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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13년 가을호
취산화서(聚散花序)* 외 4편
송재학
수국 곁에 내가 있고 당신이 왔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을 지나 나에게 왔다 수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잠깐 숨죽이는 흑백사진이다 당신과 나는 수국의 무슨 손길에 휩쓸린다 정지 화면 동안 수국 꽃색은 창백하다 왜 수국이 수시로 변하는지 서로 알기에 어슬한 꽃무늬 그늘을 얻었다 한 뼘만큼 서로 살이 닿았는데 꽃잎도 사람도 물고기 비늘이 비쳤다 같은 공기 같은 물속이다
* 꽃대 끝에 한 개의 꽃이 피고 그 주위 가지 끝에 다시 꽃이 피고 거기서 다시 가지가 갈라져 끝에 꽃이 핀다. 수국의 꽃차례이다.
물웅덩이 거울
비 온 뒤 물웅덩이라는 인상(印象)
구름과 골목길이 같은 넓이로 나란히 자리 잡은
수면에 나도 도착했지만
유리 액자를 바닥에 눕힌
너무 얇은 평화이기에
내가 건너간다면
수은 장식(裝飾)이
으깨어질까 봐
차마 물이라 하지 못할 고요에
손바닥만 적셨다
방파제 저녁
해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실루엣,
이별을 위해 방파제라는 저녁이 등장했다
너울이 아니더라도 말없을 시간이다
물기가 있는 발자국과
갈매기의 날갯짓은 같은 종류이지만
두 사람만으로 쓸쓸하기에
노을까지 이끌고 왔던
방파제의 하루이다
붕대를 감아야 하는 긴 팔의 방파제 때문에
손이 욱신거렸던 두 사람이다
지평선의 빗금을 담았던 두 사람이다
저녁비
노을과 싸우지 않고 저녁이 지나간다
빗속에는 정적도 청춘도 있겠지만
직렬 전봇대가 먼저 젖는다
저녁과 저녁 그림자는
천천히 겹쳐지는데
창 너머 들리는 라디오 소리 또한 빗물에 지워진다
저녁비는 무슨 솜뭉치처럼 부드럽다
청력을 잃은 후 저녁비는 맑아져서
빗소리는 넓어지고 있다
별과 별
별이 잠드는 곳은 별들의 숫자만큼 호수가 있다는 서쪽
빈 하늘에 별보다 더 굵은 손바닥을 남기는
별의 잔상은 지상에서 건너간다는데
그게 서늘하여 별과 별의 직선을 그어보았다
송재학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기억들 진흙얼굴 내간체를 얻다, 산문집으로 『풍경의 비밀』이 있다.
<대담>
대구(對句)를 몸에 들이다
송재학․맹문재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대담을 나눌 수 있어 기쁩니다. 곧 ‘서정시학’에서 『날짜들』이라는 시집과 『삶과 꿈의 길, 실크로드』라는 산문집이 나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송재학 : 맹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저도 즐겁습니다. 말씀대로 곧 시집과 함께 산문집 출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날짜들』은 제 여덟 번째 시집입니다. 시집 서문에 “이 시들을 발표할 무렵만 해도 이 속에 세상을 전부 구겨넣었으나, 혹은 구겨넣기로 작심했지만, 퇴고를 거치면서 다시 그 모두를 억지로 끄집어내었다.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바깥으로 나왔을까, 나부터 궁금하다”라고 적었습니다. 이왕에 발표된 시들을 단순하고 범박한 노래처럼 퇴고했는데, 결과물이 어떨지 두근거립니다.
산문집은 『서정시학』에 연재한 실크로드에 대한 산문을 묶은 것으로, 『삶과 꿈의 길, 실크로드』라는 긴 제목을 가졌습니다. 제 평생의 화두 중 하나인 실크로드가 드디어 현실이 되는 것이지요.
