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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0년 9월 23일 목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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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가 9, 7-9)
But Herod said,
“John I beheaded.
Who then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불의한 사회 구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태양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고,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라고 한다. 저자는 백성의 삶의 상황을 몸소 체험한 뒤, 그들의 처지를 만천하에 고발한다(제1독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거침없는 행보에 몹시 당황한다. 그 스스로 세례자 요한을 살해하였음을 실토하면서,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 거기엔 그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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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에는 질긴 악연이 존재합니다. 이 악연은 주님의 탄생 전부터 시작되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의 악연은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의 관계입니다.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평화와 불화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헤로데는 탐욕스럽고 권력에 젖어 사는 가련한 인생입니다. 명분과 체면의 틀을 깨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대로 헤로데가 보기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불편한 진실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요. 그러나 그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변명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종교도, 정치도 백성이 없이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모두가 백성을 위한 행위이고, 백성이 참여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종교이고, 정치이지요.
헤로데는 그러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피하려 드는 가련한 정치의 수장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가 통치했습니다. 그들은 총독을 보내 이스라엘을 지배했지만, 겉으로는 왕이 다스리는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임금은 ‘헤로데 안티파스’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과 부인 ‘헤로디아’를 비난한다고 요한 세례자를 죽게 했던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소문내자, 헤로데 임금은 만나고 싶어 합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주장에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신비스러운 사건’은 쉽게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기적과 예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 한번쯤 가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정말 ‘신비스러운 사건’은 성경 안에 넘치도록 있습니다. 성경의 기적에는 잠잠하면서 사람들의 소문에는 ‘혹한다면’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주변의 기적’에 눈떠야 합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어디에나 기적의 꽃은 피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적에 놀랄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기적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우주를 만드신 분을 모실 수 있습니다.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면, 아무리 기적을 보고 예언을 들어도 ‘호기심의 만족’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의 모습은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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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영적으로 뛰어났던 분이 한 여인의 증오로 말미암아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헤로데 임금과 불륜 관계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잘못을 꾸짖자 그를 제거할 기회를 찾던 여인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성경에서는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등장을 준비하였던 분입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부르짖었고 위선을 질책하는 직언으로 이스라엘을 뒤흔든 분입니다. 그러한 요한에게 편안한 죽음은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억울함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습니다. 그 죽음들이 그냥 묻혀 버린다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야 억울한 죽음이 빛을 발합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려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봉헌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었다는 봉헌이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았기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느님의 도구였을 따름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이재순 수녀-
골고타 언덕 위에 십자가가 세 개 서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
죄를 뉘우치며 구원을 비는 우도의 십자가,
그리고 불평과 저주를 하며 죽어가는 좌도의 십자가.
세례 받은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입었습니다.
나의 모든 고통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즉 용서와 사랑과 구원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 나의 죄뿐만 아니라 인류의 죄를 뉘우치며
예수님의 고통과 죽으심에 동참하는 영광이 신자의 사제직입니다.
나 자신을 버린다는 말은 나의 이익, 명예 등을 뜬구름처럼 바라보며
지금 닥친 고통 속에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것입니다.
이 고통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고통스러운 이 순간을 정성껏 그리고 깊이
가슴에 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계신 것처럼….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 류정순-
세레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만나서 없애려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불안에 사로잡힌 그는 민심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면 자기자리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저는 불안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었는데 은퇴 연령은 50대인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는 은퇴 후 일자리 없이 살 동안에 궁핍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불안감은 공무원에게 뇌물의 유혹을 받게 하고, 자영업자에게 폭리를 취하게 하고, 가정주부에게 부동산 투기에 나서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녀들이 성적 경쟁에서 낙오되면 일생 동안 궁핍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무리해서라도 과외공부를 시키고, 경쟁에서 이기라고 재촉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더불어 공존하는 평등과 나눔의 공동체 사회를 열고자 하는 분입니다. 극심한 경쟁으로 많은 보통 사람을 낙오시켜 생계 불안으로 밀어내는 오늘의 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는 예수님께서 이상적으로 생각하셨던 사회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국가는 글로벌 경제위기에도 끄떡없고, 국가채무도 적으며, 국민의 웰빙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모든 노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정도의 연금과 의료혜택을 받고, IQ 80~120의 고졸자 정도의 보통 사람들이 실업으로 인한 생계 불안에 시달리지 않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살도록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의 질을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영달에만 연연해하면서 공동체 사회의 근본 문제를 외면하고 살면 예수님의 뜻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예수님의 뜻에 가까운 ‘더불어 공존하는 나눔과 화해의 공동체 사회’?로 이행시키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참신자입니다.
허무와 친해지기
-김찬선신부-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오늘 저는 말씀 나누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고백성사를 보는 듯한 마음이기 때문이고
이런 고백을 하고나면 여려분이
전과 같이 저를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게 자주 엄습하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특히 올 해 들어와서 자주 드는 느낌은 서운함과 노여움입니다.
아주 별 거 아닌 것들에 서운하고 노여워합니다.
전에 같으면 지나칠 것들이 요즘은 다 눈에 들어오면서
서운해 하고 노여워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말씀 나누기에서 제가 한가위 인사를 했는데,
글을 읽은 많은 분들이 간단한 한가위 인사도 않습니다.
그것이 서운한데 전에는 서운하지 않았었습니다.
인사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다른 분에게 인사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지요.
그런 제가 지금은 그런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가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강론에 전과 같은 신선함이 없다는 형제들의 말도 서운합니다.
