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이 글을 블러그에 계시하며 잠시
망설였던 것은 필자의 노고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해서다.
그저 인터넷에 떠돌아 댕기는 것이지 올려도 되나? 아니다. 저자의 노고가 얼마나 어리고 서린 글인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무단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러다 결국 인터넷에 올림은 그 글의 주옥같은 자료들 때문이다. 글쓰는 이로서 당연히 알아야 하고 바르게 써야할 우리 말에 대한 소중함이 담겨 있다. 보시는 분들도 부단 복사나 도용은 삼가해 주시고 그저 자신의 글과 말을 다듬데 사용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은이:천소영
출판사:창 해
봉사자:김영미
머리말
이 책은 1994년 "현암사"에서 펴낸 "부끄러운 아리랑"에 이은 필자의 세 번째 우리말 수
상집이다. (부끄러운 아리랑)이후 여러 잡지에 실렸던 글을 모아 이를 다시 편집하여 또 한
권의 책으로 내놓게 된다.
여기 수록된 글은 "제일제당 사외보","생활속의 이야기""격월간"에 13년 동안 연재해 온
"아름다운 우리말"이 중심이 되고, "세계일보"에 반 년 동안 연재해 온 "천소영의 우리말 산
책"이라는 주간 칼럼과 4년 동안(1994~1998)"월간조선")화보란에 연재해 온 "전설 따라 지명
따라"의 일부 내용이 추가되었다. "전설 따라 지명 따라"는 (한국의 전설기행)이라는 제목으
로 현장 사진을 곁들여 1997년 (한국문원)에서 펴낸 바 있다. 이 책은 그 이후에 나온 연재
물과 기존의 책 내용 가운데 지명 전설만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본 수상집에서는 앞서 펴낸 두 책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고유어의 어원을 더듬어 어사의
밑바닥에 깔린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정서, 나아가 의식 구조의 저변을 찾아보고자 했다. 이런
동기와 집필 의도는 오로지 우리말 사랑이라는 큰 주제 안에 수용된다.
세계화,국제화를 부르짖는 요즘, 한국인들은 자신의 언어 현실에 대해 미처 되돌아볼 여유
를 가지지 못한다. 영어 조기 교육, 나아가 영어 공용어 지정론이 설득력을 가질 만큼 영어
를 어떻게 하면 빨리 배워 이에 능통해지느냐에 온통 괌심이 쏠려 있다. 이른바 (우리말의
문맹시대)나 다름없는 이런 현실에서 지금 새삼스레 우리말 사랑을 외치는 것을 두고 어쩌
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서 우리말 사용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두말
할 나위 없이 한 사회의 정신 문화는 그 시대의 언어 현상에 그대로 반영된다. 우리가 일상
에서 사용하는 한국어 속에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얼이 배어 있기에 이를 결코 쉽사리 내팽
개칠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말부터 잘 구사해야 다른 외국어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
에 속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오늘의 언어
현실을 반성하고 다시금 우리말 애용을 강조해야 할 당위성을 느낀다.
이 글을 읽어 줄 독자들이 전문인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여 되도록 쉽고 재미있는 글을
쓰고자 노력하였다.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책)을 펴낸다는 게 필자의 의도이기는 하
나 재미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무리나 과장이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독자라면 이
런 점을 이해하고 행간의 의미를 살펴 주리라 믿는다.
하찮은 글을 아름다운 책으로 엮어 준 도서출판 (창해)의 전형배 대표에게 깊이 감사드리
며 교정을 비록한 마무리 작업 과정에서 애써 준 신영진, 안정희군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한
다. 독자 여러분들의 따끔한 충고를 기다리고 있다.
생활 속의 우리말
임신, 출산 용어 삼신 할머니는 노여움을 푸소서
"앉아서 천리 보고 서서 만리 보는 삼신 할머니, 섭섭한 일일랑 제발 무릎 밑에 접어 두
고 이 어린 것 치들고 받들어서 먹고 자고 놀고 오로지 남의 눈에 꽃이 되고 잎이 되게 하
소서. 입을 복과 먹을 복을 갖춰 주시고 짧은 명은 길게, 긴 명은 쟁반 위에 서리서리 얹어
주시고 명일랑은 동방삭을 닮고 복일랑은 석승을 닮게 점지하여 주소서."
