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한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그려낸 대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이다.
화필을 잡은지 어언 육십년, 그야말로 써서 닳아버린 몽당붓이 쌓여서 무덤을 이루었다고 하는 노화가의
원숙기에 작가만의 내밀한 심의(心意)를 더하여 이루어낸 걸작이 바로 이 <인왕제색도>다.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의 장한 모습을 일필휘지로 표현했다.
중량감이 느껴지는 대담한 암벽 배치, 비가 걷히면서 산아래 깔린 구름의 미묘함, 화면 밖에 있을 봉우리 윗면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인왕제색도>는 ‘신미년 윤오월 하순(20일에서 30일 사이)’에 그려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사천의 사망 기록 역시 비슷한 시기인 ‘신미년 윤오월 29’일이다.
또한 ‘승정원일기’의 당시 날씨 기록을 찾아보면 윤오월 20일~24일까지는 계속 비가 내렸고, 25일 오후에 비가 그쳤다.
그림 속 맹렬히 쏟아지는 폭포와 물안개로 볼 때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비가 갠 직후인 25일 즈음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사천 이병연이 죽을 병에 걸리자 벗의 쾌유를 빌며 그린 그림이 바로 인왕제색도다.
이 그림은 사천 이병연이 사망하기 4일전 오후에 급하게 그려진 그림이었다.
벗이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친구는 붓으로 소원을 빌면서 그의 걸작품을 그린 것이다.
그것이 인왕제색(仁王霽色)이다.
제(霽)는 비 우(雨)자 아래에 가지런할 제(齊)자가 있다.'비가 개다'는 뜻이다.
"비가 개인 후의 인왕산의 산색(山色)" 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오른쪽 아래 기와집이다.
그 집에는 겸제 정선의 5살 연상 친구였던 사천 이병연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천은 1만3000 여수의 시를 지은 대문장가였다. 겸제가 그림을 그릴 당시 사천은 심하게 병을 앓고 있었다.
겸재는 '비 개인 후의 인왕산'처럼 사천이 쾌차하길 비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그림이 완성된 지 4일만에 사천은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비가 그친 인왕. 구렁이처럼 산허리를 휘감아 돌던 짙은 안개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성난 인왕의 주봉이 들소처럼 가슴으로 들이친다.
정선은 이 장관을 묘사하기 위해 함뿍 먹을 빨아올린 큰 붓을 도끼 휘두르듯 화폭에 내리긋는다.
장족지세(長足之勢).슬픔을 휘몰아가는 거침없는 붓질이다. 겸재가 쌓은 필생의 공력이 뿜어져 나온다.
그는 인왕의 주봉을 빗자루를 쓸어내리듯 그리는 쇄찰법(刷擦法)과 여러차례 휘둘러 덧칠하는 적묵법(積墨法)으로 표현했다.
과감하고 파격적이다. 비를 머금은 인왕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이 적요함과 장엄함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의 섬세한 묘사다.
이 실감나는 배경위에서 인왕산은 의연히 그 생명력을 드러낸다.
화면 하반부로부터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면서 점차 위로 번져 나갔으니,
오른편 아래쪽에 기와집이 일부 드러났지만 다른 많은 집들은 모두 다 가려졌다.
화면 상반부는 아직 채 흘러내리지 못한 빗물이 평소에 없던 세 줄기 작은 폭포까지 형성하면서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정선은 비에 젖어 평상시보다 짙어보이는 화강암봉을 큰 붓을 뉘여 북북 그어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거듭 짙은 붓질을 더함으로써 거대하고 시커면 바위산의 압도적인 중량감을 표현하였다.
아마도 <인왕제색도>를 바라볼 때 매번 마음은 억눌러지고 약간은 비장한 느낌에 잠기게 하는 것은
이처럼 위를 무겁게, 아래를 가볍게 처리한 상중하경(上重下輕)의 과분수 구도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정이 깊었던 만큼 이병연이 병마(病魔)에 시달리며 죽음을 앞두었을 때 정선의 고통도 극에 달했던 모양이다.
며칠째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갑작스레 갠 초여름 오후 인왕산에 오른 정선은 지기였던 이병연의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를 위해 그린 그림이 바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라고 한다.
먼저 바위가 유난히 검고 무거워 보이는 것은 며칠 동안 비에 젖은 까닭일 것이다.
소나무도 다소 생기를 잃고 음침하게 느껴지는 것은 죽음을 앞둔 고우(故友)에 대한 통절(痛切)한 마음의 표현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천 이병연과 겸재 정선은 스승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의 집을 사이에 두고 자라나 동문수학한 이래 서로를 격려하며
각각 시와 그림 분야에서 한 시대의 문화를 선도한 인물들이다.
겸재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앞장서서 이끌고 완성한 인물이라면,
이병연은 '영조실록'에 그 졸기(拙記)가 기록되었을 정도로 당대 진경시(眞景詩)의 거장이었다.
겸재 정선이 무수한 작품을 남긴 정력적인 화가이었던 것 처럼,
사천 이병연 또한 무려 13,000수가 넘는 한시(漢詩)를 남긴 부지런한 시인이었다.
이병연이 겸재보다 5살 위였지만 늘 벗으로 자처했다.
각각 81세와 84세의 장수(長壽)를 누리면서 여느 사람의 한 평생이 넘는 60여 년 긴 세월 동안 시와 그림을 통하여 사귀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1740년 초 가을에 겸재가 한강을 건너 양천현감으로 부임해 갈 때
이병연이 쓴 다음의 전별시(餞別詩)에 잘 나타나 있다. 두 사람은 지척간의 이별조차 안타까워했을 정도이었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王輞川)이 될터인데(爾我合爲王輞川)/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飛詩墜兩翩翩 )/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누나(己遠猶堪望)/
강서(江西)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炒愴江西落照川).
왕망천(王輞川)은 당나라 시불(詩佛)인 왕유(왕維)를 말한다.
한양에 있는 이병연이 시를 써 보내면, 양천(陽川)에 있는 겸재가 그림으로 화답하고, 겸재가 그림을 그려 보내면
이병연이 시(詩)로써 응(應)하자는 두 사람간의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낸 시화첩(詩畵帖)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기약대로 가고 옴을 시작한다.
(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보세.
(我詩君畵換相看)
가볍고 무거움을 어찌 값으로 따지리오.
(輕重何言論價問)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니
(詩出肝腸畵揮手)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네.
(不知誰易更誰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