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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경험해야 할 것 - 동행하심
눅 24:13-17,30-35
1970년 미국신학계는 죽음의 신학을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미국 인디에나 주에 사는 빌과 글로리아 라고 하는 두 고등학교 음악선생님들이 결혼을 하여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둘은 크리스챤으로 교회의 음악봉사를 위하여 학교를 사임하고 미래 음악사역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으로 어두은 분위기 탓인지 작곡도 뜻대로 되지 않고 사역의 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건강도 여의치 않은 상태로 1970년 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부가 빌의 아버지를 모시고 사무실 앞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있는데 주차장 한 구석에 깨어진 아스팔트를 헤치고 머리를 내민 파란 풀잎을 보고서 아버지가
“저 풀잎들 좀 봐라” 하고 외쳤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봄이 오는군요”하고 답을 했습니다.
봄과 더불어 이 가정에 기다리던 아들이 탄생을 합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 가족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던 글로리아는 마음 속에서 두려움은 사라지고 주님이 임재하시는 기쁨이 그녀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녀는 펜을 들어서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이 세상에 보내셨네 죄인위해 돌아가신 주 무덤을 깨트리고 살아나셨네 부활의 주 나의 참된 소망. 근심걱정 전혀없네 나의 구주 살아계시니 내 맘에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사람에게 두려움이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즘 창원지법의 가정법원에서 근무하는 천종호부장판사의 책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소년범들의 재판을 담당한 판사의 애환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아이들이 학교폭력을 당하고 비행소년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재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우리가 가진 막연한 두려움들, 실망, 좌절, 불통과 같은 일들이 어디에서 출발을 한다고 생각이 됩니까? 하나님 없는 신앙생활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를 믿고 신앙을 하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나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한 주일 동안 저는 예수님과의 동행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면서 예수님과의 동행을 경험하고 매 순간 그 분과 동행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지만 기쁨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를 믿지만 불통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지만 삶에서 활력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어떻게 동행을 시작해야 합니까?
1. 안식일에서 출발하자
오늘 본문은 엠마오로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23장과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13절의 “그 날에”는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앞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그와 관계하여 다른 제자들의 신앙의 모습에 묻어 있습니다.
(눅 23: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스승이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황망하고 마음이 급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이 되자 차분하게 안식일 준비 모드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 준수가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준비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준비 없는 성공하지 못하듯이 준비 없는 안식일예배가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에 성경의 땅을 순례할 때였습니다. 금요일에 이스라엘 땅으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국경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이스라엘에서의 3박4일 동안 우리를 안내할 안내자와 첫만남을 갖고 차에 올랐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기사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사해 였습니다. 사해에서 잠시 해수욕을 즐기는데 운전기사는 연신 시계를 보고 있습니다. 다시 장소를 옮겨 이동을 하는데 기사의 전화를 계속 벨이 울립니다. 그리고 기사는 여전히 시계를 봅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가족들에게서 오는 전화인데 안식일 환영 예배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 오냐고 계속 전화가 오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동행하심을 경험하게 된 비결의 첫 단추는 안식일 준비에서 시작했습니다. 준비된 설교에서 감동을 받고 준비된 순서에서 기쁨을 누리고 준비된 시험이 자신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안식일을 맞을 준비를 하고 맞이하는 안식일이 감동되고 주님과 동행함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맞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라는 말씀으로 육일 동안의 일을 명령하셨다. 성도들은 금요일 오후 해 지기 전에는 세상의 모든 업무를 마치고 안식일을 예비해야 합니다. 안식일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중심을 자리 잡도록 금요일 해가 지기 전에 우리의 생계를 위해서 이루어졌던 일부터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안식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출 31:14).
