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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작가 탐방 - 박완서의 문학세계
강연 일시 : 2002년 7월 5일(금), 19:00∼20:40
이야기 손님 : 박완서, 백지연
유종호(이하 유) : 처음 뵙겠습니다. '금요일의 문학 이야기'의 진행을 맡은 유종호라고 합니다. 오늘은 첫번째 시간인데, 모시기 어려운 선생님을 모시고, 작가분들을 집중 조명하는 시간 중에서 첫번째로 박완서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대한 얘기를 듣겠습니다. 새삼스럽게 여러분들에게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고명하시지만, 일단 소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왼편에 박완서 선생께서 나오셨습니다.(함께 박수) 처녀작인 {나목}에서부터 근자에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장편소설에 이르기까지 책이 나올 때마다 크나큰 비평적인 반응도 얻고, 독자의 호응도 많이 받아온 문단의 상록수 같은 작가이십니다. 좋은 단편도 계속 많이 쓰셨는데 [카메라와 워커]라든가 [지렁이 울음소리], 근자에는 [그리움을 위하여] 같은 작품을 쓰셨는데, 한결같으시고 조금도 높낮이의 불균형이 없는 수준 높은 작품을 발표해오셨습니다. 오른쪽에는 평론을 하시는 백지연 선생이 나오셨습니다.(함께 박수)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을 하셨고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라는 평론집을 창작과비평사에서 내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평론을 많이 쓰셨는데, 여기 여성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여성주의 문학 쪽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서 문학 속에서 여성을 옹호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계십니다. 두 분 선생님들께 될 수 있는 대로 편안하게 말씀을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우선 박완서 선생께서 문학을 어떻게 만나셨는가에 대해, 혹은 문학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라든가 재미를 붙였을 때에 대한 얘기를 해주시지요.
박완서(이하 박) : 대개 문학에 처음 재미를 붙였다고 하면, 처음에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문학소녀 시절에 문학의 세례를 받은 사건이 있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글씨로 쓴 책이 별로 없는 고장에 있었는데,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좋은 문학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거의 중학교에 가서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에 굶주려 있었고, 이야기가 좋고 위안이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을 느꼈던 것은 아주 어려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쌓아놓고 읽지 않았는데, 어려서 제가 자란 환경에서는 활자로 인쇄된 책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이야기책을 좋아하셔서, 글씨공부 삼아 이야기책 필사본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지만, 시집 올 때 책을 많이 가져왔다고 해서 동네에 소문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희집 환경이 문학적인 환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머니, 할머니로부터 굉장히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제가 그걸 좋아했습니다. 책을 좋아하기 전에 이야기를 좋아했고, 또 집안이 그렇게 부자는 아니더라도 화목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의 어휘가 풍부했고, 또 유머 감각이 아주 풍부한 집이었습니다. 제가 철나고 나서는 집에 아버지도 안 계셔서 어떻게 보면 우울한 환경이었는데도 그때가 즐겁게 생각되는 것은 누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든가 예를 들 때, 풍부한 고사를 빌려 너는 누구 같다느니 한다든가 해서, 집에서 아주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르는 대로 무궁무진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전래동화 같은 것을 읽어보니까, 해방 이후 제가 아이를 낳고 나서 아이들을 사주려고 읽어보면 참 재미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어머니나 할머니로부터 들었을 때는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충격을 받은 것은 열 다섯 살 넘어서인데, 제가 중학교 2학년 때(해방되던 해)였습니다. 저의 한참 위의 오빠가 문학청년이었던 것 같은데,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생을 위해 해방 후에 일본사람들이 세간 같은 것을 다 놓고 가고, 책도 한국사람들이 손에 넣기 어려운(다 일본말로 된 것이지만) 문학전집 같은 것이 싼값에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 책을 사와서, 별안간 저희집이 책부자가 되었습니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갖고 싶어하는 서른 여덟 권짜리 세계문학 전집 한 질이 들어오고, 대 톨스토이 전집이 있었는데 그런 것도 들어오고, 도스토예프스키 책도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러시아 문학에 치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가 저에게 굉장히 행복한 시기였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서부터 대학교에 갈 때까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수험공부도 안 하면서 많은 책을 읽은 시기였습니다. 그때 너무 재미있게 읽은 것도 있고, 이걸 안 읽으면 뭔가 친구들과 얘기할 때 뒤떨어질 것 같아 억지로 읽은 것도 있고, 그렇게 책이 저에게 한꺼번에 공급되고 나서는 책을 사볼 기회, 특히 신간을 사볼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 많은 책을 다 읽고 나서 반복해서 또 읽었는데, 그것이 저에게 좋은 밑천과 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유 : 우리가 얘기를 하다보면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어리석은 질문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음악 선생님에게 어떤 음악가를 제일 좋아하느냐라고 물어볼 때 사실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음악은 다 좋은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질문을 하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많은 작품을 읽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작가를 좋아하셨는지요.(함께 웃음)
박 : 그때 제가 재미나게 읽은 것과 압도된 것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재미난 얘기가 있을까 하고 읽은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입니다. 열 다섯 살 무렵 해방되기 조금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오빠가 사준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펄 벅의 {대지},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등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읽은 것 중에 {레미제라블}과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대한 재미의 연장선상에서 읽은 책들입니다. 그리고 뭔가 재미와는 다르지만, 굉장한 것이다라고 느낀 작품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었습니다. 무지 길고 지루하고 제가 뭔지 모르면서도 그 나이에 소화하기 힘들어서 읽고 또 읽었던 작품들입니다. 저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톨스토이가 조금 덜 어려웠지만,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같이 긴 작품을 왠지 모르게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압도되고 두려움까지 느낀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성격 묘사 같은 부분은 제가 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톨스토이를 굉장한 작가로 여기는 사람은 좋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품 속에서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몇 번 읽었기 때문에 누구와 누구가 만났을 때 누구는 까만 드레스를 입고 누구는 보라색을 입은 사실을 제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설교조가 많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가르쳐주려는 경향이 강했고, 저도 저의 단편을 보면 끝에 가서 뭔가 설교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을 벗어나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여러 번 읽으면 그것을 닮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책을 지금도 좋아하지만, 옛날에 책이 잘 공급이 안 되었기 때문에 반복해 읽으면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제가 너무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조금만 칭찬을 받는다든가 남이 저의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할
때도, 도스토예프스키의 큰 작품에 비하면 내 작품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제 자신을 알게 하는 데 영향을 끼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유 :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까, 처음에 마가렛 미첼이나 펄 벅이나 샬롯이나 에밀리 브론테 등 여류 작가들만 예로 들어서 저는 여성 중심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함께 웃음) 다행히 나중에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남성 작가도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국내 작가 중에서는 싫어했다거나(함께 웃음) 좋아하신 작가는 없으신지요.
박 : 일본 작가도 제가 많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해방되고 한글로 읽을 때 제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 이상과 김유정입니다. 그 둘을 굉장히 좋아했고, 그들의 단편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상의 시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저는 이상에 대해 그때의 문장이 어떻게 지금까지도 진부하지 않고 전위적인 문장으로 읽히게 썼을까 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고,(함께 웃음) 이상하다기보다 천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유정 같은 사람도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작가에 대해 누구를 얘기한다는 것은 조금 어색할 것 같습니다.