형제들이 대 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농담이고
그런 얘기를 해도 그것을 제가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얘기를 하는 것인데,
요즘의 저는 그것이 농담이 아닌 진심이라고 받아들이고
저의 강론에 신선함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전에는 그것이 진심일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요즘은 별 거 아닌 말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 못합니다.
좋게 이해하면 작은 것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고 진지하게 대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강하게 드는 느낌은 허무감입니다.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
내가 한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은 느낌 등.
이런 얘기를 듣고 평소의 저를 아는 분들은 많이 놀라실 것입니다.
저도 이런 제가 요즘 매우 낯설고
덕분에 이런 저에 대한 내면 공부와 수련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 깨닫는 것은
이것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허무는 허무를 피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것이니.
허무를 적어도 가치중립으로 놓고 껴안아야 하며,
허무를 앞에 놓고 “오, 나의 허무!”하며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허무를 나의 운명으로 껴안아야 하고
허무를 나의 본질로 껴안아야 합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다 뜻이 있으니
하느님을 만나는 장으로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허무이신 하느님이라고 전에 자주 제가 떠들어 댔는데,
이제 이 허무를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나의 하느님으로 만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아직까지 허무는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머리로 아는 것처럼
허무가 사랑으로 느껴질 때까지
허무와 노닐며 친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깊은 산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할머니의 평생소원은 서울 구경을 한 번 해보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말하길, 서울 구경을 하다가 기차를 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깜깜한 굴을 지나서 다시는 이 세상에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마’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생각을 가졌지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서울 구경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서울 구경을 소원했던 할머니는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걱정이었지요. 특히 기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할머니의 불안은 더욱 커졌지요. ‘혹시 깜깜한 굴에 들어가서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불안이었지요. 그런데 이 기차가 긴 굴에 다다르기 전, 할머니는 너무 걱정을 해서인지 그만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 잠을 푹 잔 할머니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서울에 잘 도착해 있었지요. 이제까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 땅에서 눈을 감고 긴 굴처럼 느껴지는 죽음의 터널을 지난 뒤 눈을 뜨면 거기가 바로 하늘 나라인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걱정만 할 뿐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조금도 바꾸지 않으면서, 걱정만 하며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보세요.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큰 죄를 범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헤로데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확인을 위해 예수님을 만나고만 싶어 하지요.
이 세상은 두려움에 떨면서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기쁘고 힘차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떤 삶을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꼬마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서 처음으로 성당에 갔습니다. 평소에는 안 따라 다녔는데, 그 날은 성탄절 전야라고 성당 다녀오면 선물을 준다는 조건으로 억지로 데리고 갔지요. 기도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느님 아버지.”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꼬마는 아버지 어머니가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자기는 족보를 따져서 “하느님 할아버지!”라고 말했지요. 꼬마가 하는 말을 옆에서 들은 아버지가 조용히 꼬마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도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는 거야.”
“그럼 하느님은 아버지한테도 어머니한테도 또 나한테도 아버지야?”
“그렇지, 역시 내 아들이라 똑똑하구나.”
그러자 꼬마가 갑자기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알았어, 형!”
이 꼬마는 나름대로 족보를 따졌지만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앎입니다.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으며, 이 세상을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자신 있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인다운 삶
-장수정-
오늘 복음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이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나오고(9,6 참조), 뒷부분에서는 그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결과 보고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9,10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해한다. 그러한 일을 하는 제자들을 둔 예수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일화를 읽노라니 오래전에 읽은 가르멜 수녀의 전기가 생각난다. 너무 오래되어 세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데레시다란 이름의 그 수녀가 자주 바쳤다는 기도문 하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성모님, 사람들이 저를 볼 때 당신을 보는 듯하게 하소서!’ 데레시다 수녀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깊었다. 그는 성모님을 모범삼아 자신을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기도문에는 그러한 수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제자들이 복음선교 현장에서 보인 태도와 행한 일들은 유다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는 듯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헤로데는 ‘예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고, 유다인들도 “엘리야가 나타난 것일 게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난 게 아닐까?”,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게 틀림없어.”라며 수군거렸을 것이다.
가끔 “나를 보면서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길래….’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반성해 본다. 사람들의 관심은 두 갈래로 나눠질 수 있겠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저 사람이 선하고 인내심이 많을까?” 또 하나는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저이는 저렇게 이기적이고 편협할까?” 나는 다른 사람들을 어떤 길로 이끌고 있는가?
10여 년 전 남편이 나에게 “네가 신앙인이라면서 그럴 수 있느냐?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산다고 자부했던 내게 그 말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나는 “내가 무얼 어쨌는데? 말해 주어야 알지.” 하고 쫓아다니며 물었다. 남편의 말은 내가 신앙인답지 않게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성급하게 굴고 편애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겨우 그걸 갖고 신앙인 운운하다니.’ 하는 서운한 감정이 있었지만 그런 게 아님을 곧 깨달았다. 내 행동이 남편의 눈에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비쳤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고, 그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음을 뜻했다. 남편이 지적한 것을 고치려고 꽤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지금도 불쑥불쑥 그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아, 오늘도 실패했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믿음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헤로데와 내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허무한 관심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였다는 말로 끝납니다.
이 복음을 읽으면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사뭇 흥미로웠고
어떤 이유 또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는지,
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하였는지 사뭇 궁금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
안드레아와 베드로처럼 구도의 차원에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했을까?
자캐오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을까?
맹인처럼 시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을까?
