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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 조영술의 대가, 중재적 방사선학의 개척자', ‘우리나라 영상의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 의사 한만청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수식어들이다. 그가 처음 시작할 당시만 해도 ‘영상의학과’는 기사들이나 하는 '천한' 과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하지만 그는 환자의 병을 가장 먼저 알아내는 영상의학과 일이 좋았고, 미개척분야에서 길을 닦고 넓혀가는 과정이 즐거웠다고 말한다. 세계 영상의학과 의사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의 저자이고, 서울대 병원장을 역임했으며, 영상의학계의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북미영상의학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된 최초의 한국인인 한만청.
10여 년 전부터는 '말기 암에서 살아난 의사'로 더 유명해진 그로부터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인생의 역경을 이기는 지혜를 들어본다.
제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다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큰 다음에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사신 분인지 알게 되면서,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지요. 어머니는 제가 열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나셨어요.
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님들이 계셔서 모자람 없이 생활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소극적이고 시야가 아주 좁은 아이로 자랐던 거 같아요. 귀여움 받으면서 지시대로만 살았지 스스로 용기를 내어 뭘 할 줄도 몰랐고요.
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꿔버린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저도 지금까지와 다르게 살 수밖에 없었어요. 형님들이 국민방위군으로 징발되면서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도가 들어와 집안 살림이며 먹을 것을 다 훔쳐갔는데, 얼마 있지 않아 1.4후퇴가 일어나 피난을 가야했죠. 리어카에다 짐을 싣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거동을 하지 못하는 형수, 세 살배기 조카, 가정부 누나와 함께 집을 나섰어요.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얼음이 제대로 안 얼어 리어카를 끌고 건너기에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고민하다가 가족들에게 리어카에서 내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들을 두고 가나 싶어서 제 눈치만 보더라고요. 걱정 마시라고 하고는, 제가 끌고 누나가 밀고 해서 한강을 건넜어요. 발밑에서 으드득으드득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가 죽더라도 조카가 사니까 다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어요. 무사히 도착해 짐을 내려놓고 빈 리어카를 끌고 돌아와 가족들을 싣고 다시 강을 건넜죠. 그런 저의 모습을 보고 주변의 사람들이 뒤따르면서 제 뒤로 리어카 행렬이 죽 이어졌어요. 그렇게 닷새를 잠도 안 자고 걷고 또 걸어서 피난을 갔습니다.
그 경험이 저를 긍정적이고 담대한 사람으로 바꿔놓았어요. 그 후로는 웬만한 일이 일어나도 이것쯤 못하랴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정말 힘든 순간에 어떻게 결정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대구에서 고등학교 2~3학년을 다니면서 전국 각지에서 피난 온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어요. 전쟁 때라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세상이 각박하든 풍요하든 청춘은 청춘이었죠. 청춘이라는 게 워낙 뜨겁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풍요한가 아닌가가 그다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해요. 온실에서 피건 벌판에서 피건 꽃은 피기 마련이잖아요. 꼭 온실에서 모든 걸 갖추고 필 필요는 없죠. 바람 부는 벌판에서 힘들게 피는 게 더 좋은 청춘일 수도 있고요. 중요한 건 그 시절을 자신이 어떻게 겪어내고 넘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나 공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형님께서 혼란한 시기일수록 안정된 직업을 가져야 된다며 의사를 권하셨죠. 그렇게 해서 의과대학에 가게 되어서인지 당최 흥미가 없었어요.
졸업하고 과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공학 쪽의 미련을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의학 가운데 공학과 제일 가까운 과를 택한 게 방사선과, 지금의 영상의학과였어요. 영상의학과는 기기를 이용해 질병을 진단하고 환자 치료를 돕는 분야라, 공학의 발달과 그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어요. 제 취향에 딱 맞았던 거죠.
