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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숨'을 쉬러 간다고 해도, '쉼'이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일단은 먹을 것을 단단히, 잘 먹어줘야 여행도, 명상도 잘 할 수 있다. 휴 명상 여행이란 이름으로 제주도로 떠나는 거지만, 명상에 대해선 일단 나로선 '모르쇠'할 작정이었다.
여행과 명상과 치유와 쉼이 어떻게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 충돌하는 단어들이 어떤 교집합을 이루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명상지도자를 따로 섭외해 놨으니 어찌됐든 그것은 흘러갈 것이다. (잘 되면 명상지도자 덕, 못되면 명상지도자 탓이지 않겠는가. 하하)
나는 기운이 좋은 명상 장소,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도와줄 맛있는 먹거리, 조용하고 소박한 잠자리를 중점적으로 신경쓰기로 했다. 예전에 제주도에 머물 때 먹어봤던 음식, 먹어본 음식점들과 제주도에 살았던 사람, 제주도에 사는 사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서 음식점들을 섭외해 놓았다. 그렇다해도 여행 루트가 사려니 숲속이거나 한라산 영실 코스 꼭대기거나(거기엔 먹을 게 없다) 하는 바람에 알차고 맛있고 괜찮은 음식을 준비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섭외한 것은 산 속이나 숲길에서는 도시락으로, 취사가 가능하지만 일일이 해 먹을 수도 배달할 수도 없는 서귀포 휴양림에서의 음식은 영양죽과 샌드위치와 과일을 하기로 했다. 손은 많이 가고, 거리는 머나멀고, 돈벌이도 별로 안되는 그 일들은 해줄 사람을 섭외할 수 없어서 이거 여행을 가서 내내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샌드위치와 김밥을 말아야 하는건가 싶어 난감하기도 했다.
관광버스 기사가 손쉽게 도시락집에 주문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건 아니다.
우리는 관광식당에서 주문한 식은 김밥을 스티로폼 용기에 싸가지고 여행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21명의 여행자들은 참으로 훌륭했다. 명상여행과 공정여행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어서인지 집에서 쓰는 도시락과 개인 물통을 가져오라는 공지에 모두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공항에서 만나자 마자 점심을 먹으러 간 제주 시내의 '장독대'에서 졸지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각기 다른 크기의 도시락통들을 식탁 주위에 주욱 죽 올려놓는데, 도시락을 꺼내는 아저씨들과 아줌마들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그리도 도시락통들은 어찌나 다양하던지. 어릴 적 아이들이 쓰던 도시락 통까지 총출동한 모양이다. 통성명을 나누면서 가장 먼저 우리가 먹은 것은 제주도 토속 음식. 고기 국수.
밤새 우려낸 국물에 도톰한 제주 국수발, 냄새 안나는 고소한 고기와 풍성한 들깨 가루. 제주 휴명상여행의 첫 끼니.
고기국수를 먹고 모든 여행자가 꺼내놓은 개인 도시락통. 저 빈통에 도시락을 새벽 배달해준 장독대 주인 언니 영심씨.
아무도 못 먹는 사람없이 점심으로 제주 고기를 먹고 인사를 나눈 후, 제주 버스를 타고 (45인승 대형버스, 그 우람한 버스를 예약하고 사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이 제주도 관광기사님이 다른 여행자들과 사뭇 다른, 즉 명상여행을 하려는 사람, 공정여행을 하려는 우리 여행자들 때문에 당황해하면서 생긴 우여곡절은 더욱 많다.) 한라 수목원을 걸었다.
하룻밤을 자기로 한 서귀포 휴양림까지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은 한라 수목원의 숲길과, 한라산 영실 코스 입구에 있는 존자암 터 산책,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까지저녁까지 먹고 들어가야 했기에 시간여유가 빡빡했다.
명상여행이니만치 좀 상처가 많고 어둡고 자못 경건한 사람들이 올 거란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잘 웃고 잘 어울려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부터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와서 아직 제도교육에 합류하지 않은 나름 탈학교생 청소년과 5,60대의 아줌마, 아저씨까지 중구난방(?)인 사람들은 한라 수목원에서부터 삼삼오오 같이 걸으며 초면인 어색함의 벽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사실 그것도 여행의 힘이겠지만 짧은 순간에 사람들은 확 친밀해지기도 한다. 존자암터까지 헉헉거리면서 올라갔다 내려와서는 벌써 처음부터 동행한 여행자처럼 친구가 되어 있었다.
명상지도하는 감짱의 말에 따르면 제주도의 존자암터는 좋은 기운이 있는, 명상과 마음수련에 아주 좋은 곳이라고 했다.
10월의 한 가운데... 15일의 제주는 가을이 물들어가는 초입으로 존자암터 가는 길의 호젓한 산책로는 검은 까마귀와 붉은 단풍으로 그런 말이 없다해도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평소에 사무실에만 있거나 책만 읽은 사람들, 집안에서만 웅크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한시간 남짓밖에 안되는 산책 코스에서도 숨을 몰아쉬면서 뻐근해진 허벅지를 두드렸다. 얼마 전까지의 내 모습이다. 산 밑에서 걷기 시작해 십분만 걸어도 심장이 거세게 뛰어 곧 터져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기억. 이제 나에게 이 정도의 산책은 식은 죽 먹기다.
게다가 여기 영실 근처 존자암터는 한 서너번을 오르기도 했었다. 처음 올라가던 겨울에는 제주도에 한 이년 살고 있는 후배가 동행했었다.