요즘의 내 생활은 더욱 단순해졌습니다. 퇴근 후 저녁 먹고 〈내간채〉라는 지하 작업실에 가서 몇 시간 머물고, 일요일에 등산, 매일 한 시간 산책과 운동하는 것 등 아주 양식화되어 있습니다. 생활을 단순화시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자각하고 있습니다. 생활 자체를 아예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낯가림이 심하니까 사람들과의 교류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계속 시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이러한 삶의 단순화와 양식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 오늘의 대담 방향은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간행한 시집이 일곱 권이니 차례로 들어보는 것으로 하지요. 산문집 『풍경의 비밀』(랜덤하우스, 2006)은 필요할 때 꺼내보지요. 첫 시집인 『얼음시집』(문학과지성사, 1988)에서는 「얼음시」「먼 길」「섬」「수련의 날짜」 등의 연작시들이 관심을 끄는데 특히 「얼음시」가 그러합니다. 연산석물공장에 입사한 지 3년 만에 호흡 곤란으로 입원한 김형모 씨 이야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비판과 개혁을 제시한 다산 정약용 이야기, 그리고 흉곽 엑스레이와 불면증 등을 그렸는데 의도를 들을 수 있을까요?
송재학 : 「얼음시」 연작을 쓸 무렵이 이십대였으니까, 당대의 번뇌와 개인의 번뇌가 오버랩하던 무렵의 심한 감정적 파편들이었지요. 당시 심하게 아파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생생함이 『얼음시집』전체에 깔린 분위기입니다. 이미지의 중층구조란 희미하게 자각한 방법론으로 작업한 것이었는데, 오해도 많이 받은 부분이입니다. 나 자신은 첫시집 『얼음시집』을 좌절된 사랑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첨언하자면 세상에 대한 좌절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서로 뒤엉킨 양면성을 염두에 둔 감정이었습니다. 지인이자 평론가인 김양헌이 이를 두고 “좌절과 사랑의 이율배반적 이미지가 결합하면서 감춤과 드러냄, 얼음과 불, 감각과 정신, 삶과 죽음이 뒤얽혀, 오직 울음만 남은 젊은 영혼이 짐승과 드잡이질하며 낮과 밤을 핏빛으로 적시는 격렬한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평가”해주었습니다. 젊음이라는 통과의례의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시절이었습니다.
맹문재 : 김양헌 선생님의 평가가 와 닿네요. 첫 시집에 들어 있는 「시론」이란 작품을 주목했습니다. “내 말의 은유는 삶을 위한 표현, 그 표현의 뜻을 날카롭게 갈아보고픈 막막한 그리움뿐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지향하는 면을 좀 더 듣고 싶네요.
송재학 : 스무 살 무렵에 평생 작업해야 할 시의 방향을 정한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삶과 표현, 이것이 당시 나를 지배하던 개념들이었습니다. 삶을 위해서 표현이 더 날카로워지고, 표현을 위해서 삶이 더 진지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를 길항한다는 인식론에 닿았기에, 시와 삶의 일치와 비슷한 관념이겠지만, 무엇보다 시 작업을 오래도록 진지하게 하겠다는 마음다짐 같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방법론은 풍경과 몸의 인식에 도달하면서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어요.
맹문재 : 두 번째 시집이 『살레시오네 집』(세계사, 1992)이네요. 이 시집에서는 죽음, 무덤, 괴로움, 어둠, 쓰라림, 불안, 슬픔, 폐허, 비명, 병, 상처, 탄식, 울음 등의 시어들이 많이 나오네요. 그러면서도 붉은(다), 햇빛, 욕망, 희망 등의 시어들도 함께 나오고 있어요. 이와 같은 면은 첫 시집부터 이후의 시작품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선생님의 어떠한 내면이 반영된 것일까요?
송재학 : 통과의례적인 첫 시집 이후 만난 두 번 째 시집의 세계는 감각과 욕망이 서로 조우하는 현상들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절망의 대척점이기도 한 갈증인데, 욕망이란 인간의 적나라한 내면이자, 가장 매혹적인 오브제이기도 합니다. 그 욕망이 내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하자 『살레시오네 집』의 대부분 시편은 억누르기 힘들 정도로 분출하며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 아마 감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이 아닌가 싶네요. 언어는 욕망을 만나서 더 격렬해지고, 욕망은 감각에 의지하여 더 역동적인 무늬를 만든 날들이었습니다.
맹문재 : 이 시집에서는 세바스찬 폴, 윌리암 고드윈, 조지 우드코크, 피엘 조세프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 피터 크로포트킨 등 아나키스트를 노래하고 있는데 의도한 바를 듣고 싶네요.
