 도와주려는 것을 멈추는 일이 진정으로 나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답, 내가 가진 진실입니다.
나는 친구를, 지금 이 순간을, 진정한 것을, 부서지고 치유되는 나를 묵묵히 지켜봐 주는 누군가를 원합니다.
전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 통로를 가로막는 누군가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And do you see, when you are trying to save me, you are actually abandoning yourself? You are running from your own discomfort, your own unlived potential, and focussing on mine? I become your ultimate distraction. I don’t want to be that for you anymore…”
그대가 나를 구원하려고 할 때, 그대는 사실 자신을 버리는 것임을 알고 있는가요?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불편함에서 도망치고, 당신 자신의 살아있지 않은 잠재력에서 벗어나 나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나요?
나는 너희의 궁극적인 방해물이 됩니다. 더 이상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Let’s stop trying to fix or save each other. Let’s love each other instead. Bow to each other. Bless each other. Hold each other. As we are. As we actually, actually, actually are.
서로를 고치거나 구하려는 시도를 멈춥시다. 대신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에게 인사를 합니다.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줍시다. 서로를 안아주세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실제로의 우리, 사실상의 우리,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로 살아갑시다.
IF YOU ARE FEELING SAD...
If you are feeling sad, you are not in a ‘low vibration’.
You are not being negative, and you don’t need to be fixed, and sadness is not a mistake, because it’s life moving in you, and life can’t be a mistake, ever.
만약 당신이 슬픔을 느낀다면, 당신은 '낮은 진동'에 있지 않은 것이다.
당신은 부정적인 존재도 아니고, 수리가 필요한 상태도 아니다.
슬픔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서 삶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삶이 어떻게 잘못일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다.
You are just feeling sad, that’s all.
슬픔을 느끼고 있는 당신은 완벽하게 온전하다.
RELAX, YOU ARE NOT THE DOER
Stress is the tension between this moment and your mental image of how this moment should be. Stress is your narrow focus on a mental list of ‘future things to do’, the imaginary pressure of ‘all the things that haven’t been done yet’, ‘all the other things I should be doing now’, ‘all the wonderful things I’m missing out on’.
스트레스는 지금이 순간과 지금이 순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신의 심적 이미지 사이의 긴장 그 밀고 당김을 가리킨다.
스트레스는 당신이 ‘미래에 해야 할 일들’이, 관념적으로 만들어 놓은 리스트에 갇힌 채 ‘아직은 해서는 안 되는 일들’과 ‘지금 해야만 할 일들’과 ‘놓치고 있는 멋진 일들’에 대해 정신적으로 받는 압박이다.
Stress always involves past-and-future-thinking, a forgetting of your true Ground and your only place of power: This moment, here, now, today.
스트레스에는 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이 포함된다. 이로 인해 당신은 당신의 두 발이 딛고 있는 진정한 토대, 당신의 힘과 능력이 유일무이하게 실제 하는 곳. 즉 지금이 순간. 지금 이곳. 오늘이라는 시간을 망각한다.
When your focus shifts from what is not present, to what is present, from ‘lack’ to what is abundantly here; when, instead of trying to complete a list of ten thousand things, you simply do the next thing, the one thing that presents itself now, this thing here, with your full attention and passion and presence, lists get completed effortlessly, and in some deeper sense, tasks do themselves.
당신의 집중력이 지금이 아닌 것에서 지금이라는 것으로 옮겨질 때, 지금이 ‘결핍’된 공간으로부터 지금이 풍성하게 존재하는 이곳으로 옮겨질 때, 리스트에 적힌 수십가지 목록을 완성하려고 버둥거리는 대신에 그저 다음 것을 행할 때, 지금 주어진 그것을 행할 때, 이곳에서 할 그 일을 행할 때, 당신은 당신의 관심과 열정과 존재의 가치를 온전히 쏟아낼 수 있다
Relax. You are not the doer.
진정하라. 당신은 행위 하는 자가 아니다.
THE RUPTURE AND THE REPAIR
You are not the ever-changing mind, but the unchanging observer of it, and this realisation changes everything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하는 당신이다. 당신의 마음은 항상 바뀐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당신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You only ever have to deal with life a moment at a time.
Please do not forget this. You can’t go back to the way things were.
You can’t go back to the way things were.
You can’t un-see what you have seen.
But you can be present, right now.
당신과 관련된 삶은 지금이 순간의 밖에 없다.
과거의 삶도 미래의 삶도 아닌 오늘의 삶이 당신의 삶이다.
부디이 사실을 잊지 말라.
당신은 무언가가 있었던 그때로 되돌아갈 수 없다.
