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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일주일이 지난 12월 22일 보스니아 정부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를 무효화했다. 보스니아 정부는 성명을 통해 나토 소속 영국 평화유지군이 세르비아계 점령 지역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평화 유지 감시 활동에 착수한 직후 데이튼 평화 협정에 따라 전쟁 상태를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 보스니아 정부가 1992년 6월 보스니아 내 이슬람-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간에 전투가 시작되자 전쟁 상태를 선언, 전시 동원령을 발동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평화 분위기도 서서히 무르익기 시작했다. 12월 27일 유엔 안보리는 1994년부터 실시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에 대한 유엔 경제 제재의 중단을 발표했다. 그 다음날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와 이슬람계는 억류 중이던 전쟁 포로 158명을 석방했다.
이와 함께 1996년 2월 보스니아 정부군은 세르비아계 장군 1명 등 세르비아계 군인 8명을 체포, 전범 재판에 회부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이른바 과거 청산 문제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996년 3월 18일 제네바에서 구유고 분쟁 3개 당사국 정상들이 만나 평화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 워런 크리스토프 미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열린 이 회담에는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에주프 가니치 보스니아 대통령 대행이 참석했으며 칼 빌트 유엔 특사도 동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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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주프 가니치
이어 보스니아 평화협정에 다른 후속 조치가 속속 시행되기 시작했다. 3월 19일 수도인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연방 정부에 관할권이 이양됐다. 또 3월 20일 새벽 0시를 기해 보스니아의 이슬람-크로아티아 연방과 세르비아 공화국 사이에 국경선이 공식적으로 그어졌다. 국경선 분할은 데이튼 평화협정 집행 이후 90일부터 효력을 발휘하기로 한 협정 내용에 따라 발효된 것이다. 특히 사라예보에서는 이슬람 교도 75명, 세르비아계 20명, 크로아티아계 5명으로 구성된 연방 경찰을 발족하여 치안 확보에 들어갔다.
또한 각 당사국에 수감된 전쟁 포로 등 수감자들의 석방 시한도 23일 밤 12시로 확정되었다. 보스니아 당국은 23일 투즐라 교도소에서 세르비아계 수감자 109명을 석방했으며,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시한을 다소 어긴 28일 크로아티아계 포로를 석방했다.
5월 들어 연방 국가의 기틀을 갖추기 위한 주요 결정이 이루어졌다. 5월 14일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연방 지도자들은 3년 이내에 통합군을 발족시키기로 합의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군사 훈련 및 장비 지원을 받는데 방해가 되는 주요 장애를 제거했다.
미국은 5월로 접어들면서 전범으로 기소된 세르비아 주요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본격적인 외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5월 22일 미국은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 군사령관을 권좌에서 축출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심지어 보스니아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발칸 반도를 방문한 콘블럼 미 국무부 유럽 담당 차관보는 밀로셰비치 대통령과 회담한 뒤, 기자 회견에서 전범 혐의로 기소된 이들에 대한 축출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는다면 다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한 제재를 가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데이튼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홀부르크는 1996년 2월 공직에서 사퇴했으나 1996년 7월 유엔 전범 재판소에 기소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공직 박탈을 위해 유고로 돌아왔다.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유고를 다시 찾은 홀부르크는 7월 18일 베오그라드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과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스프르스카 공화국 지도자들과 10시간에 걸쳐 카라지치 축출 문제에 관해 회담을 가졌다. 회담 후 카라지치는 대통령직과 집권 세르비아 민주당(SDS) 당수직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이날 양측 간의 합의 사항은 세르비아계 근거지인 ‘팔레’로 팩스를 통해 전송됐고 카라지치도 마지못해 서명했다.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과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 다수가 보증인으로 서명했다.
인종 청소의 주범으로 유엔 전범 재판소에 의해 대량학살과 반인류범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카라지치는 공직을 사퇴했지만 그 영향력은 지속됐다. 즉 플라브지치 대통령 권한 대행이나 당수직을 승계한 알렉사 부하 외무장관 등 모두 강경파 민족주의자들이 권력을 승계받았고 배후에는 역시 카라지치가 있었다.
보스니아 평화 협정의 요체는 국가의 구성이다. 협정은 이슬람-크로아티아 연방(국토의 51%)과 세르비아계 공화국(일명 스프르스카 공화국: 49%) 등 2개의 정치적 실체로 이뤄진 느슨한 형태의 중앙 정부를 두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하고, 적대감이 이토록 강한 상태에서 단일 국가가 유지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시금석은 1996년 9월 14일 실시된 총선거였다. 우선 연방 정부 수반인 대통령단을 선출했다. 대통령단은 이슬람,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에서 각 1명씩 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슬람께에서는 내전 기간 내내 보스니아의 이슬람 세력을 이끌어 온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이 최다 득표로 선출돼 의장단 의장직을 맡았다. 세르비아계에서는 몸셀로 크라이스니크, 크로아티아계에서는 크레시미르 주박이 각각 선출됐다. 이와 함께 상,하 양원도 새롭게 구성됐다.
이슬람-크로아티아 연방에서 150만여 명, 스프르스카 공화국에서 100만여 명, 국외에 있는 부재자 등을 합쳐 약 300만 명이 투표권을 행사했다. 정치 발전이 시작된 국가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인 이른바 ‘참여 폭발’ 현상도 두드러져 무려 29개 정당에서 3천여 명의 후보자가 난립했다.