송재학 : 아나키즘을 정치적 시각인 무정부주의로 읽지 말고 탈권위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자는 건 사회학자인 김성국 교수입니다만 저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일왕(日王)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석방된 서동성(徐東星)은 25년 9월 대구에서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하는데 진우연맹은 기로틴사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라는 1925년의 동아일보 기사에 〈진우연맹〉이 처음 등장합니다. 〈진우연맹〉은 진리와 우정의 앞글자를 따왔던 대구의 아나키즘 단체였습니다. 대구는 아나키즘과 연관이 깊은 지역입니다. 대구의 철학자 하기락 선생이 아나키즘 관련 도서를 꾸준히 발간하기도 했었고, 이후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아나키즘 열풍이 일어난 곳도 부산과 대구였습니다. 아나키즘은 젊은 날의 제가 아주 깊이 빠졌던 사상이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의문들이 그러한 시로 발현되었던 것입니다. 『살레시오네 집』속의 아나키 관련 시들은 긴 주석을 달고 있는데, 그러한 방법론 역시 아나키즘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너무 현학적이라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아나키즘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저도 공부를 해보고 싶네요. 세 번째 시집인 『푸른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사, 1994)에서 눈에 띄는 제재는 아버지와 어머니, 적천사나 은해사나 기림사를 비롯한 사찰, 철아쟁이나 해금이나 피리 등의 악기와 노래 등이네요.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소개를 부탁드려볼까요?
송재학 : 『푸른빛과 싸우다』는 제 문학의 전환점이었지요. 드디어 풍경이 등장합니다. 어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껴안는 세계의 입구였습니다. “아버지는 서른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졸시「소래 포구에서」에서 적었습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제 시의 여기저기 많이 등장하는데, 현실의 아버지, 상상의 아버지가 겹쳐지지요. 「먼 길」 연작의 아버지는 상상과 문학의 현현이었습니다. 최근의 작품인 「죽은 사람도 늙어간다」에 보면 아버지는 이제 산사람의 옆에서 편안하게 같이 늙어가는 중입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당신의 무덤을 집 대청마루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미리 지정하셨습니다. 청소년 시절 저는 늘 아버지의 시선과 부하를 심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 속에 내면이라는 화염과 소용돌이를 만들어주시면서 아버지가 저를 문학의 길로 인도한 셈입니다.
맹문재 : 이 시집에는 김현 선생님, 기형도 시인을 노래한 시가 있는데 인연을 듣고 싶네요. 산문집 『풍경의 비밀』에 들어 있는 「재능을 탓하다」에서도 김현 선생님을 언급하고 있네요.
송재학 : 김현 선생님은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시집을 낼 무렵 이미 투병생활 중이었고, 첫 시집을 내고 편지를 보냈는데, 몸이 좋아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답신만 받았어요. 김현 선생님의 저작(모두 읽었습니다)으로부터 저는 겨우 감각이란 무엇인가라는 것만 배웠을 뿐입니다. 김현의 말단에 매달려 김현이 성찰한 문학에 내려가기보다는 김현의 겉멋에만 사로잡혔던 것이지요. 수사와 더불어 내 시적 목표가 긴장인 것은 김현 선생님의 영향이었습니다.
기형도 시인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첫 시집을 내고 소위 시운동 청문회에서 성석제와 원재길을 만났는데, 뒷풀이할 때 그 두 사람이 죽은 기형도를 이야기했지요. 이후 성석제와 원재길 시인의 시선으로 기형도의 추모시를 쓰게 된 셈입니다.