어린 시절 아시 볼 때(동생을 맞을 때) 필자의 할머니께서는 방 윗목에 삼신메를 차려 놓
고 손바닥을 싹싹 소리 나게 비비면서 이처럼 "삼신풀이"라는 주문을 외우셨다. 삼신 할머
니는 예로부터 임신과 출산을 주재하는 신으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산모에게 해산 기미가
보일 즈음이면 모든 가정에서는 애오라지 이 삼신 할머니에게 매달린다. 정화수 한 그릇과
흰 쌀밥, 한 그릇 또는 세 그릇의 미역국을 올린 삼신상이 차려진다. 이 때 산모가 며느리일
때는 안방 윗목에, 해산을 위해 친정에 온 딸일 경우에는 대개 방문 가에 차리는 것이 상례
였다.
삼신상은 출산일뿐만 아니라 해산 후 첫 이렛날과 두 이렛날, 삼칠일이라 부르는 세 이렛
날에서 일곱 이렛날까지 차려지고, 그때마다 이와 유사한 주문이 외워진다. 이 기원은 아이
가 자라 일곱 살이 되어 칠성신에게 인계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런 정성은 아이의 성장은
물론 산모의 잉태와 출산, 그리고 그 이후 젖이 모자라 "젖 비는"일에서 "개암든다"는 산후
후더침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오로지 삼신 할머니의 손에 달렸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
다.
잉태를 고유어로 "몸가지다" 또는 "아이 선다"고 한다. 아기를 가진 산모는 "입덧"이라는
첫 시련기를 거치면 배가 점점 불러지면서 둥덩산 같은 "배재기"에 이르게 되고, 이때쯤이
면 아기가 맷속에서 놀기 시작하는 자위뜸을 감지하게 된다. 이런 과정 모두가 어느 하나
힘들지 않을까마는 아무래도 그 절정은 출산 순간이 될 것이다. 막달에 이르러 아이가 "비
릊는" 과정에서 문잡아 산문이 열리고, 이윽고 핏덩이의 귀가 빠지는 순간이야말로 뼈마디
가 녹아 내리는 고통의 정점이라고 한다. 세상에 나온 새 아기의 첫 울음, 이른바 고고성은
그래서 환상의 소리라 할 만하다. 아이에게는 최초의 언어이자 모체에서부터 분리된 독립
선언일 것이며, 산모에게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안간힘이며 새 생명 탄생의 선언적
환호가 될 것이다.
삼신이라는 말은 "살다"에서 유래하여 사람이나 삷, 또는 숨과도 말뿌리를 같이한다. 고
고성은 바로 인간의 호흡기 개통식이므로 그때부터 시작된 숨쉬기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고유어 "삼신"을 한자어 삼신이나 산신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삼신은 태고적 우리나라
를 세웠다는 세 신, 곧 환인,환웅,환검(단군)을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아
들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와 곰처녀와 관계를 맺어 단군을 낳았다는, 그 단군신화를 기조로
하여 삼신 할머니를 한민족 생성의 국조 신화와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특히 "삼신의 손"이라는 말에서 한민족이 세 신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
다. 이런 의식은 후일 아이를 낳는다는 모성적 의미가 확대되고, 무속신화와 민속신앙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삼신 할머니가 생명 창조를 점지하는 신령으로 변신하여 추앙 받게 되었
다는 이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현대의 젊은 엄마들은 이런 삼신 할머니의 존재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하다.
입덧이 나면 남편이나 부모들을 채근하고,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언제든지 병원을 찾아가
의사에게 몸을 맡긴다. 젖이 모자라도 젖비는 일이 없어지고, 출산 날짜는 물론 심하면 신의
영역이라는 아들, 딸의 성별까지 선택하여 낳을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고유 권한을 빼앗
긴 삼신 할머니가 노여워할 수밖에.