유 : 지금 이상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저는 가슴이 덜컥했습니다.(함께 웃음) 저도 이상을 좋아하지만 시는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이상의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조마조마했는데, 마침 시는 별로 칭찬하지 않아서 안심이 됐습니다.(함께 웃음) 이제 백지연 선생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문학을 처음 하게 됐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백지연(이하 백) : 제가 말씀드릴만한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까 박완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소설 목록 중 저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굉장히 좋아했던 중학교 시절이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누구나 그렇듯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문학에 다가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금 첨가하자면, 저에게는 한국 문학 중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이 굉장히 재미가 있었습니다. 소설이라는 게 저는 일단 굉장히 흥미로워서 한자리에 앉았을 때 푹 빠져 읽는 매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유 : 박완서 선생이 앞에 계시다고 박완서 선생 소설만 말씀하시지 말고(함께 웃음) 다른 작가분 얘기도 하고, 조금 폭넓게 얘기해주시지요.
백 : 다른 선생님들 얘기는 제가 평론을 통해 늘 글로 쓰고 있으니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유 :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박완서 선생께서는 독특한 문학적인 이력을 쌓아오셨습니다. 대개 우리나라 작가들이 문학청년이나 문학소녀를 거쳐 작가가 되어버리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경우도 있고 별로 작가를 위해 플러스가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여성 정신대 문제 때문에 늘 얘기되는 윤정옥 선생이라고 계십니다. 이분과 이화여대에서 같은 과에 있었는데, 그분은 7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돈을 들여 태국 같은 곳을 다니면서 정신대에 끌려나간 한국 여성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이분이 아무리 독신이고 돈을 쓸 데가 없더라도(함께 웃음) 저렇게 많은 투자를 하면서 태국의 오지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노력을 많이 기울여 정신대 문제가 공식화된 것입니다. 보통 그분과 함께 사회학과의 이효재 선생이 많이 부각되는데, 실제 최초로 그 일을 많이 하신 분은 그분입니다. 그분이 영문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이 대학원에 가겠다고 추천서를 써달라면 절대로 안 써줍니다. 공부를 하려면 공부를 하겠다는 결의가 서야지, 대학만 마치고 대번에 대학원에 오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니까 사회에 나가서 회사도 다녀보고 나서, 정말로 내가 공부를 꼭 해야 되겠다 라는 소신이 생기거든 와라, 그냥 졸업하고 할 일이 없으니까 대학원 간다고 하면 나는 안 찍어 주겠다고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생각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소년소녀 시절에 작가가 되고 싶었다가 어느 사이에 작가가 되어버린 사람보다는 여러가지 삶의 경험을 겪고 그 경험을 토대로 독자적인 작가세계를 이룩하는 것이 정말로 좋은 길이 아닌가(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박완서 선생에 대해서 경탄해 마지않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주부의 역할이 너무나 가혹한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여성 청취자가 많다고 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도 우리 어머님이 사신 모습을 봐서 알지만, 정말 주부 노릇하기가 어려운데 거의 불혹
의 나이에 가까워 처음으로 원고지 천 장을 쓰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계속 역작을 발표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독특한 이력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중에도 적지 않은 분들이 작가 지망의 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처녀작을 쓰기 전후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박 : 지금은 아주 늦게 등단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신기한 게 아닌데, 저는 1970년도에 여성동아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그때는 1970년대 작가군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최인호, 송영, 조해일, 김승옥 이런 분들이 20대에 등단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40대에 등단한 것에 대해서 신기해하고,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냥 생활에 권태가 와서 썼다, 심심해서 썼다 라는 말을 했을 때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문학의 엄숙성 같은 것을 생각하는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문학이라는 게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함께 웃음) 식이어야 된다고 하면서, 심심하다는 것을 심심풀이와 같이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주 부자여서 돈을 풍성하게 쓸 수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중산층의 심심한 생활도 그 심심함도 일종의 불행감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생활이 심심하다고 해서 별안간 써지는 것은 아닌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목}이라는 작품은 지금은 작고한 화가 중에 박수근이라는 분의 이야기가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분과 저는 한 직장에서 일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쟁 중에 미 8군 PX에서 그분은 미군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고, 저는 거기에서 화가라기보다는 간판쟁이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PX라는 곳이 지금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그때로서는 아주 화려한, 전쟁 중의 폐허 속에서 불을 켜놓고 미제 물건을 팔았던 곳입니다. 그 구석에서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의탁 매장 같은 곳으로 초상화 그려주는 허름한 곳이 있었고, 저는 거기에서 사무직 일을 했습니다. 뒤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저는 매장 의자에 앉아서 미군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왔을 때 초상화를 그리라고 꼬드기는 일을 하면서 주문받은 것을 화가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전쟁이 나고, 학업도 중단한 채, 학업을 계속할 가망도 없이 형편없이 살다가, 제가 별안간 가장처럼 되었는데 어린 조카들이 둘이나 있고, 늙은 어머니 올케가 있었습니다. 모두 다 피난 가고 서울은 수복되기 전으로 제가 취직을 했을 때가 1951년도였는데 최전방 도시였습니다. 의정부 쪽에서는 포성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취직을 해서 일을 하는데 그 중에 화가가 있는 것도 몰랐고, 저는 거기에서 잡무를 보았습니다. 제가 6.25가 나기 전까지는 집에서 촉망받고 아주 위해서 받드는 딸이었는데, 그 시절에도 서울대학을 들어갔다는 사실 하나로 저는 콧대가 높았었습니다. 세상에 나 이외에는 없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하고, 서울대 배지를 달고 기고만장하다가 별안간 그렇게 됐으니까 저는 제가 인생의 밑바닥까지 갔다고 생각했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고약하게 사람들에게 틱틱거리고, 요새말로 '싸가지 없는 계집애'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때 4,50이 된 저희 아버지뻘, 아저씨뻘 되는 사람들이 가장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중앙극장에서 극장 간판을 그렸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초상화가들에게 미군들이 자기 얼굴 그려달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군들이 대개 여자 친구나 아내의 사진을 보이면, 제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유수한 화가들인데 네가 일선에 와서도 여자 친구를 잊지 않고 그림을 그려 보내면 여자 친구가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라는 얘기를 해서 초상화를 그리도록 꼬드기는 일을 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초상화가 싸구려 초상화인데, 스카프 귀퉁이에 얼굴을 그린 뒤에 스카프 값까지 합해서 6달러를 받았습니다. 그게 우리 매장에서는 제일 비싼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상화 그리는 게 고약한 것이, 다른 물건은 팔면 그만이지만 초상화는 주인이 다시 찾으러 옵니다. 찾으러 와서 그림을 보고 자기 여자 친구가 그림보다 더 예쁘다면서 트집을 잡으면 다시 그려줘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그려준다고 하면 화가에게 손해가 나고 그랬습니다. 저는 화가 때문에 먹고살고 화가는 제가 주문을 많이 받아야 먹고사는 일종의 상부상조 관계였지만 상극하는 관계라고 볼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잘난 척하고 다니면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낙제생 공부시키려고 야단치듯이 조금만 더 예쁘게 그려라, 그것도 못 하느냐, 우리가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찾을 때에 자기 얼굴보다 조금 예쁘게 나오면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못하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또 그때만 해도 천연색 사진이 별로 없었고, 다 그냥 흑백 사진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머리카락 색깔도 굉장히 다양하고 눈의 빛깔도 굉장히 다양한데, 그런 것을 다 받아 적어서 그리라고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라든가 아저씨라고 불러도 좋을 것을 막노동꾼 부르듯이 이씨, 김씨 하면서 못되게 굴었습니다. 그때 그 중의 어느 화가 한 분이 어느 날 두툼한 화집을 끼고 왔는데, 속으로 간판쟁이가 저런 것을 끼고 다닌다고 누가 알아주나 라고 꼬인 마음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펴서 저에게 보여주면서 일제 시대 때 조선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을 모아놓은 화집인데 작품 하나가 자기 그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림의 최고가를 호가하는 박수근 화백이었습니다. 그분이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저에게는 그때 화가도 여기 있구나 라는 구원의 의미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나같이 잘난 여자가 왜 이런 구렁텅이에 빠졌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제가 이 PX에서 제일 잘난 여자처럼 느껴졌습니다.
