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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에서 전도
행 17:1-9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행 17:1-9 /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소동]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갔다. 거기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으므로 2) 바울은 늘 하던대로 회당에 가서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펴놓고 설교를 하였다. 3)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설명하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였다. 4) 청중 가운데 여러 사람이 감동을 받고 신도가 되었다. 많은 경건한 헬라 사람과 그 도시의 귀부인들도 신도가 되었다. 5) 그러나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폭도들이 바울과 실라를 끌어내어 시의회에서 처벌받게 하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6) 폭도들은 거기서 두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자 그 대신에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끌고 의회로 가서 아우성을 쳤다.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은 바울과 실라가 이곳에도 왔는데 7) 야손이 그놈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소. 그놈들은 모두 가이사 대신에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반역자들이오.' 8-9) 이 말을 들은 시민과 치안관들은 이 일을 처리하는 일로 한때 떠들썩하였으나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놓아 주었다.
사도 바울의 세 차례에 걸친 이방 전도 여행 중 제 2차전도 여행(행15:36-18:22)의 일부분으로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유럽 선교의 중심지 데살로니가(1) 바울의 일행은 빌립보에서 사역 도중 투옥 되었다가 명예롭게 풀려난(행 16:11-40) 후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를 지났습니다. 이곳은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약 52km 아볼로니아는 암비볼리에서 또 50km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볼로니아에서 다시 58km의 서방으로 내려오면 데살로니가가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일행이 장장 160km의 긴 도보 여행을 한 데살로니가는 당시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 도시이며,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회당도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선교 전략(2-3) 빌립보에서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 강변 기도처를 사용했지만, 데살로니가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라 함은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며, ‘세 안식일’이라는 것은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을 머물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한 것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행 13:46; 롬 1:16)라는 그의 전도 원칙을 따른 것이며,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 전도방법이었습니다(눅 4:16). 그리고 바울의 모든 선교전략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선교전략은 비시디아 안디옥(13:14-41)을 위시한 모든 선교지역에서의 선교주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초대교회 선교의 대강령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선포해야 할 것은 오직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어야 합니다.
복음전파의 결과(4-9)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복음을 영접 했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해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선포되면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 두 종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생명을 얻는 기쁜 소식이 되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소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문제로 바울을 시기하며 반대하였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전도자들을 박해하며, 불량한 자들을 앞세워서, 소동함으로, 성도들을 핍박하고, 권력의 힘을 동원하여, 불명예로, 반정부주의자로 모략함으로 고소했습니다.
적용: 바울 선교는 오직 예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 전하는 복음은 어떤 것 입니까?
저에게는 누구보다 이쁜 초등학생 딸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딸이 "아빠, 영어로 가족이 뭔지 알아?" "Family지." "그럼 아빠 Family의 어원이 뭔 줄 알아?" 딸이 '어원'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 놀라면서 동시에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난감했습니다. 가족(family)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고대 로마에서 하인이나 노예를 가리키는 말. 논, 밭, 집, 가축처럼 한 남자에 속한 생산도구를 지칭하는 단어에서 현재의 가족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딸에게 설명할까 고민하는데 딸이, "아빠는 그것도 몰라? Father+And+Mother+I+Love+You. '아빠 엄마 사랑해요'를 섞은 거잖아." 저는 웃으며, "그래, 미영이 말이 맞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크마 주석
=====17:1
저희 - 바울과 실라를 말한다. 디모데와 누가는 빌립보에 체류중이었다(16:12,40)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 '암비볼리'(Amphipolis)는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는 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R.N.Longenecker).
유대인의 회당 -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로 오기 전 다른 두 도시, 곧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 머물지 않은 부분적인 이유는 그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 공도체와 회당이 있었으므로 바울과 실라는 효과적으로 또 곧바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는 그곳을 선교지로 택했을 것이다.
=====17:2
자기의 규례대로(* , 카타 토 에이오도스) - '규례'의 헬라어 '에이오도스'는 '에도'(* )의 완료 부사로서 '습관', '익숙한 일' 등의 뜻이다. 이는 이미 바울이 새로운 도시에서 회당을 찾아 복음 전하는 일을 습관처럼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살라미(13:5), 비시디아 안디옥(13:14), 이고니온(14:1) 등에서 바울은 이미 그의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이 회당을 다른 곳보다 먼저 찾은 이유는 회당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서 거부당한 후에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식의 기계적인 수준을 밟아 증거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다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항상 우선적(優先的)인 일로 유념하고 있었던 것이다(롬1:16;2:9,10). 세 안식일에 - 이 구절만 가지고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단지 3주 동안만 머물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3주 이상 그곳에서 체류하며 회당에서 가르쳤고, 회당에서 가르치지 않을 때는 거리나 그밖의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다(Furneaux).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적어도 한번 이상 빌립보 교회로부터 '쓸 것'을 공급받았고(빌4:16) 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친히 노동했다는 점(살전2:9) 등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성경을 가지고 - 구약성경을 토대로 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단 한번도 성경을 떠나서 가르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복음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강론하며(* , 디엘려사토) - 원형 '디알레고마이'(* )의 제1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담론하다', '문답하다', '연설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17:3
뜻을 풀어...증명하고 - 여기서 바울의 설교 형태가 잘 드러난다. 바울 설교의 중심은 대개가 '증거와 선포'의 형태였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과 부활을 해석하여 선포하였으며 그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하였다. 이러한 증거와 선포는 13:16이하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은 신21:23;시2,16,110편;사53장 등이었을 것이다.
=====17:4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 바울의 설교 끝에는 늘 권고가 뒤따른다. 여기서 바울의 권고로 많은 회심자들이 생긴다. '경건한 헬라인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20:4에 언급된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귀부인들'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부인들로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로 짐작된다.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에서보다도 여성들이 많은 자유를 누렸다. 한편 호르트(Hort)는 이 '귀부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들의 유대인 아내들'이라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편 여기서 헨헨(Haenchen)은 사회 지도급 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그들이 바울 일행에 대한 박해를 막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 핍박의 주동세력은 시당국자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문은 쉽게 해소될 수 있다(I.H. Marshall).
=====17:5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처럼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켰다. 살전 3:3-10에 의하면 이 유대인들의 시기는 단순한 시기가 아니라 갖가지 중상모략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 -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쫓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를 와해할 목적으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시장이나 광장 등의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罵倒)하는 것이었다. 야손 - 이는 '여호수아' 또는 '예수'에 대한 헬라어 번역 이름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사람이 유대인(Lenski, Longenecker)이 아니면 이방인 출신(Robertson)이라고 각기 다르게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그의 전도단 일행이 빌립보에서 루디아의 집에서 머물렀던 것처럼(16:14) 여기서는 '야손'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본 구절의 '야손'이 롬16:21에 언급된 바울 친척인 '야손'과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17:6
발견치 못하매 - 불량배들의 소동을 접한 집 주인 야손은 바울과 전도단 일행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을 것이다. 야손과 및 형제를 - '형제'(* , 아델포이)란 야손의 형제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여기서는 예수 안에서 함께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Howard Marshall). 불량배들은 바울을 찾지 못하자 그들의 눈에 띄는 야손과 다른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끌고가 가당치 않은 누명을 씌워 행정당국에 넘겼다. 읍장들 - '폴리타르카스'(* )라는 칭호는 B.C.2세기부터 A.D.3세기에 걸친 시대의 비문에서 발견되었고 마게도냐의 도시들에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이 칭호는 로마 영토 내의 자치 도시를 책임지는 행정 장관을 가리킨다.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식민지가 아닌 자유 도시로서 인정하여, A.D.1세기에는 다섯 명의 읍장들이 이 도시를 다스리게 했고 그후 2세기에는 읍장이 6명이 되도록 늘렸다. 천하를 어지럽게 - 당시 '천하'라고 하는 말은 곧 로마 제국 전체를 가리켰다(눅2:1). 따라서 본문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야손이나 바울은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셈이다.
=====17:7
들였도다 - 헬라어 '휘포데데크타이'는 원형 '휘포데코마이'(* )의 현재 완료형으로서 '손님으로 영접하다'는 뜻이다. 이는 야손이 로마제국을 어지럽게 하는 범죄자들과 하나가 되어 죄를 지었으며, 또 야손의 음모로 그의 집에서 작당(作黨)하여 범죄했다는 암시를 내포한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 여기서 가이사의 명은 가이사 율리우스(Julius Caesar)의 '황제의 법령'을 뜻한다. 여기에는 황제에 대한 반역과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고 제국 내 모든곳에 적용되었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반역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의 끝에 가장 큰 죄인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 중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로마에 반역하여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임금을 세웠다고 모함했을지도 모른다(14:22; 19:8; 20:25; 28:23,31). 그리고 이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서신들에서 사람들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왕국'이라든가 '임금'이란 말을 가능한 회피했을 수도 있다(R.N.Longenecker). 그렇지만 예수께서 로마제국을 초월하여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심은 분명한 사실이다.
=====17:8
무리와 읍장들이...소동하여 -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에게 반역했다는 소리가 다른 무리에게 전해지고 읍장들에게 고해지자 이 소란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억울한 누명에 대해서 야손과 그 일행은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으며 그들을 위해 증언해 줄 바울과 실라도 그곳에 없어서 읍장들의 처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읍장들은 이러한 고소에 대해 성의없는 반을을 보이면 그들 역시 반역 공모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만 했다.
=====17:9
보(保)를 받고 놓으니라 - 법정 용어로서 판결이 명한 보석금을 받고 석방했다는 말이다. 야손과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이의를 제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 다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에서 바울 일행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야손 일행은 이후로 바울의 일행을 도시내에 다시 들이지 않겠으며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보석금을 지불하는 정도로 충분히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어려움이지 야손과 그의 일행의 보석금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D.E.Haenchen). 한편 살전 2:18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나 '사단이 막음'으로 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며 특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야손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염려한 사랑의 배려 때문이다(J.W.Packer).
< 설 교 >
천하를 어지럽게 한 사람들
행 17:1-15 / 김 조 목사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한 오늘의 삶 속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잘하는 것 같으면서 잘 못가고 있고 또 포기한 인생처럼 막되게 살아가기에 세상은 혼란스럽고 복잡해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 각계가 혼란해져 있습니다. 어디에 소망을 두고 어떤 방향으로 달려야 할지 방황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진정 내가 살고 가정이 회복되며 나라와 민족이 복 받고 사는 길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우리를 찢으셨으니 낫게 하실 것이요 치셨으니 싸매어 주시겠다(호6:1)하셨으니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 밖에 없음을 먼저 믿는 민족의 양심인 우리 성도들이 바르게 제시하고 가야합니다. 100년 전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좌절과 혼돈 속에서도 성령 충만 받은 성도들 통해 평양에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나라를 구하는 핵심이 되었으니 이제 이 땅에 그 역사가 재현되기를 기도해 온 삼락교회 성도들이여! 이제 시작되었으니 이 때 놓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함으로 하나님께로 영광이요 우리에게 큰 기쁨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이 2차전도 여행에 결정이라 할 수 있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의 전도가 오늘 말씀입니다. 아시아로 가고자 할 때 성령께서 막으시고 마게도냐 환상 보여주신 것(16:6-10)이 그 당시에 세계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가 있는 남부유럽을 복음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이곳이기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곳이요 오늘날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이루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쳐 세계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1차전도 여행 때도 그러했고 예수님이 복음 전파했을 때도 구원 받는 자와 반대자가 있었던 것 같이 데살로니가에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는 귀부인들이 믿게 되었으니 시기가 난 유대인들이 불량배를 동원하여 소란을 일으켜 바울 사도가 머물던 야손의 집을 수색하여 잡지 못하니 그 가족들을 잡아 관청에 고발하기를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자들이 여기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로마의 법질서를 어기고 예수를 왕으로 삼는다고 하며 정치적 죄목을 씌운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한 말이지만 사도들은 사단의 천하를 어지럽게 하며 방황하는 자를 하나님께 인도했던 것으로 오늘 우리도 사도들처럼 혼탁한 천하를 어지럽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되기 원하여 “천하를 어지럽게 한 사람들”이라 제목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사명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1-6절)
빌립보에서 좋은 일 하고도 고발되어 엄청난 고초를 당하였던 사도들이 160km나 떨어진 데살로니가에 와서 죽을힘을 다해 전하고 있음을 살전2:2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니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복음전파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기에 극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한 것으로 생명보다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담대할 수 있고 천하를 정신 차리게 사단의 세력을 어지럽게 하는 능력자 된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도 모르고 육체의 안일마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먹기 위해 사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 위해 창조하셨다고(사43:7)하셨고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벧전2:9)하셨으니 복음전파가 우리의 사명이기에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고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사도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득불해야 할일이라고(고전9:16)했고 최선 다해 복음 전파함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로 세상 썩었다 탓만 하지 말고 우리가 썩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일 제시에 사회를 계몽 하여 문맹을 퇴치시키며 소망을 주워 이 나라를 이끌 어떤 기독교입니다. 다시 한번 이런 역사 있도록 우리의 사명 의식 새롭게 함으로 이 민족 살리는 역사를 이루시기 원합니다.
2.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사람입니다.(1-3, 10-11절)
빌립보에서 그 고난을 받고도 “유대인의 회당”을 찾고 “자기규례대로” 복음 전하였으며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라 하지만 자기 동족 유대인을 구해야 한다는 것으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13:46 롬1:16)하여 어느 곳이나 회당에서 전도한 것이 자기 전도의 규례가 되었던 것이요 전도의 핵심 또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과 심판으로 성경 말하는 그리스도가 곧 예수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믿어 달라고 애원하거나 사정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 갖고 선포하는 것으로 당당하고 자신 있게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1:5)하시던 예수님의 권위를 보게 됩니다. 성도여! 우리는 예수 믿어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천국 시민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자신 갖고 이 복음 전해야 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목적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는 귀부인이 있었고 베뢰아 사람을 신사적이라 말씀 받아 믿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적대시하는 유대인들이 많아 고초를 겪으면서도 확신 갖고 선포하여 어떤 환경이나 그것을 이겨내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천하에 구원 받을 만한 이름 예수 밖에 없다고 힘서 확신 갖고 선포하여 사단의 올무에 죽었던 자들 다시 살려내는 능력 있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3. 좋은 결과가 있게 됩니다.(4-7, 10-13절)
극렬한 반대자들인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 가는 곳마다 따라와 방해하고 고통을 주웠으나 유대인에게 먼저라고 하며 가는 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반대자들이 유대인들이 때마다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명에 불타고 확신 갖고 선포하는 곳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많은 사람이 믿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메게도냐의 수도로써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로 “영토의 심장”이고 불리던 곳이라 그러기에 바울사도는 이곳을 발칸 반도의 전역에 복음을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고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저항을 받기는 했으나 베뢰아 사람은 신사적이었다. 이 말은 가문이나 출신성분이 귀족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탐구하며 악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하였다는 것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을 받았으니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고 날마다 성경을 삼고하였기에 미든 자가 더욱 많아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천하를 어지럽게 복음 전하는 자에게 좋은 결과가 있게 됩니다.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주의 일함으로 좋은 결과를 받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마치겠습니다.
