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미한 여성들의 로망스-'마더'와 '파주'의 여성학 / 김수현
1. 로망스―낭만적 사랑, 댄디적 모험
엄마와 소녀는 사랑의 전령사다. 영화 '마더'(봉준호, 2009)와 '파주'(박찬옥, 2009)에 등장하는 '엄마'와 '은모'는 '엄마'와 '소녀'로 규정되면서 사랑을 증여하거나 수령하는 몫을 할당 받는다. 엄마는 아들에게 사랑을 증여하고 은모는 언니―형부(중년의 나이트 클럽 사장)으로부터 사랑을 수령한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은 과잉으로 흘러넘치고 은모의 사랑은 텅 비어 있는 탓에 증여와 수령의 과정은 왜곡되고 굴절된다. 엄마와 소녀라는 규정은 엄마와 은모의 삶에 안착되지 못하고 일그러지고 희미한 형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여성과 사랑의 관계는 대개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잣대를 통해 구성되거나 재현된다. 여성은 모성의 숭고함이나 소녀의 순수함을 신화화하는 신성한 성녀의 영역에 놓이거나, 향략적이고 퇴폐적인 성적 욕망의 도구로 대상화하는 추악한 마녀의 영역에 놓여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남성권력의 산물이며 궁극적으로는 가족주의와 출산기계의 번식력을 통해서만 증식하는 자본주의 권력의 산물이다. 특히, 숭고나 순수와 같은 우아한 표현 이면에는 여성의 자궁까지 관리하고 통제하는 폭력적인 정치가 도사리고 있다.
영화 '마더'와 '파주'는 여성과 사랑의 관계를 다루는 여성에 대한 두 가지 속성 즉, 성녀/악녀라는 이분법을 교란시킨다. 영화는 선과 악, 어떤 영역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지점에서 사랑을 '섬뜩한 것'으로 둔갑시켜놓고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들의 사랑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엄마의 모성은 불안한 신경증과 히스테리를 빈번하게 노출시키며 살인까지 감행하고, 은모 또한 자신의 강박증이 만들어낸 죽음을 회피하거나 방관한다. 엄마와 은모는 온전한 가족의 형태가 부재하는 결핍을 앓고 있으며 사건과 기억을 오인하고 망각하는 동일한 궤적을 그려내는 지점에서 접합된다.
두 영화의 서사가 엄마와 은모의 자기오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남성적 권력의 무기력함이나 사회의 법적 체계의 허술함을 재현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자기오인의 메커니즘은 주변 인물들 에게도 동일하게 발견되며 그들이 거주하는 사회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두 영화가 남성과 여성의 날카로운 대립구도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어떤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남성적 권력과 시선은 그녀들의 삶에 잠복되어 있다가 '안'과 '밖'의 충돌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공격도 하기 전에 이미 허물어지고 비루한 형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이상한 것은 엄마와 은모의 사랑이 무너지고 찢겨진 남성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수선하려 한다는 점이다. 근대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위치는 강력한 남성적 표상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거나 재현되어 왔으므로 그것의 환영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진다. 엄마의 강박증과 히스테리, 그리고 은모의 침묵은 지금 여기 이 땅에 살고 있는 '엄마들'과 '소녀들'의 형상과 겹쳐진다. 영화에서 엄마와 은모는 단순한 상실이나 결여라기보다는 기이하고 모호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으로 처리되며 근대적 남성적 질서가 포섭하지 못하는 공백과 언저리에서 서성거린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들을 '모호하다', '서성거리다'라고 표기하는 방식이 삶의 여백에서 발생하는 낭만적 감수성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호함과 서성거림은 남근의 부재 때문에 근원적인 상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운명이 아니라, '가진 것 없는 여성'이 뿜어내는 불안과 절박함의 우회적인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마더'와 '파주'는 남성과 여성의 대립각을 세우는 추상적이고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있다. 개별자들 혹은 앓고 있는 자들의 내밀한 질감을 통해 무능력한 남성적 법적 제도의 허구성을 드러내며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광포한 폭압성이 지우고 은폐하는 음지의 삶을 카메라로 비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마와 은모가 놓여 있는 자리를 따뜻하지만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흐릿하게 존재하는 엄마의 비명과 은모의 침묵에 형상을 부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2. 상실과 결핍, 강박적 증상들
