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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보고 가노메라.(A monk goes on the bridge of the Genie, a shadow under the water. Stay with that middle-aged. Let's ask where you're going. Pointing to the white cloud with a stick and turning around, Kanomera.)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년~ 1593년)①의 시조인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에 그림자가 어리어 다리 위를 쳐다보니 한 스님(one's teacher in Buddhist faith)이 지나가 고 있다.(It is the founder of Songgang Jeongcheol (1536-1593) and says, "It is like seeing a beautiful landscape painting." The shadow was young in the water flowing under the bridge, so I looked over the bridge One's teacher in Buddist Faith is passing by.)
대사, 잠깐 물어보세. 어디로 가는 길인가?
스님(one's teacher in Buddhist faith)은 지팡이를 들어 흰구름을 가리키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스적스적 지나간다. 운수납자(雲水衲子)의 기품을 지닌 모습이다." (Ambassador, let me ask you for a second. Where are you going? The monk (one's teacher in Buddhist Faith) lifted the cane and pointed to the white cloud Without answering, he slips through the path he was going on. It is a figure with the dignity of a transportation recipient.")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보고 가노메라’라는 표현은 이 시조의 백미다.(The expression "pointing to a white cloud with a stick and turning around, Kanomera" is the highlight of this sijo.)
유교(儒敎, Confucian)를 숭상(崇尙, respect)하고 불교(佛敎, Buddhism) 를 배척(排斥, exclude)하던 조선시대에 스님들은 유생 관료들에 의해 말할 수 없는 박해(迫害, persecution)를 받았다.(In the Joseon Dynasty, when Confucianism was revered and Buddhism was rejected, monks were persecuted beyond words by Confucian officials.)
그 당시 스님(one's teacher in Buddhist faith) 들은 칠천(七賤'일곱 가지 직업중 천한 직업.)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At that time, monks were considered one's teacher in Buddhist faith lowly occupations.)
종, 기생, 악공과 광대,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 고을의 아전, 관아에서 심부름 하는 하인과 함께 천한 계급으로 다루어 졌다.(It was dealt with as a low class with servants, gisaengs, musicians and clowns, various batches that make leather gods, a temple in the village, and servants who were called by the government office.)
그래서 스님들한테는 하대를 했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데 물어보자’라고 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 나온 표현이다.(So I gave the monks a hard time. Another expression that came out of this situation is 'Stay there, let's ask when you go.')
심지어 스님들에게는 도성(都城 - 서울) 출입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Even monks were prohibited from entering the capital city (Seoul) by law.)
이와 같은 악법이 사라진 것은 한말 일본스님들에 의해서였다.(It was by Japanese monks at the end of the Korean language that this evil law disappeared.)
일본스님들은 남의 나라 도성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데 정작 본국의 스님들은, 자기네 나라 도성을 출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당국에 시정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Japanese monks can enter and exit the capital city of another country at will, but monks in their home countries, Seeing that their country was unable to enter the capital city, they asked the authorities to correct it.)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던 고려시대보다도 갖은 천대와 박해를 받던 조선시대에 뛰어난 수행자들이 많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수행자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The fact that there were more outstanding performers in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under low heaven and persecution than in the Goryeo Dynasty, which was protected by political power, There will be a lot of teaching to today's entourage.)
동서양의 종교역사를 통해서 볼 때, 종교는 정치권력(政治權力, political authority)을 등에 업을 때가 가장 반종교적으로 타락했고, 체제로부터 박해(迫害, persecution)를 받을 때가 가장 순수하게 제 기능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Throughout Eastern and Western religious history, religion is the most anti-religious when it comes to political power, When I was persecuted by the system, I was able to grow up while functioning the most purely.)
불타 석가모니(佛陀 釋迦牟尼, "Burning Buddha's)는 <숫타니파타>②에서 ‘천한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얼마 안되는 물건을 탐내어, 사람을 죽이고 그 물건을 약탈(掠奪, looting)하는 사람.(In "Sutani Patta," the Buddha Gamoni says about the "low man." I covet a few things, a man who kills and plunders the goods.)
증인으로 불려 나갔을 때 자신의 이익이나 남을 위해서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 가진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늙고 병든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A person who falsely testifies in his or her own interest or for others when called out as a witness. a man of wealth who does not serve his old and sick parents.)
남의 집에 갔을 때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면서 그쪽에서 손님으로 왔을 때 예의로써 보답하지 않는 사람.(A person who is treated well when he or she goes to another person's house but does not reciprocate with courtesy when he or she comes as a guest.)
사실은 성자[깨달은 사람]도 아니면서 성자라고 자칭하는 사람, 그는 전 우주의 도둑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다.(In fact, he is not a saint, but a self-proclaimed saint, who is a thief in the whole universe. Such a man is the lowest of the low.)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 (You don't become a low-born person. It's not like you're a precious person from birth. Only by the act, you become a low and precious person.")
= 華谷·孝菴의 좋은글 중에서 =
<法頂 스님 글 編輯>
* 주석(註釋)
①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년~ 1593년)
[개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 :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했다. 이때에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 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돼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정자(鄭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했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됐고, 맏형은 이때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던 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을 했다.
