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번역하여 나누는 것은 신약의 헌금자세에 대해서 고후8-9장을 중심으로 찾고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서이다. 향후 내가 관심하면서 적으려고 하는 평균케 함에 대한 입장에서 고후8-9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가지 이 글에 대한 나의 비평적 소견은 자비롭고 자발적이라는 표현이 가진 의미를 너무 규범적이지 않게 이해하는 부분이다. 나는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서 오늘의 성도들이 교회의 필요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필요를 위해서 헌금하는 일에 언약적 규범성이 존재함을 말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헌금을 축복의 수단으로 남발하여 위협하는 설교나 반대로 헌금을 설교하면 세속적인 것 처럼 타락한 것으로 여기는 풍토는 둘다 문제가 있다. 적절한 원리와 규범성을 따라서 헌금은 설교되고 실행되고 관리되어야한다.
여기에 교회의 실질적인 존재형태가 결정됨을 부연하고 싶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글은 성경 전체에서 헌금의 의미를 설명하는 일에 성실했다고 보면 되겠다.
성경적인 헌금(A Biblical Pattern of Giving by Peter Dyck)
돈은 아주 예민한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대한 결핍을 느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을 감담함에 필요한 부분의 얼마를 내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도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헌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필요한 일련의 잣대들을 제공한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헌금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십일조이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의 십분의 일이다. 십일조가 빈번하게 헌금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으로 여겨지고, 자주 말3:10의 구절이 인용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러한 유사한 본문들을 현대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십일조가 구약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 구약의 헌금
구약에서 십일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아브라함(창14:20)과 야곱(창28:22)에 대한 역사적 기사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들은 십일조가 일반적 관습임을 말한다. 즉 십일조는 여러 고대의 사회가 실행하는 관습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모세의 법은 헌금에 대한 더 포괄적인 견해를 제공하는데, 특히 공동체적 상황에 적용되는 때에 그러하다. 십일조는 이러한 교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하나님께 속했고,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속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십일조를 다루고 있는 본문이 오경에 5군데가 있다. 레27:30-33, 민18:21-32은 유사한 것이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모든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을 위해서 따로 떼어놓아야 함을 말한다. 또한 레위인들은 그들이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같은 레위인들이지만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을 위해서 내어 놓으라고 가르친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어떤 기업도 받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성막을 봉사와(나중에 성전봉사),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도록 구별되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생계수단으로 제공되었다.
신12:15-19과 14:22-26 역시 십일조에 대해서 말한다. 이 경우에는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에루살렘으로 가지고 와서 가족들과 종들과 그리고 그 도시의 레위인들과 함께 교제의 식사를 하도록 했다. 신14:22-26에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백성들이 실질적인 십일조를 고향에서 은으로 바꾸어가지고 와서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한 음식을 구입하는데 그 은을 사용하도록 하는 규정이 덧붙여졌다.
실제로 두 종류의 십일조를 말하는 이런 두 기사들의 차이들은 각기 독특한 목적을 말한다. 다른 한가지의 변이는 신14:27-29이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이것은 삼년에 한번씩 드리는 십일조를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하게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의 변이이거나 혹은 교제의 식사(화목제) 십일조의 변이이다. 분명한 것은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십분의 일 이상을 요구하신 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소산의 "첫 열매"를 가축의 첫 새끼와 마찬가지로(출34:19-26) 주님께 바칠 것을 말한다. 십일조와 이 첫 열매와의 관계가 분명하지는 않다. 어떤 구절들에서는(예로서 느12:44) 십일조와 첫열매를 구별한다. 우리가 앞서 십일조를 두가지로 구별해서 본다면, 아마도 그들 중 한가지는 첫 열매의 규정을 포함할 것이다.
십일조에 덧붙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도록 요구받았고, 그리고 주님에게 자원하는 제물을 가지고 오도록 초대를 받았다. 말3:8은 이스라엘이 "십일조와 제물"을 도적질했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제물로 사용된 단어는 아주 빈번하게 화목제의 제물이지만 그러나 다른 헌물에도 사용되었는데, 성막을 위한 건축재료의 헌물의 경우이다(출25:1-7).