당시에는 의사가 아니라 기사들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영상의학과의 지원율이 상당히 낮았지만, 저는 오히려 미개척분야라는 게 도전의식을 자극해 마음에 들더라고요. 병을 알아내고, 내과나 외과 사람들과 병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다만 우리나라의 당시 경제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병원 상황도 나빴어요. 선진국에 비해 기기 수준이 아주 뒤떨어져 있었고 그나마도 많이 노후한 상태였어요. 진단하는 데 당연히 지장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그런 부분에서는 실망도 했죠.
3년간 하버드대 병원에서 있었어요. 쪼들리는 살림에 공부하랴, 서툰 영어로 적응하랴, 만만치가 않았죠. 하지만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걸 상상했을 때 찾아오는 부담감에 비하면 다른 건 별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은 진단방사선과(현재의 영상의학과)와 치료방사선과(현재의 방사선종양학과)가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였어요. 그러니 진단 쪽으로 전공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치료 쪽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죠. 한국에 돌아가면 양쪽 모두 제가 가르치고 이끌어가야 할 분야였으니까요. 그래서 미국에 있는 동안 있는 힘을 다해 모든 걸 배워 가리라,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되뇌었어요.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으니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죠. 하지만 '나는 배우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무섭지 않더라고요. 그때는 우리가 미국에 비해 말할 수 없이 뒤쳐져 있었을 때라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배울 것 천지였어요.
요즘 유학생들처럼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건 무척 아쉬웠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과도기적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 역할을 잘해내면, 제 후배들은 한 분야를 파고들 수 있게 될 터였으니까요.
저는 지적 호기심이 무척 많은 사람이에요. 또 다른 사람이 모르는 걸 가르쳐줄 때 굉장히 큰 만족감과 기쁨을 느껴요. 남보다 먼저 알고 앞서 나가는 게 참 좋아요. 세상을 알아가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가 '읽는' 거잖아요. 지금도 매일 신문 3개를 읽고, 한국과 일본의 종합 잡지, 각국의 영상의학회 학술지, 소설 등을 꾸준히 보고 있어요. 하루에 서너 시간은 읽는 데 투자하지요.
<타임>지는 미국 유학 시절에 구독을 시작했으니 40년이 넘었네요. 처음에는 불면증을 없애려고 읽기 시작했어요. <타임>을 보다 보면 너무 어려워서 한 페이지도 읽기 전에 잠이 왔거든요. 그런 날들이 쌓이고 쌓이니까 나중에는 술술 읽히더라고요.
자신감과 두려움이 정말 50대 50이었는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사람' 덕분이었어요. 우리 과 스승님들께서 미국에서 배운 것들을 가지고 소신껏 일해보라며 힘을 가득 실어주셨거든요.
하지만 시스템이나 기기들이 너무 뒤떨어져 있어서 배운 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 실정에 맞는 것들을 가려내야 했죠. 그래서 우선은 제도나 교육 방식부터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70년대 초반에 서울대가 동양 최고의 병원을 목표로 새 병원을 지으면서, 영상의학과도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지요. 그때 진단과 치료에 관련된 방사선 의료 기기는 전부 제가 책임지고 주문을 했어요. 전체 기기 구입비용의 3분의 2는 제가 썼을 겁니다.
1975년에는 주임교수가 되었어요. 그 사연이 재밌는데, 그 당시 선배교수들이 보수가 적으니까 퇴근 후에 개인병원을 차리곤 했어요. 그게 말썽이 되어 개업 교수는 주임을 안 시키는 바람에 제일 막내였던 제가 주임이 되어버렸죠. 지금이야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대한방사선의학회(현재의 대한영상의학회)도 1974년에 선배들이 처음에는 총무를 시키겠다고 하시더니 결국엔 초대 이사장을 시키셨어요. 정말 열심히 일했던 시절입니다.
198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 영상의학계에서 SCI(Science Citation Index, 과학기술논문 색인지수)급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는 SCI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저도 1970년대 중반 도쿄대에 견학 갔을 때 처음 알았습니다. SCI급 학술지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게재했나 하는 것으로 국가의 과학 기술력을 가늠할 수 있어요. 1980년대 중반에 미국 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따내면 여비를 대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1989년인가 전공의 두 명을 처음 미국에 보냈어요. 그때만 해도 젊은 사람이 비행기 타고 미국 가서 논문 발표한다는 게 굉장한 사건이었죠. 교수 입장에서는 나보다 못한 저 친구도 쓰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하면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전공의들은 또 그들대로 자극을 받았어요.
