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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끝났다고?``...
축제는 끝났다고 빨리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란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길거리 판 다 걷었다고 끝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건, 우리 머리 속의 판이다. 이건 이제부터다.
1. 80년대
국민학교 시절, 내게 `80년대`라는 말은 `미래+희망+기대+환호`의 의미를 동시에 가진 슈퍼 복합어였다. 교
과서 구석구석에는, `대망`이란 수식어를 반드시 동반한 채 80년대를
언급하는 문구가 참 많이도 등장했었
고, 모든 좋은 일들은 전부 그 `대망의 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어나도록 되어 있었다. 교과서에 따르면, 이
것도 저것도 전부 `대망의 80년대`에 성취되고 도달하고 이뤄져서, 우리를 엄청난 강국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입학할 즈음, 그 설레는 `대망의 80년대`에 불현듯 다다랐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변하게 될 건지에 대
해서는 막연했으나 적어도 획기적 `변화` 자체는 철썩 같이 믿었던 국민학교 시절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구나.. 싶은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쥐`를 잡고 `혼식` 정도만 하면 `우리나라 좋은나라` 되는 줄 알았던
나이를 지나 `김일성`도 `때려잡아야` 하
고 `선진조국`까지 `창조`해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부담되기 시작한
어느 날, 내가 그 `대망의 80년대`를 이
미 몇 년이나 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별달리 변한 게 없다는
걸 문뜩 깨닫게 된 그 날.. 난 내 주변을
둘러보며 아주 어렴풋하긴 하지만.. 그동안 나를 둘러 싸고 있던 어떤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내가 아주 오랫
동안 기만 당해왔을 지도 모른다는.. 근본적인 배신감을 난생 처음으로, 그리고 혼란스럽게, 느끼게 된다.
더 나이를 먹어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단군의 자손은, 중국 끝자락 존만한 땅덩어리에 오
골오골 모여 사는 소수민족이었다는 팩트와 착잡하게 마주 서게 된
이후로.. 난 더 이상 그 어떤 구호나 캠페
인도 믿지 않게 된다. 구호와 캠페인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네
위정자들이 국민들과 커뮤니케이션 하
는 유일한 방식이었고, 그렇게 대한민국은 캠페인의 공화국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떤 구호도 캠페인도 믿
지 않게 된 내게 그 공화국은, 기만의 공화국이었고.
동물이 군집생활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 군집으로
인해 자신이 보호될 것이란 기대 때문
이다. 코끼리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먹이가 되는 법이니까.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부터 기만 당한다는 정서
의 본질은.. 그저 많이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는 맹수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 초
식동물의 본능적 불안감, 초초함, 소심함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몰려
다니긴 하되 결국 가장 뒤에 처지는
놈이 먹이가 되어 나머지의 안전이 잠정적으로 담보되는 시스템.. 여기서 공적신뢰 따위가 형성될 리 없다.
결국, 주위를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는 왜소한 낱개의 개인만 남는 거다..
2. 마사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용감하다는 마사이. 깡마른 체구로 펄쩍펄쩍 제자리 뛰기 의식을 치르고 맨손으로 사자
를 사냥하며, 소를 숭상하고 소똥으로 지은 집에 살며 어느 누구의 통제도 거부하고 초원을 지배했던 순수한
전사들. 그들의 이야기는 신비, 자연, 용맹, 원시.. 같은 강렬하고 낭만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구경꺼리로 남아 있을 때까지만 그렇다. 만약 내가 그들과 어떤 이유로 해서 비교우
위를 다퉈야 한다면, 소똥집은 더 이상 `자연친화`나 `생존의 지혜`가
아니라 `비위생`과 `비문명`이 되고, `순
수`와 `낙천`은 `무지`와 `방만`이 되고 만다. 다른 문명의 우위에 서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은, 내겐 있지만 상
대에게는 없는 걸 - 예를 들면 소똥 말고 시멘트 - 근거로,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이 과
정에서 소똥이 사실은 해충과 맹수의 접근을 막아낼 뿐 아니라 썩지도 않고 단열도 잘 되는 매우 과학적 건
축 자재라는 사실은, 간과된다.