평양의 대부흥100주년이 행사요 구호로 끝나면 안 됩니다. 진정 내가 살고 살맛나는 나라와 민족 만들 수 있 복음전파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명하신 사명의식 새롭게 하여 생명보다 더 귀한 줄 알고 최선을 다하시고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고 확신 갖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여 좋은 결과 얻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두 부류의 사람들
이성우 목사 / 행 17장 1~9절
오늘은 3월 들어 첫 번째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이제는 기온도 제법 봄기운이 완연해 져서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데 그 중에 날씨가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각 계절들은 제각기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가지고 있는데, 봄의 계절은 우선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와 산천초목, 그리고 우리 몸과 마음을 녹여 줄 수 있어서 참 좋은 계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따뜻한 봄기운을 머금고 만물이 새롭게 약동하는 이 생명의 계절에 그동안 여러 가지 상황과 이유들로 인해서 꽁꽁 얼어붙었던 여러분들의 영혼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넘쳐나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는 마음도 따뜻함과 열정으로 가득해 져서 행복과 웃음이 넘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창조 이후로 계속해서 크게 두 부류의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의 상태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시고 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각각 낮과 밤이라고 칭하신 것이 6일 동안의 창조 사역 가운데 첫째 날에 이루어 진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였던 이 세상은 질서와 충만함, 그리고 광명의 세계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이 질서와 광명의 세상이 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던 이 세상이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세력인 사탄의 개입과 역사로 말미암아 질서와 혼돈이 공존하며 광명과 흑암이 교차하는 세상이 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갈등과 긴장의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언제든지 분열과 분쟁, 미움과 질투, 분노와 다툼, 그리고 파괴와 죽음을 불러오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간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투쟁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확실한 승부로 끝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탄의 영역인 죄와 죽음의 권세를 짓밟아 버리고 의로움과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셨던 것입니다. 이 날의 승리는 대 역전승의 승리이기 때문에 더욱 빛나고 멋진 승리이며, 통쾌함을 맛보게 만들어 주는 승리였습니다. 감사하고 행복한 것은 이 놀라운 영광의 승리가 하나님의 만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몫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최후의 승리, 승리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마지막 날에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탄이 공중의 권세를 잡고 역사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사탄과의 영적인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의 역사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탄의 역사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에 행하실 심판을 통해서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게 되는 그 날에 영원히 끝나게 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들은 최후의 승자가 되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이 땅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되어온 하나님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로 인해서 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흐름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생명과 죽음의 공존과 갈등, 신앙과 불신앙의 대립과 긴장관계,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엄염한 존재, 더 나아가서 감사와 불평의 대치와 그 결국이 하나의 역사 속에서 공존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과 모습은 우선은 우리 인간 자신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세워진 가정 안에서조차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며, 그 범위가 확대되어갈수록 사실은 더욱 분명하고 치열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고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대립과 갈등 관계 속에서 자기들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사탄의 손아귀에서 사탄의 지배와 조종을 받는 존재로 전락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안타깝고 놀라운 사실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 속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사탄의 하수인처럼 그 역할을 감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만들거나 실족하게 할뿐만 아니라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도록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출애굽 공동체인 모세 공동체 안에서도 있었으며, 심지어는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부르심을 받고 만들어져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12제자들 가운데도 있었고 초대교회 안에도 존재했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의 서신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온 몸을 바쳐 헌신적으로 세워 섬겼던 교회들 가운데서도 쉽게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며, 안타깝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음을 잊지 마시고 긴장감을 가지고 자신과 신앙 공동체를 이 악한 사탄의 역사로부터 지켜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탄의 역사에 반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 또한 줄기차고 신실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시대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일꾼으로 부르셔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며,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여 주심으로 사탄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의 도구가 되어서 쓰임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꼽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2제자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강권적인 변화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는 정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감당했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자신을 헌신한 사람으로 목숨을 걸고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한 사도 중에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에도 여지없이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이 곳곳마다 어디든지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해꾼들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에는 그의 복음 사역을 도왔던 유명 무명의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헌신적인 섬김과 동역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선교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많은 동역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사도 바울과 같이 천막을 만드는 업을 가지고 있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자신들의 목이라도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7장 1절-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이었을지라도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의 현장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늘 그러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어디든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고 핍박하려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과 실라 일행의 소아시아와 유럽을 향한 2차 전도 여행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바울의 유럽 선교는 오늘날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상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바울 일행이 마게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 약 한 달여 동안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더니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영접하였는데, 그 곳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것을 시기하여 벌인 소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 일행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어디든지 복음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전도자들을 영접하며 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복음을 배척하고 전도자들을 핍박하며 복음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아니면 은근한 방법으로 방해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바울 일행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하심으로 사역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며 어려움 중에도 복음의 열매가 맺게 하심으로써 사역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바 복음 전파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표현을 쓴다면 이러한 사실은 복음 전파에 대한 사탄의 방해 공작이 있지만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못했을 때에는 자신의 욕심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가 예수님께로부터 심하게 책망을 받은 일이 있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이후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 개인의 경우에도 정 반대의 두 부류의 삶이 교차하며 공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십니까?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진리 편에 서서 고난을 감수하면서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며 감당하는 일에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그의 증거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대했던 사람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십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게 사탄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신의 욕심스런 생각에 이끌려서 알게 모르게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거나 복음의 역사에 걸림돌이 되었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십니까?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은 적극적인 방해도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해당되며 그 결국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가운데 복음의 역사에 적극적인 협력자요 동역자들이 되셔서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 나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
박찬길 목사 / 행 17장 1~9절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Pentecost)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내려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부활절후 50일째 되는 날이라서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지난 한달 동안 성령 충만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성령강림절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미리 알고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면 더욱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됩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변화되었다는 겁니다. 생각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변화되고 의식구조가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니까 새로운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가만히 있지를 못하지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전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회개설교를 하니까 3천명이 돌아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니까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사도들이 여기 저기로 흩어져서 생명을 살립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살아납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납니다. 각양각종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큰 변화가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초대교회에만 잠깐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도 역사하고 미국에도 역사하고 한국에도 역사합니다. 이번 여름에 우리 청년들이 단기선교를 가는데, 두 명이 더 늘어서 네 명이 간다는데, 가보면 알지만 터키에도 역사하고, 이란에도 역사하고, 팔레스타인에도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성령 충만은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령은 은사로 나타나서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여러 가지 은사가 나오지요.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통역을 주십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방언을 하게 됩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게도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평안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이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평안이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에 평안이 있지요.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뜨겁습니다. 찬양을 드리면 기쁩니다. 교회에 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삶의 생기가 넘칩니다. 주일날 제자훈련 클래스가 있는데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2부 예배가 끝나면 좀 쉬었다가 시작하는데, 얼마나 뜨거운지 일찍 끝나도 밤 10시입니다. 보통은 11시에 끝납니다.
지난주간에 연회에 갔다가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자훈련 얘기를 했더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 제가 보기에도 그 사람들 제정신(?)이 아닙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요?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서 헌신하다가, 월요일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주일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니 제정신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제자 훈련하는 거에 겁먹지 마세요. 제자훈련을 하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이처럼 피곤해도 피곤하지가 않은 겁니다. 지칠 줄을 모릅니다. 신이 납니다. 삶의 생기가 넘치고 의욕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일에도 능률이 납니다. 공부도 잘 됩니다. 가정도 화목이 넘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 충만은 이렇게 좋은 거예요.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것이 성령 충만이에요. 금보다 귀한 것이 성령 충만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을 구하셔서 성령 충만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인들 중에는 성령 충만을 원하면서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성령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성령 충만해야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못해서 답답하게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원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다면 원인을 분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원인을 분석하잖아요. 무엇이 잘못됐나?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나?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찾아내면 문제가 해결되어 순조롭게 나아갑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성령 충만을 원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다면 자신을 낮추고 말씀을 들으며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나에게 성령 충만을 막고 있는 둑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깨닫기만 하면 성령 충만은 자동적으로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과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합니다. 3절에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내가 전하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이잖아요.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짧은 기간 동안 전도를 했는데, 2절에 보면 세 안식일이라고 했거든요. 세 주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헬라인의 많은 무리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소요를 일으킵니다.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아다닙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을 사람은 유대인이잖아요. 유대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구세주를 갈망하고 있었잖아요.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증거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으면 믿어야지요. 헬라인의 많은 무리들과 많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른 것처럼 그들도 따라야지요. 그런데 그들은 핍박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를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이 증거될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핍박하는 사람이 있듯이, 교회를 다니면서 성령 충만을 받는 사람도 있고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이나 성령 충만을 받거나 안 받는 것은 원리에서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유대 사람들을 보면서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 설교가 비약인지도 모르고 적용이 잘못됐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것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로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고정 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지난해인가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에 이상한(?) 지도를 봤습니다. 우리 나라 지도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겁니다. 서울이 아래에 놓여 있고 부산 제주도가 위에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런 지도는 본적이 없거든요. 우리는 서울이 위쪽에 있어야 하고 제주도는 아래쪽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교육을 통해서 고정된 사고방식이지요. 사실 지형의 실물이라는 것은 바라보는 곳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는 거예요. 서울이 아래쪽에 있을 수도 있고 부산 제주도가 위쪽에 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보셨나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지만 고정관념을 깨면 더 넓은 세계관을 볼 수가 있고 더 넓은 세계관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지도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은 해군이 세계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의미로 만든 것인데, 그런 우리 나라 지도를 보니까 그 생각이 나더라구요. 우리 나라가 진해 부산 제주도에서 태평양을 향해서 세계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그냥 들어오더라구요. 저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잘못된 고정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거예요.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도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분이 아니거든요. 죄인들과 어울리는 분이 아니에요. 자기들이 생각하는 구세주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자기들의 고정관념을 정해놓으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구약성경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와요. 그런데도 자기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의 잘못된 고정관념 중에 하나는 성령을 받지 않고도 신앙 생활하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교회 다니는 데에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지 않으면 예수 믿는 데에는 문제가 됩니다.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성령 충만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아시지요. 공부하는 것하고 학교 가는 것하고, 직장 다니는 것하고 일하는 것은 다른 거예요. 교회 다니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거예요.
보세요. 성령 충만하지 않고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가 있고,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고,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고, 얼마든지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분들은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히 받지 않고는 예수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은혜의 단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성령 충만해야 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해야 신앙생활이 바로 되는 겁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오늘 이 시간에 다 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의 잘못된 고정관념 중에 하나는 성령이 나에게 임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성령이 나에게 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분들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개입하셨잖아요. 그런데 착각하지 마세요.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바울은 믿음의 열정이나 실력이 대단한 분이에요.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개입하신 거예요. 방향을 고쳐주신 거예요. 이런 것을 가리켜서 특별 은혜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바울과 비교할 수도 없으면서, 아니 어떤 면으로 봐서도 비교할 상대가 되지도 않으면서 바울처럼 성령이 임하실거다. 꿈 깨세요. 성령은 구해야 하는 거예요. 나는 가만히 있고 성령께서 모두 알아서 해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미신이에요. 성경 여러 곳에서 성령을 구하라고 했어요.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구하는 거예요. 구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령 충만의 고정관념을 모두 깨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깨도 아프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을 깨야 성령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둘째, 자신의 자아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상황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겁니다. 사사 시대 이전에는 일만 있으면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갔어요. 그래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이었어요.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거예요. 이 사람도 자기의 뜻대로 하고, 저 사람도 자기의 뜻대로 했어요. 사공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자아가 강할수록 성령을 가로막습니다. 내 신념이 강할수록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나의 주장, 나의 경험, 나의 판단, 나의 철학, 나의 비전...,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으면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계획, 완고함, 고집이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도 차단시키고 성령의 역사도 제한한다는 겁니다.
때때로 기도할 때도 보면 기도가 잘못되어서 성령 충만을 차단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내 식으로 성령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성령 충만하게 해주시고 저것은 저런 식으로 성령 충만하게 해 주세요. 심지어는 누구와 같이 성령 충만하게 해 주세요. 자신이 생각하는 성령 충만의 공식을 세워 놓고는 성령 충만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하게 되나요? 이런 것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내 자아가 강한지 안 강한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속회에 가시거든 말씀 나눔을 할 때에 다른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만 강하게 이야기한다. 대화가 안 된다. 그러면 자아가 강한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 스스로 관리하지 않으면 내 자아는 저절로 강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 자아를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강해져서 성령 충만하게 하는 것을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자아가 성령 충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모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경험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가치판단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철학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셋째, 불순종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삼으셔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초대교회도 보면 제자들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되는데 아무나 데려다가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120명의 사도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여기에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에 성령이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모이지 않았다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종종 한국에 가서 부흥회를 해 보면 말씀에 반응하는 모습이 여기와는 좀 다른 것을 느낍니다. 먹고사는 것은 여기가 월등한데 신앙생활의 열정이나 아멘은 한국이 더 낫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할 때에 경험하는 것인데 순종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침체되는 겁니다. 이민사회에 얼마나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 유식함이 순종하지 않는 걸림돌이 된다는 겁니다. 순종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성령 충만이 안 되는 겁니다.
어느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이 성도는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도 헌신하지 않고 계속 구하기만 했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겁니다. 불순종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으면 순종해야 합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성령 충만하면 헌신하게 되지만 헌신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면 기도하게 되지만 기도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면 전도하게 되지만 전도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가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터트려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제거하지 않고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얼마나 완고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는지 웬만한 역사에는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정 관념과 자기 계획이나 불순종과 고집이 꺾여야 합니다. 꺾여야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고, 둑이 터져야 강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모두 제거하셔서 하나님이 성령 충만하게 하실 때에 그 은혜를 다 받아드려서 언제어디서나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저희 심령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을 모두 깨트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강한 자아와 불순종을 깨트리게 하셔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하게 되는 심령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한 삶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모든 교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데살로니가 전도
김영규 목사 / 행 17장 1~9절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
오늘은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1) 이 도시들은 마게도냐를 통과하는 로마의 “이그나시아 가도”(Via Egnatia) 위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암비볼리는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약33마일(약53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게도냐 동부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아테네의 식민지였다가 로마 시대에 이 지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고대 별명은 “아홉개의 길”이라 불리웠는데 그 이유는 트라키아와 마게도냐의 많은 길들이 여기서 교차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도시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일찍이 식민지로 만들고 암비볼리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암비볼리의 뜻은 둘러 싸인 도시란 뜻으로, 스트뤼몬 강 하구에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입니다.
아볼로니아는 암비볼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30마일(약48km) 지점, 암비볼리와 데살로니가 사이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건강한 사람의 걸음으로 걷는다면, 빌립보에서 암비볼리까지 하루, 암비볼리에서 아볼로니아까지 하루, 아볼로니아에서 데살로니가까지 하루가 걸리는 여정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 도시들에서 대략 하루 정도씩 머물고 데살로니가로 직행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 도시들에서 전도하지 않은 이유는 이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데살로니가는 아볼로니아에서 서쪽으로 약 37마일(약59km) 지점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에게해의 테르마키우스 만의 정점에 위치하여 상업이 발달 된 곳입니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마게도냐를 넷으로 나눌 때에 두 번째 지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테르마(온천)라 불렀으나, 주전315년, 카산데르가 이곳을 건설하고, 빌립이 데살리 군대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여, 그의 아내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의 딸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입니다. 주전 145년에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마게도냐 전체의 수도로 정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현재 이름은 살로니키이며, 인구 약 7만 명의 도시로 남아 있고, 인구의 절반은 유대인이며, 36개의 회당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 당시부터 이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약 3주 동안 머물면서 전도했습니다. 회당에서 설교한 것이 3주인지, 데살로니가에 머문 것이 3주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어찌되었든지 바울은 회당을 거점으로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1-3) 바울의 초기 전도 방법은 하나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즉, 유대인의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성경을 강론하고, 예수님이 그 성경에 예언 된 메시아이심을 알리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회당 전도 방식은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옮기기까지 항상 지켰던 원칙이었니다.(행9:20, 13:5,14, 14:1, 17:10,17)
바울은 주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관한 예언들을 설교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몇 가지 특징적인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강론하며...뜻을 풀어...증언하고” 강론한다(dialevgomai)는 말은 설교라는 의미보다는 토론한다는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영문 성경에는 “reason, argue, interpre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논증조의 설교입니다. “뜻을 풀어”(dianoivgw)란 말은 완전히 개방한다(open thoroughly)는 뜻입니다. 예언의 해석입니다. “증언하다”(parativqhmi)는 말 역시 어떤 사실을 비교적으로 제시하고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어에 담긴 의미를 종합해 보면 바울의 설교는 구약 예언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증명했다는 말입니까? 구약 성경에 담긴 예언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들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미5:2), 유다지파에서 오실 것(창49:10), 이새의 자손,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실 것(사11:1,10), 동정녀 탄생(사7:14), 그의 외모, 성품, 사역(사53장) 등등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도덕이나 윤리적인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예언 된 메시아, 구주라는 사실만을 증명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바울의 설교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두 가지 내용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해를 받고”(pavscw)란 말은 고난당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가 고난입니다만 특히 십자가 죽으심은 고난의 정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고난당할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내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다면 속죄도 없습니다. 용서도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지옥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집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rise again from the dead”(NASB)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썩어서 영원히 멸망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시기 위해서 먼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가 부활합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구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구원 받은 헬라인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주로 헬라인들입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4) 여기서 말하는 경건한 헬라인이란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헬라인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처럼 회당멤버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회당 멤버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문의 개종자”(PROSELYTE OF GATE)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문간 정도에 머무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열렬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우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철저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처음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 1:9) 이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았는데, 이제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이제는 그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열렬히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 말하는 문간의 신자가 아니라 참 메시아를 믿고 진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 보면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해졌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10)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땅에서 고난을 이길 정도의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배워야 될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장점입니다. 이들은 두 가지 모범적인 믿음의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순순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설득 당하는 믿음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권함을 받고...따랐다” “권함을 받고”(peivqw)란 말은 설득당하다, 동의하다, 확신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상당히 다양한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감화 받고(공동번역), 승복하여(새 번역), 믿고(현대인), were persuaded(NKJV), believe(KJV) 등등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논리적으로 전할 때에 감화 받고, 동의하고, 설득당하고, 승복하고, 믿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조금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세상 지위 때문에, 체면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 때문에, 혹은 관습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바로 애굽의 바로와 같은 사람, 아합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강퍅한 사람, 교만한 사람이라 하여 심판의 제일 순위에 놓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결단은 바로 신앙에 설득당하는 결단입니다. 오늘 주님의 복음 앞에 설득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생 후회하지 않는 축복의 사람이 될 겁니다.
둘째는, 사도들의 삶에 동화되는 믿음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설득 당할 뿐만 아니라 따랐습니다. “따르다”(prosklhrovw)란 말은 제비뽑아 할당하다, 분배하다, 자기 몫으로 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말하는 로또 있지요? 제비뽑기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되는 축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최상의 로또입니다. 선택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후회 없는 구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 무리에서 벗어나 완전히 하나님 백성의 무리에 가담합니다. 하나님 백성과 삶을 함께 합니다. 따르다는 말을 영어 성경에 보면, consorted(KJV), devout(NKJV, ASV), joined(NASB, RSV, NIV) 등으로 번역합니다. 이들은 복음을 들을 때에 이것이 내 몫이구나, 이것이 내 분복이구나, 내 운명이구나, 생각하면서 성도의 회중에 참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 즉 교회 공동체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제는 세상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하나님 자녀의 무리로 삶의 장소를 옮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는 삶의 목표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성도들과 삶을 함께하는 참여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헬라인들의 회심과 함께 본문에 특별히 언급된 것은 귀부인들의 회심입니다.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습니다. “귀부인”(gunaikw'n te tw'n prwvtwn) 이들은 아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부인들, 예를 들면 총독의 부인 정도 되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이들이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고 영혼까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있어도 영적으로 빈곤합니다. 높은 지위가 있어도 마음의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명성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인생에 풀지 못할 짐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공회원으로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고 재산이 있어도 영혼은 구원받지 못하고 방황했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매달 천 명 이상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죽으려고 했었다는 사람은 더 많아요. 그만큼 인생이 고달프다는 뜻입니다. 오늘 귀부인들의 회심은 바로 이런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삶의 모든 짐에서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유대인들의 소란
헬라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 구원받은 것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유대인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에도 7만 여명의 인구 중에 절반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세력이 상당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5-7)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으니라.”(행17:5-9)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시기했습니다. 참 복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종교적 지위를 빼앗기는 것에 분노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장의 불량배를 동원하여 선동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장에는 할 일 없는 건달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이들을 다 돈으로 매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돈을 주지 않아도 난동 부리는 일에는 신이 나서 나서는 것이 속된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야손의 집으로 무조건 쳐들어갔습니다. 야손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유대인이라고 다 배척한 것은 아닙니다. 야손이나 아리스다고, 세군도(행20:4)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열심히 믿었습니다. 아무튼 무리들은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왔고, 야손은 이들의 동태를 보고 바울과 실라를 미리 빼돌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야손과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끌고 읍장들 앞에 고소했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6-7) 그들의 고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로마 황제 외에 다른 임금을 섬기려 한다. 이 두 지는 다 거짓말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했다는 말은, 세상을 뒤집었다는 뜻입니다. “turned the world upside down” 무슨 혁명을 했다는 뜻인데, 바울은 거리에서 선동을 한 적도 없고, 사람들을 소란케 한 일도 없습니다. 조용히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바울이 황제 외에 다른 임금을 섬기데 한다는 것도 전적인 왜곡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에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27:11) 주님은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유대인들은 조상 덕분에 천국 백성이 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혈통주의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이르는 곳마다 박해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40)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사도 바울 역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유대인들의 소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박해를 이겨야만 하는구나! 바울은 후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살전2:14) 믿음의 초기부터 반대나 박해를 이기는 성도,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비밀
행 17:1-3, 살전 2:8 / 이동원목사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 가장 큰 전도의 열매가 있었던 곳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당시 인구 약20만이상)였습니다. 오늘 날 도 이 도시는 데살로니키(Thessaloniki)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지금도 그리스에서 아테네 다음 가는 제2의 도시입니다. 바울 사도 일행(바울,실라,디모데,누가등)은 빌립보를 떠나 에그나티아 도로(Via Egnatia-로마의 유명한 군사도로)를 걸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살로니카 만(Gulf of Salonica)에 위치한 항구 도시 데살로니가(빌립보에서 약160km)에 도착한 것입니다.(지도 참조)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이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약 6개월 미만 체류하며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약 한 달간의 집중적인 사역을 하고 그 후에는 야손(5-6절)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일종의 셀 모임으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의 결과는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살전1:9에 의하면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살전1:7에 의하면 그들의 믿음은 마게도냐 인근 지역 교회의 보본이 되었습니다. 살전 1:8에 의하면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도대체 바울 사도 일행이 어떻게 전도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때 바울 전도 팀의 역동적 영향을 암시하는 말씀을 우리는 행17:6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던 그리스도인 일행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주의해 보십시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물론 이 표현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KJV은 이 대목을 아주 흥미롭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These that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전도했기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를 만든 두 가지 비밀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복음적 "강해설교 사역"입니다.
