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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부르의 우산>: 비의 서정 그리고 눈
비가 오면
참 비가 많이도 온다. 백수는 흩날리는 비방울 하나에도 가슴이 시렵다. 비가 오면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수필 하나가 생각난다. 중학교 국어책에 있던 <인연>이란 수필, 유명한 수필가 피천득이 쓴 것이다. 이게 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 이 수필에 나오는 한 구절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수필의 주인공(피천득)이 젊은 날 일본 동경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만난 아사꼬란 소녀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당시 이 구절을 읽으며 국어 선생님이 <쉘부르의 우산>에 대해 어떤 코멘트를 달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게 어느 나라 영화인지 쉘부르가 뭔 지, 최소한 내 기억에는 없다. 그러나 그날 이후 '쉘부르의 우산'이란 말이 내 의식 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남았다. 영화든 책이든 꼭 한 번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게 실현 된 것은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러니까 거의 20대가 저물어 가던 때였다. 우연히 TV에서 <쉘부르의 우산>을 본 것이다. 60년대 영화였으니 영화관에서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그때도 내 의식에 떠 오른 것은 <인연>이란 수필이었다. 거의 15년 만에 의문 하나가 풀렸다. 쉘부르의 우산이 뭔지? 그게 왜 세계 영화사(뮤지컬)의 고전이 되었는지? 그 후 비가 오면 늘 <쉘부르의 우산>이 생각났다.
<쉘부르의 우산>
무대는 1950년대 말 프랑스하고도 쉘부르Cherbourg란 도시, 프랑스 북서쪽에 위치한 조그만 항구도시다. 파리에서 차로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고도古都. 여기에 산뜻하고 세련된 우산 가게가 하나 있으니 그 이름이 <쉘부르의 우산>이다.
영화의 막이 열리면 어느 비 내리는 해거름에 노란 셔츠를 입은 한 아가씨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곧 가게 건너편 보도 위로 노란 자전거를 탄 청년이 한 명 나타난다. 작업복을 입었지만 잘 생기고 멋진 젊은이다. 가게를 뛰쳐나온 여자와 깊은 포옹을 한다.
여: 내 사랑, 하루 종일 너만 생각했어. 남: 즈땜므/사랑해. 여: 옷에 가솔린 냄새가 나. 남: 종류가 좀 다른 향수지.
보도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두 사람은 떨어질 줄 모른다. 여자의 이름은 쥬느뷔에브, 남자는 가이(Guy, 불어로는 기이). 여자는 홀어머니와 우산가게를 하고 남자는 연로한 고모와 살고 있는 자동차 정비공이다. 이 두 사람이 바로 <쉘부르 우산>의 주인공이다. 이들의 청신하고 유쾌한 연애가 세련된 프랑스어와 아름다운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한 참 이어진다. 그러나 곧이어 스토리의 갈등상황이 전개된다. 어머니와 사는 쥬느뷔에브의 집이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어머니가 자동차 정비공인 딸의 파트너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느 날 모녀는 집안의 가보라고 할 수 있는 목걸이를 팔려고 보석방에 간다. 원하는 값을 받을 수 없어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가게에 있던 멋진 신사가 접근한다. 자기가 사겠다고 한다. 카사르라 이름하는 이 젊고 폼 나는 파리의 사업가는 첫 눈에 쥬느뷔에브에게 빠진 것이다. 그녀에게서 옛 첫사랑을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 대책 없이 마음을 빼앗긴 것은 딸이 아니라 어머니다. 일단 돈 때문이다. 딸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카사르는 딸을 사이에 두고 편지를 주고받는가 하면 만나서 작전을 짠다. 어머니는 딸을 집요하게 설득하나 손톱도 안 들어간다.