그러다가, 그들과 내가 적대적으로 맞서게 된다면, 그들의 `용맹`은
드디어 나의 `공포`가 되어 버린다. 그리
고 그렇게 미지의 열등한 존재가 주는 공포를 극복하고 제압하기 위해 인류가 가장 자주 택해 왔던 수단은
대화나 협상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아니,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열등한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
필요했다고 해야 더 옳을 게다. 인디언을 만난 미국 이민자들이 그랬고, 남미로 건너간 라틴이 그랬고, 모든
문명이 다른 문명을 식민화해 갔던 방식이 그러했다.
이제 그 마사이가 서 있는 자리에 `동양`을 대입하고, 내가 서 있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서양`을 대입해 보라.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은 - 마사이의 `용맹`이 `무모`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 신비롭고 관능적이며 황금으로
뒤덮힌 몽환적 왕국이면서,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이며 정체되어 있는 수동적 전체주의였다.
서양을 기준으로, 서양에는 있는 데 `그 곳`에는 없다는 데서 출발하는 이런 식의 동양 인식은 `서양과 다르
다`에서 그치지 않고 `서양보다 못하다`로 발전하고, 그래서 동양은
열등하며 계도와 지도가 필요하고, 마침
내 지배하고 통치해야 할 대상이란 인식으로 확장된다. 서양의 동양
식민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서양이, 동양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상대적 우월성이
담보되는 방식으로 동양에 부여한 이미
지들.. 그 이미지에 근거한 서양의사고방식..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에
의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와 우
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권력의지.. 그런 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 그리고, 서구를 수입하면서 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까지 고스란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서양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데 익숙한 태도를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라 불러야 마땅하겠고..
3. 닭
` 어떤 남자가 숲에서 어린 독수리를 잡아 집으로 가져온다. 닭장에서
닭과 함께 마당에서 닭모이를 쪼고 지
렁이도 잡아 먹으면서 자란 독수리는,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뿐 아니라 3미터 넘는 날개를 가지게 된 이후에
도 스스로를 닭이라 믿어, 날아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한 동물학자가 그 독수리를 날게 하려고 몇 차례나 시도하지만 독수리는 여전히 모이를 쪼고 땅만 판다. 어
느 날 새벽, 그 동물학자는 독수리를 데리고 높은 산 위로 올라가고,
높은 곳에서 처음으로 태양을 바라 본
독수리는 마침내 자기가 닭이 아니라 독수리라는 걸 깨달고는 하늘로
날아 오른다.. `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가나`의 정치가, 제임스 애그레이가 쓴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라는 우화 내용
이다. 식민 본국의 끊임없는, `너희는 미개하고, 열등하며, 지배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교육에 세뇌되어, 스
스로를 과소평가하고 비하하고 폄하하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가나 민중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자각
시키고자 쓴 책이다.
` 조선은 당파싸움이나 일삼으며, 역사를 자율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나라라서 정체되어 있었다. 그런 정
체상태의 조선을 구원하여, 조선에 철도도 깔고 조선을 근대화 시켜줄 존재가 필요했다. 그게 일본이다.. `
이런 걸 식민사관이라고 한다.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 지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의 열등한 품성에서
찾고자 하는 거다. 조선이 왜 `독수리`가 아니라 `닭`인지, 끊임없이
그 이유를 개발하고 유포하여 조선인들
스스로 그걸 믿도록 하는 거. 이건 식민 지배정책의 기본 공식이다.
일제의 그런 노력의 결과는, 뭔가 뜻대로 안될 경우 아직도 우리 스스로 `조선놈들은 안돼. 엽전들은 안돼.`
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어 버리는 한 마디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렇게 식민 근성의 진정한 폐해는, 한
번 주입되고 나면 스스로의 열등함을 스스로 너무나 쉽게 믿어 버린다는 데 있다..
4. 매맞는 아내
매맞는 아내 문제를 심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이론 중 `매맞는 아내
증후군`이란 게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러노르 워커`라는 사람이 주장한 건데, 약한 폭력에서 시작해 심각한
폭력으로 연결되고, 그런 폭력 뒤 이어
지는 남편의 사과와 뉘우침.. 이 과정이 반복 순환되는 심리적 단계를
통해 매맞는 아내의 상황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매맞는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때린 후 자신 앞에서 뉘우치고 사과하는 걸 보면서, 남편이 원래는 착한 사람
이고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란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되고,
그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기에 아내는
이 반복되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순환고리에 빠진 매 맞는 아내는 그런 상황을 계속 반복해 겪게
되면 마침내 특수한 심리 상태에 봉착
하게 되는데, 자신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그 상황을 개선할 수 없을 것이라 믿게 되면서 남편이 자신을 때릴
수 있는 권력을 순순히 인정해 하고 그 상황을 개선하려는 시도 차제를 포기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걸
좀 있어 보이는 말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한다.