당신이 본 것을 되돌릴 수 없다.
현재에 지금이 순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YOUR OTHER HALF
Nobody is coming to save you, you see. No prince on horseback. No Juliet. No “One Special Person”. No surrogate mother. No messiah, no saviour, no God who will take away all your doubts, your pain, your feelings of emptiness, that sense of separation and abandonment that’s been lodged in your guts since you were young.
당신은 알고 있다.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백마를 타고 오는 왕자는 없다. 줄리엣 같은 연인에게도 어떤 ‘특별한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
당신의 모든 의심과 고통과 공허를, 어릴 때부터 줄곧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싹튼 분리감과 버림받은 느낌을 한 방에 날려버릴 메시아 구세주 신은 없다.
Nobody will be able to feel and integrate and metabolise your feelings for you.
Nobody can do living and dying for you.
Nobody has the power to permanently distract you from your inner journey.
Nobody can own you or be owned by you.
Nobody can complete you.
Nobody is coming to save you.
This is terrible, wonderful news.
당신을 위해 살아주고 죽어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도, 당신에 의해 소유 당하는 존재도 없다. 그 누구도 당신을 완전하게 만들 수 없다.
그 누구도 당신을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
이것은 끔찍하도록 멋진 뉴스다.
Your other half, your completion, your salvation, your ultimate purpose in this life, is not outside of you, you see, but deep within you. It lives as your very own warm presence, burns like the Sun within.
당신의 나머지 반쪽 당신을 완성시켜 주는 사람, 당신을 구원하는 자, 당신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시켜 주는 자, 그런 존재는 당신 바깥에 있지 않다.
당신은 알고 있다. 당신의 내면 저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당신 자신의 따뜻한 존재로 살아 있으며, 내면의 태양처럼 타오른다.
If you look to another for happiness, you will always depend on them, always be afraid of losing them, and anxiety and resentment will rumble underneath your ‘love’.
당신이 만약 행복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찾고 있다면, 당신은 늘 그 사람들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들을 잃을까 두려워할 것이며, 당신의 '사랑' 아래에는 불안과 분노가 꿈틀거릴 것이다.
But underneath every addiction is the longing for home, for Mother in the deepest sense of the word.
모든 중독 아래에는 갈망이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품속에 안기고 싶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Find the deepest sense of home within yourself, then.
Salvation lies anywhere except at the very heart of your exquisite presence, the place where there’s nobody to be saved and nobody to do the saving.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집을 찾도록 하라.
당신을 구원하는 자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있는 곳 바로 거기에 있다. 구원받을 사람도 없고 구원할 사람도 없는 곳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나 있다.
For you are The One, your own greatest lover, partner, friend, guru and Mother.
당신이 바로 그 사람 그 한사람이다.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당신의 파트너, 친구, 영적 스승, 당신의 성모는 바로 당신이다.
THE SILENCE BETWEEN US
In some Native American cultures, it’s considered polite to wait up to several minutes before responding to a question or taking one’s turn in a conversation. Replying too soon is considered rude, because it shows that you obviously haven’t truly listened to the other person.
북미 원주민의 인디언 문화에서는, 질문에 대답하거나 대화에서 자기 차례가 돌아왔을 때, 잠깐 동안 말없이 기다리는 것을 정중한 예의로 받아들인다.
질문을 받자마자 대답하거나, 누군가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말하는 것은 무례한 태도로 여겨진다.
상대방의 얘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Many of us in the modern world would find even a few moments of such silence in a conversation awk-ward, uncomfortable, even embarrassing.
Sometimes we speak not because we have anything important or authentic or heartfelt to say, not because we even want to talk really, but because we feel we have to. We feel uncomfortable, nervous, anxious about not talking. We speak in order to avoid the void, silence the silence, distract from the extraordinary absence at the heart of life. We speak in order to run from ourselves and each other.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는 대화 사이에 이런 식의 침묵이 생기면 단 몇 초라도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고 심지어 당황스러워 한다.
중요하지도 않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혹은 말을 해야겠다는 한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입을 다물고 싶을 때조차도, 말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말하고 있지 않으면 불편하고, 신경 쓰이고 불안해진다. 우리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은 삶의 중심에 매우 특별한 텅빈 공간을 마련해둘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말을 멈추지 않는다.
Slow down, friend. Get out of your head and into your body. Take a few moments to just feel your feelings in a conversation. Let yourself feel awkward and uncomfortable, vulnerable and a little shaky in the silence if you must. It’s just a feeling, it won’t hurt you, you can bear it, and the silence will hold it anyway.
