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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역사 I,
스티브 에프 메이슨/ 박성래(1939-), 까치, (1987 초) 1999.
Stephen Finney Mason(1923-), A history of the Sciences, NewYork, Collier, 1962.
1. 서론
과학의 역사의 뿌리는 두 가지의 주된 근원을 갖고 있다. 첫째는 기술적 전통인데
실제적인 경험과 솜씨가 손에서 손으로 옮겨져 시대에서 시대로 발전하고 있었다. 둘째로는
정신적 전통인데 그 속에서 인간의 소망과 상념이 계승되고 확대되어 갔다. ../.. 이 두 가지
전통은 대부분 별개의 것이었는데 그 양쪽이 다 분화하여 신관과 서기들로부터 철학자가 분
리되어 나왔고, 또 종목마다 전문화된 장인이 발생했다(I 11-12)
제I부 고대의 과학
I. 2.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과학
수메르인의 초고의 기록에는 약 2000개의 기호가 쓰였으나, 기원전 2500년에는 약
600개로 줄었다(I 16).
기원전 1100년 무렵의 이집트의 한 기록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
고하고 있다. "어떤 중노동도 하지 않도록 부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평이 좋은 관리가 되기
바란다. 서기가 되면 손으로 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고, 명령도 내릴 수 있다. 나는 아궁
이 옆에서 악어와 같은 손으로 일하는 주물공을 알고 있는데, 그 녀석에게서는 구더기보다
도 더 고약한 냄새가 난다. 나는 여태까지 관청의 위원으로 임명된 대장장이가 있었다는 말
을 들은 일도 없고, 사절로 임명된 주물공을 만난 적도 없다." (24)
일종의 알파벳 아니 오히려 두 가지의 알파벳이라 알 수 있는 것이 기원전 1300년
무렵 페니키아인에 의해 발전되었다. 하나는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에서, 또 하나는 이집트
의 상형문자에서 유래한 것인데, 후자의 알파벳 쪽이 파피루스에 기록하기에는 더 편리하였
다. 이 알파벳이 그 후의 인도-유럽어 문자와 셈 언어 문자의 모체가 된 것 같다(24-25).
I.3.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인의 자연철학
천체는 실질이 있는 물체이지 힘이 있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그런데 이 생각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그들과 거의 같은 시대의 헤브라이인 아모스, 페
르시아인 조로아스터, 인도인 싯달다 등 그들은 그들의 신을 자연계에서 때어냈다. 이들 종
교 개혁자들은 청동기 시대의 문명 속에서 여러 신들에게 맡겼던 역할, 말하자면 비를 내리
게 하거나 수확을 불어나게 하는 역할을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신들은 원래 인간 마음의
행복에 관계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27).
자연계의 과정에 보복의 원리[또는 보상의 원리]가 있다고 하는 견해는 정당한 법
률 수속에 앞서 복수가 행해지고 있던 인간사회의 관습에서 유추하여 얻게 된 것이었다. 그
러므로 그리스어로 '원인'을 의미하는 '아이티아(aitia)'의 옛 뜻은 '죄'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도 위에 가서는 자연계도 인간사회와 같이 법률로 지배된다는 관념으로 바뀌어졌다(29)
알크마이온(gr. Alkmeon, av. VI s. 그리스 의사 철학자)에 따르면, 인간과 우주 전
체는 똑같은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인간은 대우주를 송두리째 그대로 소우주적으로 베
낀 것이다. 기 견해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가르침 속에 정학하였다(33). [이런 견해가 플라톤
의 티마이오스 편에 우주 생성에 동심원 속에 정다각형의 설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동연적 사유의 장점이 우주의 원운동 사유에로 연장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초기의 그리스 의학에는 세 가지의 커다란 흐름이 있었다. 첫째로
는, 그리고 아마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신 신전의 의학이
다. 둘째로는 남이탈리아의 철학적인 피타고라스 학파이고, 세째로는 한층 더 실제적인 이오
니아계의 히포크라테스(gr Hippokrates, fr. Hippocrate, av. 460-377, 그리스 의사) 학파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저작들은 기원전 4세기의 것으로,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이다. 이
저작은 히포크라테스(B.C 460-377년경)를 크게 부각시키지만, 한 사람의 저작이라기보다는
한 학파의 저작이다. 이 학파는 피타고라스 학파처럼 의학을 이론적 과학으로 보지 않고, 오
히려 기예 또는 기술로 간주했다. 하기야 그들 역시 그들 나름의 이론은 발전시키고 있었지
만, 그들은 인체에는 네 가지 체액 또는 액즙, 다시 말해서 흑담즙, 혈액, 황담즙, 점액이 있
다는 설을 내세워, 건강에는 그런 체액들의 올바른 균형이 꼭 필요하고, 병은 그중 어느 하
나의 과잉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이 이론은 네 체액은 혈액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는 관찰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흑담즙을 나타내는 것은 거무튀튀한 응혈이고,
혈액이라는 것은 새빨간 액체이며, 황담즙은 황색의 혈청이고, 점액과 관계가 있는 것은 섬
유소이다(35-36).
I.4. 아테네의 자연철학
페르시아인을 이긴 아테네인의 문화와 기술 / ... 그리스 발명가들이 있었다고 전하
는 것도 이 시기였다. ... 그리스어의 '소피아(sophia)'가 '지혜'가 아니라 기술적인 '숙련'을
뜻하게 된 것도 이 시대였다.(I. 37)
플라톤은 그리스나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우주는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 플라톤에 따르면, 혼돈으로부터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는 과정 중에서 가장 커다란 특징은 조물주가 세계의 합리적인 계획을 체계화
한 일이다. 플라톤은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는 과정은 무시했다. ... 세계는 세계자체의 독자
적인 운동을 하며 그것이 때때로 인간의 목적을 방해했다. 플라톤은 자연계의 이러한 외관
상의 잔인성을 '필연'아라 불렀다. 이것은 '원자론 자가 말하는 필연'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원자론의 필연은 질서도 계획도 없이 다만 우연뿐이고 무질서했기 때문이다.(40)
불의 입자는 4면체, 공기의 입자는 8면체, 물의 입자는 20면체, 흙의 입자는 6면체
였다. 제5의 다면체는 정오각형에서 만들어지는 12면체로서 제5원소를 이룬다. 이것인 천구
의 자료를 만들고 있는 제5원소이다. 우주는 전체로 볼 때 구형이다(41).
지구를 중심으로 한 동심천구(同心天球)의 우주/ 플라톤의 철학은 영향력이 아주
컸지만, 그의 주요한 후계자들은 그의 견해를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서 멀어져갔
다. 그가 창설했던 아카데미의 직계 문하생들마저도 그러했다. 특히 에우독소스(408-355
B.C)는 천체운동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과정으
로 천체를 관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우독소스(gr. Eudoxos, fr. Eudoxe de Cnide, av.
406-355. 그리스 천문학자 철학자)는 수량적인 천문학과 사변적인 우주론을 통일하고, 따라
서 우주 천체의 위치를 결정할 때에 관측에다 중점을 둔 최초의 인물이었다(42).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각 천구는 자신의 운동을 바로 그 밑에 있는 천구에 전한다.
