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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2일 부활 제4주일
제1독서 : 사도 4,8-12
제2독서 : 1요한 3,1-2
복 음 : 요한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착한 목자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부활 넷째 주일이며 성소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늘 듣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밀한 모습이었습니다.
착한 목자는 대개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다니며 양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고
아주 자연스럽게 양들과 친구가 되고 마치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이지요.
서로 함께 생활하다 보면 서로를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은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실제로 그들이 사는 그들 삶의 전경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그렇게 양들과 함께 살다보면 자기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양떼를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배게 되지요.
당시 이스라엘 근동 지역에서 양떼에게 가장 큰 위협은 이리떼였는데
이들이 양떼를 습격하면 착한 목자는 사랑하는 양떼를 돌보기 위해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양떼를 지키기 위해 애쓰게 되고 때로 생명까지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시는 말씀도
단순히 비유가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생명을 내어놓으시는 당신의 죽으심에 대한 예고이지요.
우리말 번역, ‘착한 목자’ 영어로는 'good shepherd'의 ‘good'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아고토스’이고 다른 하나는 ‘카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아고토스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바르거나 질, 상태, 실력 등이 좋은 것을 지칭하는 한편,
카로스는 인간미와 사랑이 담긴, 천성이 선한 어떤 것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예수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할 때 무엇입니까?
바로 아고토스가 아니라 카로스라는 단어를 쓰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좋은 의사를 만났다고 할 때, 단지 의술이 뛰어난 사람을 지칭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환자를 생각해 주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깊은 인간미를 풍기는
그런 의사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이처럼 좋은 의사, 좋은 선생, 좋은 목자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로메로’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로메로 대주교님은 당신의 양떼인 엘살베드로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불의를 저지르는 독재 권력에 항거하여 정의와 사랑을 외치시다가
독재자가 보낸 자객의 흉탄에 쓰러지신 분이십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착한 목자이셨던 분이지요.
로메로 주교님은 “목자란 자기 양떼가 안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의 안전을 바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암살의 위협에 굴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신 분입니다.
저는 그분의 강론집 ‘여러분이 교회’라는 책을 여러 번 읽게 됩니다.
그분의 들려주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목자 곧 사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쏟으신 최고의 목자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르고자 노력해왔다’라고
말씀하시는 신념에 찬 그분의 목소리는
제게 “나도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기꺼이 그분을 따르리라’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영화 ‘로메로’에서 주교님이 성체를 높이 드신 채 흉탄에 스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느낌은 분노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평화와 안도감이었습니다.
이제는 참으로 당신의 할 일을 다 하시고 주님 품에 안기시는구나하는 느낌.
그래서 ‘주교님,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제 마음에서 우러나왔지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나, 예수님은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누가 연애편지를 쓰면서 “그대와 나는 하나입니다”라고 했다면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너무나 깊어 헤아릴 수 없고
그대와 나는 뗄 수 없는 깊은 유대 안에서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깊어 모든 것을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일치를 당신의 제자이며 친구들인 열두 사도와 나아가서 우리 모두와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지요.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는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 20-21)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가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 일치를 이룬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비결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만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참으로 어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순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의미는
바로 당신의 뜻을 버리시고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한 사람 한사람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 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하셨지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겨 주신 것은 바로 사람들,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라 갑시다.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어 나갑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을 보면 너무나 멋져보였습니다.
25년이라는 그렇게 긴 시간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신부님은 정말로 존경스러웠고 당연히 교회의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년째 사제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서
과연 멋진 사제로 살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아직 5년이나 남았으니 5년 뒤에는 은경축을 맞이했던 그 과거의 신부님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가 있을까요?
솔직히 나이 마흔이 되면 멋진 중년이 될 줄 알았습니다.
논어에서 40세를 불혹이라고 해서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즉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방황했던 30대에
제게 마흔은 인생의 정점을 찍는 시기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흔을 넘어서 이제 하늘이 정해준 명을 안다는 지천명인 오십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여전히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벌써 오십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네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우리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많이 내세우고 있습니까?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억지도 얼마나 많이 부리고 있습니까?
사실 이렇게 억지 부리며 생떼를 쓰는 모습을 사람들은 좋게 보지 않습니다.
아마 멋진 중년의 모습이 아니라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면서 피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해마다 맞이하는 ‘성소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부르는 성소(聖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는 부르심도,
또한 가정을 이루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결혼 성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활하는데 어떻습니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추는 큰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성소’를 받았습니다.
즉, 성소는 겸손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맞게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모든 부르심을 존중하고 있지만,
오늘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성소 계발과 육성을 위해 어느 누구도 제외 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큰 모범을 통해서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이는 곧 신앙생활의 단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주님의 일꾼이 당연히 필요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 성소자의 수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일할 일꾼들이 줄어들면서 교회를 찾는 신자들의 숫자 역시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신 주님이십니다(요한 10,11 참조).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신 것이지요.
이는 곧 당신의 모습을 보고 따르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세상의 것이 좋다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성소계발과 육성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도 베드로는 주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다(사도 4,12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의 우리 밖에서만 머무르려고 할까요?
