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용주사 - 용의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 얻어 조화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용주사는 사도세자 현륭원(顯隆園, 지금의 융릉隆陵)의 조포사(造泡寺)로 건립된사찰이기에 정조(1752-1800)의 효성으로 능행을 위해 새로 닦아놓은 시흥로, 즉지금의 국도를 따라 정조대왕의 옛 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경부고속도로는 본래 과천 구로를 따라 난 것이다. 정조가 능행치도에 민폐를너무 끼치게 된다 하여 그 18년(1794)에 시흥로를 개설하기 전에는 삼남에서 상경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니 정조도 현륭원 천장가는 13년(1789)부터 18년까지5년 동안은 이 길로 현륭원 전배(展拜)를 다니는 능행로를 삼았을 것이다.정조가 가까운 과천로를 버리고 시흥로를 개설한 것은 단순히 민폐를 염려해서만이 아니고 벽파의 괴수로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영의정 김상로의 형으로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의 무덤이 과천 냉정동 고개 너머(현재 과천시 갈현동)에 있어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보였기 때문에이를 보기 싫어서 한 일이라는 말이 김씨집안에 전해 내려 오고 있다.그러나 실제 김상로의 부친인 김유를 비롯한 그 선대 묘소가 밀집해 있는 의왕
시 왕곡리는 어느 길로 가든 수원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또한 사도세자의또 다른 원수라 할 수 있는 영의정 한익모묘 역시 그 길목에 해당하는 의왕시월암리에 있다. 정조는 이 부수(父讐)들의 묘 곁을 지나면서 그날의 원한을 잊지않기 위해 오히려 수원에 현륭원을 이장해 놓았던 지도 모르겠다. 호기로운 군왕의 전배 행차로 저들의 간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중외에 과시하여 아직도 조정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벽파 세력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벽파 세력을제압해 가려는 정조의 고차원적 정략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사실 정조는 인조반정이래 정국을 주도해 온 서인세력, 그 중에서도 율곡학파의적파 정통을 이어온 노론 세력에 대한 반감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 조부영조가 노론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평생 그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망부인 사도세자는 그 세력에 저항하려다 저들의 음모에 휘말려 왕세자의 몸으로불과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 속에 갇혀 생목숨을 잃었으니 그 원한과 분노가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그 외가도 노론이요, 처가도 노론이며 궁녀,환관을 비롯한 나인 권속들조차 모두 저들의 심복이니, 비록 왕좌에 앉았다 하나 고립 무원한 상태여서 저들의 세력을 타도하여 설분한다는 것은 거의 가망 없는 일이었다. 이에 표면적으로는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을 송자로 떠받들어 극진한 예우를 가함으로써 노론 세력을 우대하는 체하면서 저들이 내세웠던 성리학적 명분론에 추호라도 어그러짐이 있으면 그를 빌미 삼아 가차없이 처단하는 각개격파형식으로 노론의 교목세가들을 제압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노론과 적대 관계에 있던 기호남인을 점차 등용하여 근위 세력으로 키워 나가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이었다. 또한 정조는 조선 성리학적 이념 체제하에서 신분적 제약을 받고 있던 불만 지식층인 서얼을 포섭하여, 이들을 규장각에 두고 청조 고증학인 북학을 받아들이게 하여 반 성리학적 기치를 은연중 표방하기에 이른다. 이는 곧 새로운 이념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한 일대 혁신을 뜻하는 것이다.이를 위해 정조는 수원에 별도(別都)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별도에서 개혁정치를 주도해 나갈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런 궁리는 현륭원을 원수원부(原水原府)진산인 화산에 천묘하고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올 때 벌써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니 이 일체의 역사를 남인 총수로 근밀지임을 담당하던 채제공에게 총괄케 하고, 실무는 소론계열의 조심태가 전담도록 한 것으로 보아도 짐작이 가능하다.그래서 정조 13년에 현륭원 천장이 이루어지고 수원부가 옮겨가서 새 수원이 1천여호 대읍으로 발전하여 읍치의 면모를 갖추게 되자 정조는 그 18년(1794)에수원을 별도로 확장할 뜻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름을 화성으로 고치는 한편 1만여 호의 인구가 생활할 수 있는 성곽도시의 건설을 서두르게 된다.
