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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천명제의 제2계비이며 숭덕제의 모친이다(청태종의 어머니)
--> 이여자가 청회간씨라는 말인데 ....
----> 누루하치는 조선여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그 지역이 청장관의 권역안에 있는 것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의 제후국이 아닌가 합니다.
창해역사는 글이 길어서 다음에 다루겠읍니다.
명태조의 선조는 삼쳑에서 났는데 ... 주원장일까?
이는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화를 피하여 삼척으로
이주한 이야기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원장이 조선인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원장의 조상이 삼척에서 났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읍니다.
이 삼척의 이안사가 이성계의 선조로 이가 명태조의 선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원장은 가공의 인물이고 이성계가 명태조 이며 명은 중조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명은 이미 망했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명은 오직 조선의 중조이며 그 중조가 사라졌지만
조선은 아직 있는 의미로 보입니다. 달리해석하면 청이 명을 멸하고 중조의 위치를 점하였지만
청은 중조의 권위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후지만 엄청난 나라인 조선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명태조(이성계)의 자손들은 중조 주변의 제후국의 왕으로 군림하다가 청에 의해 중조(명)가 붕괴되자 주변의 제후국중에서 요동서쪽 서북쪽은 그 제후국의 지위를 상실하고 청에 복속되고 그 나머지 를 가지고 인조대왕이 왕업을 다시 일으킨 것은 아닌지 모르겠읍니다.
물론 이 요동은 저기 대륙서북에 있는 요동입니다. 아마도 준갈이 분지 /천산산맥서쪽의 우즈벡 또는 그너머 카자흐 평원이 요동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 요동 이야기는 별개입니다. 하도 복잡하고 얽혀있어서 .. 고증하기가 정말 어려운 곳입니다.) /끝
-----------------< 아래의 인용글은 이성계의 선조 목조의 삼척거주 이야기 입니다.>------------
1) 태조 / 총서
태조 이성계 선대의 가계.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의주를 거쳐 알동에 정착하다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전의 휘(諱)는 이성계(李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僕射) 휘(諱)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가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를 낳고, 아간이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 휘(諱)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휘(諱)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이긍휴가 휘(諱)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휘(諱)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이승삭이 휘(諱)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휘(諱)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휘(諱)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휘(諱) 화(華)를 낳고, 화가 휘(諱)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휘(諱)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휘(諱)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內侍執奏) 휘(諱) 이인(李隣)을 낳고, 집주가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사방(四方)을 경략할 뜻이 있었다. 처음에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그 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官妓)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州官)이 안렴사(按廉使)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穆祖)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家)나 되었다.(후략)
2). 태조 / 총서
목조 이안사가 알동 천호소의 수(首)천호로서 다루가치를 겸하다
명년 을묘(1255)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元)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알동 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금패(金牌)를 내려 주어 남경 등처(南京等處)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알동(斡東)은 남경(南京) 동남쪽 90여 리(里)에 있으니, 지금의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에 떨어져 있다. 알동의 서북쪽 1백 20여 리에 두문성(豆門城)이 있고, 또 그 서쪽 1백 20여 리에 알동 사오리(斡東沙吾里)가 있으니, 사오리(沙吾里)는 여진(女眞) 말로서 참(站)이다. 참(站)이 관동 알동의 관내(管內)에 있는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 평야(平野)에 큰 토성(土城)이 있고, 남경(南京)의 평야에도 또한 큰 토성이 있으며, 그 북쪽 7, 8리에도 또한 큰 석성(石城)이 있으니, 모두 목조가 관령(管領)한 군민(軍民)이 거처하던 곳이다. 목조는 비록 알동에 거처하였으나, 여러 성(城)에 왕래하여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다.
3). 국조보감 제36권 / 인조조 3 / 27년(기축, 1649)
○ 그 전에 풍기군(豐基郡) 사람 진벽(秦闢)ㆍ박지영(朴之英)ㆍ서태일(徐泰一) 등이 상소하기를,
“목조(穆祖) 양위 묘소가 삼척부(三陟府) 황지(黃池) 노동(蘆洞) 안에 있어 삼척ㆍ봉화(奉化)ㆍ정선(旌善)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을 가리켜 말하는 이들이 왕왕 있습니다.”
하여, 그 상소를 예조에 내리고 대신들과 논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경상도 관찰사로 하여금 진벽을 데리고 가 찾아보게 하고, 다음으로 예조 참판 허계(許啓)를 보내 함께 찾아보게 했던바 과연 말갈기 모양의 봉분과 3면이 담처럼 둘러싸인 석지(石地)는 발견하였으나 확실한 입증이 될 만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끝내 발견을 못하여 그냥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분묘를 수축하고 묘지기를 두도록만 명하였다.