이제는 주님을 있는 그대로 뵐 수 있도록(1요한 3,2 참조)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의 부르심에 겸손한 모습으로 제대로 응답하는 것,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과 힘을 실어 주는 것 등을 통해 가능하게 됩니다.
또 다시 맞이하는 성소주일입니다.
단순히 신학교나 수도원 방문하는 특별한 날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대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주님 뜻에 따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소국에 있는 제게는 1년에 두 번 가장 큰 행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품식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소주일입니다.
서품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젊은이들이 오랜 시간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되는 예식입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독신서약, 순명서약,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매년 새 사제들을 보는 것은 제게는 커다란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성소주일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신학교를 개방합니다. 수도회를 초대합니다.
많은 학생과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성소주일이 씨를 뿌리는 것이라면 서품식은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 것은 사람들이 하겠지만
결국 결실을 맺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신학교에서는 주교님을 모시고 미사가 있습니다. 신학생들이 만든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오셔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착하고 겸손한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사제직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 생활 50년을 앞두신 원로 신부님의 체험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서품을 받으시고, 부산의 수녀원으로 첫 미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기차를 탔는데 옆자리의 승객이 무척 긴장을 하고, 불안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대구에 동창 신부님이 있어서 잠시 내려서 동창신부가 있는 성당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곧 누가 문을 두드렸고, 나가보니 옆 자리에 있던 승객이었습니다.
승객은 신부님을 따라왔고 고백성사를 청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성당에서 고백성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승객은 28년을 냉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처음으로 고백성사를 드리는 것이었고, 냉담기간이 길어서 면담 성사를 하였습니다.
성사를 다 마치고 신부님은 승객에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저는 3일 전에 서품을 받은 새 사제입니다.
저도 오늘 처음으로 고백성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승객은 무릎을 꿇고 신부님께 다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주머니에는 2개의 봉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서였고, 다른 하나는 극약이었습니다.
사업이 계속 실패를 했고, 새로운 사업을 위해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이번에도 사업이 어려워지면 자살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승객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업이 잘 되는 안 되든 부산에 있는 수녀원으로 전화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신부님은 승객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번에는 사업이 순조롭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다음날 새벽 수녀원 미사에 오시도록 이야기를 하였고, 승객은 수녀원 미사에 왔습니다.
신부님은 수녀님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설명하였고, 승객을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새 사제였던 신부님은 첫 미사와 첫 고백성사를 통해서 사제직이 이렇게 고귀한 것임을 새삼 알았다고 합니다.
그 뒤로 50년 가까이 많은 미사를 봉헌하고, 고백성사를 드렸지만 그때의 감동이 늘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착한목자’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 생애를 거쳐 이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신학생 때 자주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임쓰신 가시관’입니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이 뒷날 님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님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고, 고난의 길일지라도, 버림받아 외로울지라도,
주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따라가야 할 신앙의 길, 진리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이미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나 수도자들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삶 안에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또한 각 본당과 신앙 공동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이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는 사제 성소자와 봉헌 생활 성소자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부활 제4 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부활의 선물인 성령으로 가득 차,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는 없다고 증언합니다.
<제2 독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분처럼 되고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선포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생명을 얻어주는 부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11)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목자”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유배를 겪으면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모아들일 미래의 “착한 목자”로 소개하면서(에제 34,11-16;스바 3,19;미카 2,12 등),
미래에 나타나 백성의 목자가 될 다윗 가문의 한 인물을 언급합니다(예레 3,15;23,4-6;에제 34,23-24;37,24;미카 5,1-4).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하느님과의 하나 됨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곧 그는 하느님이 보낸 목자인 동시에, 보낸 분의 마음에 드는 목자입니다.
그것은 삯꾼과는 달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4-16)
여기에는 “착한 목자”의 특성이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첫째> 특성은 양들과 서로 압니다.
그렇습니다. 목자는 항상 양들과 관계하여 있습니다. 곧 양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목자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있기에 서로 압니다.
이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알 듯,
밤낮 같이 지내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곧 양들을 “안다”(γινωσκω)는 것은 사랑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의 <둘째> 특성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곧 목자가 양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양이 목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 이것이 바로 목자의 존재 근거요 신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자는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착한 목자”의 <셋째> 특성은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러시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이 목숨을 내놓으십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다시 얻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요한 10,1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서 받은 명령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는 바로 이처럼, 부여받은 소명을 사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성소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데려오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삶으로 불태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뜨거운 축하와
진실된 축복을
서로 나눕시다.
다시
예수님의 삶 안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참된 사랑의
성소 주일입니다.
부르심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우리 안으로
양들을 데려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소명에
충실합니다.
착한 목자는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양들을 향한 사랑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스스로 낮아짐으로
문턱을 낮춥니다.
착한 목자는
약한 양들을
들쳐 업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갑니다.
착한 목자는
침묵의 언어로
십자가를 지고
기쁘게 걸어갑니다.
착한 목자는
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드러냅니다.