그러고는 의과대학 학장에게 건의해 SCI급 논문을 많이 쓰고 잘 쓴 사람에게 상을 주는 제도를 만들었어요. 그 상의 대부분을 영상의학과에서 타게 됐죠. 아주 신났어요. 학회에서도 일 년에 다섯 명을 골라 상을 주었고요. 그게 우리나라에서 SCI급 논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표창이었을 거예요.
1970년대 초와 비교해보면 지금 영상의학과 수준은 정말 높아졌어요. 지금은 우리나라 영상의학과의 SCI 논문 발표 수가 세계 3위 정도의 수준이에요. 서울대 영상의학과의 경우에는 1년에 140편이 넘는 SCI 논문이 나와요. 미국의 상위 10위권 병원과 맞먹는 세계 초일류 수준이죠.
가장 좋은 건 학생 때부터 연구에 관심을 갖는 거죠.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논문 쓰는 기회를 주자는 의미로 퇴직금의 일부와 퇴직 때 제자들이 보태주었던 돈을 합쳐 연구기금을 만들었어요. 성과가 아직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매년 시상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SCI가 뭔지도 몰랐지만 이제 SCI급 논문이 없으면 교수가 될 수조차 없죠. 그것처럼 학생들의 연구 풍토도 차츰 정착될 거라고 봐요.
공부는 이미 다 알려진 지식을 습득하는 거고, 연구는 아무도 모르는 걸 알아내는 겁니다. 결핵균에 의해 결핵이 발병하는 걸 알아냈던 것처럼 말이죠. 물론 연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지금까지의 지식을 다 습득해야 돼요. 그러니까 연구를 하고 업적이 많다는 건 그 분야에 일가견이 있고 실력이 좋다는 거죠. 그리고 학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거고. 그런 태도를 학생 때부터 기르면 정말 이상적이죠.
연구'만' 잘하는 의사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죠. 참된 의사는 환자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어야 해요. 암 투병 이야기를 뒤에서 하겠지만, 직접 아파보니 좋은 의사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환자를 잘 보는 의사가 연구도 잘하는 경우가 사실 많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의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이 사람을 좋아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해요. 소아과 의사가 어린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의술의 기본은 환자에게 호감을 갖는 거예요. 환자를 만나는 게 싫으면 의사가 되지 말아야죠. 그리고 의사가 된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거죠. 경제적인 지위만 보고 의사가 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또 하나는 열린 귀를 가진 의사여야 해요. 의학이 세분화되어 병을 알아내는 방법도 고치는 방법도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많아졌어요.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혼자서 진단하고 치료할 수 없는 시대예요. 정말 실력 있고 치료에 대한 확신이 서 있는 의사일수록 열린 귀를 가지고 다른 의사의 의견을 듣고 다른 방법들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취하기 마련이에요.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정말 내실 있는 자신감이죠. 독불장군은 곤란합니다.
허허. 곤란한 질문인데요. 노력은 했지만 환자들에게 얼마나 점수를 받을지는 모르겠어요. 또 과의 특성상 환자를 직접 접하는 일이 많지는 않거든요. 아,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네요. 아주 옛날 젊었을 때 이야깁니다.