* 용주사를 찾아서
인구 60만으로 불어나 이미 정조가 꿈꾸던 만호 장안의 10배 이상으로 커진 수원은 성곽이 도시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와 있는 형편이다. 이런 대도시를 관통하여 남쪽으로 10여분 달리다 보면 병점, 즉 떡전거리가 나오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나 있는 큰길 입구에 용주사 입구, 융건릉 입구, 수원대학 입구 등의 푯말이 세워져 있다. 이 길을 따라 다시 10여분 달려가면 용주사 일주문 앞에 당도하게 되는데 길가 평지라서 처음 가는 이들은 모르고 그냥 지나쳐 달렸다가 되돌아오는 촌극을 벌였다. 다시 몇분 더 달려가면 사도세자, 즉 장조의 융릉과 정조의 건릉이 있는 융건릉에 이르게 된다.삼문 밖에 나서 삼문을 보면 그 형태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임을 알수 있다. 삼문 좌우로 줄행랑이 달려 있어 꼭 육상궁과 같은 별묘의 삼문형태를 하고 있다. 아마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이런 건축양식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정문위 두쪽 대문 위에는 금강역사상이 그려져 외호의 책무를 담당하게 하였으니 그 위 문미에는 용주사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방서를 보니 일제시대 주로 활동하였던 죽농 안순환의 글씨이다. 네 기둥위 주련 역시 그의 글씨인데 '용주사불(龍珠寺佛)'의 네 자를 첫 글자로 한 네귀의 글귀이다. '용의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 얻어 조화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라는 뜻이다.삼문안에 들어서자 누각 형태의 천보루(天保樓) 건물이 앞에 솟구치는데 마치궁궐 건물처럼 아래층은 모두 돌기둥을 쓰고 있으며 2층 누각은 삼면을 모두 난간 두른 누마루로 돌리고 있다. 정조의 임어를 대비해서 행궁규모로 지은 집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를 가지게 되는 모양이다. 천보루라는 누각 명칭도 왕궁에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글씨는 정조 시대의 글씨지만 누구 글씨인지 확인할수 없다.천보루 전면 중앙에 5층석탑 하나가 서 있는데 고려 후기 이후의 양식을 보인다.천보루 좌우로 동쪽 나유타료와 서쪽 만수리실이 구(口)자형의 건축구조로 쌍동
이처럼 연결되어 지어져 있는 것 역시 다른 사원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는 마치 대가의 사랑채를 연상케 하는 건축 구조로 나유타료와 만수리실모두가 외정으로 문이나 있고 원래는 툇마루까지 돌려 있었다 한다. 외정 쪽의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잇는 그런 반가 건물 양식 그대로이다. 이 역시 재궁우로 지어진 사찰 건물이기 때문에 이런 특징을 보인것이라고 생각한다.
천보루 밑을 지나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니 천보루 뒤편에 홍제루(弘濟樓)란 현판이 걸려있다. 차우 김찬규의 글씨이다. 그 동쪽 곁 천보루 좌측 종루 벽면에는일제시 강대련 주지때 서울에서 한다하는 문인묵객들이 이곳에 와서 그를 위해기념 휘호한 것들을 모아 판각해 놓은 목판이 걸려 있다.
* 단원 김홍도가 그린 후불탱화
대웅보전 정면 계단 양쪽 대우석(大隅石)이 그대로 왕릉 정자각 계단 대우석 형식이다. 4분의 1 원형 표면에 비운문(飛雲文)이 새겨져 있고, 북 모양의 막음돌에 삼태극 문양과 모란문이 새겨진 것도 그대로 인데 이는 현륭원, 즉 융릉 정저각 계단 대우석과 동일 양식이다.
