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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할 것이다.[설청제 담동조 규원사화(규원사화) 만설(만설)]
청나라 황제와 조상이 같은 것은 한민족이 아니라, 이성계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증거는 넘쳐난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여진족이 절대 우리나라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한민족이 아닌 자는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존환(단)양호를 중국은 존왕양이로 바꿔치기 한다]
한민족 아닌 자가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면, 이성계는 전주 이 씨인 척 하지 않았고, 북애는 규원사화를 써서 여진족을 한민족으로 둔갑 시키고자 혈안이 되지 않았다. 한민족 아닌 자가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면, 무엇보다 우리나라 영토는 상실되지 않았고, 우리나라 역사는 말살(말살)되지 않았다.
이성계와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했다는 증거는 많다. 나중에 자세히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하나만 보기로 하자.
이씨조선실록에는 예종(예종) 1년 9월 18일(무술), 환단사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바친 자는 2 품계를 높여 주되, ......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책을 바친다고 벼슬을 2 품계나 올려준다는 것도 정상이 아니지만, 책을 내놓지 않는다고 사형 그것도 참형에 처한다고 협박한 사실은 그 당시 환단사 수거, 분서에 얼마나 혈안 이었는지를 알려준다.
[예종 1년 9월 18일(무술)]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예조(례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증기》·《지이성모하사량훈》,문태 · 옥거인 · 설업 세 사람의 기(기) 1백여 권과 《호중록》·《지화록》·《명경수》 및 모든 천문(천문)·지리(지리)·음양(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경중)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승정원)에 바치고, 외방(외방)에서는 가까운 도(도)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 품계(품계)를 높여 주되, 상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천구에게는 면포 50 필(필)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하고, 숨긴 자는 참형(참형)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중외)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예종실록)
이렇게 수거한 것을 두고 규원사화에는 구서의 유시라고 했다. 책을 구한다면, 한 권만 구하면 되지, 혈안이 되어 전국의 책을 모조리 긁어모을 필요가 없다. 구서의 유시랬던 북애는 표리부동하게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 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다(여상유지어술사, 이고무기재, 차명산석실, 묘무진장)”고 한탄(?)했다.
서양에서는 지동설처럼 교회의 교리에 반하는 책을 쓴 사람들이 처형당한 적이 있다. 교리에 반하는 주장을 내버려 두면 기독교의 붕괴를 가져오니까, 처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이씨조선[혹자는 ‘이씨’조선이 거슬린다고 하는데, 북애도 규원사화에서 단군을 단씨라고 불렀다. 위만이 차지한 번조선을 위만조선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식민종족 출신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자처하며 우리나라 옷을 입고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우리나라 영토를 식민종족에게 줘버린 이성계가 세운 나라는 뭐라 불러야 하는가. 이씨조선? ‘씨’는 고대에서는 극존칭의 높임말이다. 성계조선이 정확한 말이다, 위만조선이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신인왕검의 조선을 단군조선, 고조선이라 부르지만, 우리나라에 조선은 하나뿐이다. 단군조선,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으로 불러야 한다. 성계조선이라 부르고 싶지만, 날조사를 신봉하는 현실이라 여기서는 이씨조선으로 지칭한다.] 이성계와 그 후손들에게도 그만큼 절박했다. 일제의 한국사 말살을 능가하는 말살이 이씨조선에 의해 저질러졌던 것이다. 이성계와 그 후손이 한국사 말살에 혈안이었던 것은 이성계가 한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민족이라는 사실에 어떠한 긍지도 자부심도 갖지 못하지만, 한민족은 9200 년이나 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5300 년 동안 인류 문명을 주도해왔다. 긍지 높은 우리민족이 우리나라 통치자의 요건으로서 한민족 출신자임을 얼마나 엄격하게 요구했는지는 신인왕검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웅씨족이 우리나라의 일원이 된 것은 배달 1세 환웅 거발환(거발한한웅) 때였다. 웅씨의 임금 웅녀가 환웅 거발환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배달 개천과 동시에 우리나라에 합류했으므로 웅씨족은 결격사유 없는 한민족이다. 그러나 웅씨 여왕의 후손이 배달의 제후가 된 것은 웅씨족이 우리나라의 일원이 된지 천년이나 지나서였고, 우리민족의 중조(단군왕검)가 된 것은 다시 5백년이 더 지나서였다.
신시씨와 혼인한 웅씨군 즉 웅씨 여왕의 후손이 처음으로 왕검(배달의 제후)이 된 것은 12세 한웅(환웅) 주무신(주무신) 때였다. ''여(여)''라고 하는 인물로 단허(단허)에서 책봉받아 왕검이 되었다. 그로부터 460년이 지나 웅씨 출신의 신인왕검이 등장했다. 신인왕검의 모친은 배달 18세 환웅 거불단(단웅)과 혼인해 신인왕검을 낳았다. 신인왕검의 모친은 웅씨왕(검)의 왕녀였으므로 신인왕검은 웅씨 왕의 손자였다. 그래서 웅씨 나라의 비왕(비왕)이 되었다가 웅씨의 왕이 전사하자, 신인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이어받아 구한(구환)을 통일하고 우리민족의 중조가 되었다.(유신인왕검자대득민망승위비왕거섭이십사년웅씨왕붕어전왕검수대기위통구환위일시위단군왕검야 삼한관경본기)
중국인이 한족 이라면서 중국 밖의 중국인들은 어째서 화교(화교)라고 하는가. 한족이 아니라 화하족(화하족)이기 때문이다. 화하족(하화족 이라고도 함)은 한족의 근원종족이 아니라, 중토(서토로 티벳고원 일대에 산재해 살았다. 후술한다)에 살던 수십 종족의 피지배계층을 총칭하는 말이다.
화하족이 한족의 근원종족에 지나지 않는다면, 중국 밖에 사는 중국인을 모두 화교라 부르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한민족, 한복, 한식, 등등 모든 것에다 우리 민족명을 사용하는데, 중국은 주류인종을 한족(중국인의 92%에 달한다고 우긴다)이라 우기는 것 외에 한을 사용하지 않는다. 날조가 아니라면, 화교가 아니라 한교, 치파오(기포)가 아니라 한포, 중식이 아니라 한식이라고 했을 것이다.
화하족 주원장이 한족이 되었기 때문에 진짜 한족인 우리민족의 명칭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예맥족(예맥족)이라 하고 진시왕 때 붙인 이름이라고 날조했다. 어째서 우리민족에게 예맥족이라 붙인 걸까.
바로 이성계가 예맥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예맥족이라 부른다고 8600 년간 한족(환, 한,한)이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라할 리가 없다. 이성계는 자신이 예맥족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씨조선 사람들은 왜 자신이 예맥족이 되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명이 한족이라 하니까, 이씨조선은 할 수 없이 한족이라 한 것이다.
그걸 새삼스레 요즘 와서 이 땅의 사학자라는 사람들이 부활시켜 우리민족의 주류가 예맥족이라고 떠벌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중국은 박장대소(박장대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중국은 우리민족이 예맥족이라는데, 완전히 합의를 본 상태다[예맥족으로 우리민족을 보는 역사관을 만선사관(만선사관)이라 한다].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이 합쳐진 게 아니고[규원사화는 “여수기(여수기)는 예(예)의 임금이 되게 하였다.(여수기위예군)” “옛적에 부여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설유)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맥)이라 하였다.(석부여민유둔거우설유지지 수여기민잡처 파습기속 태무항업 이수렵위생 수피위복 인위지맥)”고 했지만, 날조다.
예맥족은 앵글로족 + 색슨족이 아니다. 규원사화에도 예족과 맥족이 혼혈해서 새로운 종족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없다. 거짓의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규원사화에도 예맥이나 맥이 계속 등장하는 걸로 보아 맥족은 곧 예맥족으로 말갈(말갈)이자, 여진족이다], 맥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성계의 조상들이 우리나라 강역(중국 대륙)으로 들어왔을 때 붙여준 이름이 맥이다. 그러니까 맥이라는 종족명은 진시왕 이전 1600년 전에 부터 이미 부르기 시작했다.
을묘 29년(B.C. 1806) 맥성(맥성)의 욕살인 돌개(돌개)를 봉하여 왕(한)으로 삼으셨다.(을묘이십구년...맥성욕살돌개봉위한 단군세기)
북애조차 조선시대에 맥족이 출현했다고 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날조다.
옛적에 부여(부여)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설유)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맥)''이라 하였다. 점차 옮겨와서 엄려(엄려)의 북서쪽 땅에서 거처하게 되어 이윽고 남씨(남씨)의 백성이 되었다(석부여민유둔거우설유지지 수여기민잡처 파습기속 태무항업 이수렵위생 수피위복 인위지맥 점천사처어엄려북서지지 수위람씨지민 규원사화).
중국 역사책에도 주 무왕 때 화하와 만(만).맥(맥)이 따라 오지 않음이 없다(이실불종수위만맥소태 염철론)고 했다. 만은 남쪽 오랑캐라는 뜻인데, 중토는 오늘날의 중국이 아니기 때문에 남쪽 오랑캐가 존재하지 않았다. 맥은 북쪽 오랑캐라는 뜻이지만, 예맥족은 중토의 서쪽에 살고 있었다. 만맥이라 하지만, 남흉노(남흉노)가 남하한 기원전 4백년 때까지 중토(서토)에 살고 있는 오랑캐는 예맥족이 유일했다. 역사날조 차원에서 쓴 말이었던 것이다. 화하족도 예맥족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미개종족이다. 예맥족은 그래도 중토로 들어가 화하족을 지배하긴 했었다(김,요).
남국은 신인왕검이 치우(치우)씨 후손을 제후로 봉한 나라의 하나다. 22세 단군 색불루 20년(B.C. 1266)에 매우 강성했다는 기사가 나올 뿐, 언제 멸망 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예맥족은 남후와 신지씨의 백성이 아니라 돌개의 백성이다. 북애가 한사코 돌개의 백성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은 걸로 봐서 돌개 역시 예맥족이다.
단기고사(이씨조선 말 유응두가 중국의 한 서점에서 발견하고 입수했다)에도 단군세기의 내용이 나온다. 단기고사는, 대야발(대야발)이 썼다는 건 거짓말이다. 단기고사는 전단군조선, 후단군조선, 기자조선으로 나뉘는데, 그 실체는 원본 단군세기와 번한세가를 이씨조선의 시각에서 완전히 뜯어고친 책에 지나지 않는다. 단기고사는 주변국 역사의 연대가 하나도 안 맞는다. 온통 현대용어로 도배된 것으로 보아, 20세기에 들어와서 날조했다. 1930 년 이전에는 없었던 용어까지 등장한다. 이씨조선은 한단사(환단사)를 모조리 수거했기 때문에 조선인은 단군세기를 구할 수가 없었다. 반면 이씨조선의 예맥족 궁궐에 숨겨진 한단(환단) 역사책 51종을 모조리 빼돌린 일본인 이라면 단군세기를 토대로 충분히 날조할 수 있다. 또 이씨조선의 예맥족 왕들이 단기고사 날조를 주도하는 것은 가능하다.
“[청아대부(청아대부) 한불배(한불배)와 옥저대부(옥저대부) 고사심(고사심)과] 맥대부(맥대부) 신돌개(신돌개)에게 명하여 제후로 삼아 토지를 주니, 이것이 마한과 진한, 변한이 되었다(단기고사).” 우선 기원전 1806년에는 대부라는 벼슬이 없었다. 이 당시에는 성 없는 사람이 다수 였으므로 미개 예맥족에게 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돌개에게 성이 있었다면 가문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라도 단군세기에 누락했을 리 없다.
무엇보다 삼한은 12세 단군 아한 29년이 아니라, 1세 단군왕검 통치 마지막 해(B.C. 2241)에 조선의 땅을 삼분한 관경이다. “천하의 땅을 나누어서 삼한으로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이 있었다(구획천하지분통삼한개유오가육십사족 단군세기)."
삼한은 조선의 강역 동아시아로 단군이 지배했는데, 단기고사에서는 고작 세 명에게 봉토로 준 땅으로 한반도 남부에 삼한을 집어넣은 날조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조선의 일식기록은 동아시아에 걸쳐 일어났다. 삼국의 일식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예맥족은 미개하기 그지없던 종족이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았으며 부모가 죽어도 울지 않았다.” 예맥족에 대한 명칭은 이외에도 읍루, 물길, 말갈 등 무수히 많다. 저 미개한 종족에게 걸맞는 이름을 너도 나도 붙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중국사서에는 '발조선(발조선)'이란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일부학자들은 '발조선'을 '발(발)'과 '조선(조선)'으로 분리시켜서 보려고 하는데,‘발(발)’을 ‘맥(맥)’과 연관 지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발’과 ‘맥’은 어원의 형성과정이 다르다.
‘발’은 ‘밝’의 알타이어계 한자표기음 으로써 ‘백(백, 백)’과 같고 후에 ‘번(번)’과 연결되는 음차(음차)일 뿐 '맥(맥)'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맥’은 ‘학(시+각=맥)’자로 부터 비롯되는데 ‘각’은 갑골문에서 혈거(혈거:지하식 주거지)를 뜻하고, 부수‘시’는 ‘돼지, 벌레’를 뜻하므로 ‘맥’은 혈거에서 돼지를 기르며 생활하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의 합성이다. ‘학(시+각)’은 ‘호(시+각=맥)’으로 연칭되다가 ‘호맥’으로 바뀌는데 ‘맥’의 등장은 ‘발, 백, 백’과 연계성이 확인된 이후의 호칭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기에는‘예학(예맥)’의 기록이 보편적인데 진나라 이전의 선진시대부터 ‘맥(맥)’보다 ‘학(시+각=맥)’이 먼저 등장한다. 순자(순자)에는 “진북계에 호학(호맥)이 있다”하였고, 전국책(전국책)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한편, 춘추시대의 유가 경전류에는 모두 ‘맥’으로만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유가 사상가들이 편찬한 개작이기 때문이다.
설문해자에 "치부 에서는 북방을 ‘맥’이라 하였는데 곧 북방의 ‘맥’이란 필시 북적(북적)을 말한 것이다. ‘적’과 ‘맥’은 모두 북쪽에 있으나 ‘맥’은 동북쪽에 있었고 ‘적’은 정북쪽에 있었음을 말한다(치부왈북방맥칙차필언북적적여맥개재북이맥재동북적재정북)". ‘맥’(학)은 맥(맥)의 다른 표기방식으로 본다.
그러나 예맥족은 숙신(숙신)이 아니다.
