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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측 선전물과 일본서기에서 한결같이 백제 멸망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妖女', '祅婦'.
A) '......준동하는 이 오랑캐들이 도주(島洲 : 섬)에서 목숨을 훔치며, 요해처에 있는 구이(九夷)는 만리에 뚝 떨어져 있어서 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감히 천륜(天倫)을 어지럽혀 동쪽으로는 가까운 이웃을 쳐서 가까이 밝은 조칙(詔勅)을 어기며, 북쪽으로는 역수(逆豎)와 연계되어 멀리 효성(梟聲)에 응한다. 하물며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망한 계집(祅婦)을 믿어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한테만 형벌이 미치며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이 먼저 총애와 신임을 받아 표매(標梅)에 원망을 품고 저축(杼軸)에 슬픔을 머금는다......'
- 대당평백제국비명(김영심 역)
B) '...... 혹은 말하기를 백제가 스스로 망하였다(百濟自亡). 군왕의 대부인(君大夫人)인 요녀(妖女)가 무도하고, 국권을 제마음대로 빼앗아(擅奪國柄) 현량을 주살하여, 이 화를 불렀다......'
- 일본서기 제명천황 6년 가을 7월(전용신 역)
이들 기록에서는 '요녀', '요부'의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은연중에 '요녀의 이름은 은고(恩古)'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 기록 때문이다.
C) '...... 백제의 의자왕, 그의 처(妻) 은고(恩古), 그의 자(子) 융 등, 그의 신(臣) 좌평 천복, 국변성, 손등 등 모두 50여인이 가을 7월 13일 소(蘇)장군에 잡혀 당나라로 보내졌다......'
- 일본서기 제명천황 6년 겨울 10월
B)의, 같은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군왕의 대부인인 요녀'라 하였다. 따라서 '요녀'는 곧 의자왕의 처일 것이고, 그러므로 의자왕의 처 은고가 곧 '군왕의 대부인인 요녀'라는 추론이 작용하는 것이다.
'군왕의 대부인'이 왕비, 즉 왕의 처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대부인'이라는 표현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팔찌에서도 보인다.
그렇게 보면 '요녀=은고'라는 이 추론은 얼핏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왕의 처가 반드시 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보장이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은고'와 '요녀'의 '캐릭터'일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은고'와 '요녀'는 명백히 모두 의자왕의 부인이기는 하되, '어떤 부인'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우선 '은고'는, C)에서 의자왕 다음에 언급되고 있으며 또 그에 이어서 '그의 아들 융 등'이 나오고 있다.
물론 반드시 이것만 가지고 속단할 수만은 없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에 기대면 '은고'는 융의 어머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여륭묘지명'에 의하면 융의 생년은 615년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은고'는 의자왕의 첫 번째 본부인이라고 봐야 타당할 것이다. 615년에 융을 낳았으니, 융이 장자라고 치더라도 660년에는 나이도 아주 지긋할 것이다.
그런데 A)와 B)에서 묘사되고 있는 표현. '요부'와 '요녀'.
이것이 과연, 일국에서 첫째 왕자의 생모가 되는, 지긋한 연령의 왕비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표현일까?
그리고 연이어 생기는 또 한가지 의문이 있다.
백제공격의 명분을 주장하고있는 당측 선전물인 A)에서
'요부(재앙을 가져오는 여자)'로 지목되어 '충성되고 어진 사람에게 형벌이 미치'게 한 그 -만악의 근원-이,
C)에서처럼 의자왕과 부여륭 등 다른 포로들과 같은 처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대야성 싸움의 복수를 전쟁의 명분으로 내건 신라측에서는 사비성이 함락되자 대야성의 배신자인 검일과 모척을 잡아 죽였다. 특히 주범인 검일은 대대적으로 '세 가지 죄'를 공포한 후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지는 극형에 처했다.
신라측에서 내건 명분에서의 -만악의 근원-은 즉각 극형에 처해졌다.