계단 동쪽에는 팔뚝 굵기의 회양목이 한 그루 서 있는데 이것이 정조 수식수라고 전해진다. 수령 300년 정도로 추정되어 천연기념물 제1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3칸에 팔작집으로 네 귀퉁이에 활주가 받쳐져 있으며 매우 단단하게 지어져 있다. 왕명을 받들어 정성을 다해 지은 집이니 그럴밖에 없었으리라.
전각내부는 중앙에 석가여래, 동쪽이 동방약사여래, 서쪽이 서방 아미타불이 있다. 모두 목각불로 높이가 110cm이다. 창건직후 기록인 '본사 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 의하면 서방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파근사 조각승 봉현이 조성하고, 동방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조각승 상식이 조성하였으며 중앙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 조각사 계초가 조성하였다고 한다.
내부의 후불탱화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그림 기법이 단원의 다른 그림과 동떨어진 서양화 풍이다. 탱화에 표현된 불보살 및 그권속들의 얼굴이 얼굴치고는 너무 크다고 할 만큼 우뚝 솟은 콧날을 가진 청수
한 용모를 가진 것이 단원 스스로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이 그림은 또한 전무후무하게 태서의 음영법, 즉 서영화법으로 그려져 있으며,이는 단원이 북학에 심취해 있던 정조의 명령에 따라 북경 천주당에 가서 서양법으로 그려진 천주교 성화를 보고 와 그 법식대로 그려 냈으리라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도리가 없다.
* 왕실 원찰의 흔적
탱화 위로는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불단을 장엄하게 하고 있는데. 그 솜씨가 가히 국공의 솜씨라 할 만하다. 닫집 아래에 오룡을 조각하여 구름속에 노닐게 하고, 좌우로는 동자형의 비천을 걸었으며. 그 전면 중앙에는 태양을 조각해 걸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비상하는 봉황새도 걸어 놓았으니, 이 모든 조각품들이 천상세계를 상징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겠다.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절의 법당과 크게 비교된다. 이는 정조가 비명에간 부친의 지원지통을 위안하기 위해 그 혼백을 모시는 원찰로 지성을 다했기때문이리라..동쪽 벽에는 상겸이 그린 감로탱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걸려있지 않고, 북쪽벽에는 민관이 그린 삼장탱이 걸려 있다. 이 모두 단원이 그린 후불탱을 그릴때이 그려진 것이나 화법은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불화기법이라 전혀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탱화들이 모셔진 동벽과 북벽이도 탱화위로 회랑형의 닫집이정교하게 장식되어져 있다.
불단 뒤에 높이 2m 정도의 육각당형 목조 감실 두채가 방치되어 있는데 원래지장전에 놓여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한다. 옥개의 조각기법이 매우 정교하고 옥신이 상하로 나뉘어 육면이 칸살 없는 창처럼 터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도
세자와 혜경궁의 위폐를 모시던 감일이었던 듯하다.
대웅전을 서쪽에 범종각은 높이 145cm, 직경 86cm, 중량 1,500kg의 적지 않은규모를 가진 동종이 걸려 있다. 신라종의 특색을 모두 갖추었으나 표면에 조각된 비천상이 경직되어 있어 10세기경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든다.대웅전 동쪽을 돌아 나오면 정무선사가 1981년에 건립하였다는 3층 은중경탑이있다. 정조가 하사한 은중경판을 복각하여 세운 탑으로 날로 쇠퇴해 가는 효사상을 선양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다시 동쪽으로 오르면 5층석탑이 있다. 높이가 4m정도인데 상륜부가 연잎과 연봉으로 꾸며져 있는 것으로 보아 용주사 창건당시에 세워진 사리탑인 듯 하다.
* 융릉은 천하명당
이곳은 속리산으로부터 북주한 한남정맥이 죽산 칠현산, 장항령을 거쳐 안성 성산과 수원 광교산을 지나 관악산으로 올라가다가 광교산에서 일 지맥이 서쪽으로 갈리어 가면서 다시 남쪽 가지를 쳐 내어 이루어 놓은 터인데 소위 '서린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의 복룡대지라는 것이다.