그러므로 항성을 운반하는 가장 바깥쪽의 천구는 그 축을 날마다 회전함으로써, 이 구의 안
쪽에 있는 모든 천구와 그것들에 매여있는 여러 천체의 자전운동을 일으켰다. ../.. 가장 바
깥의 항성구는 우주의 주변에 위치하여 모든 천구와 우주 전체를 관할하는 종동천(宗動天
Primum Mobile) 곧 부동의 기동자(Unmoved Mover)에 의해 움직인다(44).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천체를 외관상의 회전주기에 따
라 지구로부터 바깥쪽으로 달, 해, 금성, 수성, 화성, 목성, 토성의 순으로 배열했다(45). [왜?
요일의 배열, 즉 해 달 화수목금토의 순서와 다를까?]
'자연은 쓸모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사상/ ... 아리스
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컷과 암컷은 자손에 대한 공헌의 도가 같지 않다. 암컷은 재료 즉 질
료인을 제공하고, 수컷은 계획 즉 형상인을 제공한다. 수컷은 목수이고 암컷은 재목이라는
것이다(48). [우리나라 민간 전승에서도 이런 남존여비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남자는 씨앗이
요 여자는 밭이라는 표현이다. 또 다른 사악한 이데올로기는 왕후장사의 씨가 따로 있다는
것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한다는 유추도 마찬가지이며, 여기서 파생된 가난은 국가
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도 정치꾼들의 사악한 이데올로기이다.]
I.5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과학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3년에 죽고, 그의 제국은 분열되어 무너졌다. 이집트는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사람이며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 Aristoteles, 384-322 av. J.-C.)의 문하에서 배운 톨레미[en gr. Ptolemaios,
Ptol m e I, S ter(le Sauveeur) 367-283 av. J.-C., Rois d'Egypte 323-285]가 접수했다. 톨
레미는 후기 뤼케이온의 우두머리였던(재직 288-268 av. J.-C.) 스트라톤(Straton, mort v.
268, 뤼케이온의 물리학자, 원장)을 아들의 가정교사로 고용했으며,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
온(Mouseion, [후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창설하였다. 연구와 교수를 겸하도록 뤼케이온
을 본다 만든 것이었는데 규모는 그것보다 훨씬 컷다(53-54).
아리스타르코스(gr. Aristarkhos, Aristarque de Samos, av. 310-230. 그리스 천문학
자)가 제안한 태양중심설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에우독소스 우주 체계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아리스타르코스의 견해가 인정받지 못한 것은 그리스인이 지구와 하늘은 일
반적으로 물질적인 구성에 있어서나 둘이 따르는 법칙에 있어서나 완연히 다르다는 관념을
버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에는 등급이 낮은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서 정지해
있고 , 보다 완전한 천체는 한층 더 순수한 상부에서 한결같은 원운동을 반복한다는 견해가
뒤따르고 있었다. 아리스타르코스 이후 에우독소스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그리스인
의 모든 노력에 이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58).
그러나 고대 최후의 주목할 만한 천문학자인 톨레미(Claude Ptol m e, en gr.
Ptolemaios 수학자 천문학자 A.D. 85-165, R2(1990)에서 90-168)... 알렉산드리아에서 서기
127년과 151년 사이에 관측하였다. 그의 관측은 히파르코스(BC 190-120)의 관측보다 정밀하
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59-60).
알렉산드리아의 의학과 생물학/...알렉산드리아의 최초의 의학 교사는 헤로필로스
(BC 300년경)였다. 그는 해부를 공공연히 행한 최초의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의
자리를 심장에 두었으나 헤로필로스(Herophilos, fr. Herophile av. 4세기말- 3세기초, 그리스
의사 천문학자)는 뇌에 두었으며, 또한 신경을 운동과 감각의 기능에다 결부 시켰다. 그는
정맥과 동맥을 처음으로 구별하여, 동맥은 뛰고 있지만 정맥은 뛰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
했다(61).
고대 최후의 대의학자 갈렌/...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생물을 세 유형으로 나누
었다. 즉 식물혼에 의해서 성장하는 식물, 감각혼에 의해서 스스로 운동할 수 있는 동물, 그
리고 이성혼에 의해서 지능을 갖고 있는 인간이 그것이다. 그중 인간은 이 세 가지 넋을 모
두 지니고 있으며, 동물은 처음의 두 가지를, 식물은 다마나 식물혼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
다. 갈레노스(Claude Galien gr. Klaudies Gal nos, lat. Claudius Galenus 131-201, 그리스
의사)의 생각에 따르면, 이들 3단계의 생명력이 있어야 할 장소는 특정한 내장 속이며, 또
그것들은 공통의 생명원인 프네우마(pneuma), 즉 '공기의 정령'과 관련지어졌다. 당시의 유
력한 철학 학파였던 스토아 학파는 공기는 전 세계 다시 말해서 대우주의 호흡임과 동시에
넋이며, 그리고 소우주인 인간의 생명을 부지시켜주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호흡은 인간과 우주정신을 연결짓는 기능이며, 게다가 본질적으로 반은 공기이고 반은 불인
프네우마라는 공기의 정령 부분을 빨아들임으로써, 인간의 생명의 힘이 새로와진다고 한다
(63).
I.6 로마와 고대과학의 쇠퇴
바로(Varron, en lat Marcus Terentius Varro 116-27 av. J.-C.)는 카토(Caton
L'Ancien ou le Censeur, en lat. Marcus Porcus Cato, 234-149 av. J.-C., 검찰관) 와 비슷
한 일을 더 넓은 분야에 걸쳐 행했다. [카토가 검찰관으로 있던 시절 또는 그 부류 사람들
이 학문을 검열했을 것이다. 로마 원로원은 BC 186년에 피타고라스 학파를 BC 173년과
161년에 에피큐로스 학파를 금지 시켰다.] 바로는 문법, 변증법, 수사학, [이상 3학부], 기하
학, 산술, 천문학, 음악, [이상 4학부], 의학, 건축술 등 아홉 가지 '인문학' 과목을 다루었다.
뒤에 두 과목은 카시오도루스(Cassiodor, en lat. Flavius Magnus Aurelius Cassiodorus, v.
480-v. 575, 라틴작가)에 의해 버려졌고, 중세에는 나머지 일곱 과목이 학습되었다(67).
[로마에서 과거 연금술의 부활] 초기 수공업 공정은 주술적 의식과 밀착되었으므로,
이 의식을 행하는 것이 작업을 원만히 마치는 절대 요건이었던 듯하다. 그리스 도공들은 항
아리를 깨뜨린다고 여겨지던 악마를 내?i기 위해 부뚜막 위에 가면을 놓았다. [붉은 악마는
는 2002년 액귀를 물리치고 우리나라 축구를 세계 8강에 올려놓는데 기여했다.] 특히 금속
생산은 탄생, 죽음 부활 등 유기체의 성격을 띤 과정과 결부되었다. 금속 생산을 일종의 탄
생의 의식과 연관시킨 기원전 700년 무렵의 앗시리아의 문서에 관해서는 앞에 소개한 바와
같다. 기원전 500년 무렵의 페르시아의 신화에 의하면 금속의 탄생은 신성한 원시적 존재의
죽음의 결과라고 간주되기도 했다. 이 존재가 살해되면 머리에서는 납이 피에서는 주석이,
골수에서는 은이 뼈에서는 구리가, 살에서는 철강이, 넋[혼, 령]에서는 황금이 태어난다는 것
이다(70).