정작 문제는 가이한테서 발생한다. 알제리 전쟁 때문에 징집영장이 나온 것이다. 최소한 2년의 이별은 각오해야 한다. 쥬느뷔에브는 순결을 바치므로 기꺼이 기다리겠다는 마음을 표한다. 가이는 연로한 고모를 마들렌이란 여인에게 맡기고 전장으로 간다. 마들렌은 그전부터 고모를 돌보아온 마음씨 착한 아가씨인데, 가이를 사랑하지만 쥬느뷔에브 때문에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별의 날이 다가왔다. 저 유명한 셀부르 역 커피숖, 아무리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해봐도 가슴은 찢어진다. 죽는 날까지 사랑하겠다며 기차를 타고 떠나는 남자, 가지마라 돌아오라고 외치며 기차를 따라 달리는 여자. 자고로 이별의 운명을 가시화하는 데 기차만큼 좋은 영상적 장치도 없다. 여기서 저 전설적인 다니엘 리까리의 샹송이 나온다.
남자의 부재가 분명해지자 엄마와 카사르는 더욱 가열차게 협공을 가한다. 그러자 쥬느뷔에브는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가이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으로도 카사르의 열정은 철회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카사르는 가이의 아이를 기꺼이 자신의 아이로 키우겠다고 치고 들어온다.
정작 쥬느뷔에브의 고민은 군에 간 가이에게서 거의 편지가 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뒤 늦게 날아 온 한 장의 편지에는 곧 돌아가겠지만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고 상황이 몹시 위험하다는 말만 쓰여 있다. 대신 딸을 낳으면 프랑소아즈라 이름하라고 말한다. 얼마 뒤 가이는 전투에서 다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진다.
결국 눈이 펑펑 쏟아지던 겨울 어느 날 쥬느뷔에브는 만삭의 몸으로 드레스를 입고 카사르의 품에 안긴다. 그녀는 우산가게을 처분하고 어머니와 함께 남편을 따라 파리로 가버린다.
몇 년 뒤 쉘부르의 기차역, 가이가 귀향하고 있다. 다리를 약간 져는 것이 아직 완치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가장 먼저 <쉘브르의 우산>을 찾는다. 주인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우산은 하나도 없다. 다른 가게로 업종전환이 되어있고 쥬느뷔에브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던 가이는 어느 날 술에 취해 창녀랑 하루 밤 잔다. 이 여자의 이름도 쥬느뷔에브다.
집에 돌아오니 마들렌이 울며 문을 열어준다. 고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문득 마들렌을 보는 가이의 시선이 달라진다. 자신이 없는 사이 고모를 정성껏 보살펴 온 여인이다. 왜 그동안 저 여인을 보지 못했을까. 가이에게 새로운 사랑이 싹튼다. 가이는 마음을 잡고 고모의 유산을 처분해 도시 외곽에 주유소를 하나 차린다. 어느 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마들렌에게 청혼을 한다.
가이: 네가 원한다면 너와 인생을 같이하고 싶어 마들렌: 내가 짐이 되지 않을까? 가이: 무슨 소리. 그런데 너 지금 울고 있는 거야? 내가 말을 잘못했나? 마들렌: 아니. 좀 두려워. 가이: 뭐가? 마들렌: 쥬느뷔에브 생각 안 해? 가이: 아니, 다 잊었어. 남은 인생은 너와 행복해지고 싶어. 마들렌: 흑 흑 흑... 가이: 마들렌, 울지마.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이어지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다. 어느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주유소 뒤쪽에 있는 가이의 아늑한 집 안의 전경이 보인다. 크리스마스 츄리가 반짝이고 가이와 마들렌이 서너 살 되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눈처럼 빛나는 웃음을 주고받고 있다. 마들렌은 남편의 선물을 산다며 아들의 손을 잡고 시내로 나간다. 조금 뒤 주유소 앞으로 BMW 승용차 한 대가 와 멈춘다. 가이는 차에서 내리는 쥬느뷔에브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다.
쥬느뷔에브: 춥네요 가이: 안으로 들어와
차안에는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노란 옷을 입고 창문에 쌓인 눈을 긁어모으며 놀고 있다. 쥬느뷔에브 혼자 가이의 거실로 따라 들어온다. 어색한 가이는 할 말이 없어 담배를 피워 문다.