이 터는 일찍이 우리나라 감여가의 시조라는 도선국사가 길지로 지목하였었고,영릉 봉릉시에는 감여술에 통달하였다는 윤선도가 극력 추천하였던 대지로 용혈사수가 진선진미아여 천리 안에 없는 터이고 천년 만에 한번이나 만날까 말까한 최고의 명당이라는 것이 수원산론(水原山論)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이에 정조는 이 산론의 주장에 매료되어 곧 이곳으로 천봉을 단행하는데 현종이후 우암 일파의 산림 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로는 박장을 주장하여 왕릉 봉분의 외호석을 쓰지 않던 전례를 깨고, 왕릉이 아닌 세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외호석을 두르고 태조릉 이래 국조 전례에 없던 와첨석 까지 첨설하여 호화를 극한능제로 묘소치례를 한다.
다만 왕릉과 차등을 둔다 하여 난간석만 두르지 않았는데, 이는 체면치레에 불과한 것이고 문무석을 비롯한 석수와 석등. 상석 등의 치레는 가히 인조 장릉과맞먹을 정도의 규모이다. 그 조각 기법도 세련미가 극에 달하여 조후기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이는데 영조시대에 한껏 꽃피었던 사생적인 진경문화가 이념적인 북학 문화로 계승발전하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 해야 할 듯하다.능상에 올라 800봉우리가 화산을 꽃잎처럼 에워싸서 화산의 이름을 얻었다는 이
명당터는 과연 눈아래 잔잔한 야산 봉우리들이 끝없이 이어지며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다.
천하제일이라는 명당 터이나 그 혈손을 삼대밖에 더 이어가지 못했다.우암 송시열은 이 터를 오환지기(五患之地)라 하여 한사코 반대했다고 한다.
*명찰순례 1, (최완수, 대원사,1994)
<용주사>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에 있는 사찰. 대한 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854년(문성왕 16)에 창건하여 952년 (광종 3)에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에 창건된사찰이다.
1970년(정조14)에 사일이 팔도도화주가 되어 철학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시전8만 7000여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명복을 빌어주는 능사로 창건되었다. 창건과 동시에 이절은 전국 5규정소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하였다. 그 뒤 1900년에 용해가중수하였고, 1911년에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 안양, 남양, 죽산, 진위, 음죽, 용인, 고양, 시흥 등에 잇는 48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1931년에 강대련이 중수하였고, 1955년에 관응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였으며, 1966년 주지 희섭이동국역경원의 역장을 두었고,1969년 전강이 중앙성원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잇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790년에 건립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시방칠등각, 범봉각, 법고각, 봉향각, 천보루, 나유타료, 만수리실, 삼문각, 일주문, 수각,동별당 등이 있다 또 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금동향로, 제12호인 청동향로, 제13호인 상량문, 제14호인 어제봉불기 복게수사본, 제15호인 병풍, 제16호인 대웅전후불탱화, 제17호인 동판.석판.목판의불설부모은중경판등이 있다.
