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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계보약사
자칭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요람의 내용검토 2007년 정해(丁亥)에 발행 하였다는 소위 대장군공파 요람이라는 것을 살펴보면 내용이 사실(事實)과 전혀 다르게 조작(造作)되고 왜곡(歪曲)하여 우리 계림군파 종원들을 현혹(眩惑)하고 있는데.
1. 월성가승(月成家乘)과 월성세승(月成世乘)및 우리 대동보에 대한 왜곡 또는 조작부분
가) 월성가승을 경주김씨 계림군파 임진창시 대동보가 발행되기 전에 김세신(金世臣=1688-1736)공이 저술하였는데 경순왕 자 태자 겸용(太子 兼用) 자 순웅(子 順雄) 자 인위(子 因渭) 로 계대 되어 있다고 조작 하였고
나) 월성세승을 김덕운(金德運=1687-1767)공이 저술하였는데 경순왕 자 은열(子殷說) 자 계령(子繼苓) 자 한공(子 漢公) 자 수서(子 壽西) 자 영고(子 永固)로 계대한 다음 안서(按書)에 평장사공 인위의 치사 연대를 감안하여 계산하면 순웅장군공이 대안군보다 나이가 위일수 있다고 설명하고 원조순웅(遠祖順雄) 자 인위(子 因渭)로 등재한 것은 순웅장군공이 마의태자의 아들일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왜곡 하였으며
다) 임진 창시대동보 에도 위와같은 뜻을 담고 있고 경순왕 자 은열 자 태화 보결(譜缺) 계령 자 한공 자 수서 자 영고 원조순웅 자 인위로 계대 되었다고 왜곡 하였고
라) 1842년의 임인대동보부터 1991년의 신미대동보까지 5차례에 걸처서는 경순왕 자: 은열, 자: 태화, 보결(譜缺) 계령 자: 한공, 자: 수서, 자: 영고, 원조순웅, 자:인위로 계대 되었다고 왜곡 하였다.
2. 숭웅장군공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되어 있다는 근거 의 족보로는
가)1934년 김경대(金景大)가 발행한 신라삼성연원보가 있고.
나) 1934년에 김태훈(金泰勳)이 발행한 경주김씨 족보(갑술보)가 있으며
다) 1999년 발행 경주김씨 태사공파 대동보의 조상계보 검토내용에 순웅 장군공이 대안군 김은열의 예하가 될수 없다는 증거가 있고.
라)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수성백파보(隋城伯派譜) 계림군후 백천공파보(鷄林君后 白川公派譜)
송강 공파보(松岡公派譜) 예판공파보(禮判公派譜) 계림군파 가승보 계림군후 병조참판공 파보 등 6개 족보에 순웅장군공이 마의태자 둘째 아들로 계대 되었다고 하였다.
3. 자칭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대종회가 순웅장군공의 예하7개파 대표가 참석하여 2000년 1월26일에 창립 되었으므로 정당하고 창립이후 계대 정립을 위한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여
가) 월성가승 나)월성세승 다)계림군파 임진창시 대동보 라)대안군 은열공 묘지명 마)강릉김씨 사정공 이원청동파보 바)경주김씨 분파총목 사)경주김씨 문헌록 명현절목 집성록 아)신라삼성연원보 차)경주김씨족보갑술보 카)고려사 타)태사공파족보 파)휘순은공이 대장군으로 기록된 문헌 하)경순왕 태자 휘:일 순웅공으로 계대된 족보 등을 검토하고.