맹문재 : 네 번째 시집인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민음사, 1997)에서는 불교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들이 촉촉하게 젖어드네요. 제주도 여행도 하셨군요. 김양헌 선생님께서 해설을 열성적으로 쓰셨네요. 표제작(2007년 개정판)에서 추구한 면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 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 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내 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전문
송재학 : 내 시를 스스로 들여다보면, 한 문단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시인들의 경우 한 단어로 생성하는 이미지가 나에게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다는 거죠. 당연히 한 문장이 만들어낸 이미지란 복잡하고 중층적인 경우가 많지요. 그것으로 내 시의 애매성을 설명할 수 있을지……. 내가 체험하는 우리말의 감성적 구조도 내 문장과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내 시는 전체가 복잡한 덩어리지만 단일 이미지로 묘사된 경우가 많아요. 내 시의 복잡성이나 애매모호성의 측면과 연관된 이 묘사 방법에 대해서 너무 사적(私的) 장치가 아니냐, 또는 논리적인 차단을 노린 듯한 이중적 이미지, 언어의 과다한 폭력성이 아니냐, 이런 공격을 많이 받지요. 내가 비논리적인가 아니면 내 시의 방법론이 독자들에게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한 것인가, 고민이 없을 수 없지요. 어떻게 보면 내 경우도 시를 과중한 의도 아래 쓰는 것이 아니라 감성에 따르는 것인데, 다만 하나의 문장으로써 하나의 이미지를 생성하려 하니까 그러한 시의 외적 구조에서 문제가 파생되지 않는가 싶네요. 그러한 의미에서 졸시「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는 시적 의미만이 아닌 소리와 빛깔이라는 내 감각의 방법론으로 독자를 설득하고 공감시킨 작품인 것 같습니다. 감각의 방법론이란 소리와 색이 서로 공명하면서 형성한 공간 감각을 극도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맹문재 : 다섯 번째 시집이 『기억들』(세계사, 2001)입니다. 이 시집을 보니 중국을 여행하셨네요. 백두산도 올라가신 것 같습니다. 「글자」라는 시에서 “<가벼움과 무거움, 빠르고 늦음, 가울고 바름, 곡선과 직선>의 아름다운 균형들”을 보셨다고 했는데, 좀 더 설명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송재학 : 「알(歹)」이라는 시처럼, 언어 자체에 관심을 둔 작품도 있는데, 말 자체가 풍기는 이미지의 매혹도 풍광이나 극단의 삶만큼 시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텍스트 혹은 텍스트의 프리퀄 같은 인문학적인 요소들이 감각을 건드리는 게 분명합니다.
맹문재 : 이하석, 장옥관 등 대구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을 제재로 한 작품들도 들어 있네요. 산문집의 글들에서도 그렇고요. 선생님의 약력에는 <오늘의 시> 동인을 쓴 것도 있는데, 동인 소개를 좀 해주시지요.
송재학 : 〈오늘의 시〉동인은 1983년부터 시작하여 1994년까지 7권의 동인지를 내고, 2003년 『오늘의 시 자선집』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주로 대구에서 문청 시절부터 얼굴을 서로 익혀오던 김재진, 배창환, 장옥관, 엄원태, 정화진, 박진형, 손진은, 노태맹, 송재학 등이었습니다. 바로 윗세대인 〈자유시〉동인의 극복이 첫 과제였고, 이후 몇몇 동인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열었던 성과를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동인들의 우정이 지속되어 지금도 서로 자주 만나는 편입니다.
맹문재 : 여섯 번째 시집이 『진흙 얼굴』(랜덤하우스, 2005년)입니다. 2011년 ‘문예중앙’에서 다시 복간되었지요. 이 시집에서는 위구르, 몽골 등을 여행을 한 시편들에 관심이 갑니다. 산문집에서도 꽤 많이 소개했는데, 서역(西域)의 여행에서 느낀 점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송재학 : 이번에 실크로드 산문집이 나옵니다만, 저로서 서쪽에 대한 감회가 남다릅니다. 고교 시절 만난 파키스탄 훈자 마을의 화사한 살구나무 사진 한 장은 제 평생의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여행도 거의 실크로드 쪽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수많은 유목 시편들은 그러한 제 편애의 산물입니다. 실크로드 풍경은 내 삶과 연대한 상태입니다. 과거의 시간과 낯선 풍경들은 어떤 의미에서 제 몸의 일부처럼 여겨집니다. 그러한 시공간의 공감각은 제 사유의 방향과 일치하는 바 있습니다. 풍경과 몸의 연대라는 자의식도 서쪽의 서역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다시 서역에서 확인한 사유입니다. 대상의 객관적 실체, 주관적 인식 과정, 시로 이행하는 비밀의 문, 이런 것들이 풍경과 얽혀서 내 시의 밑그림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려의 산문을 비롯한 한문학의 사륙병려체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결국 제가 추구한 것은 일종의 고전적 미학이 분명한데, 다만 그 외피와 접근 경로는 모더니즘인 것 같습니다.