숙은 ‘엄숙하다; 삼가다; 공경하다; 엄하다; 맑다; 인도하다’, 신은 ‘삼가다; 진실로’라는 뜻이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상위혈거동이시고도신후수분 이어풍한 작어중측지이거 삼국지 위서)”던 예맥족에게 붙여 주기에는 너무나도 황송한 이름이다. 숙신은 조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은 중토에 세워진 나라들의 상국(번한, 마한)의 상국(진한.진한)이었기에 엄숙하고 맑게 인도하는 진실된 존재고 삼가 공경할 대상이었다.
반면 예맥의 뜻은 더러운 오랑캐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깊고 조용하다고 우기고 싶겠지만, 맥은 날조 중국사에도 오랑캐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화하와 함께 미개의 쌍벽을 이루는 종족이라 사해동포주의(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해 구한(구환)을 표방한 조선시대에도 맥이라고 아름답지 못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구한(구환)이 해체된 후 맥만 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예맥이라 부른 것이다.
미개 예맥족에 대한 기술은 날조역사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한단사(환단사)를 썼다는 규원사화에는 예맥족이 온갖 이름으로 등장해 한국사를 장식한다. 북애는 한단사(환단사)를 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맥족을 한민족과 동일시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맥족(여진족)은 생여진과 숙여진(숙여진)으로 나뉜다. 거주지의 상대적 위치가 생여진은 고려 영토의 동쪽, 숙여진은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생여진은 동여진, 숙여진은 서여진이라 불렀다. 흑수에 살았던 생여진은 흑수여진 이라고도 부른다. 생여진은 숙여진의 나라 이씨조선에도 조공하고 있었다. 여진은 고구려 이후 우리나라 속민이었다. 고구려, 대진국, 고려의 영토가 중국 대륙 끝에서 동북아 끝에 걸쳐 있었으므로 실제로 생여진(동여진; 흑수여진)과 숙여진(서여진)은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살았다.
청(청)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로움과 해로움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조선(조선)과 더불어 요동(요동), 만주(만주), 유주(유주), 영주(영주)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자고 할 것이다.(설청제담동조 진리해 여조선 병거료만유영지지 북유야인이위전구 규원사화 만설)
여기서도 청이 숙여진(숙여진)이고, 북쪽의 야인이 생여진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규원사화(규원사화)는 1675 년에 썼다.
어째서 생(생)여진, 숙(숙)여진이라 했는가. 생(생)여진은 원시 그 자체로 살고, 숙(숙)여진은 생여진에 비하면 그나마 문명화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흑수에서 살았다고 기록된 생여진은 신라 멸망 후 마의태자(마의태자) 후손 극기(극기)가 갔을 때 조차도 신석기인(신석기인)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살고 있었다.
김행 즉 마의태자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려사)”을 정도다. 생여진은 지구 최후의 미개 원시인이다. 10 세기까지 신석기인처럼 살고서 어떻게 12 세기 초에 나라를 세운단 말인가. 생여진은 끝끝내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청을 세운 것은 숙여진이다.
중국 대륙[그 어떤 나라도 노예의 종족명으로 지명을 삼는 나라는 없다. ‘청구대륙’이라 해야 한다. 자오지(자오지) 한웅(환웅) 때 청구(청구)로 천도(천도)하면서 우리나라 중심지는 동아시아 서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구대륙’은 생소한 말이라 일단은 중국 대륙으로 표기하기로 한다]에서 동북아에 걸쳐 있는 고려의 영토를 축소 하자면, 고려의 동쪽과 서쪽에 거주한 동, 서 여진족의 위치를 끌어 당기면 된다. 생여진을 남하시키고, 숙여진을 동쪽으로 끌고 오는 것만으로, 고려의 영토는 간단히 한반도(한반도)로 축소할 수 있다.
실제로 이씨조선의 예맥족(예맥족)은 제 조상 숙여진이 살던 땅의 남쪽 경계에 있던 백산(후대의 백두산)을 한반도 태백산으로 옮겼다. 그래서 예맥족이 종이 위에서 한반도 이북에서 살게 된 것이다.
여진족은 “신라 말과 고려 초, 동북으로 함경도 일대와 서북으로 압록강(압록강) 남안(남안) 일대에 흩어져 살았”던 게 아니다. 생여진은 흑수에 살았다고 고려사에도 분명히 나온다. 무엇보다 고구려의 일식관측지(일식관측지)가 흑룡강(흑룡강) 상류다. 바로 흑수다. 일본이 베낀 794 년에서 1183 년까지의 우리나라 일식기록이 흑룡강 중, 하류에서 관측한 것이다. 역시 일본이 베낀 1343 년에서 1599 년까지의 우리나라 일식관측지는 만주(만주)다. 생여진은 이씨조선 초에 남하했다가, 김종서(금종서)에 의해 흑수로 도로 쫓겨 갔다.
예맥족은 돌개(돌개)를 왕으로 봉한 기원전 1806 년 직전에 우리나라 강역(강역)에 등장했다. 그리고 고려 말까지 내내 우리민족의 속민(속민)으로 살았다.
이성계(이성계)는 한민족이 아닌 자로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예맥족 이라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없었다. 이성계는 기만과 술수로 한민족의 통치자라는 지위를 손에 넣었다. 한민족인 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예맥족이라는 사실은 주원장(주원장)도 알고, 이성계의 동족 숙여진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우리민족만 몰랐다.
이성계는 자신이 예맥족이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대가로 까막눈에 밥 빌어먹는 거지[백련교도(백련교도). 특별히 주원장만 무식하고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중토인들의 일반적인 지적, 생활수준이었다] 주원장에게는 우리나라 역사와 영토를, 동족 숙여진에게는 우리나라 영토를 각각 떼어 주었다.
▲ 이씨조선 초의 동아시아(티벳이 언제 티벳고원으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명이 중토를
빠져나간 다음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 천자국이라는 우리나라 역사를 가졌으니까, 중토(서토)의 지명(지명)도 중국 대륙으로 밀어내야 했다. 중토에도 5대 강이, 중국 대륙에도 큰 강만 4개다. 요수(요수)만 적당히 정하자, 중토의 지명을 강을 기준으로 거리 비와 방위를 고려해서 간단하게 밀어낼 수가 있었다.
청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로움과 해로움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동, 만주, 유주, 영주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왜)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조선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한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설청제담동조 진리해 여조선 병거료만유영지지 북유야인이위전구동련왜이사요기남비 부연후조선지강가부 이한지만가좌의 규원사화 만설)
남쪽의 천한 종족과 한나라는 명을 가리킨다. 명을 한족이 세운 나라로 날조했고, 한족은 한나라에서 유래 한다고 했으니까, 명이 곧 한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명이 1644 년에 망했다는 것부터가 거짓이다. 1675 년에도 이씨조선의 “선비들은 임진년에 신통치 않게 도움을 받은 의리로 명나라에 대해 보답하려(아국지사......임진지의 욕향명이도보 만설)” 하고 있었고, 북애(북애)는 “그러나 1백년 안에는 내가 보장하건데, 기필코 그런 일이 없을 것(연 백년지내 여보 기필무시사의 만설)”이라고 단언했다. 1675 년에도 청과 명이 동시에 존속했던 것이다. 명은 1644 년 이후에도 존속했고, 청은 이씨조선 초에 등장했다.
고려조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 년(자승조이강공사북행루백년 규원사화 서문) : 본문에서 자승조라함은 이씨조선이 물리친 조정(조정)이라는 뜻으로 고려를 의미한다.
삼국사기에는 삼국 모두 중국에 조공(조공)했다고 나온다. 한나라에 조공한 것은 천년이라고 날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수백 년 동안 조공했다고 날조한 대상은 명이 아니라, 청이다.
여기서 바꿀 수 없는 단어들이 나온다. 조공이라는 말은 조선에게 바친다는 말이다. 조정은 조선의 정부를 뜻하며 중국대륙에 있던 모든 족속들은 조선의 속민임을 나타낸다. 한나라에 물건을 바치면 한공이어야 하는데 이 역시 조공이라 한다. 조선의 위대했던 모습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존왕양이(존왕양이)라는 말은 존환양호(존환양호), 존(단)조양호를 고친 것이다.
이씨조선은 이성계 때부터 명, 청에 다 조공했다. 숙여진 이성계가 우리나라 통치자가 되는 대가로 명이 중토에서 기어나와 우리나라 땅의 주인행세를 하고, 숙여진의 나라 청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고려 시대에는 청이 없었다.
태백일사(태백일사)도 삼한비기(삼한비기)를 인용해 “사신을 북쪽으로 보내야 공물을 바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알아 수백년을 내려 오면서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기공사북행역누백년이부위지
치 신시본기).”고 했다. 북쪽. 청이 명의 북쪽에 즉 양자강(양자강) 이북에 있다는 뜻으로 쓴 글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여럿 있다. 예수회의 선교사 세스페데스(Fracis Xavier )가 임진왜란 때, 이씨조선에 왔다가 남긴 글에는 “강 하류의 넓이가 10레구아(legua : 1 legua는 약 5.5727km)나 되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와 명이 나뉘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조선과 명은 접경하고 있지 않았다. 청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인 세스페데스는 청까지도 명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성계는 주원장 뿐만 아니라, 숙여진에게도 땅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원장과 숙여진이 입을 열면 이성계의 왕노릇도 끝장이었다.
세스페데스는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꼬라이에는 지나가기 매우 어려운 거대한 사막이 있다고 한다.”고 했다. 고비사막 남부(당시 몽고고원에는 몽고가 살았다)가 이씨조선 땅이라는 것이다. 결국 명, 청과 이씨조선은 황하(황하)를 기준으로 영토가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훈민정음(훈민정음) 해례본(해례본)에 중국을 “강남의 황제가 있는 나라다 (이때는 이미 북경에 도읍을 정한 뒤)”라는 주석(주석)이 있다. 강남. 양자강 이남을 말한다. 명은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것이다. 명은 양자강 이남으로 북경을 밀어냈다. 따라서 청은 지금의 양자강과 황하 사이에 있었다. 장안성(장안성)을 차지한 것은 예맥족(청)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현 황하 이북까지 차지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Asia from Brookes R.지도다. 밑에서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쌍성총관부(쌍성총관부) 및 동녕부(동녕부)가 현 황하 이북과 발해만(발해만)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Asia from Brookes R.은 주원장이 이성계 등과 분할할 영토를 기준으로 날조사에 근거해 그린 지도를 보고 그렸다. 비록 사본이긴 해도 서양인의 말과 이씨조선의 책과는 달리, 중국이 스스로 그린 날조 지도다.
8600 년의 한(환)제국은 어이없게 식민종족들에 의해 역사와 영토가 해체되어 양자강 이남은 주원장이, 양자강 이북은 숙여진이, 황하 이북과 동북아는 이성계가 나눠가졌다. 그러나 약점을 가진 이성계와 그 후손들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청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씨조선의 영토를 야금야금 갈취한 것이다. 원래 협박범은 얻을 게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협박한다. 청도 그랬다. 지리적 조건으로도 양자강 이남의 주원장은 이씨조선을 공격할 수도 없지만, 역시 약점을 잡힌 터라 임진왜란에 파병까지 해야 했다.(임진왜란은 명과 왜의 전쟁이다)
명은 베트남 북부의 교지국(교지국 : 번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기준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후술한다)에게도 시달리던 형편없는 약체국이다. 그런 명이 북애가 규원사화를 쓸 당시 까지도 멀쩡했던 건, 청이 명과 전쟁을 해보지 않아서 명이 강한 걸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북애 역시 청과 생여진, 왜까지 끌어들여 명에 맞서야 한다고 역설하지 않았던가. 세계 전쟁사를 살펴보면, 강대국으로 알았던 나라가 전쟁에서 여지없이 무너진 경우가 더러 있다. 독소전, 노일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청은 주원장의 후손에게도 협박을 했겠지만, 통하지 않았다. 양자강 이남의 한족(한족)은 여전히 그 땅에서 천자국의 백성 한족(환족)으로 살고 있으니까, 진실이 폭로돼도 주원장의 후손들은 이성계의 후손들 만큼 타격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그 후손은 자신들의 책임을 우리나라 왕조(특히 고려)에 전가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은 자들이라, 땅을 상실할 때마다 우리나라 역사도 계속해서 축소되어 갔다. 고려가 한국사를 말살(말살)했다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어떻게 고려가 이씨조선사를 축소할 수 있는가.
고려가 한국사를 말살했다면 이씨조선은 한단사(환단사)를 수거하고 분서할 이유가 없다. 통치자가 바뀌었으므로 약점도 사라지고, 더 이상 중국도 공갈, 협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씨조선이 망했기 때문에 중국이 대한민국을 협박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주원장이 먼 미래를 바라보고 미개 중국에 번듯한 역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역사교환을 한 것은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천자 행세를 하려면 필히 번듯한 역사를 가진 종족으로 둔갑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한다고 해도 미개 중국의 우두머리라는 지위로는 한민족의 반발로 명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 명은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나라 역사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명은 중토의 지명을 중국 대륙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 시대에 걸쳐 지도를 날조했다. Asia 1808 (“Asia” from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by R. Brookes. Eighth Edition. Dublin, 1808.)은 원래 몽고간섭기의 지도를 명이 날조한 것을 보고 그린 지도다.
이걸 알아야 한다. 서양인들은 동아시아를 탐험해서 지도를 작성한 게 아니라, 기존의 만들어진 지도를 보고 그냥 베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원지도가 날조되어 있으면, 서양인이 베낀 지도 역시 날조된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Asia 1808 은 중국의 날조지도를 보고 베낀 연도가 1808 년이었던 것이다.
▲Asia 1808 지도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조선교구 제정이라는 부제가 붙은 지도는 이씨조선의 지도를 보고 베꼈다. 1824 년이라 써 있지만, 이씨조선에 교구(교구)가 세워진 것은 1830 년대, 서울·원산 교구 등으로 나뉜 것은 1900 년대고, 위도와 경도가 표시된 이씨조선 지도는 1910 년대에 나왔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의 주해에는 괄호 안에 1924 년이라 써 있다.(주간조선 2003. 07. 29.)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 (오른쪽 지도는 현재의 지도로 비교한 것임)
이미 1909 년에 일본이 일명 ‘간도협정(간도협정)’을 맺어 한반도 이북을 청에 넘겼다. 그러나 한반도 이북에도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 청이 이씨조선의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는 바람에 청의 영토가 되고 나서도 조선인이 그 땅에 계속 살았다. 시간이 좀더 지나면 그 땅의 사람들도 인식이 변해 ‘이제는 나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는 아직 자신을 조선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린 지도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는 1924 년, 원본지도는 1824 년에 제작했던 것이다.