본문2-3절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하는 즉시 유대인 회당(바울은 랍비였기 때문에 회당 설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찾아 허락을 받고 3주간에 걸친 말씀 강론 사역을 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런데 이런 바울의 설교 스타일을 가르쳐 오늘날은 강해 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읽어 놓고 그 다음 자기 하고 싶은 소리를 하는 설교(제목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그 읽은 본문을 성실하게 해석하여 그 뜻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 뜻을 풀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성경 해석이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인가를 제시한 것입니다. 그의 강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그것이 바로 인류의 죄 문제와 구원 문제의 해답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설교를 <복음적 강해 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에 근거한 복음의 메시지를 상실하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지요. 흔히 한 교회의 신학적 성향을 두고 대화하며 우리는 그 교회가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보수적이 되는 것도 진보적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적 교회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난 15년 동안 복음적 강해 설교 사역에 성실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신 중요한 이유였다고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사역의 큰 열매가 바로 이런 복음적 강해 설교의 결과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교회의 사역 스타일이나 예배 스타일등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흘러가도 우리 교회에 한 가지 변함이 없기를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성실한 말씀 강론 사역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교회 비전 연구팀에서 승계 리더십의 자격 중에 첫째로 명시한 것이 바로 이 복음적인 강해 설교 사역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지구촌 강단에서는 변함없는 복음의 메시지, 성경적 강해 설교의 생수가 넘쳐흐르기를 기도하십시다. 그것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유일한 세상의 소망이십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이 복음의 메시지를 붙들고 선포하는 공동체로 나아 갈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 사랑의 실천 사역입니다.
바울 팀의 전도 사역이 위대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탄생시키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시 자기 도시와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밀을 우리는 살전2:8에서 발견합니다. “우리가 이 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 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됨이라” 그렇습니다. 그 비밀은 복음과 함께(복음 뿐 아니라)목숨까지도 내어 주고자 하는 사랑, 이런 이웃 사랑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위대한 메시지이지만 사랑으로 증거 되지 않으면 우리의 이웃들은 복음의 진정성을 믿지 못합니다. 사랑이 복음을 증명하고 복음을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열심히 전도하면서도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한 원인이 바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희 교회 비전 연구팀이 새로운 비전을 만들면서 고심하며 목회자와 평신도의 동역으로 만들어 갈 우리 교회 미래 사역의 역점 사역으로 명기한 부분이 사회복지 사역의 확대였습니다. 이번에 15주년 기념 마당을 준비하면서도 이것이 또한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15주년 기념 축제의 두개의 초점을 우리는 <선교와 이웃사랑>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파송 선교사님들을 초청하여 미숀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선교지 우물 봉헌식을 하고 단기 선교 파송식을 진행한 것은 변함없는 우리 교회의 선교헌신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 사랑의 소명과 실천 프로젝트로 우리는 15주년을 기념하는 15집의 가난한 가정을 선택하여 집수리하는 웰빙 프로젝트, 15명의 장애 이웃들을 선정하여 취업훈련에서 취업까지 돕는 사역, 또한 15분의 긴급한 의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선정하여 지원하는 사역을 담당했고, 지난 토요일에는 장애인과 비 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한 마음 마라톤 대회(약 4,000명이 참여, 700명의 장애인이 참여함)를 개최하고 그리고 지난 주일의 헌혈 행사에 이어 오늘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목숨을 내어 놓는 주일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목숨을 다 살고 그 목숨을 사용하는 기능적 도구였던 신체의 일부를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나누기 위한 장기 기증 행사를 갖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1998년 5월 24일 주일(11년전) 한국 교회내 장기 기증 캠페인에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마련하는 모범을 보인 바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한 기관으로 최대 인원인 1,200명 이상이 장기 기증에 동참함으로 KBS 저녁 9시 뉴스에 소개되어 한국 교회, 한국 사회에 장기 기증의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복음으로만 아니라 목숨이라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후일 우리의 비전처럼 진실로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진실로 한 알의 밀로 기억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장기 기증 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오신 사랑의 장기 기증 운동 본부장이신 박진탁 목사님의 장기 기증의 취지를 설명하는 말씀을 잘 들으시고 많은 성도들이 이 이웃 사랑 사역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양향모목사 / 행 17:1-3
아시아의 서쪽 끝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럽의 시작인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서 마게도냐의 주요 도시들에 전해지는 과정을 보고 계십니다.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바울과 실라가 지금은 데살로니가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이 2천여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서쪽으로 서진하여서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돌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전파되었고 우리도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지역을 통과하면서 사도들과 바울이 전했던 복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많은 것들이 첨부되고 더러는 변질 되어서 많은 부분들이 원래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기는 하는데 뭔가 좀 첨부 된 것 같기도 하고 뭔가는 좀 부족한 것도 같아서 원래의 복음과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베드로나 사도들이 그리고 바울과 복음전파자들이 전한 복음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16장에서 유럽의 첫 번째 도시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후 17장에서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아덴에서의 전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오는 도중에 암비볼리라는 도시와 아볼로니아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 두 도시는 그냥 통과하고 바로 데살로니가로 왔습니다.
당시의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복음을 전하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서 복음은 세계만방에 퍼져나가지만 모든 도시에 모든 사람에게 다 전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함을 받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복음이 전해집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바른 복음이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바른 복음을 듣고 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은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본문 1-2절에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라고 했습니다.
다행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와서 사는 유대인들이 성경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기 위해서 회당을 세웠는데 그 회당이 데살로니가에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이 낮선 곳이 아니기 때문에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회당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읽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강론을 했습니다. 당시의 성경은 두루마리로 된 성경이었기 때문에 그 성경을 다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당에 보관 된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을 것이지만 사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 성경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성경이라고 하면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이고 신약성경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은혜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독교의 근간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에게 준 옛 언약이고 신약성경은 성도들에게 준 새 언약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가진 새 언약의 출처가 구약성경의 옛 언약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대부분의 설교는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을 그대로 성도들에게 적용시키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율법은 모든 인간들에게 인간이 살면서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를 말씀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다면 구약성경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원래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가져오는 일에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설교를 했을 때 사울이 스데반에게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편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구약성경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펼치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본문의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라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바울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증명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①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의 성취로 나타난 것임으로 바울의 설교는 성경중심이 아닐 수 없었고, ②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의 설교는 성경을 기준으로 하였고 ③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책임으로 그리스도를 위주로 전하는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도록 해석한다고 할 때 여러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복음과 연결시키려고 할 때 전체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방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좀 특별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들의 의로움보다 그들의 연약함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들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등을 위대한 사람으로 칭찬하고 그들을 따라 살라고 함으로서 나름대로 좋은 설교를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복음과는 반대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율법들을 주셨지만 인간들은 그 율법을 지켜서 행복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율법을 어김으로 벌을 받고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된다. 선을 행하여야 한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설교들이 좋은 설교인 것 같고 나름대로 좋은 설교도 되겠지만 복음과는 반대되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부족하고 의롭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고 할 때 구원의 복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 연약하고 악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구원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라는 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구원이든 집단이나 국가의 구원이든 모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염두에 두게 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바르게 살고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본받아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나름대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성경을 복음과 연관시킨다고 할 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다른 복음과 희석되어가는 현대에 설교자들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하니
본문 3절에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구약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하면서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모든 구약성경을 가지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야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본문으로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모든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중에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말씀도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할 것
유대인들은 다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신다고 예언하셨기 때문에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지금 유대인들은 나라도 빼앗기고 로마의 학정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 하는데 있어서 각자의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 즉 사람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이교도들과 함께 살면서 이교도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온갖 신화를 만들어서 나름대로의 신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온갖 기적들을 행하고 모든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을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그런 메시 야 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에서 메시야가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설명하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어느 부분을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메시야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일 것입니다. 메시야는 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기나 하고 비웃음이나 당해야 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메시야라고 하면 장차 나라를 해방시켜야 하고 모든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연약하게 사람들에게 죽임이나 당해야 하는 사람을 메시야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메시야를 죄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대신 죽음으로서 그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을 때 그들을 위하여 짐승을 잡아 죽이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실 때부터 대속의 복음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나 제사 때마다 죽임을 당하는 모든 짐승들이 사실은 메시야가 대속의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가장 중점적으로 하실 일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천 년 동안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 많은 짐승들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날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먼저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2)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바울은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강론하고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열두제자와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언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니다가 붙잡혀서 십자가에 사형을 당한 사람이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사기꾼이라고 단정하고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게 된 동기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바울을 만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이 땅에 있었지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 예수님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한동안 눈이 멀어서 세상의 것들을 볼 수 없게 될 정도로 빛 가운데 화려한 모습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후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시던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는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셨으며 그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이 되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조금도 변함이 없이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할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똑바로 산다고 해도 구원과 관계가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반대로 부족한 것이 많고 똑바로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이 위대한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믿음을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카와 베레아
정용섭목사 / 행 17:1-15
데살로니카에서
필립비 감옥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다음에 바울 일행은 대략 150km가 넘는 여행을 강행했다. 그들은 중간 기착지인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그곳에서 선교했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는다. 실제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누가가 그곳에서의 일을 모르고 있었는지, 또는 선교를 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는지 지금 우리가 그걸 판단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필립비에서의 소동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지역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걸 목표로 중간의 두 도시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지금 누가가 바울의 전체 일대기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그에 의해서 자리가 잡힌 기독교 공동체와 연결된 부분만 강조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 역사가의 눈에는 기독교 공동체가 자리를 잡지 못한 지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울 일행이 그리스 지역에서 구체적인 선교의 열매를 맺은 두 번째의 도시는 데살로니카였다. 바울은 세 주간에 걸쳐 안식일에 모이는 유대인들의 모임에 가서 성서를 중심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다고 한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평일에는 전도하지 않고 안식일에만, 그것도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아마 평일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했을 가능성이 높다.(참조, 살전 2:9). 일정한 선교비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여행을 수행하던 바울 일행은 자신들의 호구지책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을 것이다. 필립비에서 가끔 전달되는 선교비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긴 했겠지만 그것으로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만약 평일에 노동해야만 했다면 그들에 주어진 선교의 기회는 안식일밖에 없었으며, 그날을 지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바울이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자 여러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들, 또한 귀부인들도 감동을 받아서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고 한다. 누가는 지금 어떤 사실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큰 윤곽만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설교했던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무슨 논란이 벌어졌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대목에서 그의 사도행전 기술 방식은 바울이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을 아주 간략하게 전하고, 이어서 이 말씀에 대한 상당한 호응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말씀 선포와 그 결실이 바로 사도행전의 집필목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첨가한다면 바울에게 가해지는 유대인들의 압박이었다. 필립보에서 바울 일행은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이제 데살로니카에서는 그를 도와준 야손이 피해를 입는다. 이 야손은 필립보의 리다아처럼 바울 일행의 생활을 돌봐준 인물인 것 같다. 5절 말씀은 이렇다.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속에 빠뜨렸다. 그리고 바울로 인행을 찾아 민중 앞에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바울 일행을 찾지 못한 그들은 대신 야손을 치안관에게 끌고 가서 이렇게 고발했다.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던 자들이 여기까지 들어 왔습니다. 그런 자들을 야손이 자기 집에 맞아 들였습니다. 그자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카이사르의 법령을 어기고 있습니다.”(6,7절). 이런 본문만 따른다면 유대인들이 매우 비열한 사람들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바울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흔들린다는 위기감을 느낀 그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대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논란 중에서 그들이 치안관에게 고발한 내용은 그 당시 기독교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첫째는 복음이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누룩처럼 변혁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현실유지(status quo)에 집착하는 집단들에게는 시끄러운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1992년의 다미선교회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 역사에서 혹세무민을 일삼았던 수많은 열광적 소종파들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움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새로운 생명 세계를 위해서 벌어지는 충돌은 역사발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다.
왕으로서의 예수
둘째는 초기 기독교가 예수를 왕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카이사르만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자로 군림했지만, 기독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바로 이 대목이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 설정에서 우리가 예민하게 정리해야 할 부분이다. 예수를 왕으로 믿는다는 사실과 이 세상의 정치권력 사이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자리에 서야하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왕이라는 이 사실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간다. 물론 예수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왕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할 메시아라는 점에서 왕이라는 표상은 예수에게 어울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이사르를 무조건 배척해야만 한다는 말일까?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부분에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들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정통의 기독교는 세속 권력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가 유럽을 나눠갖기 식으로 통치하던 중세기처럼 종교가 일종의 권력집단으로 세속의 권력에 참여하는 것도 옳은 길이 아니다. 기독교는 정치권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누가가 앞부분에서 바울의 입을 통해 전하고 있는 구절이다. 바울은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과 그가 곧 예수라는 사실을 전했다.(3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기독교가 이 세상 권력과 대립해서 전해야 할 예수의 왕되심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주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귀신 들린 사람 앞에 십자가 모형을 보인다거나, 로마 가톨릭 교인들처럼 손으로 십자가 성호를 그음으로써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 잠들기 전에 십자가 목걸이를 손으로 붙잡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도대체 예수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게 무엇일까? 여기서 긴 이야기는 접고, 간단히 이렇게 정리해야겠다. 십자가는 인간적 실패다. 그 당시에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십자가는 실패한 삶의 실증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믿는다. 이 예수의 부활은 전혀 새로운, 동시에 여전히 은폐된 생명 사건이다. 그 어떤 인간의 업적이나 성취로도 이룰 수 없는 그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서 발생했다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경험하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사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사건이 예수가 왕이라는 주장과 어떻게 연결되나? 로마의 카이사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긴 했지만 구원론적 차원에서의 생명 사건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그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수는 있었지만,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십자가에서 부활의 생명이 새롭게 탄생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에 반해서 예수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으로서, 그래서 급기야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칠 수밖에 없었지만 완전하게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생명과 전혀 이질적인 부활의 실체가 되었다. 예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왕이 되셨다. 즉 그는 생명 세계의 왕이 되셨다.
이런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완전히 접어야 하는 걸까? 궁극적인 생명은 예수의 심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실현되겠지만, 아직 중간 시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종말에 성취될 그런 생명의 세계에 상응해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소금과 빛과 누룩처럼 말이다. 이렇게 살다보면 카이사르와 투쟁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영적인 수준에 따라서 본인이 해결해야 할 고유한 몫이다.
베레아에서
오늘 본문으로만 본다면 바울이 데살로니카에서 단지 3주간만 머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최소한 여러 달 체류했을 개연성이 높다. 필립비 4:16절이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해준다. 필립보 교우들이 “내가 데살로니카에 있을 때에도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한두 번 보내 주었습니다.” 헬라어 원의에 따르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 150km 이상이나 떨어진 필립비에서 데살로니카까지 선교비를 보내기 위해서는 그 모금에 필요한 기간도 그렇고, 여행에 필요한 기간까지 감안한다면 바울이 데살로니카에 오래 머물렀다고 보아야 한다. 야손이 고발당한 날 밤에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카를 떠나서 베레아로 왔다.
베레아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카 사람들과 달리 “마음이 트인” 사람들이라서 바울의 설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날마다” 성서를 연구했다는 표현(11절)을 보면 그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 중에서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들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건 데살로니카에서 일어났던 과정과 비슷하다. 그런데 데살로니카 유대인들이 베레아까지 와서 해방하는 바람에 결국 바울은 여기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닷가로 피신하게 되었고, 배를 타고 아테네로 갔다.
우리가 앞에서 본 필립비와 데살로니카, 그리고 베레아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 눈에 뜨이는 이들인 귀부인이다. 특히 필립비에서는 리디아라는 이름이 거명되었다.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이 제법 많았다는 복음서의 진술들과 이런 본문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누가는 이런 구절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에도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이들이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어쨌든지 우리가 2천 년 전 복음이 시작되던 그 시절의 교회를 현실적인 눈으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공동체로의 약점을 그대로 안은 그런 공동체를, 그러나 동시에 예수에 대한 깊은 신앙의 실체를 그들에게서 발견해야한다.
복음의 길
이동휘목사 / 행 17:1-34
1. 사도 바울 일행이 유럽 지역을 전도하는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가게 된 곳은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로서 마게도냐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그곳은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의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키케로에 의해 “우리 영토의 심장”이라 불리기도 했던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곳에서 3주 동안 전도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했는데, 그 중에는 그 도시의 귀부인들도 많았습니다.