그래서, 매 맞는데 익숙한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가 맞는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이고 공
격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낮아진 자아의식으로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기 시작한다.
집안이 더럽다고 맞았다면, 집안이 더러운 건 자신이 완벽하게 치우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니 방 청소를
깨끗하게 하는 걸로 그 사태를 해결하려 하는 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때리는 남편의 문제가 해결된 적
은 아마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을 게고..
5. FC 바르셀로나
포르투칼전 후, 송종국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표명했던 구단 중 하나가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다.
1899년 창단된 최고 명문 중 하나로 스페인의 푸욜, 스페인의 엔리케,
스웨덴의 안데르손, 아르헨티나
의 사비올라, 브라질 히바우두, 네델란드의 클루이베르트가 뛰고 있는 구단이다. 화려하다. 이 FC 바
르셀로나가 왜 송종국에 관심을 보였나. 이게 또 스토리가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타디움에는 노란 바탕에 붉은 두 줄의
스페인 국기 대신 노란 바탕에 붉은 줄
이 4개가 그려진 깃발이 게양된다. `카탈루냐` 깃발이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이 아니라, `카탈루냐` 라는 선
언을 전세계에 휘날렸던 게다. 국내행사도 아니고, 올림픽에서 말이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그 자부심의
강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워낙 독자적 문화와 언어를 사용해왔으나, `가탈루냐` 민족주의를 그토록 공고하게 만든 건 스페인 내전이
다. 파시스트 프랑코의 반대편에 섰던 `카탈루냐`는, 내전에서 패한
후 공직 진출뿐 아니라 언어도 사용금지
를 당하는 등 철저히 박해 당한다. 이후, `카탈루냐`인들은 현실적으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카탈루냐`는 단순히 스페인의 한 `지방`이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라는 걸 천명하고
자 했고, 이를 위해 `카탈루냐`인의 정체성을 상징할 강력한 `뭔가`를
필요로 했다.
그들이 선택한 건 축구였다.
`카탈루냐`의 수도 바르셀로나의 `FC 바르셀로나`는 그래서 1년 입장권 50만원이 넘는 비용을 기꺼이 지불
한 정규회원만 11만 명인 세계 최대의 클럽이고, 아버지가 자식을 회원으로 만들어 주는 게 전통이다. 그들
에게, `FC 바르셀로나`는 곧 `카탈루냐`의 정체성이고 정신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권력자 `스페인`의
상징이자, 원수 프랑코 총통이 열광적으로 응원했던 `레알 마드리드`가 있다. 이 둘의 경기는 그래서 언제나
민족자부심의 결전이 된다.
그런 `FC 바르셀로나`가, 숙적 `레알 마드리드`와 최근 2년 간의 5번
격돌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를 못했다.
게다가, 가장 최근 4월 홈에서 열렸던 경기마저 2대0으로 깨지고 만다. 지난 19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홈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FC 바르셀로나`의 믿기지 않는 패배를 접한 카탈루냐`인의 충
격은 대단했다. 그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사람들은 원래 `FC 바르셀로나` 소속이었다가 2년 전 660억에 `레
알 마드리드`로 팔아 넘긴, 한 명의 선수를 들먹였다. 그게 바로 `피구`다. 그리고 그 피구를 막아낸 게 송종
국이고. 스토리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다.
축구가 그렇다. 그 자체로는 단순한 공놀이지만, 거기에 어떻게 감정이입을 하느냐에 따라 한 민족의 정체성
과 자부심을 상징하고, 그 집단의 총체적 정서를 대변한다..
6. 국영방송
이탈리아 국영방송 RAI가 피파를 제소하겠다고 했다. 이탈리아 축구협회라 하더라도 웃기는 소리일텐데 하
물며 국영방송이라니. 대단한 코메디다. 독일전 판정이 우리에게 불리했다고 KBS가 피파 제소하겠다고 전
세계에 떠드는 격이다. 이걸 이해하자면 몇 가지를 팩트를 알아야 한다.