Asia 1808 을 보자. 회수(회수) 중류 이남에 Cayson 개성이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를 보고, 개성이 황하 하류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황하는 산동반도(산동반도) 위로 흘러나간다.] 북위 32°쯤 된다. 오늘날의 합비(합비)다. 회수는 예성강(예성강)이 아니라, 임진강(임진강)이다. 왜냐하면 고려의 수도 개경은 장안인데, 이성계는 개성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성강은 위수(위수)다.
이성계는 개경이 개성이라 날조했다. 왕건이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날조 역사 속에서 나마 묘청(묘청)이 개경의 지덕이 다한 반면 서경은 왕성하기 때문에 그곳을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묘청의 난은 순수창작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실에 근거해 날조했다. 저 날조기사에서 개경은 고려 이전부터 우리나라 역대 왕조가 도읍으로 정한 땅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도읍이었던 적이 없는 개성이 개경이라면, 신인왕검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5경, 3경의 하나였던 서경에 비해 지덕이 다할 수 있는가. 역사날조 하면서 무심코 실사를 노출시킨 것이다. 이게 역사날조의 어려움이다. 거짓말은 쌓이고 쌓이면 거짓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거짓말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주원장이 합의한 서압록강은 어딘가. 중국 지도에는 이 당시의 요수가 남아 있지 않다. 청이 지도를 날조해 명의 요수를 난하(란하)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조선이 황하 이북을 차지했기 때문에 서압록강(서압록강=요수라는 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한다)이 될 수 있는 강은 정해져 있다.
우리나라가 중토를 침입 하려고 해도 서압록강을 건너야 했고, 중노가 우리나라를 침입해도 서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황하 하류에 보면, 태행산맥(태행산맥) 이서는 동북아에서 부터 줄곧 산악지대고, 산악지대 이서는 사막(사막)이 펼쳐져 있다. 설령 태행산맥 이서로 진격했다고 해도 진령산맥(진령산맥), 복우산맥(복우산맥) 등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태행산맥 이동으로 공격로를 잡아야 하는데, 이 경우 오늘날의 상건하(상건하)[하류는 영정하(영정하), 천진(천진). 하류는 해하(해하)라고 부른다. 이하 상건하로 기술]를 꼭 건너야 한다. 상건하가 이성계와 주원장이 합의한 요수였던 것이다.
Asia 1808 이 무엇을 기준으로 색 구분을 해두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와 이어진 붉은색은 ‘원(원)’이라고 표시한 거라는 정도다. 위선과 경선은 그나마 정확하다. 한반도 북부를 지나는 위선(위선)이 북위 40°니까, 녹색 북단을 지나는 위선은 북위 50°다. 그러니까 녹색 상부는 몽고고원이다. 녹색의 서쪽을 지나는 경선(경선)은 100°니까, 녹색 하부는 채달목분지(시달목분지)다. 녹색 중앙부는 오르도스(악이다사) 사막에 해당한다. 지도 남서쪽의 노란색 북부에 THIBET이라 쓴 부분은 티벳고원이다. 북위 30°(한반도 아래 동중국해에 걸쳐 동서로 그려진 선)이 지나는 부분이 티벳고원 남단에 해당한다. 노란색 아래는 인도와 방글라데시다. 북위 30° 위쪽에서 길게 누운 강이 방글라데시에서 꺾여 들어간다. 바로 아노장포강(아노장포강)이다. 원래 아노장포강은 북위 30° 아래쪽을 흐르는데 잘못 그려졌다.
Asia 1808 이 1717 년에 완성했다는 황여전람도(황여전람도)를 토대로 날조한 지도를 보고 그린 것은 아닐까, 노란색으로 칠한 한반도 이북이 동녕부, 노란색 이서의 붉은색이 쌍성총관부가 아닐까도 생각해 봤지만, Asia 1808은 황여전람도상의 이씨조선 바깥에 즉 중토에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셈이 된다. 그리고 고려의 침공을 막기 위해 고려보다 훨씬 큰(10배 이상) 군사지역을 설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 황여전람도중에서
동녕부는 요동(명의 요수는 상건하)에 있다고 날조했으므로 한반도 이북의 노란색 이서가 동녕부다. 쌍성총관부는 고려의 동북면(중국 대륙에 한해 고려 수도를 기준으로 한 방위)인 황하 하류 이북에 있었다. 청이 이씨조선 땅을 빼앗을 때마다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의 위치도 요수를 따라 계속해서 한반도 쪽으로 밀렸으므로 이 지도는 명이 날조한 역사를 토대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동녕부는 고려의 서북면, 쌍성총관부는 동북면에 위치했지만, 여기서는 방위가 무시되고 있다. 역사를 날조하면서 전체적으로 방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날조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발해만 및 황하 하류 이북에 그렸다는 것은 날조사에서 그곳이 고려 영토라는 의미다. 조휘(조휘)·탁청(탁청) 등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며 몽고에 투항하자, 그 땅에 설치한 것이 쌍성총관부라 날조했다. 황하 하류 이북도 고려 땅인데, 상건하 이동이 고려 영토가 아닐 수는 없다. 오늘날은 쌍성총관부를 한반도 안에다 그리고 있다. 또 동녕부도 한반도 안의 서경에 있다가 요동으로 옮겼다고 날조했다.
날조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발해만 및 황하 하류 이북에 그렸다는 것은 이성계가 현 황하 이북까지 차지했음을 말해준다. 철령 이북 땅이 몽고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했으므로 당연히 몽고를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했다고? 양자강 이남에 있던 명이 무슨 수로 현 황하 이북 땅을 지배한단 말인가. 해결책으로 청이 1636 년에 세워진 나라라고 날조했다. 1636 년 이전까지는 명의 땅에서 명의 지배를 받은 오랑캐 부족이라고 날조했다.
타림분지(Tarim Basin) 및 중앙아시아 등에 있다는 서타타르(Tartar) 중간에 거란(KITAYANS)이라 표기되어 있다. 북위 40°선이 붉은색을 통과하고 북위 50°선이 붉은색 위로 지나간다. 요컨대 붉은색은 타림분지와 중가리아(Dzungaria)분지, 발하시(Balkhash)호수가 있는 지역이다. 중가리아분지에는 차가타이 한국(찰합태한국)이 있었다고 했으니, 거란(계단)은 타림분지에 있었다. 오늘날의 위구르 자치구(유오이자치구)다.
거란(계단)은 1125 년에 중토 즉 티벳고원 북부[티벳고원 북부가 소위 중토이다. 우리나라는 양자강 이북에, 중노(화하)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양자강 이남에 장강, 회수, 황하가 위치해야 한다. 장강, 회수, 황하가 현 위치에 있고서는 방대한 분량을 창작해야 하기 때문에 역사날조가 불가능하다.
우선, 삼국이 한수가 아니라, 황하를 두고 싸운게 되고, 신라와 중국이 가장 빈번히 싸워야 한다. 중토를 침입한 수많은 유목민족은 우리나라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문제점도 발생한다. 중토는 티벳고원 북부였다. 그래서 지명을 순차적으로 옮기자, 중토는 확대되고 우리나라 영토는 축소되어 역사날조가 간단했던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가 중토라는 사실은 서압록강만 찾으면 간단히 입증된다]에서 망했으니까, 거란(계단)은 계속해서 중토에 남아 있었다. 몽고는 원래 소수종족이라 넓은 땅을 다 지배 하기에는 병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몽고는 원으로 날조한 나라 외에도 사한국으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몽고족의 일파 거란(계단)에게 서해도(서해는 타림강이다. 고려 말까지 강을 바다로 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후술한다) 수비를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했다.
몽고는 쌍성총관부를 설치 하자마자 중토에서 빠져나왔다. 중토가 극한의 미개 땅이라 잠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중토를 방치하면, 미개 화하족이 빠져나와 중국 대륙으로 흩어지고 극단의 난잡한 성풍속을 전파할 것이므로 중토를 봉쇄해 버렸다. 이미 티벳고원 남부에는 8첩을, 채달목분지에는 동녕부를 설치했으니까, 서해도만 수비하면 중토는 완전히 봉쇄 되었다. 거란(계단) 역시 미개 땅에 갇혀 사는 건 원치 않았으므로 서해도 수비에 동의한 것이다.
▲ 동녕부, 쌍성총관부, 8첩의 위치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 해체를 주도한 예맥족(청) 역시 소수종족이다. 소수의 예맥족이 현 황하 이남으로 가서 다수의 한족을 지배할 수는 없으니까, 거란(계단)을 데려갔다.
중토에 김을 세웠던, 역시 몽고족의 일파인 숙여진(예맥족)을 쌍성총관부가 아니라, 동녕부로 이주시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Asia 1808에서 녹색 부분 아래쪽의 KALMHCS가 뭘 말하는지는 몰라도 숙여진이 살던 곳이다. 녹색은 시달목분지에서, 고비사막, 몽고고원에 이르지만, 타림분지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붉은색이 모두 거란의 거주지가 아니듯이 녹색 지역 방위를 모두 숙여진에게 맡겼다는 뜻은 아니다. 숙여진은 시달목분지에 거주했다.
시달목분지가 동녕부고, 현 황하 하류 이북이 쌍성총관부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고려 말까지 내내 동아시아를 강역으로 하는 대제국 이었음을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예맥족이 고구려의 속민이 되었을 당시부터 시달목분지에서 줄곧 살았다는 것은 물론 1장 내용 전체를 ‘다시쓰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자세히 고찰하겠다.
황하 이북에 보면 동북아에 걸쳐 동타타르라고 써두었다. 타타르(Tartary)라는 말은 특정 민족의 명칭이 아니고, 아시아적 유목사회 부족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타타르 아래는 무구리(Moxgori), 위에는 솔롱기안스(Solongians)라고 써두었다. 무구리는 고구려, 솔롱기안스는 고려를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가 유목민족 이라는 뜻으로 쓴 말이다.
성을 수백 개씩 쌓은 유목민족(유목민족)도 있던가. 가축의 먹이를 찾아 이리 저리 떠도는 게 유목민족이다. 재산이라고는 가축 말고는 달랑 천막뿐이다. 삼국은 건국자 모두 궁성에서 살았다. 삼국사기에 “온조(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온조도하남위례성).”고 했으며, 박혁거세는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김성)이라고 불렀다(이십일년 축경성 호왈김성).” 고추모는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이미황작궁실 단결려어비류수상거지).”고 했지만, 중국은 환인시라는 곳에 고추모가 지었다는 궁궐 유적을 날조해 두었다.
삼국은 모두 몇 성이나 쌓았나.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1백 76성, 백제가 2백성(말기), 신라는 기록이 없다. 신라는 삼국 말기 고구려에 버금가는 나라였으니까, 적게 잡아도 5백성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삼국 말기 백제는 두 나라에 비해 영토가 대폭 축소되었다. 그런 나라가 2백성이고, 강대국 고구려는 1백 76성? 축소한 것이 5백성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축성기술이 금방 발전하는 것인가. 건국 하자마자 축성부터 하는 나라가 최초의 국가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수십 종족에 이르는 유목민족들이 그 간단한 성 하나도 쌓지 못했을 리가 없다. 우리나라는 환국시대를 제외해도 6 천년의 고도 문명을 이룩한 농경민족이다. 삼국은 7천 2백년의 한(환)문명을 이어받은 나라들이었다.
몽고간섭기에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6백년이 넘었다. 종이 위에서나마 동북아조차 우리나라에게 주기가 아깝다고 해서 조각조각 나눈 것이다. 솔롱기안스가 고려인데, 한반도에 COREA라 써둔 것도 우리나라를 분해해 작은 나라로 보이게 하겠다는 의도다.
노란색 지역이 몽고 땅이라는 뜻이라면, 이 지도상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로는 고려의 몽고 침공을 막을 수가 없다. 만주로의 침공을 저지하는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다. Asia 1808 은 1차 날조사에 근거해 작성한 지도를 보고 그린 것이다.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이씨조선의 영토를 가로채면서 날조사를 크게 바꾸었던 것이다.
티벳고원에 티벳(THIBET)이라 쓴 것은 중토가 아니라고 우길 속셈 에서다. 마찬가지로 현 황하 이남을 날조 동녕부 및 쌍성총관부와 같은 붉은색으로 칠한 것은 중토가 황하 이남이고, 몽고에게 정복 되었다는 날조사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CHINA라고 써두었다. 한반도도 붉은색이다. 남송(남송은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동송이었다. 중토의 동쪽에 있으면서 축소되어 갔으니까)뿐만 아니라, 고려도 몽고에게 정복 됐다고 우길 셈으로 같은 색으로 칠한 것이다.
영토가 큰 만치 우리나라의 종족구성은 다양했다. 환족, 한족은 우리나라 안의 모든 종족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구한(구환)은 모조리 삼한(진한, 번한, 마한)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 불렀다(구환실통우삼한관경지천제자내호왈단군왕검 삼성기전 하편).”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을 포함하였다(구획천하지분통삼한개유오가육십사족 단군세기).” 한족은 우리민족 이외에 다른 종족들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을 제외한 한족은 속민의 형태로 있었다.
속민 혹은 피지배종족. 우리도 우리민족이라 여기지 않고, 그 종족들도 우리민족(한민족)이라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유목민족이다. 다만 화하는 후직(후직)이 농사법을 가르쳐준 이래로 아노장포(아노장포)강 유역 에서나마 농사를 지었다. 그러므로 다른 종족을 배제한 한국사의 주체인 한민족은 한민족이 아니라 한민족이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귀면와(귀면와) 사진(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도깨비상 내지 치우상으로 통함)
현 황하 이남은 자오지(자오지) 환웅[14세 환웅으로 일명 치우천왕(치우천왕) 이라고 하며 도읍을 청구국으로 옮겼다] 이후 우리나라의 중심지였다. 이성계가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분해한 14세기 말은 우리민족을 한족이라 부른 지도 어언 2천년이 지난 때다. 그 땅에 한족이라 불리는 집단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오늘날 황하 이남에 있는 소수종족들은 원래 티벳고원의 일부인 중토에서 살았던 것이다. 한족(화하족) 역시 중토에서 살던 종족이다. 화하족은 특정종족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 중토의 토착민 전체를 지칭하던 말이다. 중토에 토착민(토착민)이 수십 종족이나 되니까, 그들을 총칭할 필요성 때문에 우리민족이 만들어낸 말이다.
중국을 구성하는 종족은 모두 56종(자료에 따라서는 51종이라고도 한다)인데, 그 중 한족(?)이 92%다. 오늘날 중국의 인구가 13 억 이라는데, 화교는 빠진 숫자다. 한족을 제외한 나머지 55 종족이 1억 4백 명이라는 것이다.