맹문재 : 일곱 번째 시집이 『내간체를 얻다』(문학동네, 2011)인데 「모래장(葬)」「소금장(葬)」「붉은장(葬)」「나무장(葬)」 등에서 보이듯이 ‘죽음’에 대한 인식이 눈에 띄네요. 이전의 시집들에서도 보인 면이기는 하지만, 이 시집에서 특히 집중되어 있는데 의도가 있는지요.
송재학 : 모래장이니, 소금장이니 하면서 제가 사용한 장(葬)은 기실 죽음의 직접적 이미지보다는 죽음이라기보다는 소멸에 가까운 이미지에 더 많이 기대었습니다. 죽음과 소멸은 다른 개념으로 정치하게 가름해야 하겠지만, 장(葬)의 이미지를 풍경의 현현을 빌려서 노래했기에 밝음이나 어둠이 주검의 내용으로 나타나진 않은 것 같아요. 이것을 권혁웅은 해설을 통해 “송재학의 시가 품은 네 가지 죽음의 형식을 말”하자면, “현전의 존재론으로서의 죽음, 존재 변환의 문턱으로서의 죽음, 문자학으로서의 죽음, 사랑의 방법론으로서의 죽음―이렇게 넷이다. 그것들은 각각 생생지변(生生之變)의 기호, 만상의 물활론, 비문으로서의 시, 몸에 대한 사유를 숨기고 있다. 시인에게서 죽음은 생생한 현전을 보장하는 장치이자, 제물(諸物)들의 생물성을 드러내는 방법이며, 정지로 운동을 대표하는 것이자, 늙음을 역동성의 표현으로 읽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삶의 다른 표현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대체로 죽음/장(葬)을 어떤 틀에서 읽으려 한 것 같네요. 그런데 과연 내가 장(葬)의 의미를 저렇게 사용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냥 내 속과 사물들 사이에서 운동하던 장(葬)을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닌가라는 의심 말입니다. 운동하던 장(葬)이기에 심하게 브라운 운동을 했던 장(葬)일터이고, 여기저기 촉수를 내밀어보던 장(葬)일 겁니다. 그러한 장(葬)들은 장(葬)이 내게 손 내민 경우도 있고 내가 장(葬)의 손목을 잡아준 측면도 많습니다. 그것이 이론화되기 전의 활발한 원형이 감각일겁니다. 첨언하자면 장(葬)의 이미지 내지는 물질화라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확실히 감각에 의존하는 표현을 많이 빌립니다. 감각이야말로-제 자신을 정의하자면 모더니스트입니다만- 사물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물의 외형은 사물의 내면이라는 생각. 흔히 우리가 외연과 내포라고 시의 구조를 거칠게 규정할 때 외연과 내포도 직유하자면, 같은 본질이 빚어낸 일란성 쌍생아라고 할 수 있지요. 시의 비밀은 모두 사물에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 시의 출발점은 사물에 관한 철저한 인식에 있을 겁니다. 그 통로로 저는 감각을 찾은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색채를 저는 언어적인 요소로 받아들입니다. 감각의 한 유형으로요. 소리라든가, 빛이라든가, 색깔이라든가 하는 것. 이 감각들을 기초로 전략적으로 쓴 첫 번째 시가 「흰색과 분홍의 차이」라는 시였어요.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라고 노래했지요. 분홍을 흰색에서 나온 하위 갈래로 본 거죠. 분홍과 흰색은 색이라기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감각이 이미지 체계로 작용했습니다. 색이라는 것이 굉장히 번지기 쉽고 섞이기 쉽다는 그런 요소가 있잖아요. 기표와 기의가 좀 다른 거예요. ‘희다’라는 기표를 받는 기의가 그것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지만, 굉장히 많은 것을 끌어안고 있는 거예요. 흰색이 그냥 흰색이 아니게 돼버리는 겁니다.
맹문재 : 아주 사색이 깊은 면을 알 수 있네요. 그런데 선생님의 시들에는 악기나 음악, 조각이나 미술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시 쓰기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요?