전쟁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청소하는 아줌마도 어느 학교라고 하면 알 만한 학교의 국어 선생님이었습니다. 또 그때 우리보다 2년 선배였던 문리대 영문과 남자분도 거기에서 말이 통역이지, 통역을 한다면서 갖은 수모를 받았습니다. 남자들은 거기에 다닌다고 하면 군복을 입어도 괜찮았는데, 병역 좀 빠진다고 거기에서 갖은 수모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열고 보니까 거기 생활도 편해지고 그분과 여러가지 이야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후로도 인정은 받으면서도 굉장히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림이라는 게 돈이 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먹고 살 만한 뒤의 일인데, 1965년인가 전에 그야말로 유신시대, 산업화 시대도 못 보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작전을 보면서 그분에 대해서 내가 전기를 하나 써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분은 양구 쪽에서 피난을 내려오신 분이고, 여기에 미술학교를 하나도 안 나왔고 초등학교만 나온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을 추모하고 알아줄 만한 문인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가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가 이분에 대해 증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69년인가 1970년에 유작전이 열렸을 때만 해도 그분에 대한 평가가 마구 올라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림값도 비싸지고 비싼 값을 주고 거래하면서도 이득을 남기는 사람들은 전혀 딴사람들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유족들이 그림을 가지고 있다가 생활이 펴지거나 이런 일이 없습니다. 지금 너희들이 이렇게 떠받들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이러는 화가가 사실은 어려울 때 어떻게 살았다는 사실을 저만 본 것 같고, 내가 증언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저는 말 길게 못한다고 했는데, 말 길게 해도 괜찮은가요.(함께 웃음) 그래서 맨 처음에 전기를 쓰려고 했습니다. 전기라는 게 사실만 가지고 써야 돼서 굉장히 어려운 데, 51년 겨울에서부터 52년 겨울까지 한 1년쯤 같은 직장 안에 있었고 그 후에 저는 결혼을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분은 PX가 용산으로 갈 때까지 따라가서 오랫동안 미군부대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속으로 같은 지식인이라고 생각을 해서인지 교감이 있었긴 했지만, 가정이 어떤지도 몰랐고 이놈의 전쟁이 언제 끝나나, 고향을 북쪽에 둔 사람끼리 전쟁에 대해서 얘기하거나, 그분이 저에게 전해오는 선량한 인품 같은 것만 느꼈지, 그분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어서, 별안간 제가 조사를 해서 전기를 쓰려고 했더니 잘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중간에 아 이건 내가 상상력을 보태서 그분을 다시 그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고, 또 전기를 쓰려다가 소설을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분 이야기도 쓰고 싶지만, 저도 좀 끼여들어서 제 이야기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한 욕구가 저를 거기에서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래서 사실 {나목}을 보면 화가 이야기도 나오지만, 주인공은 저하고 같은 그때 나이 또래의 여자의 이야기가 반반씩 나옵니다. 그 여자의 눈을 통해서 본 것이고 제가 40세에 썼지만, 제가 그 작품을 쓸 때는 거의, 지금 읽어봐도 그 시절의 풋풋한 느낌이 납니다. 40세에 쓰기에는 유치한 것 같지만 어떤 풋풋한 20세의 감성으로 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전기를 쓸 때의 제 목표는 신동아의 5월 넌픽션 공모에 내야 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여성동아 7월호에 내게 되었습니다. 박수근 화백이 저에게는 결정적으로 등단하게 된, 그리고 문학이 제 안에서 불붙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 : 박수근 화백이 {나목}이라는 작품에는 옥희도 씨로 나옵니다. 그런데 박수근 화백의 그림값이 한국에서 제일 비싼 값으로 되어 있는 데는 박완서 선생의 공헌이 아주 큽니다.(함께 웃음) {나목} 때문에 박수근 화백의 성가가 올라간 것입니다. 아주 풋풋한 느낌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나목}에 대해서는 늘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나목}이 나오고 {휘청거리는 오후}가 나왔을 때, 어느 잡지사에서 글을 쓰라고 해서 제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나목}은 청춘과 전쟁의 책이라고 하고, 이 작품을 읽으면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의혹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저만하더라도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에 아주 반발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봉사한다는 말인데, 누가 봉사하겠다는 말만 들으면 아주 소름이 끼칩니다. 그리고 또 청춘은 아름답다라는 얘기를 들어도 소름이 끼칩니다. 육이오 전후해서 여러가지 느낀 점이 많아서, 청춘은 아름답다라는 말만 들으면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리고 청춘은 아름답다고 하면서 군대에 데려가서 해치려고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나목}을 읽으면서 청춘은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아서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나목}이라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백지연 선생께서 아까 박완서 선생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얘기를 했는데, 전체적인 우리나라 문학의 지도 속에서 박완서 선생의 소설의 특징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백 :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은 여러분들이 많이 읽어보셨겠지만, 한정된 주제라든지 형식적 특징으로 아우를 수 없을 만큼 광대합니다. 그러니까 간략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보면 박완서 소설의 세계는 작가가 살아온 기록과 그대로 맞물리는 사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문학사에서 보면, {나목}이 6.25 체험 이후의 황량한 무대를 바탕으로 한다면, 분단이라든지 전쟁 이후의 이산 가족, 그것이 개인들에게 남긴 상처, 이런 역사적인 소재와 더불어서 70년대에서 80년대로 이동하면서 한국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중산층이 형성되고,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대한 아주 날카로운 야유, 풍자, 통렬한 비판이 한 축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박완서 선생의 소설에서 항상 나오는 것이 굳이 저는 여성 작가로 한정짓고 싶지 않은데, 가족이라든지 결혼 제도에 얽힌 우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가부장제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남성 중심적인 것으로 인해서 만연되는 현실의 문제점 같은 것들을 굉장히 잘 파헤치셨습니다.
최근에 쓰신 작품들 가운데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보는 소재의 이동이 보통 한 작가가 50년 이상 어떤 상황을 가지고 글을 쓸 때, 계속 연결적으로 당대 현실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최근 선생님의 소설을 보면, 노년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 문학 쪽에서 보면, 의외로 나이든 사람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화 자체가 젊음 지향적이고,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항상 힘이 가장 많고 생산력이 많은 것들에 대해서 집중하다 보니까, 소외되는 부분은 나이가 든다거나 약한 사람들 같은 경우인데 문제가 계속 뒤로 밀리는 겁니다. 그런데 박완서 선생의 최근의 단편집인 {너무도 쓸쓸한 당신} 같은 것을 보면, 그런 관심이 일상으로 아주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소재라든지 주제 같은 것들이 굉장히 탄력적으로 현실 속에서 대응하면서 바뀌고, 작가의 어떤 변화하는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까 선생님께서 얘기하신 것에 많이 녹아 있는데, 박완서 소설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제가 보기에는 강한 윤리적 비판 의식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쓸 때 말미에 주제에 관한 호소력을 넣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게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는 중요한 가치 판단 기준입니다. 특히 사람들이 갖고 있는 허위의식, 물질 중심적인 가치관, 또 한국 사회가 빠른 기간 동안 근대화를 이룩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서서히 변화해서 문화적으로 축적되어야 할 많은 부분들을 건너뛰고 성급하게 왔는데, 그런 것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 끝부분에 아주 강렬한 주제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로 다양한 주제를 끌어안고 있는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고, 형식적인 것이라고 못 박기는 그렇지만, 여러분들도 상당히 흥미롭게 생각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아까 제가 잠깐 말씀 드렸는데, 문체적인 특징이 글을 읽을 때 입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묘사력이 굉장합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었을 때 어떻게 이렇게 재미나게 쓸까, 특히 인물들의 들추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밑바닥 심리까지도 까발려서 보여줄 때, 등장인물에 대해서 굉장히 강력한 흡인력을 느끼게 됩니다. 문체라든지 인물의 심리묘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에 대한 탁월한 전범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박완서 소설의 세계를 이야기할 때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라보는 묘사의 힘, 문체의 힘인데, 그런 것을 여성 문학 쪽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인 관점에서는 볼 수 없는 여성들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수다의 세계라고 얘기합니다.