아니면 우리 보통 사람처럼 사람이 그저 그리워 보고 싶어 했을까?
이런 이유와 목적으로 만나고 싶어 하였다면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지만 헤로데에겐 구원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헤로데의 관계에 대한 공관복음을 보면
루카 복음만이 독특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루카 복음에만 나오고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헤로데 앞에 서셨다는 것도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
여기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하는데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만남으로 필요가 충족이 되고
만날 때 사랑과 미움을 주고받고
만남으로 기쁨과 슬픔이 발생하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소문대로 진짜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인지 궁금할 뿐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아무런 원의도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이고,
그저 호기심일 뿐입니다.
흥미 있게 보지만
마술이 끝나고 나면 돌아서 가고
돌아서 가면 곧 잊어버리는 그런 만남과 관계입니다.
감정이 투여되지 않는,
존재의 한 부분이 투여되지 않는
그런 관심을 우리는 많이 만납니다.
제가 북한 관계의 일을 하는 것을 알고는 이것저것 묻지만
묻는 것으로 끝나는 아주 허무한 관심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정말로 그렇게 굶주리는지 묻고는
굶주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연민도 발생치 않고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생각이 없는 관심 말입니다.
호기심 이상, 그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도 철학적 관심이 있지만
하느님이 전혀 발생치 않는 그런 관념적 만남도 있습니다.
이러한 헤로데였기에
예수님께서는 헤로데가 이것저것 묻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헤로데는 율법학자들과 수석사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고는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조롱당한 예수님께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도 아무런 구원이 발생치 않은 빌라도가 불쌍합니다.
저 또한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만나고도 아무런 구원이 발생치 않는,
그런 허무한 만남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독서> : 세상의 헛됨과 부질없음을 깨닫고 하느님께 기대하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기대를 갖고 산다. 그런데 우리가 거는 미래에 대한 꿈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이를테면 부나 명예, 건강 등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육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며, 육신의 머리로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대부분 우리가 갖는 기대 역시 육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결국 실망으로 변하고 만다. 먼저 자신의 꿈과 기대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한다. 세상은 결코 내 자신의 기대와 꿈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세상이다. 나아가 설사 꿈과 기대가 이루어졌다 해도 내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내 안에 또 다른 욕망 - 더 큰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서 그에 대한 꿈과 기대를 이루려고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걸었던 꿈과 기대가 결국은 이룰 수 없는 헛된 것임을 알게 되어 실망하고 만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전도서의 저자는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하고 말한다.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리는 숨이나 바람처럼 허무하다고 말한다. 세상에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세대는 늘 바뀌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늘 돌고 돌아서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들어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여정을 바라보면서 결국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온갖 부를 누렸고, 자신의 욕심대로 큰 사업을 하기도 한 임금이었다. 그는 대궐을 짓고, 커다란 포도원을 마련하고, 화려한 정원을 꾸몄으며 수많은 남종과 여종을 두고 살았다. 그처럼 부요한 왕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그 많은 부를 통해서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는 향락에도 빠져보고, 술에도 빠져보았으나 마찬가지로 만족을 얻지 못했다.
세상의 지혜를 통해서 행복을 구하기도 했지만, 세상의 지혜 역시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 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제 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해 본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겠는가?”(코헬 2,21-22)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헛됨을 통해서 그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사물의 의미를 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삶의 모든 해답을 알 수 없으니 하느님께 경외심을 품고 하느님의 결정을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누어주시는 바를 전폭적인 신뢰와 기쁨 가운데서 누리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하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썩어 없어지는 헛된 것이며, 그 썩어 없어지는 헛된 것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비록 육신을 취하여 살고 있지만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하느님의 숨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느님 품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헛된 세상을 기대하기보다 하느님을 기대하고 하느님을 바라며 하느님을 꿈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므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오늘, 코헬렛의 저자가 가르치는 대로 세상의 헛됨과 부질없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지혜를 청하자. 헛된 세상에 얽매여 하느님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자. 우리의 고향이신 하느님을 바라고 꿈꾸며 기대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자..................◆
그게 무슨 짓이여?
- 이난호-
“그게 무슨 짓이여?” 성호를 긋는 내게 아버님이 물으셨다. 그것은 내가 처음 들은 아버님의 나무람 섞인 질문인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최초의 관심표명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대소가는 물론 근동에서 ‘생불’로 통하던 일자무식의 농부이셨다. 말씀도 적고 웃음도 적었지만 그 푸근한 성정에 나는 마음 깊이에서 며느리 아닌 딸이 되어 있었다. 물음에 답을 드릴 수 없었다. 그분의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을 충분히 이해했던 것이다.
아버님은 큰댁에서 모시던 전신불수인 당신 아버지를 화재로 잃었다. 큰댁 식구 모두 교회에 간 사이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예수라는 이가 그렇게 신령하다면….’ 당신 아버지의 횡액을 막아 줬어야 한다는 아버님의 단순하고 요지부동인 논리를 뒤집을 재간이 없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과 화해하시지 않았지만 성호 긋는 나를 외면하시지도 않았다. 그 참에 용기를 내어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한마디 했어야 옳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나는 친정·시댁 통틀어 맏이였고 최초의 천주교인 신자였고 타고난 쇠고집이었지만 턱없이 소심했다. 아버님이 타계했을 때 대소가 어른들의 뜻에 따라 유교의식으로 장례를 모시면서도 나는 속으로만 성호를 그었을 뿐이다. ‘나는 이미 전능하신 하느님께 씻긴 몸이다. 지상의 어느 의식을 따른들 시늉일 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 행위가 얼마쯤 교리에 어긋나는지 알음알음했지만 속수무책 아닌가, 크게 가책한 것 같지도 않다.