“(행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 성공을 시기했고, 바울을 반대했으며 핍박이 뒤따랐습니다. 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시장으로 가서 깡패(종교를 빙자한 테러분자, 암살단원)들을 고용해서는 그 도시의 전지역에 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과 그의 일행을 대적하도록 선동시키며, 바울 일행에 대해서 거짓된 비난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폭도들은 야손의 집에 쳐들어갔는데 야손은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한 사람으로서 바울과 그 전도 일행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폭도들은 먼저 야손을 읍장들 앞에 끌고 가서 말했습니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악당들을 야손이 제 집에 머물게 했다.” “이 작자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를 거역한다. 그들은 예수가 왕이라고 거짓된 주장을 한다.” 야손은 믿음의 형제들을 영접하였다가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대로 믿음의 형제들을 대접하였고, 나그네로 지나는 사람이라도 노숙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한 것뿐인데 지금 고통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라는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바울을 대접한 사건을 통해서 야손은 믿음이 굳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박해받던 시대에 위험을 무릎쓰고 그런 선한 일을 했으니 하나님의 나라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헌신과 수고와 고생은 정말 가치있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실 바울을 시기하던 유대인들의 사주(使嗾)를 받은 폭도들이, 마치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듯한 발언을 했지만, 전혀 로마를 걱정하거나 로마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읍장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바울을 죽이도록 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야손의 집으로 밀어닥친 폭도들은 바울과 실라를 찾아내지 못하자 야손을 협박하여 현금을 갈취하고, 바울과 실라를 다시 그 도시에 들여놓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을 전파하여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살전1:6-9)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8세기 말경, 청나라 말기에 북청사변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명 의화단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의화단은 13세기 백련교라는 종파에서 파생된 종교단체입니다. 백련교는 불교와 민간신앙을 혼합하여 모자원이라는 승려가 만든 종교인데, 의화단은 여기에 무술까지 혼합한 비밀결사대입니다. 이들은 주문을 외우는데 독특한 권법과 봉술의 연마로 초자연적인 힘을 얻어 총알에 맞아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서양세력이 청나라를 지배하다시피 하자 반 외세, 반 기독교 운동을 격렬하게 펼쳐갑니다. 의화단은 철도, 교회, 전선 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선교사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여선교사가 잡혔는데 망나니에게 목이 달아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 선교사는 망나니가 춤을 추는 얼마간은 두렵고 떨려 정신이 없었는데 돌이켜 주님을 생각하니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여선교사는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망나니가 선교사를 보자 칼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망나니가 하는 말이 자기를 바라보는 선교사의 웃는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웃었는지 울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신앙은 꾸밀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자, 큰 무리의 경건한 헬라인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그들은 어떠한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2. 데살로니가에서의 박해와 핍박을 뒤로 하고, 바울과 실라는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그 도시를 떠나 약 72km 떨어진 베뢰아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훨씬 신사적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커다란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그 전도단 일행이 베뢰아에서 누렸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을, 데살로니가에서 폭도들을 사주하여 바울 일행을 핍박했던 악한 유대인들이 듣고서, 베뢰아까지 내려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오늘날도 사람들을 이용해서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종종 교인들을 이용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탄 마귀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기도 하며, 혹은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탄의 실체를 증언했습니다. 고린도 후서11:13-15입니다.
(고후11:13-15)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베뢰아에 있는 성도들은 이러한 사탄의 계략을 알고 바울을 바다로 데려가 아덴으로 가는 배에 승선시켰습니다. 또 한 번 바울은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지역을 떠나야 했고 자기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3. 사도 바울 일행이 세 번째로 전도하러 간 곳은 그리스의 수도 아덴(아테네)인데 그곳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로 신화(神話)와 올림픽의 도시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아테네’라는 이름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자 지혜의 여신이며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테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이 도시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그리스의 유명한 관광지 파르테논 신전은 바로 여신 아테나의 집입니다. 이 파르테논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레오바고가 있습니다. 이 아레오바고에서 사도 바울이 설교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사도행전17:22-32의 말씀입니다. 아테네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고대 문명의 유적을 간직한 철학의 도시였는데, 각종 우상들이 너무 많아서 사도 바울이 크게 놀란 것이었습니다. 아테네는 각종 신들과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신상들로 인하여 아테네는 살고 있는 사람보다, 신을 찾기가 더 쉽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바울 당시 사도 바울이 이러한 아테네에 갔을 때 충격을 받은 것은, 웅장한 건물이나 아름다운 예술 때문이 아니었고, 뛰어난 철학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 숭배 때문이었습니다. 그 도시는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떤 재사(才士)는 아덴에서는 사람보다 신을 찾기가 더 쉽다고 농담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언덕마다, 거리마다, 상점마다, 집집마다 온통 우상이었습니다. 바울은 한 분 하나님,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의 마음은 모든 우상숭배에 대해서 치를 떨며 격분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마음도 우리 주위에 있는 우상숭배를 볼 때 ‘거룩한 분노’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희랍의 조각과 건축을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찬미하지만, 바울 시대에는 그 대부분이 그들의 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가 곧 귀신을 섬기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고린도 전서10:14-23입니다.
(고전10:14-23)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또한 헬라인들이 그렇게 많은 신들을 숭배하지만 그 많은 신들이 결코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없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 신화 속의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8:1-6입니다.
(고전8:1-6)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리고 그들의 모든 문화와 지혜를 가지고도 헬라인들은 참되신 하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1:18-25입니다.
(고전1: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했고 시장에서도 전도했습니다. 그 장터에서 바울은 두 부류의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하나는 에비구레오(에피쿠로스파, 쾌락주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이 ‘우연’(偶然)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믿는 유물론자들이요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는데 바로 진화론과 공산주의와 무신론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좌우명은 “먹고 마시고 즐겨라. 내일이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그들이 목표는 쾌락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쾌락이란 주로 육체적인 것을 의미하였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과 염려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평정을 누리는 삶을 의미하였습니다. 진정한 쾌락주의자들은 극단을 피하고 매사에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생을 즐기려 했지만 최고의 목표는 여전히 쾌락이었습니다. 다른 부류는 스도이고(스토아학파, 금욕주의)였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세상이 ‘운명’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어느 것에 대해서든 희로애락을 나타내는 일, 곧 슬피 울거나 혹은 기뻐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일어날 것은 일어나므로 인간이 어떤 일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이교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하나의 “세계신(世界神)”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범신론자들이었고, 개인적인 수양과 극기(克己)를 강조하였습니다. 쾌락은 좋지 않고 고통은 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을 따르며 자족하여 내적인 감정이나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스도이고 철학은 자존심을 부채질하였을 뿐이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가르침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도이고 철학파의 처음 두 지도자가 자살한 것은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을 말쟁이(수다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가서 말하기를 “너의 종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에게 “(행17:22) ...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종교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태양이나 또는 별에게 예배드리는 자도 종교적입니다. 불상 앞에서 엎드리는 자도 종교적이며, 메카(이슬람교의 성지)를 향하여 하루에 다섯 번씩 절하며 기도하는 자도 종교적이며, 동정녀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자도 종교적이며, 종교적인 많은 장로교인들, 감리교인들, 침례교인들, 성결교인들이 있지만, 그러나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참된 평화, 행복, 죄용서, 미래의 희망을 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종교체제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들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하는 교만한 철학자들, 온갖 지혜를 모두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담대하게 외칩니다.
(행17:22-31)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뽐내는 헬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선포했습니다. 즉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셔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모든 사람은 모두 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한 혈통이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가까이 계시며 신상(조각한 형상)이나 신전 안에 속박되지 않고 하늘과 땅에 충만하시다는 것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마치면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최고의 교양을 갖추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바울이 헬라 철학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당대 최고의 철학과 종교와 신화 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두가 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심판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지금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결단코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행한 설교의 결과는 세 가지 부류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는 바울을 비웃으면서 회개하지 않고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또 한 가지 부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네게 다시 듣겠다. 우리가 좀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반응했습니다. 이 부류는 주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나와서 믿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덴에서의 외견상 빈약한 전도 결과를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큰 수확에 비교하면, 바울의 사역은 형편없는 실패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을 것입니다. 교만하고 세련되고 현명한 아덴 사람들은 겸손을 요구하는 바울의 복음의 말씀을 쉽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곳의 흙은 깊지 않았고 잡초가 많았지만 조그마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지 아니한가!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는 지혜로우면서 오는 세상의 참된 지혜에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증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불순종하면 얼마나 손해보는 인생이 되는지를 어떤 의사가 이야기 합니다. 소문난 외과 의사 퍼시발(Percival)에게 키티라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선교사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딸에게 말하기를 “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안된다.”하며 말렸습니다. 딸은 순종하여 선교사로 갈 것을 포기하고 평범한 주부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 이 의사는 심한 눈병을 앓게 되어 결국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자기의 담임 목사를 보면서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친구에게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사의 소명을 받을 딸을 내 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내 시력을 빼앗아 간 것은 아닐까?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일에 부르시면 거절하지 말고 보내도록 하게나.” 하면서 슬퍼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아무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가 날로 확장되어 가는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습니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 구하는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자주 결석하는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오랜만에 나온 성도의 손을 잡고 “교회에 잘 나오셔야죠.”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 성도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 새벽부터 밤까지 뛰면서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어요.”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성도의 변명은 “제가 떡만 살 것이 아니고 채소랑 고기랑 과일도 사야 하거든요.” 하는 것입니다. 이 귀한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시고 있습니까? 쓸데없는 말싸움이나 갈등으로 세월을 허비하지는 않습니까? 남의 허물을 말하고 비난하고 다투면서 금쪽같은 시간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은 세 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1권은 “나의 과거”라는 제목으로서 이미 된 일이 기록되어 있고 절대로 수정될 수 없습니다. 제 2권은 “나의 현재”라는 책인데 날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번 쓰면 지울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잘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 3권은 “나의 미래”로서 마지막 책인데 우리 눈에 전혀 보이지 않고 그 열쇠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현재”라는 책을 잘 기록하는 사람만이 “미래”라는 책을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지 않게 되기 위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 전도의 대상이 누구이든, 복음 전할 때에 박해와 핍박이 있든 없든, 항상 복음 전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처럼 복음 전도에 많은 열매가 있을지라도 뜻하지 않은 방해세력이 가로 막을 수도 있도, 베뢰아 지역처럼 예상외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매우 신사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 지역처럼 각종 우상과 종교가 우굴거리며 각종 철학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서 쉽사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지 아니하는, 그래서 복음 전도에 쏟아부은 열정만큼이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지역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딤후4:1-5)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경우에 정신을 차려,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성도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어떠한 경우와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담대한 빛의 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이상웅목사 / 행 17:1-14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형제회(brethren)라는 교파의 예배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 독특해서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뉴질랜드의 북섬에서 6개월간의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남섬을 여행하고 싶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남섬을 여행하는 동안 주일이 있었고, 아는 분의 소개로 형제회 소속의 한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천주교처럼 자매들은 머리에 수건을 썼고, 회중에서 찬송가를 제안하여 부르고, 중간중간 개인적인 말씀 나눔과 간증을 하였습니다. 미리 약속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중간중간 침묵도 있었습니다. 낯선 방문객이었던 저희에게 소개하도록 했고, 저는 목사라는 것과 선교단체에서 사역하다가 안식년 중 여행을 하다가 방문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구원간증을 해달라 요청을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구원간증을 나누고 났더니, 저에 대한 호칭이 “형제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오후예배 때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정말 예기치 않게 준비된 원고없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 몇몇 가정으로부터 식사초대를 받았고, 여행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같은 믿음의 형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울 당시의 회당의 모임이 이와 비슷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회당에서는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 때마다 사회를 보는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의 안식일 예배는 기도문을 암송하고, 회당장은 안식일마다 정해진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회중에게 ‘누가 이 말씀을 강해해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럼 회중에서 자원하는 사람이 말씀을 강해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이 교회 지도자를 얻기 위한 좋은 자원들이 있었고, 또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에 어느 도시든 가면 회당을 찾았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지만, 얼마 후 호되게 매를 맞고 감금되었다가 풀려나 빌립보를 떠나야 했습니다. 채찍질 당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160km를 걸어서 도착한 곳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정치적으로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첫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가 그 과정에서 정적들과 싸울 때 데살로니가 도시가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섰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면세와 자치가 보장된 도시가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면세가 되었기에 상업이 발달했고, 자연스럽게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또한 자치가 보장되어 5명의 지방행정관인 읍장을 선출하여 다스려졌던 도시였습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의 탄생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입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그 도시에서 밤낮 일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데살로니가에서 천막짓는 일을 하면서 복음 전할 기회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3절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러다가 바울은 자기의 관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고 했는데, 이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강론을 하고, 이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야, 그리스도라 전한 것입니다. 회당에서의 강론은 세 안식일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4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열매를 맺었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헬라인들이었습니다. 헬라의 종교에 염증을 느껴 회당을 찾았던 경건한 이방인들과 귀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도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빛도 소망도 없이 살다가 위대한 복음의 빛에 이끌림을 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헬라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교회의 설립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을 찾아오던 헬라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자 유대인들이 화가 났습니다. 5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유대인들은 시기로 가득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시기가 이해가 가십니까? 바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회당을 찾은 경건한 헬라인들에 대한 영향력이 자신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등장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이 사라졌습니다. 자신들의 열매를 빼앗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서 10:2-3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의 시기는 잘못된 지식을 따른 열심이었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회당출입을 금했을 것이고, 그러자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헬라인들이 바울이 머물던 곳을 찾아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곳이 야손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야손’이란 이름은 ‘데살리’라는 그 지역 고대 왕의 이름이었습니다. 야손은 회심한 경건한 헬라인으로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21입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로마서에 기록된 야손이 같은 인물이라면 이 사건 이후에도 바울의 동역자, 후원자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불량배를 동원하여 야손의 집을 습격했으나 마침 바울 일행은 그 집에 없었습니다. 바울을 찾지 못하자 야손과 몇 형제들이 읍장에게 끌려 갔습니다. 6-7절입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유대인들이 읍장에게 고발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는, 바울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천하를 어지럽게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속을 어지럽게 한 것입니다. 불량배를 동원하여 소란을 일으킨 것은 그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왕, 예수가 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 황제외에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다는 로마 황제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죽은 사람을 왕으로 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아닌 로마의 황제를 왕으로 인정하는 불경한 것이었습니다.
읍장들로서는 ‘천하를 어지럽히고, 예수를 왕으로 선전하는 바울’이 아닌, 그 바울을 집에 머물게 했다는 야손과 그 형제들을 벌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9절입니다.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여기에서 보석금이란 것은 꼭 돈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다시는 바울 일행을 머물지 못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석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밤에 데살로니가를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베뢰아 교회의 탄생
바울과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급히 떠나야 했습니다. 10절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그 지역을 잘 아는 형제들이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인도했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80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또한 주요 도로에서 떨어진 외딴 성읍이었습니다. 당시 고대 문헌에 의하면 그 지역의 지방관리가 실정을 하고 피해 지냈던 곳으로 베뢰아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조용한 성읍, 베뢰아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베뢰아의 회당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11-12절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이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더 너그러웠다고 했는데, 너그럽다는 말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관련되어 쓰였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정말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상고(詳考)는 한자로는 자세히 생각했다는 말인데, 증거를 발견하려고 찾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이 과연 성경에 부합하는가, 과연 그 가르침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는가, 깊이 묵상하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회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베뢰아교회에도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13절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이 외딴 곳까지 찾아와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찾아와 바울을 돌로 쳤던 것처럼 바울을 찾아 베뢰아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원치 않는 이별을 하고 베뢰아를 떠나야 했습니다.
3.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점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주요 도로 상에 위치한 대도시였습니다. 베뢰아는 샛길에 위치한 조용한 벽촌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계획된 사역이었고, 베뢰아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복음전도의 기회로 선용하여 이루어진 사역이었습니다.
첫 번째 생각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도시 모두에서 열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열매와 함께 핍박도 있었습니다. 나의 계획안에 있었던 일이든, 아니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되, 우리의 계획밖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계획 밖에서 더 큰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계획에서는 벗어났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2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시기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시기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찾아온 경건한 헬라인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지자 시기하였습니다. 자신의 권한이 사라진 것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열심은 시기로부터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부간의 갈등, 요즘은 사위와 장모의 갈등이 왜 일어납니까? 내가 사랑하고 온 마음을 쏟았던 자녀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진 것으로부터 옵니다. 은퇴한 목사님의 마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직장 내에서 보직을 내려놓거나 정년퇴임 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영향력, 권한을 주신 이유는 섬김을 위한 것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영향력, 권한이 감소한다는 것은 그동안 잘 섬겨왔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나의 영향력이 감소하거나 위협받는다 생각될 때, 시기로 인한 열심을 내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생각할 것은 말씀에 대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상고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는 두 편의 편지를 썼는데, 베뢰아 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혹시 베뢰아교회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연구하였기에 굳이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서 만족하지 말고, 정말 그러한가 성경을 공부하고, 삶에서 그 증거들을 찾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지식을 늘리자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믿고, 순종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적극적으로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이곳에도 마중물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그 시대가 복음에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항상 복음 전파에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덧 우리의 열심이 식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시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식지 않는 열심으로 더욱 복음전파에 쓰임받는 마중물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바울의 2차 선교-데살로니가, 베뢰아
정방원목사 / 행 17:1~15
바울은 2차 선교 도중에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유럽 선교의 비전을 품은 채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이 일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바울의 2차 선교팀은 총 네 명입니다. 맨 처음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실라가 출발하고, 루스드라에서 디모데가 합류하며, 드로아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합류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마게도냐 환상을 함께 공유할 뿐 아니라 바울이 품은 유럽 선교의 비전도 함께 공유합니다. 바울의 선교팀은 ‘우리’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선교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세 명의 사람을 만납니다. 그 세 사람은 훗날 빌립보 교회의 핵심 멤버가 됩니다. 첫째, 두아디라의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입니다. 루디아 같은 전도 대상자를 만나야 합니다. 둘째, 점 치는 귀신 들린 여종입니다. 선교는 마귀 사탄과의 영적 싸움입니다. 셋째, 빌립보 감옥의 간수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명쾌하게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입니다. 아마도 루디아의 집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고린도후서 8장 2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교회보다 바울의 선교을 위하여 끝까지 후원하는 교회입니다. 그 만큼 바울을 사랑하고,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며,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배후에 루디아의 물질적인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후원한 여인들과 같습니다. <눅 8:2~3>“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예수님과 열두 제자)을 섬기더라.”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 이제 본문 1절에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의 거리는 160km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한 다음에 본문 10절에 베뢰아에서 선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행전 17장 16절에 아덴 즉 아테네에서 선교하고, 이어서 사도행전 18장 1절에 2차 선교의 최대 중심지인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이상을 머물면서 선교합니다. 여기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는 그리스의 북쪽인 마게도냐 지방이고, 아덴과 고린도는 그리스의 남쪽인 아가야 지방입니다. 오늘은 바울의 2차 선교 중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선교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전략적으로 선교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할 때, 본문 2절에 “자기의 관례대로” 선교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이 표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거룩한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말씀을 강론하는 습관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당에 와서 회중 예배를 드리며,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거룩한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교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전략을 갖고 선교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 동안 1차 선교를 했고, 2차 선교도 지금까지 열심히 감당해 왔습니다. 이제는 뭔가 자기 나름의 선교 전략대로 선교한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0:16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전도자를 파송하시는 일은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양을 잡아 먹으려는 이리떼가 우굴거립니다. 그들은 전도를 방해하고 훼방하며 핍박합니다. 전도자가 이리에게 잡아먹히면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전도자는 무엇보다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즉 전략적으로 지혜롭게 전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할 때, 아주 지혜롭게 전략적으로 선교에 임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관례대로”라는 표현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선교 전략을 갖고 선교할까요? 본문 1절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의 선교 전략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합니다. 바울의 2차 선교는 그리스의 마게도냐 지역과 아가야 지역에 집중됩니다. 북쪽인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남쪽인 아가야 지역의 아덴과 고린도에서 선교합니다. 본문 1절에 바울은 빌립보에서 선교한 다음에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그냥 지나치고, 데살로니가에 가서 선교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접촉점을 활용하여 선교합니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특별히 부르심을 받는 사도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이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는 그는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을 접촉합니다. 본인이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유대인 사이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접촉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회당’과 ‘안식일’과 ‘구약성경’을 서로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맨 먼저 안식일에 회당을 방문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맨 먼저 세 안식일 동안 회당에서 유대인을 접촉합니다.