선거 결과는 역시 예측했던 대로 전쟁의 불신과 적대감을 재확인해 주었다. 확정된 3인의 대통령은 모두 강경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내전 주도 인물에 몰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특히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인 3인 대통령 회의는 실제 권력 행사에서는 무기력한 측면이 농후했다. 게다가 대통령단의 구성원은 누구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 의사 결정의 효율성도 문제가 되고 있다. 최다 득표를 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이슬람계 대통령은 2년 임기의 대통령단 의장직에 취임했다.
한편 1996년 10월 3일 보스니아의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과 신유고 연방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파리에서 정상 회담을 갖고 전면적 외교 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이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중재로 이뤄졌다. 또 양측은 1991년 내전으로 와해된 구유고 연방의 승계자가 세르비아 공화국과 몬테네그로로 이뤄진 신유고 연방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신생 보스니아 연방의 출범을 알리는 의회 개원식이 1996년 10워 5일 열렸지만 세르비아계가 신변 안전을 이유로 불참하고 말았다. 또한 더 심각한 문제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들이 밀로셰비치 신유고 연방 대통령의 변신에 엄청난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카라지치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몸첼로 크라이스니크 세르비아계 대통령은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와의 전면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강력히 반발한 바 있다.
이후 한 달여 만에 크라이스니크 대통령이 22일 이슬람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크로아티아계의 크레시미르 주박 대통령에 이어 내전 3파벌을 대표하는 ‘3인 대통령단’에 공식 취임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어떻듯 탈냉전기의 대표적 국지 분쟁으로 불리며, 3년 반 동안 20만여 명이 희생된 보스니아 내전은 일단 평화 정착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지루하던 내전이 끝나면서 이제 구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된 각 공화국은 주적(主敵)을 상실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실질적인 문제로 옮아갔다. 전쟁 기간 동안 잠복해 있던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그들의 부모 형제와 자식들을 잃었지만, 그 결과 정치인들만 살찌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권력욕만 충족시켰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베오그라드에서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토령을 겨냥한 반정부 시위가 날로 격화되어 갔다. 자그레브에서도 역시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을 겨냥한 크로아티아 인의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었다.
특히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사람들로부터 적대를 받았다. 데이튼 평화 협정을 계기로 대세르비아주의의 명분을 저버린 채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타협에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는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뚜렷한 한계가 생겼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향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지금보다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같은 내적 문제와 함께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던 난민 문제도 유럽 대륙의 주요 이슈가 됐다. 독일은 유고 내전 기간 중 모두 2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통일과 함께 경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로서는 유고 내전이 끝나면서 이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독일 정부는 1996년 9월 32만 명의 보스니아 난민들을 강제 귀국시키되, 구체적 시행 방법은 각 주정부의 재량에 맡긴다고 발표했다. 이어 10월 10일 유고 연방과의 협의를 거쳐 13만 5천 명의 코소보 주 난민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키로 합의했다. 만프레드 칸터 독일 내무장관은 이날 본에서 부카신 요카노비치 유고 연방 내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독일로 이주한 유고 연방 국적의 난민들을 강제 추방하기로 합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협정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난민들은 향후 3년간에 걸쳐 본국으로 송환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나 정작 송환 대상자 대부분이 신유고 연방 내의 대표적 분쟁 지역인 코소보 주 출신의 알바니아 인이라는 저에서 비인도적 처사라는 비난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미 앞에서 자세히 밝힌 대로 코소보 주는 1989년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에 의해 자치권을 박탈당한 뒤 분쟁이 발생한 지역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제 그 후유증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각 공화국은 국내적으로 민주화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끊임없는 반정부 시위와 갈등이 되풀이될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경제 문제와 씨름하게 될 것이다.
또 전쟁의 피해자로 할 난민 문제도 주요 이슈가 된다. 그들은 모두 파괴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서유럽 각국의 강제 송환과 난민들의 거부는 상당 기간 동안 갈드의 요소가 됐다.
그러나 발칸 사람들이 이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악몽의 재현이다.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과 이웃을 죽이는 ‘더러운 전쟁’이 되풀이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평화의 발길을 내딛긴 했지만 살얼음판 위에 간신히 마련된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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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사진들은 그동안 올리지 못했던 유고 내전 당시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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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Hell! 사라예보의 저격수 거리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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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숨어 있는 저격병들의 저격을 피해 황급하게 거리를 달리고 있는 보스니아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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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잃은 보스니아군의 아내를 위로하는 친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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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건물에 숨어 있는 저격병을 찾고 있는 보스니아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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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저격수들은 인근 산악지역이나 호텔의 높은 곳에서 사라예보 중심을 내려다 보며 수많은 사람들을 저격하여 사망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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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에 개입한 알 카에다 지원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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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인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는 세르비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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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인을 확인 사살하는 세르비아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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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민병대 중 민간인 학살과 성폭행으로 특히 악명을 떨쳤던 ‘아르칸’ 부대. 일명 호랑이 부대. 앞쪽에 호랑이 새끼를 들고 있는 사람은 이 부대를 만든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일명 '아르칸'으로, 세르비아계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대접받아온 아르칸은 코소보 세르비아계의 지지를 받아 92년 12월 세르비아 의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으며 당시 인기 최고의 가수이던 스베틀라나와 재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1월15일 베오그라드에서 저격당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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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계 군대의 탱크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보스니아 의회 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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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군과 보스니아 세르비아 민병대들의 저격을 피해 시민군과 보스니아군이 대응 사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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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군과 보스니아 세르비아 민병대의 포격으로 불타고 있는 사라예보 외곽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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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군에 의해 체포된 보스니아 군 및 민병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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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안고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는 보스니아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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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내전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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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내전을 겪으며 유고연방은 해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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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난민 수용소의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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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에서 쫓겨나는 알바니아인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