이상한 건 우유부단하게 눈치 보며 몸 사리는 내게 미사 시간을 챙겨주는 이가 한둘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한 건 그즈음에 실로 열렬한 교우가 이웃으로 이사 와 동네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킨 일이다. 그의 직선적 언행이 너무 당당해서 가끔 거부반응이 있었지만 그는 밀리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했고 닥치는 일거리에 몸 사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내가 원하던 예언자였다. 그는 내가 하고 싶었지만 용기 없어 못했던 말(예레 1,?10 참조), 미뤄둔 일들을 해치우며 내가 들어야 할 군소리를 내 대신 듣는 것 같았다. 그의 용기가 부럽고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웃들은 그의 언행일치의 신자다움에 차츰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세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시어머님이 대세로 종언하시자 잡음 없이 천주교 상례에 따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그 교우의 공이 크다. 고인께 송구하게도 모시는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나는 틈틈이 그 힘찬 교우를 보내주신 분께 감사의 성호를 그었다.
호기심과 관심
-김찬선신부-
누굴까?
정체에 대한 호기심.
호기심.
옛날 수덕생활에서는 호기심을 아주 나쁘게 봤습니다.
그 영향인지 수도자가 호기심이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저도 별로 좋게 생각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가 마주 오는 수도자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면 민망합니다.
어떤 때 저도 두리번거리는데
그런 저를 보면 즉시 그저 앞을 보거나 눈을 내리 깝니다.
호기심이 나쁘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느님 이외의 것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무관심.
매주 화요일 단기 노인 보호 시설에 가면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그런데 게 중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할머니도 계십니다.
제게 관심이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력이 떨어져
도무지 삶의 의지도 없고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심은 살아있는 표시이고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헤로데의 알고 싶어 함,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영어에 Discard란 단어가 있습니다.
‘버리다’라는 뜻인데 틀림없이 카드놀이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카드를 집어 패를 펴보기 전에는 무슨 패일까 기대를 걸지만
막상 펴보니 원하던 패가 아니기 때문에
실망을 하고 버려버린다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헤로데의 알고 싶어 함이 이러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알고 싶어 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 알고 싶어 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오늘 이 아침,
저의 삶을 성찰합니다.
난잡하고 정결치 못한 호기심으로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두리번거리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 대한 관심일지라도
호기심 그 이상이 아닌,
그래서 어떤 분인지 한 번 알아보고는
관심을 꺼버리는 호기심은 아닌지 성찰합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전심용신부-
며칠 전에 가까운 동기 사제관에서 밤에 무서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자정이 다 되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려니 왠지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차 뒤에 누가 앉아있는 것 같고 창문 밖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텔레비전 볼 때는 안 무서운 척 했지만 저도 모르게 팔찌 묵주를 빼어 들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제로서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사제가 되면 귀신을 만나도 절대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 주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에 사제관으로 공소 회장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빨리 병자성사를 해 주어야 한다고 하며 차를 태워 산으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다 귀신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혼자 당당히 들어갔고 누워있는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려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것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손으로 닦아보니 피였습니다. 신부님은 위쪽을 올려다보니 한 소복을 입은 여자가 천정에 붙어서 자신의 혀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뻘겋게 된 눈으로 신부님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 선배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사제가 되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매우 시골이었습니다. 밤에 집에 가려면 자전거를 타고도 20분가량은 불이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야했습니다.
복사단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 오가야 할 경우가 많았는데 그 시골길은 혼자 다니기에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소리를 크게 질러보기도하고 노래를 크게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도 노래를 부르면서 오는데 검은 마귀같이 생긴 것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주춤 했지만 용기를 내어 더 가보니 나무에 걸려 흩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였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두려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사람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많으신 분이지만 헤로데는 자신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여깁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있는 ‘내적 법원’, 즉 ‘양심’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내립니다. 이 법정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죄인으로 찍히고 나면 ‘벌’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실 이 벌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반에서 시험을 잘 못 보아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때리려고 할 때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그 마음입니다.
유다처럼 그 벌을 못 기다리고 자신 스스로 그 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 모든 사람이나 상황이 자신에게 벌로 다가올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위축되고 두려워지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집니다. 벌을 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또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는 이유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리만족으로 사람으로부터는 미움을 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움을 넘어서서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그러면 사람이든 귀신이든 두려워 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벌하기 위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죄도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부모님도 자녀들을 혼내는 이유가 다 자녀가 다시 잘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다시 잘 하겠다는 결심만 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입니다.
어제 식사하는데 한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막 나무라서 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도 다시 엄마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것입니다. 야단맞았지만, 그래서 울고 싶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엄마 품밖에 없었나봅니다. 엄마는 야단친 것이 미안했는지 다시 아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모습이 참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만약 아이가 엄마가 미워서 도망가 버렸다면 엄마는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부모님이 자녀가 잘못 하였어도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부모님께 예전처럼 달려들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가끔은 매를 들 때도 있지만 두려움 없이 당신께 달려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하느님께 얼굴을 파묻으면 세상의 두려움은 다시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마치 아기가 부모가 곁에 없을 때 느끼는 감정처럼, 나를 지켜 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부터 시작됩니다.