그러므로 성일이 오기 전에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 24). 그러므로 가족들, 성도들, 이웃들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를 예비일에 청산함으로 안식일을 거룩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비일에는 싸움도, 미움도, 원망도, 빚도 모두 다 청산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주님과의 동행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전 9: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예비일에는 깨끗이 목욕을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깨끗한 의복을 입고, 구두도 깨끗이 닦고, 집안을 청결케 하고, 질서 있게 정돈해야 합니다.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을 하듯이 우리의 신랑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맞기 위해 몸과 영혼과 가정을 잘 단장함으로 여호와의 안식일을 예비해야 합니다.
(출 16: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나님을 섬기는 주부들은 예비일에 시장을 보고 모든 요리를 맛있게 준비해야 합니다. 결혼식 날이나 명절 당일에 시장을 보러 나간다면 준비성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여호와의 큰 안식일을 맞이할 구원받은 백성들이 안식일에 시장을 본다면 안될 것입니다. 예비일에 준비하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입니다. 만일 우리의 집에 귀한 손님이 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집안과, 의복과, 식단을 준비하겠습니까?
“우리는 안식일에 다른 날보다 더 많고 잡다한 음식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에 우리는 더 단순하게 먹고 적게 먹어 마음이 깨끗하고 활기에 차서 영적인 사물을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한다”(교회증언, 6권, 357).
이렇게 준비된 마음과 준비된 환경을 만들어두고서 안식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분주한 모든 것 뒤로 하고, 우리의 집중을 흐트리게 하는 모든 것은 안식일이 되기 전에 마무리 하고 안식일에는 오로지 주님만을 경배할 수 있도록 준비된 마음 속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은 이루어집니다.
한 주일간의 주님의 동행하심의 신호탄은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에 예배 속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한 주일 내내 경험하고 동행하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 안식일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 안식일에 임재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가 맞이하는 한 주일은 실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한 주일을 보내기 위해서 반드시 예배 속에 임재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하고 예배 속에 임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의 목적은 우리와 동행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예배하는 목적도 그분과 동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난 뒤에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의 동행하심이었습니다.
(마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예수를 믿지만 예수님과의 동행하심을 모르는 성도들입니다. 대한민국 땅에 살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모두 일에 중독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일 중독은 자신이 빠져 있는 일 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서 인생의 모든 기쁨과 의미를 빼앗아 갑니다. 안으나 서나 일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함께 하셔도 느끼지 못하고 주님의 동행하심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한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눅 24:31-32)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주를 향한 우리의 마음에 열정이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주님의 동행하심을 느낀다면 주님께서 동행하심을 경험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뜨거움의 신앙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신앙의 열정을 원하십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심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 안식일 예배에 임재하시는 주님의 임재하심을 위하여 안식일 준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안식일 신앙이 회복되어야 우리의 매 순간은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동행하심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일상에서도 동행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장소를 예배당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곳은 일상의 삶 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장소도 일상의 삶이었습니다.
(눅 24:30-31)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식탁에서 주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열리면 식탁에서도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재 연습’이라는 책을 쓴 로렌스 형제는 식탁을
"내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나의 지성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오래 전부터 식당에 이런 고백의 글을 장식해 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식탁에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우리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계신 분이다" 우리 시대의 영성의 거장이라고 하는 유진 피터슨은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의 하나가 식사문화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자자들을 만나 주시던 주님, 최후의 만찬 중 식탁에서 떡과 잔을 들고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던 주님, 갈릴리 해변의 식탁에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제자 시몬 베드로를 만나 생선을 건네주시던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식탁에서 우리와 동행하고 싶어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의 눈을 열어서 그분을 보십시오. 우리의 눈이 열린다면 우리가 우리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분을 전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날마다 그분의 동행하심을 느끼고 날마다 그분에게 헌신을 드리는 놀라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면 그래서 주님의 동행하심을 느끼고 경험한다면 우리의 심령은 뜨거워질 것입니다. 우리 심령에 참다운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이제 다 끝났다, 볼장 다 보았다’는 심정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 그들의 식탁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좌절한 삶이지만 주님의 제자의 삶을 포기했지만 그들의 눈이 열리자 주님의 동행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 믿는 사람들이 승천하신 주님의 임재를 깨닫고 마음이 감동되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갈 길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과 같이 희생과 순교의 길인 줄 알았을지라도, 그들이 제자가 되던 당시에 희망하였던 그대로 세상에 속한 영광을 버리고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위한 봉사의 대가로 그분께서 오실 때에 받을 의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지 않았던가? ”(쟁투, 350)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일상이 헌신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신은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께서 저들 곁에서 걷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가 얼마나 적은가! … 만약 저들이 구세주께서 저들 곁에 계셨고 거룩한 임재의 분위기가 저들을 둘러 쌌으며 생명의 양식으로 먹이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심령이 거룩한 기쁨으로 뜨거워졌을 것인가!”(부모, 342)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특별한 상황에서의 사람들에게만 주님이 만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날마다의 헌신, 일상에서의 헌신이 주님의 동행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일상의 헌신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일상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엠마오 길의 어느 식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제자들은 그들이 있어야 할 소명의 자리인 일터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눅 24:34)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이것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한 자들의 감격이요 찬송이었습니다.