그리스인이 천시했던 연금술이 부활되었다/... 형상이 없는 원초적 물질에 가까운
것을 얻기 위해 연금술사들이 채용한 일반적인 순서는 구리, 주석, 납, 철의 네 가지 비금속
의 합금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합금에다 은의 혼 또는 형상을 부여하기 위해, 그 표
면을 비소 또는 수은의 증기로써 백색으로 만들었다. 다음에 전체를 황금으로 하기 위한 종
자 또는 효소로서 소량의 황금을 첨가했다. '마치 효모가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소량
의 은 또는 황금도 마찬가지의 작용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후로 변성을 마무리하기
위해 또 한번 표면처리를 했다. 그것은 황금의 표면을 남기기 위해 비금속의 표면층을 부각
하여 없애주거나, 청동색으로 보이기 위해 유황수로써 합금을 처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짜여진 변성의 순서에서 비금속이 합금되어 개개의 개성을 잃었을 때, 다시 말해서 그 특수
한 형상 또는 넋을 잃었을 때, 비금속은 죽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찬가지로 표면의 착색에
따라 처음에는 은으로, 다음은 황금으로 새로운 형상을 갖게 되는 것은 부활의 과정이라 여
겨졌다(72).
프로클로스(Proclus, en gr. Proclos, 412-485, 콘스탄티노플 출신이며 아테네에서
활동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의 제자의 한사람으로 보이며 신플라톤파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이는 디오니시오스(R2 x)는 이러한 정신을 성서에 열거되어 있는 여러 천사와 동
일시하였다. 디오니시오스는 천사를 아홉 가지의 위계로 정리하고, 이것들을 또한 세 가지로
크게 나누었다. 그리하여 이 각 등급의 천사들이 아홉 개의 천구의 기동자(Unmoved
Mover)라고 해석되었다. 최초에 오는 것은 치천사(熾天使, Seraphim) 지천사(智天使,
Cherubim), 좌천사(座天使, Thrones)이며, 다음은 주천사(主天使, Dominations), 역천사(力天
使, Virtues), 능천사(能天使, Powers)이고, 마지막은 권천사(權天使, Principalities), 대천사
(大天使,Archangels), 천사(天使, Angels)였다. 치천사는 종동천(宗動天, Primium Mobile)의
운동의 원인이며, 지천사는 항성구를 담당하며, 천사는 달의 천구를 밀고 나아갔다. ... 존재
의 각 등급은 그 자체 내에서도 위계적으로 배치되었다(74). / 이 우주관의 물리학적 측면에
관하여, 6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저작가이며 교회로부터 이단자로 찍힌 필로포노스(Jean
Philopon, en gr. Philoponos v. 490-v. 566)는 반대하고 나섰다. 필로포노스는 천사가 천체
를 움직인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애초에 신은 천체에다 기동력(impetus)을
주었다. 이것은 천체자체의 동력이므로, 시간이 경과된다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신이 무거운 것에게 지상으로 낙하하는 성질을 부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75). - 윌리
엄 오캄(Guillaume d'Occam ou Ockham, 13세기말-1350)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계
승하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le Grand, Albertus Magnus, v. 1193-1280)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Thomas Aquinas 1227-1274)의 천체운동 학설을 비판하며]회교
도를 거쳐 중세유럽에 전해져 있던 필로포노스의 기동력설(impetus theory)를 부활시켰다
(128).
제II부 동양과 중세의 과학
II. 7. 중국의 과학과 기술
중국의 표준 의학서는 한(漢)시대의 "의경(醫經)"이다. 거기 기록되어 있는 해부학
과 생리학의 이론은 주로 인간과 국가의 비유, 소우주인 인간과 대우주로서의 우주의 비유
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일년에는 네 계절과 열두 달이 있는데, 인간도 네개의 팔 다리
와 열둘의 관절이 있다. 심장은 신체의 왕이며, 폐장은 그 중신(重臣)이다. 간장은 신체의 장
군이고, 중앙관청으로 담낭을 지니고 있다. 비장과 위는 곡창이고, 장은 교통과 하수도 조직
이다(85-85)
북극성과 주극성(週極星)은 뜨고 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인에게는 천체 중에
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북국성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하늘의 황제로 간주 되었고, 주
극성은 제후, 그 밖의 별들은 관리로서 간주되었다(86). .../ .. 초기 이집트인은 시리우스 별
이 나일강이 범람할 무렵에 태양과 함께 떠오른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해뜨기 직전에 별
이 떠오르는 것은 지평선 현상 때문인데(86), ... 그런데 중국인은 주극성과 함께 출몰하는
별을 근거했기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을때도 그 별이 어디에 있는 지를 계산할 수 있었다
(87).
중국인이 생각했던 세가지의 세계체계와 무신론적 세계관 / ... 한(韓)시대에는 세
가지 큰 우주론, 논천설(論天說)이 있었다. 그중 가장 오래 된 것이 개천설(開天說)인데, ...
하늘은 반구형 둥근 천장이고... /..이것에 대치된 것은 진(秦) 이후 정사(正史)들에 나오는
혼천설(渾天說)이다. ...장형(張衡)은 우주를 달걀에 비겨, 노른자위는 지구로서 물위에 뜨고
껍질은 천공으로서 증기가 떠받치져 있다. 세째는 선야설(宣夜說) 즉 '무한 공간' 이론이다.
... 우주는 대지와 천체 외에는 형상도 없고 실체도 없었다. 공간은 무한하고 공허하며, 천체
는 그 무엇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 '강풍'에 추진되어 자유롭게 움직였다(87-88).
인간의 통상적 행동이나 해가 바뀌고 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쉽게 관찰되고 확
인된다. 그러나 한층 더 상세한 지식은 복서(卜筮)에 의존했다. 상(商)시대에는 동물의 어
깨뼈에 뜨겁게 달군 막대기를 대어 뼈에 금이 가게 하고, 그 금이 가는 상태에 따라 사건의
진행을 예측했다. 주(周)시대에는 제비뽑기에 의하여 길고 짧은 대쪽의 어느 한쪽을 골랐다.
고르는 범위는 그러한 길고 짧은 대쪽으로부터 팔괘(八卦)를 만듦으로써 점차 넓어졌다. 그
리고 전국시대에는 팔괘의 무작위선정이 행해졌으나, 마침내 한(漢)나라에 이르자 복잡한 예
언법이 발전했다. 그것은 주극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북두칠성을 본뜬 국자를 팔괘판 위에
서 돌려, 그 국자가 멎은 위치에 따라 결과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이때, 천연자석의 국자가
언제나 똑같은 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함으로써, 자석의 방향 지시
성질이 이 방법으로 발견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89-90).
II. 8. 인도의 과학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인도의 고대 문명/... 현재로는 기워전 300년 무렵에 번성했던
인더스 강의 문명에 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 그들은 수메르인과 마찬가지
로 회전이 빠른 놀로를 사용했고,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을 만들었다. ... 그런데 기원전
2000년 무렵에는 이 인더스강의 문명도 사라지고 말았다(96).
II. 9. 회교 세계의 과학과 기술
아리비아의 연금술/ 연금술은 회교권에서 9세기경 신비주의자로 불린 자비르 이븐
하이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오늘날 전해져 있는 글들은 그들 스스로 '순결한
형제'라 지칭하는 신비주의파에 의해 10세기에 집대성된 것 같다. ... 수니파가 회교 정통파
로서 공인을 받고 있었지만, 회교권 민중 사이에는 수피파의 신비주의가 퍼졌다. 수피파 가
운데에서도 한층 더 급진적인 분파는 카르마디파로서, 이 교파의 사람들은 만인이 평등하다
는 것을 주장하고, 학교의 건설이나 백과사전 집필 같은 교육활동에 의해 교도들에게 동일
한 자격을 주고자 힘썼다(104). 그들은 사상의 보급활동을 위해 회교권의 여러 도시에 순결
한 형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들의 연금술서는 그들이 집필한 백과사전의 아주 적은 일
부분에 자나지 않았으며, 백과사전의 52편의 논문 중 17편이 과학문제에 충당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저작은 바그다드의 정통 수니파에 의해 이단이라는 선고를 받아 소각되었고, 마
침내 11세기에 이르러 순결한 형제는 탄압을 받았다. / 순결한 형제는 정통회교도 학자들이
그리스으로부터 이어받았던 연역적, 기하학적 추리에 반대했다. 그들은 신비를 이서의 위에
두고, 신비는 경험에 의해 탐구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105).