새벽을 열며
오늘은 우리 본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입니다. 좋은 말씀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은혜로운 시간이지요. 그러나 이 음악피정이 저절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이 피정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바로 우리 성당의 청년들이 전날에 미리 나와 스피커와 앰프, 악기 그리고 좌석배치까지 모두 미리 세팅해 놓습니다. 그런데 어제 제가 밖에 나갔다가 다시 성당으로 들어오는데 이 준비를 하고 있었던 청년이 제게 전화를 합니다.
“신부님! 조금 이상합니다. 사제관 문이 활짝 열려 있고요, 신부님 방도 아주 이상합니다. 책상도 누군가가 뒤진 흔적이 있고, 옷장 문도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볼 때 옷장도 누군가가 뒤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도둑이 든 것 같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추석 명절 기간 동안 성당에 도둑 들은 곳이 많다고 하더니만, 우리 성당에서도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고 외출했던 제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합니다.
‘지난번에 도둑을 맞아서 경비시스템을 새로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잠깐 경비세팅 하는 것도 귀찮다고 안하고 외출하더니만 이렇게 되는구나. 서랍에 돈도 좀 있는데, 참 노트북은 괜찮을까?’
부랴부랴 외출했다가 사제관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둑이 든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고 어수선한 제 방을 보고서 청년들이 오해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번 연휴기간 동안 어떤 작업을 좀 하느라 정리정돈을 전혀 하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마치 누군가가 뒤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어수선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제관 문은 아침에 빨리 나가느라 실수로 문을 열고 나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도둑이 들지 않았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만약 경비세팅을 해 놓고 외출했다면 걱정하지 않았겠지요. 경비세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했고, 도둑이 들었다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전체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고, 그래서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어떠한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믿음’이라는 형태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처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말로 걱정 없이 살기를 원한다면, 정말로 자신 있게 이 세상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소홀히 하지 맙시다. 특히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빠다킹신부
자유
-김인한 신부-
살아가다 보면 주위에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곤 합니다.
그 장애물만 그 사람만 없어지면 내 안에 평화를 얻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장애가 없어지면 또 다른 장애가 우리를 가로막고,
아니면 우리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지옥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이 있는데 그것은
머리에 아홉 개의 물뱀이 달린 괴물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괴물은 머리를 잘라도 잘라도 계속 솟아나와
지옥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싸운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찌 보면 우리 안의 괴물과 싸우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의심과 미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의심과 불안의 사나이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불안해합니다. 자신의 부족함, 미움과 화해하고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이 내 안에 보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악연
-변진흥-
이스라엘의 헤로데 가문은 불행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이역만리 먼 곳에서 찾아왔을 때 이를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를 해칠 생각을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가 탄생한 장소를 알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피해 가자 헤로데 대왕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있는 두 살 이하 모든 어린이를 살해했습니다. 그 아들 헤로데도 동생의 아내를 탐내 자신의 아내로 삼자, 이를 꾸짖는 세례자 요한을 살해했습니다.
헤로데 부자(父子)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그 손에 끊임없이 의로운 피를 묻힌 것입니다. 헤로데 가문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진정한 정치 지도자였다면 메시아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에 의지하여 정복자인 로마를 몰아내는 역사를 이루어야 했고, 진정 백성을 사랑했다면 백성을 회개토록 하여 진정한 삶의 길로 이끈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해 더러운 손에 피를 묻힌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외침도 너무나 공허해 보입니다. 헤로데가 소문을 듣고 만나 보려 했던 예수님은 바로 그의 아버지가 죽이려 했던 아기 메시아였고, 그가 살해한 세례자 요한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며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했던 분,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에 빌라도가 자신에게 보낸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신 예수님을 실컷 조롱만 하고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 사형선고를 받게 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예수님의 피마저 그 손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속 권력을 뜻합니다. 헤로데 가문과 예수님의 악연은 하느님과 세속을 함께 섬길 수 없는 우리 신앙인들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은 헤로데를 따르는 욕망으로 넘실거립니다.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김병환 신부-
헤로데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불안해한다. 여러 가지 일이란 복음서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풍랑을 잠재우신 일이라든지, 마귀 들린 사람한테서 더러운 악령을 쫓아내신 일이라든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신 일이라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헤로데는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이 자신의 권력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 헤로데는 어떤 사람인가? 당시 헤로데는 로마의 통치하에서 유다 팔레스티나(이스라엘) 지역을 지배하던 왕이었다. 헤로데의 통치기간은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4년까지로 알려져 있다. 헤로데는 유다의 왕이 되기 전에 먼저 갈릴래아와 이두매와 사마리아를 장악하고 유다의 땅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왕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헤로데는 유다의 왕이 되면서 유다인들의 적개심을 없애고 자신의 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많은 선심성 일들을 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증축한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헤로데는 유다교로 개종한 자의 후손으로서 그 태생만 유다인이었다. 그가 한 일들을 보면 유다인이라기보다는 악행을 많이 저지른 하잘것없는 이방인 독재자였다. 이러한 그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헤로데는 세속의 권력에 맛들여 자기 왕권을 지키려고 자주 폭력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왕권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당시 유다인들이 따르던 최고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도 그였다. 헤로데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가뜩이나 불안하게 생각했다.