둘째, 유대인들은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본문 5~9절을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고 증오합니다. 마치 회심하기 전에 바울이 예수를 증오하고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미워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아주 극렬하게 방해하고 훼방하며 핍박합니다. 심지어 불량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소란을 피웁니다. 바울의 선교팀이 사용한 숙소에도 침입합니다. 결국 행정 관서에 찾아가 바울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뭐라고 고발할까요?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면서 다른 임금인 예수를 전한다.’ 유대인들은 지극히 종교적인 문제를 아주 교묘하게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시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용어로 표현하면, 바울에게 정치적으로 아주 불량한 사람 혹은 반역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유대 교권자들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막 14:61>“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정죄합니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프레임을 짜서 고발합니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빌라도 총독을 압박합니다(요 19:12).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 빌라도 총독을 압박합니다(요 19:15).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교권자들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순수한 종교인이 아닙니다. 본문 5절의 표현대로, ‘불량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그 날 밤에 급히 데살로니가를 떠나서 베뢰아로 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똑같은 방법으로 소란을 피웁니다. 방해하고 훼방하며 핍박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뢰아에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 두고, 배를 타고 아덴으로 갑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방해하고 훼방하며 핍박하는 열심은 아주 대단합니다. 바울의 선교하는 열심이 뜨겁냐 아니면 유대인의 핍박하는 열심이 뜨겁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핍박하는 열심 때문에 선교하는 열심을 잃어버리면 결국 누가 좋아할까요? 마귀 사탄이 좋아할 것입니다. 여러분, 방해하고 훼방하며 핍박하는 열심을 이겨야 합니다. 마가복음 13장에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전방위적인 핍박을 예언하십니다. 유대교의 핍박, 로마 제국의 박해, 세상 사람의 대적, 가족의 미움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핍박과 박해, 대적과 미움을 받을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마 24:14>“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셋째, 베뢰아 사람은 말씀을 상고합니다.
본문 10~15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방해와 훼방과 핍박을 피해서 그 날 밤에 베뢰아로 갑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의 거리는 80km입니다. 그는 안식일에 베뢰아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강론합니다. 여기서 말씀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어떤 말씀을 강론했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입니다.
먼저 ‘어떤 말씀을 강론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동일한 말씀을 강론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관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말씀을 강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에서 강론한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의 강론은 윤리와 도덕의 강연이 아닙니다. 성공이나 축복이나 행복의 강연도 아닙니다. 그의 강론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 중심입니다. 그는 오직 성경의 뜻을 풀어서 강론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구약 성경이 약속한 그리스도(메시야) 즉 고난 받으시며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셋째, 예수 중심입니다. 고난 받으시며 부활하시는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전합니다.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본문 4절에 ‘권함을 받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강론을 들은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강론을 들은 사람 중에 결단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결단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데살로니가에서는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결단하고 예수님을 믿으며 바울을 따릅니다. 본문 12절에 베뢰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결단하고 예수님을 믿으며,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강론을 듣고 결단한 사람들 중에 데살로니가 사람과 베뢰아 사람의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의 특이한 점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너그럽다’는 표현은 선입관이나 편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간절한 마음’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상고한다’는 표현은 성경을 주의 깊게 탐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처럼 편견 없이 설교를 듣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경을 깊이 탐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과 선교팀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습니다. 핍박의 주범은 유대인들입니다. 선교를 방해하고 훼방하며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열심이냐 아니면 방해와 훼방과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열심이냐?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만 종말이 오듯, 천국에 가야만 전방위적인 세상의 핍박도 끝납니다. 방해와 훼방과 핍박을 이기는 열심을 갖고 예수 복음을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단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바로 알고 믿읍시다
행 17장 1~15절 / 박조준목사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에서 갈라디아 지방을 전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는 아시아가 전도하는 무대로 작정되었지만 성령이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그는 비 두니아로 가서 전도해 볼 생각을 가지고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려고 하 룻밤을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우리 지방에 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하는 환상을 보고 그의 계획을 변경해서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 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였습니다.
여기 빌립보,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는 지금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터키에 속한 작은 도시 들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세 도시는 다른 산물이나 문화로 유명 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십수 세기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특기할 만한 사건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900여년 전 바울과 실라라는 두 전도인이 다녀간 후 부터 영원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도성이 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으로서, 경건한 비단 장수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매 우 쉽게 교회가 세워져 빌립보 교회하게 되면 으레 루디아를 생각하게 되고, 또 거기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불쌍히 여겨 예수 이름으로 고쳐준 것 때문에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가 나중에 기도하고 찬미함으로 기적이 일어나고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받은 충격적인 사건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는 전도인들이 폭도들에게 무한한 고생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파해서 교회 를 세운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는 성경 안에 바울이 보낸 편지가 있기 때 문에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마게도냐 지방이면서도 성경에 두세 번 지명으 로밖에 나타나지 않는 이 베뢰아는 무엇으로 유명했습니까? 단 한 가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 는 것은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사적이었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머물러 있으면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도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경건한 헬라 사람들과 여러 귀부 인들이 바울과 실라의 말을 믿고 따랐으나 유대 사람들은 공연히 시기해서 성 안의 폭도들을 선 동해 가지고 그들을 습격했습니다. 이때 마침 바울과 실라는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 유하고 있었 기 때문에 그 집을 습격해 왔지만 때마침 바울과 실라가 그 집에서 외출하고 없었으므로 찾지 못하고 유대인들은 야손을 잡아서 읍장에게 끌고 가 이놈이 바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놈을 감 추고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 자라. 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바울과 실라를 처치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야손은 신분이 확실하고 도망갈 사람이 아니라는 인정하에 언제나 출두를 요할 시에는 응할 것을 다짐하고 불구속으로 처리되어 석방되었습니다. 이 날 밤 바울과 실라는 형제들의 호송으로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쪽으로 65km 지점에 있는 베뢰아로 내려가서 그 이튿날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라는 말 씀이 있습니다. 어떤 면이 신사적이었습니까? 저들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베뢰아 사람 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사적이란 말은 교육받고 예의 바르고 점잖은 인 격의 소유자란 뜻도 있습니다만, 원어 의 뜻은 바탕이 좋다 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마음의 바탕이 좋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 마음이 닫혀 있는 마음이 아니라 열려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 복음을 받아들였습니 다. 길가처럼 딱딱한 마음, 돌작밭 같은 굳은 마음이 아니라 옥토와 같이 부드럽고 순한 마음으 로 열려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유대교인들은 마음이 아예 굳어 있어서 예수에 대한 복음을 이단 시해버려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없애버리려는 무서운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안 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나 안 고쳐주나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면 율법을 범한 것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면서 나가서는 헤롯당과 더불어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는 것을 의논했습니다. 잘못된 신앙을 소유하면 이런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안식일에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고쳐주면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으로 정죄하면서 안식일에 사람 죽일 의논을 하는 것은 범죄하는 일로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은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서 메시아를 대망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 다.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의에 대한 기 준 때문에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서 문을 닫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닫힌 마음의 소유자 에게는 진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베뢰아 사람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진지했습니다. 11절 하반절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고 하였습니다. 베뢰아 사람의 마음이 열려 있다고 해서 아무것이 나 비판없이 알아보지도 않고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서 맹목적 으로 날뛰는 광신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 를 갖추어 바울과 실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들의 전하는 말씀이 구약의 예언자 들의 예언과 부합한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상고한다 는 말은 깊이, 자세히, 광범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란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전도를 구약성경의 예언인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고찰하기 위해서 진지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은 반대하기 위해서 비평한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믿되 확신을 가지고 믿기 위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한 고찰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100년이 지난 역사를 가지고 일찍이 선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교회가 부흥해서 세계 교회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왜 진리 아닌 허망한 데 쏠려 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과 참진리를 알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과 그것을 확인하려는 진지한 마음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진지하게 이해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흔히 있는 말 중에 덮어 놓고 믿 자. 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바람직한 말이 못됩니다. 성경을 펴놓고 믿어야지 덮어 놓고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상고하고 믿어야지 알아보지도 않고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베뢰아 사람은 신앙적이었습니다. 이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여 진지하게 진리를 상고할 뿐더러 그 말씀을 믿을 때, 받아들일 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습니다. 이렇게 베뢰아의 전도가 성공적이었을 때 유대인들이 또 폭도들을 선동해가지고 16 0리나 되는 베뢰아까지 와서 사도들의 전도사업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조금 도 동요되지 않고 자기들의 소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바울을 호위해서 폭도들의 위험을 피하도 록 헬라의 수도 아덴으로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은 머리로만의 신앙, 입으로만의 믿음이 아니라 실천과 봉사의 신앙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 0장 4절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그와 동행한 사람 중에 부로의 아들 소바더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베뢰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 이방사 람도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에 힘쓰게 된 것입니다. 이 베뢰아는 헬라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헬라인도 많이 와서 살았고, 헬라의 문화가 많은 영향을 끼친 곳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지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였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그렇게 볼 때 베뢰아 사람들은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다 동원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고, 복음을 생활화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바른 신앙이란 지적인 면, 감정적인 면 그리고 의지적인 면이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소위 인격적인 신앙이 됩니다.
너무 지성적이면 차가워지고 그래서 교만 하기 쉽고, 너무 감정적이면 광신자가 되어 탈선하기 쉽고, 너무 의지적이면 현실주의자가 되어 무궤도한 사회 사업가가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 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씀 따라 사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났다고 해서 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면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어떤 사람들 은 예수를 믿지만, 다시 말해서 복음을 믿으면서도 모세의 율법과 의식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런 것을 시정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 서를 쓴 것이 아닙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지식이나 철학방면에 치우치는 사람이 있었습 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골로새서 같은 것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치우치는 사람들이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너무 감정적인 면으로 치우치는 경향 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감정을 무시한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정에 너 무 치우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너무 소란해서는 안됩니다. 신령 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모든 일에 질서가 있게 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교훈에 맞아야 합니다. 예배가 인도하는 사람의 개인 쇼나 참석한 사람들의 흥분된 분위기로 끝나면 그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흥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고치는 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낫는 것을 믿 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체험합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그런 체험을 하신 분이 이 자리에도 계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치우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앓는 병은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사탄이 보낸 육신의 가시 입니다. 병 자체는 하나님이 직접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병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병이 기도만 하면 반드시 낫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 다.
사도 바울도 자기 자신의 병,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 물게 하려 함이라 고 하셨습니다. 병이 낫고 낫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응답으로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기적을 통해 병이 낫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 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병을 고치기도 하시지만 자연 치료를 통 해서 병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병든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병낫기를 위하 여 기도하라 고 했습니다. 옛날 히스기야 왕도 무화과로 약을 만들어 바를 때 병이 나았습니다. 병났을 때 약으로만 고친다는 것도 치우친 것이고 기도로만 고친다는 것도 치우친 것입니다. 치 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를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적을 구한다 고 탄식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누구나 호기심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호기심이 남자보다 더 강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 심리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성경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도 이적을 행한다. 고 했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한 것을 찾는 심리를 경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 것을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 중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 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 으리라 했습니다. (딤후 4:3-4)디모데후서 3장 5절 이하에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 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동안 듣지 않던 말, 듣지 못한 해석, 소위 기성교회에서 하지 않는 이상한 말을 한다고 마구 따라 다녀서는 안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받으신 예배 순서 안에 요사이 사회에 크게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소위 기독교 복음 침례회 구원파에 대한 정체와 소위 다미 선교회(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선교회란 뜻)에서 주장하는 1992년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문제점을 간략하게 기록했습니 다. 여러분께서 한번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상한 말로 우리를 미혹하는 데 현혹되지 말고, 치우치지 말고, 바로 알고 믿음의 생활을 하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말세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게 되고 거 기에 치중하다보니까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고 날짜까지 잡아놓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까지는 좋 으나 이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 수백 번 강조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누구도 모르고 또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 라 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 다시 오시는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 니다. 그러나 그 날은 하나님 외에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 성경적이요, 그 밖의 다른 말은 사람 이 만들어낸 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예수님이 1992년 10월에 다시 오시기보다 오늘밤에 안 오신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바른 자세는 아마 오늘(Perhaps Today) 주님이 다시 오실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준비 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 경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더구나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 가 자기를 멸망 가운데 들어가게 한다 고 경고했습니다.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데가 있다고 쫓아다니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성경은 어제 오늘에 생긴 책이 아 닙니다. 2천 년이란 긴 역사가 있는 책입니다. 그 동안 수천 수만 수억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 고 구원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가운데는 성경 연구를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도 많았습 니다. 이처럼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주석을 썼는데 아직까지 이 성경 가운데서 큰 구원의 진리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이 큰 구원의 진리는 무슨 특별한 해석 없이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데가 있다고 해서 분별없이 따라다녀서 는 안됩니다. 이 성경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과 그 교훈을 중심해서 성경을 해석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성경 어떤 부분을 따로 읽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16세기 로마 교회가 복음의 변질을 가져왔을 때 마틴 루터를 통해 참된 복음을 찾는 말씀 운 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도 무속주의에 영향입은 교회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신 령한 축복보다 더 중시하는 흐름이 이제는 위험 수위에 미친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는 복음의 바른 이해가 필요한 때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바 로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인데 윤리를 벗어난 기독교는 사교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밖에 나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영혼과 가족을 등한히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것은 바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중요합니다. 교회 일에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정을 관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가정을 보살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가정 일을 잘 돌보는 사람이라야 교회 일도 잘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5절에 사 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했습니다. 우리 교회 에서 늘 강조하는 바입니다만 교회 일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가정 생활에 지장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하셔야 합니다. 직장 생활에 지장이 되게 교회에 봉사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 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버지, 모범적인 어머니, 훌륭한 남편, 현숙한 아 내, 직장에서는 유능한 사원,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 사업계에서는 성공적인 사업가, 정 계에서는 신뢰받는 정치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바로 알고 바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세상에서는 덕을 세우는 귀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 이야기
행 17장 1~9절 / 김창인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17장 1절에서 9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전 주일에는 하늘 나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고 지난 주일에는 새 사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믿음 이야기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었다'라고 합니다. 재산은 내게 들어왔다가 나가기도 하고 나갔다가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에 재산을 잃는 것은 적은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었다'라고 합니다. 시간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이키지 못하기 때문에 허송세월 하는 것은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었다'라고 합니다. 건강을 잃고 죽으면 끝나기 때문에 전부 다 잃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건강보다 더 귀한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 놓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목숨보다, 건강보다 더 귀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는 사람에게서 믿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믿음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배움단계의 믿음 (1-3)
