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히브리서 (6)] - 11장(2)
1998,6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이제 히브리서 11장을 보도록 하자.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모든 세계를 하나님께서 지었다는 것은 다들 알지만, 그러나 말씀으로 지었다는 것을 과연 얼마나 아는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제일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창조과학회' 라는 것이다. 이들은 줄곧 하나님께서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들은 창조에 관한 한 이단이라는 것이다. 말씀으로 지었다는 것을 믿음인데, 그들은 이것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전자 현미경이나 가지고 설치고 말이다.
*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그분이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것은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으로 지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연구실에서 연구한다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항상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물주라는 신에게 감탄하는 '아 위대하다, 창조주' 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줄을 누가 알겠느냐는 것이다.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사렛의 한 청년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어느 놈이 믿겠느냐는 것이다. 오직 믿음을 받은 자만이 '예수님이 지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3절에서 말씀으로 지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라는 것과 '예수님이 창조하셨다' 라는 것의 차이점이 바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제 아무리 나타난 것을 연구해도 보이는 것으로 접속이 안 된다는 것이다. - 접속 불가 !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 어떤 특정한 인물이 이 세상을 지으셨는데, 이 세상은 그분을 보여주는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창조 과학회를 만든 그들이 과연 신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나갈 수 있는가? 아니라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라랏 산의 숯 덩어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 부산에 가면 그림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김 모교수가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런 그림은 가짜이고 우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자기 상징이고 이미지라는 것이다. 보컬그룹을 만들어서 하는 것도 그렇고, 예배당을 근사하게 지어서 사람을 모으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은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믿음은 이렇게 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것처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귀신들 방귀 끼는 소리로 들리겠는가? 그러니 함부로 히브리서 11장에 발을 담글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당신은 왜 산에 갑니까? - 예, 산이 그곳에 있어서 갑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 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서 믿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눈을 찍었는데 그만 예수님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과거 경험과 간증거리는 나타난 것으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다 부수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그러니 지금 히브리서는 1장부터 하나의 단계를 형성하는데, 대부분이 첫 장부터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누가 지었습니까? - 예, 하나님이 지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땡!'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을 누가 지었습니까? - 예, 예수님이 지었습니다. - 증명할 수 있습니까? - 아닙니다. 증명이 안 됩니다' 라고 하면 '딩동댕' 이라는 것이다. 증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무조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 들어왔기에 말이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리고 싶어서 드렸는가? 단지 아벨은 자기가 양을 치기 때문에 그 양을 잡아서 드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양을 강제로(믿음으로?) 기름부위와 몸체부위를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양이냐 농산물이냐'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기름부위와 몸체부위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 왜 아벨은 양의 몸체에서 기름을 분리해서 드렸는가?
* 여기에서 가인이 땅의 소산을 드리고 아벨이 양을 바쳐드리면, 그 드리는 제물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그런데 문제는 아벨이 기름을 드렸다는 것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양의 몸체에서 기름을 분리해서 드렸다는 것이다.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네게' 라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지금 히브리서는 시편을 전부 예수님께 적용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기름을 부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동류들보다 특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기름부음 받은 자'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제사장이나 왕들이 일반 민중들보다 특이하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특이성을 창세기 4장에서 살펴보면, '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는가?' 라는 문제에서, 그 차이점이 동물이냐 식물이냐는 아니라는 것이다. 직업이 원래 그러하니까 말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 '기름' 이라는 것이다. 몸체에서 이 기름부위를 분리해내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벨이 그것을 알고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다만 히브리서가 그렇게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했는데, 그 낫다는 특이성을 찾아보니 기름을 드린 것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시편에 보니 예수님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 기름 때문에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본다는 것이다. 알레고리인가?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여기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라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의로움이 앞당겨서 아벨에게 덮쳐서 아벨이 의로운 행동을 했는데, 이것은 아벨이 윤리적으로 착하다는 것이 아니고, 그의 행동이 예수님을 증거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착하냐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증거했는가?' 라는 것이다. 그분을 증거하면 의로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악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이 세상의 윤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덤비면 안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9장에도 있듯이, 날 때부터 이미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의 그릇인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태어나기 전부터 에서는 미워했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것이다.