세상의 권력이란 이처럼 진리를 외면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죽이고 하느님의 아들마저 경계하면서 죽이려 한다. 따라서 권력은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장애물이다. 권력은 왕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교만과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이웃을 지배하려 하고,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이웃을 누르려 하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믿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 권경렬 신부-
오늘은 배와 항해를 우리의 삶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배에는 바닥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를 다 만들고 나면 맨 밑바닥에 바닥짐을 싣는다고 합니다. 배를 바다에 띄우기 위해서는 바닥에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바닥짐이 없다면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뒤집히고 만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이 바닥짐은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중심일 것입니다. 그 바닥짐은, 무겁고 힘들다고 내던질 수 없는 인생의 알맹이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고, 항해할 수도 없습니다. 항해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함께 가야하는 당연하고도 소중한 바닥짐이며 중심입니다.
슈바이처도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며 이런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배에 여러 가지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항해에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성공. 명예. 부. 정의. 평화. 진실. 나눔. 사랑, 등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것들은 항해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배에 실린 많은 짐들은 배를 무겁게 하여 앞으로 나아감을 힘겹게 합니다. 풍랑이라도 만나면 침몰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하나씩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진실을 저버리고, 정의에 눈감고, 나눔은 나중으로 미루고.. 항해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빨리 나아갈까만 고심하며 마구 치달아갑니다. 짐이 없어 가벼운 배는 빨리 나아가 목적지인 항구에 빨리 닿습니다. 그러나 배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빈 배인 것입니다.“
바닥짐과 빈 배 이야기...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레아의 영주 헤로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고 두려워하며,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에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헤로데. ‘그의 삶의 중심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그를 보호해주리라 믿고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나의 중심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끝내 붙잡으려는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하깨는 우리 삶의 중심이 하느님임을 깨닫고 ,하느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성전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너희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돌아보아라..”
복음은 나의 삶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삶에서 중심은 올바른지 그리고 나의 삶의 태도는 성실한지? 나의 항해는 어디쯤에 와있으며 배에는 무엇이 실려 있는지? 항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선한 의지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무겁다는 이유로 바닥짐을 내던지고 출렁이는 물결에 균형을 잃고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는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아무리 벌어들여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아니었는지 지난 삶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세상의 모습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새로운 파도가 우리를 덮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소용돌이가 치는 한가운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중심이 있듯,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심중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출렁이며 소용돌이치는 물결의 중심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인생의 망망대해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닥짐이 없이는 항해할 수 없는 이치를 알기에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디 중심인 하느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용기와 지혜와 성실을 주시기를 청하며 마침내 다달은 항구에서 빈 배의 허무가 아닌, 만선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나누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며, 남은 항해가 빈 배가 되지 않고 마칠 수 있기를 원한다면, 바닥짐이란 내어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거짓과 불의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과 함께 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위하여 기꺼이 투신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이라는 항해가 빈 배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올바로 하기
-조성풍 신부-
동해의 해변을 따라 가다보면 어촌 마을들의 작은 포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작은 포구에는 작은 등대들이 있습니다. 등대란 배들이 밤에 뱃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위의 말이나 자신의 그릇된 방향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등대라는 정확하고도 안전한 방향을 향해 배는 움직입니다.
이처럼 인생에서도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가치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헤로데는 소문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진실을 덮으려고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끔 헤로데와 같은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예 또는 아니오’의 확고한 기준을 지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기준, 삶의 등대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력은 민중을 두려워해야
-김덕진-
예수님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온갖 기적을 행하시자 민중은 예수님을 칭송하고 따랐다. 그러자 당시 식민통치를 하던 위정자들은 예수님의 움직임에 바짝 긴장했을 것이 분명하다. 세례자 요한에게 누명을 씌워 죽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례자 요한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이후 ‘사람으로서 생명’을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유로 잃게 되시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도 발견한다.
역사의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늘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억울하게 역사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멀지 않은 7080년대 우리 사회에서도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아무런 죄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으며 결국에는 죽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진실은 밝혀지고 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로 모든 것이 투명해진 것처럼. 예수님은 엘리야이기도 하고 세례자 요한이기도 하셨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해 죽였지만 민중한테는 그리스도라는 더욱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난 셈이다.
우리 역사도 그랬다. 민주화를 외치고 인권과 평화를 지키려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진 고초를 당했지만 그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 강력하게 싸워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지켜왔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평생을 농사짓고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야 하는 농민들이 있고, 경찰의 진압방패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비정규직 노동자도 있다. 권력은 민중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민중을 힘으로 누르려고만 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모두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사회, 하느님 나라는 그런 곳일 것이라 믿는다.
-지병철 신부-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왜 만나고 싶어할까요?
그냥 예수님이니깐 죽이고 싶어서일까요?...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수 있었던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만큼은 마음대로 할수 없었습니다.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세례자요한이라
쉬이 죽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딸아이의 소원때문에 할 수 없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써
잃었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는데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떠돌기시작하는 것입니다.
헤로데에겐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영역에 또다시 누군가가 끼어들지 모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려 합니다.
만나서 회유를 하든 안되면 죽이려 들것입니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이런 이유로
그는 예수님을 실제 만나다하더라도 예수님의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고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 기억하고 싶어
예수님을 만나보려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안경을 쓰고 예수님을 보기에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는 삶이 모습이 너무나 틀린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떠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암울한 상황을 벗아나가해줄
예언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을 맞추어버립니다.
로마의 지배와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없애줄 위대한 예언자가
바로 저 예수님이라 하여 만나고 싶어 따라다닙니다.
그들은 예언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기에
언젠가 초라해지는 예수님을 보면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답답할 정도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못하는
머리를 가진 12제자들의 무리입니다.