4) 동사강목 제11상 / 갑인년 고종 41년(송 이종 보우 2, 몽고 헌종 4, 1254)
12월 산천 귀신을 신묘(神廟)에서 합사(合祀)하였다.
○ 몽고군이 돌아갔다.
몽주(蒙主)가 차라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회군하도록 했다. 이 해에 몽고병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었고, 살륙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이래로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
○ 몽고군이 고원(高原)을 함락시켰다.
이때 목조(穆祖 조선(朝鮮) 태조의 고조(高祖)인 이안사(李安社))가 삼척(三陟)에서 배를 타고 의주(宜州)로 이사하였었는데, 조정에서 의주 방어사를 임명하매, 고원에 둔치고 몽고군을 방어하였다. 이때 몽고의 산길대왕(散吉大王)이 쌍성(雙城)에 와서 둔병하고, 철령(鐵嶺) 이북을 취하려고 목조에게 원병을 청하자, 목조가 부득이 김보노(金甫奴) 등과 함께 몽고에 귀순하여 알동(斡東)지금의 경흥(慶興) 동쪽 30리에 있다 에 옮겨가 살면서 5천 호(戶)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이 되니, 왕업(王業)을 일으키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의 조감(祖鑑)에서 보충
5) 기언 제37권 원집 / 척주기사(陟州記事)
노동(蘆洞), 동산(東山) 두 산소에 대한 기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목조 황고(穆祖皇考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의 묘(墓)는 부(府 삼척군(三陟郡))에서 서쪽으로 45리 노지동(蘆池洞)에 있고, 황비(皇妣 이성계의 고조모)의 묘는 부에서 서쪽으로 30리 동산(東山)에 있다.”
라고 하였고, 지리지(地理誌)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또 옛 이원(吏員)이던 김윤직(金允直)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고사(古事)에도,
“정통(正統) 연간, 우리 세종 때에 감사(監司) 이심(李審)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묘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였는데, 옛 늙은이 고봉생(高鳳生)ㆍ조흥보(曺興保)ㆍ최산봉(崔山鳳)ㆍ최흔만(崔欣萬)의 아내와 최산덕(崔山德) 등이 알려온 내용에 ‘황고의 묘는 노동에 있고, 황비의 묘는 동산에 있다.’라고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홍치(弘治) 초년, 우리 성종(成宗) 때에 종부시에서 전교(傳敎)를 받고 본도(本道)에 공문을 발송하여 감사(監司)에게 직접 나가서 두 묘의 퇴락된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하였고, 이듬해 경술년(1490, 성종21)에는, 예조에서 전교를 받고 명을 내려 산소를 수축(修築)하라고 하였다가 이내 수축은 그만두고 수호만 하라고 명하였다.(후략)
---------> 아래의 글은 여지승람 삼척부 기사인데 어디에도 이 글에서 인용한 목조의 기록은 없읍니다.
여지승람이 수상한 이유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 강원도(江原道)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9리이고, 남쪽으로는 울진현(蔚珍縣) 경계까지 1백 9리다. 서쪽으로 경상도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 1백 50리이고, 같은 도 안동부 소천현(少川縣) 경계까지는 1백 37리며, 정선군(旌善郡) 경계까지는 95리다. 북쪽으로 강릉부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까지는 6백 32리다.
【건치연혁】 본래 실직국(悉直國)이었는데, 신라 파사왕(婆娑王) 때에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지증왕(智證王) 6년 실직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다. 고려 성종(成宗)이 척주 단련사(陟州團練使)로 고쳤고, 현종(顯宗)이 현령으로 강등시켰으며, 신우(辛禑) 때에는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본조 태조 2년에는 목조(穆祖)의 외가 고을이라는 것으로써 부(府)로 승격하였고, 태종 13년에 관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관원】 부사ㆍ교수 각 1인.
【군명】 실직ㆍ척주ㆍ진주(眞珠).
【성씨】 본부 진(陳)ㆍ김ㆍ심ㆍ박, 진(秦) 사성(賜姓)이다.
【풍속】 무당과 귀신을 믿는다. 사람의 성품이 대체로 교활하다. 오금잠(烏金簪)에 제(祭)한다. 고을 사람이 잠(簪)을 작은 함에 담아, 관아(官衙) 동쪽 모퉁이 나무 밑에 감추었다가 단오날이면 끄집어내고, 제물을 갖추어 제사한 다음 이튿날 도로 감춘다. 전해오는 말에는, 고려 태조 때 물건이라 하나 제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일이므로 관에서도 금지하지 않는다.
