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법 해설 (이관희)
예술창작이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들어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작품을 보는 것이 표현론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들어내서 표현하는 데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것을 객관화 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 관점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창작문학은 객관적 서술방법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고, 일반산문문학은 주관적 서술방법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창작문학의 어려움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보편적 대상으로 객관화 시키는 창작술 여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주관적 관점에서 서술하는 에세이(수필)문학은 쉬운 문학인가? 그렇지 않다.
주관적 관점의 서술의 어려움은 바로 주관이라는 그 '주관' 자체의 일상적 수준을 뛰어 넘는 높은 문학적 가치를 요구한다는 데에 있다.
몽테뉴 이전에도 동서양 모두에 수필(에세이) 형식의 글들이 있어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몽테뉴의 에세이에 와서 비로소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서게 되었는가?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이를 "내 집안 일이나 사사 일을 말 해 보는 것밖에 다른 어떤 목적도 있지 않다."고 하였다. 자신에 관한 주관적 서술방법의 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는 몽테뉴의 그 같은 주관적 서술방법의 글에 대해서 비로소 에세이 장르를 세운 사람이라는 명예를 안겨주고 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까닭은 몽테뉴의 에세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일상적 가치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높은 수준의 주관적 관점의 가치에 있었던 것이다.
흔히 창작은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노란 개나리 꽃을 본 아이가 "엄마, 엄마, 노랑나비! 노랑나비!"라고 감탄한다면 그것이 곧 창작의 시작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개나리꽃에 관한 일상적 판단을 뛰어 넘는 높은 생각을 지어 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김중구 작가가 보내온 산문작품을 읽으면서 이상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김중구 작가가 갑작스런 췌장암 진단을 받고 깊은 산 중에 들어가 자연요법에 의한 요양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의 소재는 외적인 어떤 대상에 대한 일상적 감상문도 아니고, 어떤 문제에 관한 일상적인 생각하기도 아니다. 갑작스런 중병 진단을 받은 후 처음 얼마 동안의 혼란기를 지나 산 중에 들어가 자연요법에 자신의 건강을 맡기게 된 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갑작스런 중병 진단을 받은 처음 얼마의 기간 동안의 혼란기를 지나 마침내 산 중에 들어가 자연요법에 자신의 건강을 맡기게 된 그 상태. 그것은 어떤 외적 대상, 예를 들면 빼어난 자연경관에 대한 감상일 수도 없고, 일상적 생활의 어떤 문제에 대한 일상적 수준의 사색일 수도 없는 어떤 절대치의 상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들의 일상적인 창작 소재, 혹은 대상은 어차피 일상적 소재이며 대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같은 일상적 소재나 대상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일상적이 아닌 높은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작가들의 창작의 숙제인 것이다.
또다시 되풀이하여 말하면 작가들의 일상적 창작 소재는 김중구 작가가 쓴 이 작품의 소재와 같은 삶의 어떤 절대치로서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작품과 같은 소재는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만에 하나 한 번쯤이나 있을까한 것이 인생인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이가 위대한 까닭은 바로 한 사람의 일생에서 한 번쯤이나 있을까한 일상적 가치를 훨씬 뛰어 넘는 높은 정신적 가치를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김중구 작가가 쓴 이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산문의 세계가 바로 그 같은 일상적 가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삶의 어떤 절대치인 것이다.
김중구 작가가 오른 대명산은 사실의 자연 사물로서의 그 산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한 번이나마 있을까한 절대치로서의 높은 정신적 산이었던 것이다. 그가 산봉우리를 올려다 보며 떼어 놓은 발걸음 하나 하나는 그가 일평생 살아오면서 떼어 놓았던 무수한 발걸음 같은 그런 일상적 발걸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산봉우리를 향한 그의 발걸음은 암이라는 인류 공동의 적을 한 발 한 발 정복하며 올라간 발걸음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 가치를 뛰어 넘는 사색 이상이었으며, 일상적 감상의 수준을 뛰어 넘는 경이로운 생명 사랑과 신뢰의 절대치 그 자체였던 것이다. 김중구 작가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은 평범한 일상인으로서는 느끼지도, 짐작도 못할 그런 절대치.
그렇게 해서 그는 산 아래 있는 일상인들은 올려다 보지도 못할 높은 에세이문학의 정상, 그 이상을 뛰어 넘는 승자로 대명산 위에 우뚝 선 것이다.
대명산을 오르다
김중구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새벽기도로 아침을 여는 마음은 가볍고 상쾌한 기분이다. 욕심 없는 평온의 마음이다. 하느님께 의지하며 내 생명 허락하시는 날까지 오늘 하루에 만족하고 충실하고 싶다. 그것이 지금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 아닌가.