Take the risk of the other person sensing your feelings of awkwardness, or thinking that you’re boring or strange or have nothing to say.
Hey, at least you are real!
천천히 내려가자. 머리에서 빠져나와 몸으로 들어가자.
대화를 나눌 때, 당신에게 일어나는 느낌들을 감각하기 위한 시간을 갖도록 하라.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그대로를 침묵 속에서 느껴보라.
입을 다 물어야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느낌일 뿐이다.
당신을 해치지 않는다. 당신은 견딜 수 있다.
상대가 당신의 그 어색한 느낌을 감지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라. 상대는 당신이 지루해 한다거나 이상하게 느껴지거나 할 얘기가 전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역시 감수하라.
Our deepest connections are always made in silence.
Witness a mother rocking her baby to sleep, two old friends or lovers passing time in a café, or a simple silent walk in nature, just you and the forest at dawn. Words are not necessary for us to feel each other, know each other, understand life and each other very deeply indeed.
우리가 가장 깊이 연결되는 것은 언제나 침묵에 의해서이다.
엄마가 아이를 재우기 위해 가만가만 흔들 때를 생각해 보라.
오랜 친구 둘이 혹은 연인 둘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자연속을 아무 말없이 걸어가는 장면을 먼동이 터오는 숲을 걸어가는 당신을 상상해 보라. 우리가 서로를 느끼고 아는데 필요한 것은 서로의 삶 저 깊은 곳에 다다르게 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다.
Maybe, with all our clever words, we’re all just trying to find our own sweet way back to that exquisite silence, the silence we came from, the silence to which we shall all return.
어쩌면 침묵은 우리가 가진 가장 지혜로운 언어 인지 모른다. 이 특별한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 자신을 찾아내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이다. 우리가 떠나왔고 돌아가야 할 그곳 거기에 침묵이란 언어가 있다.
THE BEAUTY OF YOUR NUMBNESS
Being aware of your disconnection, your dissociation, your alienation from feeling, is a massive step on the pathless path of healing.
Ironically, you have to be very sensitive, awake and alive, to actually notice your numbness in the first place.
당신이 뭔가를 느끼는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분리되고,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치유라는 길 없는 길을 향해 큰 보폭으로 내딛는 걸음이다.
당신이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당신을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 예민한 감각으로 깨어 있고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when a wave of feeling comes to visit —a grief, a fear, an unexpected anger or melancholy —can you stay present with that wave, breathe into it, let go of trying to ‘let go’ of it, and simply let it be, let it live, let it express itself right now within you?
Can you notice the impulse in you to resist it, refuse it, distract yourself from it and move away from your experience?
Don’t judge or shame yourself for that impulse either, for wanting to have a different experience than you’re having—it’s an old habit, this urge to disconnect, this impulse to flee, this addiction to ‘elsewhere’.
슬픔이나 두려움 얘기지 못한 분노나 우울한 느낌이 파도처럼 밀려들 때, 당신은 그 파도와 함께 현재에 머무를 수 있을까?
당신은 그 느낌들 안에서 호흡하고 그 느낌들을 흘러가도록 놔줄 수 있을까?
그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살아는 대로 놔줄 수 있을까?
그 느낌들이 지금이 순간에 고스란히 표현되도록 어떤 개입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이제껏 당신이 해온 것과 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면 당신 자신을
판단하거나 수치스러워 하지 말라. - 그것은 오래된 습관, 단절하려는 충동, 도망치고 싶은 충동, '다른 곳'에 대한 중독이다.
But see, today, if you can stay very close to ‘what is’, see if you can actually connect with the visiting feeling, gently lean in to your experience as it happens.
오늘을, 지금이 순간을 보라.
있는 그대로와 가장 가까이 머물기를 원한다면, 당신을 찾아온 느낌과 실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라.
그것이 일어나는 그대로 당신의 경험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도록 하라.
Until one day, deep in meditation, perhaps, we remember, all feelings are sacred and have a right to exist in us, even the messiest and most inconvenient and painful ones.
And we remember to turn towards our feelings instead of running away. To soften into them.
To make room for them instead of numbing them out or ignoring them.
어느 날 명상에 깊이 잠긴 채로 우리는 기억할지 모른다.
모든 느낌들이 신성하다는 것을,
모든 느낌들이 우리 안에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불편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는 도망치는 대신에 우리의 느낌들을 향해 몸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들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가야 한다는 것.
그들에게 반응하지 않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방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는 것.
STAND STRONG LIKE A ROCK!
바위처럼 당당하게 서라!