II. 10. 중세 유럽의 기술과 장인 전통
장인적 전통의 가치를 기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저작은 회화의 안내서이다. 이것
은 1400년 무렵 피렌체의 화가 첸니니가 토속어로 쓴 것이다(118). [첸니니(Cennino
Cennini, 14세기경 중엽 플로랑스(피렌체)에서 활동, 『Libero dell'Arte』)]
II. 11. 중세의 학자적 전통
중세에 있어서 학문의 부흥은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일어난 주목할 만한 발전,
곧 수공업과 상업의 성장 및 대성당의 건립이나 대학의 창설 등과 더불어 나타난다(121).
[대성당의 건립은 어느 시대나 부를 한 곳으로 모으면 이런 대역사(大役事)가 일어난다는
한 증거이다. 현대에서도 140층의 초 현대식건물이나 긴 다리를 건설하는 것도 피라밑의 공
사처럼 그 시대의 역사(役事) 이다.]
대학의 창립과 그리스과학의 아라비아어로부터의 중역에 이어서, 13세기의 유럽에
는 갑자기 과학실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123).
윌리엄 오캄(Guillaume d'Occam ou Ockham, 13세기말-1350)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계승하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le Grand, Albertus Magnus, v. 1193-1280)
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Thomas Aquinas 1227-1274)의 천체운동 학설을 비
판하며]회교도를 거쳐 중세유럽에 전해져 있던 필로포노스의 기동력설(impetus theory)를
부활시켰다(128).
제III부 16, 17세기의 과학혁명.
III 12.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관측 천문학은 15세기에 항해와 관련하여 그리고 태양
년(太陽年)과 맞지 않게 낡은 율리우스력의 개량과 관련하여 부활하였다. 이 움직임은 빈 대
학의 게오르그 푸르바흐(1423-61)와 그 제자 요하네스 뮐러(1436-76)에서 시작된다(137).
III 13. 길버트, 베이컨 및 실험적 방법
따라서 장인과 학자 사이에는 낡은 울타리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지금까지도 실
험과학자와 수리과학자 사이를 그리고 순수과학자와 응용과학자 사이를 여전히 구별하고
있다(157).
III 14. 갈릴레이와 역학.
케플러를 이해하지 못한 갈릴레이/... 우주체계에 관한 갈릴레이의 대저는 1632년에
출판되었다. 그것은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도이취 천문학자)가 행성운동의 세
가지 법칙 중 최후의 것을 공표하고 약 13년이 지나서였다. 그러나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이탈리아 물리학자)는 친구의 연구를 무시하고, 행성의 궤도는 원이며, 케플러가
1609년에 보여준 타원이 될 수 없다고 끝까지 생각하였다(173).
III 15 데카르트: 수학적 방법과 기계론적 철학
'자연법칙' 이라는 개념/ '자연법칙'의 사상에 관한 역사가*는 이 말이 주로 두 가지
원천에서 나온 것이라 설명한다. 첫째로 16세기 및 17세기 절대군주에 의해 도입된 성문법
에 의한 통치관습에 바탕을 둔 유추에서 왔다는 것과, 둘째로는 바빌로니아의 옛 전제주의
에서 시작되어 기독교가 받아들인 신성한 입법자라는 유태적인 신의 개념에서 왔다는 설이
그것이다. '자연법칙'이라는 말은 고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에 의해 가장 많이 쓰였고, 바빌
로니아인의 사상 특히 그들의 점성술에 의해 영향을 받아, 고대 전제주의 시대에 두드러지
게 쓰였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는 알렉산더 시대에 대두하여 로마 제국치하에서 번성했다.
중세기 동안에는 이 말은 그다지 쓰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민사회는 뚜렷한 법률보다는
오히려 관습에 의한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군주는 봉건적 질서의 구석구석까지 그
전통적 특권과 의무를 가진 각 계층의 신하에서 자기 권력을 대행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주의 입법자로서 신이라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사상이 보당의 주권론
이 나온 지 불과 40년 후에 발전을 보았다는 것은 우연으로 만 돌릴 수 없는 일이다'라고
찔젤은 논평하고 있다. 보당(Jean Bodin, 1529-1596, 프랑스 경제학자 철학자)보다 약 40년
전에, 또 한 사람의 프랑스 인 캘빈(Calvin, Jean Cauvin, 1509-1564, 프랑스 종교개혁가)이
신학의 영역에서 태초에 정해진 법에 의한 세계의 절대지배자라는 신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도 또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184-185). [주*: 찔젤, "물리적 법칙의 개념의 발
생"(The Genesis of the Concept of Physical Law), Philosophhcal Review, 1942, 51, 245.
특히 양적인 '자연법칙'의 사상은 또 하나의 원천 다시 말해서 동맹과 같은 상인들의 국제적
연합에서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이 동맹은 수나 도량형에 관해 국경을 초월한 그들 자신의
법을 가지고 있었다. 제라르 말린은 1622년에 간행한 「상인의 법」(1622 간행) 속에서 '진
정한 법칙은 자연의 올바른 이법(理法)이며, 모든 것과 일치하고, 모든 국민 사이에 침투하
여 나의 것과 당신의 것을 구별해주며, 수와 양과 길이에 의해 분배되는데, 분배됨으로써 수
와 양과 길이는 명확해질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38TMJ)
III 16. 과학혁명과 종교 혁명
프로테스탄트 국가에 종교재판소가 없는 것은 제쳐두고라도 근대 유럽의 대과학자
중에 프로테스탄트가 카톨릭을 능가한 데는 세 가지 주요 요인을 들 수가 있다 첫째, 초기
프로테스탄트의 심성과 과학적 태도 사이의 조화, 둘째, 종교적 목적 달성을 위한 과학의 사
용, 세 째,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우주적 가치와 초기의 근대과학의 그것과의 일치이다
(186-187).