쥬느뷔에브: 여기는 따뜻하네요. 근처 마을에 있는 시어머니한테 딸애를 찾아 파리로 돌아가던 길이에요. 결혼한 이후 쉘부르는 이게 처음인데 당신을 만나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이런 우연이 있다니..... 아, 저 크리스마스 츄리 참 이쁘네요. 가이: 아내가 만든 거야. 밖에 차 안에 있는 아이는 누구야. 쥬느뷔에브: 프랑소와즈. 당신을 많이 닮았는데 한 번 볼래요. 가이: 아니.
쥬느뷔에브의 차는 쓸쓸히 눈 속으로 사라지고 곧이어 마들렌과 아들이 유쾌한 웃음으로 돌아온다. 가이는 노란 잠바를 입은 아들과 집 앞에서 눈싸움을 한다. 그걸 바라보는 마들렌의 눈은 행복의 빛으로 빤짝인다. 텅빈 주유소 앞마당에 함박눈이 쉬지 않고 내리는데 화면이 서서히 닫힌다.
이렇듯 비내리는 우산 가게 앞에서 시작한 러브스토리가 눈 내리는 주유소 앞에서 막을 내린다. 이제 우산雨傘은 필요가 없다. 설산雪傘이 있다면 몰라도. 제목은 <쉘부르의 우산>인데 비가 눈으로 바뀐 것은 왜 일까?
마지막 반전과 눈(雪)의 미학
문학적으로 말하면 비의 감성은 서정적이고 눈은 서사적이다. 서정성이란 과거를 회상하면서 발생하는 감상과 센티멘털리즘이다. 대체로 이런 저런 사연 깔고 있는 어른들의 감정이다. 반면에 서사성이란 미래를 향한 긴장과 도전의지를 바탕으로 한다. 출발선상에 서 있는 젊은이들의 감성이고 청춘의 순수함이 핵심 정서다. 서정성은 비가 대변하고 서사성은 눈이 대변한다.
심수봉의 노래(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가 단적으로 대변하듯이 비는 과거를 추회하는 어른들이 좋아하고 눈은 미래의 사랑을 기다리는 맑고 순정한 청춘들의 꿈을 대변한다. 쉘부르의 비가 눈으로 바뀐 것은 가이의 사랑이 과거 지향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가 쥬느뷔에브와의 과거 사연에 정체되어 있지 않고 마들렌과 아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서사적 발걸음을 떼어 놓는 것은 눈의 정서와 일치한다. 그가 눈 속에서 쥬느뷔에브와 딸 프랑소아즈를 돌려보낸 것은 비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서사적 의지다.
이 영화의 포인트는추적추적하고 센티하게 내려깔리는 무거운 비의 감성을 화사하고 가벼운 이성적 눈이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 처음에 비오는 날 쥬느뷔에브가 가이를 기다리면서 입고 있던 노란 쉐타가 눈싸움 하는 프랑소아 (가이의 아들)의 노란 겨울 잠바로 바뀌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우연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우산은 두 사람의 피할 수 없는, 행복한 만남과 결속을 드러내는 매우 긍정적인 장치이지만 운명적인 굴레로 작용할 수도 있다. 쉘부르는 이것을 넘어서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것이 비에서 눈으로의 이행에 함의되어 있고 우산의 사라짐이 의미하는 바다. 결국 <쉘부르의 우산>은 우산의 극복을 이야기하고 비의 서정을 넘어서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물론 비와 눈을 이렇게 서정적/서사적 정서로 이분화하는 것은 나의 억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이틀간 비를 보고 맞으며 내 심상에 떠오른 것은 전날의 추억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중학교 국어시간에 각인된 35년 전의 수필(인연)과 45년 전의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 대한 기억은 전형적인 서정적 감상에 다름 아니었다.
그게 그리 생산적이지는 못하다 해도 눈을 기다리며 꿈을 꾸기에는 이제 나는 너무 늙었다. 그건 청춘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이제 그저 창가에 흐르는 비를 바라보며 오래전의 아프고 아름다웠던 사연을 추회하는 것으로 서글픈 현재를 위로할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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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는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이 영화는 안 봤네요. 사실 제가 영화는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극장에서 본 영화 중 가장 최근의 것이 "진주만",.....아하 또있네요...승빈이(3살) 가진 기념으로 본 영화 "마음이"입니다...^&^..../// 비와 우산, 그리고 인연....비가오면 생각나는 사람이고 싶어서(?), 미처 우산을 준비치 못하고 교회 앞으로 지나는 사람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우산을 나눠줬는데, 아직 돌아온 우산이 없네요.....우산을 더 구해 나워주고, 다시 그 우산이 돌아와서 나눠지기를 꿈꿔봅니다....^&^....