청을 세웠다는 만주족(예맥족)은 오늘날 동북아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청은 양자강 이북에 세워진 나라이다. 2백년 뒤 정묘호란(정묘호란)으로 난하(란하)까지 확보하고 나서 현 북경으로 도읍을 옮겼지만, 이미 한족의 반발도 사라진 상태라 지배층만 이주했기 때문에 예맥족의 대부분이 채달목분지 및 양자강에서 황하 사이에 남았다. 그런데 오늘날 이곳은 한족이 거주하고 있다. 요컨대 예맥족도 대부분 한족으로 슬그머니 변신한 것이다. 예맥족을 따라간 거란(계단) 역시 한족으로 변신했다. 동북아의 만주족은 청이 동북아를 다 차지했을 때 흑수에서 남하시킨 생여진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만주족은 그 옛날의 만주족이 아니다.
오늘날 중국의 한족(?)을 제외한 55 종족들은 한족화에 실패한(고유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화하와 몽고족(몽고족), 투르크족이다. 요컨대 중국이 주장하는 한족의 실체는 우리민족을 토대로 중토의 토착민과 몽고족에서 한족화된 사람들을 포함한 개념 이었던 것이다.
생여진은 숙여진과 분리된 후로 지리상의 여건(중간에 우리나라가 위치했다) 때문에 중토를 침입한 적이 없다. 몽고족의 일부는 고려 말 이후 몽고고원으로 이주했으나, 몽골공화국은 2002 년 현재, 245만 7000명에 불과 하니까 무시해도 된다. 흉노, 선비, 거란(계단), 예맥족도 몽고의 갈래지만, 중토 침입시에는 각각 행동했다. 중토를 침입한 흉노는 남흉노이고, 북흉노는 중앙 아시아로 빠졌다. 돌궐(돌궐)도 동돌궐과 서돌궐로 갈라졌다. 위구르는 투르크의 갈래로 중토 침입시, 단독행동을 했다. ......
그 옛날에도 92%가 한족 이었다면, 몽고, 흉노(흉노), 거란(계단), 말갈(말갈), 선비(선비), 돌궐, 위구르 등을 다 합쳐도 수 % 밖에 안되는 이민족한테 매번 정복 당했다는 이야기다. 각각의 종족은 따로 따로 중토를 침범 했으니까, 92%에 달하는 한족(?)은 매번 1%도 안되는 이민족에게 지배 당할만큼 열등민족(열등종족)이라는 소리다. 반대로 몽고족이나 투르크족은 한족의 1%도 안되는 인원으로 지난 수천 년간 중토를 정복한 우수종족(우수종족)이라는 소리다. 몽고족과 투르크족은 모든 국가, 모든 군대의 염원인 일당백을 수천 년 내내 실현한 종족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에 밀려난 탓으로 중토로, 서방으로 쳐들어가 나라를 세운 종족에 지나지 않는다.
계장、생の송원の석축지の전を통과する
【해설】
계장が지하도へ향けて생の송원(いきのまつばら)を출발する장면。화면중앙の기마무자が계장。その오で석축지(いしついじ)に요괘け、적い선자を수にしている인물が비후국の유력어가인국지무방(きくち・たけふさ)。사서
일본이 그린 몽고습래회사(몽고습래회사)에는 몽고군과 고려군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몽고병사는 고려병사의 뒤에 숨어 있거나, 왜군에 맞서 싸우는 고려 병사 뒤로 도망가다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있다. 이 당시 일본은 중국왜가 건너가 일본을 장악한지 5 백년이 지나 야만성과 잔혹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어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먹”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몽고군이 용감한 것은 약한 군대를 만났을 때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몽고인에 의해 서양이 정복 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 서양의 군사력 수준을 말해준다. 실상 서양은 우리민족에게 밀려난 종족들에 의해 대대로 정복되어 왔다.
전쟁만이 타국의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은 아니다. 세계사를 보면, 상속, 혼인, 발견, 어부지리(어부지리) 등 온갖 방법으로 땅의 주권이 바뀌었다. 몽고는 고려 땅을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획득하지 않았다. 전쟁을 하기에는 고려가 너무나 강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대진국(대진국)을 제외하면, 배달 개천 이후 고려 말까지 5300 년간 이민족에게 정복된 적이 없는 세계사에 유일무이(유일무이)한 대제국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제작된 여지전도(여지전도)에서 의주(의주)가 대릉하(대능하)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다. 여지전도를 인터넷에 올라온 조그만 것 밖에 못 보았지만, 강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있다. 혹자는 의주 동쪽을 흐르는 요동반도 아래쪽의 강을 현 요수라고 하는데, 현대지도와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현 요동반도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에 현 요수가 있다. 현 요수가 요동반도 아래쪽에 있으면 요동반도가 아니라, 요서(요북)반도여야 하지 않는가. 발해만 동단의 강을 현 요수라고 하면, 강 위치가 서쪽으로 밀린 셈이다. 그렇다고 대능하가 그렇게 크지도 않다. 강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지고 오른쪽 지류가 훨씬 작은 것이 현 요수를 그렸다고 판단된다.
▶ 청구도를 왜곡해서 만든 청구요람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청구도(청구도)를 보면, 의주가 현 요수 서쪽에 그려져 있다. 청구도의 서압록강은 확실히 대능하다. 이 시기 서압록강이 대능하에서 현 요수로 밀려났던 것이다.
의주는 서압록강에 있었으니까, 이성계는 상건하로 의주를 밀어냈다. 임진왜란 당시, 이공(이씨조선의 선조라 불리는 예맥족)은 상건하까지 도망쳐서 국경지대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호가 청구도를 그릴 당시에도 대능하가 서압록강 이니까, 1712 년에 세워진 청비는 현 압록강이 아니라, 대능하 유역에 세웠다. 대능하에서 토문강 이니까, 아직도 동북아 대부분이 이씨조선의 영토였다. 그러니까 백두산정계비는 일본의 날조다.
이씨조선은 1712 년에서 1824 년 사이에 또 한 번 청한테 영토를 빼앗겼다. 가능성이 높은 해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의 원지도를 제작한 1824 년이다. 이씨조선의 예맥족 왕들은 자신의 책임을 모조리 우리나라에 떠넘긴 자들이다. 영토를 상실하면, 우선 축소된 강역에 맞춰 지도를 그려서, 지명을 모두 끌어 당겨야 한다. 옮긴 지명에 맞춰 고을 이름도 바꾸고,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의 직함도 바꿔야 한다. 개성 사람이, 의주 사람으로, 공주목사에서 순천목사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토가 축소되기 무섭게 지도 작성에 들어가야 했다.
◀"황여전람도(1719)" 부분[자료 제공: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1717 년에 완성했다는 황여전람도(황여전람도)에는 동압록강 이북 너머 극히 일부만 이씨조선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1717 년은 청비를 세우고 나서 5년 후다. 19세기 전후(여지전도)까지도 현 요수가 서압록강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청은 우리나라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 여러 계획안을 작성했다. 청으로서야 당연히 한꺼번에 다 빼앗고 싶었겠지만, 한 번에 모두 내놓으라고 하면, ‘차라리 한민족의 땅을 속임수로 빼앗았다고 실토하자.’고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이씨조선의 예맥족들의 반응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황여전람도는 청비를 세우기 전의 여러 계획안 가운데 하나 이거나, 청비 직후 또 다시 이씨조선 땅을 빼앗기 위해 마련한 계획안 이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중국은 한반도마저 집어삼킬 계획 이었다. 이씨조선이 망해서 한반도를 빼앗지 못한 것이다. 황여전람도는 청이 이씨조선 땅을 빼앗기 위한 계획안의 하나이지, 황여전람도를 따라 국경선이 정해졌던 적은 없다. 1708 년부터 실측을 했건 안했건 간에, 이를 근거로 현재 전해져 오는 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후대의 거짓말이다. 실측한 지도는 현 요수에서 토문강이 국경선 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실측할 수는 없지 않은가.
◀ 당빌이 그린 조선왕국전도
1735 년, 당빌(D'Anville)이 시나 아틀라스(Atlas)를 그린 이후 대부분의 중국지도가 황여전람도를 근거로 만들고, 특히 1927 년에 김량(김량)이 출판한 만한합벽청내부일통여지비도(만한합벽청내부일통여지비도)가 황여전람도를 그대로 그린 것은 황여전람도에 표시된 국경선 이북은 공고한 중국 땅이라고 우길 속셈 에서였다. 우리나라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다 보니까, 중국과 이씨조선의 영토 분쟁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 이북의 한 줌을 영토분쟁 지역이었다고 우기기 위한 역사날조 차원에서 황여전람도를 근거로 지도를 만들게 한 것이다.
이미 국제 사회는 청의 날조지도를 받아들여 이씨조선의 영토를 축소하고 있었다. 1894 년 9월 3일자 프랑스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게재된 ‘한국, 일본과 동부 중국의 지도’(30.5×43㎝)를 살펴보면, 이씨조선 땅이 한반도로 표시되어 있다. 동압록강 북안까지 이씨조선 땅으로 그렸다. 이 당시 이씨조선 땅은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에 나와 있는 동압록강 서북단에서 흑룡강 하류 까지였다.
1900 년 부터는 일본이 발벗고 나서서 이씨조선 땅이 한반도 뿐이라고 선전한다. 10년 후에는 일명 청과 간도협정(간도협정)을 맺어 한반도 이북(동압록강 서북단에서 흑룡강 하류까지)을 넘긴다.
◀ Le Petit Journal지에 실려있는 일본과 한반도
일본이 한단사(환단사)에서 고려사까지 우리나라 전역사 말살에 혈안 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나라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4세기 말 백제의 식민지로 출발해서 대대로 우리나라에 조공한 속국이다.
중국왜가 이주한 후 문맹자의 나라로 전락한 일본은 조선통신사의 가르침을 받자, 역사날조에 혈안 이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역사날조가 거의 끝난 18 세기에 이르러서야 역사날조를 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조선통신사가 마지막으로 간 해가 1811 년이니까, 조선통신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역사날조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씨조선을 강점한 동안 이미 말살된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 하겠다고 날뛰었다.
고토 분지로(소등문차랑)라는 왜노는 이씨조선을 병탄하기 전인 1900 년에 조선산악론(An Orogrphic Sketch of Korea)을 써서 우리나라 땅이 한반도 뿐이라고 전세계에다 소개했다. 일본이 이씨조선을 병탄하기 전인 1900 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 지리를 연구 한다면서 설치고 다녔다는 사실이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교육회에서 발간한 문교의 조선 1931 년 3월호에 이토 후미마루(이등문치)의 '소등박사(소등문차랑)의 조선산맥론을 소개한다'에 나와 있다. 일본이 1900 년 이전부터 세계에 이씨조선의 영토가 한반도라고 날조해 알렸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 역시 이씨조선 땅을 중국 땅이라 알렸으니까.
‘한국, 일본과 동부 중국의 지도’에는 일본연안을 제외한 바다 전체가 우리나라 영토이다. 그러나 동해가 우리나라 영토 라면서도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다. 남의 나라 영토에다 자국명을 붙일 수도 있는가. 자국에 타국명을 붙이는 나라도 있나.
땅을 빼앗기 전부터 축소지도(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국은 이씨조선 땅을 모조리 집어삼킬 자신이 있었다. 같은 화하족의 나라(중국이나 일본이나 그 근원은 모두 화하이다) 일본이 이씨조선을 집어삼킬 거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씨조선이 존속하는 동안, 서압록강은 상건하, 난하(란하), 대능하, 현 요수, 동압록강으로 밀려났다. 이씨조선은 청에게 최소한 다섯 번, 일본이 넘겨준 것까지 해서 최소한 여섯 번에 걸쳐 땅을 빼앗겼다. 그리고 일본에 나라 자체를 잃었다.
이성계와 예맥족이 역사를 축소한 대가를 두고두고 무섭게 치뤘던 것이다.
결코 무력으로 정복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를 미개 식민종족들이 권모술수로 분할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 해체는 예맥족 이성계가 주도했다. 그 때문에 이씨조선의 예맥족들은 동족 청에 발목을 잡혀 끝없이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축소해야 했다.
중요한 부분 중 일부만 표시했습니다. 나머지는 포기... 그냥 소장용으로 가지고 계시면서 틈틈이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전부가 진실은 아닙니다.
1. 한민족은 예맥족이 아니다
淸나라 皇帝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할 것이다.[說淸帝 談同祖 규원사화(揆園史話) 만설(漫說)]
淸나라 황제와 祖上이 같은 것은 韓民族이 아니라, 李成桂다. 李成桂가 女眞族이라는 증거는 넘쳐난다. 李成桂가 女眞族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女眞族이 절대 우리나라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韓民族이 아닌 자는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尊桓(檀)攘胡를 중국은 尊王攘夷로 바꿔치기 한다]
韓民族 아닌 자가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있었다면, 李成桂는 全州李氏인 척 하지 않았고, 북애(北厓)는 揆園史話를 써서 女眞族을 韓民族으로 둔갑 시키고자 혈안이 되지 않았다. 韓民族 아닌 자가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있었다면, 무엇보다 우리나라 영토는 상실되지 않았고, 우리나라 歷史는 말살(抹殺)되지 않았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 歷史를 抹殺했다는 증거는 많다. 나중에 자세히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하나만 보기로 하자.
李氏朝鮮實錄에는 예종(睿宗) 1년 9월 18일(戊戌), 桓檀史 및 모든 天文·地理·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바친 자는 2 品階를 높여 주되, ...... 숨긴 자는 斬刑에 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책을 바친다고 벼슬을 2 品階나 올려준다는 것도 정상이 아니지만, 冊을 내놓지 않는다고 死刑 그것도 斬刑에 처한다고 협박한 사실은 그 당시 桓檀史 수거, 焚書에 얼마나 혈안 이었는지를 알려준다.
[예종 1년 9월 18일(무술)]
예조에 命하여 모든 天文·地理·陰陽에 관계되는 書籍들을 蒐集하게 하다
예조(禮曹)에 傳敎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 품계(品階)를 높여 주되, 賞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 필(匹)을 賞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陳告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睿宗實錄)
이렇게 수거한 것을 두고 揆園史話에는 구서(求書)의 유시(諭示)라고 했다. 책을 구한다면, 한 권만 구하면 되지, 혈안이 되어 전국의 책을 모조리 긁어 모을 필요가 없다. 求書의 諭示랬던 北厓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하게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石室에 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다(余嘗有志於述史, 而固無其材, 且名山石室, 渺無珍藏)”고 한탄(?)했다.