또 아까 이야기를 하셨는데, 지나간 상황이라든지 기억들을 복원해내는 자서전적인 글쓰기 방식 등이 박완서 소설의 매력 중의 하나입니다. 여자들의 이야기, 여자들의 입담 이런 식으로 작품을 약간 폄하하는 형식으로도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게 아니라 소설이 가져야 될 기본적인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의 욕망을 가장 저돌적으로 밀고 나간 작품세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도 어떻게 변화해나갈지 참 궁금하고, 어떻게 보면 비슷한 연령분들의 작가를 보면 작품세계가 어느 정도 구축이 되고 고정이 돼서, 흔히 문학 연구자 입장에서는 박사 논문을 쓰게 될 정도로 더 이상 형식적인 것들이 드러날 수 없을 정도로 고정되는데, 박완서의 문학세계에 관해서는 아직 확정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 정도로 계속 어떤 생산력 같은 게 많이 풍겨져 나옵니다. 저는 최근에 발표하신 단편들 중에서 {그 남자네 집]이라는 단편을 읽고 굉장히 재미있어 했습니다. {나목}의 분위기도 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박완서 선생의 소설 중에서 제일 재미있게 본 부분이 연애하는 부분입니다. {나목}에서도 옥희도와 주인공이 어떻게 연결이 될 듯 될 듯하다가 뭔가 아련하게 멀어지고, {그 남자네 집}의 경우도 저는 속상하더라구요. 좀 뭔가 더 적나라한 사건이 나와서 불같은 로맨스 같은 것을 봤으면, 그러니까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 전쟁 후에 만난 청춘의 로맨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굉장히 근사합니다. 그래서 묘사로만 읽으면, 이글이글 타는 눈, 단단한 몸매, 이런 식으로 전장의 황폐한 분위기와 대조되는 젊음의 강렬한 분위기는 개인적으로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전쟁 속에 드러나는 남녀간의 로맨스 같은 것들이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략하게 얘기했습니다.
유 : 더 얘기하세요.(함께 웃음) 균형이 잡히도록 더 얘기를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백 : 그리고 박완서 문학세계를 둘러싸고 한때 쟁점 같은 것들이 많았는데, 여성 문학 쪽에서 상당히 많은 흥미로운 토론들이 나왔습니다. 한 예로, 여성 문학 쪽에도 여러가지 흐름들이 있는데,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80년대적인 관점에서 현실적인 전망을 중시하는 흐름들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들과 반면에 '또 하나의 문화'를 중심으로 한 여성의 글쓰기의 특징 같은 것, 해체적인 독법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임에서 박완서 소설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재미있게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혹 박완서 선생의 소설에서 여성 문제만 특화시켜서 강력하게, 선생님은 스스로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적인 도식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고 개인적으로도 발언을 많이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작품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윤리적인 비판의식이 굉장히 정직한 전망을 끌어내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작품 같은 경우에는 소설적인 생동감 같은 것들이 좀 약하지 않은가라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여성 문제 같은 것을 의식적으로 썼다고 하는 것이 박완서 소설의 세계에서는 사실 별로 적합한 관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가 보기에는 여성 문제라는 것을 전반적인 현실 관계 속에서 그려낼 때, 아무래도 여성 작가이고, 저도 여성 평론가이다 보니까, 작품을 그릴 때 인물 속에 여성 인물들의 내면에 더 밀착이 됩니다. 또 박완서 소설의 남성 인물들이 상당히 무력한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무력한 인물들은 한국이 근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남성들이 안고 있는 무게라든지, 지친 가장의 모습을 보이면서 상당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 직후에 선생님이 체험하신 것과도 조금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대부분의 가정들이 아버지나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이후에 여성이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야 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 점에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 모순이라는 게 굉장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그려내면서 작품 속에서 여성이 상대적으로 부각된 면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것이 소설의 강한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성 평론가들이 박완서 소설에 대해서 남성 인물들이 어떻게 이렇게 그려지는가 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는데, 반대로 바꿔 보면 오히려 그런 것들이 현실을 정직하게 그려낸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오히려 여성 인물이 굉장히 추상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들의 이미지들이 아주 아름다운 성녀, 어머니, 이상적인 여인상 아니면, 성을 매매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로 단선적으로 그려지는데,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완하면 생동감 있는 여성들이 그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맨스 부분과 더불어 박완서 소설에서 힘이 넘치는 부분의 하나가 어머니와 딸의 관계들이 정말 녹진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박완서 소설에서 그려지는 어머니상도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얽혀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도 있지만, 남성보다 더 강하게 현실에 맞서서 가족을 끌고 간다든지, 가슴 아파하는 모습들 같은 게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한 작가의 몇몇 작품을 읽고 좋아하시는 독자들도 많은데, 박완서 소설 같은 경우에는 {나목}부터 시작해서 전집으로 쭉 감상을 해보면, 그 매력을 더 발견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 : 박완서 선생이 쓰신 작품 가운데 하나 골라잡는다면, 어떤 작품이 있겠는지요.
백 :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제가 단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그 가을에 사흘 동안]이라는 작품입니다. 그 작품을 꼽고 싶습니다.
유 : 그러면 어떻게 이름을 양도해 주실 수 없으세요.(함께 웃음) [그 가을에 사흘 동안], 백지연 이렇게 양도할 수 없으세요. 저는 단편 가운데에서 문학적인 성취도 면에서는 골고루 다 잘 되어 있지만, 늘 느끼는 게 [카메라와 워커]라는 작품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6.25 사변 때 오빠가 결국 불행하게 되는데, 그 근본 원인은 문과를 해서 괜히 사상이다 뭐다 해서 결국 다치게 되는 내용입니다. 오빠의 아들인 조카를 문과에 보내서 이데올로기니 사상이니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 게 아니라, 행복한 소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 계통 가령 엔지니어를 만난다든가 해서 편안하게 살게 하고, 사상이니 이런 것 때문에 골치 아프게 일 벌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해서 억지로 공과대학을 보냅니다.