<용주사 범종>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 용주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동종 높이 144cm, 입지름 87cm 국보 제120호. 이 동종은 고료 전기의 동종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거종의 하나이며 신라동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동종의 정상에는 용뉴와 용통을 갖추었고, 특히 용통은 세잔한 연주문으로 돌려서 6단으로 구분하고당초문과 연판으로 장식하였는데, 연판은 원형, 반원형, 타원형 등 여러 형태이다. 종정의 천판에는 문양이 없으며 상대와 하대의 문양은 서로 다른 형태의 문양대로 장식하였다. 다만 동일한 것은 상대. 하대 유곽, 당좌 등의 내외 주연만세잔한 연주문대로 하였고 그 내부에 화려한 문양대로 장식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상대의 문양은 반원권 문양을 상하 엇갈려서 장식하고 그 사이사이에 당초문으로 장식하였으며, 하대의 문양은 상대와 달리 연속되는 당초문으로 장식한 것이 다르다. 특히 하대의 당초문에 있어서 당초가 한번 선곡하는 중앙에 8판 내지 9판의 연화문을 독립시켜 배치한 것이 이색적이다. 유곽 역시 연주문대내에 당초문으로 장식하였고, 유두는 원형의 연판좌 위에 돌기된 9개의 유두를가지고 있다. 4개소의 유곽 밑으로 원형의 당좌를 배치하고 있는데, 연화를 주문양으로 하고 그 둘레에 연주문대를 돌리고 다시 당초문으로 돌린 다음 또다시연주문대로 조식하였다. 종신에는 천의를 날리며 승천하는 비천상과 결가부좌안채 두광을 갖추고 합장하여 승천하는 3존상을 교대로 배치한 특수한 양식이다.
원래 이 동종은 무명종이었으나 후각한 명문이 있어 이에 따라 854년(문성왕16)에 주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는 동종의 형태와 일치되지 않는다. 종신의 1개소에는 32자의 명문이 각명되어 있고 또 1개소에는 55자의 명문이 각명
되어 있다. 또한 이 동종은 신라동종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고려 전기의종으로 반원권 문양을 상대에 장식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용주사 병풍>
2폭 가로 65.6cm 세로 222.5c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호 팔폭병과 사폭형 둘이있는데 모두 초목그림을 담고 있다. 이것은 정조가 아버지인 장헌세자원침을 양주땅 배봉산에서 이곳 화산으로 이장하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1796년(정조20)에용주사를 자복사로 창건한 뒤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하사한 것이라고 전한다그림의 화법이 매우 정교하여 우리나라 화단의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는. 민속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림의 솜씨로 보아서 김홍도의 그림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용주사불설부모은중경판>
용주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부모은중경'의 경문과 변상도를 새긴 목판, 석판, 동판.경기도유형문화재 제17호. 모두 73판으로 목판에는 한역본과 국역본 변상도가새겨져 있고, 석판에는 한역본, 동판에는 변상도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 부모은중경판은 정조가 생부인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세우고 난 뒤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뜻에서 정성을 기울여 1796년 (정조20)에 간행한 것으로경문과 변상도의 새김이 매우 정교하다
<용주사삼장보살도>
용주사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시대 삼장보살 그림 1791년(영조15) 작.세로 173cm, 가로 318cm. 비단바탕에 채색. 상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법회를 묘사한 그림으로서, 인물의 형태라든지 구도, 필선, 색채 등에서 도식화되고 형식화된 18세기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화면에는 인물들을 가득 배치하여 거의 여유 없는 화면구성을 하였는데 삼장보살이라든지 주요협시들을 일렬로 배열하여 변화 없고 일룰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천장.
지장.지지보살의 위치와 크기는 현격히 줄어들고, 반면 협시보살을 비롯한 그 밖의 권속들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구도에서 다소 이완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인물들의 형태는 약간 위축되고 수척해졌으며 신체는 대체로 세장한 편인데 경직되고 도식화된 모습이 크게 대두되었다. 특히 일부 인물들은 얼굴에 비하여 신체가 유난히 짧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필선에서도 잘 나타나 선이 딱딱하고 경직되었으며, 느슨한 필선으로 처리한 인물들은 당당하지 못하고 좀 위축된 느낌이 드는데 시왕이나 협시 권속들의 의습선같은 곳에서는 형식화된 면이 특히 두드러져 보인다. 색채 또한 이 불화의 시대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녹색과 붉은 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짙고 탁하게 칠해서 선명도는 극히 낮은 편이다 따라서 이 불화는 이완된 구도 형식화된인물들의 모습과 의습선,색채 등에서 19세기의 형식화되고 도식화되는 불화의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이라고 보여진다.