1. 유럽의 축구는 프로구단들이 주식시장에 상장될 만큼 완전한 하나의 산업이다. 명문 구단은 시가총액이
몇 억 달러를 호가한다. 여기서, 축구는 곧 돈이다.
2.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영화, 잡지, 공영, 민영 방송국 등 이탈리아 미디어를 완전 장악한
미디어 황제이며, AC 밀란을 소유한 스포츠재벌이다. 국영 RAI, 물론
그의 소유다. KBS, MBC, SBS는 물론
이고 조선, 중앙, 동아가 전부 한 사람 소유인데 그가 대통령인 셈이다.
3. AC 밀란을 세계적 팀으로 부활시킨 능력으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어필했던, 그의 정치데뷔는 `Forza
Italia`라는 정당으로 이뤄진다. `Forza Italia`는 우리로 치면, `오~ 필승 코리아`라는 축구 응원 구호다. 이탈
리아 축구 응원구호를 자기 정당의 이름으로 정한 게다.
4. 축구리그를 세계 최초로 정규 방송화한 전통을 가진 국영 RAI는 월드컵 중계료로 거액을 지불했다. 그런
데, 이탈리아가 떨어졌다. 이건 돈이, 광고가 무더기로 떨어져 나가는
걸 의미한다. 엄청난 적자가 발생한다.
5. 축구가 곧 정치적 영향력으로까지 연결되는 이탈리아에서 정경언
일체의 절대파워를 가진 세력에게 피파
제소는 정치적으로는 여론 무마, 미디어에는 뉴스 제공, 경제적으로는 손실 만회를 한꺼번에 추구할 수 있는
절묘의 수다.
스토리가 그렇게 연결되는 거다. 덕분에 한국은 이탈리아 언론에 의해 졸지에 피파를 움직이고 심판을 마음
대로 할 수 있는 세계 축구계의 슈퍼 파워가 됐고. 가만 생각해보면 이거 칭찬으로 받아줘야 하는 거다..
중국 국영 CCTV-5 월드컵 중계방송의 보조 진행자 심삥은 한국과 스페인 대전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자 눈
물을 흘린다. 그녀의 눈물은 중국이 이번 월드컵과 관련해 한국을 바라본 시각 일반을 상징한다. 어처구니
없다. 도대체 왜..
사실, 그녀에겐 죄가 없다. 월드컵을 보다 재미있게 중계하기 위해 선발된 축구를 전혀 모르는 그녀는 그저 `
정의`가 패배하자 눈물을 보일 만큼 감수성이 풍부했을 뿐이다. 문제는 왜 한국이 중국 일반에게 `악`이었느
냐 하는데 있다.
유럽리그를 중계하고 그 경기결과를 배팅하는 스포츠 복권의 영향이란 설부터, 우리 거리응원에 자극된 집
회를 우려해 그랬다는 정치적 해석까지 설이 분분하다. 그런 영향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탈리아처럼
당사자도 아니고, 외신도 틀림없이 접했을 언론이, 더구나 국영방송이 그 정도까지 막 나가도록 오버그라운
드의 내부 비판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건 - 우리였다면 틀림없이 작동한다. 우리가 그 정도로 방
송하면,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의 접근을 요구한다.
19세기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에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며
영토가 분할지배 당했던 역사를 통해
강한 서양을 톡톡히 경험한 중국은 - 제주도를 백년간 빼앗겼다가 얼마 전 일본으로부터 돌려 받았다 생각
해보라. 홍콩이 반환된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할 필요가 있었던 서양의 오리엔
탈리즘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서양을 이상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동양의 편견을 가
지게 된다. 동양의 약소국들이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며 자학하고 자조했다면, 동양의 거인 중국은 스스로
를 낮추는 대신 상대를 높이는 쪽을 택한다. 이런 경향성을 `옥시덴탈리즘`이라 한다. 오리엔탈리즘이 동양
을 열등하게 설정하는 서양의 편견이라면,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을 우월하다 상정하는 동양의 편견이다.
그런, 유럽을 우리가 깼다. 여기서 그건 단순한 축구에 불과했다고 하면 본질을 놓친다. 중요한 건 그게 축구
냐 아니냐가 아니라, 거기에 어떻게 얼마나 감정이입을 하느냐다. 월드컵에서는 국가 자체를 감정이입 한다.