제가 시행한 방사선 검사로 진단이 확정된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그런데 검사 다음에 보니, 복도에서 앉아 한숨만 쉬고 계신 거예요. 왜 그러시는지 여쭤보니까 도대체 무슨 병인지, 낫기나 하는 병인지, 입원 수속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안타까운 마음에 입원 수속도 거들어 드리고 주치의와 상의하여 할아버지의 병세도 살펴드렸죠. 그 후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나 퇴원까지 잘하셨어요.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할아버지가 손수 짜서 만드셨다는 화문석을 둘러메고 찾아오신 거예요. 그게 제가 의사 생활 동안 받은 가장 값진,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에요. 의사 생활 내내 이때의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전문의가 될 때 생각했던 게 있어요. 어디든 제가 들어감으로 인해 그곳이 더 좋아질 수 있도록 하자는 거였어요. 제가 있거나 없거나 똑같다면 제가 아무 필요가 없는 존재잖아요. 우리 과나 학회는 자타공인 화목하기로 유명했지만, 제가 들어가서 더 분위기가 좋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죠. 또 학문 토론도, 환자 진료도 더 잘 될 수 있도록, 무엇이든 지금보다 더 나아지도록 만들자고 생각했죠.
후배나 제자들이 어디 간다고 할 때도 항상 이르는 말이 ‘네가 가서 그곳이 전보다 더 좋아지도록 만들어라’ 하는 거죠.
14센티미터가 넘는 거대한 종양 덩어리를 간에서 잘라냈어요. 그러고는 수술에 성공한 줄 알았는데 글쎄, 두 달 후에 암 세포가 폐로 전이되어 살 수 있는 날을 달수로 세어야 하는 말기 암 환자가 되어버렸어요. 이제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암 덩어리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제 운명 앞에서는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어요. 죽음을 늘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남의 일로만 치부하고 말았던 제 자만심에 대한 형벌인 것만 같았어요.
난생 처음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암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초조는 점점 커져만 갔어요.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암은 마치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처럼 느껴졌어요.
화학요법으로 몸무게가 12킬로그램 이상 빠지고, 머리털, 눈썹까지 휑해지니 거울 보는 것조차 꺼려졌어요. 체력을 기르기 위해 힘들어도 운동하라고 의사가 그러는데, 벽을 집고 방을 두 바퀴도 채 돌기 전에 다리가 마구 후들거렸어요. 난생 처음 느끼는 무력감 앞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어요. 나는 무엇과 싸우나? 암이다. 왜 싸우나? 살기 위해서. 왜 살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살려는 거잖아요. 그런데 암과 싸우면서 매일매일 분노와 적개심으로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건 참으로 모순된 일이다 싶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굉장히 낫기 힘든 암이 나에게 생긴 걸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에서만 최선을 다하자 했어요. 성격이 아주 고약한 친구 다루듯 암을 대하기로 작정했죠. 구역질이 나면 '그래, 조금 있다 먹자' 그랬고, 운동이 힘들면 '좋아, 이보후퇴 일보전진이다.' 그랬어요.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억지로 싸우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잡지에서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에 대해 다룬 에세이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에픽테토스가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별하십시오. 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십시오."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어요. 암을 극복할 때의 저의 생각과 정말 비슷하더라고요. 그런데 에픽테토스의 지혜는 사실 우리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재산, 평판, 권력, 질병, 죽음, 가난 같은 것들은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들이 아니에요. 이런 것들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죠. 반대로 의지적 활동들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에픽테토스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어요.
맞아요. 생각을 어느 방향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지요. 그래서 저는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건 이성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영국의 한 록 밴드가 내한 공연을 온 적이 있었어요. 딸아이가 하도 열광을 해서 도대체 어떤 밴드인지 봤더니,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실력파 밴드인데 드러머가 외팔이더라고요.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사고를 당해 왼쪽 팔을 어깨부터 절단한 거였어요. 그런데도 이 사람은 드럼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예전보다 속도감은 떨어졌지만 예술성은 그대로였죠.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 알기 힘들지요."
스티븐 호킹 역시 루게릭병에 걸려 왼손 손가락 두 개와 얼굴 근육 일부만 움직일 수 있지만 그것을 핑계로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어요.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가능한 정상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몸 상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대요. 또 할 수 없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데, 실제로 못하는 일도 별로 없다지요.