결국 [카메라와 워커]라는 것은 일요일이 되면 카메라 들고 가족하고 나가서 사진 찍는 행복한 소시민을 만드는 게 제일 좋다라고 생각해서 조카를 공과대학에 보냈더니, 나중에 졸업하고 강원도 어디에 가서 워커 신고 공사판에 있는 것을 보니까 가슴이 아프더라는 얘기입니다. 이 작품은 한국 사람들의 무의식을 아주 잘 나타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6.25 사변 때 저도 겪어 봤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상 문제 때문에 한 번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그 다음에 불행해지고 그랬습니다. 그런 것을 피해서 기술자가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이런 것이 제일 좋다는 생각이 한국사람들에게 아주 많이 박혀 있습니다. 그런 단면을, 한국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심층적인 무의식을 잘 포착했는데, 이런 작품은 문학적인 가치를 떠나서도 사회사적으로도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비슷한 작품에 선우휘의 [도박]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입니다. 9.28 때 이북 고향에 갔는데, 월남한 청년의 아버지와 동생이 고향에 있고, 바로 밑에 동생은 같이 월남을 했습니다. 9.28 때 올라갔다가 1.4 후퇴 때 아버지에게 같이 내려가자고 하니까 아버지가 거절하는 겁니다. 나는 농사꾼이니까 여기에서 농사 짓겠다, 그리고 혼자 있기 나쁘니까 막내아들과 함께 있겠다, 너희들은 어차피 남쪽으로 갔으니까 거기에 가서 잘 돼라, 우리는 여기에서 잘 지키겠다, 혹시 나중에 남쪽이 이기면 너희들이 우리를 봐주고, 만약에 북쪽이 이기면 여기에서 인심을 잘 얻고 있다가 너희를 봐주마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서로서로 도와줄 생각을 해야지, 다 한쪽으로 넘어갔다가 어떻게 될 줄 아냐 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은 그 당시에 이런 얘기를 못 합니다. 선우휘라고 하는 사람이 워낙 완강한 반공주의자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했고, 이건 그 사람의 실제 얘기입니다.
저는 이 두 작품이 6.25를 전후해서 한국사람들 다수파들이 공유하고 있던 심층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사회사적으로 봐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 아닌가 라고 늘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무슨 공리적인 관점에서 문학을 보는 것은 아니고, 역시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소설이라도 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산문을 읽거나 평론을 읽거나 수필을 읽거나 그 작가 특유의 개성적인 표현이 없는가, 시가 없는가 하는 것을 찾아서, 그게 있으면 입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좋은 평론이다, 수필이다, 소설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런 게 없으면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저는 좋아지지 않습니다. 예전에 박완서 선생이 [그리움을 위하여]라는 단편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박 선생님, 그 작품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운 겁니까, 픽션이 많은 겁니까.
박 : 집안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 : 거기에 보면, 옛날에 '인정의 기미'라는 말을 썼는데, 요즘에는 '인정의 기미'라는 말을 안 씁니다. 박 선생님 소설처럼, 사람 심리의 미묘한 뉘앙스나 음영을 포착하면 인정의 기미를 아주 잘 포착했다고 얘기를 하는데, 이 좋은 말이 우리나라의 좋은 것이 많이 사라지듯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인정의 기미' 같은 게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작품의 끄트머리에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 한마디를 읽고, 단편소설을 읽기 위해서 얼마 동안 시간을 소비했지만, 본전은 뺐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함께 웃음) 여러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으면, 이건 손해 봤다, 다시는 안 읽는다(함께 웃음)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책을 읽을 때에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줄거리나 스토리나 인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 말고, 역시 문학은 표현이고, 소설은 문체입니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라는 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인생의 무게와 삶의 경험과 표현의 능숙한 경험이 없으면 쓰여지지 않는 겁니다. 기발한 대목이나 기발한 표현은 쉽습니다. 아까 박완서 선생께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얘기를 했는데, 우리나라에 요새 아이리스라고 하는 영국 작가의 치매 과정을 그린 영화가 나왔습니다. 영국 영화인데, 아이리스 머독이라고 하는 영국의 유명한 여류 소설가 얘기입니다.
그 사람이 치매에 걸려서 고생하는 얘기인데, 우리나라 말에 머리를 많이 굴리고 많이 쓰면, 치매에 안 걸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거짓말입니다. 아이리스 머독이라고 하는 사람이 소설을 1년에 한 권씩 썼고, 또 이 사람의 최초의 저작은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한 논문인데, 이것은 영어로 쓰여진 최초의 사르트르에 대한 단독 저서입니다. 그런 작가인데,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말 믿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함께 웃음) 그런데 그 사람 남편이 존 베일리라고 유명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이고, 동시에 비평가입니다. 연하의 남편인데, 이 사람이 러시아 문학에 조예가 깊은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쓴 게 있습니다. 둘 다 천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기괴하고 기발한 인물들을 기가 막히게 형상화해서 보기 드문 천재인데, 천재 중에서 진짜 잘 나오지 않는 천재는 톨스토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사람 얘기를 그리면서도 이것을 잘 완성시켰기 때문에 진짜 천재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말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을 했는데, 기발한 표현이나 기발한 내용이 좋은 문학이 아니라 사실은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와 같은 대목이 있어야 좋은 문학입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합니다. 처음 소설을 읽는 사람은 이게 뭔가라고 하지만, 이게 기가 막힌 연치와 경험과 삶의 무게와 표현의 경험이 없으면 쓰여지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질문하실 게 많으실 텐데, 제가 대신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어떤 작품에 대해서 제일 애착을 가지시는지요. 자식들 많은데 누구 하나만 예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어리석은 걸 좋아합니다.(함께 웃음)
박 : 제일 좋아하는 건 없고, 제일 지루해하는 건 있습니다. 소설에도 팔자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 나름의 운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작품이 저에게는 개성을 배경으로 한 {미망}이라는 작품입니다. 갈 수 없는 고장에 대한 것도 있고, 역사소설 같은 것을 쓰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게 인물이 나와서 그 시대의 무대가 저에게 명확하게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개성 그 쪽은 거기 나오는 사람들의 출생이나 주로 활동한 연대가 19세기말이라서, 저의 주위에서도 많은 고증을 받을 수도 있고, 개성상인들 얘기니까 제 눈에 선한 개성 시가가 무대가 되는데, 상인들 얘기니까 저와는 굉장히 안 맞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고, 돈이 제일이다, 특히 천민 자본주의라고 얘기도 하는데, 제가 개성 사람의 기질에 대해서 그립게 생각한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자본주의를 발달시킨 고장이었고, 인삼이라는 게 오백 년 동안 우리나라의 제일 큰 외화 획득, 외화벌이의 수단이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개성 인삼 한 근과 은 한 근을 맞바꿀 수 있을 만큼의 가치가 있었고, 조선시대에 유일한 가치 있는 무역 품목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개성의 부자들도 많았는데, 그 개성 사람들이 자본을 축적해온 과정이라든가 돈에 대한 생각, 돈 자체가 윤리를 지녔다는 생각, 독특한 경영법 이런 것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개성 상인이 부자가 많았지만, 지금 여기에 와서 그런 기법으로 성공한 개성 상인은 별로 없습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야망을 가지고 쓰기 시작했는데, 제가 어느 정도 써야 되겠다는 양에 반 정도밖에 안 쓰고 그만뒀습니다. 그 작품을 생각하면 뭔가 거친 말, 야비하고 상스러운 말로 하면, 뭔가 재수 옴 붙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큰 생각을 갖고 쓰기 시작했는데도, 작품 외적인 것이지만, 그 글을 쓸 때 이상하게 집에 재난이 많이 닥치더라구요. 점도 안 보고, 미신적인 생각은 전혀 없는데, 이 작품에 대해서 아릿한 느낌이 납니다. 그걸 쓰는데 병원에서 많이 썼고, 애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주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래도 저는 독자들과의 약속이니까 연재를 계속했습니다. 몇 달 동안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썼는데, 왜 그리 창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진을 올 때 제가 작가라는 것을 알고, 저 여자는 여기서 왜 저런 것을 쓸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원고지를 막 감추고 그러다가 아이가 회복되고, 또 그러다가 우리 남편이 부산 병원에 일년을 들락날락하는 등 병원과 관계가 깊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재난이 있을 때마다 이제 끝마쳐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그걸 중간에서 끝마쳤으면 나에게 아주 결정적인 재난은 안 닥쳤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괜히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글을 끝마치기 전에 아들애를 별안간 잃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냥 백 매 쓰겠다고 하다가 가까스로 오십 매를 쓰기도 하면서 이어져 오던 것을, 그때는 정말로 붓을 꺾었습니다. 이제 정말 못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1년인가 있다가 대강 마무리를 하면서, 나는 무서워서 연재는 못하겠다, 그냥 제가 3,4백 매를 빨리 마무리해주면서 한꺼번에 싣든지 나누어서 싣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그냥 줘버렸습니다. 그래도 그걸 끝마친 생각을 하면 이상한 게 그냥 제 자신에 대해서 싫은 느낌도 나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제가 그후에도 글을 쓴 것은 어떻게 보면 남이 불쌍하게 나를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망}을 생각하면, 제목도 왜 {미망}이라고 붙였을까, 내가 괜히 대하소설을 쓰려고 했나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남이 쓴 대하소설도 저는 싫어합니다. 무슨 집념으로 저런 걸 쓸까 할 정도로 왜 그런 걸 생각했을까 하면서 그 소설이 제일 싫다고 보기도 하고, 작가라는 존재가 잔혹하고 지겨운 존재라는 생각도 하고 그랬습니다.