西洋에서는 地動說처럼 교회의 교리에 反하는 책을 쓴 사람들이 처형당한 적이 있다. 敎理에 반하는 주장을 내버려 두면 基督敎의 붕괴를 가져오니까, 처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李氏朝鮮[혹자는 ‘李氏’朝鮮이 거슬린다고 하는데, 北崖도 揆園史話에서 단군을 檀氏라고 불렀다. 衛滿이 차지한 番朝鮮을 衛滿朝鮮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植民種族 출신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자처하며 우리나라 옷을 입고 우리나라 歷史를 抹殺하고 우리나라 領土를 植民種族에게 줘버린 李成桂가 세운 나라는 뭐라 불러야 하는가. 李氏朝鮮? ‘氏’는 古代에서는 極尊稱의 높임말이다. 成桂朝鮮이 정확한 말이다, 衛滿朝鮮이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神人王儉의 朝鮮을 檀君朝鮮, 古朝鮮이라 부르지만, 우리나라에 朝鮮은 하나뿐이다. 檀君朝鮮, 古朝鮮이 아니라 朝鮮으로 불러야 한다. 成桂朝鮮이라 부르고 싶지만, 날조사(捺造史)를 신봉하는 현실이라 여기서는 李氏朝鮮으로 지칭한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에게도 그만큼 절박했다. 日帝의 韓國史 말살을 능가하는 말살이 李氏朝鮮에 의해 저질러졌던 것이다. 李成桂와 그 후손이 韓國史 말살에 血眼이었던 것은 李成桂가 韓民族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韓民族.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韓民族이라는 사실에 어떠한 긍지도 자부심도 갖지 못하지만, 韓民族은 9200 년이나 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5300 년 동안 人類 文明을 主導해왔다. 肯知 높은 우리민족이 우리나라 통치자의 요건으로서 韓民族 출신자임을 얼마나 엄격하게 요구했는지는 신인왕검(神人王儉)에서 그 例를 찾을 수 있다.
熊氏族이 우리나라의 일원이 된 것은 倍達 1세 桓雄 居發桓(거발한한웅) 때였다. 熊氏의 임금 熊女가 桓雄 居發桓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倍達 開天과 동시에 우리나라에 합류했으므로 熊氏族은 결격사유 없는 韓民族이다. 그러나 熊氏 女王의 후손이 배달의 諸候가 된 것은 熊氏族이 우리나라의 일원이 된지 千年이나 지나서였고, 우리민족의 中祖(檀君王儉)가 된 것은 다시 5백년이 더 지나서였다.
神市氏와 혼인한 熊氏君 즉 熊氏 女王의 후손이 처음으로 王儉(倍達의 諸侯)이 된 것은 12세 한웅(桓雄) 주무신(州武愼) 때였다. ''여(黎)''라고 하는 인물로 단허(檀墟)에서 책봉받아 王儉이 되었다. 그로부터 460년이 지나 熊氏 출신의 神人王儉이 등장했다. 神人王儉의 모친은 倍達 18세 桓雄 居弗檀(檀雄)과 혼인해 神人王儉을 낳았다. 神人王儉의 모친은 熊氏王(儉)의 王女였으므로 神人王儉은 熊氏 王의 손자였다. 그래서 熊氏 나라의 비왕(裨王)이 되었다가 熊氏의 王이 전사하자, 神人王儉은 마침내 그 왕위를 이어받아 구한(九桓)을 통일하고 우리민족의 中祖가 되었다.(有神人王儉者大得民望陞爲裨王居攝二十四年熊氏王崩於戰王儉遂代其位統九桓爲一是爲檀君王儉也 三韓管境本紀)
中國人이 漢族 이라면서 中國 밖의 中國人들은 어째서 화교(華僑)라고 하는가. 漢族이 아니라 화하족(華夏族)이기 때문이다. 華夏族(夏華族 이라고도 함)은 漢族의 根源種族이 아니라, 中土(西土로 티벳고원 일대에 산재해 살았다. 후술한다)에 살던 數十 種族의 피지배계층을 총칭하는 말이다.
華夏族이 漢族의 근원종족에 지나지 않는다면, 中國 밖에 사는 中國人을 모두 華僑라 부르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韓民族, 韓服, 韓式, 등등 모든 것에다 우리 민족명을 사용하는데, 中國은 주류인종을 漢族(中國人의 92%에 달한다고 우긴다)이라 우기는 것 外에 漢을 사용하지 않는다. 날조가 아니라면, 華僑가 아니라 漢僑, 치파오(旗袍)가 아니라 漢袍, 中式이 아니라 漢式이라고 했을 것이다.
華夏族 朱元璋이 漢族이 되었기 때문에 진짜 漢族인 우리민족의 명칭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예맥족(濊貊族)이라 하고 秦始王 때 붙인 이름이라고 날조했다. 어째서 우리민족에게 濊貊族이라 붙인 걸까.
바로 李成桂가 濊貊族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濊貊族이라 부른다고 8600 년간 한족(桓, 韓,漢)이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라할 리가 없다. 李成桂는 자신이 濊貊族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李氏朝鮮 사람들은 왜 자신이 濊貊族이 되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明이 漢族이라 하니까, 李氏朝鮮은 할 수 없이 韓族이라 한 것이다.
그걸 새삼스레 요즘 와서 이 땅의 史學者라는 사람들이 부활시켜 우리민족의 主流가 濊貊族이라고 떠벌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中國은 박장대소(拍掌大笑)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中國은 우리민족이 濊貊族이라는데, 완전히 합의를 본 상태다[濊貊族으로 우리민족을 보는 역사관을 만선사관(滿鮮史觀)이라 한다].
濊貊族은 濊族과 貊族이 합쳐진 게 아니고[揆園史話는 “여수기(余守己)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다.(余守己爲濊君)” “옛적에 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偰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昔夫餘民有遁居于偰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고 했지만, 날조다.
濊貊族은 앵글로족 + 색슨족이 아니다. 揆園史話에도 濊族과 貊族이 혼혈해서 새로운 종족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없다. 거짓의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揆園史話에도 濊貊이나 貊이 계속 등장하는 걸로 보아 貊族은 곧 濊貊族으로 말갈(靺鞨)이자, 女眞族이다], 貊族의 또 다른 이름이다.
李成桂의 조상들이 우리나라 疆域(中國 大陸)으로 들어왔을 때 붙여준 이름이 貊이다. 그러니까 貊이라는 종족명은 秦始王이전 1600년 전에 부터 이미 부르기 시작했다.
乙卯 29년(B.C. 1806)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突蓋)를 봉하여 왕(汗)으로 삼으셨다.(乙卯二十九年...貊城褥薩突蓋封爲汗 檀君世紀)
北崖조차 朝鮮時代에 貊族이 出現했다고 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날조다.
옛적에 부여(夫餘)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偰兪)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거처하게 되어 이윽고 남씨(藍氏)의 백성이 되었다(昔夫餘民有遁居于偰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 漸遷徙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揆園史話).
中國 역사책에도 周 武王 때 華夏와 만(蠻).맥(貊)이 따라 오지 않음이 없다(而實不從數為蠻貊所紿 鹽鐵論)고 했다. 蠻은 남쪽 오랑캐라는 뜻인데, 中土는 오늘날의 中國이 아니기 때문에 남쪽 오랑캐가 존재하지 않았다. 貊은 북쪽 오랑캐라는 뜻이지만, 濊貊族은 中土의 서쪽에 살고 있었다. 蠻貊이라 하지만, 남흉노(南匈奴)가 南下한 기원전 4백년 때까지 中土(西土)에 살고 있는 오랑캐는 濊貊族이 유일했다. 역사날조 차원에서 쓴 말이었던 것이다. 華夏族도 濊貊族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未開種族이다. 濊貊族은 그래도 中土로 들어가 華夏族을 지배하긴 했었다(金,遼).
藍國은 神人王儉이 치우(蚩尤)氏 후손을 제후로 封한 나라의 하나다. 22세 檀君 索弗婁 20년(B.C. 1266)에 매우 강성했다는 기사가 나올 뿐, 언제 멸망 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濊貊族은 藍侯와 神誌氏의 백성이 아니라 突蓋의 백성이다. 北厓가 한사코 突蓋의 백성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은 걸로 봐서 突蓋 역시 濊貊族이다.
檀奇古史(李氏朝鮮 末 유응두가 중국의 한 서점에서 발견하고 입수했다)에도 檀君世紀의 내용이 나온다. 檀奇古史는, 대야발(大野勃)이 썼다는 건 거짓말이다. 檀奇古史는 前檀君朝鮮, 後檀君朝鮮, 箕子朝鮮으로 나뉘는데, 그 실체는 原本 檀君世紀와 番韓世家를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완전히 뜯어고친 책에 지나지 않는다. 檀奇古史는 주변국 역사의 年代가 하나도 안 맞는다. 온통 현대용어로 도배된 것으로 보아, 20세기에 들어와서 날조했다. 1930 년 이전에는 없었던 용어까지 등장한다. 李氏朝鮮은 한단사(桓檀史)를 모조리 수거했기 때문에 朝鮮人은 檀君世紀를 구할 수가 없었다. 반면 李氏朝鮮의 濊貊族 궁궐에 숨겨진 한단(桓檀) 역사책 51종을 모조리 빼돌린 日本人 이라면 檀君世紀를 토대로 충분히 날조할 수 있다. 또 李氏朝鮮의 濊貊族 왕들이 檀奇古史 날조를 주도하는 것은 가능하다.
“[청아대부(菁莪大夫) 한불배(韓不倍)와 옥저대부(沃沮大夫) 고사심(高士深)과] 맥대부(貊大夫) 신돌개(申突蓋)에게 命하여 諸侯로 삼아 토지를 주니, 이것이 馬韓과 辰韓, 弁韓이 되었다(檀奇古史).” 우선 기원전 1806년에는 大夫라는 벼슬이 없었다. 이 당시에는 姓 없는 사람이 다수 였으므로 미개 濊貊族에게 姓이 있을 리 만무하다. 突蓋에게 姓이 있었다면 가문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라도 檀君世紀에 누락했을 리 없다.
무엇보다 三韓은 12世 檀君 阿漢 29년이 아니라, 1世 檀君王儉 통치 마지막 해(B.C. 2241)에 朝鮮의 땅을 삼분한 管境이다. “천하의 땅을 나누어서 三韓으로 다스렸으니, 三韓은 모두 5家 64族이 있었다(區劃天下地分統三韓皆有五家六十四族 檀君世紀)."
三韓은 朝鮮의 疆域 東아시아로 檀君이 지배했는데, 檀奇古史에서는 고작 세 명에게 封土로 준 땅으로 韓半島 南部에 三韓을 집어넣은 날조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朝鮮의 日蝕記錄은 東아시아에 걸쳐 일어났다. 三國의 日蝕記錄 역시 마찬가지다.
濊貊族은 未開하기 그지없던 종족이다. “穴居生活을 하고, 便所를 住居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았으며 부모가 죽어도 울지 않았다.” 濊貊族에 대한 명칭은 이외에도 挹婁, 勿吉, 靺鞨 등 무수히 많다. 저 미개한 종족에게 걸맞는 이름을 너도 나도 붙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중국史書에는 '발조선(發朝鮮)'이란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일부학자들은 '發朝鮮'을 '발(發)'과 '조선(朝鮮)'으로 분리시켜서 보려고 하는데,‘발(發)’을 ‘맥(貊)’과 연관 지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發’과 ‘貊’은 어원의 형성과정이 다르다.
‘發’은 ‘밝’의 알타이어계 한자표기음 으로써 ‘백(白, 百)’과 같고 후에 ‘번(番)’과 연결되는 음차(音借)일 뿐 '맥(貊)'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貊’은 ‘학(豕+各=貉)’字로 부터 비롯되는데 ‘各’은 갑골문에서 혈거(穴居:지하식 주거지)를 뜻하고, 부수‘豕’는 ‘돼지, 벌레’를 뜻하므로 ‘貊’은 穴居에서 돼지를 기르며 생활하는 모습을 표현한 象形文字의 합성이다. ‘학(豕+各)’은 ‘胡(豕+各=貉)’으로 연칭되다가 ‘胡貊’으로 바뀌는데 ‘貊’의 등장은 ‘發, 白, 百’과 연계성이 확인된 이후의 호칭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史記에는‘예학(濊貉)’의 기록이 普遍的인데 秦나라 이전의 先秦時代부터 ‘맥(貊)’보다 ‘학(豕+各=貉)’이 먼저 등장한다. 순자(荀子)에는 “秦北界에 호학(胡貉)이 있다”하였고, 전국책(戰國策)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한편, 春秋時代의 儒家 經典類에는 모두 ‘貊’으로만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後代의 儒家 思想家들이 편찬한 개작이기 때문이다.
說文解字에 "豸부 에서는 북방을 ‘貉’이라 하였는데 곧 북방의 ‘貉’이란 필시 북적(北狄)을 말한 것이다. ‘狄’과 ‘貉’은 모두 북쪽에 있으나 ‘貉’은 동북쪽에 있었고 ‘狄’은 정북쪽에 있었음을 말한다(豸部曰北方貉則此必言北狄狄與貉皆在北而貉在東北狄在正北)". ‘貉’(학)은 貊(맥)의 다른 표기방식으로 본다.
그러나 濊貊族은 숙신(肅愼)이 아니다.
肅은 ‘엄숙하다; 삼가다; 공경하다; 엄하다; 맑다; 인도하다’, 愼은 ‘삼가다; 진실로’라는 뜻이다. “穴居生活을 하고, 便所를 住居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常爲穴居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作於中廁之而居 三國志 魏書)”던 濊貊族에게 붙여 주기에는 너무나도 황송한 이름이다. 肅愼은 朝鮮을 가리키는 말이다. 朝鮮은 中土에 세워진 나라들의 上國(番韓, 馬韓)의 上國(眞韓.辰韓)이었기에 엄숙하고 맑게 인도하는 진실된 존재고 삼가 공경할 대상이었다.
반면 濊貊의 뜻은 더러운 오랑캐다. 이 땅의 史學者들은 깊고 조용하다고 우기고 싶겠지만, 貊은 날조 中國史에도 오랑캐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華夏와 함께 未開의 쌍벽을 이루는 종족이라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에 입각해 구한(九桓)을 표방한 朝鮮時代에도 貊이라고 아름답지 못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구한(九桓)이 해체된 후 貊만 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濊貊이라 부른 것이다.