그들에겐 이 예수님은 정치적 인물로도, 세례자 요한으로도, 예언자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조차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 자체가 좋아서 모든것을 버리고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그들의 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와 같은 상태에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둘씩 칠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그들은 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이 그들에겐 좋은 복이 될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늘 만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보기에 만나고 싶어하는지
어떤 이유로 만나고 싶어하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설령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예수님 자체, 하느님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면
그래서 무언가를 바래서라면
헤로데의 모습, 요한을 기억하는 사람들, 예언자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는것이 있다면 지워버리는 연습을 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로 만드셔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그려주십사
하느님께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헤로데 콤플렉스>
-윤경재-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가 9,7-9)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13,31)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23,8.11)
루가 저자는 헤로데라는 인물을 통하여 예수님이 사셨던 시간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 됨됨이를 통하여 인간이 지닌 어두운 모습의 한 면을 그립니다.
헤로데는 남들의 이목과 소문에 민감한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가 행동하는 판단기준은 자기의 주관이 아니라 체면에 달렸습니다. 그런 인물들은 자기 내면의 의지와 실제 들어난 자기 행동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항상 갈등 속에 살게 됩니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했어야 속이 후련할 텐데 결국 남의 이목에 따라 행한 꼴이니 생각할수록 분합니다. 그 갈등이 크면 클수록 그는 더욱 포악한 성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 그는 그 성질을 해소할 대상을 찾게 되고 아마도 예수님을 잡아다가 모든 자기 고민을 분풀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성격을 헤로데 콤플렉스라고 부를 만합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처와 아이들을 구타하는 폭력도 이와 흡사하다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알고 보니 가정 폭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랍니다. 그들은 외면과 내면의 갈등을 만만한 상대에게 투사하는 못난이 일뿐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남들이 자기를 좋게 평가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르는 구타와 폭력을 정당하다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남들도 인정할만한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해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하던 차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자기 앞에 서 계십니다. 헤로데는 만사가 제 뜻대로 되가는 통쾌한 기분을 만끽합니다. 헤로데와 같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 인물들의 특징대로 그는 짐짓 거드름을 핍니다. 제 눈앞에서 어떤 기적이라도 보여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더 높고 힘 있는 자라고 증명해주기를 바랐던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어도 믿지 못했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체면을 살려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철저히 조롱하고 깔아뭉개어 버립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정당한지 아닌지 여부는 애당초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루가저자는 빌라도와 헤로데가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하여 똑같은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참수하는 대목을 읽으며 사형제도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이 지닌 폭력성이 여실히 들어나는 장면이 바로 전쟁이며 사형제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그저 자기의 체면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합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자기의 힘과 권위를 세우기 위해 사형이라는 극형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형 제도를 행사하는 이유를 공공질서와 안녕을 지키려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지녔다는 만족감을 위해서, 복수를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사형제도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그 제도를 반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사형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1,사회정의 실현 2,흉악 범죄 예방 3,교도행정 비용절약 4,피해자와 피해자 유가족을 위한 처벌 5,국민의 법 감정 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위에 열거된 이유들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여서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역사상 폭력으로 폭력이 잡힌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폭력은 폭력을 낳았을 뿐입니다. 흉악범죄 예방효과는 강력처벌보다는 반드시 잡혀서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고려해야 될 사항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런 제반 사항이 충족되고 모든 국민들의 법 감정이 수긍될 때까지 인간 생명의 고귀함과 사형 제도의 부당함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국민들의 중의가 모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헤로데라는 이름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 세상의 권력자로서 대칭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쥔 지상권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인물로서, 그리고 예수님은 지상적 권력은 없지만 성령과 사랑의 능력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평화의 왕이라는 분으로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헤로데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크게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헤로데 대왕과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모두 예수님 때문에 당황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들고 찾아와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하자 자신의 왕권에 도전 할 또 다른 유다인의 왕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하고 불안하여 헤로데는 예수님 탄생전후 두 살 이하의 남자아기들을 죽여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헤로데 대왕이 죽고 또 그 자리를 계승한 헤로데 안티파스(Herode Antipas)는 갈릴레아와 페레아 지역의 영주이면서도 헤로데 대왕처럼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이복형제인 헤로데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이혼했었습니다. 의인이었던 요한은 누차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간하다가 헤로데 안티파스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서, 어느 축제일에 그녀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왕을 기쁘게 하고 왕의 환심을 얻어 요한을 죽이게 했던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모욕한 인물입니다.
헤로테는 심리적으로 의인을 죽였다는데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당시 큰 예언자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있었는데, 헤로데도 비록 그를 죽였지만 그의 인물에 대해 어떤 위압감마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이 등장하여 요한과 같은 일을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요한 보다 더 큰 인기를 획득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그리 쏠리자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권력자가 불안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을 제거할 뿐 아니라, 그것은 가족, 형제들까지도 그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나라의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그러한 면이 나타났지만, 로마의 갈리굴라 황제도 자신이 황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제거하고 자기는 새로운 태양, 왕이며 신으로 떠 받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자기 형제를 죽인 양심의 가책으로 미치게 되어 피비린내 나는 폭정 끝에 그도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헤로데는 의인 요한을 죽이고 양심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차에, 그 요한과 같은 인물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에 그의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습니다.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누구냐"라고 묻는 질문처럼, 우리는 소문에 들리는 그분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분에 대한 증언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는데, 예수에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예수님 한테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울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구속공로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헤로데처럼 에수님에게서 단순히 기적적인 것을 보고 싶다거나 혹은 물질적인 유익함을 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원하는 뜻, 자기자신을 그분께 신뢰를 드리고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문에 진정 자신과 타인의 올바른 구원을 위해 예수를 찾아가 볼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새벽을 열며
며칠 전, 어떤 자매님의 팔꿈치를 보고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팔꿈치가 멍투성인 것이에요. 부부 싸움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멍투성이냐고 여쭈어보니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팔꿈치뿐만 아니라 다리에도 멍투성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직 자전거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이 넘어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많이 넘어졌지요. 심지어 몇 달 전에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양 팔이 골절되기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저의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상처 뒤에 자전거 타는 실력이 부쩍 향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전거 잘 타야지.’라는 생각만으로는 실력이 향상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넘어지고 그래서 이곳저곳이 깨지면서 자전거를 잘 탈 수 있게 되더군요.