착한 목자는
끝까지
양들과 함께 하시며
양들을
아버지께로
이끌어 가십니다.
착한 목자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 또한
사랑에 충실한
저마다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착한목자가 되기 위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수원신학교를 거닐다보면 한 편에 고 배문환(도미니코) 신부님의 흉상이 수줍은 듯
꽃과 나무 사이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돌아가신지 수년이 지났지만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선배 신학생들로부터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고 갓등 중창단에 의해 노래도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신부님은 수원신학교 학장이셨고 61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여름에 신자들과 바닷가 물놀이를 갔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세 자매를 발견하게 됩니다.
신부님은 세 자매를 차례로 건져내신 뒤 물을 많이 마시신 데다 탈진하셔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착한 목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기에
지금도 동상으로나마 신학교를 지키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는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란 뜻입니다.
성소는 비록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공통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모습은 ‘착한 목자’로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분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소이십니다. 이 성소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소는 마치 소의 멍에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멍에를 매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도 이 성소를 거부한다면
하느님의 것이 될 수 없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이 759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2만6천여 명을 대상으로 직업만족도를 조사하였습니다.
1위는 초등학교교장, 2위는 성우, 3위부터는 상담전문가, 신부, 작곡가, 학예사, 대학교수,
국악인, 아나운서, 놀이치료사 순이었습니다.
대학교총장은 14위, 판사는 22위, 의사는 44위, 중고등학교 교장은 49위,
고위공무원은 55위, 변호사는 57위, 국회의원은 73위, 교사는 90위 등이었습니다.
사제가 직업 만족도에서 4위이지만 사실 초등학교교장이나 성우, 작곡가, 대학교수나 아나운서,
의사, 판검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사제가 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7년간만 신학교를 무난하게 졸업하면 서품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맘만 먹으면 직업 만족도를 가장 크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이 사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직업일까요?
사제들 중 아마 단 한 사람도 사제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했더니 세속적인 시선을 지닌 분은 ‘신부가 직업이죠.’라고 반론을 제기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직업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한 것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봉사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제가 돈을 벌기를 원한다면 본당신부로서 돈을 유용할 수 있는 액수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심 하나로 당연히 받아야 하는 돈 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사제는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하는 직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기에
한 푼도 주지 않을 지라도 행복할 수 있는 인생 자체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교황 식스토 2세 때 로마의 일곱 부제 중 하나였으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했습니다.
부제로서 교황님을 옆에서 돕던 성직자였습니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그가 맡은 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세콜라리우스가 교황이 순교하자
교회 재산을 담당하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살고 싶다면 교회의 보물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교회의 물건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집정관이 계속 교회의 보물을 달라고 요구하자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집정관 앞으로 데리고 가서 이들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보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벌겋게 달궈진 석쇠 위에서 고문을 받았습니다.
라우렌시오는 고문을 지켜보던 로마 황제에게
“보아라. 한쪽은 잘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잘 구워서 먹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직업인들과 성소자들과의 차이입니다.
직업인들은 세속적이고 이들은 세상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성소자들은 돈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삯꾼은 이리 떼가 오면 자신의 생명을 잃기 싫어 양들을 놓고 도망칩니다.
그러나 현 시대에 이렇게 목숨을 내어놓으며 순교할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착한목자에 속하는지 삯꾼에 속하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바칠 일이 없기 때문에 저를 평가할 구체적인 것이 필요했습니다.
한 번은 가톨릭의대에 다니는 학생을 만나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의대에 들어가기도 힘든데 이 학생은 거기에서도 수석을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라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루를 3분씩 나누어서 사용합니다.”
3분도 결코 헛되게 쓰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하루를 3분씩 쪼개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사제로서 양들을 위해 어떻게 하루를 나누어가며 살아가고 있나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착한목자라면 게으를 수 없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휴가로 여행을 하면서 한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 신부님은 어머니께서 자신을 위해서 지금까지 고생하신 것에 비해 해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어머니에게 무엇을 해 드릴까?’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아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고,
사제관에 혼자 들어올 때 아무도 반겨줄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
사제관에 꽃을 꽂아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꽃꽂이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고 아들은 3년 동안 그 비용을 대 주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꽃꽂이를 배우게 해 드린다고 생각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는 오직 아들을 위해서만 꽃꽂이를 하신다고 하십니다.
사제관 어디에나 꽃이 있고 아들은 혼자 사제관에 들어와도 꽃을 통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상대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데 어떻게 게을러 질 수 있겠습니까?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이 아르스에 부임 받아 성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신부님을 잡고 “여기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요. 아무도 성당에 안 나와요.” 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그러면 모든 것이 할 일이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새벽 2시부터 일어나 기도하였고 그렇게 그 분의 거룩함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하루에 18시간 동안 고해를 주어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줄 것이 항상 있기 때문에 절대 게을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생명을 바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는 아내의 자녀인 동시에 남편의 자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돌보아야 하는 양떼나 이웃은 나의 자녀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자녀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사랑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웃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이미 착한목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