한국이 유럽을 깼다는 건, 자신들보다 유럽을 우월하다 상정한 그들의 기준에 의해 자동으로 중국이 얼마나
열등한지를 더욱 역설하는 증거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 대표팀간 경기에서 한 번도 한국을 이겨보지 못한 공
한증까지 더해져, 첫출전이란 자위나 합리화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는
거대한 열패감이 일순간에 발생한다.
이를 뒤집는 방법은 유럽 위에 가 있는 한국을 끌어내리는 거다.
이종범이 일본에서 실패하는 사이,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서 1등 먹는 것이 우리 야구팬들에게 주는 일종의
자괴감에 곱하기 13억 정도 하면 존만한 오랑캐 한국에 의해 거인 중화의 중국이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받
았을 자존심의 타격에 근접할까. 우린 그래도 박찬호라도 있고 김병헌이라도 있어 완충이 됐다만, 3패 무득
점의 중국은 맨땅에 그냥 박치기 하던 차에, 한국을 쿠션 삼는 거다.
거대한 사회현상을 한 두 가지 이유로 완전히 설명하려는 건 무모한
시도다. 그러나, 적어도 그 뿌리는 언제
나 있는 법이고 그런 뿌리는 역사를 통해 형성되게 마련이다..
7. 상처
후앙 핀투. 퇴장. 아마 거기서부터일게다.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가슴
벅찬 환희의 뒷편에서, 우리를 우울하
게 만들었던 그 모든 스토리가 시작된 지점은. 송종국에게 철저히 차단 당했던 피구로 상징되는 그 날의 승
리는, 압박축구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 후 유럽 언론들이 경기 분석을
할 때면 피구가 송종국에게 차단 당하
는 장면을 몇 번이고 보여주며 감탄하곤 했다.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피구를 막아낸 게 그만큼 대단했던 게
다. 그런데, 다음 날 생각치도 못했던 목소리가 우리 내부 일각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퇴장은 편파다..
승리는 우리 실력이 아니다..
`공평무사`와 `맞짱정신`의 발로였다면 그 또한 반가울 터였지만, 그
목소리의 정체는 그런 것과는 하등 상관
이 없었다. 우리 선수들이 눈부신 압박으로 포르투칼 선수들의 평정심을 잃게 만드는 거, 그래서 2명이나 퇴
장 당하게 만드는 거.. 그 자체가 실력인데, 실력도 대단한 실력인데,
도대체가 그런 관점에서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워낙 이 정도 레벨의 승리를 처음 겪다 보니 유럽의 강팀이, 세계적 스타가 울며 떠나자.. 과연 우리가 실력
으로 이긴 건지, 우리가 그들을 울릴 자격은 있는 건지, 우리 것이 아닌 걸 대신 차지한 것 마냥 스스로 의심
스러워 하고 불안해 했다. 우린 스스로를 그저 `마사이`이고 `닭`이라
여기는데 익숙해 왔으니까. 이태리와
스페인이 패배 후 법석을 떨고, 중국이며 유럽 언론 일부까지 가세하자, 우리 내부의 우울한 자조는 정점에
이른다.
외국에서 뭐라 한다..
아.. 씨바.. 이거 우리 실력 아닌 건 가봐..
그리고는, 생각이 이렇게 이어진다.
어쩌지..
그래.. 독일전에서 잘해서 증명해 보이고 인정 받자..
편파니 음모니 하는 소리에, 무슨 헛소리냐고 반박자료를 만들고 항의논평을 내고 정면으로 공박하며 우리
목소리를 내거나.. 패자는 원래 말이 많다며 단칼에 무시해버리는 대신.. 주눅이 잔뜩 든 우리는 자신을 다그
치는 걸로 해결을 보려 한다. 이건 매 맞는 아내가, 남편 폭력의 부당성을 공박하며 대응하는 게 아니라, 집
이 완벽히 깨끗하지 않아서 맞은 거니까 집안을 티끌 없이 청소함으로써 인정 받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매
맞는 아내의 태도와 근본적으로 같은 거다. 절대로 패할 수 없다며 눈을 부라리는 승리의 기백이 필요할 때,
나를 다그쳐 덜 야단맞겠다는 수세의 자세로 대응하는 거.. 우린 그렇게 집단적으로 `매맞는 아내`였던 게다.