비오는 날 교회 앞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우산이라. 아름답고 좋은 마음이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또 그게 굳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우산의 의미는 어디선가 작동하고 있을 거고. 그건 하나님이 하는 일이잖아. 그런데 성경이란 방대한 텍스트 안에 비다 눈이다 하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회감의 서정은 거의 없고 오로지 앞으로 진행하는 인간 사회의 스토리만 드러나 있다는 게 문학하는 내게 좀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랄까. 사막과 광야를 배경으로 한 게 성경이라 그런지.
오늘도 여전히 비는 솓아지고, 영화 한편으로 옛 연인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가네,역시 비는 과거 지향적이고 기억 저넘어 한 조각의 추억마저 끄집어내니, 비 속을 헤매고 다니고 싶지만, 젊었을때는 추억이 되겠지만 이제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질까봐 엄두도 못내겠네, 젊었을때 부지런이 밧속을 둘이서 해매시길............
한국에서 맞는 두번 째 여름인데, 지난 여름은 더위로 잠 못 이룬 고난의 시간으로 기억되는데 올 여름은 비로 기억될 것 같네요. 역시 선배님도 옛 연인'들', 즉 복수의 사건들이 있었군요. 한 건은 저도 들은 바 있는 유명한 러브스토리인데, 언제 자세히 한 번 들어었으면 합니다. 물론 나머지도 그렇고요. 젊은 사람들은 미래의 사랑을 꿈꾸고 늙은 사람들은 과거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 주 토요일 탁구장에서 일단 뵙기를 희망합니다. 마치고 동동주 잔 건네며 한 스토리 개봉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비속을 헤집고 다니며 뜨거운 가슴을 식혀야 하는 청춘은 아니지만 그런 시절을 회감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만큼은 그 시절을 다시 사는 미학적 체험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세계 문학사의 많은 러브스토리들이 더 이상 사랑을 꿈꿀 수 없는 노인들이 과거의 사랑을 재현하고 싶어 마치 현재의 일인듯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다가 형성된 것들이잖아요. 그건 주책도 아니고 초라하지도 않지요. 저는 전부터 우리 동창들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수집하여 어떤 형태로든 작품화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우리 독문과의 추억을 독문 고유의 방식으로 역사에 남기는 방식이 아닐까요?
아주 오래전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 Heiderberg Alte Brueke위에서 비를 맞으며 어느 여인을 생각헸다, 그 어둡고 침침한 기억이 비가 억수로 오는 날에는 가끔 그 여인이 생각난다. 뼈속을 저미는 추위가 있어도 느끼지를 못 했고, 그냥 그 여인만 머리속에서 맴돌뿐........ 그 여인이 누굴까?
선배님, 추억이 두 단계로 되어 있네요. 비가오면 겨울비 쏟아지는 하이델베르크 다리 위에서 만난 어떤 여인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어떤 여인을 생각했던 것을 생각한다는 겁니까? 비오는 하이델베르크 다리가 생각나고 그러면 그 위에서 비맞으며 생각한 여인을 생각하는 거잖아요. 놀랍습니다. 그여인이 누구인지? 왜 그 다리 위에서 그 여자가 생각났는지? 다리는 이별의 이미지가 아니라 결합의 이미지로 사용되는 게 통례인데, 다른 남정네랑 결합되어 버렸습니까? 일찍이 처용이 이런 비가를 불렀드랬지요. '달이 밝아 놀다 집에 오니 침대 위에 다리가 넷이네. 두 개는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오나가나 다리가 문젭니다.