未開 濊貊族에 대한 기술은 날조역사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한단사(桓檀史)를 썼다는 揆園史話에는 濊貊族이 온갖 이름으로 등장해 韓國史를 장식한다. 北崖는 한단사(桓檀史)를 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濊貊族을 韓民族과 동일시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濊貊族(女眞族)은 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뉜다. 거주지의 상대적 위치가 生女眞은 高麗 영토의 동쪽, 熟女眞은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生女眞은 東女眞, 熟女眞은 西女眞이라 불렀다. 黑水에 살았던 生女眞은 黑水女眞 이라고도 부른다. 生女眞은 熟女眞의 나라 李氏朝鮮에도 朝貢하고 있었다. 女眞은 高句麗 이후 우리나라 屬民이었다. 高句麗, 大震國, 高麗의 영토가 中國 대륙 끝에서 동북아 끝에 걸쳐 있었으므로 실제로 生女眞(東女眞; 黑水女眞)과 熟女眞(西女眞)은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살았다.
청(淸)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로움과 해로움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조선(朝鮮)과 더불어 요동(遼東), 만주(滿州), 유주(幽州), 영주(營州)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자고 할 것이다.(說淸帝談同祖 陳利害 與朝鮮 倂據遼滿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 揆園史話 漫說)
여기서도 淸이 숙여진(熟女眞)이고, 북쪽의 野人이 生女眞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 년에 썼다.
어째서 생(生)여진, 숙(熟)여진이라 했는가. 생(生)여진은 원시 그 자체로 살고, 숙(熟)여진은 生女眞에 비하면 그나마 문명화 되었던 것이다. 高麗史에 黑水에서 살았다고 기록된 生女眞은 新羅 멸망 후 마의태자(麻衣太子) 후손 극기(克己)가 갔을 때 조차도 신석기인(新石器人)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살고 있었다.
金行 즉 麻衣太子의 후손 “克己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高麗史)”을 정도다. 生女眞은 지구 최후의 未開 原始人이다. 10 세기까지 新石器人처럼 살고서 어떻게 12 세기 초에 나라를 세운단 말인가. 生女眞은 끝끝내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淸을 세운 것은 熟女眞이다.
中國 大陸[그 어떤 나라도 노예의 종족명으로 地名을 삼는 나라는 없다. ‘靑邱大陸’이라 해야 한다. 자오지(慈烏支) 한웅(桓雄) 때 청구(靑邱)로 천도(遷都)하면서 우리나라 중심지는 東아시아 서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靑邱大陸’은 생소한 말이라 일단은 中國 大陸으로 표기하기로 한다]에서 동북아에 걸쳐 있는 高麗의 영토를 축소 하자면, 高麗의 동쪽과 서쪽에 거주한 東, 西 女眞族의 위치를 끌어 당기면 된다. 生女眞을 南下시키고, 熟女眞을 동쪽으로 끌고 오는 것만으로, 高麗의 영토는 간단히 한반도(韓半島)로 축소할 수 있다.
실제로 李氏朝鮮의 예맥족(濊貊族)은 제 祖上 熟女眞이 살던 땅의 남쪽 경계에 있던 白山(후대의 白頭山)을 韓半島 太白山으로 옮겼다. 그래서 濊貊族이 종이 위에서 韓半島 以北에서 살게 된 것이다.
女眞族은 “新羅 末과 高麗 初, 東北으로 함경도 일대와 西北으로 압록강(鴨綠江) 남안(南岸) 일대에 흩어져 살았”던 게 아니다. 生女眞은 黑水에 살았다고 高麗史에도 분명히 나온다. 무엇보다 高句麗의 일식관측지(日蝕觀測地)가 흑룡강(黑龍江) 上流다. 바로 黑水다. 日本이 베낀 794 년에서 1183 년까지의 우리나라 日蝕記錄이 黑龍江 中, 下流에서 관측한 것이다. 역시 日本이 베낀 1343 년에서 1599 년까지의 우리나라 일식관측지는 만주(滿州)다. 生女眞은 李氏朝鮮 初에 南下했다가, 김종서(金宗西)에 의해 黑水로 도로 쫓겨 갔다.
濊貊族은 돌개(突蓋)를 王으로 封한 기원전 1806 년 직전에 우리나라 강역(疆域)에 등장했다. 그리고 高麗 末까지 내내 우리민족의 속민(屬民)으로 살았다.
이성계(李成桂)는 韓民族이 아닌 자로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李成桂는 濊貊族 이라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없었다. 李成桂는 기만과 술수로 韓民族의 통치자라는 지위를 손에 넣었다. 韓民族인 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李成桂가 濊貊族이라는 사실은 주원장(朱元璋)도 알고, 李成桂의 同族 熟女眞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우리민족만 몰랐다.
李成桂는 자신이 濊貊族이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대가로 까막눈에 밥 빌어먹는 거지[백련교도(白蓮敎徒). 특별히 朱元璋만 무식하고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中土人들의 일반적인 지적, 생활수준이었다] 朱元璋에게는 우리나라 역사와 영토를, 同族 熟女眞에게는 우리나라 영토를 각각 떼어 주었다.
▲ 이씨조선 초의 동아시아(티벳이 언제 티벳고원으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明이 中土를
東아시아 天子國이라는 우리나라 역사를 가졌으니까, 中土(西土)의 지명(地名)도 中國 大陸으로 밀어내야 했다. 中土에도 5대 강이, 중국 대륙에도 큰 강만 4개다. 요수(遼水)만 적당히 정하자, 中土의 地名을 江을 기준으로 거리 비와 방위를 고려해서 간단하게 밀어낼 수가 있었다.
淸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고 그 이로움과 해로움을 나열하여 설복할 것이니, 朝鮮과 더불어 요동, 만주, 유주, 영주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野人을 끌어들여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朝鮮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漢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說淸帝談同祖 陳利害 與朝鮮 倂據遼滿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東聯倭而使撓其南鄙 夫然後朝鮮之强可復 而漢之慢可挫矣 揆園史話 漫說)
남쪽의 천한 종족과 漢나라는 明을 가리킨다. 明을 漢族이 세운 나라로 날조했고, 漢族은 漢나라에서 유래 한다고 했으니까, 明이 곧 漢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明이 1644 년에 亡했다는 것부터가 거짓이다. 1675 년에도 李氏朝鮮의 “선비들은 壬辰年에 신통치 않게 도움을 받은 의리로 明나라에 대해 보답하려(我國之士......壬辰之誼 欲向明而圖報 漫說)” 하고 있었고, 북애(北厓)는 “그러나 1백년 안에는 내가 보장하건데, 기필코 그런 일이 없을 것(然 百年之內 余保 其必無是事矣 漫說)”이라고 단언했다. 1675 년에도 淸과 明이 동시에 존속했던 것이다. 明은 1644 년 이후에도 존속했고, 淸은 李氏朝鮮 初에 등장했다.
高麗朝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 년(自勝朝以降貢使北行累百年 揆園史話 序文) : 본문에서 自勝朝라함은 李氏朝鮮이 물리친 조정(朝廷)이라는 뜻으로 高麗를 의미한다.
三國史記에는 三國 모두 中國에 조공(朝貢)했다고 나온다. 漢나라에 朝貢한 것은 千年이라고 날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수백 년 동안 조공했다고 날조한 대상은 明이 아니라, 淸이다.
여기서 바꿀 수 없는 단어들이 나온다. 朝貢이라는 말은 朝鮮에게 바친다는 말이다. 朝廷은 朝鮮의 정부를 뜻하며 중국대륙에 있던 모든 족속들은 朝鮮의 屬民임을 나타낸다. 漢나라에 물건을 바치면 漢貢이어야 하는데 이 역시 朝貢이라 한다. 朝鮮의 위대했던 모습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말은 존환양호(尊桓攘胡), 尊(檀)朝攘胡를 고친 것이다.
李氏朝鮮은 李成桂 때부터 明, 淸에 다 朝貢했다. 熟女眞 李成桂가 우리나라 통치자가 되는 대가로 明이 中土에서 기어나와 우리나라 땅의 주인행세를 하고, 熟女眞의 나라 淸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高麗 時代에는 淸이 없었다.
태백일사(太白逸史)도 삼한비기(三韓秘記)를 인용해 “사신을 북쪽으로 보내야 공물을 바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알아 수백년을 내려 오면서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其貢使北行歷累百年而不爲之
耻 神市本紀).”고 했다. 북쪽. 淸이 明의 북쪽에 즉 양자강(揚子江) 以北에 있다는 뜻으로 쓴 글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여럿 있다. 예수회의 선교사 세스페데스(Fracis Xavier )가 壬辰倭亂 때, 李氏朝鮮에 왔다가 남긴 글에는 “江 下流의 넓이가 10레구아(legua : 1 legua는 약 5.5727km)나 되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와 明이 나뉘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李氏朝鮮과 明은 접경하고 있지 않았다. 淸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인 세스페데스는 淸까지도 明으로 착각한 것이다. 李成桂는 朱元璋 뿐만 아니라, 熟女眞에게도 땅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朱元璋과 熟女眞이 입을 열면 李成桂의 왕노릇도 끝장이었다.
세스페데스는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꼬라이에는 지나가기 매우 어려운 거대한 사막이 있다고 한다.”고 했다. 고비사막 남부(당시 蒙古高原에는 蒙古가 살았다)가 李氏朝鮮 땅이라는 것이다. 결국 明, 淸과 李氏朝鮮은 황하(黃河)를 기준으로 영토가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에 中國을 “江南의 皇帝가 있는 나라다 (이때는 이미 北京에 도읍을 정한 뒤)”라는 주석(註釋)이 있다. 江南. 揚子江 以南을 말한다. 明은 揚子江 以南에 있었던 것이다. 明은 揚子江 以南으로 北京을 밀어냈다. 따라서 淸은 지금의 揚子江과 黃河 사이에 있었다. 장안성(長安城)을 차지한 것은 濊貊族(淸)이었던 것이다.
李成桂가 現 黃河 以北까지 차지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Asia from Brookes R.지도다. 밑에서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및 동녕부(東寧府)가 現 黃河 以北과 발해만(渤海灣)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Asia from Brookes R.은 朱元璋이 李成桂 등과 분할할 영토를 기준으로 날조사에 근거해 그린 지도를 보고 그렸다. 비록 사본이긴 해도 서양인의 말과 李氏朝鮮의 책과는 달리, 中國이 스스로 그린 날조 지도다.
8600 년의 한(桓)제국은 어이없게 식민종족들에 의해 역사와 영토가 해체되어 揚子江 以南은 朱元璋이, 揚子江 以北은 熟女眞이, 黃河 以北과 東北亞는 李成桂가 나눠가졌다. 그러나 약점을 가진 李成桂와 그 후손들을 국경을 맞대고 있는 淸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李氏朝鮮의 영토를 야금야금 갈취한 것이다. 원래 협박범은 얻을 게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협박한다. 淸도 그랬다. 지리적 조건으로도 揚子江 以南의 朱元璋은 李氏朝鮮을 공격할 수도 없지만, 역시 약점을 잡힌 터라 壬辰倭亂에 파병까지 해야 했다.(壬辰倭亂은 明과 倭의 전쟁이다)
明은 베트남 북부의 교지국(交趾國 : 番朝鮮의 마지막 왕이었던 箕準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후술한다)에게도 시달리던 형편없는 약체국이다. 그런 明이 北厓가 揆園史話를 쓸 당시 까지도 멀쩡했던 건, 淸이 明과 전쟁을 해보지 않아서 明이 강한 걸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北厓 역시 淸과 生女眞, 倭까지 끌어들여 明에 맞서야 한다고 역설하지 않았던가. 세계 전쟁사를 살펴보면, 강대국으로 알았던 나라가 전쟁에서 여지없이 무너진 경우가 더러 있다. 獨蘇戰, 露日戰爭이 그 대표적인 예다.
淸은 朱元璋의 후손에게도 협박을 했겠지만, 통하지 않았다. 揚子江 以南의 한족(漢族)은 여전히 그 땅에서 天子國의 백성 한족(桓族)으로 살고 있으니까, 진실이 폭로돼도 朱元璋의 후손들은 李成桂의 후손들 만큼 타격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李成桂와 그 후손은 자신들의 책임을 우리나라 王朝(특히 高麗)에 전가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은 자들이라, 땅을 상실할 때마다 우리나라 역사도 계속해서 축소되어 갔다. 高麗가 韓國史를 말살(抹殺)했다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어떻게 高麗가 李氏朝鮮史를 축소할 수 있는가.
高麗가 韓國史를 말살했다면 李氏朝鮮은 한단사(桓檀史)를 수거하고 焚書할 이유가 없다. 통치자가 바뀌었으므로 약점도 사라지고, 더 이상 中國도 공갈, 협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李氏朝鮮이 亡했기 때문에 中國이 大韓民國을 협박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朱元璋이 먼 미래를 바라보고 未開 中國에 번듯한 역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역사교환을 한 것은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天子 행세를 하려면 필히 번듯한 역사를 가진 종족으로 둔갑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한다고 해도 未開 중국의 우두머리라는 지위로는 韓民族의 반발로 明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 明은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나라 역사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明은 中土의 지명을 중국 대륙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全 시대에 걸쳐 지도를 날조했다. Asia 1808 (“Asia” from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by R. Brookes. Eighth Edition. Dublin, 1808.)은 원래 蒙古干涉期의 지도를 明이 날조한 것을 보고 그린 지도다.
이걸 알아야 한다. 서양인들은 東아시아를 탐험해서 地圖를 작성한 게 아니라, 기존의 만들어진 지도를 보고 그냥 베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原地圖가 날조되어 있으면, 서양인이 베낀 지도 역시 날조된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Asia 1808 은 중국의 날조지도를 보고 베낀 연도가 1808 년이었던 것이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조선교구 제정이라는 부제가 붙은 지도는 李氏朝鮮의 지도를 보고 베꼈다. 1824 년이라 써 있지만, 李氏朝鮮에 교구(敎區)가 세워진 것은 1830 년대, 서울·元山 敎區 등으로 나뉜 것은 1900 년대고, 위도와 경도가 표시된 李氏朝鮮 지도는 1910 년대에 나왔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의 주해에는 괄호 안에 1924 년이라 써 있다.(주간조선 2003. 07. 29.)
이미 1909 년에 日本이 일명 ‘간도협정(間島協定)’을 맺어 韓半島 以北을 淸에 넘겼다. 그러나 韓半島 以北에도 朝鮮人들이 많이 살았다. 淸이 李氏朝鮮의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는 바람에 淸의 영토가 되고 나서도 朝鮮人이 그 땅에 계속 살았다. 시간이 좀더 지나면 그 땅의 사람들도 인식이 변해 ‘이제는 나도 中國人’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는 아직 자신을 朝鮮人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린 지도다.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는 1924 년, 원본지도는 1824 년에 제작했던 것이다.
