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 너무 추워요
당신은 못 말리는 땡벌 땡벌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 너무 길어요
64년 갑장들이 펄펄 날고 있는데 허리나 붙들고 있는 한심한 용갈이가 절치부심 목욕재개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이것은 부재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응답이고 중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침묵을 버림으로 해석하면 절망이 되고, 준비로 해석하면 기다림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침묵은 무응답이 아니라 지연된 응답입니다. 침묵과 응답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하는가? 에예공! 지긋지긋한 고난의 끝이 언제일지 모를 때 삶이 얼마나 지겨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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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시는 하나님은 부재하시는가, 기다리게 하시는가? 시편 13편은 하나님의 침묵보다 인간의 해석을 다루는 시편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인은 그 침묵을 견디며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놓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침묵 자체가 아니라, 그 침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는 해석학의 문제다. 후기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간은 언제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해석된 방식으로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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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역시 이해는 대상 자체보다 해석의 지평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침묵도 마찬가지다. 같은 침묵이라도 버림으로 읽으면 절망이 되고, 신뢰로 읽으면 기다림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해석을 인간에게만 맡겨 두지 않는다. 시인은 "어느 때까지입니까?"를 네 번이나 외친 뒤에도 마지막에는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감정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해석의 기준이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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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시편 13편은 오순절 이전 제자들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부르짖던 시인은 응답을 받기 전에 이미 "나는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라고 노래합니다. 환경은 아직 변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먼저 변했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 전에 응답을 받을 사람을 먼저 준비시키십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는 시간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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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을 흘러가는 양(量)으로 측정하지만, 성령은 시간을 성숙의 질(質)로 만드십니다. 기다림은 빈 시간이 아니라 존재가 변화되는 시간입니다.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처럼, 참된 시간은 시계의 초침이 아니라 존재가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성령은 바로 그 지속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은 성령의 부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이 역사하시는 방식일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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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들리지 않을 수 있지만, 성령은 침묵 속에서도 우리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의 시선을 현재의 고난에서 하나님의 때로 옮겨 놓으십니다(롬 8:26). 결국 지연된 응답은 응답이 늦어진 시간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시간에 맞도록 빚어 가시는 시간입니다. 응답은 사건으로 끝나지만, 성령은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응답을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때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2026.7.14.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