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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2016년 1월호 원고 (교계 15명 인사들에게 '한국교회의 시급한 문제 3가지와 해결 방안'이라는 질문에 A4 한장 반 분량으로 정리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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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시급한 문제 3가지와 해결 방안 -
- 조헌정목사(향린교회)
1. 구원론에 대한 균형 잡힌 신학이 필요하다.
지옥과 천국으로 압축되는 사영리에 기초한 영혼구원의 틀에서 제1성서(구약)의 출발 역사인 출애굽사건 곧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켜 새 역사의 주역으로 불러 쓰시는 인간해방의 사회구원이 함께 선포되는 전인적인 구원론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자 하느님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에 기초한 신앙고백 이전에 30여년의 삶을 로마 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야 했던 역사적 나사렛 예수에 대한 삶이 먼저 고백되어져야 한다. 교리에 기초한 신앙고백은 후차적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이단적 가르침이 너무 횡행하고 있다.
70년대 필자가 공부할 당시에는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제 학문 간의 교류로 인해 예수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해졌으며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필자가 Walter Wink로부터 직접 들었던 ‘원수사랑’에 대한 해석은 새롭다기보다는 충격 그 자체였다. (Engaging the Powers: Discernment and Resistance in a World of Domination. Fortress. 175ff. 한국어 번역도 나와 있다.) 이때부터 역사적 예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예수께서는 믿음의 대상이 아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역사적 예수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역시 허공을 치는 메아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우선 목사들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여러 책들을 섭렵하고 이에 기초한 설교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
2. ‘교회 성장’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으로.
기독교가 ‘개독교’로 목사가 ‘먹사’로 평신도가 ‘병신도’로 조롱받아온 지 오래이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 완성을 위한 도구이지 인간의 명예와 부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들어 치셨다. 성전 제사용 희생동물을 파는 장사꾼들과 성전봉헌을 위한 환전상들을 내어 쫓아냈다는 말은 제물 살 돈도 없고 봉헌할 재물도 없었던 가난한 민중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개혁을 하셨다는 말이다. 물질 세상 축복을 남발하는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성전 숙청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장로 혹은 권사로 임직할 때, 헌금을 강요받고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돈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지도자로 설수 있는가?
한국은 오랜 기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제1의 자살국가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 또한 세계에서 최고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 되도다, 부자에게 화가 있으라!’ 선포하셨는데, 과연 예수를 머리로 한 한국교회는 이렇게 가르치고 또 실천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성전 숙청에 이어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 2;19) 하고 촉구하신다. 더 나아가 예수는 ‘(새로운)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닌 부활 예수의 몸으로서의 성전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곧 주류 사회로부터 쫓겨나고 뿌리 뽑힌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갈릴리로 가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셨다. 남한 사회에서 오늘의 갈릴리는 어디일까? 새해마다 교회가 신앙 표어를 정하는데, 교회 성장과 관련한 세속적 목표는 그만 갖도록 하자. 대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망을 품을 수 있는 표어를 갖도록 하자. 모든 재산을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사용했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시작한 교회는 마땅히 작금의 부익부 빈익빈의 세속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안적 공동체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에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느님의 나라란 예수께서 ‘주의 기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닌, 이 땅에 세워지는 나라, 곧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나라를 말한다. 이는 곧 나라와 나라 사이에, 백성과 백성 사이에 ‘정의와 평화, 자유와 생명, 평등과 복지’가 펼쳐지는 나라를 의미한다. 지금 한반도는 남북분단으로 인한 미움과 대결로 인한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다. 개인의 성공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교회 전체에 주어진 과제이다. 교회마다 평화통일을 위한 교육과 실천을 우선시하고, 과거에 매여 있는 적개심을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상생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사랑 훈련이 필요하다.
3. ‘시대의 징조를 읽자.’(마 16:3)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먼저 세상을 알아야 한다. 모든 신앙고백과 신학은 세상을 향한 시대의 증언으로서 제한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하지만, 이 말씀을 담는 그릇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목사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공부와 아울러 세상에 대한 공부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세상은 지구온난화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느라 정신이 없다. 반면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이에 관련한 교육이나 설교를 하고 있을까? 필자가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PCUSA) 매년 2주간의 재교육(continuing education)의 결과를 노회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 저명한 신학대학 총장은 이미 30년 전에 한국교회는 서구교회 역사에 비하면 5세 어린이의 머리에 20대 청년의 몸을 갖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말하면서 신학대학들이 새로운 학생들을 뽑는 대신에 목사 재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개신교회는 급격한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다. 60년대 농촌교회를 가면 어른들은 몇 명 되지 않았어도 어린이들은 바글바글했다. 2,30년 후의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었다. 지금 대부분 교회의 평균연령은 60세를 성큼 넘는다. 어른들에 비해 초중고생들의 출석은 너무 빈약하다. 그렇다면 2,30년 후의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몰락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가 미래지향적으로 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짧든 길든 신학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현인은 변하자고 하고 바보는 변했다고 한다. 침몰하는 배를 붙들고 애쓰다 결국 빠져들기보다는 다른 배를 준비해서 옮겨 타도록 하는 것이 날씨의 변화를 넘어 시대의 징조를 읽는 예수님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본이신데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만 강조하다보니 한국 교회가
이 모양 이 꼴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겠죠-
정말 마음에 와 닿네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에
그분의 뜻과 영이 함께 하심을
말씀속에서 찾고 실천해야 함에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