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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제최후의 장교가 남기고 간 업적
1위 : 박정희 4,285명(28%)
2위 : 광개토대왕 2,257명(14%)
3위 : 세종대왕 1,93명 (11%)
4위 : 이순신 1,303명 (8%)
5위 : 김대중 807명 (5%)
이상은 월간조선(3월호) 실린 한국 역사상 최고의 인물 인터넷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결과다.김구선생이나 안중근의사는 명함도 못내밀고,참으로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1. 박정희가 친일한 증거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 덕에 영광의 얼굴로 [만주일보]에 실린다. 뿐만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민족반역자,매국노이다.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 박정희가 대통령이었을때 대표적 친일행위
박정희는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2.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한 증거
1942년 7월 조직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의 군사조직. [박정희가 `요시이~`하며 공을 세우려하여 토벌하고자 했던 독립군 부대이다.]
결성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군사조직으로서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일부 부대는 옌안[延安] 지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중국공산당의 영향하에 옌안계의 한인 무력과 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조선의용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들이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의 도움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옌안 지역에서는 한인들의 비중이 커져가자 한인 자체의 혁명조직을 만들 필요성도 증대했다. 이에 따라 1941년 1월경 태행산(太行山)에서 김두봉(金枓捧)·최창익(崔昌益)·한빈(韓斌) 등의 주도하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조직되었는데 같은 해 7월경 이 한인무장부대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에 가입하고 자신들의 부대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그리고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될 때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했으며 1944년 2월에는 화중지대(華中支隊)를 설치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3. 박정희가 빨갱이 이었다는 증거
박정희는 남로당을 자기 발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시절에 미군정에 붙잡혔다. 그래서 사형 언도받았고 당시 미측 하지 대장은 총살시키려고 했는데 취조했던 글렌 중령의 이용가치가 있다고 선처를 호소하여 무기징역받고 몇달 뒤 3.1 사면 받은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사형을 면했나?
남로당 핵심당원 400명 이상의 명단을 건네주었고 그 당원들은 다 총살당하였다. 그 자체로도 악행인데 사나이로서의 의리나 자기 의지도 없는 기회주의자 박정희. 그는 6.25전쟁이 적기임을 알고 백선엽등의 실세 장군들에게 아첨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육본 문관으로 취직하여 중령으로 현직에 복귀하였다.
4. 5.16은 술쳐먹고 저지른 행운의 쿠테타였다.
5.16쿠데타는 사실 운이 좋았을뿐이다.
이미 방첩대가 다까기의 반란사실을 알고 15일저녁부터 다까기를 추적하고 있었다. 참모총장 장도영 머저리가 단호하게 체포를 명했다면 다까기의 운명은 달라졌을것이다. 방첩대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다까기는 반란봉기 장소로 가지 않고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실상 자포자기 상태였던 것이다! 기다리다 못한 반란일당들이 다까기를 찾아나서 설득해서야 그는 거의 만취상태로 한강을 건넜던 것이다~ 그덕에 출발이 3시간여나 지체되었음은 물론이다! (반란에 참여한 공수단 대령 박치옥의 증언)
참모총장이 장도영이 아니고 이종찬이었다면 다까기는 감히 쿠데타를 시도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설사 시도했다 하더라도 결코 성공할수 없었을 것이다.
다까기가 결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넘들에게 난 꼭 이얘기를 해준다!~
물론 더 뭣같은 건 이런 엉성한 새끼의 쿠데타를 못막은 장도영이야말로 역사의 죄인중 죄인이다! 쿠데타 진압명령을 기다리던 1군사령관 이한림의 출동을 재가하지 않고 쿠데타를 수수방관한 윤보선 역시도 마찬가지고... (당시쿠데타가담군은 고작3500여명, 이에 비해 당시 제1야전군은 한국군 최정예주력부대...출동만 했다면 진압은 시간문제였다!) 수도원으로 도망가 미국에 전화질만 하다 끝난 장면 역시도 왜 그렇게도 나약했었는가? 4.19의 피로 세운 정부를 그렇게 쉽게 내주다니? 답답할 따름이다!