유 : 고고학 하는 사람들 사이에 징크스가 있는데, 고분을 발굴하면 그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 집안에 반드시 어떤 우환이 생긴답니다. 그런데 막스 베버라고 하는 독일의 사회학자가 자본주의의 핵심은 합리주의에 있고, 합리주의, 합리성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이 부기(장부의 부기)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개성 상인들이 이미 그네들 나름대로 부기를 만들어서 썼으니까 자본주의 정신에, 일찌감치 눈 뜬 사람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성 상인들의 고분을 건드리셨던 모양입니다.(함께 웃음)
저는 여러 소설이 다 좋지만, 그래도 박완서 선생의 작품 가운데에서(다 기억에 남겠지만), 앞으로도 특히 오랫동안 얘기될 것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라는 6.25에 관한 작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남는다는 것은 주제넘은 얘기인 것 같고, 제가 좋아하는 작품은 그런 작품들입니다. 백지연 선생은 아까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얘기했으니까, 제일 싫어하는 작품은 어떤 작품입니까.(함께 웃음) 그러면 박완서 선생의 문학세계에 대해서 더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마무리지어서 말씀해주시지요.
백 : 박완서 소설의 세계가 이야기한 대로 한국 근대사회가 겪어온 모든 힘든 과정에 대응되는 기록들이라고 압축해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쓸 때 여러가지 현상들을 보여주긴 하는데, 기본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은 계속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젊은 작가들의 소설의 경향에 관해서 살펴보면, 스토리보다는 이미지나 감각적인 세계, 영화적인 기법을 도입한 작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충족되는 재미 중의 하나는 스토리의 재미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 없이, 가볍게만 소설을 써나간다면, 소설 같은 것들이 오래 가는 힘 같은 것은 떨어질 겁니다. 그래서 박완서 소설이 갖고 있는 중요한 미덕을 얘기할 때 그 한 가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다음에 어떻게 진행이 될까, 한 고개를 넘어서 듣고 있으면, 그 다음에 이야기가 또 어떻게 진행이 될까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또 박완서 단편소설의 매력 중의 하나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반전이 꼭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격정적인 사건의 변화라기보다는 이야기의 힘에 끌려서 가다가 어느 순간 늪에 풍덩 빠져서, 여기가 늪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대목에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겁니다.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그 가을에 사흘 동안]이라는 작품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산부인과 의사가 아기를 안고 달리는 장면이 그 소설에서는 굉장히 눈물나는 대목이면서 상당히 통렬한 부분이거든요. 막판에 인생의 진실을 한순간에 보여주는 소설의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작품과 더불어서 좋아하는 작품을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작품인데, 그 작품은 형식적으로도 조금 특이한, 전화기에 대고 말하는 한 사람의 모노드라마인데, 독백 형식으로 그야말로 입담의 결정체가 바로 이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독백을 통해서 소설을 끌어간다는 것은 소설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 안에서 주인공들과 사건들 같은 것이 독자도 모르게 한 사람의 목소리에 끌려 들어가 있는 겁니다.
목소리의 단선적인 고백이 마지막에 역전이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 같은 것들이 소설에서 추구하는 인생의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완서 소설의 가장 예리한 부분은 소설의 정통적인 플롯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계속 갱신해가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독자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 : 지금 전화통에 대고 얘기하는 작품이 뭐라고 하셨죠.
백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여성 문학과 관련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우리나라에서 여러가지, 특히 여성문학이 90년대 이후로 많이 화려해지고 풍성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신문 연재소설 같은 것이라든지 뭔가 약간 빛이 나는 부분은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가지고 등장을 했었습니다. 예전에 제 기억으로도 신문 연재소설에 70,80년대에는 여성 작가가 아예 등장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여성 작가가 쓴 작품을 아침부터 읽으면 어떻다는 얘기가 많았었는데, 그 정도로 여성들이 문단에 진출하기가 힘들었는데, 90년대 이후에 많은 여성 작가들이 등장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떻게 보면 여성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여성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사회 진출이 좋아진 게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사회의 여타 다른 분야, 정치, 경제, 이런 부분에 진출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들어진 영역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글쓰기로 분출이 되는 거지요.
글을 쓰는 공간에서는 적어도 자유롭고, 자신의 생각 같은 것들을 학연, 지연, 혈연이 조금은 작용하겠지만, 그런 것을 뛰어넘어서 자신의 능력을 표출하는 영역인데, 그런 여성 소설의 개화된 저변에 박완서 소설이 있는 겁니다. 70, 80년대에 보기 드문 오정희 선생도 계시고, 여러 분들이 계시지만, 그런 전범이 있었기 때문에 박완서 문학의 어떤 부분이 계속 후배들을 밀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겁니다. 형식적으로 얘기하면, 아까 얘기하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은 자전적인 성장소설도 박완서 소설의 최근에 발표된 성공적인 전범 아래 문학적 형식으로 인정받은 덕목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여성 성장소설이 그 이전에는 넋두리 같은 것으로 폄하되던 것들인데, 문학 안에서 귀중한 형식 중의 하나가 된 겁니다. 그래서 박완서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성장담이라는 것도 저로서는 여성 문학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해야 되는 형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고백체의 문학이 아니라 여성이 글을 쓰고 있을 때에 자신의 문학을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됩니다. 어떤 권위적인 서사, 반드시 어떤 인물이 나와서 거대한 전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밀착된 서사를 통해서 오히려 기존의 딱딱한 형식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풍부한 내용들을 끌어올리는 거죠. 그래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고백체의 힘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성장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작품에서는 더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걸 읽을 때 여러분들도 느끼시겠지만, 나라는 화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아주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설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형식 같은 것은 저를 비롯한 연구자들에게 계속 매력적으로 분석해볼 만한 텍스트로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유 : 박완서 선생은 소설뿐만 아니라 신문 칼럼이 아주 훌륭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데,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칼럼에 잘 나타나 있어서 아주 명 칼럼니스트입니다. 얼마 전에 대산 문화재단이라는 곳에서 국제 문화포럼이라는 것이 열렸는데, 그때 박완서 선생께서 포스트 식민적 상황에서의 글쓰기라는, 이것은 아마 박완서 선생께서 붙이신 게 아니고 그쪽에서 제목을 줬을 겁니다. '포스트 식민적 상황에서의 글쓰기'라는 어려운 제목의 글을 쓰셨는데, 저도 거기에 참석을 해서 듣고, 이 분의 기억력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릴 적에 얘기를 적었는데, 참 감동적으로 들려와서 이게 정말로 전부 기억의 소산일까, 그렇지 않으면 보태서 써넣으신 걸까 한번 여쭤보고 싶을 정도로 생생하면서도 실감나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영국의 마가렛 드뢰블이라고 하는 여류 작가가 왔었는데, 그 작가가 이 내용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계속 우리나라에서는 박완서 선생밖에 없는 것처럼 얘기를 하더라구요. 여러분들도 기회 있으면 한번 읽어보세요. 정말 실감나는 얘기가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교실에 들어와서 얘기하는 장면 같은 것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가 막힌 장면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해 주실 게 있으면 한 말씀 해주시지요.