'마더'의 엄마는 이미 모성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했다.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엄마는 5살이었던 아들 도준에게 농약이 든 박카스 병을 내밀었던 과거의 기억과 함께 현재를 살고 있다. '바보'가 되어버린 모자라고 어눌한 아들과 단 둘이 살아가는 탓에 엄마에게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구획은 무의미한 것이며 기억은 언제나 생생한 현재의 자리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엄마에게 기억은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의 한복판을 이미 점령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도(불)가능한 기억은 엄마를 아들과의 분리를 통해서는 재현 불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사슴 같은 눈"이 꼭 닮은 것처럼 둘은 분리(불)가능하게 흡착되어 있다. 사슴 같던 두 모자가 살인 괴물로 변이된 후 서로의 죄를 은폐하고 침묵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엄마의 삶이 온통 아들에게 바쳐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아들을 지키려는 엄마의 고군분투는 일종의 강박증에 가깝다. 모자는 아직도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으므로 모성은 기각 될 수 없으며 만회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미 구멍 뚫린 모성은 아들과의 은밀한 요새와 암호를 만들어 냄으로써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 도준을 무시하거나 바보라고 깔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응징해야한다는 것. 영화의 서사는 엄마와 도준의 은밀한 내부규칙이 아정이라는 여고생의 살인 사건을 기점으로 '외부'의 규칙들과 접속하고 균열되는 지점들을 곳곳에 포진시키지만 다시 위태로운 봉합의 방식으로 닫히고 만다.
'파주'의 은모에게도 안정적인 삶의 지반이나 온전한 가족은 부재한다. 엄마와 달리 특정한 대상을 향한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언어가 없는 은모는 안개 속에서 부유한다. 소녀는 손을 뻗어 잡을 수 없는 안개처럼 모호하다. 언니(은수)―부모님이 물려주신 집―형부(―나이트클럽 사장)의 보호막을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그 대상들의 부재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은모는 자신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흐릿하게 만들면서 스스로도 현실의 중력에서 비껴나 있는 것이다.
격렬하거나 처절하지 않아서 천박하거나 비루하지 않은 은모의 무표정은 사실 '가면'을 만들어 내는 강박증에 가깝다. 공부방 친구들과 공모하여 중식을 놀렸을 때는 중식을 향하여 "우리 언니 건드리지 마"라고 말했지만 결국 자신의 실수로 언니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혼자 못 살아간다는 게 두려워서요"라고 말했지만 결국 중식을 감옥에 보내고 자신은 또 어딘가를 향해 떠난다. 가면의 속성이 본래의 얼굴이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장치라면 은모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어야 하겠지만 영화는 애당초 이런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면의 속성을 통해서만 존재를 드러내려는 은모의 강박증이 무엇인지를 묻게 만든다.
영화의 공간은 엄마와 은모의 강박증적 양상을 드러내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그녀들이 거주하는 공간의 속성은 머무름과 닫힘/떠남과 열림으로 분절되지만 이러한 차이가 강박증이라는 동일한 증상에 의해 종용된다는 점에서 접합된다. 엄마에게 약재상은 삶의 거점을 형성하는 구심점이지만 은모에게 안개 자욱한 파주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가변항이다. 엄마는 머무르기 위해 "나만 아는" 침 자리로 가슴에 맺힌 울화를 풀어주고 마취한다. 최고의 약재와 침은 도준과의 '분리(불)가능'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종교와 흡사한 매개물인 것이다. 은모는 떠나기 위해 중식의 첫사랑의 기억―하얀 원피스, 쓸려진 머리칼, 목덜미―을 한갓된 장난으로 추락시키거나 언니의 결혼사진을 흠집 내고 손상시킨다. 중식을 오려내는 것은 언니를 소유하고 싶은 것도 중식을 소유하고 싶은 것도 아니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파주처럼 타인과 끝없이 벌어지는 '거리두기'의 증표인 것이다.