루터의 생각으로는 인간 구제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내적인 신앙만으로 충분하
고, 캘빈의 생각으로는 어떤 일정한 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미리 구제 받도록 예정되어 있
는 것이다. 양쪽의 어느 경우에도 인간의 일은 그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
다. 그러나 캘빈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구제 받을 것이 약속되어 있나 없나 를 아는 일이 절
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첫 교리는 스코틀랜드나 네델란드 및 영국의
캘빈주의자에 의해 변경되어, 17세기 중엽 무렵에는 계속 선행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구제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 청교도들에 의해 승인되기에 이르렀다(188)
천사와 정령/ 이처럼 캘빈주의자의 세계의 움직임은 질서가 있고 충분히 예정된 것
이었다. 이러한 교리를 케임브리지의 임마누엘 칼리지 학장이었던 청교도 존 프레스튼
(1587-1628)은 1628년에 '신은 자연법칙을 바꾸는 일이 없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191-192).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미친 과학의 영향/ 근대 초기 과학자들의 새로운 우주관은 프
로테스탄트의 한 분파의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분파는 인간의 정신은 육체와 함께 사
라졌다가 주 그리스도의 재림 때 육체와 함께 부활한다고 믿었으므로, 모랄리스트
(Moraliste)라 불리게 되었다. 이 파의 가장 열렬한 신자는 시인 존 밀턴이며, 모랄리스트 신
학의 주요 대표자는 리처드 오버튼이었다. 이 사람은 영국의 내란 시대에 평등운동(Leveller
movement)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195)
여기서 윌킨스 (1614-1672)의 논의는 자연과정이 경제적으로 지배된다는 한 층 더
일반적인 원리를 명백히 했던 것이다. 자연이 스스로 '간단하고 쉬운 방법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 까다롭고 어려운 방법을 결코 쓰지 않는다'는 것은 '신의 지혜에 꼭 맞는 것'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생겼던 열거가지 '최소' 원
리의 근본 개념이었을 것이다. 반사하거나 굴절하는 빛이 최소시간에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지나간다는 페르마의 원리(1662), 빛은 최소저항의 길을 지나간다고 하는 라이프니쯔의 원리
(1682), 많은 물리 현상에 사용된 모페르튀의 최소 작용의 원리(1744)가 그런 것이다(199).
III 17. 만유인력의 이론
방해가 없는 물체의 운동은 등속도 직선운동이라는, 갈릴레이의 관성법칙에 근대적
표현이 주어지자, 천체의 운동을 역학의 언어로 설명하는 문제는 두 가지의 주요 문제로 나
누어졌다. 첫째는 관선에 의해 이 같은 직선운동을 원 또는 타원으로 구부리기 위해 필요한
구심력을 계산하는 법칙을 구하는 것, 둘째는 중력은 행성을 닫혀진 궤도에 구속하는 구심
력을 생기게 하는 물체들 사이의 거리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법칙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했다(209-210).
뉴튼(Isaac Newton 1642-1727 영국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은 이 점에서 네델
란드의 철학자인 스피노자(1632-1677)에 의해 제창된 기계론적, 범신론적 견해에 보다 가깝
다. 뉴튼은 신학적으로는 말하자면, 비정통파로서, 세르베투스(1509-1553), 존 로크
(1632-1704), 조셉 프리스틀리(1733-1804)와 같은 근대 초기의 과학적 전통을 잇는 거물들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원리를 배척하는 유니테리언파에 속했다(218).
III 18. 17세기의 광학
16, 17 세기의 실험과학의 성장은 모든 관측의 기본인 빛의 연구와 인간의 눈의 능
력을 진상시켜주는 기계의 발전을 자극하게 되었다. 르내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사실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 또는 회화에서의 원근법의 개량을 위해 광학문제를 연구했다. ... 17세기초
에 네델란드의 미델부르크의 안경기술자인 한스 리퍼세이와 자카리아스 얀센에 의한 망원경
과 현미경의 발명으로 결실을 보았다(219).
빛의 굴절에 관한 정확한 법칙은 1621년 라이덴의 수학교수인 스넬(1591-1626)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굴절 법칙은 1637년에 데카르트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
는 이 법칙 및 기타 광학 현상을 빛은 빠른 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다
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 빛은 공간의 에테르에 의해 전달되는 작
용이라고 하는 광학이론는 데카르트학파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입자설(粒子說, corpuscular
theory)은 뉴튼 및 그 후계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220-221).
III 19 의학과 혈액 순환설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특성 가운데 근대과학의 발전을 위해 중요했었다고 생각되는
또 한가지 특성은 이 직업에서는 장인적 요소와 학자적 요소가 서로 매우 밀착되어 있었다
는 점이다(226).
이발외과의 파레/... 해부학적 지식은 주로 학자들, 특히 파도바의 의학교수였던 베
살리수스(1514-1564), 콜롬부스(1516-1559), 파브리쿠스(11537-1619)에 의해 진보하였다. 외
과술은 프랑스인 파레(1510-1590)와 같은 이발소 외과의들에 의하여 틀히 발전하게 되었다.
... 파레는 외과기술에 네 가지 주요 공헌을 하였다. 첫째로, 그는 당시 믿고 있던 바와 같이
총상(銃傷) 자체가 독을 가진 것이 아니므로 구태의연하게 총상을 펄펄 끓인 기름으로 처치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요법으로 치료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둘째
로. 절단 뒤의 출혈을 멎게 하려면,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것처럼 불에 달군 쇠
로 지지는 것이 아니라, 절단된 동맥을 동여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하였
다. 세 째로... 네 째로, 갖가지 작업을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교묘한 의수족을 발명했다
(228).
베살리우스와 세르베투스/ 베살리우스는 파도바에 온 플랑드르 사람이었는데, 주저
인 『인체의 구조에 관해』를 1543년에 출판하였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천체 운동에
관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한 바로 그 해였다(228). ... 그는 파도바로 가기 전에 프랑스의 소
르본 대학의 의학부에서 세르베투스(1511-1553)와 함께 연구하고 있었는데, 세르베투스는
그것을 대신할 만한 설명을 제시한 최초의 근대인이었다. 그는 혈액이 허파를 통해 심장의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옮아간다는 설을 내놓았다(229).
세베르투스가 제네브에서 캘빈에게 붙잡혀서 이단 심문을 받았을 때, 그에게 씌워
진 죄목의 하나는 그가 혼을 혈액으로 간주했다는 것이었다. 이 속에는 혼이 육체와 함께
멸한다는 이단적 견해가 들어있다고 본 때문이다.../.. 1553년 세베르투스는 캘빈에 의해 이
단이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지고, 그의 신간 서적 대부분이 함께 불태워졌다(231). [브루노
의 화형보다 프로테스탄트의 화형이 먼저이다]
세베르투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심장은 생명의 첫째 것이며, 몸의 중심에 자
리잡은 열의 원천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그 후의 혈액순환론자들에게도 자주 나타나게 된
다. 그 중 한사람은 꼴룸부의 제가 체살피노(1519-1603)로서, 그는 1571년에 펴낸 책 중에서
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로서 그는 1584년 이
후 쓴 몇 가지 글 가운데서 혈액순환에 관한 사변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 또 하나 가장 두
드러진 사람은 윌리엄 하비(1578-1657)인데, 혈액순환설은 그의 손에 의하여 1628년에 결정
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장은 생명의 기원이다. 그것은 소우주의 태양이다. 또 한편으로는 태양을 세계의
심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심장의 힘과 맥박에 의해, 혈액은 운동하고 완성괴도 영
양을 함유하게되고 부패와 응고를 면하기 때문이다. 심장은 그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몸에 자양을 주고 보호하고 민첩하게 해주는 만인의 수호신인 까닭에 그야말로 생명
의 기초이며 온갖 작용의 원천이다. ... 심장은 최고 주권을 그 손에 귄 국왕처럼 모든
것을 지배한다. 또한 심장은 동물의 체내에 있어 모든 힘이 거기서 생겨나고, 온갖 힘
이 그것에 의존하는 원천이며 기초이다(232-233). (38UKG)
III 20. 연금술에서 의화학으로
생물학적 물질은 네 가지의 기본 체액 즉 혈액(), 담즙(), 흑담즙(), 점액()과 세 가
지 기능적인 체액 즉 동맥혈, 정맥혈, 신경액, 이들을 통제하는 혼 즉 생명혼, 또 자연혼, 동
물혼이다. 병의 원인은 인체를 침법하는 외적인 실재물 때문이 아니라, 네 가지 체액의 비율
이 조절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초기 히포크라테스의 시대에는 ...환자를 의약으로 지나치
게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레누스(Claude Galien gr. Klaudies Gal nos, lat.
