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강에 띄워 보내는 편지
가을이다. 왠지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뚜렷하게 어떤 내용이 떠오르지도 않지만, 긴 여름을 견뎌온 오랜 갈증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안개 자욱한 섬진강과 주변 산들을 보며 열차를 타기 위해 구례교를 걸으면 가을이 만들어낸 상념에 쉽게 빠진다. 사실, 두렵기도 하다. 계절의 순서로는 중간이고 세 번째이지만, 이 짧은 가을이 지나면 곧 한 해가 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을이다. 가을의 시작이다.
가을은 두 가지 이미지로 다가선다. 수확과 조락(凋落). 풍성함과 시듦의 차이가 만들어 가는 과정을 우리는 지켜보고 살아가야 한다. 가을의 절정에는 단풍이 있다. 그래서 올해는 피아골에 가려 하고, 노고단을 거쳐 피아골로 내려오는 산행을 생각한다. 힘든 산행이겠지만, 더 늦어지기 전에, 더 힘들어지기 전에. 꼭 가려 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때 드는 대표적인 느낌은 ‘시원하다’이다. 느낌을 표현하는 감각 어휘인데, 그 온도를 재어 보면 봄날에 느끼는 ‘따뜻하다’와 비슷하다. 우리가 쾌적함을 느끼는 적정한 온도일 텐데, 계절의 변화에서 다른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올가을은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하고, 이른바 시절인연일 법한, 정다운 사람들과 만나 따뜻함을 느끼고 싶다.
밤이 익어 떨어질 즈음이면 지리산 대성동계곡을 거닐고 싶다. 그곳에서는 온통 가을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평소 고맙게 생각하거나 존경하는 작가나 시인들의 책을 펼쳐보고도 싶다. 그 책을 다 읽지 않아도 몇 구절에서 삶의 길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되새겨야 할 문구들을 정리하여 손으로 써가며 음미해 보고도 싶다. 그것이 부질없고 속절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맑은 가을하늘에는 그런 구름들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가을강은 맑고 차갑게 느껴진다. 강물의 흐름은 끊이지 않고 연속적이다. 우리네 삶도, 내 일상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반쯤은 맞고, 반은 틀릴 것이다. 앞강물 밀어내고 오는 뒷강물은 새로운 물이다. 지난날에서 형성된 나의 모습이 이어지지만, 새날을 살려면, 새로운 다짐과 각오가 필요하다. 그래서 강변에서 묻는다. 나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복잡한 생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색과 정돈의 과정을 거쳐서 좀더 간결해지고 단순해지자는 것이다. 박노해의 시 <3단>을 떠올린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그럭저럭 괜찮은 삶의 지표이지 않은가.
우리 인생을 사계에 대비하자면, 우리들은 아마도 가을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을 게다. 그래서 더욱 가을을 절실하게 느끼고, 사랑해야 한다면 순진한 억지일까.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의 말을 빌려 감히 ‘운명’을 생각한다. 여름날 그 불볕에도 풍성하게 키웠던 이파리들을 떨구어 내는 가을 나무들을 보며 말이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을 겸허하게 받아안고자 한다. 누군가 그 가을길을 함께 걸어주리라 믿는다.
이 가을에, 그대들 모두에게. 부디, 아모르파티(Amor F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