3. 오인의 이중주
엄마와 은모는 모성과 소녀가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라는 신화적 통념에 파열을 가하고 균열을 일으킨다. 도준을 구출하기 위한 엄마의 사투가 너무 비장하지만 우스꽝스럽게 처리되는 방식은 추락의 반전을 예비하는 것이다. 가령, 진태의 방에서 피 묻은 골프채를 찾아낸 후 그것에 일회용 비닐장갑을 씌워 행진하는 장면 바로 뒤에 피가 아니라 말라붙은 립스틱으로 판명되는 경찰서 장면은 신성한 모성이라는 신화의 불가역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험금 사기죄로 기어이 중식을 감옥에 보내는 혹은 방관하는 은모 또한 순수하고 순결한 소녀라는 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현실에서 신화는 다양한 것을 배제하거나 제거하면서 하나의 선택항만을 허용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오인의 메커니즘을 수반한다. 다시 말해 신화는 외부와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욕망의 덩어리를 특정한 욕망을 생산하는 틀에 구겨 넣기 위해 나머지 것들을 인식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쳐 버리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화가 포섭하지 못(않)한 잔여물들은 현실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틈과 틈 사이에서 배회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화는 이미 균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엄마와 은모가 신화에 대응하는 방식은 현실을 변혁하려는 의식적 주체의 저항의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에서 터져 나오는 안간힘과 신음소리가 신화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균열을 드러내 준다.
영화에서 그녀들의 사랑은 과잉되어 있거나 텅 비어 있기 일쑤이지만 신화는 사라지기는커녕 거짓말처럼 부풀려지기만 한다. 도준에게만 주시된 엄마의 시선과 자아에게만 향하는 은모의 시선은 오인에서 시작하고 오인에서 끝이 나지만 실은 오인의 붕괴과정에 다름 아니다. 차에 부딪친 도준을 쫓아간 엄마는 자기 손에서 나는 피를 도준의 것으로 오인하고, 아정을 살해한 범인이 아들 도준이 아니라고 오인한다. 그리고 은폐한다. 은모는 언니 은수에게 일어난 사고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오인한다. 그리고 회피한다.
오인의 메커니즘은 돌고 돌아 순환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어찌 보면 나와 타인의 만남이라는 사태 자체가 오인하고 또 오인하는 과정이겠지만 문제는 접속과 동시에 생성의 힘을 만들어 내는 유동적인 흐름이 아니라 일종의 폐쇄회로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 무엇이든 기억해 내야한다"는 엄마의 명령은 도준의 기억장치들을 통과하면서 전혀 엉뚱한 기억들을 산출해낸다. 선형적인 시공간을 이탈한 도준의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후퇴한다. 벤츠의 빽미러는 자신이 아니라 진태가 부순 것이며, 다섯 살 때 엄마가 자신에게 농약이든 박카스 병을 내밀었던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때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법적 제도 역시 엄마와 도준의 그것(인식수준)과 별다른 질적 차이를 보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날 밤 발정난 '개'같았다던 맨하탄 술집 여주인의 증언과 새벽에 '개밥'을 주다가 아정을 따라가는 것을 봤다는 동네 노인의 증언,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체 옆에 놓인 '도준'이라고 적힌 골프공 때문에 도준은 살인자가 된다. 그러나 기도원을 탈출한 종팔의 옷에서 아정의 혈흔이 발견되면서 살인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 결과는 번복된다. 온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현장검증까지 한 사건을 말이다. 살인사건 현장검증이 유난히 엉뚱하고 허술한 이미지들로 산포되어 있는 것을 떠올려 보면 이러한 해프닝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으며 무능력한 법의 힘은 실소와 조소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정들을 바보 도준만이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도준의 말은 깜짝 놀랄만한 직관력과 통찰력을 내포하고 있다. "다들 내가 죽였다 그러고, 그러다 보니 죄가 몇 바퀴 돌아서 나한테 오고." 기이한 힘일 수밖에 없는 도준의 괴력은 다른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매번 헛발질만 하던 도준이 아정의 머리통에 돌덩이를 던져 정확히 명중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근대의 지적체계에서 도준의 존재는 추방된 자, 몫이 없는 자 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영화는 근대 지성의 오만함을 폭로하면서 윤리적으로 정당한 질문을 제기한다.