(미국사는 장도영이 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줄 아는가? 쪽팔려서다! 그는 다까기와 정통정부사이에서 교묘히 눈치보다 인생조진 기회주의자일뿐!)
5. 박정희정권의 경제성장률 칭송은 수구세력들에 의해 붙여진 허울이다.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김대중 7.4%, 노태우 7.0%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그러나 각 집권자별 연평균성장률과 우리와 여건이 비슷하고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은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여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대만은 10.0%, 주요국은 5.2%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 기간 동안 비교적 소득수준이 높은 주요국의 성장률이 5.2%였다. 일반적으로 한나라의 경제개발에 시동이 걸리면 성장률이 일정수준까지는 급상승하나,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성장률이 둔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로 선진국으로 인 주요국 성장률 5.2%는 대단히 높은 수치이다. 뿐만 아니라 대만이 10%였다는 것은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국제적으로 엄청난 호황기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정희는 18년이 넘는 집권기간 동안 연평균 8.6%의 성장에 그쳐 10.0%의 대만에 못 미쳤고 주요국의 1.6배 수준이었다.
전두환은 집권기간(7년) 동안 연평균 9.3%의 성장률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를 기록하였다. 전두환의 성장률은 대만의 성장률 8.5%보다 약간 높았고 주요국의 2.6배 수준이었다. 노태우도 연평균 7.0%의 성장률은 기록 수치상으로는 전두환에 약간 못 미쳤으나 주변국의 성장률과 비교할 때 전두환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김대중의 집권시기는 대만이 연평균 3.1%, 주요국이 2.4%에 불과해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극심한 불황기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기간동안 연평균 7.4%의 성장률은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1위의 전두환에 1.9% 뒤졌으나 대만의 3.1배, 주요국의 2.4배를 기록하여 내용면에서 매우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경제통계를 근거로 분석한 역대대통령의 경제성적표는 단순수치상으로 전두환 1위, 박정희 2위, 김대중 3위 순이다.
6. 박정희의 여자들 (경향신문,한국일보 ,서울신문,한겨레21)
“박정희의 여자 200명” 입력: 2005년 10월 25일
박정희 전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65)가 최근 발간한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라는 책에서 소문으로 떠돌던 박전대통령의 여자관계를 폭로했다.
안변호사에 따르면 김재규는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1980년 2월19일 접견에서 박전대통령의 여성편력에 대해 말했다.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전대통령을 거쳐 간 여성이 200명쯤 됐고 이 때문에 박선호(당시 중정부장 의전과장, 사형집행)가 무척 고생했다”고 털어놓았다는 것. 또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박전대통령에게 다 불려갔으며 당시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다.
1975년부터 3년간 서울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라며 "큰 행사, 작은 행사 등의 얘기가 근혜씨의 귀에도 흘러들어가 문제가 됐었다. 주변에서 박 대통령을 재혼시키려고 애를 많이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진술을 소개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중정)는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 2명을 활용해 200여명의 여성 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발을 드는 여성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 5∼6곳에도 안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 중앙정보부 안가 관리직원은 최근 한겨레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연회 접대 여성은 어떻게 준비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이 같이 밝히고 "접대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다. 대통령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대통령이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라며 "대통령이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1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1980년 1월 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차 공판에서 박 과장은 ''''대통령의 여인들''''과 관련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혔다.
맺음말
이제 박정희가 죽은지도 26년이 되었다.그의 죽음이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것이다.그의 죽음은 준비없는 친일행위자 이었지만 전두환 ,노태우를 거치면서 아무 탈없이 박정희의 업적과 영광은 그대로 이어진게 사실이다.문민정부,국민의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 이르자 그들 친일반민족 수구세력들은 국보법사수 및 박정희의 업적을 찬양하기 시작했고,이들 말에 속은 철없는 일부 국민들은 그것이 사실인양 받아들였다. 결국은 그 세력들에 의한 이니셜은 제대로 먹혀들어 극심한 국론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는 항상 살아있다.아무리 준치일후라 하여도, 견원지간이라 하여도 우리민족의 슬기로움으로 진실을 알게 될것이고,박정희의 허와실은 낱낱히 밝혀질 날이 머지않아 도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