Don’t focus on what’s ‘wrong’ with the world. When you fight against a broken world, when you live in resistance and inner violence, you contribute to the outer violence you see.
세상과 ‘잘못’ 관련된 것이 무엇일까 따위에 집중하지 말라.
당신이 망가진 세상과 맞서 싸울 때, 당신이 저항과 내면의 폭력에 갇힌 채 살아갈 때, 당신은 당신이 보고 있는 외부의 폭력에 협력하게 된다.
See the world as it is, the way an artist would look at a face, with all its flaws, imperfections, ridges, bumps, crevices and creases. See the light and the dark, the love and the flight from love, the kindness and its forgetting. See it all in fascination. Love the world now for how it appears. Hold the world in your loving arms. She is young, and making mistakes, and learning.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라. 화가가 얼굴을 보듯이, 얼굴 안의 결합들, 완벽하지 않은 요소들, 튀어나온 것과 푹 꺼진 것, 패어나간 것과 쭈글쭈글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듯이, 빛과 빛이 사라진 어둠을, 사랑과 사랑의 상실을, 온화함과 온화함의 망각을 보라.
당신을 매료시킨 그 모든 것을 샅샅이 보라.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사랑하라. 그것이 나타나고 있는 그것을.
당신의 사랑이 가득한 두 팔로 세상을 껴안으라.
세상은 언제나 젊고, 실수하고, 배우는 중이다.
And from this place of love, re-enter the world. Stand strong like a rock, illuminating the world with your powerful presence. Speak up for those without a voice. Amplify messages of understanding and compassion. Spread the truth.
Fight for what you know and love, not against what you oppose and reject.
이곳 사랑의 거처로부터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라.
바위처럼 강하게 우뚝하게 서라. 당신의 힘이 넘치는 현재로 세상을 비추라. 언어로만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말없이도 들려줄 수 있다.
이해와 공감의 메시지를 증폭시켜라. 진실을 퍼트리라.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위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싸워라.
당신이 반대하고 거부하는 것과 싸우지 말라.
Your attention is your greatest blessing, so bless the world you are birthing now with your loving attention; do not energise a dying world with your intolerance.
Gather together with your brothers and sisters. Discover your true family, beyond colour, race, religion, belief. Unite in the name of love.
Now you are not attacking the world but fighting alongside her, and all her angels fight with you.
당신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신이 가진 가장 위대한 축복이며 선물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가득한 당신의 관심과 주의를 가진 채로, 이곳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축복하라.
당신의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라. 당신의 진정한 가족을 찾으라.
피부색, 인종, 종교, 신념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라.
이제 당신은 세상을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과 함께 싸운다.
세상의 모든 천사들과 당신이 함께 싸워나간다.
WHEN LOVE CRACKS YOU OPEN
Safe, unsafe. Happy, sad. Certain, uncertain. Afraid, fearless. Fragile, powerful. Worthy, worthless, and everything in between. There is so much life now trying to fill you up, and you can barely contain it all. You are full of life, penetrated by life, pregnant with life.
안심과 불안, 행복과 슬픔, 확실과 불확실, 두려움과 두려움 없음, 연약함과 강함, 가치와 가치 없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
지금 당신을 가득 채우려는 삶이 너무 많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그대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고, 생명에 의해 관통되어 있으며,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TODAY, BE WILD
There must be people who go mad or take their own lives because there is so much life inside of them and they feel unable to express it or even access it.
미쳐버리거나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건 당연하다.
그들 내면에 너무도 많은 삶이 있는데 도저히 표현할 수 없거나 심지어 접근할 수조차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You are not sick if sexual urges towards man, woman or beast move through you.
Let them move through.
They won’t control you when you breathe through them.
No need to ‘get rid’ of them, and no need to act on them either in your search for relief.
They are just pictures moving through the mind, images on the great movie screen of awareness, and the more you allow them, the less of a problem they are.
Stop judging yourself, and no need to judge yourself for judging yourself.
남자나 여자 혹은 짐승에 대한 성적충동이 당신에게 일어난다면,
당신은 병든 것이 아니다.
그들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라.
당신이 호흡 그들을 들이시고 내신다면 그들은 당신을 조종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제거할 필요도 없고,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행동을 취할 필요 없다.
그것들은 그저 마음 속을 움직이는 그림들일 뿐이며,
인식의 거대한 스크린 위에 떠오른 이미지일 뿐이다.
당신이 그들을 허용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는 상황은 그만큼 줄어든다.
당신 자신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라. 생각을 그냥 생각이 되도록 내버려두라.
Let the mind be the mind, and know that you are not the mind.