'파주'에서도 이와 유사한 지점을 목도할 수 있다. 은모의 시선은 폐허 직전의 재개발 반대 시위 현장을 느린 속도로 훑은 다음 물대포를 맞으며 용역 깡패들과 싸우는 중식에게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고 묻는다. "글쎄, 처음엔 멋있어 보여서 한 것 같고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 나"라고 말하는 중식의 대답은 거짓말일 지도 모른다. 실은 '처음엔 첫사랑 선배 때문에, 지금은 은모 때문에'라고 말하는 게 옳지 않을까. 정신없는 시위현장에서 은모의 뜬금없는 질문에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더 이상하고 낯선 까닭이다.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지식인 중식은 매번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질문했을 것이며 그것에 대한 답들을 의식적으로 확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답은 자기오인에서 비롯된 위선이나 기만으로 보인다.
은모는 중식에게 보험사기 혐의를 덮어씌움으로써 그의 윤리적 정당성을 조롱한다. 이것에 중식은 순교자의 희생과 흡사한 구도자의 선택을 보여주지만 은모는 신성하고 초월적인 힘에 굴복하기는커녕 외면함으로써 냉소한다. 어떤 형태―학생운동, 공부방, 철거반대 시위 현장―로든 현실적 개입을 실천하는 중식의 도덕적 삶은 '길 잃은 어린 양 한 마리'를 구원하기 위해 후방으로 밀려난다. 중식이 "난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발설하는 순간 그의 권위는 찢겨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위선과 자기기만은 시위현장에서 감옥으로 자리이동만 했을 뿐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4. 앓는 자들의 공동체
'마더'와 '파주'에는 근친상간의 혐의와 성적 암시를 지시하는 기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 두 영화에서 성적 욕망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거나 매우 많은 것을 말해주는 기능을 한다. 엄마와 도준은 같은 이불에서 자고 은모(처제)와 중식(형부)은 단 둘이 산다. 그들의 관계는 외부 사람들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의 표적이 되고 이들의 목소리는 소문을 만들어내고 근친상간에 대한 공포를 불러들인다. 그러나 근친상간은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동력이라기보다는 관객에게 동일시를 불허하는 장치에 가깝다.
성적인 암시는 남성권력의 상징이다. 이때 여성에게 가해지는 신화의 두 가지 속성 즉, 모성과 소녀를 숭배하고 성적 욕망에 대한 대상으로 도구화는 것은 남성들의 시선 아래 지배되지만 여성들에 의해 실행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엄마와 은모에게 남성은 파괴의 대상인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다. 부연하자면, 잘 봉합되어진 강력한 남성성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만 무능력한 남성은 퇴출되거나 삭제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포착되지 않던 엄마와 은모의 욕망은 남성성 내부에 위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지점에서 발화된다.
가령, 폐가에서 쌀 봉지를 주섬주섬 내어놓고 여고생의 몸을 쌀과 교환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엄마에게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성적욕망을 질질 흘리던 고물상 노인은 죽임을 당한다. 은모의 몸을 덮쳤던 중식도 감옥으로 들어간다. 남근은 감추어짐으로써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욕망은 진태를 통해서 드러난다. 진태의 방에 잠입해서 방안을 훑던 엄마의 시선은 벽에 붙은 진태의 군복 입은 사진에서 잠시 멈춘다. 그런 다음 진태와 미나의 성교 장면을 훔쳐보는 엄마의 클로즈업된 눈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까지 확대된다. 그런데 그것은 성적 욕망 자체라기보다는 유약한 여성의 강력한 남성적 힘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엄마를 향해 '경찰수사를 믿지 말라'고 말하는 진태가 위에서 아래로 카메라를 내려다보는 설정은 엄마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강력한 남성성에 대한 욕망은 뒤돌아 앉아 있던 진태에게 도준의 환영을 덧씌운 후라서 아들 도준에 대한 엄마의 죄의식이 빚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은모의 욕망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고 영화의 끝에서 다시 함께 등장하는 중년의 나이트클럽 사장에게 향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텅 비어 있어 예측 불가능하다. 중식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가차 없이 중식을 밀쳐냈던 것을 떠올려 보자. 시장에서 브래지어를 고르던 장면에서 은모와 중식은 은밀한 성적 교신을 주고받지만 은모의 '아니'라는 한 마디에 허무한 여운만을 남긴다. 근데 진짜 달려들어 버리면 중식처럼 무안만 당할 뿐이며 소녀는 멀리멀리 달아난다. 은모의 욕망은 실체가 없는 가면을 만들어내는 거리두기에 다름 아닌 탓이다. 이러한 속단은 영화에서 은모가 딱 한번 남성들의 욕망에 반응하는 장면에서 확실성을 얻는다. 중식과 함께 도로변에서 차(茶)를 팔던 은모는 지나가던 두 남자의 "예쁜 아가씨가 주면 더 좋지."라는 농지거리에 차를 끓여 건네준다. 딱 그만큼만 요구하고 지나갈 것이므로.