저는 말하자면 차가운 사랑을 하는 쪽이었어요. 애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도 안 했지만, 따뜻한 말이나 칭찬도 안 했죠. 밖에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호인이었지만 집에서는 참으로 무심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고 남편이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항암치료 후에는 누웠다 앉는 데도 도움이 필요했고, 화장실에 가려면 누가 안아서 옮겨줘야 했어요. 그럴 정도니 몸이 더러워질 때도 많았죠. 하루아침에 갑자기 허물어져가는 저를 바라보며 이게 지옥이구나 싶을 때도 있었어요. 당당했던 아버지의 권위, 그런 건 챙길 정신도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내를 대신해 병수발을 들던 딸아이가 불쑥 목욕을 시켜주겠다는 거예요. 제 승낙이 떨어지기도 전에 저를 목욕탕으로 데려가서는 한참동안 등을 문지르며 어릴 때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더라고요. 세 딸들이 모종의 합의를 봤는지 그날 이후 목욕은 딸들의 몫이었어요.
그 시간들을 통해 제가 무엇을 기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전에는 전혀 들리지 않던 집사람과 세 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잘 들리는 게 신기했어요. 제게 잠시 머물렀던 암이 떠나면서 막혀있던 내 귀를 뚫어놓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부터 고맙다, 예쁘다 이런 말들도 제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인간관계는 우리 삶의 질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예요. 관계를 통해 나는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어떤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 안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으니,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호모 루덴스, 즉 우리는 놀이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삶을 유지해나가려는 생존 본능 외에도 유희하고자 하는 본능이 존재해요. 인간은 유희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삶에 대해 더 강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으며,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되찾죠.
다르게 말하면 삶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우선은 자기가 하는 일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어야겠죠. 저의 경우에는 초음파나 CT나 MRI를 찍어 병을 알아내는 과정이 참 재밌었어요. 모르는 걸 내가 알아내는 희열이 대단했죠.
만약 그 일을 의무감으로 억지로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재미없습니까? 일은 싫은데 돈을 벌기 위해서 억지로 하면 본인한테도 사회에도 나빠요. 세상의 일들은 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하는 것 아니겠어요. 거기서 성취감과 보람, 낙을 찾아야죠.
건강해지려고 재미없는 헬스클럽 가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등산을 하면서 즐거움과 동시에 건강을 얻는 게 훨씬 좋은 것도 같은 이치죠.
저는 비록 의사이긴 하지만 약을 좋아하지 않아요. 집에 있는 상비약이라고는 해열제가 전부이고, 세 딸을 키우는 동안에도 그 흔한 감기약 한 번 먹인 적이 없어요. 모든 약에는 이로운 면과 불리한 면이 있어요. 그러니 쓸데없는 약을 먹으면 불리한 면만 받는 것이죠. 자꾸 약을 쓰면 이 약들이 인간의 자가 치유력을 떨어뜨려요. 내 몸이 스스로 싸워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죠.
지나친 비약일지 몰라도 제가 받은 화학 요법이 효과를 본 것은 평소 항생제와 같은 약을 잘 쓰지 않았던 생활 태도가 한몫했으리라 봐요.
조실부모, 한국전쟁, 암 발병 등 제 인생의 세 가지 고비가 오늘의 저를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은 분명히 시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참을성이나 독립심, 책임감, 긍정적 사고, 성실, 정직, 리더십 등의 덕목을 제 몸에 익힐 수 있었던 뿌리가 되었지요. 제가 이런 덕목을 얼마나 갖추었는지는 별개로 하고요. 이렇듯 인생의 고비들을 겪으며 조금씩 나이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이가 많아지면 모르는 게 자꾸 많아지지요. 어느 정도의 나이까지는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는 게 계속 많아지다가, 어느덧 정점을 찍고 내려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세상이 하도 빨리 바뀌어서 할 수 없는 것도 많아지고, 듣고 보고 걷는 능력도 점점 줄어들어요. 이게 자연의 순리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잘 대처해야 합니다. 거꾸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인생은 참으로 마라톤과 비슷합니다. 요령은 통하지가 않거든요. 버스를 탈 수도, 누구 등에 업힐 수도 없죠. 오직 내 발로 갈 수밖에 없어요. 거센 바람도 진흙탕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뚜벅뚜벅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