장군공 김순웅을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 한다고 결론지은 다음 2000년 11월20일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의안대로 결의 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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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대장군공파 요람의 임의 조작과날조 왜곡 부분에 대한설명
1) 월성가승(月城家乘)에 대한 왜곡내용 설명
월성가승은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7세 직계 장손으로 호는 석릉(石菱)이며 1844년에 태어나 21세때 문과급제 하였으며 벼슬은 공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하고 향년47세에 졸하신 김창히(김창히)씨가 저술한 8권의 가승인데 4권은 유실되고 1.2.4.8. 네권만 남아 있는것을
김주신의 작은집 종재인 김세신(金世臣)의 9세손 야촌 김정무(野村 金正珷)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필사하여 보관하고 있는 가승으로 내용은 현조(顯祖)의 행실.유사. 시문. 비문, 제문. 등을 기록하고 있고 조상 계보로는 경순왕부터 계림군까지 계대한 다음 계림군 예하로는 경은부원군의 직계조상에대한 내용을 위주로 하면서 특히 인원왕후(仁元王后)를 탄생케한 김주신이 5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인 진사공 김필진(金必振) 내외분께서 경은부원군 김주신을 많이 보살펴 주셨기에
8권후미로는 숙모이신 안동권씨 부인의 제문을 손수지은 내용을 끝으로 하였고 월성가승원대세계(月城家乘遠代世系)란에는 敬順王 諱 簿 南諱 謙用 安東國史畧有太子謙用之語 順雄 敬順王之後 將軍 配 江陵金氏宣喚女 男諱 因渭 라고 기록한 다음 안서로 순웅부터 경순왕 사이에 보실세계(譜失世系)가 있고 경순왕이 고려 경종3년 훙 하신후43년에 순웅의 아들 인위가 현종 때 우복야 하니 이를 근거로 하면 연대가 지극히 가깝다고 하는 참봉공 김덕운의 안서를 인용하고는
또 경주 김상욱(金尙郁) 가장 세보에는 경순왕4자(四子) 은열 이후 4세대를 내려가 영고의 아들이 인위라고 하였으니 이는 경순왕 훙후 43년에 인위가 우복야를 하였는데 나이70세에 치사를 하였는지 아닌지 명확치 않아서 그간의 대수가 그렇고 저렇고 하는 말이 많더라 하고는 인위 예하는 계림군까지 월성세승과 같은 내용을 담아 계대 하였다.
그런데 월성가승 원대세계의 내용을 살펴보면
1) 경순왕의 휘자가 어떤 곳에는 부(溥)자 라고 하였지만 고려사의 기록에 부(傅)가 맞는다고 하였 으므로 오기로 판명 되며
2)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남휘 겸용(南諱 謙用)은 아버지인 경순왕보다 두 글자를 내려서 썼고 안서에 “동국사략에 태자겸용 이라는 말이 있다” 라고 한것은 조선 태조조때 문형 대제학 권근(文衡大提學 權近)등이 찬한 동국사략(東國史畧)을 확인 하지않고 참봉공 김덕운이쓴 월성세승(月城世乘)의 내용을 따라 태자겸용(太子謙用)으로 오기(誤記)한 것으로 간주되며
3) 순웅의 이름앞에 남이라고 쓰지도 않고 남휘 겸용보다 두 글자를 올려서 경순왕의 첫글자인 경자와 같은 위치에 순웅이라고 하고는 경순왕지후라고 하였으니 남휘 겸용의 아들이 아니고 경순왕의 후이지만 계대를 알수 없다는 뜻이며 관직은 장군 배위분은 강릉김씨 선환의 여식이고
4) 순웅의 아들은 남휘 인위라고 하면서 아버지인 순웅보다 두글자 내려서 경순왕과 그 아들 남휘 겸용과 같이 글자의 높낮이 배열을 엄하게 해놓은 것은 순웅장군공이 경순왕의 아들 남 겸용의 아들이 아니고 경순왕의 후예이지만 정확한 계보는 알수가 없다는 뜻임에도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는 지금도 생존해있는 필사자(筆寫者) 야촌 김정무가 월성가승 8권 맨후미에 “이책은 昌熙 호는 石菱 가 저술한 가승이라 후에 자손을 위하여 필사 하여둠” 이라고 써 놓은것을 낙서로 지우고 창희의 176년전 7세 방조인 김세신이 임진창시대동보가 발행되기 전인 1600년대에 저술 하였으며 순웅장군공이 마의태자 둘째 아들로 계대된 고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삼척동자도 비웃을 일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필사본 원문 계림군 대종회에 확인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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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세승을 왜곡한 내용의 설명