다리가 꼭 결합의 이미지는 아니지요. 도시의 경계가 대부분 다리를 기점으로 지역이 나뉘어지는 것만 봐도 다리는 다른 두 세계를 잇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분짓는 경계선으로 작용하기도 하죠. 넥카강 위 아름다운 Alte Brueke는 누군가를 불러내게 하는 마력이 있긴 합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거든요. 그 사람과 여기 있다면... 근데 경규선배 너무 많이 나가는 거 아닙니까... 추위조차 잊게 한 아련한 추억을 회고하는데 왠 처용? 하이튼 은근 퇴폐적이셔~~~
경규야 독일 Buyer list 좀 보내 줄래.
선배님, 번역 자료 보내면서 www.wlw.de에서 Buyer (Haendler) 찾는법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우선 제품 이름이나 개념을 독일어(홈페이지 버전을 영어로 바꾸면 영어 단어도 가능)로 넣으면 생산자, 딜러, 수입/수출업자 등으로 나뉘어 업체 리스트가 나옵니다. 회사 홈페이지와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회사 규모를 살펴보고 제품 소개서/설명서와 회사소개서를 보내면 관심유무에 따라 답이 올 거고 거기에 따라 대응하면 됩니다. 안 되면 언제 같이 한 번 작업을 해 보지요. 우선 영어나 독일어로 된 제품/회사 소개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독일 전시회 협회 (www.messen.de)에서도 관련 업체를 찾아 볼 수도 있습니다.
나야 즐겨 퇴폐적인바, 자고로 데카당스의 미덕이란 위선적인 도덕주의를 거부함에 있거든. 그렇지만 고등학교 국어책에도 나오는 신라 최고의 시작(처용가)을 인용했다고 퇴폐적이라고 하면 공부 열심히 한 게 퇴폐인가? 사실 어떤 국문학자는 신라시대의 여자들은 여러 남자와 동거해 보고 나서 남자를 선택했을 정도록 여권이 신장되어 있었다고 하두만. 그걸 대변하는 게 바로 처용가라는 것. 도올 김용옥도 같은 생각이고. 그런데 처용가는 그래도 상당히 젊잖은 작품이지. 나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은데. '달 밝은 서울 밤 놀다가 집에 와보니 침대 위에 다리가 다섯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셋은 뉘것인고' 중간다리 ㅋㅋㅋㅋ
공부 열심히 안했어도 처용가 모르는 사람 없죠. 동유형의 애잔함을 처용가로 연결시킨 선배의 감수성이 데카당스라는 것이지...
남자들은 여자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더러 많지, 젊었을땐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할때도 있고, 모든걸 올인할때도 있고,지금까지 살아 왔지만 아직 까지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은거 같은데, 모르지 나이가 더 들면 어쩔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여자는 마음속에 머무를때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옆에 있는 여자에게 최선을 다해 사는게 마지막 인생을 아름답게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싶네.
마지막 문장에 올인~~~ 여자는 남자로 인해 백만% 인생이 바뀌죠. 생각해보면 참 무서운 선택인 것 같아요. 각자 옆에 있는 남녀에 최선을 다합시다!
여자로 인해 남자의 인생이 바뀌는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자들은 그 반대를 더 강조하겠지요. 그런데 선배님, 여자에게 올인하는 마음이 변치않고 있다는 것이 과거의 사람에게 그랬고 현재의 사람에게 그리하고 있고 미래의 사람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올인을 여러번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반복되는 올인의 강도와 진정성이 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음속의 여자는 마음 속에 머물려둘 때 더 아름답다는 것은 찾고 표현하고 결합을 시도하는 액션의 부질없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무액션도 올인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까요?
남자가 여자없이 무얼하겠는가,인생의 반쪽없이 사는게 의미도 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고로 남자들은 끋없이 여자를 찾는데 내가 이 여자다 싶으면 올인해야지. 주는만큼 받는다고 남여지간에 문제가 있다는것은 다시한번 돌이켜보면 다 내문제가 아니던가. 사랑은 현재이지 결코 과거나 미래가 될 수 없지, 다른거는 몰라도 사랑은 경규보다 내가 한수 위인거 같은데 나중에 미팅 한번 하자.
사랑의 현재성, 역시 한 수 아래임을 인정하겠습니다. 미팅을 통해 더 배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