겨울이었던 그 때 후배는 그 산책길에서 마른 나무 등걸에 홀로 푸르르게 돌돌 말린 덩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이름이 뭔줄 알아요? 겨우살이래요.
모두 죽어 있어도, 저 혼자 살아 있잖아요. 저걸 걷어서 끓여 먹으면 암인가, 뭐에도 좋다던데.
그래? 어떻게 올라가면 저걸 걷어올 수 있지?
겨우살이는 아주 높이 높이 걸려 있어서 병이 위중했다 해도 걷어 올 수 없었다.
또 한번은 여름... 주차장 근처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 이 길로 접어들자마자 온갖 땀이 사르르 식어내려갔다.
서늘하고 청량했던 그 숲길도 기억에 떠올랐다.
다시 한번은 작년... 여름... 제주도에 머물면서 지내고 있던 그 때. 서울에서 내려온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했다.
렌트한 차를 타고,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이야..."라고 말하면서 짙은 안개에 휩싸인 한라산 영실로 향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보는 짙은 안개는 정말 운전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간신히 존자암터까지는 산책을 마쳤지만, 바로 앞의 나무마저 안개에 덮여 있던 뿌연 풍경은 사실 무섭기 조차 했었다.
내 속에 살아있는 이 길에 대한 수많은 기억들.
여행자들은 모두 자기 생각에 골몰해 여행을 다니겠지만, 나는 앞서 걸으며, 뒤에서 걸으면서 나만 기억하는 제주도의 풍경과 사연을 되새기면서 길을 걸어나갔다.
한라산 까마귀. 참 까맣다.
해가 질 무렵, 먼 길을 돌고 돌아 영실주차장의 존자암터에서 지척에 있는 서귀포 휴양림 숙소를 두고 제주 차 숲 근처에 있는 명리동 식당으로 갔다. 기사님은 도대체 왜 코스를 '이 따위'로 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로서는 명리동 식당의 자투리 고기와 국수가 하도 맛있고 제주의 느낌이 살아 있는 곳이어서 열심히 길을 만든 거였지만 기사님이 보기에는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루트였었나 보았다. 뭔 숙소를 그 산속에 정해놓고, 뭐 대단한 것을 먹기에 돌고 돌아 다니는 것인지 조금씩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편한 관광식당에서 그냥 먹어도 다 맛있는데, 도시락집에다 그냥 주문해도 한끼 먹는 데 별 지장 없는데... 까지...
20명을 태우고 가는 기사님의 표정이 어두운 것이, 약간의 짜증기가 너무 민감하게 감지되는 바람에 저녁 먹을 즈음엔 피곤이 확 끼쳐왔다.
그래도, 명리동 식당, 그 연탄불에서 구운 자투리 고기와 연탄불에서 자글자글 끓는 멸치젓갈은 얼마나 맛이 있던지.
바로 옆에 불켜진 '오월의 꽃' 밤풍경을 보고 서귀포 휴양림에 도착했다. 그 밤 모두 간단히 몸을 씻고 나무로 만든 숲 속의 세미나 실에 모여 앉았다. 아니 둘러앉았다.
첫 날 밤의 명상은 어쩌다 함께 이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이름 지어주고 불러주기, 그리고 <자기 용서 명상>.
바닥은 보일러를 땠지만 숲 속이라 그런지 약간 서늘했다. 멀리서 반짝이는 숙소의 조도 낮은 불빛만 있을 뿐 사위는 조용했다.
'괜찮아. 너는 그래도 괜찮아....'
너무 신기한 것은 그런 시간, 그런 분위기에 그냥 별 다른 저항감이나 부끄러움 없이 스며들어가는 나 자신과 여행자들이다.
각자의 아픔과 상처를 들어주고 손을 맞잡아 줄 때, 나즉하게 읊조리는 감짱의 목소리에 그 순간에도 여지 없이 이상하게 눈물이 솟았다. 그래야 한다고 내 스스로 강제했던 탓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 때, 울고 있는 나보다 선배인 평강의 울음이, 마리의 아픔이 확 공감되는 바람에 나는 그들의 손을 번갈아 가며 잡아 줄 때, 이해와 따스함으로 아무 잘난 척 없이, 들이댐 없이, 손과 어깨와 다리를 잡고, 함께 울었다.
우리가 만난 지, 그래봐야, 이제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들은 어디서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살다가, 이 낯선 제주도 서귀포 휴양림 나무 들 사이에서 손을 잡고, 같이 인사하고 눈물을 나누게 되었을까. 밤이 아주 아주 깊어갔고, 세미나실을 나와 숙소로 가는 길에 작은 계곡과 작은 다리와 나무길이 이어졌다.
그 길이 멀지 않고, 어둡지 않아, 참 좋았다.
첫댓글 글을 읽으니 생생하게 생각나네요. 여행기획자인 동점과 명상안내자인 내가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코스와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얼마나 말없이 힘겨루기를 했는지. ㅎㅎ 여행지에서 모두들 허물없이 무너지게 하는 것, 그건 동점의 탁월한 장점이잖아요.
홋. 장점으로 봐주셔서 감사하구요. 이제 곧 모두들 허물없이 무너지게 하려다가, 즉 제가 좀 오버하다가 스스로 방전되서 여행자들과 감짱을 애먹인 이야기를 써야 할 때인데... 쫌 민망하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