Asia 1808 을 보자. 회수(淮水) 中流 以南에 Cayson 開城이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를 보고, 開城이 黃河 下流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黃河는 산동반도(山東半島) 위로 흘러나간다.] 북위 32°쯤 된다. 오늘날의 합비(合肥)다. 淮水는 예성강(禮成江)이 아니라, 임진강(臨津江)이다. 왜냐하면 高麗의 수도 開京은 長安인데, 李成桂는 開城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禮成江은 위수(渭水)다.
李成桂는 開京이 開城이라 날조했다. 王建이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날조 역사 속에서 나마 묘청(妙淸)이 開京의 地德이 다한 반면 西京은 왕성하기 때문에 그곳을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妙淸의 亂은 순수창작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실에 근거해 날조했다. 저 날조기사에서 開京은 高麗 以前부터 우리나라 歷代 王朝가 도읍으로 정한 땅임을 알 수 있다.
高麗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도읍이었던 적이 없는 開城이 開京이라면, 神人王儉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5京, 3京의 하나였던 西京에 비해 地德이 다할 수 있는가. 역사날조 하면서 무심코 實史를 노출시킨 것이다. 이게 역사날조의 어려움이다. 거짓말은 쌓이고 쌓이면 거짓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거짓말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합의한 西鴨綠江은 어딘가. 中國 지도에는 이 당시의 遼水가 남아 있지 않다. 淸이 지도를 날조해 明의 遼水를 난하(灤河)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氏朝鮮이 黃河 以北을 차지했기 때문에 西鴨綠江(西鴨綠江=遼水라는 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한다)이 될 수 있는 강은 정해져 있다.
우리나라가 中土를 침입 하려고 해도 西鴨綠江을 건너야 했고, 中奴가 우리나라를 침입해도 西鴨綠江을 건너야 했다. 黃河 下流에 보면, 태행산맥(太行山脈) 以西는 동북아에서 부터 줄곧 산악지대고, 山嶽地帶 以西는 사막(沙莫)이 펼쳐져 있다. 설령 太行山脈 以西로 진격했다고 해도 진령산맥(秦嶺山脈), 복우산맥(伏牛山脈) 등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太行山脈 以東으로 공격로를 잡아야 하는데, 이 경우 오늘날의 상건하(桑乾河)[下流는 영정하(永定河), 천진(天津). 下流는 해하(海河)라고 부른다. 이하 桑乾河로 기술]를 꼭 건너야 한다. 桑乾河가 李成桂와 朱元璋이 합의한 遼水였던 것이다.
Asia 1808 이 무엇을 기준으로 색 구분을 해두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韓半島와 이어진 붉은색은 ‘원(元)’이라고 표시한 거라는 정도다. 위선과 경선은 그나마 정확하다. 韓半島 北部를 지나는 위선(緯線)이 북위 40°니까, 녹색 北端을 지나는 緯線은 北緯 50°다. 그러니까 녹색 상부는 蒙古高原이다. 녹색의 서쪽을 지나는 경선(經線)은 100°니까, 녹색 하부는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다. 녹색 중앙부는 오르도스(鄂爾多斯) 사막에 해당한다. 지도 남서쪽의 노란색 북부에 THIBET이라 쓴 부분은 티벳고원이다. 북위 30°(한반도 아래 東中國海에 걸쳐 東西로 그려진 선)이 지나는 부분이 티벳고원 南端에 해당한다. 노란색 아래는 인도와 방글라데시다. 북위 30° 위쪽에서 길게 누운 강이 방글라데시에서 꺾여 들어간다. 바로 아노장포강(雅魯藏布江)이다. 원래 雅魯藏布江은 북위 30° 아래쪽을 흐르는데 잘못 그려졌다.
Asia 1808 이 1717 년에 완성했다는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토대로 날조한 지도를 보고 그린 것은 아닐까, 노란색으로 칠한 한반도 이북이 東寧府, 노란색 이서의 붉은색이 雙城摠管府가 아닐까도 생각해 봤지만, Asia 1808은 皇輿全覽圖상의 李氏朝鮮 바깥에 즉 中土에 東寧府와 雙城摠管府를 설치한 셈이 된다. 그리고 高麗의 침공을 막기 위해 高麗보다 훨씬 큰(10배 이상) 군사지역을 설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 황여전람도중에서
東寧府는 遼東(明의 遼水는 桑乾河)에 있다고 날조했으므로 韓半島 以北의 노란색 以西가 東寧府다. 雙城摠管府는 高麗의 東北面(中國 대륙에 한해 高麗 수도를 기준으로 한 방위)인 黃河 下流 以北에 있었다. 淸이 李氏朝鮮 땅을 빼앗을 때마다 東寧府와 雙城摠管府의 위치도 遼水를 따라 계속해서 韓半島 쪽으로 밀렸으므로 이 지도는 明이 날조한 역사를 토대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東寧府는 高麗의 西北面, 雙城摠管府는 東北面에 위치했지만, 여기서는 方位가 무시되고 있다. 역사를 날조하면서 전체적으로 방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날조 東寧府와 雙城摠管府를 渤海灣 및 黃河 下流 以北에 그렸다는 것은 날조사에서 그곳이 高麗 영토라는 의미다.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東北面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죽이고, 鐵嶺 以北의 땅을 내놓으며 蒙古에 투항하자, 그 땅에 설치한 것이 雙城摠管府라 날조했다. 黃河 下流 以北도 高麗 땅인데, 桑乾河 以東이 高麗 영토가 아닐 수는 없다. 오늘날은 雙城摠管府를 韓半島 안에다 그리고 있다. 또 東寧府도 韓半島 안의 西京에 있다가 遼東으로 옮겼다고 날조했다.
날조 東寧府와 雙城摠管府를 渤海灣 및 黃河 下流 以北에 그렸다는 것은 李成桂가 現 黃河 以北까지 차지했음을 말해준다. 鐵嶺 以北 땅이 蒙古의 雙城摠管府와 東寧府에 속했으므로 당연히 蒙古를 몰아낸 明의 소유여야 한다고 했다고? 揚子江 以南에 있던 明이 무슨 수로 現 黃河 以北 땅을 지배한단 말인가. 해결책으로 淸이 1636 년에 세워진 나라라고 날조했다. 1636 년 이전까지는 明의 땅에서 明의 지배를 받은 오랑캐 부족이라고 날조했다.
타림盆地(Tarim Basin) 및 중앙아시아 등에 있다는 西타타르(Tartar) 중간에 거란(KITAYANS)이라 표기되어 있다. 북위 40°선이 붉은색을 통과하고 북위 50°선이 붉은색 위로 지나간다. 요컨대 붉은색은 타림盆地와 중가리아(Dzungaria)盆地, 발하시(Balkhash)湖水가 있는 지역이다. 중가리아盆地에는 차가타이 한국(察合台汗國)이 있었다고 했으니, 거란(契丹)은 타림盆地에 있었다. 오늘날의 위구르 자치구(維吾爾自治區)다.
거란(契丹)은 1125 년에 中土 즉 티벳고원 북부[티벳高原 北部가 소위 中土이다. 우리나라는 揚子江 以北에, 中奴(華夏)는 揚子江 以南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揚子江 以南에 長江, 淮水, 黃河가 위치해야 한다. 長江, 淮水, 黃河가 현 위치에 있고서는 방대한 분량을 창작해야 하기 때문에 역사날조가 불가능하다.
우선, 三國이 漢水가 아니라, 黃河를 두고 싸운게 되고, 新羅와 中國이 가장 빈번히 싸워야 한다. 中土를 침입한 수많은 유목민족은 우리나라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문제점도 발생한다. 中土는 티벳高原 北部였다. 그래서 지명을 순차적으로 옮기자, 中土는 확대되고 우리나라 영토는 축소되어 역사날조가 간단했던 것이다.
티벳高原 北部가 中土라는 사실은 西鴨綠江만 찾으면 간단히 입증된다]에서 망했으니까, 거란(契丹)은 계속해서 中土에 남아 있었다. 蒙古는 원래 소수종족이라 넓은 땅을 다 지배 하기에는 병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蒙古는 元으로 날조한 나라 外에도 四汗國으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蒙古族의 일파 거란(契丹)에게 西海道(西海는 타림江이다. 高麗 末까지 江을 바다로 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후술한다) 수비를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했다.
蒙古는 雙城摠管府를 설치 하자마자 中土에서 빠져나왔다. 中土가 극한의 미개 땅이라 잠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中土를 방치하면, 미개 華夏族이 빠져나와 中國 대륙으로 흩어지고 극단의 난잡한 性風俗을 전파할 것이므로 中土를 봉쇄해 버렸다. 이미 티벳高原 南部에는 8첩을, 寨達木盆地에는 東寧府를 설치했으니까, 西海道만 수비하면 中土는 완전히 봉쇄 되었다. 거란(契丹) 역시 미개 땅에 갇혀 사는 건 원치 않았으므로 西海道 수비에 동의한 것이다.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 해체를 주도한 濊貊族(淸) 역시 소수종족이다. 소수의 濊貊族이 現 黃河 以南으로 가서 다수의 漢族을 지배할 수는 없으니까, 거란(契丹)을 데려갔다.
中土에 金을 세웠던, 역시 蒙古族의 일파인 熟女眞(濊貊族)을 雙城摠管府가 아니라, 東寧府로 이주시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Asia 1808에서 녹색 부분 아래쪽의 KALMHCS가 뭘 말하는지는 몰라도 熟女眞이 살던 곳이다. 녹색은 柴達木盆地에서, 고비사막, 몽고고원에 이르지만, 타림분지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붉은색이 모두 거란의 거주지가 아니듯이 녹색 지역 방위를 모두 熟女眞에게 맡겼다는 뜻은 아니다. 熟女眞은 柴達木盆地에 거주했다.
柴達木盆地가 東寧府고, 現 黃河 下流 以北이 雙城摠管府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高麗 末까지 내내 東아시아를 疆域으로 하는 대제국 이었음을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濊貊族이 高句麗의 속민이 되었을 당시부터 柴達木盆地에서 줄곧 살았다는 것은 물론 1장 내용 전체를 ‘다시쓰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자세히 고찰하겠다.
黃河 以北에 보면 동북아에 걸쳐 東타타르라고 써두었다. 타타르(Tartary)라는 말은 특정 민족의 명칭이 아니고, 아시아적 유목사회 부족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타타르 아래는 무구리(Moxgori), 위에는 솔롱기안스(Solongians)라고 써두었다. 무구리는 高句麗, 솔롱기안스는 高麗를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가 유목민족 이라는 뜻으로 쓴 말이다.
城을 수백 개씩 쌓은 유목민족(遊牧民族)도 있던가. 가축의 먹이를 찾아 이리 저리 떠도는 게 遊牧民族이다. 재산이라고는 가축 말고는 달랑 천막뿐이다. 三國은 건국자 모두 宮城에서 살았다. 三國史記에 “온조(溫祚)는 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溫祚都河南慰禮城).”고 했으며, 朴赫居世는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고 불렀다(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高鄒牟는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고 했지만, 中國은 桓因市라는 곳에 高鄒牟가 지었다는 궁궐 유적을 날조해 두었다.
三國은 모두 몇 城이나 쌓았나. 三國史記에 高句麗가 1백 76城, 百濟가 2백城(末期), 新羅는 기록이 없다. 新羅는 三國 末期 高句麗에 버금가는 나라였으니까, 적게 잡아도 5백城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三國 末期 百濟는 두 나라에 비해 영토가 대폭 축소되었다. 그런 나라가 2백城이고, 강대국 高句麗는 1백 76城? 축소한 것이 5백城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축성기술이 금방 발전하는 것인가. 건국 하자마자 축성부터 하는 나라가 최초의 국가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수십 종족에 이르는 유목민족들이 그 간단한 성 하나도 쌓지 못했을 리가 없다. 우리나라는 桓國시대를 제외해도 6 천년의 고도 문명을 이룩한 農耕民族이다. 三國은 7천 2백년의 한(桓)문명을 이어받은 나라들이었다.
蒙古干涉期에는 高句麗가 멸망한지 6백년이 넘었다. 종이 위에서나마 동북아조차 우리나라에게 주기가 아깝다고 해서 조각조각 나눈 것이다. 솔롱기안스가 高麗인데, 韓半島에 COREA라 써둔 것도 우리나라를 분해해 작은 나라로 보이게 하겠다는 의도다.
노란색 지역이 蒙古 땅이라는 뜻이라면, 이 지도상의 雙城摠管府와 東寧府로는 高麗의 蒙古 침공을 막을 수가 없다. 滿州로의 침공을 저지하는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다. Asia 1808 은 1차 날조사에 근거해 작성한 지도를 보고 그린 것이다. 淸이 明을 멸망시키고, 李氏朝鮮의 영토를 가로채면서 날조사를 크게 바꾸었던 것이다.
티벳高原에 티벳(THIBET)이라 쓴 것은 中土가 아니라고 우길 속셈 에서다. 마찬가지로 現 黃河 以南을 날조 東寧府 및 雙城摠管府와 같은 붉은색으로 칠한 것은 中土가 黃河 以南이고, 蒙古에게 정복 되었다는 날조사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CHINA라고 써두었다. 韓半島도 붉은색이다. 南宋(南宋은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東宋이었다. 中土의 동쪽에 있으면서 축소되어 갔으니까)뿐만 아니라, 高麗도 蒙古에게 정복 됐다고 우길 셈으로 같은 색으로 칠한 것이다.
영토가 큰 만치 우리나라의 종족구성은 다양했다. 桓族, 韓族은 우리나라 안의 모든 종족을 포함하는 廣義의 개념이다. “구한(九桓)은 모조리 三韓(辰韓, 番韓, 馬韓)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天帝의 아들은 檀君이라 불렀다(九桓悉統于三韓管境之天帝子乃號曰檀君王儉 三聖紀全 下篇).”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三韓은 모두 5家 64族을 포함하였다(區劃天下地分統三韓皆有五家六十四族 檀君世紀).” 韓族은 우리민족 이외에 다른 종족들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을 제외한 韓族은 속민의 형태로 있었다.