Claudius Galenus 131-201, 그리스 의사)의 시대에는 의약을 사용하여 체액의 균형을 회보
시키는 일이 실제로 행해지게되었고, 체액이 유기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의약도 주로 식
물이나 동물에서 채취한 것이다. 회교도는 갈렌이 사용한 약제에 새로운 것을 첨가함으로써,
의약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239) ... 파라셀수스(Philippus Aureolus Paracelsus,
1493-1541)는 스위스인 의사로 의학과 연금술을 결합시킴으로써 의화학 이른바 이아트로-케
미스트리(iatro-chemistry)를 새 과학으로 성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240)
파라켈수스의 이론및 치료법/ 파라켈수스는 ...자신을 로마의 의학자 켈수스보다 위
대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켈수스를 능가한다는 뜻에서 파라켈수스라고 스스로 칭했다. ...게다
가 루터가 로마 교황의 교서를 불태운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개강식은 의학의 권위라고 일
반적으로 인식되었던 갈렌과 이븐시나의 서적을 불태운 것이었다.(240)
파라켈수스에 따르면, 병은 3원소간의 균형의 결여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갈렌 학
파가 체액의 균형이 결여된 것을 병의 원인이라 생각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균형을 회복
시키는 것은 광물질의 의약일 뿐 유기질의 치료약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는 서로 의견이 달
랐다. (241)
파라켈수스는 병을 아르케우스(Archeus) 또는 종자처럼 어떤 생명적인 힘이 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신체를 습격하여 그 아르케우스와 싸우고, 또는 특정한 기관의 아르케우스
와 싸운다. ...1531년 파라켈수스는 병에 관한 이와 같은 견해를 발표했는데, 1546년에는 지
롤라모 프라카스토로(1484-1553)가 병은 그 자체가 종자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파라켈수스
와 비슷한 이론을 내놓았다.(243)
독일의 신비주의 전통/ ... 캘빈파의 학자와 기계론 철학자는 우주의 지배체제에 관
한 계급적 관념을 버리고, 우주법칙에 대해서 절대주의 이론으로 옮겨갔다. 이 이론에 있어
서는 일체의 존재는 기계적으로 평등하며, '지상의 통치자'아래에서 균등한 권력이 주어져
있다. 루터파와 생기론 철학자 특히 의화학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종류의 피조물
사이에 성립되어 있다고 생각되던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관한 전통적인 사상을 물리치고,
우주에 있어서의 일체의 존재는 자유독립이며 그 자율성을 내재적 원리에서 얻고 있다고 생
각했다. 파라켈수스도 이러한 견해였다. 그리고 자연계의 개개의 실재들은 다른 존재들과는
관계없는, 그 자체의 내부에 있는 생명력의 충동에 의해 발생한다고 상상했다. 신비론자는
언제나 개인주의자 였다.(244) [신비주의에 두 계열이 있다. ]
보일, 후크, 로워의 연구는 메이요에 의해 정리되고 더욱 ㅂ발전되어 "의학 및 물리학의 다
섯가지 논문"으로서 1675년에 출판되었다. 메이요는 호흡과 연소의 불가결한 생명력을 지닌
공기의 부분은 일종의 '초공기입자(硝空氣粒子)'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화약은 공기가 없는
데서도 타므로, 이 입자는 초석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초산에도 포함되어 있다.(253) ...
메이요는 공기를 두 가지의 가스의 혼합물, 다시 말해서 그의 '초공기입자'와 다른 불활성
입자의 혼합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공기를 하나의 원소물질로 보고, '초공기입자'는
공기의 입자에 붙어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기계론 철학의 신봉자 였던 그의 경우에는 초공
기입자의 작용도 극히 기계적이었으므로, 우리들이 화학결합이라 부르고 있는 꼭 그런 변화
를 이 입자가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실로 그의 견해 대부분은 생기론적인 의화학 이론의
'기계론적 번안'이었다. 의화학자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연계에 세 가지의 기본적 원질료-초
공기의 정령, 유황, 염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초공기의 정령은 연금술사에 있어서 수은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254)
이러한 견해는 헬몬트의 가스개념 및 레이의 금속 회분(灰分)화 이론과 더불어 그
후의 시기에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퇴색하였다. 의화학의 신선한 물결이 플로지
스톤 설(phlogiston theory)의 형태로 독일에서 유럽 전체에 퍼졌기 때문이다. (255)
III 21. 근대 초기의 과학의 응용
포르투갈인은 동쪽을 향해 탐험하였다. 바르도로뮤 디아스는 1486년에 희망봉을 돌
았고, 바스코 다 가마는 그 길을 통해 1497년에 인도에 다다랐다. 스페인은 서쪽으로 항행
해서 콜럼버스는 1492년에 서인도 제도에 다다랐다. 콜럼버스도 바스코 다 가마도 육지가
눈에 띄지 않는 광대한 대양을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항해를 되풀이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해도를 만드는 일과 해상에서 배의 구역의 지도를 만드는 데에는 지구
표면상의 지점의 상대적 위치를 정하는 일과 구면을 이루는 지구를 평면의 도면으로 나타내
는 어려움이 있었다. ... 그러나 두 지점의 경도 차이를 측정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
다.(257)
과학을 진보시키고 응용하는 목적을 위해, 그는 '솔로몬의 집'이라 부르는 학회 설
립을 그의 유작 "새 아틀란티스"(1627) 중에서 제안하고 있다. 학회라는 것은 다만 학문이
있는 사람들의 사교클럽 같은 것이 아니라, 실험실, 정원, 도서실, 공장, 동력실을 갖춘 연구
와 교수의 기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베이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우리 학회
의 설립목적은 사물의 원인과 그 숨겨진 운동을 아는 일, 또한 모든 가능한 것을 실현할 때
까지 인간제국(Human Empire)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다. (268)
III 22. 17세기의 과학학회들
프랑스 파리 과학아카데미/ ... 파리에는 런던의 그레셤 칼리지(p. 236)와 비슷한 '콜
레즈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가 있었다. 그것은 휴머니즘의 분거지를 만들고자 했던
프랑스와 1세가 1518년에 설립했는데, 파리 대학에 의해 강력하게 배척되었다. 콜레즈 드 프
랑스의 수학교수 피네우스(1494-1555)는 새로 발견된 육지의 지도를 만들어서, 그의 동시대
인인 레코드가 영국에서 한 것과 마찬가지로 탐험가들에게 편의를 주었다. 콜레즈 드 프랑
스의 그 후 교수인 가상디(1592-1652), 로베르발(1602-1675) 등은 그래셤의 교수들과 마찬가
지로 과학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다. 프랑스에서 최초의 주목할 만한 과학자 모임은 1620년
무렵 엑스의 돈 많은 사제이자 프로방스 고등법원의 메버였던 클로드 드 페이레스크
(1580-1637)의 집에서 회합을 했다. 가상디는 파리로 옮겨가지 전까지는 엑스의 교수로서
페이레스크 모임의 일원이었다. 파리에서는 가상디와 마찬가지로 프랑시스코파 수사 마랭
메르센(1588-1648)의 지하실이 과학자 지뵈소가 되어, 이곳이 과학지식을 매개하는 중심이
되었다.이 지하실에서는 페르마, 로베르발, 가상디, 파스칼 등이 회합하고 있었는데, 메르센
은 갈릴레이, 데카르트, 홉스 등과 서신교환을 하고 있었다. 그 후의 파리의 회합은 정부의
자문위원 아베르 드 몽모르(1600-1679)의 집에서 있었고, 1654년 무렵에 정례적인 회합으로
발전되었다. (277)
제IV부 18세기의 과학: 각국의 과학적 전통의 발전
IV 23. 18세기의 과학의 응용.