박 : 지금 얘기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라는 작품을 방송에서 얘기해서 별안간 많이 팔리고 그래서 겸연쩍어서 피해가려고 했는데, 그 두 작품을 성장소설이라고 합니다. 그게 저를 빗대놓고 한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에 여성들의 성장소설 비슷한 것도 많이 나오고 그래서 사적인 고백체라고 하면서 폄하하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쓰는 욕구 중에는 제가 산 특이한 시대, 어떻게 보면 작가로서는 복 받은 시대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 시대를 증언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고백체라고 그러지만, 백지연 선생이 사소한 사적인 고백은 별로 안 했다고 얘기했는데, 저도 그것은 상당히 삼갔습니다. 제 생애에 짜들어오는 시대 외에는 개인적인 얘기는 별로 안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거친 시대를 스토리를 꾸민다든가 하는 생각보다는 더 잊어버리기 전에 그 시대를 아주 정직하게 증언해야 되겠다고 해서 기억력이 미치는 한 아주 세밀하게 묘사를 했습니다.
아까 {미망} 얘기도 했는데, 제가 안 살아본 시대를 쓸 때에 그 시대의 무슨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책에도 다 나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우리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나를 고증할 수 있는 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적인 평가보다도 나중에라도 이것이 그 시대의 보통 사람의 삶을 증언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6.25 때 밀리고 밀려오고 그럴 때, 저는 남들이 가는 방향과 반대로 가면서, 남들이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갈 때, 저는 북쪽으로 갔다든가 이러면서 당한 것을 전혀 픽션이 개입하지 않게 썼고, 그것은 제가 잊기 위해서 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털어놓고 나면, 잊어도 좋다는 느낌도 있어서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고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었으면 했습니다. 또 전쟁 중에 저쪽으로 밀려갈 때 저는 그 이면에 있었기 때문에 이면사를 쓰는 것 같은 느낌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런 것이 픽션으로 읽히지 않고 기록문학으로 읽혀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것도 증언의 욕구가 강할 텐데, 이 두 작품은 내가 살아온 시대, 남들이 못 본 이면을 증언하고 싶다, 특히 북쪽 체제에 대해서도 정면 비판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가 겪은, 표현할 수 없는 북쪽 체제의 이상함을 저로서는 굉장히 세밀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널리 읽히는 데에 대해서는 속으로 굉장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유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보면, 1.4후퇴 때 국군이 남하를 하고, 서울에 북쪽의 군대가 왔는데, 그때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생활이 나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정말로 박 선생님의 소설이 아니고서는 전달될 길이 없습니다. 그걸 읽어보면, 그때 이렇게 했구나 라고,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잘 모르는 얘기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경호, 권명아 이런 분들이 엮은 책에 {박완서 문학 길찾기}란 책이 있습니다. 혹시 더 검토해보고 싶은 분이 있으면, 이 책을 보면 박완서 소설이나 문학의 여러가지 제상이 자세하게 검토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두 분 말씀을 이만큼만 듣고,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 질의 응답 -
질문자 1 : 박완서 선생님께서는 요즘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박 : 능력 있는 작가들이 많지요. 그리고 저희하고는 기법도 많이 다릅니다. 사실은 제가 이 질문을 피하려면 많이 못 읽었다고 해야 되는데, 여러 계기로 많이 읽습니다. 요즘 작가들의 특징을 제가 한 마디로 얘기하면, 성적인 묘사의 대담성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로서는 낯설기도 하고, 이만큼 살았는데도 난 참 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라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또 우리는 다른 쓸거리가 많았는데, 이렇게 평화롭고 빈곤이라든가 전쟁이라든가 부모로부터의 억압이 별로 없으니까 성적인 게 앞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이 먼저였는데, 성의 해방이라고 할지 남성 작가보다 여성 작가들이 더 대담하게 묘사하는 것 같고, 그런 면에서는 제가 많이 뒤지고 있고 성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성적인 것은 항상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엿보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우린 헛 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질문자 2 : 박완서 선생님께서 40대 이후에 문단에 등단하셨는데, 책도 많이 읽지 않고 40대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에 관심이 있는데, 그래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조금 무모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함께 웃음) 그리고, 지금 문단에서 고희를 넘긴 선생님 중에서 박경리 선생님과 박완서 선생님을 저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박경리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백지연 선생께서도 [그 남자네 집]을 말씀하셨는데, 지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박완서 선생님의 [그 여자네 집]이 나오거든요. 그 소설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박 : 저에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났던 것은, 연극을 많이 보면 연극 배우를 흉내내보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많이 읽고 나서 모방하고 싶은 것, 나도 저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욕구가 싹텄기 때문입니다. 별로 읽지 않고도 쓰고 싶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혹시 글쓰는 것을 가장 쉽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테면 그림을 그린다든가, 음악을 한다든가 하는 것처럼 실연도 필요가 없고, 많은 장소도 필요 없고, 그냥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서 혹은 수필가나 시인, 소설가가 되어서, 소위 등단을 해서 나는 소설가 아무개입니다 라는 식으로 자기를 장식할 수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반지처럼 나를 장식하기 위해서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저는 말리고 싶습니다. 강남에 아무것도 안 하는 주부 중에는 엄마, 아빠 직업란에 시인이나 수필가라고 쓰고 싶어서 문학 학교를 나온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못 쓴다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그것과는 다른 동기, 조금 더 참을 수 없는 뭐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이는 비교적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초년생인데 등단한 사람 중에도 나는 요새 책을 안 읽는다고 자랑하면서, 뭐 읽을 게 있느냐고 얘기하는데, 너는 왜 쓰느냐라고 하면 자기가 쓰는 것은 읽혀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는 일차적으로 독자가 없이 일기를 써도 누군가가 읽는 것을 가장하고 쓴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것은 굉장한 것으로 알고 읽히길 바라지만, 저는 그럴 때에, 남의 것을 읽지 않고 자기 것이 읽히기만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다라고 막말을 합니다. 나이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축구도 열심히 배워야 되지, 그냥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이것은 남 눈에 안 띄게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선 남의 것을 읽고 감동하는 경지를 여러 번 거치면서 감동의 깊이를 심화해가는 과정을 지나고 나서 비로소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박경리 선생은 저와 경향은 많이 다르지만, 제가 대하소설은 끝까지 읽은 것이 없는데, 박경리 선생님 것도 끝까지 읽지는 못했습니다. 옛날에 1부라고 하는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다섯 권까지를 읽고 앞으로 더 읽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못 읽고 있습니다.(물론 초기의 단편들은 읽었습니다.) 제가 {토지}를 읽은 양이 3분의 1이나 4분의 1정도 될텐데, 제가 월선이와 용이의 사랑을 좋아했는데, 월선이가 죽고 나서는 기운이 빠져서(함께 웃음) 못 읽게 되었습니다. 박경리 선생은 여류 작가 중에서 아주 대가 센 분이면서, 정도 많고, 여장부입니다.