屬民 혹은 被支配種族. 우리도 우리민족이라 여기지 않고, 그 종족들도 우리민족(한민족)이라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유목민족이다. 다만 華夏는 후직(后稷)이 농사법을 가르쳐준 이래로 아노장포(雅魯藏布)江 유역 에서나마 농사를 지었다. 그러므로 다른 종족을 배제한 韓國史의 주체인 한民族은 漢민족이 아니라 韓민족이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귀면와(鬼面瓦) 사진(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도깨비상 내지 蚩尤像으로 통함)
현 黃河 이남은 자오지(慈烏支) 桓雄[14세 桓雄으로 일명 치우천왕(蚩尤天王) 이라고 하며 도읍을 靑邱國으로 옮겼다] 이후 우리나라의 중심지였다. 李成桂가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분해한 14세기 말은 우리민족을 한族이라 부른 지도 어언 2천년이 지난 때다. 그 땅에 漢族이라 불리는 집단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오늘날 黃河 以南에 있는 소수종족들은 원래 티벳고원의 일부인 中土에서 살았던 것이다. 漢族(華夏族) 역시 中土에서 살던 종족이다. 華夏族은 특정종족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 中土의 토착민 전체를 지칭하던 말이다. 中土에 토착민(土着民)이 수십 종족이나 되니까, 그들을 총칭할 필요성 때문에 우리민족이 만들어낸 말이다.
中國을 구성하는 종족은 모두 56種(자료에 따라서는 51種이라고도 한다)인데, 그 중 漢族(?)이 92%다. 오늘날 中國의 인구가 13 억 이라는데, 華僑는 빠진 숫자다. 漢族을 제외한 나머지 55 種族이 1억 4백 명이라는 것이다.
淸을 세웠다는 滿州族(濊貊族)은 오늘날 동북아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淸은 揚子江 以北에 세워진 나라이다. 2백년 뒤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난하(灤河)까지 확보하고 나서 現 北京으로 도읍을 옮겼지만, 이미 漢族의 반발도 사라진 상태라 지배층만 이주했기 때문에 濊貊族의 대부분이 寨達木盆地 및 揚子江에서 黃河 사이에 남았다. 그런데 오늘날 이곳은 漢族이 거주하고 있다. 요컨대 濊貊族도 대부분 漢族으로 슬그머니 변신한 것이다. 濊貊族을 따라간 거란(契丹) 역시 漢族으로 변신했다. 동북아의 滿州族은 淸이 동북아를 다 차지했을 때 黑水에서 南下시킨 生女眞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滿州族은 그 옛날의 滿州族이 아니다.
오늘날 中國의 漢族(?)을 제외한 55 종족들은 漢族化에 실패한(고유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華夏와 몽고족(蒙古族), 투르크族이다. 요컨대 中國이 주장하는 漢族의 실체는 우리민족을 토대로 中土의 토착민과 蒙古族에서 漢族化된 사람들을 포함한 개념 이었던 것이다.
生女眞은 熟女眞과 분리된 후로 지리상의 여건(중간에 우리나라가 위치했다) 때문에 中土를 침입한 적이 없다. 蒙古族의 일부는 高麗 末 이후 蒙古高原으로 이주했으나, 몽골共和國은 2002 년 현재, 245만 7000명에 불과 하니까 무시해도 된다. 匈奴, 鮮卑, 거란(契丹), 濊貊族도 蒙古의 갈래지만, 中土 침입시에는 각각 행동했다. 中土를 침입한 匈奴는 南匈奴이고, 北匈奴는 중앙 아시아로 빠졌다. 돌궐(突厥)도 東突厥과 西突厥로 갈라졌다. 위구르는 투르크의 갈래로 中土 침입시, 단독행동을 했다. ......
그 옛날에도 92%가 漢族 이었다면, 蒙古, 흉노(匈奴), 거란(契丹), 말갈(靺鞨), 선비(鮮卑), 突厥, 위구르 등을 다 합쳐도 수 % 밖에 안되는 異民族한테 매번 정복 당했다는 이야기다. 각각의 종족은 따로 따로 中土를 침범 했으니까, 92%에 달하는 漢族(?)은 매번 1%도 안되는 異民族에게 지배 당할만큼 열등민족(劣等種族)이라는 소리다. 반대로 蒙古族이나 투르크족은 漢族의 1%도 안되는 인원으로 지난 수천 년간 中土를 정복한 우수종족(優秀種族)이라는 소리다. 蒙古族과 투르크族은 모든 국가, 모든 군대의 염원인 일당백을 수천 년 내내 실현한 종족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에 밀려난 탓으로 中土로, 西方으로 쳐들어가 나라를 세운 종족에 지나지 않는다.
季長、生の松原の石築地の前を通過する
【解説】
季長が志賀島へ向けて生の松原(いきのまつばら)を出発する場面。画面中央の騎馬武者が季長。その奥で石築地(いしついじ)に腰掛け、赤い扇子を手にしている人物が肥後国の有力御家人菊池武房(きくち・たけふさ)。詞書
日本이 그린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는 蒙古軍과 高麗軍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蒙古兵士는 高麗兵士의 뒤에 숨어 있거나, 倭軍에 맞서 싸우는 高麗 兵士 뒤로 도망가다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있다. 이 당시 日本은 中國倭가 건너가 日本을 장악한지 5 백년이 지나 야만성과 잔혹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어 告祀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먹”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蒙古軍이 용감한 것은 약한 군대를 만났을 때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蒙古人에 의해 西洋이 정복 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 西洋의 군사력 수준을 말해준다. 실상 西洋은 우리민족에게 밀려난 종족들에 의해 대대로 정복되어 왔다.
전쟁만이 타국의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은 아니다. 世界史를 보면, 相續, 婚姻, 發見, 어부지리(漁夫之利) 등 온갖 방법으로 땅의 主權이 바뀌었다. 蒙古는 高麗 땅을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획득하지 않았다. 전쟁을 하기에는 高麗가 너무나 강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대진국(大震國)을 제외하면, 배달 개천 이후 高麗 末까지 5300 년간 異民族에게 정복된 적이 없는 世界史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大帝國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제작된 여지전도(輿之全圖)에서 의주(義州)가 대릉하(大凌河)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다. 輿之全圖를 인터넷에 올라온 조그만 것 밖에 못 보았지만, 江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있다. 혹자는 義州 동쪽을 흐르는 遼東半島 아래쪽의 江을 現 遼水라고 하는데, 현대지도와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현 遼東半島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에 현 遼水가 있다. 현 遼水가 遼東半島 아래쪽에 있으면 遼東半島가 아니라, 遼西(遼北)半島여야 하지 않는가. 渤海灣 東端의 江을 현 遼水라고 하면, 강 위치가 서쪽으로 밀린 셈이다. 그렇다고 大凌河가 그렇게 크지도 않다. 강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지고 오른쪽 지류가 훨씬 작은 것이 현 遼水를 그렸다고 판단된다.
▶ 청구도를 왜곡해서 만든 청구요람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청구도(靑邱圖)를 보면, 義州가 현 遼水 서쪽에 그려져 있다. 靑邱圖의 西鴨綠江은 확실히 大凌河다. 이 시기 西鴨綠江이 大凌河에서 현 遼水로 밀려났던 것이다.
義州는 西鴨綠江에 있었으니까, 李成桂는 桑乾河로 義州를 밀어냈다. 壬辰倭亂 당시, 李公(李氏朝鮮의 宣祖라 불리는 濊貊族)은 桑乾河까지 도망쳐서 국경지대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金正浩가 靑邱圖를 그릴 당시에도 大凌河가 西鴨綠江 이니까, 1712 년에 세워진 淸碑는 현 鴨綠江이 아니라, 大凌河 유역에 세웠다. 大凌河에서 土門江 이니까, 아직도 동북아 대부분이 李氏朝鮮의 영토였다. 그러니까 白頭山定界碑는 日本의 날조다.
李氏朝鮮은 1712 년에서 1824 년 사이에 또 한 번 淸한테 영토를 빼앗겼다. 가능성이 높은 해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의 원지도를 제작한 1824 년이다. 李氏朝鮮의 濊貊族 王들은 자신의 책임을 모조리 우리나라에 떠넘긴 자들이다. 영토를 상실하면, 우선 축소된 疆域에 맞춰 지도를 그려서, 地名을 모두 끌어 당겨야 한다. 옮긴 地名에 맞춰 고을 이름도 바꾸고,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의 직함도 바꿔야 한다. 開城 사람이, 義州 사람으로, 公州牧使에서 順天牧使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토가 축소되기 무섭게 地圖 작성에 들어가야 했다.
◀"皇輿全覽圖(1719)" 부분[자료 제공: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1717 년에 완성했다는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에는 東鴨綠江 以北 너머 극히 일부만 李氏朝鮮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1717 년은 淸碑를 세우고 나서 5년 후다. 19세기 전후(輿之全圖)까지도 현 遼水가 西鴨綠江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淸은 우리나라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 여러 계획안을 작성했다. 淸으로서야 당연히 한꺼번에 다 빼앗고 싶었겠지만, 한 번에 모두 내놓으라고 하면, ‘차라리 韓民族의 땅을 속임수로 빼앗았다고 실토하자.’고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李氏朝鮮의 濊貊族들의 반응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皇輿全覽圖는 淸碑를 세우기 전의 여러 계획안 가운데 하나 이거나, 淸碑 직후 또 다시 李氏朝鮮 땅을 빼앗기 위해 마련한 계획안 이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中國은 韓半島마저 집어삼킬 계획 이었다. 李氏朝鮮이 亡해서 韓半島를 빼앗지 못한 것이다. 皇輿全覽圖는 淸이 李氏朝鮮 땅을 빼앗기 위한 계획안의 하나이지, 皇輿全覽圖를 따라 국경선이 정해졌던 적은 없다. 1708 년부터 실측을 했건 안했건 간에, 이를 근거로 현재 전해져 오는 皇輿全覽圖를 만들었다는 것은 후대의 거짓말이다. 실측한 지도는 현 遼水에서 土門江이 국경선 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실측할 수는 없지 않은가.
◀ 당빌이 그린 조선왕국전도
1735 년, 당빌(D'Anville)이 시나 아틀라스(Atlas)를 그린 이후 대부분의 중국지도가 皇輿全覽圖를 근거로 만들고, 특히 1927 년에 김량(金梁)이 출판한 만한합벽청내부일통여지비도(滿漢合壁淸內府一統輿地秘圖)가 皇輿全覽圖를 그대로 그린 것은 皇輿全覽圖에 표시된 국경선 이북은 공고한 中國 땅이라고 우길 속셈 에서였다. 우리나라 땅을 단계적으로 빼앗다 보니까, 中國과 李氏朝鮮의 영토 분쟁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韓半島 以北의 한 줌을 영토분쟁 지역이었다고 우기기 위한 역사날조 차원에서 皇輿全覽圖를 근거로 지도를 만들게 한 것이다.
이미 국제 사회는 淸의 날조지도를 받아들여 李氏朝鮮의 영토를 축소하고 있었다. 1894 년 9월 3일자 프랑스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게재된 ‘韓國, 日本과 東部 中國의 지도’(30.5×43㎝)를 살펴보면, 李氏朝鮮 땅이 韓半島로 표시되어 있다. 東鴨綠江 北岸까지 李氏朝鮮 땅으로 그렸다. 이 당시 李氏朝鮮 땅은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에 나와 있는 東鴨綠江 西北端에서 黑龍江 下流 까지였다.
1900 년 부터는 日本이 발벗고 나서서 李氏朝鮮 땅이 韓半島 뿐이라고 선전한다. 10년 후에는 일명 淸과 간도협정(間島協定)을 맺어 韓半島 以北(東鴨綠江 西北端에서 黑龍江 下流까지)을 넘긴다.
◀ Le Petit Journal지에 실려있는 일본과 한반도
日本이 한단사(桓檀史)에서 高麗史까지 우리나라 全歷史 抹殺에 혈안 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日本이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나라 植民地였기 때문이다. 日本은 4세기 말 百濟의 식민지로 출발해서 대대로 우리나라에 朝貢한 속국이다.
中國倭가 이주한 후 文盲者의 나라로 전락한 日本은 朝鮮通信使의 가르침을 받자, 역사날조에 혈안 이었다. 日本은 東아시아의 역사날조가 거의 끝난 18 세기에 이르러서야 역사날조를 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朝鮮通信使가 마지막으로 간 해가 1811 년이니까, 朝鮮通信使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역사날조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李氏朝鮮을 강점한 동안 이미 抹殺된 우리나라 역사를 抹殺 하겠다고 날뛰었다.
고토 분지로(少藤文次郞)라는 倭奴는 李氏朝鮮을 병탄하기 전인 1900 년에 조선산악론(An Orogrphic Sketch of Korea)을 써서 우리나라 땅이 韓半島 뿐이라고 전세계에다 소개했다. 日本이 李氏朝鮮을 병탄하기 전인 1900 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 지리를 연구 한다면서 설치고 다녔다는 사실이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교육회에서 발간한 문교의 조선 1931 년 3월호에 이토 후미마루(伊藤文治)의 '소등박사(少藤文次郞)의 조선산맥론을 소개한다'에 나와 있다. 日本이 1900 년 이전부터 세계에 李氏朝鮮의 영토가 韓半島라고 날조해 알렸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中國 역시 李氏朝鮮 땅을 中國 땅이라 알렸으니까.
‘韓國, 日本과 東部 中國의 지도’에는 日本沿岸을 제외한 바다 전체가 우리나라 영토이다. 그러나 東海가 우리나라 영토 라면서도 日本海로 표기되어 있다. 남의 나라 영토에다 自國名을 붙일 수도 있는가. 自國에 他國名을 붙이는 나라도 있나.
땅을 빼앗기 전부터 축소지도(皇輿全覽圖)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中國은 李氏朝鮮 땅을 모조리 집어삼킬 자신이 있었다. 같은 華夏族의 나라(中國이나 日本이나 그 근원은 모두 華夏이다) 日本이 李氏朝鮮을 집어삼킬 거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이 존속하는 동안, 西鴨綠江은 桑乾河, 난하(灤河), 大凌河, 현 遼水, 東鴨綠江으로 밀려났다. 李氏朝鮮은 淸에게 최소한 다섯 번, 日本이 넘겨준 것까지 해서 최소한 여섯 번에 걸쳐 땅을 빼앗겼다. 그리고 日本에 나라 자체를 잃었다.
李成桂와 濊貊族이 역사를 축소한 대가를 두고두고 무섭게 치뤘던 것이다.
결코 무력으로 정복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를 미개 식민종족들이 권모술수로 분할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 해체는 濊貊族 李成桂가 주도했다. 그 때문에 李氏朝鮮의 濊貊族들은 同族 淸에 발목을 잡혀 끝없이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축소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