【형승】 천 길 푸른 석벽, 오십천 맑은 냇물 류사눌(柳思訥)의 시에, “천 길 푸른 석벽이 겹겹으로 둘러 있고, 오십천 맑은 냇물이 졸졸 흐른다.” 하였다. 북쪽으로 큰 영(嶺)을 의지했고, 서쪽으로 큰 냇물을 임했다. 김수온(金守溫)의 〈죽서루기(竹西樓記)〉.
------> 김수온의 죽서루기에 기록된 삼척은 현재의 지형과 다르케 북쪽에 큰 영이(실제는 동쪽) 있고
서쪽에 큰 물에 의지하고 있읍니다 그 물 이름이 오십천인데 굽이가 오십이라서 오십천입니다.
천길 푸른벽은 또 어디에 ???? 현재의 삼척이 아닙니다..
6). 동사강목 제14하 / 을미년 공민왕 4년(원 순제 지정 15, 1355)
○ 우리 환조(桓祖)가 쌍성(雙城)으로부터 와서 조회하였다.
쌍성은 조휘(趙暉)가 배반한 때부터 우리 국토가 아닌 지 오래이다. 그때 환조는 쌍성 천호(雙城千戶)였는데 와서 조회하였다. 처음에 목조(穆祖 휘는 안사(安社))가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나라를 안정시킬 뜻을 두었으며, 일찍이 의주(宜州)를 다스릴 적에 어진 정치를 하였었다.
인아 친척(姻婭親戚)의 문제로 인하여 삼척현(三陟縣)에 옮겨가 살았었고 거기서 또 어떤 일로 지현(知縣)에게 거슬려 원에 망명하니, 원에서는 남경(南京)원지(元志)에 “개원성(開元城) 서남쪽은 영원현(寧遠縣)이고, 또 그 서남쪽은 남경이고, 또 그 남쪽은 합란부(哈蘭府)이고, 또 그 남쪽은 쌍성이라 한다.” 하였다. 에 살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삼았다.
【안】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목조가 삼척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의주(宜州)로 옮겨가자, 조정에서 의주 방어사로 임명하여 고원(高原)에 둔치고 몽고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산길대왕(散吉大王)이 쌍성에 와서 둔치고,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취하려 하여 목조의 군사를 청원(請援)하므로, 목조가 어쩔 수 없이 김보노(金甫奴) 등을 데리고 항복하여 알동(斡東)에 옮겨가 살았으니, 지금의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다. 이리하여 오천호소의 달로화적으로 삼으니 왕업(王業)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는 고종(高宗) 41년이다.
동각 잡기 상(東閣雜記上)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사공(司空)은 휘(諱)가 한(翰)인데 신라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 10세 손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았고, 시중이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고, 복야가 아간(阿干) 광희(光禧)를 낳았고, 아간이 사도 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고, 사도가 긍휴(兢休)를 낳았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았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고,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았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았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고, 충민이 화(華)를 낳았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았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았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았고, 용부가 내시집주(內侍執奏) 인(璘)을 낳았고, 인이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고, 양무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목조(穆祖)다.
전주(全州)에서 강릉도(江陵道)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겼다가, 삼척에서 바다를 건너 덕원(德原)으로 갔는데, 고려에서 그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하고, 고원(高原)에 진(鎭)을 설치하여 원 나라 군사를 막게 하였다. 당시 영흥(永興) 이북은 개원로(開元路)에 속하였다. 원 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이 와서 쌍성(雙城 영흥)에 주둔하여 철령(鐵嶺) 이북을 차지하려고 계획하면서 목조에게 원 나라에 항복할 것을 요청하자, 목조가 부득이하여 김보로(金甫奴) 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때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1254)이니, 송 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이었다. 지원(至元) 갑술년(甲戌年 1274) 12월에 목조가 경흥부(慶興府)에서 흉(薨)하므로 성 남쪽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함흥부의 의흥부 달단동(義興部韃靼洞)에 이장(移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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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각컨대 <명>이란 황제국은 존재하지 않고, 조선의 한 제후국이었다는 주장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려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이란 <중조>의 명칭으로 그 유래는 수천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아집니다. 그 아래 작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의 제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다름이겠으나, 조선사의 왜곡은 한 국가의 산물이 아닌 당시의 여러 제국들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한 국가가 만들었다고 보기엔 너무 광범위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조선의 지배층들이 한반도로 이주했는가, 또는 대륙에서 자연 소멸되었는가하는 숙제를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정보와 좋은 글을 가려내어 올려주시는 "격물"님께 감사드립니다.
"해무"님 역시 아주 좋은 정보와 글을 올려 주시니, 여러가지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전 요즈음 월말이 공사준공과 큰 행사 때문에 글 쓸 여력이 없습니다. 여러 회원님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10월엔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좋은 내용의 글을 소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