요새는 집필보다는 환경 운동 같은 것을 열심히 하시고, 문학도 크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좋은 점(후진을 위해서라든가)을 갖고 계셔서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분과 제가 성은 같지만, 그분은 워낙 통이 크고, 큰 작가적 기질과 원대한 무언가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노후에 편히 사시지, 왜 그렇게 많은 일을 벌이실까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그분의 그릇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아주 그릇이 작은 사람이고, 그분을 존경하는 것도 있고, 의지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아주 힘들어해서 아무도 제 가까이 오지 않을 때에도 저에게 쳐들어와서 저를 따뜻하게 감싸주신 분입니다. 아주 너그럽고 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네 집]은 정말 가볍게 쓴 것인데, 교과서 편찬위원회에서 교과서에 싣겠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거기에 몇 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는데, 정신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까 정신대 문제를 깊이 파헤치시는 분들이 있다고 했는데, 저는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는 악몽 같은 게 있습니다. 그때 정신대를 뽑아가는 것은, 도시에서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면 정신대 나오라고 강제로 뽑아가지는 않았습니다. 피해자는 거의 다 시골에 있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서울에 숙명여고를 다니던 해방되기 반년 전에 서울 인구를 지방으로 소개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골에 호수돈 고녀에 전학을 해서 다니려고 했는데, 잠깐의 공백기에 박적골이라는 척박한 마을에 들어가 있을 때였습니다. 정신대 문제를 서울에 있을 때는 못 듣다가 그때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해방되던 해의 봄에 시골에 내려갔는데, 그때는 일제 말기니까 저에게 무슨 악몽처럼 남아 있는데, 쌀 뺏으러 오는 사람들은 긴 장대 끝에 꽃삽 같은 것을 달아서, 면서기와 순사가 같이 조를 짜서 쌀을 뒤지러 다녔습니다. 쌀을 뒤지러 다니는 사람이 오면, 여자를 정신대로 뽑아서 군수공장으로 보낸다고 해서 딸들을 감추고 집집마다 빨리 시집을 보내고 그랬습니다.
제 친구 중에 갑희라는 애가 있었는데, 제가 열 다섯 살 적인데, 신의주 어딘가로 시집을 갔습니다. 정신대에 뽑혀 갈까봐 지레 겁을 먹어서 보낸 겁니다. 순사와 양복 입은 사람들이 동구 밖에서 오니까 딸을 감춰야 된다고 해서 소리개라는 동네에서 갈잎, 지푸라기 같은 것을 땔감으로 마당에 크게 쌓아두는데, 거기다가 조금 모자라는 딸을 감춰둔 겁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뭘 감추면 시골 순박한 사람들의 표정에 뭔가 다른 게 드러나니까,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거기를 찌른 겁니다. 그래서 살점이 묻어 나오고 그 애를 싣고 어디로 가고, 유언비어라고 그래서 그런 사실을 퍼지지 못하게 했는데,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쉬쉬하는 사이였습니다.
저는 그때 호수돈 고녀에 전학이 되지는 않고, 시골에 내려가서 유유자적하고 있는데, 그 소문이 나니까, 그때만 해도 시골보다는 시내가 더 나으니까, 빨리 개성으로 가 있으라고 해서 밤에 친척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건을 보면 일제가 정신대 피해자는 얼마 안 된다고 하지만 그때 피해자라는 것은, 정신대 할머니의 수효가 아니라, 참혹하게 일그러진 시골 지방의 순박한 동네사람들 전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신대로 뽑아 나간 것만이 죄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일제에 대한 항의는 두 가지 축입니다. 하나는 정신대 문제로 피해받은 그 소문과 또 하나는 사랑하던 사람들이 급하게 딴 데로 시집을 가면서 헤어지게 되는 얘기입니다. 정신대 문제와 그 시절에 아주 아름다운 연애를 하던 사람들이 헤어지게 되는 두 가지 이야기를 꼬아서 만든 이야기이고,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에서 제목을 따 왔는데, 그 긴 시의 내용이 우리 고향 마을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도입했고 제 소설이 흔히 그렇듯이, 이게 픽션인지 넌픽션인지를 알 수 없게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가르치는 많은 국어 선생님들이 처음 실리고 나서, 제가 실은 것도 아닌데,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국어교육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걸 어떻게 말을 해줘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또 교과서에 나오기 전에 참고서 업체에서 저에게 또 물어보는 겁니다. 이것은 소설을 분류하는 것 중에 어디에 포함을 시켜야 되는 것이냐고 물어서 저는 참 난감했습니다. 아이들이 읽고 그냥 느끼면 되지, 그렇게 이 소설을 찢어발기는 것을 생각하면, 제가 좋아하는 생물체를 죽여서 해부대에 눕히는 것 같은 무참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제가 책이 귀하고 그럴 적에(일제 시대 때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 국어 교과서를 받아들면, 재미있는 수필이라든가 짧은 콩트 비슷한 게 교과서에 나오면 그게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내서 몇 번씩 읽으면 책이 귀할 때 국어 교과서도 저에게 어떤 문학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아이들도 싫어하면 안 읽고, 좋아하면 읽고 또 읽으면서 문학적인 감성을 키우길 바라는데, 이게 무슨 형식이냐는 식으로, 어떤 국어 선생님은 이걸 가르치기가 굉장히 어렵다면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선생님 단편을 많이 읽었는데, 단편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도 많이 있는데, 하필이면 왜 이 작품을 실었습니까 하고 물어서, 제가 실은 게 아닙니다, 싣겠다고 그러는데, 싫다고 그럴 수도 없고, 이것은 그냥 지나간 시대, 일제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저로서는 좋은 문장을 구사했다고 생각해서 별 생각 없이, 국어 교과서 편찬하는 분들이 선택을 한 것이니까, 그래서 실린 겁니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만일 그 소설을 가지고 국어 시험 문제를 내서 저에게 풀라고 한다면(함께 웃음) 글쎄, 제가 50점 이상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질문자 3 : 저는 선생님께서 성인들만을 위해서 재미있고 좋은 작품을 많이 써주신 줄 알았는데, [자전거 도둑]이라든지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옥상에 핀 민들레꽃] 등을 쓰셔서 아이들과 참 재미있게 수업을 하고 있고,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이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의외로 선생님이 남자분인 줄 아는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면, 박완서라는 이름도 그렇고 사진을 보래요.(함께 웃음) 자꾸 저에게 남자인데, 왜 여자라고 그러느냐고 해서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뭘 궁금해하느냐 하면, 70년도에 여성동아에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해서 등단을 했다고 하면, 그때 공모했을 때 상금이 있었냐는 걸 궁금해합니다.(함께 웃음) 아마 있었을 것 같다고 하니까 얼마나 되냐고 다시 물어서 나도 잘 모르니까 다음에 가르쳐 준다고 했거든요. 그때 혹시 상금 있었습니까.(함께 웃음)
박 : 그때 상금이 50만원이었습니다.
질문자 3 : 그때 당시의 50만원이 지금으로 따지면 많겠네요.
박 : 2천만원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저보다 2년쯤 먼저 홍성원 선생님이 동아일보에 [디데이의 병촌]이라는 작품으로 등단을 했는데 상금을 50만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 생각이 안 나는데, 그분이 어디에 글을 쓴 것을 보니까, 그걸 갖고 집을 샀다고 한 것을 보니까(함께 웃음), 그때는 지금처럼 집값이 비싸지는 않아서 그런지 아파트 같은 것도 없고 그럴 때였습니다. 그러면 그게 그렇게 굉장한 돈이었나, 난 왜 집도 안 사고 흐지부지 썼나 하는 생각도 하고 그랬습니다.(함께 웃음) 아무튼 50만원이었습니다.
유 : 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태풍도 불어오고 하니까 이 정도에서 박선생님을 해방시켜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함께 박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