로마서 10장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의 믿음은 듣는데서 시작이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으면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들음은 전도를 가리킨다고 해도 좋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 믿고 구원 얻으세요"라고 할 때에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믿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나오게 되면 설교를 통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들음"은 성경공부를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배우는 중에 "진리가 여기에 있다. 생명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면서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는 들음 즉 성경공부에서부터 출발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3절을 보면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를 떠나 이리 저리 다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헬라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는 유대 사람이 절반이요, 헬라인 토박이들 절반이 살고 있는 큰 도시입니다. 바울이 그 곳에 이르러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을 먼저 찾아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바울 사도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런데도 어느 도시에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이 있으면 그 회당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같은 값이면 내 동족에게 먼저 전도하여 구원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 안식일 동안 바울이 자기의 규례 혹은 습관을 쫓아 성경을 읽고 아주 쉽게 풀어 가르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 조상적부터 기다리는 그리스도요, 메시아라고 하는 그 분이 오셔서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전부 뒤집어쓰시고,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은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가지고 증명을 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큰 권세를 가지고 로마 군병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정치적으로 독립시키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는 반드시 죽고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가 예수요, 그리스도가 예수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쉽게 풀어 가르치더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진리가 있다. 여기에 생명이 있다'라는 것을 믿고 돌아왔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이처럼 성경공부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재미있게 공부를 하고, 그 성경 공부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할 만큼 말씀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인 성경공부에서 재미있게 믿음이 출발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초보적인 단계요, 출발은 성경을 배우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을 배움에 있어서는 즐거움과 재미가 있어야 하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오세정이라고 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경기 고등학교가 전국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훌륭한 고등학교였습니다. 이 학생이 그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일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요즘과 달라서 누구나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이 너무 많은 관계로 입학 원서를 낼 때 제한을 해야 하므로 대학입학 자격 고사를 치렀습니다. 나라에서 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똑같은 문제를 놓고 전국적으로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전국적으로 1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대학을 지원했는지는 여러분들이 벌써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 대학은 수재만 모인다고 하는 대학인데 입학 시험에서 또 1등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고 있었는데 4년 후에 또 크게 신문에 났습니다. 그 학교를 졸업할 때 일등으로 졸업을 해서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이 학생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문 기자가 가서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학교에 가기 전에 오늘 공부할 것을 집에서 미리 예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표를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서 배울 때 모르는 것은 '아 이것이로구나'하고 깨우치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예습하면서 모르겠다고 한 것,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들어 깨우친 것을 다시 복습을 하여 완전히 소화시켜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배우는 대로 자기의 실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공부에 재미가 있었고 그 학생에게는 공부가 곧 생활이었습니다. 그 학생의 실력 즉 1등을 했다는 것이 나쁠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나쁘다고 하실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꼴등이 좋습니까?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듣든지, 성경공부를 체계 있게 하든지 재미있게 하고 그 성경공부가 우리 믿음 생활에 분명히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적에 믿음의 실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출발되고 믿음에 싹이 튼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배움 단계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이렇게 출발하고 점점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나 기초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생활단계의 믿음 (4-)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머리에 많이 기억해 두고 지식으로만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서 입을 열었다하면 성경이 줄줄 나온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생활화되지 않으면 지식적인 믿음이요, 이론적인 믿음이요, 사색적인 믿음이요, 관념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절대 그 믿음은 써먹지를 못합니다. 어디에 가서 믿음 노릇을 못합니다. 반드시 그 믿음은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생활화 된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을 보면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전도를 했는데 왜 헬라인의 큰 무리가 예수를 믿습니까? 그리고 왜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돌아옵니까? 경건한 헬라인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유대인들이 모여 살면서 회당을 세웠습니다. 헬라인들이 유대인들의 믿음 생활을 살펴보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하나님이 참신인지라 지금까지 자기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우상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경건한 헬라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수가 큰 무리라는 것입니다. 결코 적은 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귀부인은 그 분들의 아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참석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은 것입니다. 성경해석을 통해서 공부를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믿어도 예수는 믿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도 예수도 함께 믿지 않습니까? 유대교로 개종했던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로 그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생명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쫓았다는 말씀은 바울과 실라라는 사람 자체를 쫓았던 것이 아니라 그 교훈 즉 성경의 가르침을 쫓았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우상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가서 하나님을 믿더니 복음이 전파된 후에는 기독교로 개종을 해서 하나님도 믿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종이라는 것이 말로만 끝나는 것입니까?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까? 행동이요, 실천인 것입니다. 헬라의 많은 사람들과 귀부인들의 믿음은 행동이요, 실천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생활화된 믿음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보일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여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어서 영혼이 떠나면 그 몸은 죽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 무엇을 합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믿음은 행함 즉 생활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인 헬라인들과 그 귀부인들의 믿음이 바로 생활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단계로 믿음이 향상 발전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는 '예수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내가 내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해야 되느냐? 하지 말아야 되느냐? 또는 내가 내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처신이 난감할 때 내 입장에 서신 예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셨을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을 행동과 처신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화 된 믿음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생활화되었고 생활 속에 믿음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생활과 믿음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교회에 가두어 놓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예배하고 믿음은 교회에 놓아두고 가정으로 직장으로 가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믿음을 여기에 놓아두고 즉 교회 안에 가두어 놓기 까닭에 직장에 가서 욕을 먹는 것입니다. 믿음을 직장으로 가정으로 가지고 가서 내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 곧 믿음이 되는 것이 생활화 단계의 믿음입니다. 여기까지 우리의 믿음이 성장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셋째, 순교단계의 믿음 (5-9)
순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죽인다'라고 할 때에 순교적인 자세를 가지지 못하면 죽을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죽을 죄로 잘 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게 빌다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왔다 갔다 했을지라도 그런 믿음을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언제나 죽인다고 하면 끝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순교적인 믿음은 '예수 믿으면 죽는다'라고 할 때 '죽일 테면 죽여봐'라고 하면서 목을 내 놓는 것입니다. '죽일 테면 죽여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목숨을 내 놓고 죽기를 한사코 믿는 믿음은 천하가 당하지 못합니다. '예수 믿으면 죽인다'라고 할 때 죽을 죄로 잘 못했다고 하면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100명, 1000명이 모이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믿음을 위해서 목을 내 놓고 순교자적인 자세로 대드는 한 사람을 당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나가서 일당 100을 하고 일당 1000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세상이 뒤집어 진 것입니다. 순교적인 믿음의 자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절에서 9절을 보면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길지만 설명은 간단합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안식일에는 반드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성경을 풀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야손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예수를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전부 야손의 집으로 모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는지라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유대교로 개종했던 헬라의 그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다시 개종하는 까닭에 시기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자에 나가서 괴악한 사람들 즉 깡패를 동원시키고 야손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바울을 붙잡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바울만 죽이면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손의 집으로 달려갔더니 숨겨 놓기는 분명히 어딘가에 숨겨 놓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한 그들이 야손과 형제들을 끌어내었습니다. 여기서 형제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믿음의 형제를 가리킵니다. 군중심리로 소요를 일으킬 때 끌고 가다가 죽인다면 아니라고 나설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 괴악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하나씩만 들고 가면 살림이 끝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돌로 치기 시작하면 목숨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데 그 때 그가 살길은 '바울을 여기에 숨겨놓았소'라고 하면서 바울이 숨은 곳을 알려 주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지 않겠소'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손과 그 형제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끝까지 끌려갔습니다. 재산은 가지고 갈테면 가지고 가고, 가다가 죽일 테면 죽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끌려가다 보니 읍장들 앞에 갔습니다. 읍장들이 냉정하게 살펴보니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기에 보를 받고 놓아주었습니다.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보석으로 풀어주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순교적인 사람을 누구가 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믿음이 자라고 자라서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같은 귀한 일꾼이 그 교회에서 난 것입니다. 일꾼도 순교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순교적인 믿음을 가진 가정에서 귀한 일꾼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자적인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믿음은 천하가 당하지 못합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렇게 잘 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적인 믿음 단계까지 우리는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들의 믿음은 첫째 배움 단계의 믿음입니다. 철저하게 성경공부를 하고 그 말씀 위에서 믿음을 시작했습니다. 둘째 생활단계의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사색적이고 지식적이고 이론적으로 끝나면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은 생활화되어질 때 믿음 속에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때 그 믿음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 순교단계의 믿음입니다. 목숨을 내 놓고 충성하는 사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일당 100, 일당 1000을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행 17장 1~9절 / 서금석목사
미국 국경일 가운데 컬럼버스데이(Columbus Day)가 있는데 10월 12일에서 가장 가까운 월요일로 되어 있습니다. 컬럼버스가 1492년 10월12일 신천지 중 하나인 바하마 열도에 도착한 날입니다. 왜 그날을 국경일로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의 나날을 보내던 선원들은 매일 되돌아 갈 것을 선장 컬럼버스에게 요구했답니다. 때로는 선장을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전진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만일 선원들의 투표에 의해서 항해를 결정하였더면 아마도 대서양을 3분의 1도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컬럼버스는 회상하면서 "내가 신천지를 발견한 것은 나의 수학의 힘이나 항해술 때문이 아니라 믿음때문이었다"라고 국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컬럼버스의 선원들은 10월11일 저녁에도 폭동에 가까운 데모를 하며 배를 돌리고자 소란을 피웠으나 이튿날 10월12일 새벽이 밝았을 때 안개 속에 육지가 드러났습니다. 지금의 바하마 제도였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을 수 있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은 조급하고 신경질만 부릅니다.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라는 서양속담이 있습니다.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통에 빠졌는데 한 마리는 포기해서 얼른죽고 다른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휘저으니까 어느새 우유가 버터로 굳어져서 살아나왔다는 우화에서 나온 속담입니다. 컬럼버스의 불굴의 신념과 의지 그리고 개척정신(Frontierism)이 지금의 미국정신이 되었기에 국경일로 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이 터오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넘기면 곧 찬란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새성전 입당을 앞둔 우리 모두가 마음에 새겨야 할 이야기입니다. 지금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내면 곧 아름다운 성전에서 맘껏 예배할 수 있는 순간이 옵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인구 20만 정도의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는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고 그 명성에 걸맞는 잘 발달된 도로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까지 갔는데 암비볼리나 아볼로니아에서 유대인도 회당도 없었던 듯합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의 거리는 160km가 넘었습니다. 바울은 교통요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얻는 유익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정확히 데살로니가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2절에 세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햇다고 했으니 최소 3주는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달이라고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바울이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대단히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살전1:3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고 1:4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자의 본이 된 교회였고 1:8에 보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교회 대단한 교회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전도했고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신앙의 교훈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1.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1-4)
2절 보면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복음을 전했다고 했는데 규례가 무슨뜻입니까?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자기 습관대로' '자기 규칙대로' '자기 스타일대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바울은 어디에 가나 자기 스타일대로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바울의 스타일/규칙은 어떤 것입니까?
⑴ 안식일에는 꼭 회당을 찾았고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안식일을 꼭 지켰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아무리 오래 여행하더라도 안식일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주일을 꼭 지켰다는 말입니다. 세월이 변하고 사람들의 생활이 바빠지고 복잡해져서 요즘은 주일을 그렇게 엄격하게 지키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일을 거룩하게 예배드리며 지키는 사람에게 하늘의 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1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규칙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바울은 안식일에 언제나 회당을 찾았습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이 많지 않아서 회당이 없엇기에 기도처를 찾았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회당을 거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바울은 스스로 이방인을위한 사도라고 말했지만 언제나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무작정 길거리에 뛰어들어 아무나 붙잡고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잘 아는, 여러 가지로 익숙한 회당을 중심으로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리고 나서 이방인에게 전도했습니다.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먼저 여러 가지로 - 가정형편,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잇는지-아는 사람에게 전도해야 합니다. 전연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전도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입니다. 또하나 할수만 있으면 가족, 친지부터 전도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새기세요.
⑵ 회당에서 어떻게 전도했습니까? 성경말씀을 가지고 전도했습니다.
"2…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성경을 강론햇다는 말씀입니다. 강론이 무슨뜻입니까? 희랍어 디알레고마이(διαλεγομαι)는 '담론하다' '문답하다'의 의미가 잇는데 '합리적으로 따진다' '마음에 확정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안식일 회당에서 단순하게 '예수 믿으시오" "교회다니시오" 그렇게 하지 않앗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전도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으시오' '교회에 나오시오'정도가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믿는 예수는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인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으며, 2000년대를 살고 잇는 우리에게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가 무책임한 전도가 되지 않기 위해 전도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중심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신앙에 대해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예수를 전했습니까?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證明)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3절을 보면 바울이 행한 성경강론의 요지, 전도 설교의 핵심을 봅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 - 누가 죽였습니까?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죄를 지적받은 자의 반응은 반드시 둘 중의 하나로 나타납니다. 죄를 인정하고 예수를 믿던지 아니면 내가 무슨 죄인이냐 하면서 오히려 핍박하며 덤벼들든지. 둘째 '그리스도가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 초대교회의 전도강령입니다.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죽음으로 끝이라면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가 죽었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증명했습니다. 셋째 그러므로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메시야라' -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교리입니다.
⑶ 전도의 결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4절을 함께 봅니다.
"4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경건한 헬라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우상숭배와 인본주의에 빠진 헬라문화를 등지고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기로 개종한 사람들 -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던 헬라사람들입니다. 귀부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마게도냐 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 여성들이 자유를 누렸습니다. 여기서 귀부인은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부인이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생활이 음란하고 방탕한 로마여인들보다 유대 여인과 결혼하기를 선호했습니다. 헬라의 지성인이나 귀족 가우네도 유대여자와 결혼하기를 좋아했는데 바로 그런 귀족이나 고관의 부인들이 귀부인으로 불리웠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 믿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그 유명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는 기간동안 여러 가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그 결과로 교회가 서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닙니까?
2. 시기하는 유대인들.
그런데 바울의 전도를 받고 모두 예수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5절입니다.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저자'라는 말 - 표준 새번역에는 '거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떤 괴악한 사람들'은 한마디로 불량배들을 말합니다. 거리의 불량배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누가?
⑴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도하는 것을 듣고 경건한 헬라사람들과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좇으니 - 예수를 믿게 되니 반대로 유대인들이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이 그랬을까요? 바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유대회당의 지도자급에 해당되는 유대인들이 시기했습니다. 그러면 왜 시기햇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지도력이 상실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럴때는 자신들도 예수 믿으면 간단한데 그렇지 못하고 바울과 실라를 시기해서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시기의 밑바닥에는 열등감이 깔려있습니다. 자기가 더 잘 할 수 있다면 왜 시기하겠습니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시기하는 것 보았습니까? 열등의식 때문에 시기합니다. 가장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탄이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교의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꾸만 남과 비교합니다. 그리고 비교하면서 교만해 집니다. 나는 아무개보다 인물도 낫고,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아무개를 무시하고 때로는 책망까지 합니다. 문제는 현대인 대부분은(95%정도)심리적으로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지위와 명예가 있는 사람도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화) 수도사가 있었어요. 마귀가 예쁜 여자로 유혹해요. 끄떡하지 않습니다. 금덩이로 유혹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당당하게 자기 길을 갑니다. 드디어 마귀대장이 나섭니다. 수도사 귀에 몇마디하니까 수도사 얼굴빛이 금방 변했습니다. 시험에 성공했습니다. 마귀대장이 속삭인 말이 궁금하시지요? '네 동생은 대주교가 되었단다'
동생과 형 사이도 시기와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27:18을 보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자기에게로 끌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가야바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물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닙니다. 시기때문이었습니다. 시기가 발동되면 이성도 마비되고 믿음도 힘을 잃고 상식도 잃어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시기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열등감 없애주시고 시기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게 하옵소서"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까지 동원햇습니다. 그냥 동원했겠습니까? 시기로 눈이 가려지니 이제 제 정신이 아닙니다. 믿음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유의해 보세요. 시기로 가득하니 이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돕던 야손의 집으로쳐들어 갔습니다. 야손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성경은 설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만 짐작키는 데살로니가에서 초기에 얻은 회심자 중 한사람이었을 것입니다.
⑵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
"6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여기서 읍장이란 로마 영토내 자치도시의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장관을 말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뜻은 로마제국에 반란을 꾀한다는 뜻인데 다른 도시에서 바울의 전도활동에 대하여 알고 있는 듯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천하를 뒤집어 놓는다'(turned upside down) '꺼꾸로 놓는다'는 뜻입니다. 실제는 이들이 바울 일행을 모함하려 한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딱 맞는 말 아닙니까? 예수 믿기만 하면 사람이 변했습니다. 이단사상에서 벗어났으며, 인간적인 자랑들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이들의 변화를 보고 주위 사람들이 놀랐고 곧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앞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16:33)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이 믿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⑶ 시기가 지나치니 바울 일행을 정치적 음모로 몰고갑니다.
"7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영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종교 깡패까지 동원해도 되지 않으니까 바울은 잡지 못하고 대신 바울이 묵었던 야손을 잡아 넣고는 가이사 이름팔아서 정치적 음모로 집어 넣으려 합니다. 유대인이면서도 가이사 임금이 있는데도 다른 임금 예수가 있다하니 이것은 로마 가이사 황제에 대한 불충이요 반란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기독교를 핍박할 때 당시 세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습니다.
8.9절을 보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고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 한다는 말을 듣고 군중과 시의 통치자들이 소동했지만 곧 시기때문에 생긴 일인 줄 알고 보석금을 받고는 야손일행을 놓아 주었습니다.
3.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에서 찾아지는 신앙의 교훈.
후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질적으로 참으로 우수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결코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에서 몇가지 교훈을 나눕니다.
⑴복음 전파는 반드시 말씀 중심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항상 예수를 전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흔히 전도하라 하면 어떻게 합니까? "교회 나오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시면 하나님이 복 주십니다" "하나님 믿으면 평안을 얻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평안해지고 복받으려는 것인가?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평안과 축복은 예수 믿은 결과이지 목적 자체는 아닙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가르쳤고 예수가 바로 메시야인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다. 그 예수가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이므로 예수를 믿어야 한다. -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 가르쳤습니다. 요즘 '일대일양육'지도자 훈련 바으시지요? 성도를 교회에 빨리 그리고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 양육해야 합니다. 전도할 때 우리가 단순히 '예수 믿으면 좋다'는 느낌 / 감정만 가지고 전도하려 하지 말고 예수가 누구신지? 왜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믿게하는 것이 빨리 성도로서 제구실할 수 있도록 자라게 합니다.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⑵ 핍박이 오히려 복음을 더 빨리, 더 많이, 더 능력있게 전하게했습니다.
전도 여행에서 바울이 다른 도시로 옮겨가서 전도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핍박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그리고 다음에 볼 베뢰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도시에서 머물러 전도하면서, '이만하면 됐다' 어지간히 전도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다음 도시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핍박이 닥치면 '아, 하나님께서 다른 도시로 가라고 하는 사인(Sign)을 주시는구나'그렇게 생각하고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오히려 이핍박 때문에 복음이 더 빨리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일이 되었다고, 좀 쉬자고, 그런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미쳐 마무리 되기도 전에 재빨리 다음 도시로 강야 했으니 그만큼 복음이 빨리 전파된 것 아닙니까? 그렇고 보니까 이 핍박 때문에 복음이 더 많이 전해지게 되지 않았습니까?두곳 정도 전도할 수 있는 시간에 세곳, 네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으니 그만큼 많이 전한 것 아닙니까?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핍박은 복음을 더 능력있게 전하게 했습니다. 가는데 마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의 능력은 결신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전도하다가 핍박을 당하면 곧 능력도 나타나게 되고 결신자도 생길 것이다 - 확신 가지시고 더 담대하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⑶ 신앙생활하다보면 '잡족(雜族)의 신앙'인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회당의 지도자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하여 종교깡패까지 동원하여 가이사에게 반란을 꿈꾼다고 엉뚱하게 고발하지 않습니까? '사이비신앙' '잡족의 신앙'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아닙니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눈치껏 세상과 어울려 살려고 합니다.