경도의 문제 및 기타 항애의 문제는 국가의 중요한 관심사라는 이유에서, 그러한
일들을 다루기 위한 국가적 기관이 설치되었다. 그것이 1675-76년에 세워진 그리니치 천문
대이다. (283)... 1659년 호이헨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 네델란드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는 해상에서 사용하는 크로로미터(chronometer)를 만들었으나 선박의 운동이 진자
의 진동을 방해하여 정확한 시각을 유지할 수 없었다.그 후 호이헨스와 로버트 후크는 각자
독자적으로, 와상(渦狀)태엽의 진동도 등시성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태엽이 시
계의 조정에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발표하였다(284)/...해상에서 경도를 찾아내기 위한 정
확한 크로노미터 제조는 18세기에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시도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요크셔의 시계제조공 존 해리슨(1693-1776)과 프랑스 왕실의 시계 제조공 피에르 르
로와(1717-1785)였다.(285) [루이 16세가 열쇠와 시계의 태엽과 톱니바퀴에 대한 작업에 몰
두한 것은 그 시대의 관심사와 결부되어 있다]
[경도의 문제에서 정확한 시계제조의 문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산업상의 문제중
의 하나는 광산의 배수문제였다. (285)
옛날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그의 역학적인 장난감을 움직이는데 가열한 공기와 증
기를 동력으로 사용했고, 르네상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증기력으로써 움직이는 대포의
설계도를 남겨 놓고 있다. 16세기 말경에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는 증기의 힘으로써 물을 끌
어올리는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286-287) ..../... 열에서 역학적인 힘을 얻어내려는 노력이
결과한 또 한가지 연구는 16세기 광산기사에 의해 행해지고 있던, 흡입펌프는 물이 약 30
피트의 높이 밖에 오라가지 않는다는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갈릴레이는 자연이 이처럼 어느
높이까지만 진공을 허락하는 것은 기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일 이 한계가 일정
한 것이라면 다른 액체는 그 밀도에 의존하는 한계까지 상승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
다. 그의 제자 토리첼리와 비비아니는 1643년에 이 생각이 사실임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물의 14배의 밀도를 가진 수은은 약 76cm의 높이까지 상승하였다. ... 이것은 1648년에 플레
즈 파스칼(1623-1662)에 의해 뒷바침되었다. 파스칼은 남부 프랑스의 퓌 드 돔에서 토리첼
리와 비비아니의 장치를 사용했는데, 산을 높이 오를수록 수은주는 내려간다는 것을 발견했
다. (288)
IV 24. 18세기의 과학의 배경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지리상의 대발견으로 덕을 본 일들이 모두 순조롭게만 진행되
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위기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1720년에는 '남해(南海)
상사'가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존 로우의 '인도상사'가 거의 같은 무렵에 무너
졌고, 네델란드에서도 그보다 좀 전에 마찬가지로 도산이 여럿 있었다. 이에 비해 농업과 공
업이 대신 번성하여 한층 더 안정된 기업이 되었다. (294)
장노파 스코틀랜드의 대학은, 잉글랜드의 비국교도의 아카데미와 같이, 18세기에 과
학교육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실제로 에든버러는 그 무렵부터 의학학교로 유명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과학자들도 또한 잉글랜드의 비국교도의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의 공
업의 발달과 연결되어 있었다. .... 프랑스 역학 및 천문학에 관한 이론적 연구에 영국은 너
무 반응이 없다고 플레이페어는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세기 말엽에 와서 영국의 과학은 전
반적으로 다시 이론적인 것이 되었다. 1801년부터 토머스 영(1773-1829)이 빛의 파동설을
부활시켰고, 존 돌튼은 1803년에 원자론을 화학에 도입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우연히도 퀘
이커 출신이었다. 같은 무렵, 이와는 상대적으로 프랑스 과학자는 이전보다 한층 더 경험적
이 되어, 나폴레옹의 군사적 요청에 따라 실험적이고도 응용적인 과학의 길을 내닫고 있었
다.(301)
IV. 25. 18세기의 천문학과 뉴튼의 체계
버클리의 뉴튼 비판과 반비판/ 뉴튼이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간행한 뒤 반세
기 동안, 만유인력의 이론에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 그리고 그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 다시
나타난 것은 100년 뒤의 일이었다. [누굴 말하는고?, 100년 뒷면 계몽기시대인데...] (303)
카이엔에 간 프랑스 탐험대는 1673년에 1초의 진자길이가 적도 근처에서는 파리의
1초의 진자보다 짧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각각 994mm와 990mm 였다. 뉴
튼은 이에 대해 적도에서는 극에서보다 중력이 작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305)
이리하여 라플라스(Pierre Simon, marquis de Laplace 1749-1827)는 1812년에 특정
순간의 세계의 모든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알면,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과 장차 일어날 일
을 모조리 계산할 수 있는 '계산의 신(Divine Calculator)'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만들었다.
..../ 생물학자 보네(Charles Bonnet, 1720-1793 제네바에서 활동한 스위스 박물학자 철학자)
는 이보다 조금 전에 심리학 방면에서 마찬가지의 착상을 내놓고 있다. 어떤 천재가 호메로
스의 뇌의 모든 신경의 작용을 분석할 수 있다면, 그는 이 시인이 생각했던 것과 또 같은
『일리아드』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자 콩도르세(Marie Jean
Antoine Nicolas de Caritat, marquis de Condorcet 1743-1794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정치
가)는 이러한 생각을 인간세계에 확장하면 결함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309)
IV 26. 플로지스톤설과 화학혁명
마인쯔의 의학 교수 베커(1635-82)는 의화학의 원리를 약간 수정하여, 1669년에 고
체의 흙 성분의 물질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성분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발표하였다. 그 첫
째는 모든 고체에 들어있는 고정성의 흙, 테라 파피다(terra lapida)로서, 초기에 의화학자가
말한 원질인 염(소금)에 해당한다. 둘째로 모든 가연성 물질 속에 존재하는 기름 성분의 흙,
테라 핑귀스(terra pinguis)로서 유황 원질에 해당하며, 셋째 테라 메르쿠리알리스(terra
mercurialis)는 유동성의 흙으로서 수은 원질에 해당한다.(316) .../... 1703년에 할레의 의학
및 화학 교수인 게오르크 에른스트 슈탈(1660-1743)은 베커의 테라 핑귀스에 플로지스톤이
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열의 운동' 또는 '불의 운동'이며, 동시에 '유황성의 원질' 그
리고 '기름 성분의 원질'이었다. 금속은 회분과 플로지스톤의 복합체이며, 열이 플로지스톤을
몰아내고 회분을 남기는 것이다. (316) .../... 플로지스톤설에서는 금속은 복합물질이므로 회
분으로 화할 때 그 성분인 무거운 회분과 기체성인 플로지스톤으로 분리된다고 하였다.
