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 우리 동네 방공호는 어디?
10년 전 도쿄에서 NHK 뉴스를 보면서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파트 이음매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더니 세상이 '구르릉' 하고 흔들렸다. 등에 식은 땀이 배었다. '이게 지진이구나. 더 큰 게 올지 몰라.' 3~4초 동안 세상이 정지된 듯했다.
뉴스를 진행하던 TV 속 앵커도 말을 못했다. 그의 등에도 식은 땀이 흘렀을까? 화면 속 뉴스 데스크에 놓인 화병의 꽃들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앵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진인 듯합니다." 곧이어 화면 상단에 지역별 진도를 알려주는 지진 속보가 흘렀다.
묘한 경험이었다. 'TV 속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땅 위에 있구나.' 동시대인의 동질감이랄까, 자연의 공포 앞에 모두가 똑같은 인간의 나약함을 느꼈다고 할까. 지금 기억으론 이즈(伊豆)반도 일원은 진도 6~7, 도쿄 일원은 4~5 정도였다. 이즈의 피해가 컸다.
4년 전 특파원으로 부임하자마자, 진도 5~6의 지진을 경험했다. 건물 전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여진 공포 탓에 오싹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큰맘 먹고 산 평판TV가 앞뒤로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TV 받침대를 탁자에 나사로 고정하라는 지진 대비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탓이다.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함께 근무하는 선배였다. "별 일 없니?" "예. TV가 망가질 뻔했지만." "다행이네. 자전거 사둬라." "예?" "큰 지진 나면 교통이 마비되니까, 사무실에 가서 기사를 보내려면, 자전거가 있어야지. 우리 식구는 한대씩 다 있다." 그때 산 내 자전거를 포함, 도쿄에는 시민들의 자전거가 산더미처럼 많다. 대지진으로 발생할 교통 난민을 집으로 인도하는 최고의 방재 기구다.
일본엔 크고 작은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내가 있는 동안에도 2007년 니가타(新潟) 지진으로 15명, 2008년 이와테(岩手)·미야기(宮城) 지진으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도 도쿄가 온전한 것은 그저 천운(天運)이다.
일본은 지진 피해가 있을 때마다 모든 언론이 달라붙어 지면과 방송을 도배질한다. 사망자 6400여명을 낸 1995년 한신(阪神)대지진의 경우 훗날 쏟아져 나온 조사·분석 리포트가 수만 책에 달한다. 나쁘게 말해 호들갑을 떤다. 가족의 목숨을 좌우하는 재난에 관한 이상, 일본인들에게 '심리적 내성(耐性)'은 없는 것이다.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는 일본의 지진 피해 뉴스가 있을 때마다, "도쿄는 어떠니?"라고 전화를 주신다. 하지만 요즘은 내 쪽에서 "한국은 어때요?"라고 전화하고 싶다. 자연의 지진 위협이 아니라 북한의 전쟁 위협 탓이다.
과거 어느 시기 한국인들은 일본인이 느끼는 지진 공포보다 더 큰 전쟁 공포를 느끼면서 살았다. 그런데 "네가 떨었던 전쟁 공포는 독재 정권이 가공한 거야"라는 한마디가 사람들을 불감증 환자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도 우리들은 북한이 미사일에 불을 붙이든, '전면전' 협박을 하든, 기를 쓰고 태평한 척하는지도 모른다. 따져보면 6·25에서 서해교전까지, 그리고 어제오늘 북한의 전쟁 위협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들은 정신적 맨몸 상태로 노출돼 있는데도 그렇다.
도쿄에 대지진이 났을 때 나는 내 몸을 피할 대피소를 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북한의 장사정포가 정말로 불을 뿜었을 때, 내 어머니가 대피할 방공호가 서울 어디 있는지 누가 생각이나 해보았는지 모르겠다
선우정 도쿄특파원 su@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