1551년(명종 6)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552년(명종 7) 17세에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강항(柳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0(명종 15)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星山: 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됐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1566년(명종 21)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됐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에 선출됐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1570년(선조 3)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성균관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인 1589년(선조 22)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했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됐다.
명천(明川)에 유배됐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했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임금을 사모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멋스런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② 숫타니파타(Sutta Nipāta, 經集)
《숫타니파타》(수타니파타, Sutta Nipāta, 經集, Sn)는 최초 성립한 불교 경전이다. 초기경전이며 시기적으로 상당히 고층에 속한다. 남방불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불경이다. 이 경전은 누구 한 사람의 의지로 쓴 게 아니고, 부처 설법을 부처 사후에 제자들이 모여 운문 형식으로 모음집을 구성한 이후 전래했다고 한다.
팔리 삼장(Tipiṭaka)에는 《담마빠다 (Dhammapada)》 등과 함께 경장 (Sutta Piṭaka) 소부(Khuddaka Nikāya, 小部)에 분류되어 있다.
[개요]
숫타니파타는 불경 가운데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경으로 초기 경전을 대표하는 경이다. 숫타(sutta)는 팔리어로 경(經)이란 말이고 니파타(nipāta)는 모음(集)이란 뜻으로 부처의 설법을 모아놓은 것이다
성립된 시기를 인도의 아소카 왕(마우리야 왕조 3대 왕. 재위 BC 268~BC 232) 이전으로 보고 있다. 모두 5품(5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제4의품(義品) 속에 들어 있는 8편의 게송과 제5 피안도품(彼岸道品)이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5품의 내용이 별도로 유통되다가 어느 시기에 함께 모아져 합집된 것으로 본다. 원래 이≪숫타니파타≫는 팔리어로 된 남전(南傳) 장경에 속한 경이다. 그러나 한역 장경 속에도 이 경의 제4품 <의품>에 해당되는《불설의족경(佛說義足經)》(K.0800, T.0198) 2권이 번역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서북 인도 출신의 지겸(支謙)이 중국으로 와 오(吳)나라 때 3세기 중엽에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숫타니파타≫는 무엇보다도 석가모니 부처를 역사적 인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경이다. 물론 ≪아함경≫ 등에도 부처의 역사적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이 많이 있으나 ≪아함경≫보다 이 경이 먼저 이루어진 경이므로 부처의 육성이 제일 먼저 더 생생하게 담겨 있는 경이라 할 수 있다.
★ 법정 스님(法頂, 1932~2010) : 승려, 수필가. 1945년에 출가하였으며, 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일상적인 소재를 쉽고 간결하게 표현한 수필을 많이 썼다. 주요 작품으로 ‘무소유’, ‘설해목’, ‘나그네 길에서’, ‘맑은 기쁨’ 등이 있다.
[요약]
o 세속명:박재철(朴在喆)
o 출생: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군
o 사망:2010년 3월 11일 (향년 77세)
o 학력사항:해인사대교과
o 경력사항:~2003.11.
대한불교조계종길상사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수련원 원장
동국대학교 역경원 역경위원
o 수상내역:2004년 제2회 대원상 대상.
[해설]
속명은 박재철. 수십 권의 수필집을 통해 힘겨운 삶에 허덕이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사유의 기쁨과 마음의 안식을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가이자 '무소유'를 실천한 승려이다.
목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했으나 3학년 때인 1954년 출가하여 통영 미래사(彌來寺) 효봉스님의 행자로 있다가 다음해에 사미계를 받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련하였다.
1960년대 말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의 불교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불교신문〉 편집국장, 역경국장을 지내다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불교경전 번역을 하던 중 함석헌·장준하·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75년에 본래의 수행승으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혼자 지냈으나, 또다시 사람들이 찾아오자 1992년 제자들에게조차 거처를 알리지 않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혼자 지냈다. 1993년 시민운동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소리없는 나눔을 실천했으며, 1996년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12월 길상사를 개원한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해왔다.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1976년 4월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달아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저서는 〈무소유〉 외에 〈서 있는 사람들〉·〈물소리 바람소리〉·〈산방한담〉·〈오두막 편지〉·〈텅 빈 충만〉·〈홀로 사는 즐거움〉 등의 산문집과, 명상집 〈산에는 꽃이 피네〉·〈아름다운 마무리〉,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법문집 〈일기일회〉·〈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번역서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진리의 말씀(法句經)〉·〈불타 석가모니〉·〈숫타니파타〉·〈인연이야기〉·〈신역 화엄경〉·〈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스승을 찾아서〉 등 30여 권에 달한다.
폐암으로 투병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사후에 '더 이상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했다. <끝>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효암(孝菴)박규택(空認 大法師) 시인님의 좋은글 "무엇이 사람을 천(賤, vulgar)하게 만드는 가.
(What makes a man vulsar)" 즐감히고 갑니다.
이번주는 작은일에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 즐거운 한주 되세요....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