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상도동 양녕대군 묘
양녕대군은 참으로 자유분망한 인물이었다.
틀에 박힌 법도를 지켜야만 하는 세자로서의 생활은 그에게는 감옥살이 그 자체였다.
세월이 흘러도 세자의 행동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참다못한 태종은 세자에게 반성문을 써서
종묘에 고하고 임금에게 올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태종 7년 2월 22일 어명을 받은 세자는 종묘에 나가
다음과 같은 반성문을 낭독했다.
우리 부왕 전하께서는 신 이제를 세자로 삼으시고 아침저녁으로 교훈을 내리시고 서연을 두어 날마다 경서를 공부하게 했습니다.
이는 세자 된 직분을 지극히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군부의 마음을 우러러 받들지 못하고 사욕 때문에 법도를
무너뜨렸습니다. 방종 때문에 예의를 무너뜨려 여러 번 어버이께 순종하지 않아 마음을 상하게 했고, 위로는 조종의 덕을
더럽혔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신이 비록 우매하나 양심의 발로는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일찍이 글을 읽어
의리를 대략이나마 아니 감히 마음을 씻고 행실을 고쳐 그 끝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자애자신할 조목을 갖춰 조
종의 영전에 다짐하는 바입니다.신 이제는 타고난 바탕이 우완하고 둔하며 마음 씀씀이가 광망합니다. 지금 비록 죄를 뉘우쳤다 해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해 다시 전일의 미혹을 밟을까 염려하여 스스로 경계하는 여덟 가지를 가지고 종묘와 하늘에 계신 신령에게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세자는 반성문을 제출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남의 첩을 빼앗아 세자궁에 들였다가 발각됐다.
태종 18년(1418) 3월 6일 실록에 그 전말이 소개되어 있다.
임금이 조말생에게 비밀리에 이르기를 “세자가 지난 정유년에 곽선의 첩인 어리라는 여자를 빼앗아 세자궁에 들였다가
발각되어 쫓겨났다. 어느 날 청평궁 궁주, 평양궁 궁주 등이 와서 중궁을 보는데, 내가 마침 이르니 평양궁 궁주가 말하기를
‘세자전에서 유모를 구하기에 부득이 이를 보냈습니다’ 했다. 이에 중궁이 놀라 ‘무슨 유모란 말이냐’ 하니 궁주가 말하기를
‘어리의 소산입니다’ 했다(어리가 양녕대군의 자식을 출산했기 때문에 양녕대군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이 유모를 바친 것이다).
사연을 들어보니 김한로의 처가 김한로의 말을 따라 종이라 속이고 데리고 들어가 바쳤다는 것이다” 하고는 조말생에게
이렇게 명했다.
“세자가 어려서 체모가 장대하여 장차 학문이 이루어지면 종묘사직을 부탁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가르치고 깨우쳤다.
이제 수염이 덥수룩하고 자식이 있으나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황음하기가 날로 심하다. 역대 군주 가운데 태자에게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바꾼 자가 있었고 참언을 써서 폐한 자가 있었다. 내가 일찍이 이를 거울삼아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세자의 행동이 이와 같으니 어쩌겠느냐. 태조께서 개국한 지 오래되지 않아 그 손자에 이르러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장차 어찌하겠느냐” 하고는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조말생이 김한로에게 벌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우선 스스로 새 사람 되기를 기다리고 이 일을 누설하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양녕대군이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임금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개월 후인 태종 18년(1418) 6월 2일 여러 대신들은 물론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날 상소문에 세자 양녕대군의 파행과 기행이 적나라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번에 세자가 역신(逆臣) 구종수 등과 사통하여 불의를 자행했을 때 즉시 폐하여 추방하는 것이 합당한데 전하께서 맏아들이라 하여 차마 폐하지 못했습니다. 또 세자에게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도록 종묘에 고하게 하여 정신 차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세자는 허물을 뉘우치고 자중하려는 뜻이 없으니 그 정황이 심합니다. 그 죄가 하늘을 속이고 종묘를 속이고 임금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는 데 이르렀으니 그가 종사를 이어받아 제사를 주장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세자는 허물을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원망하고 노여운 마음을 일으켜 오만하게 상서(上書)하니 신이 놀라고 전율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상서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세자를 폐하여 외방으로 내치도록 허락하시면 공도에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6월 6일 태종은 세자를 폐할 결심을 하고 문귀와 최한을 불러 “세자에게 나의 말을 전하라”고 했다.
이때 임금이 통곡하면서 목이 메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너는 비록 광패했으나 새 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 뉘우치지 않고 개전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백관들이 지금 너의 죄를 가지고 폐하기를 청하기 때문에 부득이 이에 따랐으니 그리 알라. 네가 화를 자초했으니
나와 너는 부자이지만 군신의 도리가 있다.네가 옛날에 나에게 고하기를 ‘자리를 사양하고 시위(임금을 모시어 호위함)하고
싶습니다’ 했는데 내가 안 된다고 했다. 이제 세자 자리를 사양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바라던 바다."
효령대군(태종의 2남)은 바탕이 나약하나 충녕대군(태종의 3남. 후에 세종)은 고명하기 때문에 내가 백관의 청으로
세자를 삼았다.양녕대군은 1416년 전직 고위관리 곽선의 첩 어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요즘시대로 표현하면
불륜이었던 것이다.양녕대군은 태종의 극심한 반대에도 어리와의 비밀 연애를 즐기다 결국 1418년 결국 어리는
양녕대군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태종은 노발대발하고 결국 양녕대군은 종묘에 반성문을 올리며 용서를 빈다.
그런데 사건이 일단락 될 쯤 충녕대군을 마주친 양녕대군이 말을 합니다.
“너지?”
세자가 노하여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라고 다그친 것이다.
이에 충녕대군은 침묵을 지킨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셨으니, 지금까지 신의 여러 첩을 내보내시어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한데 어찌 반성하여 스스로 책망하지 않으십니까?
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은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아버지도 그랬으면 서, 저한테는 왜 그러세요? "다.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강제로 출궁하게 된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자색이 매우 빼어났던 기생 어리(於里)에게 빠져 결국 세자의 자리에서 폐해진 양녕대군이 광주로 갈 때
이곳 광나루에서 배를 탔다.광나루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다.
태종 18년 (1418) 6월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이를 응낙하였으나
곧 가까운 광주(廣州)로 바꾸어 나가게 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나는 날, 양녕대군은 동대문 밖까지 그를 수행하던 원윤(元胤)에게
"경은 무슨 일로 나를 따라 오는가?" 고 물었다.
원 윤은,
"호송하라는 분부이시옵니다." 하니,
양녕대군은,
"앞으로는 이 땅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며 눈물을 지었다.
작별할 때 원윤에게 말하길,
"…죄가 큰데도 죽지 않은 것은 오직 나라님의 덕택이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는지…
이처럼 불효하였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나라님을 뵈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하였다.
호송을 하던 원윤은 양녕대군의 일행 가운데
여자의 숫자가 나라에서 정해 준 인원보다도 많다고 하여
두 사람의 여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이 보고를 들은 태종은,
"그 두 여자도 다 양녕의 첩이다.
빼앗아 온 것은 경의 잘못이다." 하고,
곧 광나루로 되돌려 보내주도록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