월성세승은 송애 문정공 김경여 (松崖 文貞公 金慶餘)의 증손자인 참봉공 덕운(參奉公 德運=1687-1767)이 수기(手記)로서 만든 한권의 가승(家乘)인데 많은 사료들과 가승들을 검토하여 조상계보를 정립하고 인위평장사 아래로 12세 적장손 계림군까지의 계대를 사기(史記)에서 명확하게 밝힌 다음 평장사 위로 아버지인 순웅장군 위로는 사료상에서 밝힐수가 없어서 경순왕의 위로는 이미
밝혀진 사첩(寺牒)이 상합(相合)이나 경순왕과 순웅장군공의 사이는 밝힐 수가 없으며 은열이하의 계보는 가정전언(家庭傳言)에 따라 고록(故錄=잠깐 적어둔다는뜻)으로 적는다고 하면서 은열 공부시랑(殷說 工部侍郞)자 계령 형부시랑(子 繼苓 刑部侍郞) 자 한공(子 漢公) 자 수서(子 壽西) 자 영고(子 永固)라 하고는 임진창시대동보에 등재되어 있는 안서(按書)와 같은 순웅장군공을 은열의
후예로 계대할수 없음을 명확히 하였고 또한 경순왕과 순웅장군과의 관계도 사료에 밝혀진 바가 없었음으로 일세 휘:순웅(一世 諱:順雄)이라 하고는 이하로 명확한 계대를 설명하고 있는데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 에서는 이같은 설명의 내용이 은연중에 순웅장군공을 마의태자 둘째아들로 계대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참봉공 덕운이 월성세승을 편록 하면서 조선조 태조조 때에 문형 흥문관 예문관 대제학 권근(文衡 弘文館 藝文館 大提學 權近) 등이 저술한 동국사략(東國史略) 춘하추동 4권중의 하권에는 “왕견태수겸용 우고려 청상견려 왕왕회우국 도숙대이행 추호불범 도인상경 왈석견씨지 래야여 봉시호 금왕공지 래야여견부모” (王遣太守兼用 于高麗 請相見麗 王往會于國 都肅隊而行 秋毫不犯 都人相慶 曰昔甄氏之 來也如 逢豺虎 今王公之 來也如見父母)
“경순왕께서 태수 겸용을 고려에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니 고려왕이 서라벌에 와서 만났는데 고려왕을 호위한 도숙대의 행실이 서라벌 백성들을 털끝 만큼도 범하지 않았기에 서로 경하하며 이르기를 옛날 견씨(후백제 견훤을 지칭) 왔을 때는 승냥이나 호랑이를 만난것 같았는데 이번에 왕공(왕건 태조지칭)이 왔을때는 부모를 본 것과 같더라” 라고 하였 음에도 이를 명확하게 확인하지 않고 태수 겸용(太守 兼用)을 태자겸용(太子 兼用)으로 글자 한자를 잘못기록 하므로 임진창시
대동보와 월성가승에도 그같이 믿고 기록케 하였으며 훗날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도 태자의 자(字)가 겸용이라고 조작(造作)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것과 순웅장군공의 배위는 강릉김씨로 대상 선환(大相 宣喚)의 삼여 이시고 대상선환은 명주군왕 주원(溟洲郡王 周元)의 6세손이신데 월성세승 에서는 대상선환이 명주군왕의 7대손이라 하였고 방계문중 소목의 일부내용을 명확하게 확인도 하지 않고 서(庶)자를 붙여 놓으므로서 훗날 그 후손들의 위상에 큰 피해를 입혔던 오류등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할것 이다.
그럼으로 우리 후손 들은 족보나 가승을 편록 하면서 조상계보에 대하여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검토하여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등재 하여야 조상님에게 불효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고 명확하게 밝혀진 고증과 근거있는 사료에 나와 있는 사실 데로만 수록 하는것이 후손된 도리임을 명심 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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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계림군파 대동보들에 대한 왜곡 내용