그렇다면 당측에서 내건 명분에서의 -만악의 근원-은 어찌되어야 할까? 과연 왕 등과 함께 같은 처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요컨대 '요녀'와 '은고'를 동일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요녀'가 과연 '은고'냐 아니냐 하는 어찌보면 지엽적인 문제를 굳이 여기서 따지는 이유는,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을 일으키는', 사료가 부족한 삼국시대사의 특성 때문이다.
'요녀'와 은고' 문제는 자연스럽게 655년의 정변(?)과 태자교체설 문제 등과 얽히게 된다.
실제로 의자왕대의 태자책봉 문제에 대한 기존의 한 연구에서는, 바로 위의 기록들을 가지고
'요녀'='은고'=부여륭의 생모
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요녀'로 대표되는 세력의 집권시기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했다는 기사가 보이는 655년경으로 추정하고 이때 태자가 효에서 융으로 교체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김수태, <백제 의자왕대의 태자책봉>)
이 견해는 이후 제출된 연구에 의해 철저하게 비판되었다. 의자왕 4년에 융이 태자가 된 기사가 보이고 효가 태자로 등장하는 시기는 의자왕 20년인데 이걸 앞뒤를 바꿔 이야기함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모순이라는 것이다.(이도학,<백제 의자왕대의 정치변동에 대한 검토>)
여기서 전자의 견해가 모순에 빠진 원인이 바로 '요녀'='은고'라는 근거없는 등식에 있었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니 줄줄이 오류가 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특성상 추론에 추론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 삼국시대사 연구에서는 하챦은 사항 하나도 이렇게 중요할 수 있다.
어쨌든 그렇다면, '요녀'와 '은고'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면,
대체 '요녀'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는 백제가 망할 때 어떻게 되었을까?
현재로서는 그것을 명확하게 단정할 수 있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일종의 '영감'과 '힌트'를 주는 'B급' 자료들은 있다.
근거자료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아 사료로 인용할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요녀'의 이름을 '금화(錦花)'라고 칭하고 있다. 만약 이를 따를 수 있다면 '요녀'와 '은고'는 분명히 별개의 인물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와 아울러서, 655년 태자궁 수리 사건 이후 660년 삼국사기 기사에서 태자로 등장하며 당측 기록에서 '외왕(外王)' '소왕(小王)'으로 등장하는 부여효의 존재를 상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요녀'의 등장 시기와 부여효의 등장 시기는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륭의 어머니는 '은고'이고, 부여효의 어머니가 바로 '요녀'라고 한다면...... 무리한 추단일까?
한편 '삼천궁녀'라는 후대에 왜곡된 전설로 오염된 낙화암 이야기의 원형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데, 그 뉘앙스가 묘하다.
D) ......<백제고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살해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했다. 때문에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속설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들만이 여기에 떨어져 죽은 것이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문(明文)이 있다.
- 삼국유사 기이 1 태종 춘추공 (이민수 역)
삼국유사의 편자 일연은 당측 기록이나 삼국사기에 의자왕이 당에 끌려가 죽었음이 기록되어 있음을 들어 이 전설을 부정하면서 '다만 궁녀들만이 떨어져 죽었을 것'이라 했다.
물론 의자왕이 당에 끌려가 죽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일개 궁녀들이 자살한 것만으로 '고기'에 이런 식의 기록이 남았을까 하는 점이다. 주체가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 또한 다만 오류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요 그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강에 몸을 던졌다는 대목 또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나만의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첫댓글 백제에서 왕후를 '대부인'이라고 호칭하고 있다는 것은 '대부인'이 둘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요녀로 지목된 여인은 은고가 맞을 겁니다. 단재가 언급한 금화는 의자왕의 여러 후궁 중에 총희였을 것입니다.