*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아벨이나 가인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격을 뺀다는 것이다. 다만 예물만 가지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느 예물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부합되느냐는 것이다. 장차 오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아서 동류보다도 승했다고 1장 9절에 기록되어있으니,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벨을 활용하셨다는 것이다. 아닌가?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그가 믿음이 좋았다든지 행동이 좋았다든지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사실 얼마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가?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나그네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나그네 생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인격이나 자질이 아니고 말이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 여기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등 바보열전(?)이 시작되는데, 바락이 누구인가? 그가 잘 싸워서 승리했는가? 적의 군대장관 시스락을 죽인 것은 아줌마 야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락이 승리했다고 하는 것은, 주께서, 예수님께서 승리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가? 그들은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브라함처럼 야무진 믿음을 가지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새해 예산을 세우면서 아브라함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밀어 부치자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사고방식이 아닌가? - 예수여,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 자기만 마귀 짓을 하면 되지만, 그러나 목회자의 경우는 온 교회를 마귀의 소굴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인들은 '아멘' 이라고 답하고 말이다. 다음은 마귀의 좋아하는 구호들이다. - 잠자는 거인을 깨워라. 하면 된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
* 그러니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온전히 다 행하시는데, 그런 행하신 것 중에서 하나가 택한 자기 백성을 하늘나라에 집어넣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에녹의 경우에 창세기는 동행이 주안점이었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동행이 아니고 에녹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녹이 자기가 죽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즉 이것은 에녹이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에녹을 죽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죽음을 이기신 부활이고 생명인 것을 에녹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내하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멋있는 주님이 너희 속에 계시니까 말이다.
* 그러니 우리가 욕심을 내어서 '나도 예수님처럼 무엇을 할 수 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에게도 뭔가 한 부분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스데반의 역할은 무엇인가? '성전은 없다!' 이 한 마디를 위해서 스데반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데반이 죽도록 그렇게 예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데반은 예수님의 박수를 받으며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겠는가?
* 12제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특히 야고보는 무슨 역할을 했는가? 첫 째로 죽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역할은? 잘리는 것, 바로 그것인 것이다. 우리의 역할도 있지 않는가? - 놀면서 잘리자 !
* 그러니 우리가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 무엇을 걱정하는가? 소위 선교사들을 보면 마구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데, 아니 선교라는 단어가 성경에 없는데 선교가 웬 말인가? 자기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없음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는 선교가 있다는 것이다.
◈ 선교사들 - 누구 나를 사랑해줄 사람 없소 !!
* 과연 전도는 누가 하는가? 예수님께서 하시는데,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 말이다. 그런데 왜 산 넘고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찾아가는가? 사랑 찾아 삼 만리인가? 우리는 다 하늘나라에서 파송 된 자들이 아닌가? 이 대한민국이 본국인가?
* 그리고서는 여기에 돌아와서는 한국이 어떻고 저떻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있는 나라는 그래도 열심히 복음이 전파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지금 이 땅에서 전도하시는 주님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있음에서 출발하니, 자기 부인(否認)이 되는가? 그렇게 되니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그런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노아의 경우에는 방주로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노아는 예수님이 시키는 데로 방주를 만들었는데, 그 방주에 들어감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방주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아처럼 그렇게 주님이 시키는 데로 산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다 방주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 여기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 라고 하는데, 여기 방주라는 존재의 의미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후손들에게도, '아, 이 세상은 심판 받고 우리도 어딘가 들어가야 된다' 라는 이미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의 후사가 된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 11장 해석 -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성이 어떤 연결점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가?
* 그러니 지금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중심을 완전히 배격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도구로서만 활용되고, 증거를 하게 한 보이지 않는 분과 나타난 증거된 것과의 직접 연결을 지우는 해석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요구되는 해석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어떤 연결점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느냐는 것이다.
* 그러니 지금 히브리서의 해석은 창세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의의 후사라는 것이다. 그러니 창세기에서 해석된 것들이 히브리서에서는 거부(?)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 방주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방주를 기준으로 해서 그 밖은 정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노아와 여덟 식구들도 방주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앞당겨서 증거하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직접 오실 마지막 때에는 이 세상은 멸망당함을 것을 미리 보여준다는 것이다.
* 노아의 당시에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마태복음에도 나와 있지만,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홍수가 나기에 중요한 것은 방주라는 것이다.