우리 경주김씨 계림군파 임진창시대동보부터 신미대동보까지 6차에 걸친 대동보의 조상계보에
관한 왜곡(歪曲) 내용 지적은 1772년의 임진창시대동보 발행 당시에는 대안군 은열의 묘지가
발견되기 12년전 이었으므로 경순왕의 아들이 몇 명이고 태자의 이름이 누구인지 알수가 없어서
신빙성이 없고 참고할 가치가 많지는 않지만 어느 일보(一譜)에 태자 궐명이자 역궐명 삼녀 은열(三女 殷說)이라는 내용도 있더 라는 것을 기록한 다음 평장사 인위가 고려초 8대임금 현종의 장인으로서 고려사 기록이 명확하고 아현 김감사 려(阿峴 金監司 礪) 소장 가승에 평장사공 인위의
아버지가 고려 초기 정4품 장군을 역임한 김순웅 이라는 사료들의 근거가 명확 함으로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는 국사(國史)로서 사료(史料)가 그런대로 밝혀져 있으므로
국사의 내용 대로 기록하고 경순왕 이후부터 장군공 까지는 사실(史失)로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 다 밝히지 못하고 장군공을 1세로하여 원조순웅(遠祖順雄)으로 임진창시 대동보를 편찬 하면서
연대가 맞지 않아서 장군공을 대안군의 예하로 계대 할수 없다는 월성세승의 안서와 대안군부터 영고까지의 고록(姑錄=잠깐 적어둔다는 뜻)을 그대로 등재하여 발행 하였으며 1784년에 대안군의 묘지(墓誌)가 발견되어 경순왕의 아들이 다 밝혀지고
넷째아들 대안군 아들이 태화(泰華)임이 밝혀 졌으나 태화의 아들은 기록이 없어서 계대가 명확하게 이어질 수는 없지만 대안군부터 영고까지의 고록에 묘지의 내용을 삽입하고 그 이후 2차인 임인대동보부터 6차인 신미 대동보 까지 경순왕의 아들은 대안군 묘지에 따라 기록 할수 있었으나 장군공의 조상계보는 더 밝혀진 바가 없어서
원조순웅으로 등재한 다음 장군공을1세로 또는 계림군을 1세로하여 일관되게 대동보을 편찬해 왔는데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는 우리 계림군파의 역대 대동보에 장군공을 대안군의 예하인 공부상서 영고 후예로 계대한것 처럼 왜곡하여 우리 대종회 종원들을 현옥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 대동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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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웅장군공을 마의태자의 둘째아들로 계대된 증거 및 족보의 허구성과 조작, 날조, 왜곡,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性淵源譜)의 허구성(虛構成)
1880년생 김경대(金景大)가 평안북도 벽동(碧洞)에서 족보를 갖지 못하였다가 1924년에 경김족보갑자년(慶金族譜甲子年)이라는 허황(虛荒)된 족보를 처음 만들면서
“내가오직 을묘가을에 족보를 이루겟다는 뜻을 굳히고 이에 7.8.년에 이르러 각도를 유람하여 고적 등본 김충한공 서문 오래된 묵보초본 및 6세조 대우공 집에 있는 문적을 살펴보고 의문없이 떳떳하게 편집할 마음을 굳혔는데 나의 중손 적선공 차증손 영진씨 후손은 전라 함평군에 살고 있으므로 다 기록 할 수는 없으니 후세 자손들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계보를 찾아주고 양해를 바란다” (김경대가 본인 족보에 기재함)
(惟我乙卯秋 成譜趣旨令至七八年 各道遊覽古蹟 腾本 金冲漢公 序文上古 墨譜草本及 六世祖大佑公家所 文蹟可考一遵編緝心常無 疑吾中祖積善公次 曾孫永珍氏后孫則 全羅咸平郡 仍居故不 可盡記後世子孫先代來系 詳尋以此諒解)라고 설명하고는 자신을 김충한의 32세손으로 밎추기 위하여 직계조상을 작명 조작 계대하고 사실(史失)로 조상계보가 밝혀지지 않아서 보결(譜缺)로 비워둔 계림군파와 태사공파의 조상계보를 임의작명날조(任意作名捏造)하여 영분공파, 계림군파, 태사공파 합보를 2권으로 만들었는데(국립도서관한58-가5-5-126) 국사인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는 오자만 있을뿐 대과없이 국사(국사)인 정보와 같았으나
그 이후로 터무니 없는 임의 조작과 날조를 하였다.
