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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 신자들을 기억하며 인사를 전하는데, 특히 먼저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과 다른 이들을 위하여 애쓴 이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복음 전파에 협력한 이들을 기억한다(제1독서).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높이 평가되는 사람이라도 그가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재물을 섬기는지 알아보신다(복음).
제1독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6,3-9.16.22-27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4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에패네토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6 여러분을 위하여 애를 많이 쓴 마리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7 나의 동포이며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뛰어난 사도로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8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암플리아투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협력자인 우르바노와
내가 사랑하는 스타키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16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22 이 편지를 받아쓴 저 테르티우스도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23 나와 온 교회의 집주인인 가이오스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이 도시의 재정관 에라스토스,
그리고 콰르투스 형제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24)·25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26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7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9ㄴ-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돈의 집착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의 연속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려면 재물이 주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재물을 나의 것으로 여기면 나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경쟁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 것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구도 사귀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의 특징은 돈을 좋아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과 경쟁하며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모순된 길을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우상 숭배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 좋아하는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종이 됩니다. 여물을 먹으면 밭을 갈아야 하는 소가 됩니다. 그래서 돈 좋아하며 주님을 섬긴다는 말은 우상숭배를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정한 우상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바뀌지 않을까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변호사에게 80대 할머니가 이혼소송을 하러 왔다고 합니다. 자녀를 낳으면 바뀔까, 자녀가 결혼하면 바뀔까, 나이가 들면 바뀔까 기다렸더니 여든이 넘어서도 자신의 친구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의 강의에 이런 예도 있습니다. 여렸을 때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를 신앙을 가지고 용서하였다고 합니다. 딸 아이를 낳고 큰맘을 먹고 아버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딸도 추행했다는 것입니다. 딸의 상처를 알고 딸의 용서를 받은 아버지이지만 손녀딸까지 추행한 것입니다.
정말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닌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합니다. 고치지 말고 주인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고쳐집니다. 문제는 내 안의 주인 때문입니다. 행동을 이해시키고 변화시키려 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벼랑 끝, 상담』의 또 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한 어머니가 청년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청년은 쓰레기를 버리지도 못하고 샤워 물을 내리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변을 닦은 화장지도 버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유치원 때부터 어머니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접대부와 외도를 한 사실을 알고는 보복하는 마음으로 줄곧 여러 남자를 만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보낼 나체사진을 딸에게 찍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딸을 데리고 다니며 그런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딸은 자신을 그런 공범자로 만드는 엄마도 싫었고 그런 것도 모르는 아빠도 바보처럼 여겨졌습니다.
딸이 그런 쓰레기조차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강박증이 생긴 것은 자신도 어머니와 공범이라는 죄의식입니다. 죄의식이 강하니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죄의식을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도 자신의 자존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더러운 물을 내려보내지 않기 위해 샤워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무너진 윤리의식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그런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사라지게 할 정도로 인정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최 원장은 명상최면치료를 통해 어머니의 부정한 행위들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먹물로 칠하여 불에 태워버리는 명상을 자주 시켰습니다. 점점 나쁜 기억들이 사라졌지만,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강박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런 명상을 시켰습니다. 양손에 나를 더럽다고 질책하던 자아와 그건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두 자아를 쥐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더럽다고 하던 자아에게 잘 말해서 우주 밖으로 떠나버리라고 한 다음 오른손에 있는 자아를 가슴에 집어넣었습니다. 나의 주인을 바꿔주는 것입니다.
만약 가톨릭교회를 믿었다면 고해성사로 나를 질책하던 자아를 벗어던지고 성체성사로 그리스도를 참 주인으로 모셔 나의 주인이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로 믿게 되면 다 해결될 일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없다면 더 나은 자아를 주인으로 넣어주어 믿게 만드는 명상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청년은 이전의 자아가 사라지고 죄책감 없는 새로운 자아가 자신의 가슴에서 주인이 되어 살게 된 것을 믿게 되어 강박증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바뀔 때는 내 안의 주인이 누구냐는 믿음이 바뀔 때입니다. 그전에는 바뀌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할 때, “저는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대답을 하거나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할 때 그 사람이 변했다고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주인이 누구냐는 믿음에 따라 욕구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늑대라고 믿으면 날고기를 좋아하겠지만 내가 사람이라 믿으면 요리가 된 것을 먹는 편을 좋아할 것입니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욕구입니다. 욕구가 바뀌어야 사람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구는 내 안의 주인이 누구냐는 믿음에 따라 결정됩니다.
뉴스에서 보니 베트남 다낭의 한 청년이 14억 슈퍼카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12cm 돌연변이 난초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 사람은 나중에 이 난초가 14억보다 더 높은 가격의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을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14억짜리 차를 별 볼 일 없는 물건처럼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고 믿고 사는 것의 가치를 안다면 나를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 내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으로 살 때, 그래서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존재라고 믿을 때 나는 변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고쳐 쓰려 하십니다. 성체로 하나가 되었다고 믿게 하심으로써 말입니다.
돈 좋아하는 마음은 돈 안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꿔야만 사라집니다. 그 마음이 성체로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체를 영한 사람은 돈 안 좋아하는 마음을 주인으로 모신 성전과 같습니다.
과로로 인한 번아웃 증후군에 빠졌거나 자존감이 낮은 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정신과 의사는 무언가를 돌 볼 것을 권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이렇게 항의한다고 하네요.
“나를 돌볼 힘도 없는데 어떻게 무엇을 돌 볼 수 있겠어요?”
하지만 무언가를 위한 돌봄의 노력이 자기를 돌 볼 힘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해야 남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를 돌보는 일은 나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남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역시 돌보지 못합니다. 남을 보기가 더 쉽도록 우리는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치료를 많이 사용합니다. 사회 심리학자 프랭크 리스먼도 ‘도움 치료’ 이론을 정립해서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자신도 치유된다는 이론을 발표했고, 학계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돌 볼 힘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돌 볼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돌봄이라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고 있어서 힘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돈을 다루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합니다. 그렇다면 그 수법과 재주를 하느님 나라를 얻는 데 쓴다면 얼마나 거룩한 일이겠습니까?
그 재주를 발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을 돕는 일입니다. 즉,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것을 남을 위해 쓴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바보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라고 하시면서, 어떻게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남에게 이득을 주는 것 같지만, 이로써 하느님 나라를 얻는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불의한 재물을 잘 다룰 줄 모르면 하느님도 참된 것인 천상 재물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십니다.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이 큰일에도 불의하다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름지기 올바른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이제까지 행한 사랑의 실천을 두고서 셈을 요구할 것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을 하느님 뜻대로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일이 제자의 사명입니다. 사랑과 봉사로 살라는 교훈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돌봄이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다(노만 빈센트 필).
주님의 손을 꽉 잡고 주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앞면의 승리
알렉산더 대왕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적군의 숫자가 아군보다 월등하게 많은 것입니다. 이 기세 눌려 병사들은 모두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알렉산더 대왕은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 이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승리할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패할 것이다.”
그리고 동전을 높이 위로 던졌습니다. 동전이 땅에 떨어졌을 때, 모두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시하였고 곧바로 환호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앞면입니다. 전쟁의 결과는 당연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후에 알렉산더 대왕은 동전을 부하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 동전은 모두 앞면만 있었습니다.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아닐까요?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긍정의 상황 그리고 성공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도 우리의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댓글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청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