You are not damaged if thoughts of death come to visit. Bless them and let them pass, for they always pass and they are only thoughts, voices, vivid pictures.
마음이 마음이 되게 하고, 그대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죽음에 관한 생각들이 당신을 방문한다 해도 당신은 손상을 입지 않는다.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라.
그들은 언제나 지나가기 때문이며, 그것들은 단지 생각들, 목소리들, 생생한 그림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You are not disturbed if disturbing images play out on the movie screen of Awareness, because you are the unchanging screen and not the ever-changing pictures.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자각과 인식의 스크린 위에 상용되고 있다 해도 당신은 혼란스러워 않는다.
당신은 도무지 변할 줄 모르는 그림이나 영상이 아니라 스크린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림이나 영상이 그 위로 스쳐 지나갈 뿐이다.
Make room in yourself for the light and the darkness, the weird and the strange and the erotic and the taboo and the unique and the inconvenient. Repress nothing and deny nothing and then none of it will control or frighten you. You will see: all thoughts are your children too.
당신 자신 안에 방을 마련하라. 빛과 어둠을 위한 방, 이상한 것, 괴상한 것, 에로틱한 것, 금기와 기이한 것, 불편한 것들을 위한 방.
어떤 것도 억누르지 말라. 아무것도 부정하지 말라. 그들 가운데 당신을 조종하거나 겁에 떨게 만드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당신은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생각들이 당신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Radical self-love is the deepest kind of joy there is; the permission to be wild, free, alive within.
급진적인 자기 사랑은 존재하는 가장 심오한 즐거움이다.
그 존재 안에서 난폭해지는 것을 허용하라. 자유로워지고 살아 있도록 하라.
And know there is nothing wrong with you, ever.
그리고 알라 당신에게 그 어떤 것도 잘못되지 않는다는 사실,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THE WILD BUDDHA
When we no longer fear our feelings, we will no longer—in vain—try to control the feelings of others, and we will have much compassion for our wild playmates.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느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헛되이 조종하려 들지 않으며, 우리는 야생의 놀이 친구를 위해 더 많은 공감과 연민을 가지게 될 것이다.
The Buddha sobbed like a baby sometimes, felt righteous anger at the injustice and abuse in the world, feared death but stood fearlessly at the heart of that fear. Here was the source of the Buddha’s power—an infinite and unbreakable love for the wildness inside.
붓다는 때로 아이처럼 흐느꼈다. 붓다는 정의롭지 못하고, 온갖 학대로 얼룩진 세상에 정당한 분노를 터뜨렸고, 죽음을 두려워했으나,
두려움을 떨쳐낸 채, 두려움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여기에 붓다가 가진 힘의 원천, 즉 내면의 야생을 향한 멈추지 않고, 결코 부러지지 않는 사랑이 있었다.
SOOTHE THE FIRE
The repressed rage feeds our addictions and compulsions. It generates stress, chronic pain and tension in the body, feeds disease and even generates suicidal and homicidal urges, which we in turn repress, deny or try to silence, all in our quest to maintain an acceptable picture of ‘self’.
억압된 분노는 중독 증세와 충동에 먹이를 준다. 그것은 스트레스와 만성통증과 과민 증세를 키우고 병을 키우고, 심지어 자살과 살해 충동까지 부추긴다.
결국 우리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억압하고 부정하고 입을 다물려 한다.
We cannot destroy or cut out this inner one. He is only crying out for the love he never received in childhood. The more we try to destroy him, the more he tries to destroy us. What we fear and fight in ourselves will only grow in power.
우리는 이 내면의 존재를 파괴하거나 걷어낼 수 없다. 그는 단지 어릴 적에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달라며 보채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를 파괴하면 할수록, 그는 우리를 더 깊이 파괴하려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두려워하고 투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저 힘을 키울 뿐이다.
Great healing can happen when we let go of our mind-made ideals, and turn to face our living truth.
위대한 치유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상들을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그런 다음 우리의 살아 있는 진실을 향해 정면으로 마주할 때 일어난다.
We invite all the buried rage up into consciousness, so we can finally meet it. We connect with the furious inner one, hold him in our arms at last, let him exist, and live, and express in safe ways.
Ask him what he needs, deep down. Does he feel unloved, disappointed, sad, forgotten? Does he feel neglected, abused, abandoned, unsafe? What vulnerability was the rage trying to bring our attention to?
매장되어 있는 분노를 모두 꺼내어 의식으로 초대함으로써, 마침내 그 분노와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분노하는 내면의 존재와 연결되고, 마침내 그를 품에 안고, 그가 존재하게 하고, 살게 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에게 물어보라,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깊이 내려가라. 그는 사랑받지 못하고, 실망하고, 슬프고, 망각된 존재의 느낌을 받는가?