일언방구 설명이나 근거도 제시하지않고 임으로 날조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전부다 열거 하지는 못 하겠지만 중요한 일부분만 지적하면 경순왕비 죽방부인 박씨소생이 정보에는 생 3남1녀인데 여기 에서는 생8남1녀로 태자 일(太子 鎰). 전(佺). 요(瑤). 곤(琨). 영(英). 분(奮).등 5형제가 더 있다고 하였고 태사공 인관(太師公 仁琯)을 대안군은열(大安君 殷說)의
12세 장손(長孫)으로 장군공 순웅(將軍公 順雄)을 대안군의 5세손 한공(漢公)의 동생 연공(沇公)의 손자로하여 대안군의7세손으로,대안군의5세손 품언(稟言)의 아들 4형제 금영. 한남, 용담, 김씨선대 순보(順輔) 순거(順擧) 순서(順瑞)순단(順端)을 한공의 아들로 뒤바꾸고
계림군파와 태사공파의 적장 종통마져 뒤바꾸어 놓고 10년후인 1934년에는 의주(義州)로 옮겨와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性淵源譜)라고 하는 괴상한 족보1권을 발행 하였는데 박(朴) 석(石) 양씨는 설명을 줄이고 우리들의 시조이신 대보공(大輔公) 후예만을 살펴보면 국사(國史)인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의 계보중 경순왕의 19세조부터 16세조까지 정보(正譜)상에 습보(習寶) 지증왕(智證王) 진종(眞宗) 흠운(欽運)을 사도(斯道) 구해(九解) 이천(伊天) 미휴(美休)로 뒤바꾸고
14세조이신 법선(法宣)의 아들이 경순왕의 13세조이신 의관(義寬) 한분이신데 진지왕(眞智王)의 후예인 연충(蓮忠) 충필(忠弼) 필긍(弼肯) 긍현(肯玄) 4대를 법선의 큰아들 계보로 조작 하였고 정보에는 경순왕의 6세조이신 문성왕(文聖王)의 큰아들이 안(安)이시고 민공(敏恭) 실홍(實虹) 이자효종(二子孝宗) 경순왕으로 이어졌으며 문성왕의 둘째아들 식(軾)이고 식의 아들이 인경(仁慶)이신데,
신라삼성연원보에는 인경을 한 대 내려서 민공(敏公)의 둘째아들로 하여 경순왕의 조부이신 실홍(實虹)대신 인경(仁慶)으로 뒤바꾸었는데 김경대(金景大)자신이 10년전 처음 발행한 경김족보 갑자년에서는 국사의 정보와 같이 발행하였고 10년후에 발행한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국사를 뒤바꾸었으면 근거의 사료(史料)를 제시하고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임에도 일언방구 설명도 없이 계보만 바꾸어 놓았으니 어찌 미친놈의 잠꼬대라 아니할 것이며
신라삼성연원보를 근거없는 잡보(雜譜)라 아니할 것인가(비교표후첨) 또한 정보에는 경순왕비 죽방부인 박씨가 생3남1녀하고 낙랑공주 왕씨가 생5남2녀 별빈안씨 생1남이신데
김경대가 1924년에 처음 발행한 경김족보 갑자년에는 죽방부인 박씨 생8남1녀 낙랑공주 생5남2녀라 하고는 동일인 김경대가 10년후인 1934년에 발행한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송희부인석씨(松希夫人昔氏)생5남 죽방부인박씨 생3남1녀 낙랑공주왕씨 생5남2녀라하여
경순왕비 한분을 더만들고 우리들의원조 순웅장군공을 1924년에 만든 경김족보 갑자년에는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 은열(殷說) 태화(泰華) 정구(正矩) 계령(繼苓) 연공(沇公) 수서(壽西)
순웅(順雄)으로 대안군7세손이라 하더니 싱라삼성연원보에서는 마의태자의 둘째아들이라 하여 5세를 줄였으며 태사공파의 증조인 태사공 김인관(太師公 金仁琯)을 1924년 경김족보 갑자년에서는 대안군 은열(殷說) 태화(太華) 정구(正矩) 계령(繼苓) 한공(漢公) 경보(景輔) 세린(世麟) 태서(台瑞) 약선(若先) 미(敉) 인관(仁琯)으로 대한군의 12세손이라 하더니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대안군 은열을 감(鑑)이라하고 은열의 아들을 심(深)이라 한 다음 정구(正矩) 계윤(繼尹) 양검(良儉) 인관(仁琯)이라 하여 태사공 김인관이 대안군 6세손으로 6세를 줄였고 판도판서공 김장유(版圖判書公 金將有)를 1924년의 경김족보갑자년에서는 소목의 기록이 없었는데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감(鑑) 심(深) 중구(重矩) 원개(元槪) 지공(之恭) 여생(麗生)필손(弼孫) 언보(彦輔) 익정(益精) 덕립(德立) 수(秀) 장유(將有)라 하여 중구부터 수까지 9대를 작명(作名) 삽입한것,
이외도 수도 없이 많으므로 신라삼성연원보가 털끝만큼도 참고 가치가 전무(全無)한 잡보(雜譜)라는 것은 명확 할 것인바, 1880년생인 김경대는 족보도 갖지못한 가계(家系)였으나 한일 합방후 왜정에서 침탈의 목적으로 호적을 편재할때 성(姓)과 본관(本貫)을 본인의 희망대로 부여 하니까,