따라서 남성성에 대한 엄마와 은모의 공격은 허무적 공격성일 가능성이 높다. 두 영화는 이미 낡고 닳아서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남성의 권력을 파괴하는 동시에 더 강력한 남성성에 대한 욕망을 환기시킨다. 남성성의 상징인 전쟁에 대한 대중의 공포가 파시즘의 창궐을 묵인하고 환대했던 것처럼. 모성과 소녀의 성스러운 요새를 위협하는 공포는 자신들을 숙주로 삼아 포식하고 비대해지는 남성권력의 망령을 집요하게 붙들려고 하는 것이다. 상실된 모성에 대한 강박증이 과잉된 형태로 출현하고 거리두기에 대한 소녀의 강박증이 타인과의 건조한 관계를 반복하게 하는 것은 동일한 집착에 대한 서로 다른 양상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러한 뻔한 욕망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똬리를 틀고 꿈틀거리는 지반을 예민하고 섬세한 촉각으로 살피는 일일 것이다.
영화 '마더'와 '파주'는 이 지점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희미하게 지우며 '앓는 자'들의 공동체로 확장된다. '가진 것이 없'어서 앓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환부들은 켜켜이 서로 다른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어서 구별하거나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존재하고 있지만 부정되거나 은폐된 채로 '지워진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탓에 우리가 가진 언어로는 재현불가능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조금 달리 보면 강력한 남성에 대한 엄마와 은모의 욕망은 버텨내기 위한 안간힘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때 안간힘은 외부와의 충돌에 대처하는 생존하기이므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된다.
현실에서 자본이 잉여가치를 통해 자가 증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핍은 결핍이 살포하는 잉여물들을 통해 자가 증식 한다. 결핍에 대한 공포가 신경증과 강박증을 통해 빈번하게 출현할수록 그것의 강도는 짙어지고 타인에게 전이되고 또 전이된다. 결핍은 메워지거나 대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결핍의 증상들은 출구를 찾지 못하는 자기방어에서 나오는 것이며 자기방어는 독백, 중얼거림, 소통불능의 상태를 반복한다. 자기방어와 강박증의 주위를 맴도는 공격성은 대개 생동적 에너지보다는 파괴적 에너지로 향한다.
'마더'에서 결핍―오인―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바보 도준과 창녀 아정이 만나는 장면은 이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여고생 아정은 자신의 몸과 쌀을 교환하러 가는 길이었다. 도준은 뺑소니로 도망간 교수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진태에게 속아 빽미러 값을 덤터기 쓰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바보가 창녀에게 "오빠랑 할래? 술 한잔?"이라고 말하자 창녀는 바보에게 "이 바보 새끼야."라고 말하며 돌을 던진다. 결핍-오인-자기방어가 마구 뒤섞인 채로 던져진 돌은 정확히 다시 되돌아와 아정의 죽음으로 귀착된다.