현대인들은 금줄에 무엇을 다는지도 잘 모른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출산 풍습들, 이를
테면 산모는 상주나 상가에 다녀온 사람과 대면하지 말아야 하며, 집안에 빨래를 널지 않고,
질그릇을 다루지 않으며, 고기를 굽거나 먹지도 않는다는 따위의 금기 사항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진 만큼 이런 풍습은 몰라도 좋고 또 지키지 않아도 괜
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하더라도 태아의 성감별이나 아기를 지우는 따위의 삼신 할머니의 고유
영역만은 제발 침범하지 말아야겠다. 최근 산아 제한법마저 철폐되고 태아의 성감별을 엄격
히 규제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남아선호사상이나 성을 쾌락의 도구로 삼는
한 이런 조처만으로 삼신 할머니의 노여움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생명의 신비, 그 신의 영
역만은 더 이상 넘보지 말았으면 한다. 삼신 할머니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요람기의 용어 어화둥둥 금자둥아, 얼싸둥둥 은자둥아
왕후장상이라도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다. "태어난다"는 말 자체가 모
체의 "태"에서 세상으로 나왔다는 뜻이다. 태어난 날, 곧 생일을 달리 일컬어 "귀 빠진 날"
이라 말하기도 한다. 모체에서 분리될 때 태아의 귀가 보이면 출산이 완료된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정확한 출생 시간은 바로 귀가 빠진 그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귀 빠진 날에 대해 "코 생긴 날"을 생일로 삼자는 의견도 있다. 인간이 생겨난 날, 곧 어
머니의 자궁 속에서 최초로 형체가 만들어진 때(잉태)를 지칭한 것인데, 흔히 말하는 비조라
는 말은 여기서 비록된 것이다. 또한 생일을 "고고성일"이라고도 하는데 말하자면 고고지성
을 울린 날이라는 뜻이다. 고고성은 앞서 말한 대로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서 "응애"하고 우
는 첫 울음을 말하는데, 이는 자신의 출현을 알리는 최초의 인간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배내짓"이라 하는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위를 보인다. 이를테면 자
면서도 방긋 웃는다거나 눈이나 코, 입을 찡긋거리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배내"란
말은 "배 안에 있을 때부터"라는 뜻이다. 예컨대 태어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누는
똥을 배내똥이라 한다. 이 밖에도 배냇병신, 배냇니, 배냇머리, 배내옷 등은 여기서 파생된
말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태어나 처음 싸는 똥뿐만 아니라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누
는 똥도 역시 배내똥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용어가 같을 뿐 아니라 그것의 성분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니 세상만사가 시작과 끝, 곧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이 과연 옳은가 보
다.
갓난쟁이가 입술을 털며 투투거리는"투레질"도 일종의 배냇짓에 속한다. 투레질뿐 아니라
입으로 풀무질처럼 바람을 불어대는 "풀무질"이나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죄암질(쥐엄
질)",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싸대는 "쉬야질", 잠들기 전이나 깬 후에 부리는 "잠투세"등도
역시 배냇짓의 일종이다.
성장하면서 아이는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리운다. "얼뚱아기"란 말도 그런 것인데, 둥둥
얼러 주고 싶은 재롱스런 아기를 두고 이름이다. 아무리 밉둥을 피워도 세상의 모든 아기는
부모들에게 "이쁘둥이"일 수 밖에 없다.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벌리고 새근새근 나비잠을
자는 모습이며, 팔다리를 휘저으며 "당싯거릴"때도 기쁘기 한량없다. 뿐인가, 문짓문짓 배를
바닥에 문지르고 기어가며 "배밀")하는 모습도, "아우타는 짓"이라 하여 먹을 것만 찾는 "밥
빼기"를 할 때도, 공연히 트집을 잡아 "아망그릴"때도 그 모든 행위가 부모들에게는 오로지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런 자식을 두고 부모들은 여러 방법으로 얼러준다. "가동질"
이 그렇고 "부라질"이나 "시장질"이 모두 아이를 얼러 주는 방식을 이르는 말이다. 아이의
겨드랑이를 치켜들고 오르내리면 아이는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기를 반복하는데, 이런 동
작을 가동질이라 한다. 부라질은 아이를 곧추 세워 좌우로 흔들며 두 다리를 번갈아 오르내
리게 하는 동작이며, 두 손을 잡고 앞뒤로 밀고 당기는 동작을 시장질이라 한다. 이때 "부라
부라" 또는 "시장시장"이란 말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생겼다.
아이가 도담도담 잘 자라 옴포동이처럼 토실토실 살이 오르면 부모는 더욱 자식 키우는
재미를 느낀다. 새순처럼 너무 연약하기에 더욱 귀엽고 앙징스럽고,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거
기에 알맞은 말을 만들어 사용한다. 젖먹이가 일어나서 처음 떼놓는 걸음마를 "밟다"라 하
고, 뒤뚱뒤뚱 어설픈 걸음발이 앙증스러워 "조작거리다", "자칫거리다" 또는 "아칫거리다"라
는 표현을 쓴다.
