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앞마당-
온몸이 나른하면 육신이 지쳤다는 신호이니 이때에는 행복한 여행을 꿈꿔 보아야 한다. 몸이 지쳐 떠나는 여행도 있지만 여행의 목마름 때문에도 간다. 여행에서 찾을 수있는 기쁨은 무엇이고 또, 우리는 어디서 그것을 찾을 수있을까? 대체로 사람들은 낯선 땅과 하늘이 있는 곳을 찾는데, 그런 곳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여행의 진미이다. 이처럼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삶의 기쁨이 여행의 진미이므로 여행은 곧 생각의 산파이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은 가야할 곳을 찾고 결정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만약 풍광여행처럼 흘러가는 풍경을 기대한다면 움직이는 공간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또 한편 박물관탕방여행이나 유적지순회여행 등처럼 예술작품이 있는 곳이나 종교적인 호기심에서 자신의 상상력과 시선으로 숭고함을 바라보려면, 철학적 사색이 가능한 정숙한 곳이 좋을 것이다. 그런 곳은 비록 여행지 풍경과 이국적인 정취는 부족해도 여행의 미적 체험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오래 전 초저녁, 사람들의 발자국도 멀리 떠나버린 적막한 불국사를 찾았다. 하늘에는 밝은 달과 몇 개의 별이 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끼고돌다 돌샘에 고인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불국사 경내로 들어갔다. 빈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달빛을 이고 서 있었다. 어디 한 번 멀리 갔다 올 수도 있었으련만 탑들은 옛 자리 그대로 묵묵히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옛 연인의 얼굴처럼 신비와 슬픔과 원숙한 아름다움이 녹아있어 방문자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그래서 빙허가 일찍이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민 성장여인(盛粧女人)으로, 또 석가탑을 수수하게 차린 담장여인(淡粧女人)으로 묘사했던가?
석가탑이 다보탑보다 더 친근감이 있어 그곳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나이 탓인지 화려한 성장여인보다 수수한 담장여인이 더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역시 여인의 아름다움은 화려함만으로는 부족하고 은근한 화사함이 있어야 하는 까닭일까? 한참 석가탑을 바라보니 이 탑에 서린 백제의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 간에 얽힌 전설이 생각나 울적한 마음이 가슴을 스쳤다. 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기다림에 지친 아사녀가 그만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서글프고 애달픈 그 전설......
기다림이란 무엇이고 돌아옴이란 또 무엇인가?. 그런 생각으로 눈을 떼지못하고 탑을 자세히 보니 달빛에서도 탑신 곳곳이 깨어지고 금이 가고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도 큰 틈이 보였다. 피가 흐르지 않는 석탑도 세월의 흐름은 어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대웅전으로 눈을 돌리니 고색창연한 단청 빛이 눈에 안긴다. 천년 고찰에서는 모든 것이 가르침이다. 사찰 동쪽 소나무 숲은 제멋대로인 듯 규칙이 있고 얽매인 듯 자유로웠다. 모두가 제 각각이지만 어느 하나 튀지않는다. 내일 아침에도 태양은 천년을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저 숲을 건너 불국사 대웅전 마당으로 찾아 올 것이다.
어스름이 내리자 텅빈 절안 이곳저곳에서 스님들이 한 분씩 나와 조용히 대웅전으로 향한다. 문여는 닫는 소리도 없다. 모든 것이 소리가 없는 침묵 속에 어둠만 자리 잡았다. 새소리도 물소리도 바람소리도 일찍 잠에 들었는지 주위는 침묵뿐이다.
저녁 예불시간. 침묵이 내려 앉은 마당 한 쪽 법고 앞에 스님 한 분이 미동없이 서 있더니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빨라지다 달래듯 잦아들고 거세게 흔들다가 가만히 북을 어루만진다. 속세로 속세로 퍼져나가는 북소리는 널리 널리 퍼져나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리라.. 눈물이 돈다. 무슨 연유인가? 죄 많은 가슴속에 맺힌 것, 그것이 무엇이드냐? 요동치던 북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멎는다. 북소리에 화답하듯 토함산 너머에서 범종소리가 은은히 건네왔고 북소리와 종소리의 여운이 사라지자 산사 주위는 어둠에 잠겼다. 속인과 산사의 인연은 여기까지였으니 이제 속세로 돌아가야 할 시간. 또 다시 만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끼? 선사는 내게 “내려 놓아라”, “비우라”고 말하지만 그러지 못한 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를 위로하듯 밤 하늘에는 둥근 달과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