잣나무 숲 사이로 간간히 불어오는 아침의 산 공기는 맑다. 그 숲 사이를 뚫고 나에게 전달되는 햇살은 생명의 빛이며 오늘 하루의 희망의 빛이기도 하다. 아직 녹지 않은 얼음장 밑으로 여유자적하며 흐르는 계곡의 물은 깨끗하고 그 마음도 맑다. 등산길 따라 오르는 숲 사이사이에 이름 모를 소녀 새들의 합창이 울적한 내 마음의 벗이 되어준다. 숲과 풀잎 사이를 비비고 푸드득 푸드득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기어오르는 장끼와 까투리 한 쌍이 사랑스럽다. 그 사이에 노랑 파랑 나비 한 쌍이 내 앞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른거리며 구애를 하는 것 같다.
요양 차 이곳 대명산(경기 양평군 서종면 명달리 소재) 자락에 온지도 꼭 한 달이 되어간다.음산하고 을씨년스러웠던 2월 28일 췌장암 말기(간, 임파로 전이) 판정을 받고 수술도 못하게 되었다. 병원의 항암치료까지 거부하며, 자연과 면역을 강화하는 식이요법 치료차 이곳에 오게 되었다. 검사 결과를 수용하면서 10여일의 입원기간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걸어서 병원 문을 나올 수 있는 것도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의지하며, 빠르게 결정한 가족애와 담담한 여유를 가진 것도 나 자신을 믿어준 것에도 감사한다.
이곳 요양원에 와 첫날 창문을 여는 마음은 이러했다. 병원의 검사기간을 포함해서 그 동안의 내 삶까지도 갇혀있던 새장을 박차고 나와 창공을 마음껏 훨훨 날을 수 있는 확신을 얻었다. 자연은 지쳐있는 나를 보듬어 준다는 강한 메시지를 받았다. 매일 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 4시간의 등산과 산책을 하며, 자연 그대로의 삶에 충실하고자 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벗 삼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29,104,130,116), 윌리엄 워즈워드의 무지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때로는 김남주 시인의 사랑은, 이성복의 서시를, 신경림의 갈대를,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등을 그날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사정없이 낭송하며 중얼거리며 자연의 숲과 시에 어울려 한 달을 보냈다. 행복하며 감사한 시간이기도 하다. 과분할 정도로 사랑과 격려와 용기를 준 지인들과 친구들 가족들에게 한없는 감사함을 가졌다. 보답하는 길은 건강을 회복하여 새로운 사명감으로 봉사하며 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이제 한 달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본래 도전을 좋아하는 성품이다. 그 동안 한 달의 체력을 확인해보는 도전이 시작되었다. 평소 오전에 2시간의 운동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입산 요양 기념 등반이라고나 할까. 한 달 동안의 산행은 대명산 정상 봉우리만 쳐다보면서 다녔다. 그 동안 올려다만 보던 대명산 정상의 능선으로, 발길을 확 틀었다. (대명산 정상은 어림잡아 750m 고지가 넘을 것 같다.) 언제 한번 꼭 도전해 보고 싶었던 날이 바로 오늘이다. 갈참나무 잎만 수북하게 쌓인, 아무도 가지 않은 능선의 길은 한적하기보다 적막감이 깃들었다.
췌장암 말기 환자의 체력은 어디까지일까 정상을 꼭 올라가야지 암 정복의 목표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상을 가는 길 중간 중간에 큰 바위와 장애물과 급경사가 몇 군데나 있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럽고 낙엽으로 살짝 가린 경사 길은 잘 못 디디면 저 아래 밑으로 떨어질 판이다.양지바른 곳으로 돌아가려니 급경사에 낙엽이 발이 푹 빠지도록 수북이 쌓여있다. 실수라도 하면 낙엽과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정복이란 쉽지 않은 길이다”는 것이 새삼스럽지가 않다. 급경사이지만 중간 중간에 칡덩굴과 물푸레나무들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다. 산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에게 손을 잡아준다. 쉬지 않고 조심스럽게 3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산 정상 이정표에 大明山이라고 시멘트 위에 표시되었다. 오르는 동안에는 별로 숨도 차지 않았다. 암 말기 환자의 산행이 맞나 스스로 자문해 본다. 대명산 정상에서 들이 쉬는 산 공기의 맛은 달고 고소하였다. 대명산의 공기는 내 생명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를 사랑하고 격려하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삶의 새로운 가치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새로운 제 2의 삶의 설계가 떠올랐다.
내려오는 급경사의 길은 더 위험하였다. 더 조심스럽게 바위와 비탈을 내려오니 능선의 평지에는 물푸레나무들이 새싹으로 부릅뜬 눈망울들이 사정없이 내 얼굴을 스쳐가며 반긴다.
"수고하셨어요. 당신은 해냈어요. 나는 믿어요. 당신의 건강을 찾을 것을요."
이 이른 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를 반긴다고 얼싸 안으며 물푸레나무들의 격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길참나무 낙엽이 수북이 쌓인 능선길을 따라서 봄을 만끽하며 내 생명의 꿈을 날아본다.
"너는 할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4시간 반의 등산을 가볍게 해냈다. 파이팅! 지금 이 시간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