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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는 법대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숨어있는 처지. 때는 긴급조치 등 공포정치의 절정기였던 1975년, 김영수는 조그만 골방에 쳐 박혀서 자신의 뇌리와 가슴 속으로 순간순간 뛰어드는 젊은 남자의 실체를 잡기위해 애를 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전태일. 4년 전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스스로를 태워버린 평화시장의 한 노동자. 사망 당시의 나이 겨우 22살. 그의 죽음은 김영수를 비롯한 학생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회각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아직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다.
처음에 김영수에게 전태일은 다만 희미한 윤곽에 존재할 뿐이다. 첫 번째 이미지는 통금 사이렌에 쫓겨 필사적으로 달려 가는 모습이다. 점심을 굶는 어린 여공들에게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곤 야간 작업이 끝난 늦은 시간에 늘 통행금지에 쫓기며 집까지 뛰어야했던 전태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지만 늘 공부를 목말라했고 아버지로부터 근로기준법이란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난 뒤부터 법을 아는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순박한 노동자.
그의 삶을 파고들수록 김영수는 전태일에게 집착하게 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전태일에게 오버랩시키게 되며, 그 작업은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김영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비상구가 된다. 그러나 전태일의 삶이 역사와 가까워질수록 결단을 요구받았던 것처럼 김영수의 개인적인 삶도 자기희생의 통과제의를 거쳐야만 한다.
김영수에겐 '사랑의 실천'과 '실천의 사랑'을 저울질하는 정순이라는 애인이 있고, 그녀는 공장에 다니면서 현재 영수를 먹여 살리는 입장이기도 하다. 야학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난 정순은 영수를 통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으며 임신한 몸으로도 현실의 난관을 헤쳐나간다.
그러나 김영수에게 다가오던 공권력은 그가 도피해버림으로써 정순에게로 향하게 되고 자신의 고통을 대신 치루는 그녀 때문에 영수는 갈등이 깊어진다. 극장 보일러실에 숨어 있게 된 영수는 각성의 과정을 거쳐 결단의 순간으로 가고 있는 전태일의 정신적 고뇌와 치열하게 맞서며 자기 자신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시대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월남이 패망한 것과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된다. 김영수의 행동반경도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보일러실로 정순이 찾아오고 경찰의 미행을 눈치 챈 그는 원고보따리를 챙겨들고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 끝에 마침내 경찰을 따돌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시외버스를 타고 아직도 기약없이 어디론가 도피를 하고 있는 김영수와 정순이 있다. 그러나 이번엔 두 사람만이 아니다. 만삭인 정순의 배 위에 완성된 전태일의 전기가 놓여 있다. 영수는 잠든 아내의 배에 귀를 대본다. 탄생을 예고하는 새로운 생명의 힘찬 숨소리가 들린다. 영수의 귀에는 그것이 분신하던 날에 전태일의 가슴을 울리던 심장의 박동소리로 바뀐다. 불꽃에 휩싸이는 육신의 죽음위로 겹쳐지는 생명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1948년 8월 26일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전상수(全相洙)와 이소선(李小仙) 사이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살게 되었으나 봉제기술자였던 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찾아 1954년에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전태일은 가난 때문에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던 1960년에 학생복을 제조하여 납품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동대문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그러다 17살 때인 1965년에 학생복을 제조하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보조원으로 취직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재봉일을 배운 적이 있었던 전태일은 기술을 빨리 배워서 1966년에는 재봉틀을 다루는 재봉사가 되어 통일사로 직장을 옮겼다. 이 무렵이 되어서 빚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청계천의 평화시장은 인근의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과 함께 의류상가와 제조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1층은 상가로 사용되었고 2∼3층에는 500여개의 제조업체가 모여 있었다. 공장들은 모두 영세한 규모여서 작은 곳은 6.6m²의 공간에 13명이 일하는 곳도 있었고, 큰 곳은 40m²의 공간에 50여명이 일했다. 이처럼 좁은 공간에 다락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밀집시켜 일을 시키다보니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햇빛도 비추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서 어두운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하루 14시간씩 일을 했다. 환기장치가 없어서 폐 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특히 ‘시다’라고 불린 보조원들은 13∼17세의 어린 소녀들로 초과근무수당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전태일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함께 일하던 여성 노동자가 폐렴에 걸린 상태에서 해고되자 그녀를 도우려고 애쓰다가 자신도 해고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이후 전태일은 재단사 보조를 거쳐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던 재단사가 되었으나 동료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68년에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것을 공부하면서 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다지게 되었다. 그래서 1969년 6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어 설문으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며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렸다. 그러나 이 사실이 사업주들에게 알려지면서 전태일은 해고되었고, 평화시장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내던 전태일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다시 노동환경을 조사하는 설문지를 돌려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사회적 주목을 받자 삼동회 회원들은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행정기관과 사업주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래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여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기로 했다.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되려는 상황에 놓이자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큰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간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날 세상을 떠났다. 전태일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매장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여 사회적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나서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11월 16일 이후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등에서 농성과 시위가 벌어졌으며, 종교계에서도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 추모예배가 실시되었다. 노동자들의 저항도 잇따라 그해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이던 이상찬이 분신을 시도한 것을 필두로 1972년 유신체제가 성립되기 전까지 노동자들의 저항과 단체행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전태일은 하루 14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독서와 일기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쓴 일기는 많이 파손되고 유실되었지만 1967년 평화시장에서 일하면서 쓴 일기는 상당 부분 남아 있다. 그의 일기와 편지, 관계기관에 보낸 진정서 등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라는 책으로 정리되었으며, 일기와 주변 사람들의 구술 등을 기초로 그의 삶을 기록한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도 전해진다. 1995년에는 그의 삶을 영화로 옮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감독)이 국민모금 방식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가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청계천 6가의 ‘버들다리’ 위에 2005년 그의 정신을 기리는 반신 부조가 설치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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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태일 열사는 단순
< 월급을 많이 달라 ! >
가 아니었고
< 나라에서 제정한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 ! >
는 요구를 하였을 뿐 입니다.
1980년 초 까지, 아니 그 한 참 후에도 기업체에서 어린 여공들을 착취(거의 등골 빼먹는 수준)하여
즈이들은 돈을 벌어 먹었답니다 !
ㅠ ㅠ ㅠ ㅠ ㅠ
한국에서 기업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업이윤을 통째로 털도 안 뽑고 다 먹으려드니 노사분규도
심하지 않았는지..
기업주가 투자한 원금의 은행이자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만 가져가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욕심들이 너무 많아서..
청년 전태일, 흠모합니다. 이제는 공정과 상식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도 이 영화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던 일 이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