이렇게 자전거를 잘 타기 위해서는 시퍼런 멍이 생길 정도로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저절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 행복일까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어떠한 시련 없이 내게 오는 것이 행복일까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런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헤로데가 두려워하고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큰 잘못 때문이지요. 헤로디아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내어주었거든요. 그런데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리니 그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사실 그는 체면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은 행동을 했었던 것이지요. 헤로디아의 춤추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 앞에서 말합니다. 어떤 소원을 들어도 다 들어주겠다고……. 그러자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했던 약속을 스스로 철회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체면 손상을 걱정했던 그는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에 두려움에 체력 손상까지 입게 됩니다. 만약 자신의 체면을 먼저 생각하지 않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래서 자신이 내뱉은 말이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역사 속에서도 나쁜 인물로 기록되지 않았겠지요. 쉽게 행복을 얻으려는 그의 안일한 마음에 행복과는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각자는 과연 어떤가요? 혹시 이 헤로데처럼 쉽게 행복을 얻으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때로는 불의도 저지르는 못된 짓도 과감해서 행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전거를 배우는데도 멍이 들 정도로 힘듭니다. 그런데 행복을 얻는데는 얼마나 힘들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행복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빠다킹 신부
살아 있는 평화
-최혜영 수녀-
벌써 오래 전의 일이 되어 형량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아마도 무기징역이었던 것 같다-선고를 받은 박노해 시인의 해맑은 웃음이 얼마나 충격적이던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애써 고뇌하는 듯한 심각한 얼굴의 검사나 판사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평화로운 웃음을 간직할 수 있는 그의 모습은 한 점 두려움도 없어 보였고, 이 세상 그 누구도 그의 자유와 정의와 해방의 정신을 꺾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물리적인 공권력을 이용하여 요한을 신체적으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고귀한 영혼만은 꺾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라는 소문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강한 척했지만 탐욕과 허영과 두려움에 갇힌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에게서 하느님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강인한 힘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될 인간에게 굴복하기보다는 비록 고통과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하느님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기도가 될 것 같습니다.
영혼의 치유
-이수철신부-
큰 죄를 짓고는 불안하여 살기 힘들다고 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반문하며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하는 헤로데 영주,
바로 내면의 불안을 반영합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 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하면서 예수를 한번 만나 보려고 하였다.
-강영구신부-
요즘 인기 있는 책 중에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위즈덤하우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49가지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자기를 잃지 않는 삶’과 ‘사랑하는 삶’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리고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도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중에서 단 하나라도 제대로 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짧고 유한한 인생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해야 할 일도 많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있습니다.
생명을 해치고 이웃과 형제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자기만족을 위해서 생명을 파괴하고 형제들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만과 사련(邪戀) 빠진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는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하여 세례자 요한을 살해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도 있지요.
자신이 저지른 악한 행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그의 목을 짓누릅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업보(業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헤로데의 호기심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을 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開始)를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둔 시점에 두었다.(마태 4,12; 마르 1,14) 그 후 헤로데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는 반응과 함께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의 최후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마태 14,1-12; 마르 6,14-29)
여기서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는 전승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삭제하고, 헤로데의 호기심을 덧붙여 그가 예수를 만나 보려하는 의도를 지적하고 있다. 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은 당시 누구에게나 있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바로 곁에서 보고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당시 팔레스티나의 최고 권력가인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가 관연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던 것이다. 헤로데는 아직 예수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수많은 소문들이 그의 귓전에 몰려왔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두고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아니면 옛 예언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헤로데에게 있어서 예수는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소생한 것으로 보도되는 배경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관련성이 깔려있다. 그러나 루가는 이 관련성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헤로데와 예수를 관련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예수를 정말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운명의 장난에 의해 어차피 법정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루가 23,6-12) 그러나 그는 예수를 진정 알려고 하기보다는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한 번 보고 싶어 했을 뿐이다.(루가 23,8)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예수를 경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아인 동시에 종교적인 메시아여야 한다.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부분이 헤로데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헤로데 자리는 위태로워지게 될 것임으로 그는 자연히 불안에 싸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결국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당황한 헤로데 대왕이, 겉으로는 자신도 경배하러 가겠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몽땅 죽여 버릴 음모를 품지 않았는가 말이다.(마태 2,3.8.16)
헤로데 대왕은 그 음모를 실행에 옮겼고,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또한 겉으로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결국은 예수의 사형선고에 적극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빌라도와의 반목을 깨고 친분을 다지게 된다.(루가 23,6-11)
누구든지 예수를 대면하려는 자는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헤로데 대왕도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도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려 했기에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그분께 다가서느냐에 따라 그분 또한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