<용주사어제봉불기복게사본>
용주사에 보존되어 있는 수사본 기복게 가로 45cm 세로 68cm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4호 . 2책불교식 가사체는 정조가 손수 지은 어제로 글씨는 해서체이다. 즉위20년, 곧
1795년에 지은 것으로 "절을 현륭원의 재궁으로 세웠다. 소자는 8만4000의 보안법문의 경의를 썼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삼가 게어를 지음으로써 삼업의공양을 드리며 보은의 불공을 드립니다."고 밝히고 초서일분 곧 사람과 하늘을
대신해서 고하는 처음 차례분에서 "혜일같은 대성의 존귀하심이여 그 위덕을 헤아려 알지 못하나니 종을 쳐서 사주에 고하여 뭇 백성을 깨우쳐 바른땅에 오르게 하나이다"고 서설하였다. 정종분에서는 대지숙인(大地宿因), 공양칠보(供養七寶), 장엄만게(壯嚴萬偈), 응운발상(應運發祥), 복덕무량(福德無量), 제불호우(諸佛護佑), 보살원력(菩薩願力)에 관한 내용을 실었고 결게분(結偈分)에서는 정토극락, 항사보록(恒沙寶錄)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용주사 회양나무>
천연기념물 제264호. 회양나무는 회양목과에 속하는 상록활엽의 관목 또는 소교목으로 정원수나 생울타리로 많이 심고 있다. 용주사의 회양나무는 용주사 경내에서 독립수로 자라고 있는데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15권 (한국정신문화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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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龍珠寺)---왕가의 흔적을 밟으며
깊은 산중이 아니다. 수원에서 남쪽으로 10리 저쪽에 있는 절이다. 그러나 화산의 거대한 숲속에 있는 절이다. 이조 영정조 이래의 국찰이다. 그저 평지를 가면그 절은 나타나는 것이다. 평지의 좋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울창한 숲을 만나서그 길은 흡인되고 만다.본디 이 절터에는 신라 문성왕16년에 창건된 갈양사가 있었다. 그것이 고려 광종때의 호란에 의해서 불타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빈 절터에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그런 절터에 이조의 어린 임금은 이조 당쟁의 첫머리를 조정하고 문은(文運)을일으켜 이른바 영정문화(英正文化)를 이룩했던 것이다. 사실 그 왕조를 전후해서근세문화는 변전되었고 문물의 사대성을 주체화하는 의식이 발아했던 것이다.그런 시대를 다스린 간절한 임금 정조는 그러나 난세의 임금이었다. 왕호는 왕이 승하한 다음에 추서된다. 종(宗)이 있고 조(祖)가 있고 군(君)이 있다. 종이붙은 왕은 태평세의 왕이다. 군은 포악한 임금이다. 조는 난세에서 난을 만나거 난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다. 그래서 건국 왕위는 혁명가이므로 조가 많고 중흥 왕위도 난으로 된 임금과 난을 만난 임금은 조가 붙는다. 정조시대 역시 난세였다.더구나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흉금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는 정한의 왕이었다. 사도세자는 훗날 장조(莊祖)라고 왕위가 붙여졌지만 뒤주 안에 같혀서
죽음을 당한 비극의 세자였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추효(追孝)는 어진 임금 정조에게는 숙명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산소를 양주에 옮겨 용주사에 모시고 용주사를 창건케 하여 현륭원의 자복재사(資福齎社)로 정했다. 그는 당대의 고승 보경당(寶鏡堂)으로 하여금 불법에 스스로 귀의하고 그의 권유로 경기 제1의 대가람 용주사를 이룩한 것이다. 중앙 관방(官房)과 8도 대관들이 기진(寄進)한 시주만 해도 거금 8만냥이나 되었던 것이다. 보경당대사가 도총섭으로 이 창건 불사를 보필했다.용주사는 그래서 곳곳마다 왕가의 흔적이 많으며 사찰 법물(法物)들도 진귀한
것이 많다. 용주사에 가까와지면 대황리 라는 곳이 있다. 용주사 창건의 전설이여기서 비롯된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 묘소를 물색하느라고 친히 예조신하들을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알고 보경당이 임금의 행차가 오기를 기다려서 부모은중경을 설하면서 이 너머에 능위가 있다고 진언하여 묘소를 정했던 것이다. 보경당이 임금을 기다린 대황리가 바로 여기다.