자식이 똘똘이가 아니여도 좋고 지독한 똥싸개라도 아무 상관없다. 세상 부모들에게 모든
자식은 공히 "어화둥둥 금자둥이며, 얼싸둥둥 은자둥이"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이들도
손뼉을 짝짝 맞추는 "짝짜꿍"에서 도리도리"도리질"이나 곤지곤지 잼잼에 이르기까지 갖가
지 "이쁜짓"을 연출한다. 부모들도 이들을 손 위에 곤두곤두 "곤두세우기"나 따로따로 혼자
"따로 서기"를 시키며 즐거워 마지않는다. 그러나 아기가 언제나 귀여운 것만은 아닌가 보
다. 때로 "곽쥐"나 "먼지털음"을 할 때도 있다. 곽쥐란 아이가 쭐래둥이여서 간혹 칭얼거리
며 보챌 때 이를 위협하여 달래는 방식을 이름이요, 어쩔 수 없이 한 대 쥐어박는 경우를
"먼지털음"이라 한다. 어린 것에게 어디 때릴데가 있겠는가. 엄포용으로 기껏해야 옷에 묻은
먼지나 털어준다는 뜻으로 이런 예쁜 말을 지어냈으니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자식이 귀할수록 매는 아끼지 말라는 충고도 있다. 너무 오냐오냐하고 키우면 응석 받이
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될 수도 있다. "지지다"하고 소리치면서 만져서는 안 될 것은 못
만지게 하고, "애비다"라며 해서는 안 될 일은 못하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크는 과정에서
으레 치러야 할 역질 따위를 "제구실"이라 이른 것을 보면 옛 어버이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현명했던 것 같다. 어렵고 힘들지만 이런 과정을 이겨내야만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때로는 따끔한 매가 진정한 의미의 사랑 표현일 수 있다는 얘기
다.
유아의 언어 습득 말문은 저절로 트인다
보통 아이들은 난 지 1~2년이 지나면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옹알이부터 시작된 언어 학
습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제법 어른의 흉내를 내게 된다. 초기에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몇몇
단어를 반복하는데 그치지만, 이런 시행 착오기를 거치면 어느 날 갑자기 제대로 된 문장을
봇물 터지듯 쏟아낸다.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미숙하지만 아이들은 나름대로 자기를 표
현하려 애쓴다. 이런 시기를 가리켜 옛 어른들은 "말문이 트인다"고 했다.
말문만 트이는 게 아니라 글문도 트인다고 말한다. 글을 능숙하게 읽을 줄 알고 또 자유
자재로 지을 수 있는 단계를 일컬어 문리(문리)가 트인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트이다"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트이다는 "트다"의 피동형으로 "싹이 트다. 동이 트다. 움이
트다"에서 보듯 어떤 결과가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저절로, 또 필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을
이름이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그것도 우연히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 그런 결과를 가져올
어떤 싹(원인)이 내재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경우이다.
어린이는 세상에 태어나 두세 살이 되면 자연스럽게 말문이 열리고, 그 이후 글방에 다니
면서 열심히 글을 읽으면 어느 순간 저절로 글문(문리)이 열려 자연스럽게 글을 지을 수 있
게 된다. 이런 필연적 현상을 두고 "트인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어린이가 말을 배우는 과
정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헤엄치기나 자전거 타기처럼 오로지 학습에 따른 결과라고만 믿어
왔다. 다시 말하면 말하기에 관한 한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여 언어 현상을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숱한 시행 착오나 반복 훈련을 거쳐 비로소 자유롭게 말을 하게 된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최근에 와서 뒤바뀌게 되었다. "트인다"는 표현을 고려한다면 어린이
에게는 말을 할 수 있는 어떤 싹, 즉 유전인자가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트인다"가 본래 내재했던 인자가 저절로 드러나는 현상이라면 인간은 본래 언어 능력을 가
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언어, 특히 생후 최초로 습득하는 모어에 관한 한 "배운다"
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물고기는 태어나면서부터 헤엄을 칠 수 있고, 또 새는 알에서 깨어나면서부터 하늘을 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 날 수는 없으니 새가 날 수 았고 물고기가
헤엄칠 수 있는 이유는 후천적 학습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선천적인 자질이기 때문이
다. 언어 습득도 이와 같으니 말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인간의 선천적인 자질에 속한다. 현대
언어학에서 말하는 생득설이니 합리주의 이론이니 하는 것도 이를 두고 이름이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면서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고려해보면
이 생득설이 언어 습득에서 얼마나 합리적인 이론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 나라 학생들은 가
장 지능이 발달한 시기, 곧 중학교 때부터 영어룰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까지 약 10여 년을
지속한다. 그것도 무질서하게 배우는 게 아니라 가장 체계적인 방법으로, 또 좋은 환경에서
수학하게 되므로 그 정도면 영어 하나는 충분히 구사할 법도 한데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
다.