그렇게..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규모로 양극단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이 땅에서 태
어나 이 땅의 현실을 통과하며 성인이 된 자라면 누구나 얼마쯤은 안고 사는 그 뿌리 깊은 `한국인의 상처`들
이, 그렇게 제 정체를 하나씩 드러냈다. 그러니까, 그 자조와 자학과
패배주의의 주눅 든 목소리는, 공적신뢰
라는 걸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만의 공화국에서.. 왜소한 낱개가
되어.. 스스로를 `마사이`라 여기고..
스스로를 `닭`이라 믿으며.. 스스로 매맞는 아내가 되어.. 그렇게 우리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쌓여왔던.. 그
콤플렉스와 식민기질과 자기비하의 `상처`들이, 그것들이 내질러 대는 비명소리 였던 게다.
그리고, 그래서.. 눈물이 났던 게다.
첫 골이 터지고, 1승 휘슬이 울리고, 골든골이 들어가고, 거리가 붉은
색으로 물들 때.. 도대체 어딘지 모를
곳에서부터 강력한 기세로 울컥울컥 복받쳐 올라왔던 그 눈물의 정체는, 엄청난 승리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환호임과 동시에.. 왜소한 낱개가 군집을 만나는 상봉의 감격이었고,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흘리는 치유의
눈물이었던 게다.
세계가 처음 목격했다는 그 엄청난 규모의 응원은 그래서 단순한 축구 응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정하는 자
긍의 격려였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자부의 갈채였으며, 독수리가 될
수 있음을 그제서야 발견한 자존의 탄성
이었다.
대표팀에 `대한민국`을 감정이입 했던 우리는 당당하게 강호를 격파하는 우리 선수들을 통해 그렇게 우리들
의 상처를 치유 받고, 그렇게 스스로를 재발견하게 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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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전히 20세기의 역사가 우리 뇌리에 음각해 놓은 멘탈리티로
21세기를 산다. 20세기의 역사가 우리에
게 안겨줬던 패배와 좌절과 분열과 소외는 아직도 21세기의 우리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독일 전을 패하고 나
서 눈물이 났던 건, 독일에게 패해서가 아니라 그 패배를 다뤄내는 우리의 익숙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와는 절대 상관 없을 거라 믿었던, 항상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그 꿈이라 생각했던 결승
전을 지켜보며.. 우리가 저기 설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 그들과
싸워 이길 수도 있겠다 싶은 거.. 다음
에는 결승전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승리가 우리의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그 엄청난 화학 변화
는 이미 우리 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 버렸다. 과거가 줄 세워 놓은 우리 머리 속의 구질서를 재편해 낼 동력
을 얻은 게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이제 중요한 건, 그게 시간에 떠내려 가지 않도록 스스로 잊지 않는 것이다. 역사에 영원한 상수란 없다. 로
마까지 갈 것도 없다. 불과 1세기 전까지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영국을 보라. 반세기 전 초강대국 아르헨
티나를 보고, 지금의 미국을 보라. 그래서, 한국이 중국을 여전히 큰형으로 설정하는 것과 같은 짓은, 지금의
그리스를 유럽의 형님으로 설정하는 것만큼이나 착각이다. 누굴 무시하자 어쩌자 하는 게 아니라, 이제 그런
구질서에 대한 짝사랑과 집착은 끝낼 때가 왔다.
온갖 패배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기성의 세대가 자기 눈으로 보고도 스스로 자신의 승리를 못 미더워 할
때, 우리가 우승할 거라고 외치는 10대에게서, 난 희망을 본다.
그래,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이제 다시는 조선놈들은 안된다는 소리 따윈 하지 마라. 정말 안되는 건 그런 소
리하는 바로 니 놈이니까, 이 씹새야. 모든 나쁜 습성들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20세기
를 지배했던, 우리 온 정신을 지배했던, 이 패배의 습성을 절대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말자.
이탈리아 전을 보며 지면 어떻게 하나를 생각하고 있을 때, 운동장에서 뛰고 있던 우리 선수들은 어떻게 하
면 이기나를 생각했다. 그게 강팀에 어울리는 정신이다.
이제 다시는 잊지마라 대한민국,
우리가 강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강팀이다.
*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딴지일보에서 퍼 왔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