송재학 : 조각가 쟈코메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대학 일학년 때 복사한 쟈코메티 화집은 스무 살의 저를 사로잡던 오브제였습니다. 더불어 세잔느, 모네, 뭉크 등을 편애했지요. 쟈코메티 조각에 사로잡힌 건 무엇보다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자코메티의 철사에 가까운 조각의 몸은 처음부터 가냘픈 육신이 아니라 차츰 살을 발라버린 의식처럼 보였습니다. 그것도 그냥 발라버린 것이 아니라 거칠고 힘들게 살을 제거한 의식입니다. 임제록의 봉불살불, 봉부살부라는 구절과 겹치는 모습입니다.
실크로드의 쿠차 키질 동굴에 가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바로 소위 음악동굴이라고 불리는 38굴입니다. 그곳에는 서역 음악의 일종인 구자악의 대편성 벽화가 있습니다. 공후, 피리, 북, 비파 등의 악기를 든 기악 비천이 연주하는 그림이죠. 음악 동굴은 푸른색으로 덮혀 있습니다. 푸른색 벽화의 재료는 코발트인데 페르시아산의 고급 안료입니다. 음악 동굴 악천도 아래에서 내가 들었던 소리는 현악기, 타악기, 피리의 역동적인 화음이었습니다. 그 소리들은 부여박물관에서 보았던 백제금동대향로의 음악과 자꾸 겹치고 있었지요. 그러한 텍스트들이 준 감각들이 제 시와 사유에 깊이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맹문재 : 음악 분야에도 남다른 깊이가 있으시네요. 이번 『서정시학』에 발표하는 「취산화서(聚散花序)」라는 작품을 보니 동양의 인문학적 지식과 현대적 감각이 함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에서 나타난 면이기도 하지요. 한자를 활용하는 면도 그러합니다. 이와 같은 시작법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송재학 : 한시의 대구(對句)는 질서에 대한 인문학적 세계관의 발로입니다. 그것은 정중동의 정신과도 상응하는데, 대구는 서로 길항하거나 간섭하면서 서로를 수식해준다고 볼 수 있지요. 그 길항․간섭이란 자연/인간, 어둔 것/밝은 것의 대비이면서 동시에 자연/자연처럼 같은 것들의 짝입니다. “대립항만 對가 아니라, 반의어도, 동의어도, 유사어도, 대가 되며, 상위범주와 하위범주의 관계도 對가 된다”는 대구의 정의가 있습니다. 대구는 서로 마주보는 세계입니다. 이와 기의 마주침이기도 하며 상호보완이기도 합니다. 천하의 외양이면서 동시에 사물의 원리이기도 한 대구의 이론은 제 시의 방법론이기도 합니다만 이미 존재했던 것이지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짝짓기가 시문에도 살아왔던 것이지요.
맹문재 : 「만어사」「하늘 거울」 등의 시작품이며 산문집의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유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네요. 어떤 면에서 영향을 받았는지요?
송재학 : 삼국유사의 어떤 세계는 우리와 멸절된 시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떤 세계는 우리네 삶과 이음새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멸절된 부분은 이적의 현상들인데 실제로 그 공간마저 우리의 상상력 속에 여러 갈래로 온전하게 유전되어 왔다고 보여집니다. 우리와 곧장 연결된 부분은 삼국유사 인물들의 심리적 묘사인 희노애락이겠지요. 내가 찾는 유사의 세계는 후자를 생성시킨 정서의 유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국유사의 서사는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겹쳐진 메타텍스트입니다. 그러한 서사의 구조가 저를 삼국유사를 되풀이 읽게 했던 것입니다.
맹문재 :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요?
송재학 : 지금 생업을 마치고 은퇴하는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이후 그토록 간절하게 가고 싶었던 곳에 몇 달씩 기거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진 늘 시간에 쫓겨 겨우 며칠 주마간산으로 머물렀던 곳이지요. 목록과 상상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지겨울 정도로 머물고 나면 그곳이 내 몸에 들어오지 않을까 싶네요. 그곳이 몸으로 들어온다면 사유와 글은 저절로 이루어지니까, 정말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하의 발원지, 부탄과 네팔의 호수, 티벳의 우정공로 주변, 천산북로 이녕으로 가는 햇빛, 이식쿨 호수의 침엽수림, 성수해, 어링호와 쟈링호의 물결, 탈레스 강 주변, 안데스 산맥의 바람 등이 제가 꿈꾸는 순간들입니다.
맹문재 : 부럽기도 하고 기대도 되네요. 소중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좋은 시집과 산문집을 기대해보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