어린이의 모어 학습의 경우는 어떠한가? 지능 계발도 덜 된 시기에, 그나마 가르치는 사
람이 반드시 우수하지도 않으며 가르치는 내용도 체계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여건하에
서도 모든 어린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수준의 모어를 구사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어가 일반적인 지적 능력과 경험만으로 습득되
는 것이라면 어린이의 지능 지수나 소질, 환경 등의 차이에 따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
열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어린이에게는 환경적 여건이나 일반적 지능에
제한을 받지 않는 어떤 천부적인 언어 학습 능력, 또는 언어 구조에 대한 해석 능력이 있다
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는 언어 구조에 대한 선험적 지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마치 건축 설계의 청사진과도 같은 그것의 모습을 우리가 알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
다. 그 청사진의 참모습을 밝히는 일이 언어학의 궁극적 목표가 되겠는데, 만약 그것이 밝혀
진다면 언어학의 분야뿐 아니라 인간 정신의 해명에도 크게 공헌하리라 믿는다.
언어 학습 과정에서 유난히 말을 빨리 배우는 어린이가 있다. 이럴 때 부모는 똑똑한 자
식이 태어났다고 좋아들 하지만 사실 일찍 말문이 트인다 하여 꼭 지능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천재 아인슈타인은 여섯 살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
들이 왜 그렇게 늦게 말을 배웠느냐고 묻자 그는 남들이 말을 배울 때 자신은 상대성 원리
를 구상했노라 했다. 말하자면 그 나이에 아인슈타인은 말을 못 한 게 아니라 말을 안 한
것이다. 말은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문이 트여서 행하게 되는 것이니 아인슈타인
은 단지 시간적으로 말문이 늦게 트인 경우에 불과하다고 할까.
옛날 우리 조상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아 길렀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왜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나았냐고 물으면 사람은 생기는 족족 저 먹을 것을 가지고 나온다고 답하곤 했다. 태
어날 때부터 저마다 갖고 나오는 그것, 그 재산 목록 가운데 가장 귀한 보물이 바로 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한다.
부모 호칭어
엄마, 아빠에서 "어이 어이"까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무엇일까? 생전 처음 입 밖으로 내뱉는
이 최초의 말이 죽으면서도 남기는 인류 최후의 언어가 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의문에 대해 희랍의 사가 헤로도투스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옛날 이집트의 한 왕이 새로 태어나는 자신의 아이를 대상으로 아이가 태어나서 맨 처음
으로 무슨 말을 내뱉는가를 관찰하게 했다. 전혀 언어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이 아이가 스
스로 지어내서 하는 말이 인류 최초의 언어, 곧 조어일 것으로 가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베코스"라는 제일성을 듣게 되었고, 이 말이 소아시아의 한 지방 언어인 프리지안 어
(phrysian)로서 빵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그저 흥미있는 일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언어가 다름 아닌 빵이
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서양인의 구호가 생각난다. 이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양이나 한국인에게는 "밥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에 해당되는 말이다.
빵이나 밥은 먹을 것을 가리키고, 먹을 것을 요구하는 행위는 모든 생물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그런데 이 본능적 욕구, 즉 먹을 것을 요구하는 외침이 친족 호칭어의 기본인 부
모 호칭어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더욱이 이런 현상이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언어에 공통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한국의 아이들도 태어나면서 "맘마, 밥바"를 외치면서 부모를 찾고 먹을 것을 요구한다.