경주김씨로 등재하는 1924년초 평안북도 군남답동(郡南沓洞)에서 주인없는 큰무덤을 발견한다음
그 무덤을 자신의 입벽중조(入壁中祖=처음벽동에 들어온증조) 병판공 김보남(兵判公 金甫南)묘로 하여 족보를 처음 만들었음은 경김족보 갑자년의 서문과 병판공 묘지와 발행동기를 후기로 써놓은 내용으로 보아 능히 짐작 할것이며 1924년에 족보를 처음 만들면서 고려말기 예의판서 김충한(禮儀判書 金冲漢)공이 명나라 홍무28년 을해인 서기1935년에 영분공(永芬公)부터 자신의 조부까지 벼슬한 직계조상들만의 관작을 적어놓은 근지(謹誌)를 입수하고
1784년에 대안군묘지가 발견됨으로서 영분공이 경순왕의 셋째아들인 김명종(金鳴鐘) 이라는 것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자 김경대 본인의 가계를 예의판서 김충한의 후예로 계대하면서 예의판서공의 조상계보를 영분공파의 기존 족보와 비숫하게 수록 하였으나 10년후에 만든 신라삼성연원보 에서는 자신과 계대를 맞추기 위하여 예의판서공의 조상계보를 뒤바꿈으로서 영분공 기존 족보와도 판이(判異)하게 다르기 때문에 신라삼성연원보를 경주김씨 영분공파 대종회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계보연구회에서 신라삼성연원보를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한 다음 즉시 영분공 예하의 계보를 기존 족보와 같게 재조작하여 판매 하였던 것만 보아도 명확 하다,
할 것인데.(영분공후손 계보연구회 계림지 편집장 김용석 소행으로 간주) 자칭 경주김씨 대장군공파는 희귀본 이라고 맹신 하고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는 조원수도 얼마 되지 않는
일부 지파에서 그 계보에 따라 족보를 만들었는가 하면 앞으로 순웅장군공의 조상계보를 조작된 신라삼성연원보의 계보에 따라 대동보를 편찬 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인데 명문 거족인 경주김씨 계림군파 종원으로서 어찌 동의 할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기 짝이없는 일이다.
참고사항 : 고려조말 예의판서 김충한의 조상 계보지 홍무28년 을해=1395년.
김경대는 1880년생 이며 1935년에 신라삼성연원보 발간 고로 김경대가 만든 족보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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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족보(갑술보)의 허구성(虛構性)설명
경주김씨족보(갑술보)는 일정소화9년인 1934년에 1889년생 김태훈(金泰勳)이 평안북도 용천군 내중면 산동(平安北道 龍川郡 內中面 山洞)784번지 자택에서 철산(鐵山)곽산(郭山)용천(龍川)의주(義州)정주(定州)선천(宣川)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신의집안 당시 생존자 집안 23가구(家口)를 모아 처음 만든 가승(家乘)인데 1924년에 경김족보 갑자년과 1934년에 신라삼성연원보라는 잡보를 만든 김경대(金景大)와는 같은 도내에 살면서도 김경대가 1924년에 처음 만든 경김족보갑자년에는 태사공 김인관을 대안군 김은열의 12세손으로 계대한것이 연대가 맞지 않는다,
하여 족보를 갖지 못하였음에도 입보(入譜)하지 않고 있다가 김경대가 1934년5월에 신라삼성연보를 만들면서는 태사공 김인관을 대안군6세손으로 계대하자 그계보에따라 가승을 만들면서 태사공파 기존 족보에는 태사공의 8세손 휘:오(諱:珸)의 큰아들이 자정(子汀)이고 둘째아들이 상촌공 자수(桑村公 自粹)인데 자정(子汀)의 8세장손 정남(正南)이 무후(无后)하였음을 알고 철산군 백양면 명암리 순대산(鐵山郡 栢梁面 鳴岩里 順岱山)에서 호(號)가 운암(雲岩)인 김옥남(金玉南)의 주인없는 묵은 무덤을 발견하고는 정남을 옥남으로 바꾸어 자신의 가구를 옥남의 후예로 계대한후
일명 운암공파(雲岩公派)라 하고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선생의 종손자 김유제(金有濟)씨가 갑인년인 1914년에 졸 하였는데 졸하기 직전에 서문을 쓴것처럼 하고는 한일합방 전까지 조선조 직계에는 없었던 전홍문관장 원종유제서(前弘文館長 遠宗有濟序=홍문관 관직 영사(영의정이 겸임) 대제학, 제학, 부제학, 직제학, 응교, 부응교, 수찬 ,부수찬, 박사, 저작,정자,)라는 서문을 조작하여 공신력을 갖춘것처럼 위장을 하고 20년후에야 가승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국사인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의 계대중 정보(正譜)에는 경순왕 20세조 복호(卜好) 아들이 습보(習寶)이시고