영화 초반부 술집에서 나온 도준의 뒤를 쫓았던 카메라에는 도준의 너스레만 있을 뿐 아정과 도준의 분노는 생략되어 있다. 당연하다. 그것이 도준이 가진 기억의 이미지라면 말이다. 그에 반해 후반부에서 카메라는 사건의 전모와 진실을 보여주지만 모순적인 층위에서 작동한다. 고물상 노인의 기억장치에서 진술되는 이 플래시백은 노인의 눈(시각)과 귀(청각)라고 할 수밖에 없는 깨어지고 흐릿한 창을 통해 보여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할 정도로 안정적이고 냉정하게 보일만큼 합리적이다. 도준이 서 있는 지점과 아정이 서 있는 지점을 공평하게 오가던 카메라에는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없다. 이것도 당연하다. 고물상 노인은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한 채 그저 말다툼 정도로만 여겼을 테니까.
의도적으로 방관하던 카메라는 이 장면에서 딱 한번 일탈을 감행하는 데 아정이 도준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카메라의 기묘한 위치는 아정이 던지는 돌이 우리가 던지는 것처럼, 도준에게 날아오는 돌이 우리에게 날아오는 것처럼 처리되어 있다. 이것은 영화적 이미지와 현실의 이미지가 충돌하면서 영화와 현실이 서로 간섭하는 대목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결핍-오인-자기방어가 만들어내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우리가 당면한 문제이며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인 혹은 자신과 다름없는 시체를 옥상 한 가운데에 전시해 놓는 도준의 괴기스러운 행동은 일종의 자기 진술이다. 진태의 말처럼 "보통 죽이면 파묻"는 것이어야 하지만 "얘 지금 피 질질 흘리고 있으니까 빨리 병원 데려가라고. 그래서 사람들 젤 잘 보이는 데에 올려놓은" 도준은 시체와 다름없이 부정되는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그런 방식으로 밖에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엄마가 묻지 않았는데 혼자 묻고 답하는 것처럼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기 때문에.
'파주'의 중식은 이것보다 덜 절박하고 덜 처참하지만 현실에서 사라져 가는 학생운동의 잔영의 이미지를 반추하게 하고 재개발 반대 시위 현장의 이미지를 환기시킴으로써 현실의 재현영역을 확장한다. 영화 안에서 중식의 사회적 실천은 은모에 의해 의혹이 제기 되었고 어떤 점에서 위악의 대상으로 다루어졌지만 그것이 하나의 질문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실은 이것도 달리 보면 중식과 같은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며 공동체 문제를 숙고하는 우리의 태도와도 관련된다. 사랑하지 않는 은모의 언니와 결혼한 뒤 아내와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뛰쳐나온 중식을 쫓던 카메라가 중식의 걸음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엇박자를 내면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머뭇거림과 겹쳐진다.
5. 회색의 질문들
엄마가 들판에서 흐느적거리며 춤추던 장면은 도대체가 가늠조차 되지 않고 가면 같은 은모의 무표정도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두 영화는 엄마와 소녀의 신화를 기괴한 방식으로 변주하면서 우리에게 이해(불)가능한 희미한 형상만을 남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희미하게 존재하는 여성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침묵은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어 앓는 자들의 공동체로 확장되고 있다.
영화 '마더'와 '파주'는 다시 한 번 묻는다. 이래도 다시 사랑할 수 있겠냐고 말이다. 엄마는 살인 괴물로 둔갑되었고 끈적하고 눅눅한 것들에게 보내는 은모의 무표정은 대책 없는 냉소인데도 우리는 그녀들을 그녀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질문의 형식은 대개 긍정/부정, 승인/거부, 복종/저항 중에서 한쪽 항을 선택해야만 대답을 도출할 수 있다. 경찰들이 도준에게 '예' 아니면 '아니오'로 대답하라고 했던 것처럼 자기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에 가까운 것이 된다. 그러나 낱낱으로 흩어진 개별자들의 목소리들을 어떻게 '예/아니오'의 구분법으로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으며 듣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폭력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무능력을 학습하는 한에서 희미한 존재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모호하고 기이한 것들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 즉, 함께 희미해지는 방법을 통해서 좁혀지기 (불)가능한 거리자체를 희미하게 만드는 가능성을 실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첫댓글 마더와 파주에 대한 관점을 사회적 위치의 여성성과 맞물려서 쓴 평인데 읽을 만 하네요^^ 2010년 부산일보 평론 당선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