맘마, 밥바에서 첫소리 자음 "ㅁ" 과 "ㅂ"이 떨어져 나가면 "엄(암)마, 압바(아빠)"가 되고,
이것이 바로 부모를 부르는 말의 기원어가 된다. 부모 호칭에서도 어머니를 칭하는 말의 첫
음이 "ㅁ(m음소)"이며, 아버지를 칭하는 말의 첫음이 "ㅂ(f, v)"임도 역시 세계 공통의 현상
이다. 우리말의 어미, 아비, 어머니, 아버지 등이 모두 부모 호칭의 기원형인 "엄" 이나 "압"
에서 분화, 파생된 어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 할비, 할미는 이 기원형에 크다는 뜻의 "한"이 접두하여 발음하기 쉽게
"할"로 바뀐 것이다. TV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의 세자 양녕대군이 할아버지인 태조
를 향해 "할바마마"라고 무르고 있음을 본다. 오빠 및 올케라는 호칭도 아버지의 기원형
"압"에서 분화된 파생어이다. "오라비"는 아비에 "올"이 접두한 어형이고, 올케도 "오라비겨
집"이 줄어든 말이다. "올"은 올벼, 올감자 등의 예에서 보듯 어려서 아직 익지 않은 과일을
지칭하므로 올아비 역시 어린 아버지란 뜻이다.
자기보다 항렬이 낮은 아우라는 호칭은 본래 "아시"에서 "ㅅ"이 탈락한 형태로 지금도 동
생을 낳을 때 경상도에서는 "아시본다"는 말을 쓴다. 아시는 작다, 어리다는 뜻인데, "아시
아비"가 줄어 아재비로, "아시어미"가 줄어 아재미 또는 아주머니라는 파생어를 만든다. 말
하자면 부모 항렬이긴 하나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저씨나 아주머니
의 어원을 유별나게 보려는 사람도 있다. 곧 아저씨는 "아기의 씨"를 가진 남자이고,아주머
니는 "아기의 주머니"를 가진 여자라는 것이다. 이는 우연히 어형이 유사한 것으로 그저 말
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부부를 지칭하는 지아비, 지어미 역시 부모칭의 압, 엄에서 짓는다(작)라 할 때의 "짓"이
접두한 말이다. 농경사회에서 부부를 생산자로 여겨 그렇게 부른 것이다. 말 그래도 부부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집을 짓고,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자식을 짓는(자식 농사
란 말이 있다)일에 종사하는, "짓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후레자식"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흔히 아비 없이 자란 아들을 그렇게 말하는
데, 이는 "홀어미 자식"을 이르는 말로 지아비가 없다 보니 제대로 자식을 짓지 못하여(교육
을 시키지 못하여) 버르장머리없는 자식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말의 친족 호칭어도 여느 어사처럼 극심하게 한자저의 침투를 입었다. 친근한 고유어
를 버리고 한자어를 쓰게 된 것은 맹목적인 한자 숭상의 사대풍조와 함께 한자어가 가지는
편리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서는 외숙모를 가리켜 "어미오라비겨집"이라 하
고, 이모부를 가리켜 "어미겨집동생의 남진"이라는 긴 이름으로 적고 있다. 이처럼 우리말이
촌수에 비례하여 길어지는 단점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가까운 피붙이의 호칭이 이보다 더
정겨울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부모칭 외의 아들, 딸, 언니, 누이, 며느리 등도 이에 해당하
한자어가 있기는 하나 고유어의 당당한 기세에 눌려 비집고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우
리말이 지닌 그 피붙이(혈연)와도 같은 친근감을 당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위기를 맞았을 때 서양
인들은 "오 마이 갓!" 하며 하느님을 찾지만 우리는 "엄마야!" 하며 부지불식간에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나, 어마나, 에그머니나, 오매" 등도 모두 같은 유형이다. 통상 부모가 돌아가
셨을 때 "어이 어이"하면서 슬프게 곡을 하는데, 이때 "어이"는 단순히 울음의 의성어가 아
니라 어버이를 부르는 말이다. 어떤 이는 "어이"가 부모 가운데서도 특히 어머니를 가리키
므로 "어이 어이"하는 곡성은 모태회귀 본능의 발로라 주장하기도 한다.
어떻든 부모칭은 태어나 맨 처음 배우는 말인 동시에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되
뇌는 삶의 최종 언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부모칭이 먹을 것을 찾는 본능적 의사 표시에서
기원했다는 점에서 "엄마, 아빠는 우리의 밥이다."라는 말도 가능할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의
이런 노골적 표현이 일견 고약스럽기는 하지만, 부모들은 어차피 다음 세대를 위한 밑거름
이 되어야 하기에 그리 잘못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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