외면당하고 학대 받고 구제불능으로 여겨지고, 안전하지 못한 느낌을 받는가 ?
분노한다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불러오려 애쓰는 우를 행하는 몸짓이 아닐까?
Anger is not bad, wrong or a sign of our weakness or failure. It is a precious orphan child knocking on the door of the Present Moment, longing to be let in.
분노는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우리가 연약하거나 실패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문을 두드리며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귀중한 고아이다.
Success. Popularity. Looks. Achievements. The things that matter but don’t truly matter in the end. Satisfied with a limited, conditional version of happiness.
The kind you can post on Instagram. The kind that you can buy and sell. The kind that has an opposite and can crumble so quickly. The kind that looks good.
성공. 인기. 외모. 성취. 이는 중요한 것들이지만 결국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제한된 만족, 특정한 조건에서만 가능한 행복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인스타그램 같은,
사고파는 거래와 같은,
상대가 존재해야만 가능한, 상대가 사라지면 홀연이 사라져 버리는,
눈길을 사로잡는 상품과 같은 것이다.
It’s sad to see our great potential forgotten.
Nothing ‘wrong’ with any of this unconscious activity, of course.
우리의 위대한 잠재력이 잊혀지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물론 이 무의식적인 활동에는 '잘못'이 없다.
I only wish that everyone could truly find the courage to stop. Rest. Break, if they need to. Cry, if they need to. And finally feel: the abandonment, the grief, the shame that was unconsciously running the show. Finally stop pretending. Finally sacrifice the addictive surfaces for the living truth—the scary, disorienting, thrilling, embarrassing, awkward, groundless truth.
나는 단지 바랐을 뿐이다. 사람들이 내달리는 걸음을 용감하게 멈출 수 있기를. 휴식하라. 잠깐만이라도 멈추라. 필요하다면 울어라. 그러면 마침내 느낄 것이다.
포기, 비애, 수치심은 무의식적으로 상용되는 동영상이었다는 것을.
척하는 것을 위장하는 짓을 멈추라.
살아있는 진실-무섭고, 혼란스럽고, 스릴 넘치고, 당황스럽고, 어색하고, 근거 없는 진실-을 위해 중독에 빠진 표면적인 것들을 희생시켜라.
There is no shame in breaking and in breathing through the mess.
멈추는 것, 고장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혼란 속을 통과하며 호흡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To be slow and empathic in a fast world, it is a challenge for sure. To be sensitive in a world that has gone mad with goals and results, insane with surfaces and statistics. To be a lover in a world that has reduced love to a commodity. To be awake in a world that tries to numb you and then tries to sell you medications and cures and distractions for your numbness.
빠르게 내달리는 세상에 공감하며 느려지는 것은 분명 하나의 도전이다. 목표와 결과에 혈안이 된 세상, 표면적인 것들과 통계 수치에 온통 정신이 팔린 세상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느낀다는 것, 상품을 사랑하느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줄어든 세상에서 사랑의 존재가 된다는 것, 당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는 옴짝달싹 못하는 당신을 치료해 주겠다며 약을 팔아대는 세상에서 깨어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이것은 쉽지 않은 그러나 해야 하는 도전이다.
Yet you cannot be numbed. You know your path now, and you cannot turn back. And your sensitivity is a great gift to this fast world. You can teach the world how to slow down, how to behold the beauty in the ordinary and the mundane, how to be comfortable with space and silence and not knowing, how to breathe…
당신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 없다.
당신은 이제 당신의 길을 알고 있으며, 당신은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의 감수성은 이 빠른 세상에 큰 선물이다. 속도를 늦추는 법, 평범하고 평범한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법, 공간과 침묵에 익숙해지는 법, 모르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법, 숨쉬는 법을 세상에 가르칠 수 있다.
WALKING WITH JOY
Sometimes you become so mesmerised by the goal, the destination, the future, the ‘place you should be’, that you forget the present ground, the place where you stand, the place from which you will take the next step, the place where life always is.
때로 당신은 목표, 목적지, 미래, 당신이 있어야만 한다는 곳에 완전히 매료되어 지금 두 발을 딛고 있는 땅, 당신이 서 있는 곳, 다음 걸음을 내딛을 곳, 삶이 늘 존재하는 곳을 잊곤 한다.
You forget that you are breathing now, that the journey is made only of breaths, fleeting instants, moments that cannot be repeated. You forget your own presence, so solid, so trustworthy, so constant amidst the constant change of the journey. The destination has become more important than presence, and you have become lost in time.