(317)
4원소 중 흙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종류의 '흙의 종류'가 알려졌으므로, 이제 원소
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물, 공기, 불은 아직도 일반적으로는 원소라 여겨졌다. 플로
지스톤을 불의 원소 또는 훨씬 넓게 불의 활력제라고 간주하는 학설도 있었다.(318)
1772년 말경 라브와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 프랑스 화학자)는
연소에 관해 이전부터 행해지고 있던 연구를 되풀이해보았다. 그것은 인과같은 비금속이나
주석과 같은 금속을 공기 속에서 태우면, 무게가 증가한다는 것을 나타낸 실험이다. 라브와
지에로서는 이 무게 증가가 공기의 흡수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320)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 영국화학자)는 1774년에 파리를 방문하여,
그가 새로 발견한 산화수은을 가열하여 얻게된 새로운 가스, 즉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라고
그가 명명한 것에 관해서 라브와지에와 이야기했다. ... 1775년에 라브와지에는 산소는 공기
그 자체의 순수 원소이고 불순물이 들어 있지 않으며, 대기는 산소에 불순물이 섞인 것이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1777년에 셀레(Carl Wilhelm Scheele 1742-1786 스웨덴화학
자)가 공기는 두 가지 가스로 이루어져 있고, 그 하나는 연소를 돕는 산소 또 하나는 불활
성의 질소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322)
그 동안에 라브와지에는 그의 이론에 따라 비금속인 수소가 산소와 결합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산(酸)을 찾고 있었다. 이러한 산을 찾아내지 못했으나, 1783년에 카벤디시
(Henry Cavendish 1731-1810 영국화학자 물리학자)의 조수였던 블라그덴이 파리로 가서 라
브와지에를 만나, 영국의 화학자들이 수소와 산소로서 물을 얻었다는 것을 알렸다. 라브와지
에는 간단한 실험을 행하여, 카벤디시와 프리스틀리가 물의 구성에 관해 연구한 주요 결과
를 확인했다.(324)
IV 27. 18세기의 기계론적 세계에서 진보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 Aur le, 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의 이성혼은) 전 우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허공을 떠돌며 그 구조를 확인하고, 무한한 시간 속에 뻗쳐 만물의 순환적 재생을 파악한다.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는 우리 조상이 우리 이상으로 본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 자
손도 또한 우리 이상으로는 아무런 신기한 것을 볼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29)
1000년도 더 지난 뒤에 플로렌스의 철학자 니꼴로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i,
fr. Nicola Machiavel, 1469-1527, 이탈리아)는 이와 똑같은 느낌을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세계 만물에 끊임없이 성쇠가 있는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정해진 일이다. 최고의 완성에
도달하면, 그 이상으로 오를 수 없어 기필코 조락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가장
아래의 밑바닥에 떨어지면, 이번에는 오르기 시작한다." (329)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영국 철학자)은 다른 사람들도 그랬던 것처럼, 안
쇄술, 나침반 등의 발명이 인류의 기술적 진보의 본보기이며, 고대의 업적을 뛰어넘는 진보
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330)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는 『철학원리』를 '어떤 자연
현상도 나 논문에 주어진 설명으로부터 제외되어 있지 않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330) ...
"나의 희망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신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필요한 실험
에 기여를 하도록 만들고, 또한 그 발견을 공개함으로써 전진을 시도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사람은 앞서 간 사람들이 정지한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며,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의 생활과 직업을 결합시킴으로써, 각자가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멀리 함께 나
아갈 수 있을 것이다."(331)
기계론적 관념은 1577년에 보댕(Jean Bodin 1529-1596)이나 1748년에 몽테스키외
(Charles Louis de Secondat, Baron de Br de et de Montesquieu, 1689-1755)에 의해서 다
른 방식에 따른 사회학설로 확장되었다. 이 두 사람은 지리적인 위치, 다시 말하면, 한 지역
의 기후가 거기에 사는 종족의 본질을 결정짓는 것으로 보았다. 북방인은 강건하지만 지적
이 아닌 경향이 있고, 남쪽으로 내려감에 따라 영리하지만 동시에 허약해진다는 것이다. 그
리고 이러한 경향은 환경에 강제되는 외부적 결정이므로, 인류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이다. (333)
데카르트는 인간정신이 육체의 내적 기구에 의해 결정되는 바가 많다고 한다. 그는
그의 저서 『방법서설』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신은 육체의 여러 기관의 조
건 및 관계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으므로, 만일 인간을 이제까지보다 더 이상으로 현명하
게, 재주있게 만들 수단이 있을 수 있다면, 이 수단은 의학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334) [여기서 의학은 생명과학의 전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의 것은 데카르트의 영과 육의 연결이 송과선(松科腺)에 있다고 한 것이다]
기계론적 철학이 심리학설에 응용된 두 번째의 것은 17세기 동안에 발전했는데 1690년 간행
된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 철학자)의 『인간 오성에 관하여』는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 그는 "그러니까 정신이라는 것을 어떤 글자도 없고 어떤 생각도 지니지
않은 백지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이 정신은 어떻게 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지니게 되는 것
일까? 무한한 인간의 상상력이 거의 끝없이 다양한 정신 위에 그려 놓은, 그 엄청나게 많은
것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물에 대해 나는 한마디로 대답한다. '경험에서'라고"(335)
어떻게 관념이 결합하여 생각을 낳는가 하는 문제는, 관념이 내용의 유사성 때문에,
또는 인과관계로 상호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또는 다만 공간적 시간적으로 서로 접하
고 있음으로써 상호간에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면, 그 해답은 나온다. 철학자 흄
(David Hume, 1711-1776, 영국 철학자)은 1739년의 저서 『인간오성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세 가지 원리에 의해서 관념들은 서로 연결되는 것 같다. 곧 유사성, 시간과
공간적인 접축, 인과관계가 그것이다." 그러한 심리학에서 법칙이 물리학에서 법칙에 상대되
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흄은 다시 다음과 같이 썼다. "(관념연합은) 일종의 '인력'에 의
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심적 세계에 있어서도 자연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의 커다란 결과를
가져오고,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336-337)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는 1796년에 태양계의 진화론을 발
표하였고, 의사 카바니스(Pierre Jean Georges Cabanis 1757-1808)는 1796년 이후 인간의
정신능력을 인간 발달사의 산물로 간주하는 심리학설을 전개했다. 1809년에 라마르크
(Jean-Baptiste-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1744-1829)는 스스로
『동물철학』이라 이름 붙인 체계를 수립했는데, 이것은 근대적인 생물진화론으로서 최초의
중요한 것이었다. 라마르크는 완전히 18세기의 프랑스 전통에 지배되었으며, 실제로 그는
'최후의 계몽사상가'라 불리고 있다. 그의 생각으로 동물은 '진보의 법칙'에 따라 고등의 형
태로 진화한 기계였다. (341)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 찰스 다윈의 할배)에게는 라마르크에
게 없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생물이 경쟁과정을 통하여 생활력이 보다 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사상이다. 그는 손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과 마찬가지로, 수
닭의 며느리 발톱이나 숫사슴의 뿔은 암컷의 짝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발달
한 것이라고 믿었다. 식물도 '지상에서는 빛과 공기, 지하에서는 양분과 수분을 얻으려고 끊
임없이 경쟁함'으로써 변화해왔다. 경쟁적 자유주의 냄새가 풍기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나
중에 빅토리아(Victoria 1819-1901, reine 1837-1901)왕조 중기의 영국에서 크게 혼영받았고,
또한 많은 열매를 맺기도 했다. 그 열매의 하나가 바로 찰스 다윈이 가꾼 것이었음은 물론
이다. (345) (38UM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