왕은 절을 세우고 고승 의소인악(義沼仁岳)스님을 증사로 초치하고 불복장원문경찬소(佛服臟願文慶讚疎)를 짓게 했다. 의소스님이라면 이조의 유교체제를 육화해서 불유 습합을 이룬 사상가로 유명하다. 그는 심, 성, 명, 리 (心性命理)를 하나로 보는 양명학을 숭상하였으며 그의 '만불일심설(萬佛一心說)' 은 이조 불교의 한 특색으로 남겨진다. 이조체제라고 하지만 그는 왕도의 주자설을 비유적으로 부정하고 대담한 불교 유교의 습합을 꽈한 것이다.
일설에는 꿈에 용이 여의주를 주었기 때문에 용주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절 어귀에 이르면 연풍교가 나타난다. 그 일대의 자연석에는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라(到此門來 莫存知解)' 라는 귀절이 있다. 지해란 여기서는 불교의 지혜가 아니라 세진에 번진 알음알이인 것이다.정조는 여기에 와서 기재(忌齎)를 친히 올리고 춘하추동의 절기마다 찾아왔던 것이다. 부왕에 대한 명복을 극진하게 빌면서 그 자신도 왕도도 밝힌 것이다.
또한 그는 보굥당으로 하여금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을 겸임케 하여 국내 각사암을 다스리도록 했다. 그래서 용주사는 정조 시대의 종궁(宗宮)이라고 할 수있다.
대웅보전은 6백평이나 되는 대당우이며, 10방 7등각, 동성각, 호성각, 명부전 등의 전각이 있다. 신라시대의 석조 7층 사리탑이 어떤 인연으로 해서 이 절에 있다는 것도 재미있다.대웅보전의 현판도 정조 친필이며 용주사 창건문, 상량도문 정조 어제(御製)인것이다. 법당의 후불탱화 역시 무병 화공의 솜씨가 아니라 당대의 화사(畵師) 단원 김홍도의 역작으로 농염선려(濃艶鮮麗)한 채색과 유장한 화풍으로 석가여래좌상을 중심하여 아미타불여래상, 약사여래상을 좌우에 두고 가섭, 아란, 재석들의 제사, 수호신상을 의노애락의 각영 각색 표정을 짓게 한 30상의 대형 화면이
다.대웅보전의 뒤 십방칠등각(十方七燈閣) 내벽에도 3폭의 불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 것이 단원의 진필이라고 한다.
정조 대왕은 단원이 이 탱화 불사를 하기 전에 7일 동안의 기도를 시켰다.절의 창건이나 절에 관련된 사업은 일단 기도 운운의 전설이 많다. 그것은 기도를 여자들의 기복으로 생각하는 수준에는 너무 진부한 여승 취미라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기도란 불사에 있어서 일종의 촌법인 것이다. 술 한잔 마시고 목수가먹줄을 투,ㅇ기기 시작하는 것과 기도 7일을 회양한 정성으로 불사에 대드는 것은 같다. 다만 기도의 가피력(加被力)은 고대, 중세, 근세 사람들이 믿는 큰 위안이었다.
융능(隆陵)의 사도세자 원혼을 진혼하는 국찰 용주사는 정조의 경건한 필체의장건기 상하권이 있다. 또한 고지(古地)에 남아 있던 갈양사 범종이 있어서 종신(鍾身)에는 '成皇山葛陽寺梵鍾一口의 뚜렷한 글씨가 각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오늘날 용주사는 이런 국찰의 면모를 재우고 조계종 강원(講院)으로서 운허, 관응, 탄허 등의 강백을 모신 교학 선양의 도량이 되었다.이 절은 일주문이 없다. 그대신 흙으로 구운 손오공을 경내 사방이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