교회 다녀봐야 별것 아니라 하면서 요즘 세상에 아무리 신앙인이라해도 술 적당히 마시고, 담배 적당히 피우고, 오락이나 하면서 때로 도박도 하고, 기업하자면 뇌물도 주고, 이중장부도 만들고 - 성경대로 하면 다 꿂어죽는다고 아우성치는 사이비 신앙인들. - 예나 지금이나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신앙의 지조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강직한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숙종때 형조판서 민진후가 어렵게 사는 누이동생 집을 들른적이 있었습니다. 술상을 차려 내오는데 안주라고는 김치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실은 그 전날이 시아버지의 생신이었기에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았기로 남은 쇠고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법으로 소를 잡지 못하게 됐었는데다가 오빠가 강직하여 법 지키는 것이 엄함을 알고 있던 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크게 나무라지 말 것을 다짐하고 쇠고기를 구워내자 민판서는 맛있게 먹고는 문밖에 나가 포졸을 풀어 "범법을 했으니 이 집 종을 잡아가두라"고 시켰답니다. 그러고 나서 법정벌금을 민판서가 물고 종을 풀어줬답니다. 가족의 정으로 구워낸 고기를 아니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범법한 것을 묵인할 수도 없었던 민판서가 행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참으로 강직하고 투명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합시다. 하나님만 바라보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태도와 소속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은 이것도 저것도 못하고 맙니다.
⑷ 복음을 듣는 자는 언제나 긍정적으로 듣고 따르는 자와 부정적으로 듣고 항거하는 자 - 두 종류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따랐지만 유대 회당지도자들은 오히려 핍박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긍정적이 되세요. 신문을 보아도 뉴스를 들어도 긍정적인 것 많이듣고 기억하세요. 어떤 사람은 신문보아도, 뉴스 들어도 꼭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들어요. 그 마음이 이미 병든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교회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열명의 지파대표와 여호수아와 갈렙, 이스라엘 역사는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긍정적인 지도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갔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먼저 사고를 긍정적으로 하세요. 신앙을 긍정적으로 바꾸세요.
마무리하면서.
신앙생활하면서 시기심 버리세요.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말씀 중심으로 전도하세요. 잡족 신앙에 흔들리지 마세요. 긍정적인 시각으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의 본이 되도록 아름답게 자라난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믿음의 성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고 사랑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행 17장 1~9절 / 신성종목사
지금 이 세상은 가치관의 혼돈과 올바른 세계관의 부재로 인해서 폴 틸릭이 말한 대로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마치 사사시대와 같습니다. 사사기 21:25절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제멋대로의 세상입니다.
여러 해 전에 Christian Today 잡지에서 [뒤틀린 가치관]이라는 특집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가 한 시간 노래를 부르는 것이 미국 대통령의 일년 월급과 같고, 대법원장의 3년간의 월급과 같다고 비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은 생명이 없는 일, 무가치한 일에 많은 것을 지불하고 가장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은 업신여기는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도행전 17장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우리의 사명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가치관이 새롭게 정립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이 세상에는 3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1) 첫째로 8절에 보면 그냥 [무리]가 나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있으나 마나해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물에 술탄 듯, 술에 물 탄 듯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로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교인 중에도 형식적인 교인들, 즉 아직 중생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나, 반대로 소라처럼 자기의 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신비주의적인 사람들이 바로 무리, 오크라스입니다.
(2) 두 번째는 나쁜 의미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5절에 나오는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한국에서는 김기환 같은 지존파, 미국에서는 168명을 죽인 오크라호마 폭파범인 멕베이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으면 본의 아니게 세상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는 순간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는 복음으로 무장한 사람들, 좋은 의미의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4절에 나오는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데 이들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번역에서는 [세상을 소란케 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King James나 Revised Standard 성경에서는 [turn the world upside dow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사실 신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배경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 과정에 일어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의 심장이라고 할만큼 무역과 상업이 아주 무성하였으나 사회악이 심각한 도시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바울이 제2차 선교 때 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때에 그들의 죄목이 세상을 어지럽게 한 사람들이란 것이었습니다.
2. 세상을 어지럽게 한 사람들의 [메시지의 내용]은(2절)?
바울이 세상을 어지럽게 한 것은 바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의 풍속과는 전혀 다른 것이고, 상식과도 전혀 다른 것이고, 인간의 철학과도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울이 세상을 어지럽게 한 것은 3절에 잘 나옵니다. 한번 큰 소리로 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용이 무엇입니까?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 틀이 아니고, 바로 나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열쇠이기 때문에 이것은 개인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요 인류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부활]이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인간은 죽음의 문제로 고통을 당해왔고, 이것을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왕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누구인가 왕으로 섬기고 있고, 그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자기가 왕인 사람도 있고, 타인이 왕인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오직 가이사 만이 왕이었고, 다른 왕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리와 읍장들이 소동한 것은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 세상을 어지럽게 한 사람들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은?
계층마다 다른 반응을 했습니다. 참 인간은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생각도 다르고 반응도 다릅니다. 꼭 같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고, 시험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 화)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사우나에 목욕을 하러 갔습니다. 아들은 사우나에 가 본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물 속에 들어가면서 “아이쿠 시원하구나”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아무 의심없이 풍덩하고 탕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물이 뜨거운지 아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물에서 나오면서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구나”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날씨가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키는 사람들이 사우나에 들어가서는 뜨겁지 않다고 더 온도를 올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로러니칼 합니다. 땀이 펄펄 나면 “아이쿠 시원하구나” 하고 말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반응이 다르고 표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 본문에 보면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 종류의 계층이 있었습니다(5절).
첫째는 유대인, 둘째는 괴악한 사람들, 셋째는 백성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시기]였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사랑의 동기]이나 아니면 [미움과 시기의 동기]로 움직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끝없는 전쟁은 바로 이 미움과 시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반응(행 17:5)은 시기로 인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시기란 질투를 뜻하는 말입니다. 많은 무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시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가 바울과 실라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시기했습니다. 이들은 바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비난했습니다. 간사하다(3절), 부정하고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3절)고 헐뜯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또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4절)이라, 목적을 위해서 아첨하는 자(5절)라, 욕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라(6절), 영광을 구하는 자(6절)요, 불의하고 사악한 자(10절)요, 비난받고 책망 받아야 할 자(10절)라고 했습니다.
또 괴악한 사람들의 반응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떼를 지어서 바울과 실라를 선동적이고, 반역적이라고 하면서 소동을 피웠습니다. 자기들이 사회를 어지럽게 하면서 남들에게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고소를 했습니다. 사실 이들의 고소는 일면 일리가 없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생활을 변화시킵니다. 사람들을 죄와 수치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부도덕에서 순결함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소처럼 그냥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뒤틀린 것을 바로 잡는 것이었습니다.
(2) 그러나 수많은 독실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있었다(4절)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숫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또 이들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서로 연합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교회의 중심 멤버들이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참으로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4. 그러면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되려면?
(1) 각자가 위로부터 [주시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간증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204장 후렴). 그 메시지의 내용은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스도의 왕권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 전파에는 항상 환난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증인]이란 말을 [Martus]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시는 메시지를 위해서는 핍박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말을 요약하면 듣는 것이고 듣는 것과 순종이란 말은 동의어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순종하면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네 씨로 말미암아 헌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불이 떠오르면 앞으로 진행하였고, 구름과 불이 머무르는 곳에 진행을 멈추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평안했고 승리했습니다.
(3) [능력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성공은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때 이루어집니다. 사실 세상에 보면 아이큐는 높고, 능력은 많은데 그것을 활용하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능력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성도들의 능력은 기도에서 옵니다. 기도는 결코 허공을 치는 허사가 아닙니다. 약자의 하소연도 아닙니다. 한가한 사람의 노름이나 미신 자들의 공염불도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영적인 다이나마이트요 불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절망에서 희망을 갖게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4)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을 표현]하여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물질을 사랑하고, 사람을 이용하는데 믿고 난 뒤에는 반대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물질을 이용하게 됩니다. 사랑은 소금과 같아서 맛을 내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랑하는 자를 닮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님처럼 변할 줄로 믿습니다. 돈을 사랑합니까? 돈처럼 변하고, 더러워지게 됩니다.
사랑과 전쟁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최근 미국의 어떤 상원의원이 베트남에서 대위로 복무하고 있었을 때에 양민을 학살한 문제가 30여 년이 지난 지금 터져 나왔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전쟁에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전쟁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사랑도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를 보면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불과 같이 강하다”, “홍수보다 더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참으로 강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마귀를 이기고, 죽음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우리는 좋은 의미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인 것을 믿으십니까? 침묵이나 조용한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어지럽게 해야 합니다. 어지럽게 한다는 말은 위와 아래를 바꾸어 놓는 것, upside down을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모든 가치관이 무너져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은 오직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그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의무일 뿐만 아니라 또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섞여서 즐기고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과 같아집니다. 덴마크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엘케고르의 유명한 예화가 생각납니다. 한번은 야생 오리 한 마리가 날아가다가 집에서 키우는 오리 떼들을 발견하고 내려와서 함께 오리 우리에게 살게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주인이 주는 것을 잘 먹으면서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야생 오리들이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자기도 본래의 자기 무리인 야생 오리들에게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날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왠일입니까? 집에서 키우는 오리들과 함께 살다보니 땅에서 걸어만 다녔기 때문에 뒤뚱거리기만 했지 날개에 전혀 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그런 하늘을 날지 못하는 야생 오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음 한 주간이라도 복음으로 세상을 어지럽게는 못할 망정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를 알려서 작게 남아 복음 증거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에게 증명 되어야 할 말씀
행 17장 1~9절 / 박지온목사
광고를 하나 더 드립니다. 다음주에 건축을 위한 우리 작정 헌금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것 때문에 아마 예배 마치고 한 5분 정도만 시간을 내면 되겠더라 구요. 보니까! 잠깐 남아서 우리 건축 위원회, 그 동안 건축에 대한 상황을 상세한 보고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건축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헌금할 것이냐에 대한 그런 어떤 구체적인 자세도 말씀 통해서 우리가 좀 잡아야 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건축한다는 것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과 제가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다. 또 한번 건축을 한다. 또 한번 내가 하나님 앞에 건축할 수 있는 헌금을 드린다. 이런 기회가 또 한번, 또 한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50년 후가 되면 여기에서 못 볼 사람 참 많다고 생각이 됩니다. 저도 50년 후면 분명히 살아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제가 여기다가 50년 더 보태고 50년 후에 계속 이렇다! 도저히 그건 뭐 상상이 안 돼요. 제가 50년 더 있다 그러면 110살인데, 상상이 안 됩니다. 제게도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마지막 기회고 여러분도 쓰임 받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리고 이런 어떤 그 하나님의 축복된 기회에 여러분과 저를 쓰셨다. 쓴다! 이것이 그냥 감사하다. 그런 정도가 아니고 엄청난 은혜 중에 은혜더라 구요.
그래서 오늘 조금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반드시 증명되어야 할 말씀이다." 여기에 제목을 '반드시' 라고 넣어야 되는데 지면 관계상 못 넣었습니다. 17장 3절에 보면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할렐루야! 반드시 여러분에게 이 증명이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성경은 뭐라 그랬느냐 하면 통괄 적으로 '성도' 라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여러분과 저를 뭐라 그랬습니까? '증인' 이라 그랬습니다. 증인이라!
그러면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증인이라는 것은 법적 용어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증인이, 자기에게 증거 할 수 있는 증명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증인으로 자격도 안 되지만 그 뭐 세워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잘 알아들어야 돼요. 저는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야, 정말 우리가 이 말세에,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여러분과 제게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뭘 줍니까? 증명을 줍니다. 증거를 줍니다. 이것이 없으면 증인이 안 됩니다. 증인은 사실적인 개인, 개인에게 증명이 되는 사실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이건 뭐, 세상에 남아 있을 살아야 될 가치조차 없는 겁니다.
그렇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또 제가 바로 뭐부터 해결해야 되느냐? 이 배경입니다. '내게 반드시 증인으로서 약속하신 증명을 주옵소서.' 사실을 증명하는... 그런데 이 증인 그럴 때에 법적 용어인데도 뭘 보느냐하면 증인이라고 그래서 아무렇게나 증거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실을 말해야 됩니다. 사실을 말 안 하면 허위 증거로 나옵니다. 법정에 가서 이것 때문에 손을 들고 뭡니까? 사실 그대로 내가 진실을 말하겠다. 서약을 안 합니까! 여러분들이 증인으로 섰다! 그럴 때에 사실이 없고 진실이 없다, 그러면 그건 뭐 증인이 안 되죠. 증인이 될 수가 없죠.
그리고 또 뭘 보느냐 하면 증인이 되었을 때에 변호사가 이런, 이런 방면으로 내가 이 사람을 증거 해 나가겠다. 이끌어 나가겠다. '그 중에 당신이 그 방면에 나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증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자리인가 하는 것을,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을 변호하면서 증인이 증거한번 잘하고 못하고 잘한다, 못한다! 그 말은 사실을 반드시 증거한번 바로 하고, 못하고에 따라서 '사느냐? 죽느냐?' 가 결정됩니다. 증인에게 달려 있어요. 증거 한번 잘 못해놓으면요, 증인 한번 잘못되어 놓으면 살 사람도 죽습니다. 죽을 사람도 살아요.
여러분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러분과 제가 엄청난 자리에 있습니다. 지금 내 주변에 고통과 절망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에게 '살리느냐? 죽이느냐?' 는 중대한 자리가 누구의 자리입니까? 우리 자리입니다. 왜? 벌써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벌써 인간은 심판을 받았어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당연한 심판! 뭡니까? '정령 죽으리라!' 사형선고 받았어요. 사형선고 받았는데 이 '사형의 왕! 사망의 왕!' 사단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여기서 여러분과 제가 반드시 증명되어야 될 것이 있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내 자신과 여러분 자신이 이 사실이 안 되면 증인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2절 말씀에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성경을 가르치는데 그 내용이 뭐냐하면, "(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뭐라 했습니까? 증명입니다. 이 언약! 예언된 말씀이 또 구체적으로 이 말씀이 각 사람에게 이것이 증명이 되어야 돼요. 반드시! 그러니 말씀은 반드시 증명될 말씀이지... 그러니까 이것을 쉽게 말해서 말씀이 성취될 말씀이지, 그냥 오는 말씀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반드시 증명되어야 하고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무엇으로? 그리스도로! 여러분 개개인에게 증명되어야 된다. 이것이 되어야 그 다음에 뭡니까? 여러분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가 있습니다. 병든 자를 낮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구체적으로 증거 하는 증인이 바로 될 수 있습니다. 참 귀중한 역사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많은 기적들이 나와요. 많은 기적들이 나오고 많은 역사들이 나옵니다. 많은 역사들이 나오는데 그 역사가 언제 나오느냐? 하나님의 방향과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뜻이 맞아 떨어져야 됩니다.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게 기적 주옵소서. 그런다고 기적이 나오고 역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향과 맞을 때에 그 말씀이 여러분과 제게 '사실이다!' 증명해줍니다. 그러니 기적과 역사가 증명 속에서 이게 되어지는 겁니다. 이때마다 다 한번 받아합시다. "믿음이 회복된다." 이때마다 믿음이 더 확고해져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더라 구요. 하나님의 계획은 어디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왜 입니까?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 메시아 보내시겠다. 그것이 뭐냐하면, '세상 구원하시겠다.' 하나님 계획이요, 하나님 목표거든요. 거기에 보내겠다.
그런데 이 보내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실제적으로 이 사람들을 증인을 삼아야 되는데 뭐냐? 개개인에게 문제가 증명될 수 있는 증거거리 줍니다. 그것이 첫번 판에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문제! 뒤에서는 애굽 백성이 따라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뭐라 그랬습니까? 가만히 서서 하나님 바라보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 막대기를, 지팡이를 내어 밀 때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 장소를 건너가면서 무엇을 확인하느냐? 유월절 피를 확인합니다. 반드시 내게 생명주신 하나님께서 생명주신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을 세워서 하나님의 계획에 맞도록 세워놓고 거기다가 맡게되는 자리에서 계속해서 뭐냐? 증거주십니다. 증명해 주십니다. 약속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뭐냐? 증명이라는 그 순간에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기적들이...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깨달아야 되느냐 하면요. '맨 날 뭔가 기도해도 안 되더라. 노력해서 안 되더라. 열심히 해도 안 되더라.' 그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과 생각이 악해서 그래요. 그 마음과 생각이 악하다는 말이 성경에 무슨 말이냐? 그게 나는 처음에는 막 늘 음란한 생각하고, 늘 못된 생각하고, 거짓말하고, 사기 칠 생각만 하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마음으로 생각이 악하다는 그 배경이 창세기 6장에 보면, 그게 구체적으로 나오죠. 창세기 6장에 보면 첫 번째 6장 1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받아합시다.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기에 나쁘다, 악하다. 이건 못됐다! 그러는 배경이 뭐냐하면 자기 중심입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데로 살더라.'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러면서 4절에 보면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자기들 좋아하는 데로 사는 중심인물들이 나옵니다. 네피림입니다. 그 배경이 누구냐? 악한 사단의 세력이다. 그 배경입니다. 네피림의 배경이... 그 다음에 이때에 이렇게 되고 난 후에 바로 이어서 6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랬습니다. 여기 악하다는 말이 뭐냐하면, 자기 중심이에요. 하나님의 계획과는 아랑곳이 없습니다. 자기들 좋아하는 데로 살아가는, 그리고 자기들 좋아하는 계획을 세워서 자기들 중심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사단의 속임수거든요. 한번 받아합시다. "나라는 존재는 허상이다." 사실 여러분과 저의 존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뭔가 갖고 있으면 갖고 있을수록 더 허망해 져요. 여기에 누가? 하나님의 생명이 임해야, 여기서 뭐가 됩니까? 참 회복이 됩니다. 그러니 지난날에 내가 고생했던 것, 지난날에 실패했던 것, 지난날에 내가 고통 당했던 것, 지난날에 내가 어려웠던 모든 부분들! 이런 부분들이 생명이 없으면 참 허망하게 끝납니다. 일장 주몽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생명이 들어가는 순간에 다 살아납니다. 모든 경험도 지혜로 인도 받고, 모든 실패도 새로운 도약으로 인도 받고 전부 다 살아납니다. 그 배경이 뭐냐?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없으면요. 지난날에 여러분 백 번, 천 번 좋은 경험, 만 번, 천 번해도 소용없습니다. 다 허상입니다.