대부인이 융의 어머니에서 효의 어머니로 교체가 되었다면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금화"라는 인물은 백제멸망이 신라의 음모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일방적으로 설정한 캐릭터이므로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것으로 사료됩니다만...분명한 것은 위의 본문과 삼국사기 내용으로도 태자 효가 아무래도 꺼림직하며 그 어미가 개입된 흔적 또한 우회적인 암닭으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9년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제하였다.(十九年 夏四月 太子宮 雌雞與小雀交.)라는 기사에서 암탉이라면 부여융이 아닌 태자 효의 어미로 보입니다..태자 효가 아마도 비정상적으로 상당히 시끄럽게 태자가 된듯 합니다..그리고 타사암으로 궁녀들을 이끌고 간 왕비 역시 태자 효의 어미가 실책한 것에 대한 후회 또는 자책감으로 자살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매우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본문의 내용이 매우 자세하여 나열된 의문시 되는 점에 매우 공감합니다.
백제가 망한 원인중 하나는 전통적으로 왕과 8성 대족등 귀족이 대립하던중 의자왕초기 부터 정변을 일으켜 귀족을 숙청하고 왕권강화를 꾀하여 큰성과를 거둔것으로 보이는데 의자왕의처 요녀가 국권을 휘두를수 있었다는것은 의자왕시대 왕권강화가 성공한 결과이나 왕권집중하는 과정은 성공했으나 그 행사에서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보이며 그결과 요녀및 그 주변세력이 엉터리 정치를 펼쳤다고 추론해봅니다 그결과 백제도성이 함락될때 지방지원군이 오지 않은것으로 보입니다
효태자의 모후가 은고대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으로 알 수 있죠? 설령 은고대부인이 융태자의 모후였다가 폐서인되고, 효태자의 모후가 대부인이 되었다면 백제멸망 당시 포로는 은고대부인이 아니여야 하는데 사료에는 왕의 처 은고라고 명시되어 있거든요.
이미 본문에서 은고가 군대부인인 요녀가 될 수없다는 이유를 "백제공격의 명분을 주장하고있는 당측 선전물인 A)에서 '요부(재앙을 가져오는 여자)'로 지목되어 '충성되고 어진 사람에게 형벌이 미치'게 한 그 -만악의 근원-이, C)에서처럼 의자왕과 부여륭 등 다른 포로들과 같은 처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라고 매우 공감이 가는 이유를 밝혀 놓았네요..^^
외척 정권이 바뀌었다 해서 꼭 폐서인이 되어야 할까요? 태자가 효로 바뀌고 대부인이 효의 어머니가 되었다 해서, 은고대부인이 폐서인으로 될 이유와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대부인이 효의 어머니인 상태에서 왕의 또다른 처인 은고, 이런 상정은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일까요?
부여효의 나이가 고려되지 않은 연구같은데요 ? 삼국사기엔 사비성이 포위되고 의자왕과 태자 효가 북변으로 도망치자 둘째 태가 왕을 자처하고 당나라 군사에 맞섰는데,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 왕과 태자가 밖으로 나갔는데, 숙부(태)가 자의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병이 포위를 풀고나면 우리가 무사할수 있겠습니까 ? '하고 당나라에 항복한걸로 되어있습니다. 즉 부여효의 아들 문사가 이만한 이야길 할수 있을법한 나이란거죠
나라를 망친 요녀라면 통상적으로 왕이 나중에 여색에 빠져든 젊은 여인쯤으로 생각하는데...부여효의 어머니를 요녀라 하고...부여효가 태자가 된 시기를 15-20년 사이의 일과 결부지어 생각한다면, 부여효는 백제 멸망시기 다섯살도 채 안된 어린아이란 이야기가 됩니다. (님이나 다른분들이 추정하는건 결국 의자왕이 나중에 얻은 젊은부인에게서 나온 부여효가 태자가 된걸로 생각하시는거 아닌가요 ? )
나라를 망친 요녀가 통상적으로 여색에 빠져들어 생긴 젊은 여인.... 이라는 가정이 딱히 상식적인가요? 전 그렇게 단정내릴 만한 근거가 보이지 않는데요...
헌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이미 부여효에겐 다른 신하들이나 숙부(?)등을 설득할만한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부여문사는 분명히 왕을 자처한 '부여태'를 숙부로 지칭했군요. 저도 은고=요녀가 아니다란 주장 자체엔 동의합나다만, 그렇다고 부여효의 어머니를 요녀로 단정하기에도 여러가지 정황상 무리가 따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