지증왕(智證王) 삼자 진종(眞宗), 흠운(欽運), 마차(摩次)로 이어 지는데 김태훈의 가승에는 복호의 둘째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모르겠다는 뜻으로 00이라 표기하여 5대를 내려간 다음 경순왕의 14세조이신 법선(法宣)을 계대 함으로서 경순왕의19세 직계선조이신 습보부터 15세조 마차까지 5대를 방조(傍祖)라 하였고 경순왕의 6세조이신 문성왕의 큰아들이 안(安)이시고 안의 큰아들이 민공(敏公) 둘째아들이 인경(仁慶)이며 민공의 아들이 실홍(實虹)으로 경순왕의 조부이신데 김태훈의 가승에는 문성왕의 둘째 아들로 00또 그 아들 00이라 한다음
그 아들을 인경(仁慶)이라 하여 인경을 경순왕의 조부라고 터무니 없는 조작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순왕의 아들은 김경대가 만든 잡보와 다르게 전비박씨 생3남1녀 후비왕씨 생5남2녀라 하여 8공자라 하였고 순웅장군을 마의태자의 둘째아들로 태사공 김인관을 대안군의 6세손으로 판도판서공 김장유를 대안군의 12세손으로 신라삼성연원보와 똑같이 계대하는등 사료(史料)의 근거는 하나도 제시하지않고 국사를 날조하고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조상계보를 조작해 놓은 근거없는 잡문(雜文)을 순웅장군공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는 근거라고 한다면 말못하는 짐승인 소도 웃을 것이다, (국사내용 후첨)
계림군파 홈페지에서 옴김 추가내용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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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웅장군공을 마의태자 둘째아들로 계대하여발행한 족보들의분석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 재판과정 에서나 요람을 통하여 이미 순웅장군공을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하여 발행된 족보들이 다수있다고 하면서.
가. 1986년 발행 수성백파보 (隋城伯派譜)
나. 1997년발행 계림군후백천공파보(鷄林君後白川公派譜)
다. 1998년발행 송강공파보 (松岡公派譜)
라. 1999년발행 예판공파보 (禮判公派譜)
마. 2000년발행 게림군파가승보 (鷄林君派家乘譜)
바. 2000년발행 계림군후병조참판공파보 (鷄林君後兵曹參判公派譜)
등 6종을 들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순웅장군부터 13세손 계림군까지의 사이에서 분파된 지파 세문중과 계림군예하 소목으로 계대된 소문중 셋으로 구분 되는데 이들 모두가 1995년에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신라삼성연원보라는 허황된 잡보를 1632년에 발행된 희귀본이라 신봉하고 그 계보에 따라
족보를 처음 만들었거나 족보를 발행한 역사가 일천(일천)한 문중들로서
자손록(子孫錄) 100면 미만의 가승으로부터 2.3백면 문중들이고 약4.5백면으로 추정되는 문중은 예판공문중 뿐이며 계림군예하의 세문중은 계림군파 대동보에 입보(入譜)된 역사가 짧고 지역 한 고을에 기십 내지 백여호 되는 종원들이 일개 문중이라하여 만든 족보들로서 천년전 조상이신 순웅장군공의 조상계보에 관한 추호의 영향력도 끼칠수없는 족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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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공파에 관한분석
순웅장군공의 13세 적장손 계림군까지 적장종문인 계림군파를 비롯하여 6개 지파를 합하면 7개파인데 첫 번째 분파된 지파는 계림군5세손 이신 휘:남미(南美)공의 아우 남기(南基)공을 중조로 하는 예판공파(禮判公派)이고 두 번째는 4세조이신 휘:수(粹)의 이제(二弟)정(精)을 중조로 하는 정숙공파(貞肅公派)이며 세 번째 역시 휘:수(粹) 삼제(三弟)방(昉)을 중조로하는 수성백파(隋城伯派)이고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분파된 지파는 1제 능(倰)을 중조로 하는 현령공파(懸鈴公派) 2제 헌(櫶)을 중조로 하는 송강공파(松岡公派)
3제 온(穩)을 중조로 하는 충문공파(忠文公派)이나 충문공파는 북한에 거주하고 있어 남한에는 자손이 없고 이들 지파들의 최근 발행된 파보들을 기준하여 종원수를 살펴보면.