그때에 이스라엘은 그의 십일조와 첫열매를 드리고, 그의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자유로운 제물을 서원의 제물을 가지고 왔기에 그의 수입의 상당한 부분이 주님에게 드려졌다. 이러한 십일조와 제물들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
하나님께 헌신되는 행위로서의 제단에 태워진 제물과는 달리, 대부분의 구약의 헌물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사역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목회자로서 레위인과 제사장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이러한 역할을 했다. 제사장들은 제물을 드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대하31:4, 말2:6-9). 레위인들은 성막과 성전을 유지하고 백성들을 예배하도록 인도하는 실질적인 일들을 했다(대상23:28-32).
주님을 에배하는 역할에 덧붙여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또한 일반 시민들의 삶과 관련된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초기 이스라엘은 농경사회였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신정국가로 세웠다. 여러 지파들에 장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했고,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하도록 구별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민족과 관련된 영향력있는 중요한 결정들은 대 제사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출28:29,30). 제사장들은 또한 민족가운데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시켰다. 그들은 일상의 음식법과 공중의 건강과 위생의 전문가들이었다(레11-15).
시민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레위인들의 기능은 또한 도피성과 같은 레위인들의 성의 지정과 관련된다. 이것은 레위인들이 사법체계의 수호자임을 말한다. 왕이 지명된 이후에 조차도 레위인들은 행정적인 일뿐 아니라(대상26:20-32) 여전히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대상23:4).
세번째 종류의 십일조는 구약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기에 전혀 다른 기능을 한다. 삼년에 한번씩 드리는 이 십일조는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것이다(신14:29).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여러 율법들 중에 하나이다. 구약전체에서 이스라엘은 가난한 자들을 간과하는 상대적인 부유층들의 태도로 인해서 정죄받았다.
요약하자면 구약의 헌금은 여러 형태를 지니는데, 십일조(둘 혹은 세종류), 제사, 자유로운 제물, 서원, 혹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들판에 떨어진 이삭을 버려두는 일등이다(레19:9,10). 이것은 이스라엘의 세금수입의 실질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헌금들은 모든 선한 것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도들이 있었고, 목회자들을 지원하고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또한 기초적인 시민 봉사를 하였다.
# 신약의 헌금
신약으로 가서 우리는 헌금에 대한 어떤 연속성을 기대하게 된다. 도잇에 교회의 구조와 이스라엘 민족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본다. 교회와 국가의 구별, 농경사회에서 혼합경제로의 이동, 그리고 제사 제도의 종결등은 신약의 헌금 형태의 수정을 가지고 왔다.
신약은 교회를 봉사하는 이들을 지원할 필요를 계속해서 강조한다. 딤전5:17-18의 말씀이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성경적인 원리는 목회자가 스스로 연구와 목회에 몰두할수 있기 위해서 자신과 가족의 필요를 위한 세속적인 일들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도바울이 자급했던 것(텐트 만드는 일)을 말하면서 그가 그 자신의 사역을 직업을 가지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9:1-14에서 바울이 강조하기를 그의 사역을 위해서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권리를 주장한다. 사실상 그는 자주 사역을 위해서 지원을 받았다(빌4:10-19).
신약은 또한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원리를 강하게 강조한다(딤전6:17, 히13:15-6 등). 특히 고아와 과부들이다(약1:27). 신약은 이스라엘에 있었던 공동체의 의미를 보존하는데, 그 공동체가 바로 현재의 교회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먼저 교회에 있는 자들중에 가난한 자들이다(갈6:9-10).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이 정부의 계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내는 세금에 의해서이다. 신약은 우리에게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하고 정확한 세금을 내도록 가르치는데, 이는 그들이 우리의 선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고 한다(롬13:1-7). 동시에 우리는 교회안에 있는 자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의 정부가 "안전망"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에도 개별 성도들은 어려운 일들에 직면한다. 이러한 경우에 가난한 자들을 돕는 성경적 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러한 지원은 재정적인 것일수 있으나 더러는 자주 다른 실질적인 사랑의 표현이 요청된다. 이것은 우리 소유의 나눔을 포함하고, 혹은 노인들의 문제나 질병이나 홀로된 이들이 가지는 어려움을 함께 돕는 것을 말한다.
결핍된 자들에게 헌금하는 원리는 지역교회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바울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은 극심한 가난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여러교회로부터 헌금을 모으는 일이었다(갈2:10). 우리는 비록 풍족한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민족과 나라에는 아직 심각한 가난과 어려움을 격고 있으니 우리는 그들을 잘 기억해야만 한다.
신약이 기독교인들이 드려야 하는 헌금의 양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십일조가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우리는 더 많이 내야하나 혹은 적게 내야하나?