* 그러니 노아 머리 속에는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고 홍수가 나니 방주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지금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노아가 미리 앞당겨서 모여주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서, 개척교회를 할 생각 말고 오직 예수님을 믿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는 개척교회가 분명히 방주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 것은 또 하나의 자기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 지난 주에 우리 교회 정 장로님이 기도를 하시는데 그 내용이 너무 좋아서 소개하자면, '아무 것도 없어도 예수님만을 믿게 하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장로의 마음속에서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온다면 그것은 대단하다는 것이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 증거는 무엇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두 포함되는데, 그들은 '나그네'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죄를 당할 이 세상과 방주 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 서로 그 원리가 똑같다는 것이다.
◈ 나타난 것을 기대하다가는 보이지 않는 것에 들어가지 못한다 !!
* 이렇게 보니까, 11장 3절의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라는 것이 이해가 잘된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지어진 세계라는 것이, 그 새로운 세상 속으로 이 세상을 포기하고 들어오도록 하는 뉘앙스가 더욱 더 강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뒤에서 해석한 것을 다시 앞으로 가서 살펴보니까, '나타난 것을 기대하다가는 보이지 않는 것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을 설교하다보면 설교가 다시금 돌아가서 되먹임을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뒤로 가면 갈수록 나타나는 해석이 더 넓고 진리에 접근된 것이니까, 그렇게 반복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 아벨의 경우에도, 아벨이 기름부위를 따로 떼 내어서 제사를 드린 것은, 바로 이런 더러운 세상을 탈출해서 기름부음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겠다는 것을 또다시 반복해서 언급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같이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믿음이기에 서로 내용이 통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양지다방에서 누구를 만나자고 약속했을 때, '오후 6시 30분에, 7번 테이블에서, 붉은 장미를 꼽고' 라는 식으로 한다면, 점점 더 내용이 추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당신 양지다방에서 오후 6시 30분에 7번 테이블에서 붉은 장미를 꼽은 사람을 만나지?' 라고 했을 때, '아니, 어떻게 아십니까?' 라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겠는가? '나는 미리 가보았고 조금 전에도 한바퀴 돌고 왔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미리 안 상태에서 다시 살펴보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은 없어질 것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새로운 세계로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말씀을 되먹임을 해보면 말이다. 너무 복잡한가?
* 그리고 11장 8절에서, 아브라함의 경우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라고 되어 있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이 결국은 자기가 갈 바가 도대체 어디인가? 15절에 보니까,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의 나온바 본향이 어디인가? 그곳이 바로 '갈대아 우르' 라는 것이다.
(히 11: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그런데 16절에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면서, 붕 떠서 갑자기 하늘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갑자기 하늘이 왜 튀어나오는가? 바로 이 해석에 근거해서 앞으로 나오는 모든 상들은 이 땅의 상이 아니고, 하늘의 상이 된다는 것이다.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그러니 여기에 나오는 상도 이 땅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늘의 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가면 갈수록 장차 오실 분에 대한 내용이 보다 자세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을 보면서, '갈 바를 모르고 나아간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한번 나아갑시다' 라고 한다면 모두가 엉터리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기 교회성장을 위한 구호들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대학 입학시험 원서를 내면서도 '아브라함처럼 믿고서 한번 도전해보자' 라고 해도 다 엉터리고 말이다. 군대를 가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런 것은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여기서 믿음의 증거는 무엇인가? '외방' 이라는 것이다. 낯설다는 것이다. 이것을 13절에서는 나그네이고 외국인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이방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나는 야 외계인 !
* 그리고 여기에 장막이 나오는데, 우리는 모두가 장막(텐트)에 산다는 것이다. 벽돌로 지은 아파트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징계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텐트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나그네이니까 말이다.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은 모두가 다 나그네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지상에는 발을 딛지 말라는 것이다.
* 이것을 가지고 창세기를 해석하면 희한하게 되는데, 야곱이 찾고자 하는 젖과 꿀의 땅은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12 아들들은 자기 땅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땅에서도 쫓겨나서 나중에 돌아오게 되는데, 결국 땅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런 과정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미리 작용을 했다는 것이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채워야 자기의 욕망을 채우겠는가? 못 채운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고향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뭐라고 했는가? '뭐하다 죽을까? 밥이나 먹고 죽자' 라는 것이다. - 점심 먹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