3. 비결은 예수님 이야기
본문의 두 제자들은 좌절 가운데 슬픈 기색을 띠고 엠마오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17절) 그런데 그들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좌절하고 포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비판적인 말을 하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래도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판은 곧 관심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할 대상자들이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말을 할 때에는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교회에 대하여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포기할 수 없는 관심을 비판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 때문에 마음이 불붙듯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눅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존 웨슬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을 때 그의 선배가 "말씀이 믿어질 때까지 말씀을 붙들고 있으라" 고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올더스게이트 스트리트의 작은 교회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겠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십자가 사건을 믿지 못하고 목사가 된 윌리엄 쿠퍼는 어느 수난주간을 앞둔 토요일 자기가 출석하던 교회의 주보를 들여다보다가 구원의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설교 제목이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라고 정했는데 그 아래에 윌리엄쿠퍼 목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주보를 한참 바라보다 생각하니까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통곡하고 엎드려 주님이 자신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였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을 장악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믿음의 대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부정적이면 부정적으로 변하고 긍정적이면 긍정적으로 변합니다. 대화의 주제가 세상의 부귀영화면 세상의 것에 열정을 쏟고 대화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면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대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구속의 계획보다 마음을 집중시키기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무궁 무진한 주제이다. 예수님의 사랑, 그분의 무한한 사랑으로 타락한 인류에게 제공된 구원, 마음의 성결, 이 마지막 때를 위하여 주어진 귀중한 구원의 진리, 그리스도의 은혜,-심령에 생기를 주고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는 이 모든 주제들은 제자들이 엠마오를 향하여 여행할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그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애정을 그리스도께 집중시킨 자는 이와 같은 종류의 교제를 맛보게 되고, 그런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2보감, 242)
“그대가 대화를 나눔으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주제들이 있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우리 믿음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안전하다. 그대들의 혀를 하나님께 대하여 성화시키고, 그대들의 말을 언제나 은혜로 부드럽게 하라.”(4증언, 134)
왜냐하면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의 대화 속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께서 자신의 임재를 동행하심을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십시오. 이야기의 주제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되게 하십시오. 나의 이야기를 멈추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십시오. 어떤 상황 어느 환경과 관계없이 주님 이야기를 하십시오. 믿음의 대화는 주님의 임재하심을 반드시 경험하게 만듭니다. 그 일을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역동적인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날마다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 동행의 시작은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가 주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면 예배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마음과 몸, 의복, 주변정리까지 예배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도 주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하기기 바랍니다. 주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동행하심을 위하여 일상의 대화가 예수님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시고 교류를 하시기 바랍니다. 에수님과 동행하는 모든 이들의 심령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과 동행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의 신앙의 회복되고 우리의 열정이 회복되고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경험하는 첩경입니다. 주님의 동행하심이 저와 여러분의 천국길 내내 함께 하시는 축복을 기원하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