당신은 지금이 순간 당신이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삶의 여정이 호흡들로 이루어지고, 덧없는 순간들, 반복될 수 없는 순간 순간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는다. 당신은 그토록 견고하고, 그토록 신뢰할 수 있고, 그토록 변함없는 여정 속에서 자신의 현존을 잊어버린다. 목적지는 존재보다 더 중요해졌고,
당신은 그렇게 시간 속에서 길을 잃어왔다.
Joy is not a place you reach. Joy will not appear magically on the completion of your journey. Joy lives only in presence. Joy has a home called Now.
즐거움은 당신이 도달할 곳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금이 순간에만 존재한다. 즐거움은 지금이라고 불리는 집을 가지고 있다.
LOVE’S ADVENTURE
Love is not a feeling, a state, or an experience.
It’s not a destination.
It’s this extraordinary Light that shines from within.
It’s this radiant Knowing that never leaves.
It’s the Joy of being alive.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상태도, 경험도 아니다.
성취해야 할 목적도, 다다라야 할 목적지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비춰 나오는 특별한 빛이다.
사랑은 결코 떠나지 않는 빛나는 앎이다.
그것은 생생히 살아 존재하는 기쁨이다.
YOUR WILD VOICE
The truth will always come out.
You can try to suppress truth, you can threaten, punish, enslave, crucify those who dare speak it, you can run from it, try to numb it, silence it, smother it, shame it, ridicule it, throw all manner of lies and manipulations and half-truths at it.
진실은 언제나 드러난다. 당신은 진실을 억누를 수도 있다.
진실을 말하는 자들을 위협할 수도, 벌할 수도, 노예로 만들 수도, 처형할 수도 있다.
당신은 진실로부터 달아날 수도, 진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할 수도, 침묵시킬 수도, 질식시킬 수도, 모욕할 수도,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
당신은 진실을 거짓말이라고, 조작된 것이라고, 반쯤 만 사실이라고 왜곡할 수도 있다.
But in the end, truth will always win. Because truth is life.
그러나 결국 진실은 언제나 이긴다. 진실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And it takes courage to speak truth. You may risk losing your livelihood, your relationships, your reputation, your worldly possessions, your friends, your family, even your life. You may be quaking as you speak it, dripping with sweat, nauseous and dry-mouthed and on the verge of fleeing
진실을 말하는 데는 용기가 따른다.
생계를 잃을 수도 있고, 관계와 명성과 직장을, 친구와 가족을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위험도 있다. 진실을 말할 때 당신은 두려움에 떨 수도 있고, 땀에 흠뻑 젖을 수도 있고, 메스꺼움을 느낄 수도 있고, 입이 바짝 타 들어 갈 수도 있고,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느낄 수도 있다.
But in the end you cannot hold it back. It is more powerful than you. It will outlast you and outlive you.You were born from it and will return to it. It speaks through you; you are a vessel for truth. And when you know truth and declare it to the Universe and to all who will listen, you may feel the doubt and the guilt and the shame of it too, the terror of abandonment, old thoughts warning you to shut the hell up.
그러나 결국 당신은 진실을 억누를 수 없다. 진실은 당신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진실은 당신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당신은 거기서 태어났고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당신은 진실을 담는 그릇이다.
당신이 진실을 알고 그것을 온 우주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모두에게 알릴 때, 당신은 의심과 죄의식과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다.
포기하고 싶은 두려움, 입을 닥치라는 케케묵은 경고에 무릎이 덜덜 떨릴 수도 있다.
But you will feel so alive. So on your path. So aligned with your calling. So willing to face the consequences, moment by moment, breath by breath. And those who want your truth will gather around you, and you will know your true family.
그러나 당신은 살아 있음을 느낄 것이다. 당신의 길 위에 서 있음을 느낄 것이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당신의 진실을 바라는 사람들이 당신의 주위로 모여들 것이고, 당신은 당신의 진정한 가족들을 알게 될 것이다.
There is no greater power on Earth, no more potent agent for change, and no more thrilling experience, than you, wild and alive with your truth.
지상에서 당신보다 더 큰 힘은 없다.
당신을 바꿔 놓을 잠재력을 가진 존재 따위는 없다.
당신보다 더 가슴 뛰는 경험은 없다.
LONELINESS CONTAINS ITS OWN CURE
The more you surrender into presence, that existential freedom which is your birthright and your true home, and the more you relax out of the mind and its infinitely complex conditioning, and the more you shed those roles and activities you habitually use to escape yourself, the more you will encounter the raw longings, anxieties and insecurities you were always running from.