가. 현령공파=1993년발행 파보단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298면
나. 송강공파=1998년발행 파보단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250면
다. 정숙공파=2003년발행 파보단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200면
라. 수성백파=1996년발행 파보단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284면
바. 예판공파=1998년발행 파보 2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500여면으로
우리 계림군파 신미대동보 평균900면17권에 비교하여 100분지8에 불과한데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는 대동보를 편찬 한다고 하면서 이들5개 지파를 주축으로 하고 대종회장 가계(家系)의 종원들과 일부 극소수의 추종 종원들로 대동보 편찬을 추진하고는 절대 다수의 계림군파 대종회 종원들에게 수단제출을 독려하고 있으나 이는 도덕적 으로도 불합리하고 상식적으로도 어불성설 이라고 할것이다.
이유는 2000년1월26일에 장군공대종회를 창립하면서 400여년 동안 대종손과 종회가 합심하여 계림군의 사우(詞宇)와 묘소(墓所)를 수호하며 향화(香火)하다가 1956년10월1일(陰)에 종헌(宗憲)을 제정하고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회로 계명하여 건전하게 운영 되고 있는 계림군파 대종회에 공식적(公式的)인 통보나 협의도 없이 소수 종원 에게 개별 통지하여 대종회를 창립 하였고 또 2003년12월20일에 대동보 편찬공고를 하면서도 사전에 순웅장군공의 적장대종손이나 종가(宗家) 또는 계림군대종회와 협의나 통보도 없이 사료(史料)의 근거도 없는 조상계보(祖上系譜)로 태자파대동보를 편찬하겠다고 공고한후 계림군파 대종회는 상위 대종회인 대장군공파(태자파) 대종회의 운영 방식에 협조하라는 취지의 방식은 곁방살이가 안방차지 하려는 격식이어서 적반하장이라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계림군의 13세 직계선조이신 숭웅장군공파 대동보 편찬을 하기위한 바른절차는 순웅장군공의 적장 종손이며 계림군의 대종손인 효수(孝洙)를 비롯한 대종가(大宗家)와 먼저 협의를 한후 합의가 이루어지면 계림군파 대종회와 공식적인 협의를 거친 다음 5개 지파들과 협의를 하여야 할것인데 바른절차를 무시한체 근거없는 조상계보를 조작하여 대동보를 편찬하려 하고 있으므로 장군공의 적장종문(嫡長宗門)인 계림군파 대종가와 대종회가 반대하여 수단을 제출하지 않을 시에는 대동보가 편집 될수 없는 이유로,
시조로부터 조상님들의 소목이 등재되고 자손록(子孫錄)에서는 매권마다 맨 앞에 대종손 가게가 수록되고 다음 지차순(之次順)으로 족보가 공간이 없이 역어지는데 계림군파 대종가와 대종회가 공식적으로 반대의사를 수차 통보 하였고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하였음에도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 대동보 편찬을 강행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것은 현재의 순웅장군공및 계림군 적장종통을 부정하고 사료(史料)의 내용과 다른 가계를 종통으로하여 대동보를 편찬 하려는 의도가 역연(歷然)한 것이다.
그럼에도 계림군의 후예로서 대장군공파(태자파) 대동보 편찬에 동조하여 수단을 제출하고 입보(入譜)한다면 우리들에 직계조상이 아닌 마의태자를 우리들의 조상으로 섬겨야하고 사료(史料)와 다른가계를 우리들에 적장정통가계로 섬기게 됨으로 훗날 천수(天壽)를 다하고 저승에가서 조상님에 영혼을 어찌 뵈올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쪼록 위대한 계림군파 대종회 종원 여러분들 께서는 저들의 왜곡하고 조작된 근거를 내세워 정당하고도 사료가 명확한 현재의 종통을 부정하고 있는 부당한 행위에 현옥 되지 마시고 계림군의 대종가와 대종회가 합심하여 앞으로 편찬하고자하는 합법적인 바른 대동보 편찬에 적극 동참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위대하신 조상님의 후예로서 바른 종원의 도리이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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