신약은 십일조를 네번 언급한다. 마23:23 그리고 눅11:42은 바리새인을 정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바리새인은 곡식과 향의 십일조를 내었지만 그러나 율법의 중요한 내용을 무시했다. 눅18:12에서 스스로를 옳게 여기는 바리새인의 기도에 그들이 받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내었음을 말한다. 히7장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내었던 사건을 회상한다. 이들 구절중에 어떤 것도 헌금에 대한 교훈을 제공하지 않는다. 첫 세가지는 바리새인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리고 네번째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의 본질을 말한다.
헌금의 원리를 말하는 신약의 구절들은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십일조의 원리가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헌금을 요청하는 구절들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책임을 말하낟. 그러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실제적인 책임으로서 정규적이고 헌신적이며 적절한 액수의 헌금이 요청된다. 기독교인들은 목회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지역교회의 필요를 고려해야 한다.
재산과 이자 그리고 가용설비와 다른 장단기적인 재정적 필요에 대한 성도들의 정규적인 헌금은 세심한 청지기직분을 요청되는데, 이는 공동체안에서 교회의 증거에 대한 통합성을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신약에서 헌금에 대한 가장 선명한 가르침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이다. 거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격려하는 내용이 들어잇다. 고린도교인들은 헌금에 대해서 행동은 느리고 단지 말만 많이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고전16:2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헌금에 대한 이러한 권면의 틀은 돈을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구별해 놓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의 헌금과 철저하게 일치되는 부분이다. 어떤 특정의 비율이 언급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각 사람은 어떤 특별한 주에(우리의 경우에는 지불기간동안) 그의 능력에 따라서 헌금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그가 당시에 받은 물질적인 축복의 양과 관계된다.
고후8-9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비롭게 헌금하도록 권한다. 관심이 가는 부분은 그가 강제로 하도록 하지 않고 있다(8:8, 9:7). 대신에 마케도니야 교회의 자비로움을 지적한다. 그들은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헌금했다(8:3).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성전 헌금함에 기부하는 막대한 양에 감동되지 않으셨는데, 왜냐하면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기" 때문이었다(막12:44). 주님의 칭찬을 받는 과부의 헌금이 바로 이를 증거한다.
바울의 논증의 중심은 고후8:9에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를 기억할때 우리의 응답은 자비로움뿐 아니라 자원하는 것이 된다(고후9:5-7).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증거이다(9:12-14).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재정적인 관리를 고려해야한다. 재정의 잘못된 관리는 교회에 수치를 가지고 오고 이름에 먹칠을 한다. 다윗왕은 레위인들에게 성전 금고의 관리를 맡겼는데(대상26:20-32) 이는 그것을 적절하게 관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느혜미야 시대에 성전 금고의 관리가 허술해졌다. 그의 개혁중에 하나가 다시 신실한 손에 그 금고를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느14:4-13).
이와같은 관심이 신약에도 있다. 처음에 사도들이 드려진 헌금을 받았고 나누어주었다(행4:34,35). 시간이 지나자 교회 재정의 관리가 더 많은 일을 요청했고, 복잡해졌다. 그래서 교회는 집사들을 선출했고, 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자들이었고 그들에게 이러한 관리의 책임이 넘겨져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전무했다(행6:2-6).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이 교회에서 인정된 존경할 만한 사람들에 의해서 관리됨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애를 썼다. 이러한 실제에 대해서 바울은 고후8:20-21에서 말한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돈은 아주 예민한 것이어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아주 조심해서 다루라고 가르친다.
# 결론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어떠한 법적인 강제아래 있지 않음을 볼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헌금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이러한 원리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분량에 따라서 자비로움과 자발적으로 헌금하도록 격려를 받는다.
우리의 헌금은 교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다. 말씀을 봉사하는 자들이 세속적인 것의 궁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야한다.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을 돕도록 요청한다. 헌금과 친절한 다른 행위들을 통해서 이를 성취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헌금은 예배의 행위이다. 우리는 지불할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헌금을 한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이 글은 '성경을 보는 눈'의 손정원 목사가 캐나다의 개혁파 침례교에 관련된 홈페이지에서 읽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주소는 http://www.netrover.com/~dontheo/give.htm입니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내용에 있어서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은 daum 기독교 까페인 '성경을 보는 눈'에서 퍼온 글임을 밝혀 둡니다.
*작성일: 2002/02/17
*작성자: 소리나라