당신이 현재에 투항할수록 끝없이 반복되는 복잡한 조건에서 더 많은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역할과 행동은 더 많이 없어질 것이고, 야생의 갈망들을 마주할 것이다.
You were always seeking security in an inherently insecure cosmos.
당신은 항상 안정을 쫓아왔다.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이 우주에서.
The less identified with the narrative you become, the more groundless and homeless you may begin to feel. But this is not a bad thing. Groundlessness is the way, the truth, the life; it is how pure freedom can be intimately known.
당신이 등장하는 만들어진 이야기와 당신을 동일시하는 태도를 줄이면 줄일수록 토대를 잃고 집을 잃은 듯한 느낌이 시작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토대를 잃는다는 것이 길이고, 진실이고, 삶이다.
순수한 자유가 어떻게 친밀하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As the Buddha taught, there is no ground anywhere to be found. Nothing to hold onto. No home. No rest for the seeker. Except here in presence. Except in the breath. Except in this field of true acceptance. The mind is no ground for you.
붓다가 알려 주었듯,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토대이고 근거이다. 붙들고 의지할 곳은 없다. 집은 없다. 지금 이곳을 제외하고는, 내쉬고 들이마시는 호흡 외에는, 이 참된 수용의 분야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마음은 그대에게 근거가 되지 않는다.
There is a profound loneliness and sense of loss inherent in the experience of freedom. It is the loneliness of pure meditation, the loss of a solid world;
it is the loneliness of distant planets spinning in infinite night. It is the loneliness of forever being at the point of pure creation. It is the loneliness of leaving the known world and confronting the precious passing moments.
It is the loneliness that exists at the core of every being, the loneliness that is the realisation, “I am living and I am dying and I cannot resolve this Mystery for myself, and nobody can resolve it for me, and nobody can breathe for me, love for me, die for me…”
자유에 대한 경험 안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깊고 짙은 외로움과 상실감이 존재한다.
그것은 순수한 명상의 외로움이며, 견고한 세계의 상실이다.
그것은 무한한 밤에 회전하는 먼 행성의 외로움. 그것은 순수한 창조의 지점에 영원히 존재하는 외로움. 그것은 알려진 세계를 떠나 소중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마주하는 외로움.
그것은 모든 존재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외로움.
‘나는 살아 있고, 나는 죽어가고,
나는 홀로 이 신비를 풀어낼 수 없으며,
누구도 나를 위해 해결해 줄 수 없고,
누구도 나를 위해 대신 숨을 쉴 수 없고,
나를 위해 사랑해 줄 수 없고, 날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없다’라는 것을 자각하는 외로움이다.
It is a loneliness that never leaves, that is not dependent on how many people surround you or how ‘popular’ you are or how many ‘fans’ you have, a loneliness that is actually built-in to Being itself, that calls you home moment by moment.
그것은 결코 떠나지 않는 외로움이며, 당신이 얼마나 유명하든, 얼마나 많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있든, 존재함 자체에 내장된 외로움, 매 순간 당신을 집으로 부르는 외로움이다.
Back here.
Out of the mind and into this presence! To this intimacy with life. This is a loneliness that does not separate you or isolate you, but actually connects you profoundly with all things. It is a healthy loneliness, and it takes courage and strength to stay near to it and not run away into habitual distractions.
이곳으로 돌아오라.
마음을 떠나 현재로, 삶과 함께하는 이 친밀함으로!
이것은 당신을 분리시키거나 고립키는 것이 아니라,
만물과 당신을 깊이 있게 진정으로 연결하는 외로움이다.
건강한 외로움이다.
그 곁에 머물면서 습관적인 산만함 속으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
It is the kind of loneliness that everyone on the path of true meditation must confront in the end.
이것은 진짜 명상의 길을 가는 모든 사람이 결국 마주해야만 하는 외로움이다.
You meet “the lonely one” inside and you love it so it is no longer lonely.
You touch life at the point of creation.
Loneliness contains its own cure. Dive in.
당신은 내면의 외로운 존재와 만나고, 그것을 사랑하고, 더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창조의 지점에서 생명을 감지한다.
외로움은 그 자체로 치유를 포함하고 있다. 그 속으로 뛰어들어라.
There is no language of the holy.
The sacred lies in the ordinary.
All teaching are mere references.
The true experience is living your own life.
—Deng Ming-Dao
성스러운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성은 일상에 존재할 뿐이다.
모든 가르침은 그저 언급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경험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첫댓글 성스러운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성은 일상에 존재할 뿐이다.
모든 가르침은 그저 언급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경험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