왜,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것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이루어졌을 때에 다 살아나게 되느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럴 때에 여러분도 저도 하나님의 생명이 오는 순간에 뭐가 생각됩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에 모시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주에 말씀했습니다 만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냥 오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내가 죽고 누가 삽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주관자가 되어 버리면 이건 해결 다 된 겁니다. 저절로 오는 겁니다. 얼마나 내가 예수 생명! 확인되느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대로 됩니다. 얼마나 내가 확인이 안 되느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대로 나옵니다. 나라는 존재는 봄에 새싹처럼 파릇파릇 돋아나옵니다. 죽은 것 같지만 아닙니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게 그대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계획이 도대체 뭐고, 내 계획이 뭐냐? 이런 생각을 좀 하게 되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계획은 영의 일이고 나의 계획은 누구의 일입니까? 땅의 일입니다. 주로 '육' 에 일이요. 그러면 육신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뭔 이야기냐 하면요. 육신을 가지고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속여집니다. 육신가지고 속아요. 그러면서 생각이 영적인 문제는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항상 거짓말을 정말로 믿고 살아가고 육체적인 일을 요만큼만 문제 있어도 확실히 믿어버립니다. 신문 한쪽에 났다 그러면 확실히 믿어 버립니다.
성경에 백 번, 천 번 말해도 안 믿던 사람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누구의 뜻이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 그랬는데... '신문에 뭐 조금만 경제가 이상하다!' 그래버리면요. 그걸 확실히 믿고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은 오만상을 찡그려 가지고 너지리하게 교회에 들어옵니다. '주여, 지난번에 신문 보니 경제가 어렵다는데...' 성경이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 말씀 안 믿어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뭡니까? 내 생각, 내 마음이 되면서 뭐가 나오느냐?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따라 나와 묶여버립니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와 근심이 들어가 버리면 그때부터 모든 생각이 착각이 되어요. 뭔가 정확하게 판단이 안 나옵니다. 여기서 전부 실패해 버립니다. 믿음 회복해야 합니다. 진짜입니다.
제가 제일 근심을 많이... 교회를 위해서 근심을 많이 하는 분들이 누구냐 하면, 제일 첫 번째는 목사고 두 번째는 장로님이고 세 번째는 우리 안수 집사님들, 권사님들 그 다음에 내려가면서 묵은디이를 비롯해서 그게 안 나옵니까! 이 사람들이 주로 걱정을 어디다가 걱정을 하느냐? '아, 큰일났네 헌금 나오는 것 보니까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겠나!' 자연적으로 이리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우리 재정부 실에, 재정부 실에는 헌금 수금하는 그 허락된 사람들 외에는 들어가지 말라 그러는 것도 전부터 광고를 했는데 쉴 때가 없으니까! 뭐, 안수 집사님들이 친구들 있으니까 올라가시는가 봐요. 올라가지 마세요. 가면 걱정거리만 생겨서 안 돼요. 왜? 얼른 육체적으로, 육신 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요. 교회가 이래서 되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지금까지 교회가 안 된 적이 있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할 겁니다. 왜? '하나님은 죽었다!' 그러면 안 돼요. '하나님이 살아 계셨다!' 여러분과 제게 말씀이 사실이라는 뭘 줍니까? 개개인에게 증명해 줄 겁니다. 확실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안되면요, 믿음이 회복이 안 되어요. 그래서 여러분 가나안 땅에 보내 놓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가라 하고서는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맞다는 것을 그 말씀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면서 뭐가 나오느냐? 계속 광야 길에 쓴 물도 단물로 바꾸어 버리고, 밥 없다고 할 때에 뭘 내려 주었어요? 만나를 내려주고, 고기 먹고싶다 그러면 메추라기 다 몰아가지고 한꺼번에 막 이에 끼여 가지고 이빨을 소지할 여가도 없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개개인에게 뭘 주어요? 증명해 주었습니다. 증명해 주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과 제가 뭐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었다. 그건 뭡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계획입니다. 영혼구원입니다. 그 영혼구원에 가장 시급한 뭐가 가장 기본적인 생명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셨다. '맞다, 그 분이 나에게 그리스도다!' 증명되었다. 십자가 역사입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 붙들고 내가 흑암 권세에 매여 있다가, 질병에 매여 있다가, 불안과 공포에 매여 있다가 어느 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동시에 그 분이 내게,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여기 생명의 원천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입니다.
그때부터 여러분도 저도 뭡니까? '아, 세계복음화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이 다른 게 아닙니다. '세계복음화다!' 이것이 시간이 갈수록 가슴속에... '뭐, 세계복음화 한다고 뛰어다니면서 온 세계로 나가지도 못하는 것이 무슨 세계복음화 하냐?' 이런 사람이 많아요. 이것이 생각과 마음이 그대로 들어갑니다. 그때부터 뭐가 되느냐? '내가 세우고, 내 마음대로 못 하고, 내가 못하는 구나! 하나님이 하시는 구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이게 나옵니다.
여러분 참 감사한 것은 바보 머저리 같다 그래도 줄만 잘 서면됩니다. 맨 날 실패하고, 맨 날 안 되어도 줄만 잘 서면 되게 되어 있어요. 보세요, 나는 운동을 원래 못해요. 그런데 내가 들어가는 팀이, 아주 다른 사람은 참 잘해요. 나는 못해도, 나는 맨 날 헛발질만 해도 다른 사람이 잘 해 가지고 이겼어요. 그러면 나와 상관없이 뭡니까? 이기는 팀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됩니다. 암만 노력하고, 백 번 뒹굴고, 무릎 다 까지고 해도 지는 팀에 들어가면 백 번, 천 번집니다. 실컷 고생하고 집니다.
여러분과 제가 어쩌다가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은혜로 반드시 승리할 팀에 들어왔습니다. 믿습니까! 절대로 망할 수 없다니까요! 그래서 이것을 시간가면 시간 갈수록 머저리 같이 살았는데도 '승리하게 되더라! 증명하여 주마!' 말씀성취입니다. 이게 충만에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방향에 조금만 맞아버리니까, 하나님이 증명시켜주시고 증명해 줍니다. 말씀이 성취되면 이게 구체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건축한다!' 아까도 조금 전에 말씀했습니다 만은, '세계복음화 한다!' 이 배경으로 우리가 건축하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이 교회 건축에 대해서 굉장히 제가 첫 번부터 우리 장로님들 앞에서 말씀할 때에 그렇게 제가 앞에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도 교회 건축에 혼자 고생을 많이 해서 여러분 앉아있는 이 장소가 아무것도 없는 자리 아니었습니까! 여기서 개척하는 당시에서 개척하는 과정에서 그냥, 그냥 했어요. 그러니까 전부 뭐, 재정을 비롯해서 전부 제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너무 힘들더라 구요. 그래서 '교회 건축!' 그러면 너무 힘들어서, 내 마음이 어떠냐하면, 하나님이 직접 명령을 하셔서 '교회 한번 다시 건축해라!' 이런 소리를 안 하시는 동안에는 내가 안 하련다. 그런 던 중에 교회 건축의 계획들이 세워지고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습니다.
어제께 우리 교회를 건축하는데 부지 선정이 벌써 4개월 전부터 집중적으로... 모두 이제 작업을 해 왔습니다 만은, 이것이 뭐, 여러 가지 이유로 계속 이 잘 안되더라 구요. 그런 중에 부지 선정이 완전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계약을 하게되는 단계에 계약을 막상 하고 장로님들이 들어오셔서 우리 집사님들하고 오셔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 중에서, 그때 마음속에 뭔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아버지 하나님이 '또, 나를 교회 건축하는 일에 사용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이 기도가 나옵니다. '나를 사용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돈이 있다, 없다.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사용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 건축에 앞으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오고 오는 세대에 세계복음화에 쓰여질 수 있도록, 그런 일에 교회를 건축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솔직히 좀 뭔가 이렇게 마음에 부담도 있었고, 이렇게 있었습니다 만은, 딱 '건축한다!' 그러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정말 우리 장로님들하고 건축위원들 들어오는데 한번 안아주고 싶더라 만은, 원래는 그렇게 못하잖아요. 악수만 하고 '참, 축하합니다.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이러고 끝냈습니다. 여러분 내 일이 여러분 일입니다. 하나님과 방향 맞추었다. 하나님이 증거 해 주실 것입니다. 경제와, 행정과, 정치와,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 모든 문제! 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방향 맞추었다. 누가 한다 구요? 하나님이 하십니다. 거기에 따라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어서, 이것이 하나님 방향에 '사실이냐? 아니냐?' 확인만 해 나가면 돼요.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오는 일이 뭐냐하면, 여러분 이제 '교회 건축해야 되겠다!'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게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마지막 내 인생에 한번입니다. 여러분 다시 뭐 또 '교회 건축한다!' 말씀드렸듯이 50년 후에 거의 다 갈 사람입니다. 그전에 다시 뭐 '건축한다!' 잘 안 될 겁니다. 하고싶어도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마지막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시간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드릴 것이냐? 여러분들 혹시 들으면서, 결국 저 말 하려고 서론이 길었구나! 예, 구체적으로 들어 보세요.
제가 이렇게 쭉 들어보니까! 구체적으로 이제 우리 보고할 때 나오겠습니다 만은, 프로젝트를 통해서... 1,370평이라 그래요. 1,370평 나오는데, 그것이 1,370평인데 거기다가 몇 평을 짓느냐 하면, 건축이 1,000평입니다. 그러면 지금 본당의 인원이 2,000석을 만듭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지금 오는 사실적인 인원이, 모이는 분들이 1,000명입니다. 그 뒤에 뭐 올라갔다, 내려갔다. 제가 한 1,300까지 같다 그랬는데, 제가 뭐 건강 문제도 있고 이러는 동안에 뭐 한 200-300명이 달아나고 또 그 다음에 회복되고 이래가지고 하여튼 1,000명에서 뭐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약 1,000명! 그런데 천명만 더 모이면 본당이 차버려요. 거기 가서도 어떤 면에서 얼마 안 있다가 또 넓히자! 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나 한가지 제가 느끼는 것은, 1부 2,000명, 2부 2,000명, 3부 2,000명하면 얼마까지? 6,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어요. 할렐루야! 그렇다 그러면, 이 지금 현재 1,000명의 우리 교인들 통해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그러는데, 그러면 내가 어떻게 헌신해야 될 것이냐? 지금 현재 아무것도 없는데서, 1억을 내라 이러면요.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적인 것을 해야 되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성전 건축할 때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 즐겁게 드리나이다.' 그렇게 말씀을 했는데, 사실적으로 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뭘 여러분 좀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면요. 1,400평입니다. 연건평 3층까지 1,000평을 만드는데, 그러면 1,000평 건축을 할 때에 평당 건축비가 얼마가 드느냐? 땅값하고 건축비하고 평당 500만원입니다. 그러면 한 평에 얼마나 사람들이 앉느냐? 5명이 앉아요. 한 평에! 그러면 최소한 여러분, 내가 그 동안 신앙생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앉을 땅은 마련해야 안 되겠느냐? 나와 내 가족들이, 그 다음에 나를 통해서 구원받고 들어올 사람이 많은데 하나님 내게 은혜 주신 데로 이것도 내가 마련해야 안 되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많이 데려올 것 생각하고 세계복음화 하도록, 그러면 2평도 좋고, 3평도 좋고 그 다음에 10평도 좋고, 100평도 좋습니다. 하나님 은혜 데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뭔 문제냐 하면, 하나 알아야 될 것이 여러분과 제가 한 평당 5명씩입니다. 그 다음에 한 평당 5명 더 모읍니다. 5명 더 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앉는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구원주실 백성들을, 나를 통해서 구원 주실 백성들이 앉을 장소를 만듭니다. 이 일을 주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되 내게 증명해 주옵소서. 여러분 이 방향이 맞았다! 기적이 나오는 겁니다. 방향이 맞았다!
그래서 제가 대략 당장 돈이 들어갈 것도 있고 이래서 지금 현재 보니까 계획대로는 2003년 12월 달에 완공이 되더라 구요. 그러면 3개년 계획을 세우고 그 3개년 계획 통해서 1년 안에 얼마 지불하고, 2년 안에 얼마 지불하고, 안 그러면 당장 6개월 안에 얼마 지불하고, 그 다음에는 3년 안에 얼마 지불하고, 아마 이런 연차적인 계획을 세워서 작정도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직접 내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어쨌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돈을 '낸다, 안 낸다.' 이것보다도 하나님이 나와 내 가족과 나를 통해서 살리실 생명이 바로 우리의 적은 현실 속에 두고두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서 대구를 살리고 세계를 살립니다. 그것에 주축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를 그래도 필요하다고 쓰신다! 감격해야 됩니다. 돈 있다고 쓰는 것 아닙니다. 건축 헌금을 해보면 뭘 느끼느냐 하면요. 돈 있다고 많이 안 냅니다. 그리고 돈 적다고 많이 안 내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 내는 것 아닙니다. 뭐가 되느냐? 믿음입니다. 믿음!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오는 겁니다.
기브온 거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섯 왕과 전쟁을 합니다. 엄청난 이 어려운 전쟁을 하게 돼요. 그런데 기브온 거민 들이 이게 뭡니까? 이방인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속이면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브온 거민 들이 그래도 우리가 어쨌든 하나님의 축복의 손에 속해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막 속이면서까지 기어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기브온 거민 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다섯 왕들이 엄청난 연합군으로 지금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이때에 하나님께서 아얄론 골짜기에 뭘 머물렀습니까? 해와 달을 머물게 했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어요.
여러분과 제가 쓸데없는, 지금까지 헛돈 쓰고 돌아다녔습니다. 쓸데없는데 빗 지고, 쓸데없는데 사기 치고, 쓸데없는데 걱정하고 교회에 하나님 앞에 헌금해야 되겠다는 일에 정말 여러분 밤잠 안 자면서 걱정해 봤습니까! 안 해 봤거든요. 그렇게 쓸데없이 일평생을 쓸데없이... 그래가지고 막 재산 다 잃어버리고 망할 바에는 하나님 앞에 헌금하고 망하는 것이 안 좋습니까! 쓸데없이 망했거든요. 이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었다! 기브온 거민, 이방에서 아무것도 쓸데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태양을 멈추었고 달을 멈추어 버렸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확실히 믿기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정말 세계복음화 해야 된다는 계획과 역사를 여러분 가슴에, 제 가슴에 두었다. 사실이라면 '교회 짓는다!' 이것은 따라오는 하나님의 역사이지. 이걸 우리가 뭐 '잘했다, 못했다.' 이런 배경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혹시 여기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아이고 나는 도망가야 되겠다.' 가십시오. 그러나 엄청난 후회가 나올 겁니다. 그때에 내가 어렵지만은 했다. 그 한 평을 내가 차지하고 앉았을 때에 여러분 감격하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감정적인 감격일수도 있습니다 만은, 거기에서 역사 하는 하나님의, 여러분 개개인에 하나님의 증명거리들이 말씀이 성취되는... 그래서 반드시 증명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래야 증인 될 것 아닙니까!
이 시대에 뭔가 송현교회 교인들에게 증명은 해 줘야 되는데 이게 어리하게 앉아 가지고 증명할 짓을 안 해! 그래도 이런 기회라도 증명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안 되겠느냐? 경제와 건강과 우리의 삶이 완전히 회복되는, 말씀이 성취되는, 증명이 반드시... 증명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방향 맞아서... 하나님의 방향에서 그래서 내 인생 정말 마지막 마무리하면서 '정말 축복된 인생이다!' 나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야, 어쩌면 내게 이 교회 지어 놓고도 얼마나 감격해서 울었다기보다도 그때는 빗 때문에 죽을 고생했다는 기억이 더 많이 남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증명해 주셨거든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 여러분 뭐 이렇게 모여 가지고 예배드린다! 여러분은 그저 보통이지만 이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 하나 감격하고 감사할 것뿐이거든요. 그런데 뭐 반 죽어가다가 이제는 그것도 또 한가지 쓰일 일이 있어 가지고 뭔가 살려서 또 이 교회 건축했다... 제자들이 사도행전 5장 마지막 절에 '두들겨 맡는 일에도 쓰여지는 것을 감사했다' 는 그 메시지가 참 늘 마음에, 가슴에 남아 있어요. 여러분 두들겨 맡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쓰임 받았다.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마지막에 주님의 손에, 참 새 생명 받는 일에 그래도 아직까지 나를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나와 내 후손들에게 뭡니까! 말씀이 사실이요. 진짜 이 세계복음화 하는 일에 실제적인 역사를 뭡니까? 증거 해 주실 것입니다. 증명시켜 주실 것입니다. 개개인에게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지속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이래라! 저래라!' 말할 것도 없어요.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이걸 딱 붙들고 기도하면서 여러분 가슴에 참 증명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붙잡고 다음주는 뭡니까? 기도하고 뭐 구체적으로 종이를 나눠주고 봉투를 나누어주고 기록할 것입니다.
기록할 때에 첫 번째 얼마를 기록하던지 먼저 그 기록하는 속에서 먼저 낼 것은 먼저 낼 것이라고 구분해도 좋고 그러면 '몇 년 안에 이걸 하겠습니다!' 적어도 그것도 3년 지나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 전에는 다 해야 되니까! 적어도 2년 동안은 생각하면 좋겠어요. 2년 반, 늦어도... 이래가지고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헌신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었다. 실제적으로 그때에 나오는 증명과 증거거리가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와져야 됩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